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82)
* * *
“사람의 본성이 선하겠습니까, 악하겠습니까?”
“악하지.”
너무나 쉽게 나온 대답에 하륜은 내심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구 심양전의 뒷산 아래 놓인 가옥에서 심양왕의 왕자와 더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심양전이 이미 요동으로 옮겨졌으나, 아직 왕가의 사람들 중에는 장남과 차남만이 일가를 옮겼을 뿐, 어린 왕자들은 남아 있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게 즐거우니까.”
“악한 것이 즐거우십니까?”
“아니, 즐거운 것만 택하는 마음이 쉽게 악해진다는 거지.”
왕자 이방원이 말을 뱉어 놓고는 하륜을 바라보았으니, 그의 표정에 뭘 그리 어려워하느냐는 핀잔이 묻은 듯했다.
“잘 봐.”
그러곤 씨익 웃더니, 앉은 채로 곁에 둔 활을 들어 화살을 먹였고, 이내 시위를 당겨 어딘가를 겨누었다.
팅! 퍽!
현이 놓임과 함께 화살이 날아갔고, 건너 별채 마루 아래로 사라졌다.
방원이 앉은 몸을 일으켜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가더니, 손을 마루 아래로 넣어 화살 끝을 잡고 들어 올렸는데, 그 화살은 커다란 쥐의 머리에 박혀 있었다.
“여봐, 즐겁잖아.”
화살 끝에 박힌 생쥐의 시체를 가져와 보이며 웃는 낯으로 말하니, 하륜은 실소를 지었다.
열 살 소년의 궁술이 참으로 신통하다는 생각을 잠시 동안 한 후에 왕자에게 물었다.
“쥐를 잡는 것이 어찌 악입니까? 쥐는 사람이 먹을 양곡을 파먹기도 하고, 들리기로 역병이 있는 곳마다 쥐가 번창한다 하니, 역병을 일으키는 미물이라…….”
“이게 쥐가 아니라, 사람이라도?”
“……?”
“그리고 내가 정말 이 쥐가 먹는 양식이 아까워서 죽인 것 같아?”
“…….”
하륜이 무어라 답하지 못하니, 화살에서 쥐의 시체를 발로 밟아 뽑아낸 왕자가 그의 곁에 도로 앉으며 낄낄 웃음을 흘렸다.
“선생은 어릴 적에 비 오는 날에 땅 위에 나온 지렁이를 밟아 죽여 본 적도 없어? 지렁이가 아니라 다른 미물들이라도 말이야. 그냥 보기 싫어서, 아니 보기 싫거나 좋은 걸 떠나 그냥 그곳에 있기에 죽여 본 적 말이야.”
왜 없을까.
벌을 잡아 침을 뽑은 후 개미굴 앞에 던져 놓기도 했고, 잠자리의 날개를 떼어 바닥에 기는 걸 한참 구경하기도 했었다.
“있지? 거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지. 그것이 설령 살생이라도. 한데, 그렇게 하면 못됐다고들 하잖아. 혼도 나고 말이야. 그래서 안 하는 거지, 아니라면 못할 이유가 없지.”
하륜은 쥐의 사체에 잠시 시선을 두다, 왕자가 그것을 사람에 비유한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하면, 치자는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들을 어찌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어쩌긴,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걸 분명히 해 두고, 죄를 짓는 놈들은 박살 내야지. 아, 그러기 위해서는 치자가 힘이 세야겠네? 그래서 선생이 치자가 강해야 한다고 했던 건가? 오호, 역시 선생은 똑똑해.”
툭툭.
어린 왕자가 하륜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였다.
하륜은 실소하였으니, 뭔가 과정이 이상하긴 했지만, 결론은 늘 자신과 비슷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만, 그가 바라는 절대적 군주는 강한 것에 더해, 그 스스로도 절제할 줄 아는 자여야 했다.
“알아. 지고의 자리에 서려면 그 정도 희생은 해야지. 근데 말이야, 내 생각에 죄짓는 놈 때려잡는 것만 해도 제법 오랫동안 신날 것 같거든. 세상에 쓸모없는 자들, 아니 없는 게 도움이 되는 놈들이 좀 많아?”
* * *
몽주가 통주에 닿아 교역에 관한 일을 진행하면서 명국의 상인들과 수시로 접촉하였다. 대만 섬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현대에서 이 시기 대만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게 어려웠기에, 명국에 온 김에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정보를 구할 수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대만 섬, 아니 이주(夷州)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그 섬은 남 중국의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한 섬이었다.
