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76)
* * *
“딱히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지요?”
“그러합니다.”
위국공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자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는 모르겠으나, 연왕은 분명 왕부로 나갈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 천자께옵서도 아시지 않겠습니까. 태자 전하께서 그것을 바라고 계시는 것을요.”
“적어도 공과 제가 이렇게 만났다는 걸 아신다면 분명 짐작하시겠지요.”
태자전에서 태자와 마주하고 있는 위국공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태자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 그와 태자가 만나고 있음을 천자가 알게 된다면, 그가 천자에게 청하였던 요동 공략의 방책이 비단 구원의 세력에 대항한 방책만이 아니라, 동시에 태자가 연왕을 연국으로 보내려는 방책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앞서 천자 앞에서 원나라 잔당들의 공세를 꺾기 위해 요동을 먼저 쳐야 함을 고한 것은 분명 이치에 합당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방책을 실현하기 위해 요동과 닿아 있는 연국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으니, 지금 응천부에 남아 있는 연왕을 왕부로 보내고, 그로 하여금 요동 공략의 기둥으로 삼아야 한다고 재청하였다.
이 또한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으니, 이 자체만을 두고 보면, 연왕을 응천부에서 축출하려 한다고 추측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나, 그 후에 위국공이 태자와 만났다는 사실이 하나 추가되면 새로운 추정이 가능해진다.
태자가 위국공 서달을 통해 연왕을 연국으로 축출하고자 유도하였다고.
사실 연왕을 연국의 왕부로 보낸다는 것 자체는 반드시 ‘축출’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일은 아니다.
명나라 권력의 핵심지인 응천부에서 떠나게 한다는 점에서는 연왕에게 불리할 수도 있으나, 어차피 연왕이 연왕인 이상 그의 기반은 연국이니, 연국에서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곁방살이나 다를 바 없는 응천부의 삶보단 더 나아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이미 자신들의 왕부에 가 있는 차남 진민왕 주상과 삼남 진공왕 주강 모두 각자의 왕부에서 호의호식하는 중이었다.
하나 태자가 연왕을 연국으로 보내려 한다는 추정이 붙는다면, 그 순간 연왕의 연국행은 축출의 의미가 강해지니, 일종의 권력 다툼 내지, 후계 간의 알력으로 비춰지기 때문이었다.
아니, 해석 따위는 필요 없었다.
위국공 서달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 애초에 요동 공략의 방책 또한 태자로부터 전해들어 천자께 고한 것이었다.
후계인 태자가 공신으로 하여금 다른 황자를 왕부로 내보내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축출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공께서 큰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내 절대 공의 애쓰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소소한 일에 마음을 쓰십니까. 대명의 근본이신 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는 일에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음에 소신이 오히려 감읍할 따름입니다.”
위국공 서달은 이미 몸에 배인 겸손함을 보였으나, 그 또한 애초에 노리는 것이 있었기에 태자에게 협조한 것이었다.
지난날, 그가 대군을 진두지휘하여 구원의 중심으로 쳐들어갔다가 크게 당하여 대명의 군력에 치명타를 입힌 이후, 그는 늘 불안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천자께서 공신들을 숙청하여 후대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건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었으니, 서달은 자신을 숙청시키지 못할 만큼 큰 공을 세우는 것만이 살길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크게 패하여 명국에 큰 부담을 지웠으므로, 언제라도 천자가 자신을 버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태연하고, 천자 앞에서는 겸손, 공손하면서도 속으로는 좌불안석이었는데, 그 와중에 태자가 먼저 손을 뻗었으니, 캄캄한 밤중에 한 줄기 빛을 본 기분이었다.
이는 단지 명나라의 근본이자 차후 황좌의 주인인 태자의 신임을 얻을 기회라는 점에서, 그의 권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만이 아니라, 천자의 숙청을 만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태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하온데, 연왕이 연국으로 나아가 따로 힘을 축적하려 한다면 어쩌실 것입니까?”
