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72)
* * *
병진년(丙辰年)도 경칩에 이르렀으나, 요동은 여전히 추웠다.
똑같이 북방이라곤 하나, 함주와 그 주변은 상대적으로 따스한 해안가에 위치한 덕에 요동의 추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 심양왕이 심양전을 요성으로 옮기면서 따라온 관리들은 추위에 크게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자들이 특히나 고생했는데, 사실 사서 하는 고생이었다.
다른 이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요동 토박이들이 입는 가죽옷과 털옷을 겹쳐 입었는데, 유자들은 몸가짐이 흐트러진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함주에서 가죽옷을 입는 이들은 대부분 군병들이었으니, 그들과 같은 꼴이 될 수는 없다는 고집이었다.
겉으로는 추우면 추위를 느끼고, 더우면 더위를 느끼는 것이 이치를 따르는 것이라 둘러 대었지만, 결국은 체면이 깎인다 여긴 탓이었다.
물론, 유자들 중에서도 가죽옷 입기를 마냥 거부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어쩐 일로 날 찾아오신 겐가.”
요성 내 구성에 위치한 좌찬성의 집무실에서 정도전이 근자에 심양왕하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하를 맞이하였다.
그 신하는 노숙진이었으니, 본디 요동공의 신하로서 요동이 떨어진 후 지지부진한 기존의 관료들과 달리, 호부승지로 승급되는 특전을 누린 자였다.
노숙진은 좌찬성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잠시 그를 바라보았으니, 그의 시선은 정도전의 차림새를 훑었다.
관복을 입은 좌찬성의 옷깃 아래로 누런 터럭이 보였으니, 관복 아래로 털옷을 입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숙진에게 있어, 그것은 작은 희망이었다.
좌찬성 정도전은 다른 이들, 즉 심양왕 아래 고위직을 석권한 유자 출신 관리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
그는 좌찬성을 찾아오기 전에 그의 직속상관인 호승지 권근을 찾아갔었다.
그에게 요동의 발전을 위한 몇 가지 건의를 올리기 위함이었는데, 호승지는 노숙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단칼에 거절하였다.
노숙진의 건의에 담긴 내용에 동의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노숙진을 견제하는 마음이 커서, 제대로 귀담아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호승지의 축객령 앞에 별수 없이 물러난 노숙진은 그가 갈 수 있는 두 곳 중 어느 쪽으로 갈지를 고민했었다.
한 곳은 심양왕 이성계이었고, 다른 한 곳은 좌찬성 정도전이었다.
마음이 편한 곳은 아무래도 심양왕 쪽이었다.
왕좌에 앉은 자를 편히 대할 수 있다는 게 우스울 수는 있지만, 적어도 노숙진에게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유자들에게는 세 번째 주인을 모시는 자라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으니, 갑작스레 심양왕의 총애를 얻은 그에 대한 견제가 극심했던 탓이다.
그러니 딱히 생각을 나누고, 말을 붙일 이를 찾지 못하던 노숙진에게는 심양왕 앞에 부복하고 있는 게 오히려 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노숙진의 선택은 좌찬성 정도전이었다.
아무리 심양왕에게 말을 올리기 편하다고 하더라도, 또 심양왕만 설득한다면 그의 건의가 곧 실행될 것이라 하더라도, 왕의 총애에만 만족하면 자신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다른 수많은 대소 신료들의 견제가 심해진다면 언젠가는 내쳐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여, 노숙진은 어떤 일을 추진하든 다른 관원들과 함께 논의하여 추진하려 노력했다.
가깝게는 자신을 배타하는 분위기를 일소하고자 함이고, 멀게는 자신의 편을 만들고, 나아가 동지를 구하고자 하였다.
하나, 호부승지로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그였기에 그보다 아랫니거나, 비슷한 지위의 관원들과는 부족하나마 여러 오해를 풀 수 있게 되었지만, 그보다 높거나 유자 출신으로 함주로부터 온 심양왕의 측근들과는 좀처럼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호부승지. 오셨으면 용건을 말씀하셔야 할 것 아니오?”
“이런, 송구합니다.”
