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84)
초겨울, 개경 왕성은 날씨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오가는 사람들이 적은 건 아니나, 그들의 어두운 표정과 긴장한 듯한 몸놀림과 빠른 발걸음은 마치 모두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했다.
2층 객잔에서 시전 거리를 내려다보던 염흥방은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곤 몸을 돌렸다.
“오셨군요.”
자신에게 먼저 읍하는 이를 보며 염흥방도 마주 읍하였다.
“따로 뵙자고 청하여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좌승직께서 청하신 것은 곧 전하께서 청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염흥방의 겸양에 좌승직이 살짝 미소를 보였다. 염흥방의 깍듯한 예의가 맘에 들었던 것은 물론, 자신이 청한 이유가 금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줄 아는 현명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내시부 정5품에 불과한 좌승직(左承直)이지만, 염흥방이 예의를 차린 것은 그가 금상의 최측근이고,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어 내시부의 수장이 되었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선왕이 내시부 환관에게 시해를 당한 일로 인해, 내시부가 해체되었다가 중란 후에 다시 부활하였는데, 그 와중에 내시부의 고관직은 모두 영산왕의 측근이 차지하였고, 실질적으로 왕을 보필하는 환관 출신 내시들은 정5품 이하의 당하관직만을 얻게 되었다.
어쨌든 그런 좌승직이 궁 밖에서 은밀히 만나기를 청하니, 염흥방은 금상이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 여겼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영산군왕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
좌승직의 말에 염 현백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속내로는 동의하는 바였으나, 엄연히 영산왕의 측근인 그로서는 겉으로 그것을 표할 수는 없었다.
“금상께서 아직 어리시나, 그렇다고 영산왕의 부정을 모르시진 않습니다. 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산과 같이 쌓이고 계시지요.”
정치적으로 거세된 금상이었지만, 같은 왕성 안에서 영산군왕이 날마다 주연을 열어 고성방가하고, 궁녀마저 자신의 시녀인 양 희롱하니, 13살 어린 금상이 모른 척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수준이었다.
“영산왕 저하께서 근자에 근심이 깊어, 그 상심한 심정을 푸시고자 하다 보니, 다소 과한 경우가 있긴 하였지요.”
염흥방이 애써 말을 돌려 조심스럽게 영산왕에 대한 비판을 하자, 좌승직이 씁쓸한 어조로 답하였다.
“염 현백,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그대도 유자 출신으로 신하의 도리를 잘 알고 있을 터, 지금 영산군왕의 작태는 그 도리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 아닙니까.”
“…….”
좌승직이 직설하여 말하니, 염 현백도 더는 영산왕을 두둔하기 어려웠다.
영산왕 신돈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역시나 제주군공이 바다에서 위력을 행사하여 그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 때부터였다.
하나, 나름 정치적 묘수를 두어, 제주공과 좌제우휴의 결의를 맹약함으로써, 제주공의 위력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그 덕분에 영산왕은 고려 내의 정치적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하나, 그도 얼마간일 뿐, 어느 순간부터 영산왕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너졌으니, 그건 제주군공이 고려 내에 상단을 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주공이 고려 상인들의 방해를 고하며 도와 달라 영산왕에게 청한 뒤부터였다.
영산왕은 좌제우휴의 결의를 맺으며, 이미 고려 내 상업 활동에 대해 약속한 바가 있었으므로, 제주공의 상단을 방해하는 고려 상인들을 막기 위해 지방 수령들에게 상인들을 감독하라 명하였다.
사실 그런 명을 내린 이유는 제주공이 고려의 상업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계기로 다시금 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제주공이 가진 위력을 빌려 지방의 수령에게 명령을 내림으로써 중앙에서의 정치력을 지방까지 확대하려 했던 것이다.
한데, 통하지 않았다.
다들 말로는 상인들을 감독하고, 그들의 월권을 단속하겠노라 답을 보냈지만, 실상 영산왕의 명을 따른 지방 수령은 거의 없었다.
아니, 심지어 대놓고 딴짓을 하는 수령들이 적지 않았으니, 분노한 영산왕이 금상의 권한을 빌려 그 수령들을 파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리하여 보낼 관원이 모자라 그러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
하여, 영산왕은 분기를 억누른 채, 말을 듣지 않는 지방 수령들에게 일일이 파발을 보내 명을 따를 것을 재촉하였는데, 그러던 중 제주공이 자력구제를 통보하고는 제주의 군병을 동원하여, 고려 상인들과 싸움을 크게 벌였다.
