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77)
* * *
“너무 일찍 준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태자를 만나기 위해 의관을 정돈하던 몽주가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장원의 주인인 남씨세가의 가주가 조만간 태자 전하께서 장원에 도착하실 것이라며 준비하라 전하였기에 그리하고 있었다. 아니, 일단 하는 척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떠들썩하게 굴어 놓고, 태자가 이미 도착한 것을 왜국 사신단이 모를 것이라 단정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 우습기도 하였다.
아마도 태자가 부리나케 달려온 태를 보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괜한 말로 태자를 격동케 한 건 아니겠습니까.”
동경의 한쪽 구석에 이미 의복을 단정히 한 탁기가 비치고 있었으니, 그가 한 말에 우려가 가득했다.
“맞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동경에는 비치지 않았으나, 탁기의 뒤쪽에 있을 차현유 또한 같은 심정을 담아 말하였다.
그에 몽주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들의 우려가 이해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통쾌감이 있었다.
“무엇이 태자를 격동케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미 그가 알고 있는 명군이 수몰된 이유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주가 생각보다 강자라는 걸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건가.”
몽주는 동경을 보던 자세에서 뒤를 돌아보며 그의 두 수하를 향해 물었다. 물론, 두 수하들이 가리키는 것은 전자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저 짐작하던 것과 명백히 증인이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탁기가 말하였으니, 그가 의미하는 건 몽주가 왜국 사신들 중 일인인 도가시 요시시게로 하여금 태자에게 고발하게 만든 것을 의미했다.
“요시시게가 우리가 명군을 몰살시키는 걸 봤나?”
“직접 보진 않았지만, 우리 군병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들은 것에 대해선 증인이겠으나, 명군이 수몰된 것에 대해서는 증인이라 할 수 없지.”
“그래도…….”
탁기는 여전히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하기야 현대의 재판장에서나 그런 세세한 구분을 따지지, 당대 권력자들에겐 본 거나 들은 거나 그게 그거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 유리하다면 더더욱 말이다.
몽주는 두 교리들을 번갈아 본 후에 그들에게 손짓하여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에 앉게 하였다.
“아마 빠른 시간 안에 우리를 부를 것 같지는 않으니, 좀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지.”
몽주가 먼저 편안한 자세로 앉자, 탁기와 차현유도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
문득 몽주가 물으니,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곤 그중 차 교리가 답하였다.
“그야 명국과의 교역을 성사시키고 고신걸 교리를 구하기 위해서이며, 연왕이 불렀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명국과의 교역이나 고신걸 교리를 구하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라면, 피상적인 이유는 연왕의 호출이네. 한데, 지금 연왕이 이곳에 있나?”
“…….”
“아니지, 연왕이 아니라 태자가 와 있지. 재밌지 않나. 분명 연왕은 태자의 수중에서 고신걸을 구했으니, 이는 분명 태자의 위엄을 깎아내린 짓일 터인데, 연왕이 만나자 청한 지금에 정작 찾아온 건 태자니까 말이야.”
몽주의 지적에 차 교리도 그 차이점을 깨달은 듯했다.
“하, 하면, 태자와 연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의미입니까?”
차 교리가 흥분하여 어조를 높이자, 몽주는 손짓으로 목소리를 작게 하라고 하며 말을 받았다.
“둘 중 하나겠지. 태자와 연왕이 크게 충돌하여 연왕이 패퇴, 아, 진짜 싸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정쟁을 뜻하는 것이네. 어쨌든 연왕이 이번 일에서 밀린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겠지. 난 아마 후자가 맞을 것이라 보고 있고.”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야 태자와 연왕이 크게 충돌하였다면, 태자가 벌써 이 자리에 나타날 겨를이 없을 테니까. 그게 어지간히 큰일이겠는가. 아마 응천부는 물론 명국 전역이 들썩였겠지. 게다가 우리를 이렇게 좋은 곳에 모셔 둘 리도 없을 것이고.”
고신걸을 구한 연왕과 충돌했다면, 태자의 위치는 자연히 고신걸을 다시 감금하는 역할에 놓이게 되고, 이는 제주와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선다는 의미였다.
적의 적은 아군이고, 적의 아군은 적인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탁기가 서둘러 물었다.