노숙진은 속내의 고민을 떠올리다가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음을 깨닫곤 사과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요동의 경영을 위해 노숙진이 고심한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대맥(밀)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이곳의 호인들이 대맥으로 밥을 대신하고 있는 걸 본 적은 있으나, 그건 대신할 뿐, 제대로 된 양식이라 할 수 없지 않소?”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노숙진이 숱하게 들었던 물음이 다시 들려왔다.
“제대로 된 양식이라는 것이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먹어 배를 채우고, 힘껏 일할 수 있게 하는 곡물이라면 모두가 양식이고, 양곡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소만…… 하나, 대맥을 먹는 백성들도 쌀이 없어 그걸 먹는 것이지, 쌀이 있다면 쌀을 양식으로 삼을 것 아니겠소. 호승지가 요동의 농사를 쌀로 일원화하려는 것 또한 생산량을 늘려 백성들이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하려는 것 때문이고.”
심양왕이 요성을 점령한 이후 다시 질서를 바로잡자, 호승지 권근은 심양왕에게 고하여 요동의 농사 행태를 바꿔야 한다 주장하였다.
요동에서 벼농사는 남부 고려촌 중심으로 일부 시행되고 있을 뿐이며, 그조차도 작황이 그리 좋지 않았으니, 쌀의 생산이 곧 경제의 근본인 상황에서 호승지인 권근은 벼농사를 전면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여겼던 것이다.
심양왕 주변의 유자 출신 관원들이 이를 적극 지지하였는데, 벼농사 중심의 농촌 자급적 이상 사회를 목표로 나라를 경영하려는 그들의 입맛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급자족적 농촌 사회가 꼭 벼농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유학의 교리에 나와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이 고려였으니, 자연히 따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유자 출신의 측근들이 일제히 동의하니, 심양왕 또한 그 건의를 받아들여 요하 이동의 농사를 벼농사로 바꾸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호승지 권근이 심양왕의 이름으로 명을 내려 요동에 속한 모든 농가에서 벼농사를 시행하라 하였고, 볍씨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함주에서 볍씨를 가져오기 위하여 군병이 동원된 중이었다.
하나, 호부승지 노숙진의 눈에는 그런 소동 모두가 무의미한 짓이었다.
“좌찬성 영감, 이곳 요동은 고려와 다름은 물론, 함주와도 같지 않습니다. 벼농사가 가능한 곳은 남부 일부 뿐이고, 그곳에선 이미 고려인들이 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사실 농사를 잘 아는 것은 이곳 농부들이 아니겠습니까.”
“농부들이 농사를 잘 안다고는 하나, 그들은 대대로 전해지는 것을 따를 뿐, 더 나은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안다 하더라도 시도하지 못하는 자들이오. 이참에 우리가 볍씨를 내주어 벼농사를 짓게 한다면 요동의 백성들에게도 이로운 것 아니겠소?”
“영감, 요동의 대지와 기후에는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있긴 하나 길지 않고, 강우가 비교적 일정하긴 하나 그 양이 적습니다. 땅도 건조하여 넓은 평야 위에도 작은 초목만이 자랄 뿐이지요. 요동의 땅 대부분이 그러하니, 치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농가로 하여금 벼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은 자칫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노숙진이 다시 고하니, 정도전도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사실 호승지 권근이 처음 벼농사의 확대를 고하였을 때, 요동의 환경이 고려와 달라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반론이 작게나마 있긴 했었다.
하나, 권근이 넓은 평야가 있으니, 요하에서 물을 끌어 논을 만드는 것에 문제가 없다 주장하면서 그 반론을 묵살하였다.
“치수가 그리 간단한 문제겠습니까? 요하 이동부터 요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야라고는 하나, 완전히 평평한 곳은 아니니, 조금 높은 지형만 있어도 물길을 내기가 거의 힘들 것입니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많은 시간을 두고 진행해야 할 일이니, 당장의 농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 대맥은 다르다는 것인가.”
“대맥은 벼와 달리, 밭농사에 가까워 서늘하거나, 건조해도 지장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의 호인들이 대맥을 키워 왔으니, 농사를 크게 확대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노숙진을 응시했다.
사실 권근이 벼농사의 확대를 고한 것에는 어느 정도 노숙진이 원인인 부분도 있었다.
그가 급작스레 심양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하였고, 권근의 바로 아래에 임하니, 안 그래도 심양왕보다 스승 이색에 가까워 심양왕과의 관계가 서먹했던 권근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에 뭐라도 공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벼농사의 확대를 고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정도전 또한 지레짐작하는 것이었다.