제주공이 이기는 것이야 당연한 노릇이겠으나, 그 와중에 제주공의 고려 삼남 지방에 대한 장악력이 크게 높아졌으니, 영산왕의 명은 모른 척하던 지방 수령들마저 제주공만큼은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일은 영산왕에게 속이 쓰리다 못해, 좌절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제 지방 수령들에 대한 장악은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고, 제주로의 고려 삼남 지방 예속은 대세적인 흐름이 되었다.
특히 제주에서 고신걸이라는 자가 온 뒤로 제주의 상단이 더 활기를 띠고 활동하여, 큰 고을의 상인들뿐만 아니라, 작은 고을들 사이를 움직이는 보부상들까지도 규합했다.
동시에 지방 수령들마저 뇌물과 협박으로 구워삶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으니, 눈뜨고 코 베인 격으로 나라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쯤이면,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항의해야 마땅하고, 항의가 소용없다면 실력 행사에 나서야 했다.
실제로 영산왕의 내각에서 그에 대한 논의가 있기도 했지만, 결론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함이었다.
지난날 본토에 아무런 세력도 없었던 제주공이 바다에서 위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던 게 영산왕이고, 그의 내각이었다.
한데 이제 고려 삼남에 큰 세력을 가지게 된 제주공에게 덤빌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국외의 도움을 강구해 보려고도 했지만, 요동의 심양왕으로부터는 구체적인 제안을 해 보기도 전에, ‘우리는 흉심을 털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는 원천봉쇄성 답을 받았고, 명국으로는 사신을 보내는 것조차 두려웠다.
육로는 심양왕이 막고 있고, 바다는 제주공의 것이니, 만약 섣불리 명국에 제주공을 대상으로 하는 모계(謀計)를 전하려다가 들통난다면, 제주공에게 아주 좋은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궁하기 그지없는데 솟을 구멍도 보이지 않으니, 영산왕의 심기는 크게 무너졌고, 결국 그가 지난날 그렇게나 비웃었던 선왕과 비슷한 추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염흥방은 당금 영산왕의 사정을 떠올리다가 문득 좌승직을 보며 말하였다.
“솔직히 말씀하자 하셨으니, 저 또한 솔직한 답변을 기대하며 묻겠습니다. 오늘 저를 청하여 만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단지 영산왕을 함께 비난하기 위해 만나자 하신 것은 아닐 터…….”
“지금 금상께는 아무런 힘도 없으신 바,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난날 고려의 군왕과 같은 치세를 여시긴 어려울 것입니다. 어차피 고려의 실권자가 따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차라리 고려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자로 하여금 영산군왕을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좌승직은 자세를 바로 하며 답하였으니, 정말로 솔직한 것이었다.
염 현백은 속내로 놀란 마음을 숨기곤, 다시 물었다.
“좌승직께서는 제가 누구의 덕에 현백의 지위에 앉게 되었는지 잊으신 모양입니다.”
“현백께서 영산왕을 따라 공을 세워 현백의 고위를 얻으신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현백은 본디 유자로서 고려에 출사하였고, 영산왕을 따르긴 했으나, 이는 역당 이인임에 반하여 영산왕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제주공과 인연이 깊고, 또 심양왕과도 친분이 있으니, 실상 현백은 비단 영산왕의 휘하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크게 쓰였을 것입니다.”
염흥방이 제주공 석몽린과 인연이 깊은 것은 잘 알려진 바였고, 심양왕과도 알게 모르게 친분이 있었으니, 지난날 심양왕이 경흥후로서 함주에 자리했던 시절에 신돈과의 동맹을 위해 수시로 함주를 방문한 덕이었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지금은 제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니, 다른 말부터 꺼내겠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좌승직의 독단입니까, 아니면 금상께서도 공감하시는 것입니까?”
염 현백이 강렬한 눈빛으로 직시하며 물으니, 금상의 연루 여부를 묻는 그 말을 들은 좌승직의 얼굴에 일견 불안함이 스쳤다.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염 현백이 그대로 영산왕에게 고하여, 큰 난리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불안이었다.
하나, 좌승직 또한 무작정 염 현백을 택하여 말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판단을 믿고 말하였다.