사실 현대에서 찾아보길, 삼국 시대 오나라 손권이 대만에 사람을 징발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는 기록 이후에는 16세기 서양 세력이 그곳에 거점을 둘 때까지 기록이 거의 없었고, 그저 원나라가 대만 섬 근방의 팽호제도(澎湖諸島)에 행정 기관을 잠시 두었다는 기록만이 전부인 터라, 중국인의 영토 의식에 대만 섬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가까운 거리만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예상과 크게 달랐던 것은 그 섬을 이용하는 중국인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었다.
이용한다 함은 이주(夷州)에 살거나, 들르는 것을 포함한 것이니, 동고서저의 지형 중 중국 쪽 연안 평야 지대에는 중국인들이 터전을 잡고 있었고, 밀무역을 위해 이주의 포구를 쓰는 상인들도 무척 많았다.
게다가 비단 중국인 외에 남만(南蠻)의 상인들도 명국과의 밀무역을 위해 이주를 이용하였으니, 그저 현대에서 고산족이라 통칭되는 원주민들만 사는 섬이라 여겼던 대만 섬은 예상과 달리 외래인들로 제법 활기를 가진 곳이었다.
몽주로서는 그리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주를 점령하실 생각이셨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탁기의 물음에 몽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나, 많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주에 정착한 중국인들이 있더라도, 적다면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수가 많은 데다, 오가는 이들도 많다면 불가능했다.
여기서 해결이라 함은, 명국에게 제주의 이주 점령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거나, 가급적 늦게 전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태자와 은밀히 손을 잡았다곤 하나, 명국의 턱 밑에 자신이 영토를 개척한다면 이를 곱게 볼 리가 없지 않은가.
비단 지금의 황제뿐만 아니라, 태자도.
“하면 이제는 포기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대만 섬은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류큐 제도가 있긴 하지만, 그 위치는 남방으로 진출할 거점이었고, 대만 섬 자체도 탐나는 땅이었다.
당대에 국가적 지배가 없는 그만한 크기의 땅이 어디 흔한가?
특히 제주를 중심으로 가까운 곳 중에는 대만 섬이 유일했다.
비록 한반도보다도 산지의 비율이 높다곤 하지만, 서안에 몰려 있는 평야는 아열대의 옥토였으니, 여러 작물을 키우기에 적합했다.
광물 자원 역시 요동 및 만주에 비해 채굴하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석탄, 대리석, 유황, 그리고 석유가 매장되어 있으니 훗날 유용하게 쓰일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이야말로 몽주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달리 방도가 있으십니까?”
“좀 돌아가야지.”
“…….”
탁기에게 바로 말하진 않았지만, 몽주가 떠올리고 있는 방법은 ‘대리 전쟁’이자 ‘공포의 섬’이었다.
물론, 이 또한 원주민들과 협상이 잘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니, 구체적인 시도는 아직 많은 시간과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통주에서 공식적인 교역을 행한 후, 몽주의 선단은 곧바로 바다로 나섰다.
딱히 명 조정의 인사나 태자와 만날 예정은 없었고, 보다 중요한 방문이 연이어 있기 때문이었다.
장강 하구를 벗어나 명국의 연안이 보이지 않는 먼 바다까지 나간 몽주의 선단은 백해의 해류를 타고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 * *
“그나저나 제주의 물산은 어떤가?”
피곤한 음성으로 하문하니, 연왕부 동지사(同知事)가 녹계를 바치며 말하였다.
“지지난 달에 들어온 물품은 이미 처분하여, 은 이천삼백여 근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연왕 주체는 녹계를 훑곤, 대략 숫자가 맞자 고개를 끄덕이며 동지사를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께서 기뻐하셨겠군.”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시며, 왕야께도 이문을 남기라 하명하셨습니다. 하여, 삼백 근의 은을 보내지 않고 왕부에 두었으니, 필요하신 곳에 마음껏 쓰십시오.”
연왕부의 동지사는 태자의 사람으로, 연왕부에 파견되어, 공식적으로는 왕부의 살림을 고문(顧問)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연국으로 들어오는 제주의 물산을 유통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그 은은 다시 전하께 보내게. 내가 전하를 돕는 것은 전하께서 언젠가 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지, 내 이득을 바라서가 아니네. 은을 남겨 두면 오히려 내 뜻을 빛바라게 하는 것이니, 모두 가져가게.”