“진정 태자와 연왕이 손을 잡았다면, 지금 돌아가는 사정이 어찌 되는 것입니까?”
탁기는 상황 판단이 힘들어 곤욕스러운 표정이었고, 차현유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일단 확실한 건 태자든 연왕이든 우리가 명군을 수몰시켰다는 걸 천자와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네. 앞서 말했듯 우리가 이처럼 편히 쉬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요.”
“그것만으로도 태자와 연왕이 하나의 유대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겠지. 거기에 기인함에 더하여, 연왕이 우리를 부른 것이 우리가 명군을 수몰시킨 것을 약점으로 잡고, 우리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얻고자 한다고 짐작한 것과 함께 생각하면, 태자 또한 연왕과 더불어 이번 일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한다 생각할 수 있을 것이네.”
“…….”
탁기는 계속 몽주의 말을 듣고도 멍한 머릿속이 가늠이 되지 않는지 궁한 표정이었다.
하나, 몽주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현대에서 연왕이 자신을 처벌하려 하지 않을 경우를 상정하여 논한 결과는 물론, 제주에서 교리들과 이번 명국행을 두고 의견을 나누었을 때도 마찬가지의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태자와 연왕이 같은 노선을 걷고 있을 가능성과 결탁하여 판단에 어려움을 주고 있긴 했다.
왜냐하면…….
“저는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태자와 연왕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없진 않겠으나, 태자와 연왕이 실상 돈독한 사이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연왕이 차후의 제위를 노리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분명 그렇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나마 정보를 다루는 직책을 가진 차 교리가 조금 더 생각을 전진시켰다.
아직 제주의 행정 능력이 아주 높지는 않아 정보 계통의 인력이 명국에까지 뻗은 건 아니지만, 명국 백성들의 입에 오갈 정도로 드러난 정보 정도는 얼마든지 구하고 있었다.
“그야 태자가 연약하던 시절의 이야기이지. 길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횡횡하던 때에야 비단 연왕 말고도 다른 모든 황자들에게 빌붙어 후계를 노리라 들쑤신 자들이 오죽 많았겠나. 물론, 연왕이 출중한 편이라 그중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 편이었겠지만.”
“하면, 태자가 건강을 되찾았기에 연왕이 태도를 바꿔 태자의 편에 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네. 한번 야망을 품은 자는 그 야망에 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역사에서 연왕이 영락제가 되었음을 알기에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태자와 연왕이 손을 잡았다 속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현 상황을 통해 보면, 단기적으로는 그럴 것이네.”
다시 반복된 몽주의 단정에 차 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과거 태자와 연왕을 번갈아 만나면서 그들이 자신의 중상중공적인 경영책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몽주로서는 태자와 연왕이 손을 잡을 여지가 실제 드러난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확신에 가깝게 추측할 수 있었다.
여전히 궁리가 닿지 않아 곤란해하는 차 교리와 달리, 어느새 의문 어린 표정을 지운 탁기가 대화를 받았다.
그가 몽주의 판단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껏 몽주를 따라 위태로운 적이 별로 없었음에 기인하여 몽주의 판단대로 일단 여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한데, 그것과 왜국 사신으로 하여금 명군의 수몰과 관련한 고발을 하게 만든 것은 어떤 연유 때문입니까? 이미 말했듯 아무리 짐작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왜국 사신이 그리 고한다면 더욱 격동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걸로 격동할 자라면, 애초에 진실을 알았을 때 벌써 분통하여 일을 크게 벌였겠지.”
가장 단순한 논리로 말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두 수하를 안도하게 할 수 없었다. 몽주 스스로 또한 그것만을 믿고 그리한 것도 아니었고.
왜냐하면, 왜국 사신이 고한다는 것 자체가 왜국이 명군의 몰살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는 바, 만약 왜국이 그것을 알고 있음을 명국이 후에 알게 된다면, 이는 명국의 위신이 더욱 크게 떨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미 아는 것을 들었다는 식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나, 몽주는 태자가 그 때문에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차라리 왜국 사신을 압박하거나, 제거하여 그가 다른 곳에서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자와 연왕이 손을 잡았다고 한 것과 결부하여 생각해 보게. 손을 잡았다는 것은 함께 공유하는 계획이 있다는 의미이니,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변경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야. 함께 공유하는 계획의 변경은 상황에 따라 연대의 파기에도 이를 수 있기 때문이지. 명군 3만이 수몰된 것을 서로 아는 상황에서 그 둘 사이의 파탄이 어떤 식으로 타격이 되어 돌아올지 예견하기 어려우니, 어지간해서는 두 사람 모두 서로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을 것이네. 즉, 태자와 연왕 사이의 연대 때문이라도, 왜국 사신의 고발이든 다른 어떤 이유로든 계획이 파기되는 건 피하고 싶을 것이네.”