“저를 비롯한 몇몇 내시들이 공론하기는 하였으나, 금상께서도 이미 영산왕에게 지치셨으니, 저에게 ‘어차피 따로 권세가가 있어야 한다면, 공손한 권세가를 곁에 두고 싶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
염흥방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의 금상에겐 역시나 군왕의 자질이 크지 않음을 재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영산왕이 괘씸하여 두고 볼 수 없다면, 그를 밀어내고 군왕의 위신을 회복할 각오를 다져야 마땅하거늘, 다른 권세가를 끌어들일 생각부터 하였으니, 한숨이 나올 법했던 것이다.
하나, 이는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유자로서의 판단이 그러한 것이었고, 고려의 작은 권세가로 자리 잡은 그의 입장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염흥방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가 좌승직에게 다시 물었다.
“하면, 누구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영산왕을 대신할 만한 이는 단 둘뿐입니다.”
그 둘은 당연히 심양왕 이성계와 제주공 석몽린이었다. 앞서 좌승직이 염흥방과 그 두 사람의 인연과 친분을 들먹이기도 했으니, 염흥방은 자신을 통해 그 두 사람 중 하나와 내통하려 한다 여긴 것이다.
한데, 좌승직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는 염 현백이십니다.”
“……!”
“현백이라면, 심양왕이든 제주공이든 누군가의 힘을 빌려 영산왕을 축출하실 수 있을 것이고, 그 두 사람과 인연이 있으니, 고려 왕실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현백께서도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가 되어 적어도 개경과 경기 정도는 다스릴 수 있을 테지요.”
간단히 말해서, 좌승직의 제안은 염흥방에게 왕실의 수호자 역할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왕실을 유지하고, 금상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 이상이 아니었으므로, 그 외의 일은 염흥방에게 모두 맡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염흥방은 태연하려 노력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입술을 깨물며 노심초사하는 속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좌승직 또한 속내로 초조함을 품고 염흥방을 살펴보았다.
염흥방이 영산왕의 당여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항상 유자 출신답게 다른 당여들과는 달리, 왕실에 예의를 갖추었다.
더구나 여러 어려운 협상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여 온 지난 행적에 비춰 봤을 때, 그에게 이 난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 판단하였다.
좌승직은 염흥방을 선택한 것이 옳은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해합니다.”
이 자리에서 가타부타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욕심과 명분 사이, 깊은 고민이 쌓인 날이었다.
* * *
요동을 떠날 때, 몽주에게 쥐어진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양왕은 몽주의 요구 조건에 최종적으로 승인도, 거부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결정은 몽주가 제주에서 ‘북벌 성공의 증거’를 가져와 보인 이후로 미뤄졌으니, 진정 북벌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판단되면, 그 후에 몽주의 조건에 딸린 께름칙함마저 감수할 작정이었다.
하여, 몽주는 심양왕과의 만남 이후, 곧바로 제주로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가 제주에 닿은 것은 요하 포구를 떠난 지 사흘 만이었다.
제법 거센 북풍을 등 뒤로 받은 덕이었으니, 다시 요동으로 갈 시간을 그 두 배로 잡아도, 제주에서 닷새 가까이 머물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물론, 전근대 시기에 촌각을 세어 ‘스케줄’을 잡을 수는 없었으니, 제주에서 이삼 일 안에 다시 요동으로 출항해야 했다.
“이게 뭔가?”
몽주는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훑고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홍로현 포구에 내려, 가족과 식사를 하면서 잠시 해후의 시간을 가지고, 임신한 앵도의 건강함을 확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몽주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홍길도 교리의 보고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뜻하지 않은 상소문을 건네주어 읽었던 것이다.
“고학교와 기술 학교의 학생들 중 일부가 연서하여 올린 상소입니다. 그들은 노비를 해방시키고, 제주의 백성들 모두가 따로 위아래가 없이 평등함을 군공께서 천명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 역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군. 한데, 내가 제주에 오자마자 이것을 자네가 부리나케 들고 온 걸 보면, 자네도 이 상소에 동감하는 모양이야?”
몽주의 물음에 홍 교리가 고개를 숙이며 인정하였다.
“본디 군공께서 목호의 일족을 노비로 거두시면서 훗날 방량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군공을 성실히 따랐음은 물론, 약속하신 시일도 되었으니, 그 노비들을 방량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데, 소신의 생각으로는 이참에 제주의 모든 노비들을 방량할 수 있도록 명하신다면, 군공의 공업이 한층 높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주의 모든 노비라 함은, 목호의 일족 출신들 외 몽주에게 속한 소수의 노비뿐만 아니라, 제주 4성을 비롯한 호족들에게 매인 노비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지금 몽주가 제주에서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그저 명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노비들을 방량할 수 있을 터이니, 홍 교리는 몽주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한데, 여기에 써 있기로, 직위만을 남기고 지위를 폐하라 하는데, 이는 나 또한 포함하여 말한 듯하군.”