위국공이 문득 조심스레 물으니, 그 순간 태자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
태자의 대답은 오히려 그러길 바란다는 의미로 위국공에게 들렸으니, 만약 연왕이 연국에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연왕을 아예 제거할 생각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위국공은 애써 웃음 지으며 마른침을 삼켰으니, 속내로는 태자도 그저 사람 좋기만 하던 예전의 태자와는 크게 달라졌다 여겼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위국공은 더는 이번 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겨 다른 주제를 꺼냈다.
“요사이 태자 전하께서 사냥을 종종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라도 소신에게도 태자 전하와 함께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아, 바라는 바입니다. 다만, 내일부터는 며칠간 남직례에 신경을 쓸 참이라, 그 후에 함께하도록 하지요.”
“연락만 주시옵소서.”
* * *
중국 삼국시대에 본디 장강 하류 양주(揚洲)가 있었으니, 응천부 또한 양주에 속했다.
시대가 변하여 지역의 이름도 바꾸니, 남직례의 남부가 양주의 북부를 포함하게 되었고, 양주라는 이름은 남직례에 속한 고대 양주의 중심지를 뜻하는 고을 이름이 되었다.
고우호(高邮湖)와 소백호(邵伯湖)를 따라 남쪽으로 흐른 강이 장강과 만나는 곳에 위치한 양주는 당나라 시절에는 국제항으로서 이름이 높았고, 명대에도 소금의 집적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훗날 호상(豪商 : 대형 상인)이 번영하여 경제와 문화가 꽃피게 한다.
제법 규모가 큰 양주의 시장, 그 시끌벅적한 한 곳에 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만, 겉보기에는 젊은 상인의 모습이었고, 호위하는 태감 둘만이 양민의 차림으로 그를 지킬 뿐이니, 누구도 태자를 태자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만약 태자가 변복하였음을 알아본다면, 태자가 남몰래 시정을 시찰하기 위함이라 여길 법한 모습이기도 했다.
태자는 시장을 둘러보는 양 하다가 문득 월병(月餠)을 파는 작은 상점에 들어갔다.
“이백이 흥취했던 달과 같은 월병을 주게.”
상점의 주인에게 그리 말하니, 주인이 흠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하곤 상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쪽에서 도로 나온 그가 손바닥만 한 큰 월병을 종이 싸 내주니, 태자는 태감에게 턱짓하여 값을 치르게 하였다.
그러곤 다시 상가로 나아가 거리를 쏘다니며 월병을 오물오물 조금씩 뜯어먹으니, 얼핏 보면 그 모습이 참으로 태평한 한량과 같았다.
다만,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다른 골목으로 대로로 나올 때는 손에 들고 있던 월병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는데, 굳이 월병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할 변화였다.
천자의 총관태감이 찾아와 왕부로 가는 것을 물었습니다. 이에 억울한 표정을 보이니, 그가 위로하면서 그저 몇 년 앞서 가는 거라 하였습니다.
태자의 소매 안에 구겨진 채 들어 있는 작은 종이에 적힌 글이 그러했으니, 본디 월병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연왕이 전한 것으로, 쪽지의 내용으로 보건대, 천자께서 이미 연왕을 왕부로 보낼 마음을 품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서달의 요동 공략의 방책을 두고, 태자가 연왕을 쫓아내기 위한 술수가 숨은 것임을 천자께서 아셨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태자의 의도를 천자가 허락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태자는 거리를 거닐며 여기저기 구경하는 척하면서도 얼굴에는 은근히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아우와의 대화마저도 이처럼 조심해야 하는 것, 아우와 손을 잡아 놓고도 일부러 경원하는 척하는 것, 나라의 미래를 위함에도 이처럼 비밀스럽게 필담해야 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이 씁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던 태자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강가에 위치한 작은 포구 근처였다.
우연인 듯 태자가 선 곳 몇 걸음 곁에 한 노인이 그물을 다듬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태자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시오, 노인장. 그 그물로 몇 마리나 낚을 수 있겠소?”
