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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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초무치였던가?
첫 천몽 때 만났던 무수한 인간들 중 몽주의 적이었던 자들 역시 셀 수 없이 많았다.
부족장이 된 이후에는, 거의 무적의 권력을 누렸으나, 워낙 그 힘의 세기가 커서 적수가 없었을 뿐, 엄밀히 말해 적은 많았다.
물론, 그들 모두가 몽주의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에 다들 몰락했다.
죽거나 죽는 것보다 더 나쁘거나.
그들로서는 원통하게도 몽주의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몽주를 저주하고, 혐오하며, 하늘이 감동할 만큼 거센 저항을 했다 하더라도, 대부분 몽주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거나, 끌려와 죽기 직전에야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말인즉 몽주도 그런 자들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의미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극히 일부는 몽주의 게으른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으니, 초무치가 바로 그런 적 중 하나였다.
초무치가 정확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초무치가 몽주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의 앞에 끌려왔을 때, 그가 보였던 당당함 때문이었다.
몽주가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주변 부족을 순식간에 복속시킨 후, 더 먼 곳까지 탐하기 시작할 무렵, 초무치는 몽주의 새로운 타깃이 된 부족의 대전사였다.
늙은 부족장을 대신해 부족을 이끌던 그는 선전하였지만, 앞선 무기와 규모가 다른 전력 앞에서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패배한 초무치는 몽주 앞에 끌려왔고, 그때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네 죄를 아뢰라. 그리하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마.”
몽주는 굴복시킨 부족의 족장이나 장수를 볼 때마다 늘 그런 말을 남겼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죄가 없소. 오히려 그대의 죄를 묻고 싶소.”
골골한 몸임에도 애써 자세를 갖추며 담담한 어조로 초무치가 한 말이 그와 같았으니, 당시 몽주에게는 신선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거칠게 저항했고, 기세등등했던 자였다고 하더라도, 몽주의 앞에 끌려오면 자신의 죄상을 죄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토설하곤 자신을 혹은 가족을 살려 달라 애원하곤 했었는데, 초무치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초무치를 살리고 싶었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던 당당한 패장을 처음으로 보았으니, 정말로 그를 휘하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다시금 그에게 죄를 밝히라 명하곤, 그리한다면 너와 너의 가족을 살리는 것은 물론, 그를 등용하여 크게 쓰겠노라,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노라 약조까지 해 주었다.
하나, 초무치는 거부하였다.
아니,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더 당당한 모습으로 몽주의 죄를 구설하며 자신은 패배했으나, 옳은 길을 따랐음을 온몸으로 피력하였다.
한참이나 초무치의 욕설 아닌 욕설을 듣던 몽주는 결국 그를 처형시켰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죽음을 내렸으며, 그의 부족은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당당한 면모에 감탄하긴 했지만, 면전에서 자신을 비난하니, 몽주로서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참으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껏 수하들 중에서도 불쾌한 언행을 하는 자는 곧잘 곤죽이 나곤 했기에 면전에서 그를 비방한 적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초무치를 죽인 후 그의 기분이 어땠을까.
인재를 죽이게 된 것을 통탄…… 하기는커녕, 우스웠다.
“병신.”
잠들기 전에 그렇게 중얼거린 게 전부였고, 이후에 다시 그를 떠올려 본 적도 없었다.
당당한 것도 유분수지, 칼이 목에 닿아 있는데, 그것도 제 목뿐만 아니라 제 가족들의 목도 걸려 있고, 그의 부족들이 받을 대우도 달려 있는데, 끝끝내 당당하기만 하고 오히려 수난만을 키운 후에 죽은 그는 그냥 병신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어릴 적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이지요.”
만찬을 겸한 만남이었고, 대화가 길어졌기에 대화 중간에 태감들이 상을 치우게 되었는데, 조금 번잡한 중에 대화가 끊겨 잠시 홀로 옛 생각을 떠올린 것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기억인 모양이군. 입가에 웃음이 한껏 떠올라 있었네.”
“……좋은 기억이었습니다.”
좋은 기억이었다. 처세에 도움이 되는 기억이었으니까.