“실상 그렇긴 합니다. 하나, 공께서 가지신 위업은 결코 제주군공의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니, 제주군공의 지위를 폐하고, 그 직위로서만 기능한다 하더라도, 공의 위업에는 한 점의 상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홍 교리의 말은 귀족으로서의 제주군공이 아니더라도, 제주와 그 외 영토를 다스리는 직위로서의 제주군공은 남을 것이고, 지금 몽주가 가진 권력은 지위가 아닌 직위에서 비롯된 것이니, 권력의 누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몽주는 홍 교리를 보며 웃음을 보였다.
홍 교리는 참으로 당대인의 한계를 벗어난 자였다.
이미 스스로 ‘호민론’을 깨달아 보임으로써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제주군공의 지위를 폐하라 청하는 것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상소를 올린 자들도 실로 대단한 발상을 한 자들이었다.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깨달음은 결코 아니었다.
아미 지난날 같잖은 왈패들조차도 왕후장상의 씨를 운운하지 않았던가.
하나, 대부분의 당대인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누구든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는 수준이지, 왕후장상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수준은 결코 아님을 생각하면, 이 상소를 올린 학생들도 대단하다 싶었다.
“혹시 공의 위업에 위태로움이 있을까 저어하신다면, 공의 지위만 남겨 두고, 그 이하에 따로 높고 낮은 지위가 없음을 천명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상소한 자들은 만족할 것입니다.”
몽주의 생각이 깊어지는 듯하자, 홍 교리가 그렇게 한마디 더 거들었다.
어지간히도 그 상소를 몽주가 가납하길 바라는 듯했다.
그에 몽주는 다시 홍 교리를 보며 미소를 지어 준 뒤, 상소를 다시 눈여겨 살펴보았다.
내용의 뒤로 연서한 자들 수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몽주가 홍 교리에게 다시 말하였다.
“여기 보니, 자네의 아우와 누이인 듯한 이들의 이름도 있군.”
“그러합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상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제 아우와 누이가 상소에 참여한 것 또한 상소를 받은 이후에야 알았습니다.”
“누가 뭐라던가. 음? 여기 포은 선생의 이름도 있군? 허어, 참…….”
몽주로서는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어질 노릇이었다.
최근 포은이 아무리 ‘유학 근본주의자’적인 면모에서 탈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분 제도를 타파하자는 주장에 동의하여 상소에 참여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몽주는 그 상소문의 바탕에 깔려 있는 저의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홍 교리, 이 상소문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불러오게.”
“예?”
홍길도는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상소에 못마땅해한 몽주가 그들을 핍박하려 하는 건 아닌가 우려한 것이다.
“이들을 잡아 가둘 생각은 아니니, 걱정 말게. 한 시진 안에 다 모았으면 좋겠군.”
“아, 알겠습니다.”
홍 교리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답하곤 이내 서둘러 물러났다.
마흔 명이 넘는 이들을 한 시진 안에 다 데려오기 위해서는 급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홍 교리가 떠난 뒤, 다른 교리들이 오기 전까지 몽주는 상소를 다시 읽으며 웃음을 흘렸다.
“훗, 쉽게도 귀한 족속이 되려 하는군.”
물론, 지금 몽주가 말한 귀한 족속이란 신분적 질서의 귀족이 아닌, 정치 ‘엘리트’로서의 귀한 족속이었다.
현대 한국에도 무수히 많은 ‘그분’들, 그리고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선진 정치를 구현한다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그런…….
* * *
서너 명의 교리들과 만나는 동안 그 상소문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사롱’이라는 모임을 작당하였다든지, 주도자들의 성분이 어떠한지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몽주가 자리를 비운 동안, 교리들 사이에서 그 상소를 두고 논란이 있었기에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한 시진이 다소 지난 시간에야 홍 교리가 급히 입실하여 사롱의 구성원들을 다 불렀다고 전하였다.
몽주는 집무실 밖 마당으로 나가, 그곳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 앞에 섰다.
“빠짐없이 다 모인 겐가?”
“그러합니다.”
다들 학생들이라 하니, 대부분 학교에 있을 시간이긴 하였으나, 오전과 오후로 나뉜 기술 학교의 경우에는 적지 않은 자들의 행방을 따로 찾아야 했을 터인데도, 잘도 불러 모은 모양이었다.