“하오나, 태자 전하의 뜻이 있었던지라…….”
“아니래도.”
연왕이 끝내 거부하니, 동지사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애써 숨기곤 고개를 숙여 응하였다.
“제주의 물산이 조만간 또 들어올 때가 된 것으로 아는데, 언제쯤 오겠는가?”
“이미 응천부에 도착해서 일을 보고 있다는 소식을 선편으로 받았습니다. 아마 수일 안에 삼하도에 닿을 듯합니다. 아, 근데 이번 방문은 제주공이 직접 이끈다고 합니다.”
“그래? 내가 한번 그를 만나 봐도 되겠는가. 태자 전하의 일이시나, 그 일을 돕는 입장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 두는 것이 나을 듯하네만.”
연왕이 청하니, 동지사가 잠시 생각을 가늠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께서 연왕과 제주공이 만나는 것을 불허하라 명하신 것도 아니고, 연국에서 제주의 물산을 몰래 유통하니, 연왕도 제주공을 만날 이유가 분명 있었다.
“하면, 제주공이 삼하도에 닿거든 자리를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동지사에게 감사를 표한 연왕은 문득 찌뿌둥한 표정을 지으며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피곤하십니까.”
“그렇긴 하군.”
“왕부에 오신 이래, 쉬지 않고 왕부의 사정을 연구하신 탓일 것입니다. 이만 쉬십시오.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그러게. 앞으로도 태자 전하를 위해 애써 주게.”
웃는 낯으로 동지사를 보내고 난 후, 연왕은 정말 피곤한 듯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였다.
하나, 곧바로 휴식을 취하러 가진 않았다.
잠시 후, 태감이 새로운 방문자가 입실할 것임을 알렸다.
“들어오라.”
들어온 이는 승려였으니, 도연이었다.
“동지사가 물러났다 하여 왔습니다.”
“그래, 알아보았는가?”
“네, 동지사의 지난 거동을 살펴보니, 그가 직접 상인들을 챙길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왕부에서 주선한 상인들을 의심없이 맞이하였고, 따로 상인들과의 만남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잘되었군. 하면, 상인들은 모두 왕부에 줄을 서게 만들 수는 있겠는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리되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세 곳의 대상이 찾아와 다음 번 거래에 참여케 해 달라 청하였습니다.”
도연의 말에 연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동지사가 상업에 익숙한 자였다면, 제주의 물산을 원하는 상인들 모두를 왕부에 얽매게 만들기 어려울 수도 있다 여겼는데,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기야, 태자의 처가에서 구한 유자 출신으로, 태자에 대한 충성심은 높으나, 관인으로서의 이력이 적고, 상업에 대해서는 더욱 눈이 어두운 자임을 알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소 짓던 연왕이 문득 도연에게 다시 물었다.
“상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요구에 응하던가?”
“그 또한 대개 응하였습니다. 어차피 제주의 물산이 연국에 계속 들어오니, 그들 또한 연국에 사람을 두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잘되었군, 잘되었어.”
연왕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더 진해졌다.
그가 태자로 하여금 제주의 물산을 밀무역하게 부추긴 바탕에는 역시나 그에게 이로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로움은 여러 가지이나, 그중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은 바로 연국으로 상인들이 모이는 것이었다.
중화의 영역 각지에서 사탕을 비롯한 제주의 물산을 얻기 위해 가까운 곳부터 발 빠르게 모여드니, 각 상인들이 십여 명 혹은 수십 명의 수하들만 대동하여도, 왕부 근방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이 왕부를 찾는 것은 제주의 물산을 거래할 권한을 왕부에서 배부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왕부는 여러 가지 이득을 챙길 수 있었으니, 왕부에 직접적으로 증루(贈漏)하여 제주의 물산을 얻을 권한을 취하고, 또 그들이 연국에 오가고 머물면서 집과 사람을 사서 쓰니, 자연 연국 내에 돈이 돌아 활기를 띠었다.
물론, 그런 이득이 얼마나 큰지는 연왕이나 도연도 셈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태자가 제주의 물산을 통해 얻는 이문에 비하면 별게 아닐 수도 있었다.