명 태자와 몽주 사이의 분위기는 처음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앞서 몽주가 명군의 수몰에 대한 태자의 추궁에 당당하게 맞선 직후 분위기는 몹시 경직되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내디뎌 압박한 후, 작은 걸음으로 여러 번 물러나는 식으로 대화를 이끌었으니, 그 시작은 명군과의 전투에서 명군이 선전하였음을 거짓으로 고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실제와는 전혀 달리, 명군이 준비가 안 된 중에도 물러섬 없이 전투에 임하였고, 만약 자신에게 화포가 없었다면, 혹은 명군도 화포를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며 명군을 추켜세워 준 것이다.
그러면서 최후의 일선일인(一船一人)까지 당당히 맞서는 통에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전몰에까지 이르렀다 고하여, 명군을 몰살시킨 건 그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피력하였다.
물론, 그 와중에 몽주는 제주의 화포가 그 성능이 매우 우수함을 은근히 알리며, 가정법으로 말하여 자신이 태자를 돕는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이어, 죽은 명군의 처지는 안타까우나, 그들은 실상 명국 귀족들의 전력으로, 명 황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묻어 위신이 저하되는 것만 피한다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지 않냐 되물으며, 명국 내 정치적인 문제로 슬쩍 치환하였다.
이는 당시 고려의 중란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이후, 이미 명국 내 퍼진 소문을 구해 들은 것을 토대로 한 말이었는데,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태자도 얼결에 이를 인정해 보였으니, 그가 명군의 수몰이 제주에 의한 것임을 짐작하면서도 함구하였음을 두고 추정한 대로 반응한 것이었다.
물론, 태자라고 마냥 몽주의 주도에 끌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몽주의 당당한 반응에 당황하고, 또 어느새 속내에 크게 자리 잡은 제주의 위력에 혼란스러워하긴 했지만, 정신을 차린 후에는 아무리 전쟁이고 전투라고는 하나, 명국에 큰 손실을 입힌 자가 명국에서 교역을 하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는 식으로 몽주를 압박했던 것이다.
하나, 몽주의 ‘프레임’대로 전쟁의 일환이고, 전투 중 하나임을 인정한 이후, 그 압박은 애초에 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미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본래 몽주가 명군의 수몰에 대해 모르쇠하면, 왜국 사신을 불러다 대질시킴으로써 굴복케 하고자 했던 방책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사실 명군의 수몰을 추궁하는 것을 통한 압박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몽주가 그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나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태자 또한 그 문제를 함구한 전력이 있었으니, 몽주가 먼저 명군을 몰살시킨 자라는 것을 밝혀, 명국 내에 공론화시키지 못하는 점도 그 한계였다.
어쨌든 명군과의 충돌을 두고 유감을 표명함으로써 태자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한편, 그가 감정적으로 발끈하기 전에 겸양하여 분위기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조절한 몽주는 그쯤에서 제주의 물산을 자랑하듯 소개하고, 그 물산이 명국에서 크게 호응 받을 것이라 전하였다.
“만약 제주의 물산을 충분히 명국에 들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천자 아래로 가장 큰 부를 쥐게 될 것입니다.”
몽주의 말은 오만했으나, 태자에게는 오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른 물산들은 다 제외하고, 사탕만 두고 보아도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그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신걸이 교역을 위해 선을 대느라 이곳저곳에 뿌린 사탕은 한 달 만에 응천부의 고관 및 부자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 달콤한 맛도 그렇지만, 눈처럼 하얀색이 누런 물엿 같은 다른 사탕과는 전혀 달라, 매혹적이었고 고급스러움을 과시하기에 적합하였던 것이다.
덕분에 많다면 많은 고신걸이 뿌린 사탕은 여기저기 쓰이면서 순식간에 소비되었고, 다시 사탕을 찾는 이들의 수소문이 태자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아직은 아니지만, 사탕에 눈과 혀를 빼앗긴 자들 중 조정에 참여하거나, 입김이 닿는 자들이 적지 않으니, 그들이 조정을 통해 고려에 사탕 조공을 요구할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사탕을 정기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남길 이문이 실로 막대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태자가 그것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침을 삼키고 사탕을 언급하니, 몽주가 왜국의 예를 들어 보였다.