몽주는 홍 교리에게 잘했다고 간단히 치하하고는, 모인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이미 수군거림을 멈추고 몽주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여 흐르고 있었다.
그중 몽주가 먼저 시선을 멈추고 응시한 사람은 포은이었다.
“오랜 만이오, 포은 선생.”
몽주가 아는 체를 하니, 포은이 말없이 읍하여 인사하였다.
학교가 아닌 일터에서 불려 온 듯 공인의 차림이었으나 지저분한 구석 없이 정갈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하문하십시오.”
“선생은 그 상소에 완전히 동의하여 이름을 더한 것이오?”
포은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한 번 호흡을 고르며 시간을 잠시 보낸 후에야 답하였다.
“이곳 제주에 한해서라면 동의하기에 가필(加筆)한 것입니다.”
“제주에 한해서라……. 하면, 그대가 이름자를 더한 그 상소의 내용이 고려 전역에 준하여 이뤄지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당장은 그렇습니다. 다만, 고려 전역이 제주와 같이 바뀐다면 그때는 또 달라질 것입니다.”
제주가 고려의 다른 곳과 무엇이 다른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거의 대부분이 다를 터이니.
다시 포은이 무어라 말문을 열려 하였으나, 몽주는 손을 내밀어 발언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다른 학생들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였다.
“오래전 망이, 망소이가 명학소에서 난을 일으켰고, 그 후에 만적이 노비 해방을 명분으로 반란을 모의하였으니, 비단 그 두 경우 외에도 고려에서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수많은 민란이 있었소.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그대들도 잘 알 터, 신분제를 타파하려는 자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했고, 그들의 가족은 물론이고, 같은 고을의 백성들마저도 반역의 낙인이 찍혀 죽거나, 더 험한 꼴을 당했소.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신분 제도의 폐지를 그대들은 이처럼 쉽게 청하는 걸 보니, 이곳 제주가 진정 고려의 다른 곳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땅인가 보오.”
몽주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냉랭한 기운에 몇몇 학생들, 특히 어리거나 여자인 학생들은 점점 울상이 되고 있었다.
그들이 그저 머릿속으로 동의, 동감하여 참여한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그제야 실감한 모양이었다.
몽주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마주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소. 만약 내가 이 상소를 거부하겠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찌할 것이오?”
몽주의 물음은 좌중의 침묵을 가져왔다. 조금 전 몽주가 한 말 때문인지, 그들의 머릿속에 민란이라는 말이 떠올랐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 자리에서 민란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다들 불안함에 우물쭈물하던 중에 문득 뒤쪽에 한 사내가 손을 들며 말문을 열었다.
“군공,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발언권을 요구한 자에게 몽주가 고개를 끄덕여 주니, 그는 살짝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이름이 홍길래라고 밝혔다.
그에 몽주가 홍길도를 바라보니, 홍 교리는 묵묵하게 지금 나온 자와 아무 상관이 없는 연기하고 있었다.
몽주는 그 모습에 실소하며 홍길래에게 말하라 하니, 그가 다소 항의조로 주장하였다.
“이미 군공께서 목호의 일족들을 노비로 삼으실 때, 차후에 방량하실 것을 약조하셨으니, 노비의 해방은 군공께서 마땅히 이루셔야 할 일입니다. 그 참에 제주의 노비 전부를 방량시키는 것은 군공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귀한 족속들을 폐하는 문제 또한 어차피 제주에는 공식적으로 귀한 자들이 없으니, 이 또한 말 한 마디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습니까?”
“허, 참 나…….”
몽주는 코웃음을 치고 어이없다는 듯 홍길래를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홍길래는 자신이 하늘 아래 가장 떳떳한 자인 것처럼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몽주로서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내가 약속한 방량은 목호의 일족에 한할 뿐, 제주의 다른 노비들에게 약속한 바가 없다. 또, 제주에 귀한 족속이 없다곤 하나, 안타깝게도 네 앞에 있는 내가 귀한 자이다. 대개가 그런 것과 전부가 그런 것은 엄연히 다른 법! 네가 한 주장은 진실을 가리고, 네 고집을 위해 거짓을 사실인 양 왜곡하고 있는 궤변일 뿐이다.”
“하나, 그 차이는 군공께서 가지신 위업으로 충분히……!”
“네, 이놈!”