그에 그물 손질을 하던 노인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다시 그물을 만지작거리며 답하였다.
“적으면 만 마리일 것이고, 많으면 한 마리일 것이오.”
그 대답에 태자는 실소를 머금었다.
만 마리(萬只)는 만 척(萬隻)과 같으니 즉, 적어도 배 1만 척만큼의 이문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많으면 한 마리라 하였으니, 얼핏 모순되는 말이나, 그 한 마리가 지고지순한 한 자리를 뜻한다면 곧 천하를 얻을 것이라는 의미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말은 노인이 한 말이 아니라, 연왕이 전한 말이기에 그리 해석될 수 있었다.
태자는 그 말을 곱씹으며 미소를 짓다가 노인에게 말을 전했다.
“출항은 작은 풍랑이 지난 후에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리 말을 남긴 태자가 노인의 곁을 스쳐 다시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 와중에 노인의 품 안으로 돌돌 말린 쪽지가 하나 떨어졌다.
물론, 그 노인은 그물을 다듬는 척하며 그 쪽지를 품에 넣었다.
태자가 떠난 그 자리는 한참이나 평소의 포구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태감을 시켜 네 태감과 소란을 피울 것이다. 그에 너는 발끈한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되, 그 시일은 제주에서 사람이 온 이후이다.
노인의 품에 있다가 늦은 밤에야 연왕에게 전해진 태자의 쪽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 * *
“한 잔 쭈욱 들이켜십시오.”
“좀 텁텁하던데…….”
“하하, 다른 이는 없어서 못 마시는 겁니다. 때마침 곡우(穀雨 : 4월 20일경)에 이르렀으니, 곡우 물을 마셔야지요.”
한 손에 병을 든 탁기가 다른 손으로 내미는 찻잔에는 얼핏 홍차와 비슷한 때깔의 액체가 담겨 있었으니, 제주에 있는 자작나무들 중 수백 년을 살았다는 고목에서 채취한 수액이었다.
“오늘 고려 전역에 비가 오길 기원하세.”
몽주는 그리 말하며 찻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한 번 들어 올리고는 곡우 물을 ‘원 샷’하였다. 달달한 첫맛에 이어 텁텁한 느낌이 입안에 감돌았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하였으니, 비록 제주에서 농사는 이미 중요한 산업은 아니었으나, 제주의 산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라도, 고려를 비롯한 모든 교역지에 풍년이 들길 바란 것이었다.
“그나저나 어찌 이리 늦는지 모르겠군.”
“명국 관리들이 제주의 관리들처럼 기민하길 바라기는 어렵지요.”
이미 장강 하구의 큰 고을인 통주(通州 : 현 난퉁시)의 포구에 닿아 왜국 사신들이 왔음을 알린 지 한 시진은 족히 되었건만, 포구를 관리하는 하급 관원이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이후에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속으로 ‘만만디(慢慢的)’라고 욕을 해 보았지만, 사실 이 시기 대부분의 세상은 만만디였다.
정확히 말하면 농경 사회의 생활 양태가 기본적으로 만만디였으니, 처음 제주에서 몽주가 산업을 시작할 때만하더라도 제주 백성들 역시 만만디였고, 지금도 그리 재빠르진 않았다.
다만, 몽주와 함께 의기투합한 이들을 중심으로 그 수하들은 자연히 몽주를 통해 ‘현대식 부지런함’ 내지, ‘대도시적 조급함’을 닮아 가게 되었고, 불과 몇 년 만에 ‘빨리빨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그러니 같은 관리라고 하더라도, 제주와 명국의 관리 사이에서는 일을 처리하는 태도에서부터 크게 다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당장에 군병들이 몰려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음, 그도 그렇군.”
이미 입항 후에 왜국 사신단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몽주 또한 왜국 외사령(外師令)의 자격으로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러니 만약 태자나 연왕이 몽주를 벌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면, 벌써 군병들이 들이닥쳤어야 마땅했다. 아무리 만만디라고 해도, 태자나 황자의 명을 수행하는 것까지 게으름을 피우진 않을 테니까.