하나, 연왕은 조금 달리 생각하였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지 않고 잠든 돈은 그저 죽은 돈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오래전 고려의 하관이었던 제주공과 만나 중상중공의 경영책을 들은 후, 그 또한 관이오의 사상을 공부하고, 그가 부국으로 이끈 제나라에 대해 연구한 바, 결국 부국이란 그 나라에 안에서 도는 금은의 규모가 큰 것이고, 그 규모를 차근히 키우는 것이 부국을 얻는 방법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똑같이 억만금을 가진 두 나라가 있을 때, 한 나라는 부자들이 손에 쥐고 있고, 다른 나라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그 돈이 흘러다닌다면, 전자에 비해 후자가 훨씬 강대한 나라라는 이치였다.
어차피 모종의 목적이 있어, 제주의 물산이 가져다주는 직접적인 이문을 태자에게 모조리 양보한 바, 연왕은 제주의 물산을 통해 연국 내에 자금이 유동하고 점점 규모가 커지기를 유도하고자 했다.
연국 내 사정 또한 적합했으니, 북부 요동에 대한 정벌이 조정에서 사실상 결론 난 덕에, 연국 또한 그것을 핑계로 여러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철을 대량으로 주조하기도 하였고, 군병을 적잖이 모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정 덕이었다.
그에 필요한 자금 역시 제주의 물산을 노리고 모여든 상인들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형님께서 죽은 돈을 쌓는 동안, 나는 살아 있는 돈을 움직일 것이야. 언젠가 때가 되면 누가 더 큰 이익을 얻었는지 하늘이 판가름해 주지 않겠나.”
“전하께서 최선을 다하신다면, 하늘은 반드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연왕과 도연 사이에 아직은 묘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 * *
“연왕이 왕부에 와 계셨소?”
“그렇소. 오신 지 이제 이레가 지났소.”
삼하도 북서쪽에 위치한, 새로 정리한 포구에서 제주의 물산을 하적하고, 태자가 연국에 파견한 동지사와 만나 그 대금을 계산하고 나니, 동지사가 문득 연왕이 그를 만나길 원한다 전해 왔다.
이미 반년 전에 연왕이 응천부를 떠나 연국으로 가게 되었음은 알고 있었고, 그 공식적인 이유와 그 물밑에 흐르는 내연 또한 알고 있었지만, 정작 연왕이 이미 연국에 입성한 것은 미처 몰랐다.
나름 중요한 변화를 먼저 알지 못한 것에 대해, 정보를 다루는 차현유에게 아쉬웠으나, 시대가 시대인만큼 정보망도 없는 명국의 사정을 빠른 시간 안에 구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왕을 만나 보는 것 자체는 피할 이유가 없었다. 연국에서 밀무역을 진행하는 만큼, 아무리 교역의 상대가 아니더라도 연국을 다스리는 연왕과 친분을 다지는 건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만, 연왕이 겉보기와 달리 마음까지 태자에게 고개를 숙인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있던 몽주는 연왕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남을 청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연왕이 삼하도로 건너온 건 저녁 무렵으로, 예상과 달리, 작고 수수한 노선을 타고 왔으니,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연왕을 대면한 몽주의 첫 소감은 ‘짜식, 많이 컸네.’였다.
소화자로 변장하여 자신을 골릴 때만 해도, 어린애 티가 많이 났었는데, 몇 년 사이에 장성하여 이제는 겉보기엔 다 큰 청년이었다.
하기야, 곧 나이가 열여덟에 이를 것이니, 성인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랜 만이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하.”
검은 피부라 그런지 연왕이 씨익 웃음 지으니, 청결한 하얀 이가 눈에 띄었다.
“지난날에도 그대 제주공이 평범한 자는 아니라 생각하였지만,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될 줄은 미처 몰랐소.”
“과찬이십니다. 그저 작은 땅을 얻었을 뿐이지요.”
“그 작은 땅에서 나는 것들 때문에 태자 전하와 내가 대명의 황제의 눈마저 가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몽주는 겸양을 유지하며 살짝 숙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 겉으로 대범해 보이는 연왕일지라도 지난날 자신을 골탕 먹였던 때의 성격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역사의 영락제를 봐도, 가능한 여타의 빌미도 주어서는 안 되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동지사는 연왕을 포구 근방에 새로 지은 교역청으로 안내하였고, 몽주도 그 뒤를 따랐다.
삼하도의 교역청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고, 근방에 있는 창고와 경계가 서지 않아, 아직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지체 높은 황자이자 친왕이 잠시라도 거하기에 부족하지만, 연왕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안내받은 대로 자리에 앉았고, 몽주도 상석의 연왕을 좌측으로 두는 자리에 앉았다.