“제주의 사탕이 왜국 구주에 처음 들어갈 때는 보통 그 절반에 해당하는 무게의 은과 바뀝니다. 하나, 구주를 벗어나 왜국의 동국에까지 가면 같은 무게의 은보다도 비싸지지요.”
사실 제주의 사탕이 비단 은으로만 매매되는 건 아니나, 일부러 은을 두고 설명한 것은 명국에서 은의 가치가 다른 곳보다 높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대 명국의 중심인 응천부 이하, 강남 강동 지역에서는 이미 은이 기준 화폐로 쓰이고 있었으니, 태자는 더더욱 사탕의 가치를 체감할 수 있었다.
같은 무게의 은이라 생각하면, 사탕은 실로 고가였다.
고려에서 16근의 은병으로 절도 지었던 걸 생각하면, 16근의 사탕도 마찬가지란 뜻이니, 현대에서 싸구려 취급인 설탕과는 천지차이라 할 만했다.
“만약 태자께서 제주의 물산을 책임져 주신다면, 사탕을 사분지 일의 은과 교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제주로서는 이문이 남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이나, 지난날의 악연을 씻고, 장차 대명국을 이으실 태자 전하께서 크게 권세를 갖추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선물이라 여겨 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자는 이미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분지 일 무게의 은으로 사탕을 구하는 것은 애초에 그가 제주공을 압박하여 요구하려던 것보다 오히려 더 저렴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태자의 기꺼운 반응을 못 본 척하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여의치 못하다면 같은 가치의 금이나 쌀과 같은 현물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청원컨대 부디 다른 물산들은 명국의 상인들과 저희가 직접 흥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도 남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만약 다른 물산으로 크게 이문을 얻는다면 그 또한 태자 전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할 것…….”
“그만, 잠깐만 멈추게.”
태자는 몽주의 말을 끊었으니, 그가 심호흡하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 한 말이 진심인가?”
“어찌 이 자리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몽주가 진중한 어조로 거짓이 아니라 하자, 태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여러 번 변하였다.
이처럼 이야기가 쉽게 될 줄 알았다면, 굳이 그를 압박할 필요도 없었다는 후회부터, 혹시나 파악하지 못한 속임수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각들이 표정마저 감추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물론, 속임이 없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일단 사탕의 가치부터 속임수였으니, 왜국에서 팔린 가격은 사실이나, 제주에서 생산되는 비용을 생각하면 4분의 1 무게의 은은커녕 10분의 1에 팔려도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
사실 현대의 설탕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하면 그 또한 매우 비싸게 생산하는 것이지만, 아직 소량만을 생산하는 중이었고, 장차 중산층과 시민을 육성하기 위한 몽주의 방침에 따라, 제주의 인건비가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보니, 그 정도에 이른 것이다.
잠시 몽주를 직시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태자는 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난날 그대가 처음 응천부에 왔을 때 나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기억하는가.”
“그 대부분을 명명백백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장될 위기에서 벗어난 후, 태자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몽주는 굳이 태자가 눈물로 사과하였던 것까지 언급하였다. 그 또한 언젠가 때가 되면 같은 생각을 나누었던 대로 뜻을 실행해 보자 약속한 것을 일깨움과 동시에, 태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채무 의식을 건드리고자 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자는 잠시 시선을 내려 표정을 감추었으니, 그가 오늘 몽주에게 하려 했던 것이 지난날 그에게 약속했던 것과 오히려 반대되는 짓이었음에 자책감을 가진 것이었다.
물론, 그때야 몽주가 고려의 하관(下官)이 불과했을 때였기에, 훗날 그가 천자가 되면 하찮은 그를 높이 사 그 경영 방책을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었고, 지금 그가 맞대면하고 있는 자는 강대한 세력을 갖춘 제주공으로서 명군을 수몰시킨 적도 있는 권력자였으니, 마냥 같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리고 일개 사사로운 사인이 아닌 명국의 태자이기에,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직 때가 되지는 않았다. 하나, 당금의 사정이 그저 때를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으니, 태자로서 훗날을 대비하고자 하였다.”
