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81)
* * *
어제 아침에 홍로 포구에서 출발한 다섯 척의 경함선 선단이 저녁 무렵 데카이(출해 교역소)에 입항하였다.
배 위에 있던 석삼은 제주의 배들이 입항하려 함을 알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카이의 포구 인부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돛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깃발 하나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으니, 하얀 천 위에 검은 색으로 큰 원이 있었고, 그 안에 바람개비 모양으로 선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아는 사람의 눈으로는 그것이 삼태극(三太極)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 가운데에 검은 타원이 놓여 있는 것이 도드라질 뿐이었다.
그것은 이번에 새로 정한 제주군공의 문장(紋章)이었으니, 국가나 가문을 상징하는 표지인 문장이 쓰이지 않았던 고려의 문화에서 보면 확실히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다만, 그 문장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가 연상되면서 제주군공이 어떤 의미로 저와 같은 문장을 정한 것인지 이해되었다.
“자네도 저 문장이 끌리는 겐가?”
문득 들려온 질문에 고개를 내리니, 창 선장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끌린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상상을 유도하는 것 같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상상이라…….”
석삼은 다시 고개를 들어 문장기(紋章旗)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가운데 가로로 긴 원형은 제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제주의 모양이 실제로 대략 저러하지.”
“저 원형을 중심으로 태극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보고 있으면, 마치 제주가 세상의 중심이라 천명하는 것 같으니, 제주가 세상으로 뻗어 나가고, 동시에 세상이 제주로 몰려오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음, 맞아. 나 또한 같은 생각을 했지.”
“제주가 세상과 교류하는 것이라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비단 하나로만 좁혀지지가 않습니다.”
석삼은 홀로 제주공의 문장을 보며 그 의미를 연상했었으니,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제주의 중상(重商)을 생각하면 제주의 상인들이 세상으로 진출하는 것을 뜻하는 것 같고, 중공(重工)함을 생각하면 제주의 탁월한 상품이 세상에 널리 쓰이는 것을 가리키는 듯했다.
또, 제주가 다른 세상과 달리 양민들도 풍요로우며, 사람답게 살고 있으니, 세상에 그것을 자랑하고 제주를 따르라 호령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다른 모든 상상보다 더 먼저 있었던 것은 제주라는 세력 자체가 더 커지고, 넓어지는 것이었다.
석삼이 간단히 말한 문장기에 대한 소감에 대해 창 선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였다.
“결국은 저 문장을 보는 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을 먼저 떠올리지 않겠나. 그리고 제주공께 새로이 영토가 될 땅의 상황을 알려야 하는 우리의 임무를 생각하면, 자네가 가장 먼저 말한 것이 지금은 가장 적합한 것이겠지.”
석삼도 창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명국에 닿으셨을 제주공께서 창 선장을 비롯한 다섯 배의 선장들과 항해사들을 불러 제주 남방의 섬들을 탐사하라 명하셨다.
위험한 일이기는 하나, 그들의 가슴을 부풀게 할 만한 임무였다.
안전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석삼마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흥미와 모험심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미지의 세계라고 할 정도로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주공께서 제주와 그 주변 나라와 영토를 그린 지도에서 본 적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저 제주공께서 그곳에 섬들이 있다 하여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지, 정말 그 위치에 섬이 있을지 누구도 확신하지는 못하였는데, 이번에 그곳을 탐사하게 되었으니, 묘한 흥분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첨벙.
노꾼들이 탄 작은 배들의 도움으로 포구에 배가 정박하자 닻이 바닷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데카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기상 상태만 나쁘지 않다면, 내일부터는 남쪽으로 항해할 예정이었다.
* * *
“포은 영감, 뭐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하굣길에 나선 포은의 뒤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책보를 품에 안은 댕기 머리 낭자가 있었다.
낯선 이는 아니었다. 같은 기술학교의 학생으로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포은은 앳된 낭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먼저 틀린 것을 고쳐 주었다.
“어찌 나를 영감이라 부르오. 나는 일개 학생일 뿐이오.”