지금의 만만디는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을 확인시켜 주는 셈이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참 부지런하군.”
몽주가 가리킨 곳에는 어느 왜국 사신이 갑판 난간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저자는 매번 볼 때마다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데, 대체 뭘 하는 걸까요?”
“차 교리가 말로는 배 안을 여기저기 기웃거리곤 한다는데, 우리 배에서 뭔가 적어 둘 만한 게 보인 모양이지.”
“그럼,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는 거야 말릴 수 있나. 캐묻는다면 모를까.”
기술 유출을 묵인하거나 유출 방지를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열심히 보고 적으며 뭐라도 배우려고 하는 거라면 오히려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리 역사의 변화를 위해 주변국과의 경쟁 내지 갈등이 필수적이라고 해도, 아시아가 함께 발전해 나가길 바라는, 그래서 역사에서 근대에 이를수록 뒤처졌던 동양 세계의 역사도 바뀌길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심리에 기인한 마음이기도 했고, 단지 제주나 고려만 홀로 발전하는 건, 불가능하거나 괜한 지출 및 과도한 투자를 촉발한다는 계산에 비롯한 마음이기도 했다.
“저 친구 이름이 도가시 요시시게였던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기억해 둬야 할 이름인 듯하군.”
몽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어디선가 봤었다는 느낌을 다시 가졌다.
“아, 저기 관원들이 오고 있습니다.”
요시시게를 보며 다시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몽주는 탁기의 말에 고개를 돌려 포구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교자(轎子 : 가마)를 탄 관원을 위시한 일단의 무리들이 포구의 나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군병도 몇몇이 따르고 있었지만, 관원들의 호위 정도에 불과할 뿐 다른 목적은 없는 듯하였다.
안도한 몽주는 왜국 사신들에게 알려, 함께 하선하였고, 나루에서 명국 관원을 맞이하였다.
자신을 통주의 동지(同知 : 종 6품)라 밝힌, 교자를 타고 온 배불뚝이 관원은 왜국 사신 명부를 보며 한 사람씩 확인하였는데, 몽주에 이르자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무어라 말하였다.
“여기에 적힌 것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으셨소.”
통역을 통해 전해진 말에 몽주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였다.
왜국 사신 명부를 제출할 때, 왜국 무왕의 외사령이라는 신분을 가장 먼저 적긴 했으나, 고려 제주군공은 물론, 대마도와 일기도의 도주나 왜국 서구주의 주인이라는 신분까지도 모조리 적었으니, 그런 물음이 나올 법도 하였다.
몽주의 대답을 들은 통주 동지는 그의 뒤에 있는 휘하 관리들에게 무어라 명하곤 다시 몽주를 향해 말하였다.
“왜국 외사령이 아닌 제주군공에게 전하겠소. 명의 태자께옵서 이미 남직예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제주군공이 닿으면 따로 거처를 마련한 후 그곳에 거하게 하라 하셨으니, 제주군공은 그에 따르셔야 할 것이오.”
“따르는 건 어렵지 않으나, 나는 왜국 사신들을 이끄는 신분이기도 하오. 함께 가게 해 주시오. 아니라면 나는 왜국 사신들의 거처로 갈 것이오.”
몽주의 말이 전해지자, 통주 동지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잠시 그가 강요하면 어찌할지를 고심하였는데, 정작 그가 통역에게 전하는 중에 들린 어투는 그리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태자께옵서 예를 갖춰 대하라 하셨으니, 제주군공의 청을 허락하겠소.”
“현명한 결정이시오.”
이후, 통주 동지가 다시 가마를 타고 앞서니, 몽주와 왜국 사신들, 그리고 몇몇의 군공군 선원들은 명의 군병들이 가져다 준 말을 타고 뒤를 따랐다.
“근데, 동지면 종육품이지 않나. 나는 종이품이고. 쳇, 평대를 받으니 짜증나네.”
“제가 항의해 보겠습니다.”