좌찬성 정도전이 잠시 말없이 있자, 노숙진이 다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게다가 대맥을 널리 농사짓게 한다면, 또 다른 이점도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점? 그것이 무엇인가.”
“이곳의 호인들은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키우는 가축은 크게 말과 양, 그리고 염소입니다.”
“그야 잘 알고 있소.”
“소인이 보기에 그중 양의 목축을 크게 늘리는 것이 요동의 살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도전은 노숙진의 말에 선뜻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보기에 호인들이 목축을 병행하는 것은 부족한 식량을 가축의 젖과 고기로 보충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호인들이 키우는 양은 털이 풍성하여 그 털로 직물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직물은 따뜻함은 물론 촘촘하여 물기에 젖어도 쉽게 스며들지 않으니, 추위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 환영받을 만한 옷감입니다.”
양모직물을 언급한 노숙진의 말은 당연히 그 직물을 널리 매매하여 이문을 얻자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쯤에서 정도전의 이맛살은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고려에서 어려운 백성들의 살림을 두고 한탄하며 백성들이 어려움을 탈피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자로서 농촌 이상향을 꿈꾸지 않은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목축이란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일이니, 농촌 사회를 이루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일이었다.
정도전은 찌푸린 표정으로 노숙진의 건의를 물리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표정을 살핀 노숙진이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무엇을 우려하시는 것인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앞서 제가 대맥을 널리 키우자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대맥과 목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목동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가축들에게 먹일 풀을 찾기 위함입니다. 특히 양은 초목의 뿌리까지 파먹는 습성이 있어, 한 곳에 두면 대지가 황폐해져 양이 다시 먹을 풀을 찾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 만약 한 곳에 머물러도 계속 먹일 목초를 구할 수 있다면, 굳이 목동이 가축들을 몰아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노숙진의 말에 정도전은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 물었다.
“하면, 대맥을 가축에게 먹이자는 것이오? 사람이 먹을 것을 어찌…….”
“사람이 먹는 것은 알곡일 뿐, 줄기와 잎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이미 호인들 사이에서는 수확이 끝난 후 대맥의 짚을 목초와 함께 말린 건초를 두고 겨울철에 가축에게 먹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대맥의 생산량을 늘릴 수만 있다면, 비단 겨울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가축들을 한 곳에서 키울 수 있고, 나아가 더 많은 가축들을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노숙진의 건의에 담긴 대강을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그리 달갑지 않은 기색이 담겨 있었다.
요동에서 잘 자란다는 대맥을 크게 키워, 그 말린 짚으로 양을 비롯한 가축을 키우고, 가축의 부산물을 팔아 이문을 얻는다는 것.
분명 말이 되는 건의이긴 했다.
하나, 그렇기에 정도전의 맘에 거슬리는 것이기도 했다.
노숙진의 건의에 담긴 핵심은 결국 가축에 있고, 그 부산물을 팔아 이문을 챙기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 자체가 장사치의 역할을 하게 하는 일이니, 단기적으로는 나라 살림이 풍성해질 수는 있겠으나, 점점 이문만을 추구하는 소인배들이 늘어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우려했던 것이다.
유자의 입장에서 이는 당장 목이 마른다고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과 같은 행태였다.
정도전의 표정을 살피던 노숙진은 속으로 한탄하였다. 그나마 열린 자라고 믿었던 정도전조차도 뻔히 눈앞에 이익을 두고도 유학의 잣대를 내밀어 쥘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요동은 요동의 것이 아니게 되고, 심양왕은 점점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할 수도 있으니, 그 또한 이인임, 최영에 이은 세 번째 주인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노숙진은 마지막 패마저 꺼내 들기로 하였다. 심양왕과 그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었으며,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는 엄명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낄 때가 아니었다.
그나마 정도전은 심양왕의 최측근이니, 다른 이라면 모를까 그에게는 밝혀도 될 것이라 자위하면서 노숙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주공이 요동에서 조만간 채광을 시작할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야 알고 있소. 한데 어찌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오?”
노숙진은 좌찬성에게 채광권이 가진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이 단지 철과 동을 가져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설파하였다.