“현명하십니다.”
당금의 사정이 무엇인지 태자가 밝히지는 않았으나, 몽주는 역사에 비춰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학의 득세와 더불어 중농의 자치적 경제에 주력한 명나라의 현황이 그사이에 크게 바뀔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상공업, 특히 상업을 통한 부흥을 바라는 태자의 입장에서는 훗날 나라를 뒤바꾸기 위해서라도 힘을 갖추고자 하였고, 그 힘을 제주의 물산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제주의 물산을 내가 책임진다 하더라도, 이는 비공식적인 일일뿐이다. 만약 이 일이 크게 논쟁거리가 된다면, 나는 너와의 관계를 일체 부정할 것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쉬운 바이나, 사정이 그러하다는 것 정도는 저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태자가 자신을 부정해야 할 정도로 큰 일이 벌어진다면, 몽주 또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대책을 세울 테지만, 그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했던 것도 결국은 사무역이고, 밀무역이었다. 다만, 그 교역이 명나라 권세가의 도움을 통해 정기적이고, 가능한 한 길게 이어지길 바랄 따름이었다.
그런 점에서 태자는 최고의 선택이랄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천자가 될 수 있다면 말이다.
몽주는 태자의 얼굴을 차근히 보며 조심스레 말하였다.
“송구한 말씀이나, 예전에 전해 듣기로, 태자 전하께서 한때 옥체에 강녕치 못하셨다 하였습니다. 지금 뵙기로는 그런 흔적을 찾기 어려우니, 아마도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돌려 말한 것이나, 결국 건강하냐는 질문과 같은 말이었고, 태자도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미소를 띠었다.
“내가 일찍 죽을까 싶은가?”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네가 들은 그 소문은 헛소문은 아니었다. 하나, 나는 내가 일찍 죽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충분히 내 삶을 누릴 정도의 건강을 도로 얻었고, 내 마음속 의지는 그 어떤 때보다도 굳건하다. 이것으로 답이 되었는가?”
“그저 전하의 장수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몽주는 태자에게 축원하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찻물을 음미했다.
아직 실무적인 이야기가 많이 남았지만, 어차피 그건 태자와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무자라…….’
문득 태자와의 대화 중에 나와야 할 인물이 하나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실무자일까? 아닐 것이다. 그 또한 지체 높은 자이니.
하나, 태자에 비하면 실무에 가까울 것이고, 실무자들의 수장역은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태자도 문득 말문을 열어 잊고 있던 중요한 사안을 말해 주겠노라 하였다.
“제주의 물산을 교역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연국이네.”
“연국이라 하시면…….”
“연경의 동남쪽에 직고(直沽)가 있고, 직고에 속한 해하(海河)강 하구에 삼하도(三河島)가 있으니, 그 섬에서 교역할 것이네.”
직고는 오늘날의 텐진시(天津市)에 위치한 고을로, 하북 최대의 하천인 해하의 나루터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텐진시는 항구 도시지만, 당대의 직고는 내륙 도시로서, 해하를 통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해하 하구의 삼하도라는 섬에서 교역하자는 것이니, 다른 이들의 눈에 가급적 띄지 않게 교역하면서도 연국을 통해 그 물건을 유통시킬 속셈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차피 제주의 물산은 고려의 물산이라 할 수 있으니, 설령 연국에서 고려의 물산이 퍼진 것이 드러나더라도 고려와의 국경을 통해 밀수된 것이라 여기지, 태자와의 연관을 직관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이는 연왕의 협조를 전제할 경우의 이야기였다.
몽주는 역사 속의 연왕을 떠올리며 태자에게 물었다.
“연왕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연왕과 손을 잡았느냐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그건 이복이나 형제인 황자를 두고 태자에게 묻을 만한 게 아니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그것이 아니면 태자의 말이 성사되기 어렵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었다.
태자 또한 찻물을 마신 후 실소하며 말하였다.