연왕은 금번에 들어온 제주의 물산에 대해 묻는 말로 대화를 이끌었고, 몽주도 예의 바른 언행으로 공손히 답하였으니, 분위기는 훈훈하지는 않을지언정, 모나지도 않았다.
하나, 한 식경이 채 지나기 전에 연왕이 새로운 대화거리를 꺼냈으니, 동지사가 일 때문에 자리를 뜬 직후였다.
“고려 심양왕이 대명의 번왕직을 받아 요동왕이 되었음을 잘 알 것이오. 그리고 어째서 그에게 요동왕위를 내린 것인지 그 이유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고.”
“명국에서 요동 북부의 구원 세력을 정벌하려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소. 구원의 무리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 제법 사나워, 천자께서 또 다른 돌파구를 구하고자 하니, 그것이 바로 요동이오. 그곳에 큰 세력을 지난 이가 나하추이니, 요동왕이 지난날 나하추와 크게 싸워 이긴 바 있음을 알고 그의 실력을 빌리고자 하오.”
연왕은 순순히 요동왕위에 관한 사연을 말해 주었다. 물론, 대단한 비밀이랄 건 아니었다. 명국의 북벌 계획을 아는 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요동왕이 명국과 더불어 북벌한다면, 제주공도 요동공을 도와 참전할 의향이 있으시오?”
“그건…… 쉽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요동왕과도 논의해 봐야 할 일이지요.”
“그렇소? 아쉽군. 지금 조정에서는 요동왕이 지난날 고려 요동공을 칠 때, 화포를 동원한 것을 알고 요동왕의 전력에 기대하는 바가 크오. 고려에서 화포를 능히 쓰는 것에 대해 더는 문제 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지. 하나, 사실 그 화포들은 제주공의 것이 아니오?”
“그렇긴 합니다.”
사실 고려의 화포가 제주의 화포라는 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명국 조정에서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하나, 그에 대한 의문은 더 전개할 수 없었으니, 연왕의 입에서 뜬금없는 제안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요동왕을 도와 참전할 생각이 없다면, 나를 도와 북벌에 참가할 생각은 있소?”
“…….”
“그리해 준다면, 내 제주공에게 큰 선물을 줄 것이오.”
“…….”
몽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연왕이 굳이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것일까. 단지 화포 때문에? 그럴 리는 없었다. 무거운 청동제 화포지만, 명국은 이미 화포를 전력화한 지 오래였다.
혹시 전장에 끌어들여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고 죽게 하려는 속셈인가 싶었지만, 그럴 거라면 이미 더 좋은 기회들이 연왕에겐 있었다.
명군을 수몰시킨 범인이라 천자에게 고하면, 명국이 체면 때문이라도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일전에 고신걸을 데려가기 위해 명국에 왔을 때 죽이는 게 더 편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태자와 손을 잡은 게 분명한 이상 자신을 해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공에게 줄 선물이 뭔지 궁금하진 않으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요동을 주겠소. 지금의 요동왕 자리에 공이 앉는 것이오.”
몽주는 말없이 연왕을 바라보았다. 그건 이 자리에서 보일 수 있는 기분 나쁨의 가장 큰 표현이었다. 연왕이 무어라고 요동왕을 교체하는 것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연왕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아니 아예 느끼지 못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요동 북부를 천자께서 얻으실 수 있다면, 지금 요동왕의 영역 또한 언제든 명국의 것이 될 수도 있소. 하나, 그것은 태자 전하나 나로서는 바라지 않는 일이니, 제주의 물산과 교역하는 것이 들통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오. 반대로 그대가 요동왕이 된다면, 제주의 물산은 곧 요동의 물산이 될 것이니, 태자 전하와 내게는 유리한 형국이라 할 수 있소. 어떻소?”
“태자 전하께서 응하신 일입니까?”
“그건 아니오. 일단 내 생각일 뿐이고, 그대가 응한다면 태자께 청해 볼 요량이오. 혹시 전하께서 가납하신다면 응하실 것이오?”
몽주는 잠시 생각하는 양 고개를 들어 교역청의 천장을 보다가 다시 연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고개가 서서히 좌우로 흔들렸다.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 * *
“역시나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인물인가 보오.”
“그럴 것입니다. 나찰과 같은 운명을 지닌 자가 응할 리가 없지요.”
“나찰이라…… 악귀나찰(惡鬼羅刹)이오, 수호나찰(守護羅刹)이오?”
“저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날 밤 연왕부에서 오간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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