몽주만이 아는 사실 내지 역사를 빼놓은 채, 추정에 추정을 더한 것을 근거로 다시 추정하여 내놓은 결론에 탁기나 차현유나 여전히 혼란스러워하였다.
그나마 다시 말문을 연 것은 탁기였으니, 이번에도 깊은 고민 대신 몽주의 판단을 따른다 마음먹은 덕에 다른 의문을 생각할 겨를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왜국 사신의 고발이 태자의 선택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라면, 어째서 그자로 하여금 그런 고발을 하게 하신 것입니까?”
이미 같거나 비슷한 질문이 세 번째 나온 중이었다.
몽주는 미소를 띠며, 그가 도가시 요시시게에게 시킨 말을 떠올리며 말하였다.
“그가 내가 시킨 대로 태자에게 고하였다면, 태자의 머릿속에는 내가 소국 고려의 일개 신하만으로 남아 있겠는가, 아니면 왜국을 정벌하여 영토를 빼앗고 나아가 명국의 해안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강대한 세력으로 변해 있겠는가.”
“그 차이가 큰 것입니……? 아, 크군요.”
차 교리가 얼결에 되물었다가 문득 닿은 생각에 그 두 가지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우선 왜국 사신의 고발이 무의식적으로라도 태자가 제주의 힘을 보다 크게 여기게 만드는 데에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통한다면, 분명 태자에게 제주공과 제주의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약점이 잡혔다고, 고개를 숙이고 벌을 청하는 양 하면, 우리는 태자와 연왕의 노림수대로 끌려가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될 걸세. 태자가 무엇을 요구할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요구받는 대로 고스란히 넘어가 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탁기와 차현유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직 몽주의 모든 논리에 동의하는 건 아닌 듯하나, 적어도 제주를 대표하는 그들이 태자와 연왕의 계획에 그저 끌려갈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군공께서 의도한 대로 통하기를 기원할 따름이었다.
몽주도 더는 두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해 주길 바라진 않았다.
다만, 눈앞의 두 사람이 이번 기회에 배웠길 바라는 것은, 국가의 대표는 절대적으로 철면피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쟁 후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협상에서도, 패전국의 대표가 무작정 숙이고 들어가는 일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니, 지난날 명군 3만을 죽였다고 해서, 명 태자 앞에 고개를 숙일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이것이 외교에 임하는 자세가 아닌가.
물론, 중화사상이 고정된 ‘대명제국’의 태자를 두고 위와 같은 이치가 쉽게 통용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제주가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님을 먼저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저, 그래도 너무 뻣뻣하게 굴지는 마십시오. 이곳은 엄연히 명국 땅이니, 태자가 크게 분노하여 저희마저 가두거나 더 큰 해를 입히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차 교리가 문득 걱정하며 고하였으니, 몽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지 않게 잘해야지. 후후.”
왜국 사신단의 일원이라는 ‘보호막’도 있고, 태자나 연왕의 상황이라는 믿을 만한 ‘방어구’도 있었지만, 엄연히 이 또한 외줄타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잘해야 한다.
“후후후.”
몽주의 웃음이 조금 길게 이어졌다. 잘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자조적 웃음이 문득 지난밤의 회상에 닿으면서 우연한 깨달음에 대한 희극적 웃음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도가시 요시시게, 그놈이 그놈이었을 줄이야.’
어젯밤, 몽주의 거처에 있는 작은 서재에 왜국 사신들을 불러 놓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던 중에, 열린 창으로 급히 분 돌풍으로 방 안의 촛불이 일시에 꺼진 일이 있었다.
급히 수하들이 창을 닫고, 몽주와 가까운 촛불부터 불을 붙였는데, 그 순간 흐릿한 촛불 너머로 요시시게의 모습이 보였고, 그제서야 그를 예전에 어디서 보았는지를 깨달았다.