30대 후반의 나이인 포은은 그의 나이에 절반쯤 될 어린 낭자에게 하대하는 대신 평대를 하였으니, 이는 두 사람이 같은 학생의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
그러고 보니, 무어라 부르게 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는 기술학교 학생이긴 하지만, 여전히 철공소의 공인(工人)이기도 했다.
기술학교 입학을 허락받은 후, 따로 청하여 철공소에서도 계속 일하게 해 달라 하였던 것이다.
어차피 열흘 중 삼 일은 기술을 배우고, 남은 칠 일도 오전과 오후로 학생들이 교대하니 어느 정도 일할 시간이 있었다.
모아 놓은 미찰이 없진 않았으나, 뒷바라지를 해 줄 사람이 없는 포은의 사정을 생각하여 공무교리 화극의 허락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배우면서 일하다 보니, 다른 학생들과는 어울릴 시간이 없어졌고, 그렇다 보니 학생들끼리 무어라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물론, 친한 학생들끼리는 형, 아우, 누이라 부르는 걸 듣긴 했지만.
“저희들끼리는 보통 학우라 칭하기는 하지요.”
“학우?”
학우(學友)라 함은 같이 배우는 벗이라는 의미니, 통할 만한 호칭이긴 했다.
‘하나, 남녀가 유별하고 장유(長幼)의 서열이 뚜렷하거늘 어찌…….’
포은의 목구멍 아래까지 치솟았던 말이었으나, 애써 억눌렀다.
생각해 보면, 공자께서도 벗을 구분함에 있어, 정직한 벗, 성실한 벗, 다식한 벗(友直 友諒 友多聞)으로 나누셨지,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는 않으셨다.
포은은 문득 실소하였다.
여전히 무언가를 판단하고 생각할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경전과 성인의 말씀부터 떠오르고 있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학우라, 좋은 말이오. 그럼, 학우 낭자, 내게 무얼 묻고자 하신 것이오?”
“여기서 말씀을 나누긴 그러니, 가까운 다점에 가시지요.”
“…….”
다점(茶店)은 ‘카페’였으니, 상업의 분화가 촉진되면서, 근래 들어 학교 근방 위주로 한두 곳씩 생기고 있었다.
특히 홍로현에는 고학교와 기술학교가 가까이 붙어 있어, 그 사이에 다점들이 여럿 생겨났다.
포은은 가 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학생들끼리 차를 마시며 서로 어울릴 때 다점에 간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가늠한 포은은 한 식경 정도는 시간에 여유가 있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점이라는 곳이 궁금하기도 했고, 자신이 포은임을 알기에 어려워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먼저 말을 붙인 낭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탓도 있었다.
물론, 낭자가 묻고자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컸다.
“그나저나 낭자의 함자는 어찌 되시오?”
“저는 홍길선이라 합니다.”
“음, 혹시 ……?”
“맞습니다. 제 큰 오라비가 교무교리지요.”
“아…….”
낭자의 이름과 집안을 알게 되니, 그녀가 달리 보였다. 홍 교리는 제주공의 측근 중 한 사람이며, 제주의 내정과 교육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게다가 외지에서 제주로 이주한 고려 백성들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양부 출신 백성들이 주인처럼 따르는 인물이기도 했으니, 공식적인 그의 직위에 비해 권세가 큰 인물이었다.
그런 이의 어린 누이인 학우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점은 포은으로서는 여러 가지 상상을…….
“그저 배움에 대해 묻고자 한 것이니, 제 큰 오라비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신다면 자제해 주십시오.”
마치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양, 포은이 헛짚으려는 것을 막았으니, 포은은 살짝 얼굴이 붉어져 손으로 쓰다듬는 척 가려야 했다.
그 후 다점에 갈 때까지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다점이 가까워 무안한 분위기까지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여러 다점 중 길선 학우가 들어가는 다점에 따라 들어가니, 그 안은 성행 중인 식당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상과 의자가 놓인 곳마다 헐거이 짠 발로 가려져 있어, 공간을 나누고 있는 것이 달랐다.