정도전이 쉽게 수긍하지 않은 터라, 한참이나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백성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이 요동 경영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그리된다면 요동의 흥망이 제주공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애써 이해시켰다.
“다행히 제주공이 직접 요동 백성들에게 임금을 주는 것은 막아, 백성들이 제주공을 왕처럼 여기는 것은 피했으나, 제주공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면, 제주군공이 요동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다는 겐가?”
좌찬성이 노한 목소리로 물으니, 노숙진은 일단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그것까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제주공이 요동에서 채광을 하는 이상 함께 이문을 나누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동의 경영이 제주공이 요동에 뿌리는 임금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면, 어찌 심양왕 저하께서 제주공 앞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겠습니까?”
“크음…….”
정도전이 이맛살을 와락 찌푸린 채 침음을 내었으니, 이는 노숙진의 말에 동의하지 않음 대신, 제주공에 대한 의심과 위기감을 표한 것이었다.
“하면, 가축을 키운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이를 갈던 좌찬성이 문득 물으니, 노숙진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면에서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산을 요동이 가짐으로써 제주공과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첫 째이고, 둘째는 이 나라 재정의 규모를 보다 키우고, 재정의 근본 중에 제주공이 요동에 뿌리는 임금의 비중을 줄임으로써 제주공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숙진이 확신에 차 설명하니, 정도전 또한 그 세밀한 흐름까지는 모를지라도, 적어도 제주공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였다.
다만, 그것이 결국 장사치의 길을 걸어야 함을 의미하는 터라, 여전히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정도전은 노숙진을 보며 물었다.
“저하께서 자네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어찌 이런 일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겐가.”
“그저 궁리하였을 뿐입니다.”
“궁리하였다라…… 어디 궁리만으로 세상의 흐름을 알 수 있겠는가?”
“또 의심하였을 뿐입니다. 아무리 심양왕 저하와 제주공의 친분이 깊다 하더라도, 많은 물자를 소모하는 전쟁가지 감수하면서 고작 땅을 파헤치는 권리만을 요구하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또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 궁리했던 것입니다.”
“허어, 대단하군. 저하께서 자네를 아끼시는 이유를 알겠어.”
정도전이 감탄하니, 노숙진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저 살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심양왕 저하께서 흥하셔야 저 또한 흥하지 않겠습니까.”
* * *
10척의 경함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포구를 떠나는 걸 지켜보던 몽주는 문득 자신의 양 어깨 위에 새로이 옷이 덮이는 걸 느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요.”
앵도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녀가 몽주의 곁에 섰다.
두 부부는 그들의 시야 속에 담긴 제주 위의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사이로 움직이는 10척의 범선을 함께 바라보았다.
“멋지지 않소?”
“멋지네요.”
“두 달 안에 다시 열두 척의 배가 건조될 것이오. 그리고 그만큼 제주의 힘은 강대해질 것이고.”
잠시 건조 행렬이 멈췄던 선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동안은 경함선들을 운영하면서 보고된 미비한 점을 정리하고, 설계를 변경하느라 잠시 정지되었던 것이었다.
“필요하기에 짓는 것인가요?”
“물론이오. 필요도 없는 걸 지을 필요가 있겠소?”
“그렇다면 걱정이군요.”
앵도의 대답에 몽주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바다 쪽으로 던지며 몽주로부터 전해지는 무언의 질문에 대답했다.
“더 강대한 힘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더 큰 위험을 예감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녀의 대답에 몽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대비를 한다는 것이니 안전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도 되지 않겠소.”
“꼭 명국으로 진출해야 하나요?”
뜬금없는 질문일수도 있었지만, 몽주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금의 제주 상황에서 더 큰 위험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은 명국뿐이고, 몽주는 그런 명국으로 진출을 꾀하는 것은 물론, 몸소 명국으로 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제주의 산업은 나날이 승천 중이고, 그 산업들이 만들어 내는 물산은 반드시 팔려야 하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는다면 제주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것이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미 고려와 왜국에 마음껏 물산을 보내고 있으니, 그 두 나라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 작은 제주가 생산하는 물산이 팔리지 않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얼핏 맞는 말이긴 했다. 실제로 명국으로의 진출을 계획하기 시작할 때, 교리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어 몽주에게 반론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들도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제주에 비하면, 고려와 왜국은 큰 나라가 맞소. 하나, 제주의 물산에 비하면 고려와 왜국은 큰 시장이 아니오.”