“믿지 않네. 다만, 이번 일만큼은 같은 배를 탔으니 배신하기 어려울 것임을 믿네.”
몽주는 고개를 끄덕여 태자의 판단에 동의하듯 표현해 주었다. 하나, 정말 태자와 연왕이 같은 배를 탄 것인지는 확신하지 않았다.
연국에서 제주의 물산을 교역한다면, 그 직접적인 이문을 태자가 모두 취한다고 해도, 연왕 또한 간접적인 이득은 취할 것이니, 연국에서 상업이 흥하여 국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국으로 모일 인력과 자금으로 인한 그 이득은 비록 간접적이라고 해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연왕이 그것을 노리면서도 태자에게 감추고 있다면, 같은 배를 탔다고 순진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물론, 아직은 몽주도 태자를 지원하는 연왕의 의도에 대해 무어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역사의 연왕이 그러했듯 가슴속 깊은 곳에 야망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고, 역사가 바뀌어 연왕이 그 야망을 진정 포기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 * *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지요?”
“뭘 안심해도 된다는 말이냐?”
“뭐긴요, 명국 놈들이 몰려올 경우를 말하는 거지요.”
“일견 그렇긴 하지.”
통주의 포구 한쪽을 크게 차지한 제주 선단 중 기함의 갑판에서 감태의 판단이 담긴 물음에 석삼이 대략 동의해 주었다.
그 둘은 심심하던 참에 포구 근처를 지나며 크고 낯선 배를 구경하는 명국인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통주에 닿은 지도 칠 일째, 첫 삼 일간 비상 대기였던 것에 비해 이제는 조금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명군을 몰살시킨 전력이 있는 제주의 군병들로서는, 굳이 상부에서 알려 주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상황이 악화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얼핏 소문이 퍼지기로는, 만약 포구에서 볼 때, 명국 군병의 움직임이 수상하면, 즉각 포구를 떠나 선단의 안전부터 확보하라는 군공의 명이 있었다고도 하였으니, 더욱 긴장하기도 했었다.
하나 석삼은 군공께서 진정으로 그런 나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 여기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군공께서 통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을 테니까.
어쨌든 칠 일째가 지나감에도 아무 일이 없었으니, 이쯤이면 군공께서 일을 잘 처리하셨다고 믿어도 될 만했다.
“근데 왜놈들은 왜 그렇게 풀이 죽었대요?”
“일이 잘 안 되었나 보지.”
“에? 일이 잘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야 군공의 일이 잘되고 있다는 거고, 왜놈들의 일은 잘 안 되었을 수 있지.”
“군공의 일이 왜놈들의 일이 아니었나요?”
감태는 혼란스러운 듯 다시 물었고, 석삼은 피식 실소하였다.
“너는 군공께서 그저 왜놈들과 명국 간의 일 때문에 예까지 오신 것 같으냐?”
“아니면요?”
“나도 잘은 모르나, 지금 군공께서 제주의 물산을 고려와 요동, 그리고 왜국에 매매함으로써 제주를 흥하게 하셨으니, 명국에서도 같은 일을 행하고자 하셨을 것이다. 그런 참에 왜국에서도 명국과 교류하고자 하니, 그것을 빌미로 이곳에 오신 것일 테고. 예전에 있었던 일도 있으니, 왜국 사신단을 이끌고 옴으로써 보다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신 것 아니겠냐.”
“흐음.”
감태는 석삼의 지레짐작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돌려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어제 왜국 사신들이 선단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그들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내내 선실에서 좀처럼 나오지도 않았으니, 적어도 왜국의 일은 잘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후후…….”
문득 석삼이 낮은 어조로 음침하게 웃음을 흘리니, 감태가 다시 석삼을 바라보았다.
“왜 웃으십니까.”
“사실 아까 종광이 녀석에게 들은 게 있는데, 그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서. 후후.”
석삼이 말한 종광이라는 자는 이번에 같이 온 왜국말 통역사 중 하나였다. 왜국의 사신들이 먼저 선단으로 돌아오면서 그도 먼저 함께 온 것이다.
“그게 뭔데요? 뭘 들으셨는데요?”