그중 한 곳의 발을 젖히고 들어가 길선 학우와 마주 앉으니, 포은은 새삼 불편함을 느꼈다.
제주에 없을 뿐, 가족이 엄연히 있는 포은은 외간 여인과 한 방(?)에 들어가는 게 도덕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시중을 드는 이가 다가왔고, 길선이 능숙하게 차를 청하곤 미찰을 네 점 내주었다.
“찻값이 꽤 비싸구려. 차 한 잔이 밥 한 끼와 같지 않소.”
“남의 집에 한동안 죽치고 앉아 있는 값이라 여기면 그리 비싸다 여길 순 없지요.”
“……그도 그렇구려.”
금세 다기와 더불어 따뜻한 차가 담긴 항아리가 나왔다.
쪼르륵.
길선이 소매를 조심하며 잔에 차를 따라 주니, 포은은 가벼이 목례하여 감사를 표하곤 차의 향을 음미하였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차향을 느끼니 미소가 절로 입가에 감돌았다. 차향 또한 꽤 좋았으니, 품질이 결코 낮은 차를 우린 게 아님이 확실했다.
그만하면 미찰 두 점의 값을 한다 여기며, 찻물로 입술을 축이니, 문득 길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본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을 묻고자 한 것이었소?”
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학교는 본래 기초적인 교과에만 충실했지만, 지지난 달에 새로이 교과가 추가되면서 사회라는 이름의 수업도 생겼다.
그리고 그 사회(社會) 교과의 서책은 ‘만행지론’이었으니, 그 수업은 곧잘 토론으로 변하곤 하였다.
기본적으로 만행지론은 이미 제주에 널리 퍼져 학생들 중에서도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은 자들이 많았고, 담당 교사도, 방침이 있었던 것인지, 강독과 강의 대신 비교적 자유롭게 논하게 한 덕분이었다.
물론,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그 시간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학생들 중 과반이 이미 머리 굵은 성인들인 터라, 곧잘 자신들의 생각과 해석을 말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종종 충돌하기도 하였다.
다만, 포은은 그런 토론과 논쟁에 잘 끼어들지 않았고, 주로 듣는 쪽이었다. 그로서는 그것이 진정한 공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회 교과를 통해 만행지론에 대해 논하게 되면서, 자연 인본(人本)에 대해서 논란도 있었다.
“사람이 근본이라 함 자체는 따로 부연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
정론적인 말로 간단히 마감하였으나, 길선은 딱히 대꾸가 없었다. 아마 포은이 더할 말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그에 압박감을 느낀 포은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밝혔다.
“천지가 만물의 부모라면, 인간은 만물의 영(靈)라 할 것이오. 영이 없는 만물은 이미 존재의 의미가 없으니, 인간이 있으므로 만물도 존재하는 것이오. 이는 비단 사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지니, 정치와 제도 또한 인간이 근본에 서지 않는다면 영이 없는 것과 같소. 그러니 인본으로부터 유래된 것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있겠으나, 인본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유자로서의 대답이군요.”
포은이 속내로는 자신만만해하며 답한 것에 길선의 반응은 다소 냉소적인 것이었다.
하긴,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첫 대답부터 ‘惟天地 萬物父母 惟人 萬物之靈(유천지 만물부모 유인 만물지령)’이라 하여 서경 주서 태서상(書經 周書 泰誓上)을 인용하였으니까.
유학에서 인본은 사상의 중심 중 하나였으니, 포은은 다른 건 몰라도 인본에 관해서는 유학의 기치를 얼마든지 따를 수 있다 여겼다.
“만행지론에 나온 인본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
“다릅니다.”
길선이 단정 지으며 말을 끊으니, 포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 스스로 배운 것이 의심스러워 단지 일개 공인으로서 제주의 세상을 새로 배우고 있긴 하나, 적어도 유학에 관해서는 여전히 스스로 고려 최고라 자부하였다.