과거 왜국에서 관령과 담판한 후, 화약에 대한 요구가 나온 날 밤, 짐꾼으로 위장하여 그와 함께 화약 거래에 대해 논한 자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흐릿한 촛불 하나 아래로 요시시게를 보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왜국 사신들과의 대화 후, 요시시게를 따로 불러 이를 추궁하니, 그가 당황하여 지난 시절 스친 인연에 불과하다 여겼다며 절대 몽주를 희롱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설파하였다.
하나, 그때 몽주는 이미 한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을 빌미로 그가 배 안에서 수없이 적은 것을 두고 세작질을 한 것이라 더욱 몰아세웠다.
그렇게 압박하여, 끝끝내 요시시게가 적은 글까지 살펴보았는데, 그곳에서 재밌는(?) 글귀를 보게 되었다.
‘고려 군병들이 곧잘 황해의 대승을 입에 담으며 즐거워하니, 대관절 그 대승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혹시 지난날 고려로 향하던 명군이 황해에서 사라졌다는 소문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명군이 사라진 것이 제주의 군병에 의한 것이라는 말인가?’
그저 배를 관찰한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군공군의 병사들끼리 나누는 이야기까지 적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두 가지를 알게 되었으니, 하나는 요시시게가 의외로 고려말을 알아들을 줄 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짜로 세작질다운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몽주는 더욱 발연대노한 양 목소리를 높이며, 탁기로 하여금 요시시게의 목을 곧바로 칠 듯 칼을 겨누게 하였으니, 그가 공포에 눈물을 줄줄 흘렸고, 뒤늦게 소란을 듣고 찾아온 왜국 사신들도 몽주 아래 엎드려 애걸복걸하였다.
물론, 이미 그때 몽주는 요시시게를 이용할 방법을 얻은 후였다.
안 그래도 태자나 연왕에게 제주의 진면목을 어찌 알릴지, 어떻게 자신과 제주의 힘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했음을 깨닫게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말로 설명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고, 오히려 허장성세로 오인할까 싶어 고민 중이었는데, 요시시게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주의 힘을 과시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지금쯤 요시시게는 열심히 그가 알려 준 대로 떠들고 있을 것이다.
일이 잘되었는지, 아닌지는 태자가 그를 호출하는 시간이 언제인지에 따라 알 수 있으리라. 일이 잘되었다면 한두 시진 안에 부를 리가 없으므로.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하고, 복잡할수록 정리할 시간이 그만큼 더 필요할 테니까.
* * *
“심양왕을 왕작에 봉한다?”
“그러합니다. 고려의 군왕위(郡王位)가 아닌 명의 번왕위(藩王位)를 수여함을 논하는 중이라 하옵니다.”
요시시게를 물러나게 한 후, 홀로 고심하던 태자에게 또 하나의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조정에서 요동 북부를 치는 방책이 논의되던 중에 고려의 심양왕 이성계에게 명국의 왕위를 주고, 그로 하여금 북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 것이었다.
연국과 요동에 관해 조정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있다면 즉각 전하라는 명을 내린 바 있었기에, 태자의 태감이 급히 통주로 달려와 보고하여 알게 된 것이다.
“고려의 사정에 변동이 있었으니,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명국에도 이미 요동공이 몰락하고, 심양왕이 요동을 차지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있었다.
태자가 제주군공과의 일을 두고 연왕과 힘을 합하는 전후로 그와 같은 소식들이 명의 조정에 연달아 전해졌던 것이다.
전혀 다른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태자의 머릿속이 한결 더 복잡해진 것은, 당금 고려의 상황이 정립된 것에 누구보다 제주군공의 역할이 컸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소식이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심양왕이 요동공을 물리치고 요동을 차지한 것에 기여한 제주군공의 역할이 점점 더 커졌으니, 왜국 사신 요시시게와의 대화를 통해 제주의 힘이 생각보다 더 강성함을 인지한 그로서는 제주가 무척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만약 심양왕으로 하여금 북방을 치게 하려 한다면, 제주 또한 그 일에 얽히게 될 것임을 직감하였는데, 앞서 알려졌듯 지금의 심양왕은 제주군공이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고, 그 이야기인즉슨, 제주가 돕지 않는다면 요동은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뜻에 가까웠다.