“됐다. 그냥 통역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말지.”
투덜대며 명의 관리를 따르던 몽주의 앞에 제법 큰 장원이 모습을 드러낸 건 일다경쯤 지난 후였다.
* * *
사실 태자의 마음만은 통주까지 급히 달려왔다.
그제 저녁에 왜국 사신들이 닿았다는 소식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뒤이어 왜국 사신들 중에 제주군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듣고는 단숨에 통주로 오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기에 하루를 넘겨 남직례를 시찰하는 양 하며 다른 곳을 돌아 도착한 것이었다.
통주의 남씨세가 장원.
통주의 남씨는 태자의 아내, 즉 태자비의 외가이자, 이미 죽은 개국공신 개평왕 상우춘의 처가였다. 달리 말해서, 태자의 아내는 상우춘의 딸이었다.
그런 인척지간인 덕에 태자는 남씨세가를 통해 제주현백, 아니 제주군공을 듣는 이 없이 따로 만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역시 평범한 자는 아니었어. 그저 작은 섬이나 다스리고 있는 줄 알았더니, 왜국에까지 발을 디뎠다니.”
제주공과 만나기 전에 먼저 손님방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중에 그렇게 중얼거리니, 곁에서 시중을 관장하고 있던 남씨세가의 가주이자 태자의 처외삼촌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소국들 간에야 하루아침에도 영토가 바뀌곤 하지 않겠습니까.”
“소국이라고 영토를 쉬이 내주겠소? 아니, 소국이니 오히려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애를 더 쓰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그자를 높이 여기진 마십시오. 제가 이틀간 봐 온 그자는 비범하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태자가 이미 제주군공과 만난 인연이 있음을 알지 못한 탓인지, 남씨 가주는 그가 느낀 그대로 말하였다.
하나, 이미 태자는 오래전부터 제주군공으로부터 비범함을 느끼고 있었으니, 오히려 혀를 차게 만들 뿐이었다.
“처외숙부야말로 겉으로만 본 것 아니오.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소?”
“그건 아닙니다만.”
“하면,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오.”
“그래도 대명의 근본이신 분께서 이처럼 한달음에 달려오신 것을 알면, 그자가 태자전하를 우습게 여기고 대명을 내려 볼까 저어됩니다.”
남씨 가주이자 태자의 처외삼촌이 제주군공을 절하하는 근간은 그 때문이었다.
태자는 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나름 시간을 보낸 후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이 보이게는 충분히 다급하게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태자도 동의하면서도 속내로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명국의 대계를 세우기 위한 발걸음이건만, 앞서 연왕과의 모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대명천지에 드러내지 못하니, 마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기야 당금의 천자와 권신들에게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태자는 내심 들끓는 답답함과 불만을 애써 잠재우곤 잠시 홀로 쉬겠노라 하였다.
“하면, 그자를 언제 불러올려야겠습니까?”
“한 시진 후에 불러오시오. 그때면, 내가 다급히 달려온 기색도 사라졌겠지.”
“알겠습니다.”
하나, 태자가 제주군공과 만난 것은 두어 시진이 더 지나 해가 진 이후였다.
그사이에 작은 소란이 있었던 탓이니, 왜국 사신단 중 한 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태자를 뵙겠노라 청하였던 것이다.
예에 어긋나는 청이고, 무작정 떼를 쓰는 행태이긴 했으나, 왜국 사신이기에 그의 청원이 태자에게 전해졌으니, 태자는 사신이 강짜를 부리는 연유가 궁금하여 그를 들이게 하였다.
비교적 젊은 왜국 사신은 명국 태자를 뵙게 된 것에 크게 흥분하였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등장하였고, 크게 심호흡한 후에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저는 왜국 관령의 신하 도가시 요시시게입니다.”
“…….”
그자의 입에서 어설프기 그지없는 명국말이 흘러나왔는데, 태자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성조 없이 딱딱한 말투에다가 그의 왜국식 이름 또한 섞여 있어 혼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통역이 따로 없기에, 하는 수 없이 태자는 그자에게 필담을 허락하였고, 그 후에야 종이 위에 쓰인 글을 통해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의 이름 또한 부견의중(富樫義重 : 도가시 요시시게)이라 알 수 있었다.