한데 방년 안팎에 불과한 어린 처자가 유학에 관하여 자신을 이기려 드니, 가소롭고 불쾌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후에 길선으로부터 나온 물음에 포은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어린 처자라 가소롭게 어긴 것을 속으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합니까? 아니면, 악합니까?”
“……!”
뜬금없는 질문인 듯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핵심을 짚은 것이었다.
인간이 근본인 세상에서 인간의 본성을 가늠하는 것만큼 궁극적인 물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분법적인 구별 또한 아니었다.
본디 사람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의 세상을 다루는 정치와 제도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 본성이냐는 문제는 세상을 만드는 잣대와 유관한 것이었다.
본성이 선하다면, 그 선함을 키우는 정치와 제도가 유효할 것이고, 본성이 악함에 가깝다면, 그 악함을 제어하고 제거하는 정치와 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유학에서도 중히 여기는 문제이기도 했으니, 공맹의 도리를 좇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선설(性善說)을 추구하였다.
유학이 추구하는 왕도 정치가 바로 인간의 본성이 선함에 기반을 둔 것이니, 각자의 자리에서 선을 추구하면 성세가 찾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자로서 포은은 성선(性善)을 입에 올리려다가 차마 뱉지 못했다.
선한 인간의 본성 위에 세운 유학의 정치가 진정 성세에 닿은 바가 있느냐는 자문(自問) 앞에서 감히 그렇다 자답(自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낭자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여, 포은은 오히려 길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습니다. 물론, 누구나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지요. 하나, 북적대는 인간 세상의 개인으로서 인간은 악한 선택이 큰 이익을 얻을 경우에 그 유혹을 떨쳐 내기 어렵습니다. 아니, 비단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한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나 피해가 없는 한 악한 선택을 방조할 가능성 또한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를 두고 감히 악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적어도 선하지는 않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포은은 길선의 말을 들으며 앞으로 오랫동안 생각해 보고, 세상을 관찰해 볼 문제라고 여기다가, 문득 길선이 인성의 본질을 물은 것이 인본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하였다.
“하면, 인본의 세상은 악한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오?”
“정확히는 악한 정치와 제도라 해야겠지요. 악한 마음은 선한 정치와 제도에서는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인간의 본성을 바꾸지 못하니, 그 본성이 활개 칠 여지를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포은은 길선의 말을 들으며, 그가 살고 있는 제주를 떠올렸다.
자신이 아는 그 어떤 세상보다도 제주의 백성들은 자유와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니, 이는 자비로운 정치와 제도가 있는 덕일 것이다.
물론, 제주에도 부정한 관리와 죄를 범하는 악인들이 있었으나, 분명 고려나 왜국, 그리고 명국 등에 비하자면, 인간의 악한 본성이 드러난 경우는 몹시 적었다.
“이 제주는 선한 정치로 다스려지나, 거악(巨惡)이 아직 남아 있습지요.”
문득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패랭이를 쓴 젊은 남자가 발을 걷으며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낯선 얼굴이었다.
다만, 그 남자가 길선의 옆에 나란히 앉으니, 두 사람 사이에 닮은 구석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길선의 작은 오라비인 길래라 합니다.”
“……반갑소.”
반갑다 말하긴 했으나, 길래라는 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 것을 보면 길선과 미리 말을 맞춘 듯했으므로 뭔가 찜찜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비례인 줄은 아나, 그 유명한 포은 선생의 생각을 듣고 싶었기에 감히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용서를 해야 할 만한 일이 무에 있소?”
“길선이와 대화하시는 걸 뒤에서 엿듣고 있었으니까요.”
“…….”
“만약 크게 분노하지 않으시다면, 제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해 보시오.”
“저희는 지금 제주공께 올리는 상소를 작성 중입니다.”
“저희?”
“아, ‘저희’라 함은 고학교와 기술학교의 학생들로 이뤄진 모임을 의미합니다. 부르기 편하게 사롱이라 이름도 지었지요. 하하.”