몽주의 입에서 처음으로 고함이 터지니, 좌중이 크게 놀랐고, 몇몇 마음 여린 학생들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면, 신분제를 폐함에 있어, 네놈들이 한 게 무엇이 있더냐! 지난날 수많은 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얻고자 한 해방을 네놈들은 고작 글 몇 줄로 얻을 수 있을 성 싶더냐?!”
“군공 영감, 저희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문득 날카로운 음성이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으니, 이번에는 한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자신을 홍길선이라 밝히자, 몽주의 시선이 다시금 홍길도에게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홍길도도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쨌든 홍길선은 뭉주 앞에서 진심을 밝히는 사람처럼 간절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희는 군공께서 이미 언젠가 신분을 폐하시리라 짐작하였기에, 감히 그런 상소문을 작성한 것입니다. 군공께서 뜻이 있음에도 계기가 없어 하지 못하시는 것이라 여기고, 그 계기를 마련해 드리고자 한 것이란 말입니다. 저희라고 어찌 신분의 구별을 폐하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고 가벼이 여겼겠습니까? 그저 군공의 치세가 하늘이 낮다 여길 만큼 높으니, 구태를 벗어던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정녕 너희들의 상소에는 단지 그 뜻만이 담긴 것이더냐?”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몽주의 입가에는 웃음이 서렸으니, 누가 봐도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이어, 몽주의 입에서 나온 물음에도 그의 심정이 어렸다.
다만, 그 물음은 길선이나 길래가 아닌 포은에게로 향하였다.
“이보오, 포은 선생. 그대도 정녕 신분제 폐지에만 목적이 있으셨소? 신분의 구별을 폐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얼마나 무모할 수 있는 일인지, 포은 선생이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정녕 신분제 폐지만이 상소에 이름을 올린 모든 이유였소?”
“…….”
포은이 그 질문에 질끈 눈을 감으니,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닌가 보군. 아마도 선생이 제주에서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내게 증명해 보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을 것이오. 그리고 너희들도 내 눈에 띄어 언젠가 크게 등용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겠지.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그렇지 않……!”
길선이 다급히 결백을 주장하였으나, 그녀의 뒤에 모여 있는 학생들의 표정은 이미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찌 보면 참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몽주는 실소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혼쭐을 내고 싶다. 뜻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위해 직접 노력하고 움직여야 하는 법이거늘, 어찌 글월 몇 자로 남의 권세에 기대어 자신을 돋보이려 하다니……. 그것이야말로 조금이라도 배운 자라면 해서는 안 될 추태가 아닌가.”
“…….”
몽주가 꾸중하니, 앞서서 항변하던 길래와 길선 남매도 결국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여,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
풀이 죽고, 겁을 먹은 중에 몽주가 예기치 못한 말을 꺼내니,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정녕 상소에 담긴 너희들이 마음이 오직 욕심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직접 신분제를 타파하도록 내가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다.”
몽주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학생들을 다시 둘러보곤, 그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너희들이 제주의 모든 어른 노비들 중 십분지 팔의 동의와 함께 그들의 화압(손도장)을 얻어 온다면, 나는 그날로 제주의 모든 노비들을 방량하라 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제주 내 열여섯 살 이상의 온 백성들 중 십분지 팔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화압을 받아 온다면, 나는 그날로 내 지위를 포기하고, 제주에 귀한 족속이 따로 없음을 선언할 것이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몽주의 제안에 학생들은 물론, 홍 교리도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어찌 신분의 문제를 백성들에게 묻는 치자가 있을 수 있는가.
“너희들이 노비나 백성들을 만나 화압을 받기 위해 설득하는 것은 내 따로 명하여 그 권한을 보장할 것이다. 단! 만약 거짓으로 화압을 위조하거나, 화압하게 강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나를 능멸한 강상의 죄로 다스려 크게 벌할 것이다. 어떠냐, 해 보겠느냐?!”
“…….”
대답은 없었다.
해 볼지 말지를 정하기 전에 그 방법부터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못하겠다면 섣부른 짓거리는 하지 말고, 배움에나 힘써라. 이건 알아들었겠지.”
비소가 잔뜩 서린 표정으로 툭 말을 뱉은 몽주가 몸을 돌렸다.
“하,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그때, 등 뒤에서 길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그녀를 바라본 몽주는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입가에 어린 비웃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하겠노라 소리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그녀의 생각과는 엄청나게 다른 일일 거라는 사실을 몽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만약 그 일을 해낸다면, 그때는 정녕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엘리트로 삼아 키워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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