“관령이 무엇인가.”
태자가 왜국의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은 왜국의 왕이 있지만, 권한은 없고 그의 신하인 무왕이 왜국을 다스린다는 정도였다.
이에 도가시 요시시게가 관령이 왜국 무왕의 섭정임을 알리자, 태자는 실소를 지었다.
그로서는 왜국의 정치 구조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왕이 유명무실한 건 둘째쳐도, 따로 무왕이 있어 그가 왕처럼 군림하는데, 그를 위한 섭정이 또 있다고 하니, 그 나라에 정통성이 존재하긴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태자는 속내로 왜국 사신들이 명국에 온 이유는 아직 모르나, 만약 사대관계를 맺고자 온 것이라면, 그 부족한 정통성 때문이라도 쉽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일단 도가시 요시시게가 어찌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물었다.
“지금 제가 태자 전하를 뵙고자 한 것은 이번 사신행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제주군공에 관한 것을 고하고자 함입니다.”
종이 위에 흘러가는 글귀를 본 태자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요시시게의 다음 글을 기다렸다.
“지난날에 고려로 가던 명군이 사라진 것은 제주군공이 바다 위에서 명군을 공격하여 멸살한 탓입니다.”
“…….”
“제주군공은 알려지진 않았으나, 실제로는 강대한 힘을 가진 자입니다. 저희 화국의 영토인 구주의 서쪽에 그자가 세력을 얻은 바, 이는 저희의 나약한 탓만이 아닌, 제주군공의 강대함 때문입니다.”
태자의 표정은 어느새 진중함이 넘쳐 딱딱해지고 있었다. 그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가시 요시시게는 연신 붓끝을 놀렸다.
“이제 고려에서도 그 힘을 크게 키운 바, 명국의 동쪽에서 제주군공이 크게 활개를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명국의 해안과 바다가 언제라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의미이며, 화국과 고려가 명국에 사대함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요시시게는 잠시 태자를 힐끗 보고는 그가 자신의 글에 집중한 것에 힘입어 다시 붓을 놀렸다.
“제주군공이 화국 사신들을 앞세워 명국에 닿은 것은, 그가 스스로 밝힌 바, 그의 이득을 얻기 위함이니, 자칫 명국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태자 전하께옵서는 이를 명심하시어, 그자의 혹시 모를 간계를 경계하시옵소서. 더불어, 화국이 대명의 태평성대에 기여하고자 하니, 저희를 도와 불학무도하게 변할 수 있는 제주군공을 견제하게 해 주시옵소서.”
“…….”
요시시게의 필적이 일단락되었지만, 태자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다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후에 물은 것은 요시시게의 필적 중 끝에 담긴 내용이었다.
“명국이 너희를 도우라 하였는데, 그 방도가 무엇이냐.”
“화국이 대명에 조공케 해 주시시고, 부디 화포의 기술을 전수케 하여 저희가 제주군공의 세력을 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요시시게가 급히 글로 대답하니, 태자의 입가에 냉소가 잠시 스쳤다.
왜국 사신의 말이 사실일 수 있고, 그가 명군 3만이 수몰된 것을 아는 것으로 보아 아주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님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왜국의 신하 또한 그것을 밝힘으로써 자국의 이득을 모도하려는 것 또한 분명했다.
태자는 다시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문득 눈빛을 발하며 요시시게에게 말하였다.
“너의 말에 일리가 있다. 만약 네가 나를 돕는다면, 나 또한 너희를 도울 방도를 찾을 것이다. 응하겠느냐?”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요시시게가 읍하여 고하니, 태자의 입가에 다시 냉소가 스쳤다.
‘안 그래도 명군의 수몰을 두고 짐작만으로 압박하기 부족하다 여겼는데, 괜찮은 수단이 생겼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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