감태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매달리며 물으니, 석삼이 짐짓 고심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한테만 말할 터이니, 절대 다른 곳에서 떠벌려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나랏일에 대한 것이니까.”
“알았어요. 빨리 말해 주세요.”
“종광이가 말하길, 왜국 사신들이 응천부의 황궁에 가서 황제를 잠시 배알하였대. 한데, 조공 관계를 맺는 건 일언지하에 거절되었나 봐.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고. 한데, 왜국 놈들도 단번에 일이 성사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서 그건 별로 실망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런데, 대신 엉뚱한 일이 있었던 게지.”
“엉뚱한 일요? 무슨 일요?”
“명국 황제가 하명하길, 어쨌든 조공 관계를 맺기 위해 손수 찾아온 왜국놈들이 나름 기특하다면서, 아직 정식적으로 조공 관계를 맺을 수는 없지만, 그를 논의하기 위해 앞으로 오갈 수 있도록 허락은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서구주의 왜인들만큼은 우리 제주를 통해 이곳에서 가끔 교역할 수 있게 허락해 줬다는 거야. 크크크.”
“……?”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냐?”
“잘 모르겠는데요.”
툭.
석삼이 감태의 등을 가볍게 타박하였다.
“생각해 봐라, 생각. 그 말인즉 명국 황제의 눈에는 왜국과 서구주가 나뉘었다는 말이지. 그것도 서구주가 우리 제주군공을 따르는 걸로 여긴다는 것이고.”
“사실이잖아요?”
감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석삼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사실이지. 한데, 이제껏 그건 왜국과 우리 제주 사이에서나 사실일 뿐이었잖아. 그렇다고 왜국이 서구주를 아예 포기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정이 있어 잠깐 우리 군공에게 양보했다고 여겼겠지. 한데, 서구주가 제주를 따른다는 게 외국에, 그것도 명국 황제에게 인정되어 버렸다 이거야. 이건 왜국의 입장에서는 자칫 서구주를 완전히 잃어버릴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 그게 중요한가요? 명나라 황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당연하지, 인마. 명나라 황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명나라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고, 명나라가 그리 여긴다는 건 곧 천하가 그리 여긴다는 거잖냐. 거기에 대고 왜국놈들이 ‘서구주 우리 건데요.’라고 항의할 수 있겠냐? 명나라 황제에게 대드는 건데? 안 그래도 명나라랑 조공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인 놈들이? 절대 쉽게는 못하지.”
뭔가 중요한 변화인 듯하기도 하고, 별거 아닌 듯하기도 했으므로 감태로서는 좀처럼 감을 잡기 어려웠다.
“크게 봐라, 짜샤.”
석삼이 우월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감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근데 명나라 황제는 어째서 서구주의 왜놈들에게 교역할 수 있게 해 주었을까요?”
“뭐, 종광이가 추측하기로는 군공께서 명나라 태자를 잘 구워삶으신 것 아니냐고 하더라. 그리고 군공께서 신돈이랑 동맹을 맺으시면서 따로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권한을 얻으셨기도 했으니, 제주가 명국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김에 서구주도 끼워 넣은 모양이지.”
“근데 자주 교역할 순 없겠죠? 저도 듣자 하니, 명국은 외국 상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렇겠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아니겠냐. 왜국 사신들을 데려온 공도 있고 하니, 일종의 선물처럼 허락해 준 것…….”
석삼이 가벼이 말을 하는데, 문득 감태가 뭔가를 깨달은 양 눈을 매섭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냐?”
“이제 보니, 아까 군공께서 따로 하시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게 명국에서 교역하는 거라고 하신 건 다 종광이 형에게 들은 거였군요?”
“…….”
“난 또 무슨 신산묘계(神算妙計)라도 셈하신 줄 알았네요.”
“어험, 험!”
헛기침을 하던 석삼은 붉게 물든 장강의 석양을 바라보며 감태의 날카로운 시선을 회피하였다.
“뭔 강이 이렇게 크냐. 쩝.”
서쪽으로 길게 뻗은 장강은 넓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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