“크흠.”
“전하, 괜찮으십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침음을 내니, 태관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네. 그냥…… 복잡하군, 복잡해.”
태자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위국공 서달로 하여금 요동을 치는 방책을 고하게 한 것은 연왕을 연국으로 보내는 빌미로 삼기 위함이었고, 차후에 연국과 태자 간에 소통이 활발해지는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 삼고자 함이었다.
물론, 요동을 치는 방책 자체는 충분히 천자와 조정의 대신들이 수긍할 만한 것이었으니, 그래야만 제대로 된 빌미이자 핑계로 삼을 수 있었기에 그만큼 고심 끝에 정한 것이었다.
한데, 그것이 가납된 뒤에는 더 이상 태자의 방책이 아니었다.
천자와 명국의 책략이 되어 태자의 손을 벗어나 따로 발전하기 시작하니, 그 여파가 요동에까지 미치려 하고 있었고, 요동과 관련이 깊은 제주에까지 닿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연왕을 연국으로 보내려는 속셈이 제주와의 교역에 있었던 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책략이 돌고 돌아 다시 변수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아무리 천자의 눈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북요동을 치는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일이었다.
그건 비단 태자 자신이 낸 방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 천자의 뜻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고, 명국이 구원(舊元)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중화의 유일한 정통 국가로 바로 서기 위한 방책이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제주를 다룰 수 있겠는가.”
옅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니, 애초에 연왕과 더불어 태자가 노린 것을 강요하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일들이 늘어난 탓이었다.
사실 연왕과 논의하여 태자가 제주공에게 강요하고자 한 것은 아주 간단했다.
제주의 물산을 아주 값싸게 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명국에서 고가로 팔릴 사치품을 통해 귀한 족속들의 돈을 뽑아 차후 황권을 위해 쓰고자 했다.
제주가 명군을 몰살시킨 약점이 있으니, 명국의 불호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제주는 결코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짓고 있었는데, 막상 제주공을 불러다 놓고 만나기 직전에 이르니, 쉽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제주는 작은 섬이라 하지 않았던가?”
문득 태자가 헛웃음을 흘리며 태감을 보고 물으니, 태감이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대답하였다.
“분명 작은 섬임에 틀림없습니다. 명국은 물론 소국인 고려에 비해서도 몹시 작습니다.”
“한데, 어찌 그리 세력을 뻗은 곳이 많을 수 있는가?”
태감이 답할 수 있는 물음은 당연히 아니었고, 대답을 기대한 질문도 아니었다.
왜국 사신의 고발에 따르면, 제주는 왜국과 싸워 제주의 열 배에 달하는 영토를 얻었고, 고려에서도 고려 권왕과 그 권세가 대등함에 이르렀으며, 이제 요동의 심양왕 또한 제주가 아니면 설 수 없음이 알려졌으니, 지금 체감하는 제주와 제주공은 이미 며칠 전까지 그가 생각했던 제주나 제주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태자는 내심 불길함마저 느꼈으니, 그 불길함은 그저 기우(杞憂)가 아니었다.
* * *
얼마 후, 만찬을 겸하여 만난 제주공은 지난날 고려의 사신 중 일원으로 왔던 일개 하급 관리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어찌 그 일을 두고 저희를 협박하시나이까. 저는 당금 고려의 정권을 잡고 있는 영산군왕과 이미 오래전부터 위아래로 손을 잡고 있었으니, 그 일 또한 영산군왕을 도와, 명군을 꾀어 고려를 전복하려 했던 역적 이인임의 음모를 막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일환으로서 엄연한 전투였으니, 운이 닿아 제주의 군병이 별로 상하지 않고, 명군을 몰살시켰을 뿐, 결코 명국의 힘없는 양민들을 학살한 것이 아닙니다. 명국의 소중한 군병들이 허무하게 죽은 것에 대해 노여움이 남아 있는 것은 이해되는 바이나, 사실 그 노여움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함부로 전쟁터로 대군을 몰아넣은 명국의 관리와 장수에게로 향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태자의 추궁, 즉 명군을 수몰시킨 죄를 언급한 것에 대한 제주공의 담담한 답변이 그러했으니, 자신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말하는 제주공의 모습에서 이번 일이 결코 그의 뜻대로 통하지 않을 것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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