여리한 길선과 닮았으면서도 굵은 눈썹으로 강인한 인상을 가진 길래가 웃는 낯을 보이며 사롱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롱(士瓏)은 선비의 옥 소리라는 뜻이니,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들 중 통합된 것이 있으면, 이를 세상에 밝혀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하였다.
“사롱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의견이 오간 것은 아니나, 단 하나에 대해서만큼은 금세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포은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앞서 그가 거악이 있다 말하였는데, 제주의 정치와 제도 중에 낯선 것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악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지는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직 제주에는 노비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하면, 자네가 말한 거악이 신분 제도를 뜻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물론, 제주의 신분제는 그 경계가 크지 않아, 노비도 양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누리고는 있지요. 하나, 이는 엄연히 제주공께서 선정을 베푸신 덕이지, 그 바탕에 선한 제도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길래는 사롱의 구성원들과 연서하여, 노비 제도를 폐하고, 제주의 세상에 직위만을 남기고 지위를 폐지해 달라 청원하려 했다.
“노비를 방량하는 것은, 언젠가 이미 제주공께서 목호의 일족을 노비로 삼으시며 성실히 따르면 방량해 줄 것임을 약조하셨다 하니, 제주공께서도 가납해 주실 가능성이 있을 것이나, 직위만 남기고 지위를 폐하라는 것은 제주공의 지위에도 미치는 이야기가 아니오?”
포은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으니, 길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제주공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임을 인정하였다.
지위를 폐하라 함은 결국 양민과 구별되는 귀한 족속을 두지 말라는 의미였다.
제주에 따로 귀족이라 명백히 구별할 자나 가문은 없었지만, 제주 4성의 가문이나 교리들은 사실상 귀족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어차피 공식적으로 귀한 족속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니, 제주공이 그들 또한 다른 양민과 다를 바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지위를 폐하는 것이 진행될 수 있지만, 문제는 바로 그 제주공이 제주 유일의 공식적인 귀족이라는 점이었다.
“하나, 이미 제주공께서 만행지론을 통해 인본을 설파하시면서, 신분의 고하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세상의 중심임을 말씀하셨으니, 제주공께서 그의 말씀을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신분 제도를 폐하셔야 합니다.”
“…….”
“그렇지 아니하신다면, 제주공께서 말씀하신 인본의 인(人)은 귀한 족속들, 혹은 제주공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포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분 질서를 강조하는 유자의 마음과 제주 공인으로서의 마음이 뒤섞인 와중에,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에 대해 젊은이들이 생각을 모아 세상을 바꾸려 노력한다는 것 자체의 충격마저 더했으니, 정신을 쉬이 가다듬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포은은 그 자리에서 생각을 정하는 대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대체 그 사롱의 상소에 대해 왜 내게 말하는 것이오? 설마…….”
“포은 선생이시라면, 사롱에 입회하시기에 차고도 넘칠 것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누이와 대화하시는 것을 엿들어 유자의 면모에서 많이 벗어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더욱 환영하는 바입니다. 더불어, 만약 포은 선생께서 사롱의 상소에 이름을 더해 주신다면, 제주공께서도 더욱 관심을 가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상소에 대해서도, 그리고 포은 선생께 대해서도.”
씨익, 크게 웃음을 짓는 길래를 보며 포은은 자신이 아직도 제주에 대해서 공부할 것이 많음을 절감하였다.
동시에 아마 함주에 남아 있을 그의 가족을 떠올렸으니, 특히 앞에 있는 길선 낭자와 비슷한 나이일 장남이 보고 싶었다.
장남 종성은 아비를 따라 유학에 매진하고 있을 터, 만약 그 아이가 제주의 세상을 보면 무어라 감상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아비가 제주의 세상에서 수십 년을 쌓은 유자로서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며 무어라 평할 것인가.
포은은 그것이 문득 궁금했다.
사롱의 상소가 제주공에게 전해진 것은 한참 뒤, 제주공이 제주에 귀환한 이후였다. 그리고 제주공의 반응은 사롱으로서는 실로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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