“……?”
“고려와 왜국의 백성들 중에서 제주의 물산을 소비할 수 있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 같소? 열에 하나? 스물에 하나? 아니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백에 하나도 많다 할 것이오.”
이미 고려에서 살면서 목격했듯 일반 백성들의 구매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비노와 선로를 팔 때부터 부유층을 목표로 한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는 왜국도 마찬가지. 아니, 고려보다 더 심했다.
빈부격차라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지배층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세상이 당대의 세상인 것이다.
“정말 그런가요?”
“제주의 물산이 좀 비싸지 않소.”
“하면, 값을 내리면 되지 않겠어요?”
“얼마나 내리면 양민들이 사탕을 사 먹을 수 있겠소?”
“…….”
몽주가 되물으니, 앵도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쉽게 답을 내지 못하였다.
답은 사실 뻔했다. 공짜이거나 그에 다름없을 정도로 헐값이어야 평범한 백성들도 사탕을 구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빈부격차라는 말보다도 무색하여 아예 존재하지 않는 말이 있으니, 그게 중산층이라는 말이었다.
고가품의 가격을 낮춤으로써 가격의 하락폭 이상으로 구매량이 증가하여 궁극적으로 더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중산층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을 때다.
하나, 모두 가진 자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로 양분된 사회에서 가격 변화로 판매량의 증가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가격을 올려 소비하는 자로 하여금 우월감을 가지게 만드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몽주에게 있어, 그리고 제주의 산업에게 있어 매출과 이익의 규모는 차후의 문제였다.
이문이 줄어든다고 해도 판매량을 늘릴 수 있어 제주의 산업이 증가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가격을 내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 그것도 손해가 없는 한계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당대의 사회처럼 가격으로 판매량 증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큰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알기 어렵겠지만, 이곳 제주는 제주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소.”
“제주가 특별한 곳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아니, 누구나 아는 특별함 이상으로 특별하다는 말이오.”
전근대의 구조로 가득한 세상 속에 제주만이 홀로 근대의 구조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니, 이는 산업 구조뿐만 아니라, 그에 파생된 사회 및 생활 구조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제주의 모든 것이 제주군공의 것이라고는 하나, 일반 양민들, 심지어 아직 노비의 신분인 자들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그들 하나하나가 소비의 주체였으며, 훗날 중산층과 시민의 효시가 될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라도 제주는 성장을 멈출 수 없었다.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이제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과 시민의 조상님들을 다시 주저앉히는 결과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명국으로의 진출은 필수였다.
아직 제주 물산에 대한 고려와 왜국의 구매력은 남아 있겠지만, 초창기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없던 것을 구할 때의 구매력과 있는 것을 다시 구할 때의 구매력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제주 산업의 확장은 오히려 더 기세가 강해졌으니, 공장제 수공업 형태의 공소가 많이 지어질수록, 그 공소에 쓰이는 수차와 풍차 및 각종 생산 설비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공소에서 일하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들의 솜씨가 발전할수록 그 기세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여기에 다시 또 다른 기술을 도입하고, 새로운 물산을 개발함으로써 추가되는 생산력을 위해서라도 더 큰 시장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하아, 나라를 경영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군요.”
“그런가 보오. 허허.”
사실 더 쉬울 수도 있으나, 달리 목표가 있는 삶이기에 어려운 길을 먼저 앞서고 있는 몽주는 멋쩍은 마음에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의 턱밑에 까끌한 수염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이제 갓 스물넷에 이른 몽주의 얼굴에서도 마냥 어린 티가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한데, 왜국의 무왕과 관령이 서방님의 뜻대로 따라 줄까요?”
“쉽지는 않겠지. 아무리 내가 서규슈에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외국인인 내게 왜국과 명국의 관계를 맡기고 싶진 않을 것이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시오. 뜻이 있으면 길이 있지 않겠소.”
몽주는 어느새 동쪽으로 제법 멀어진 선단을 쳐다보며 앵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좀 숙일까요?”
“아니, 뭐, 괜찮소.”
자신보다 큰 여인의 어깨를 감싸느라 ‘폼’이 좀 안 나긴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