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88)
새로 마련한 100인치 넘는 대형 TV 모니터에는 요동 및 만주부터 류큐 제도에 이르는, 익숙한 지형 지도가 떠 있었다.
주요 고을의 위치마다 원형의 표기가 자리 잡고 있었고, 하천과 산맥을 비롯한 각종 지리 정보도 곳곳이 기재되어 있었다.
물론, 여러 나라와 세력 간의 국경…… 이라기보다는 강역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 화면 위 어느 곳에 머물러 있던 마우스 포인트가 움직이다 멈춘 곳은 개경이었다.
개경의 위치에 표기된 작은 원형 위에 마우스 포인트가 멈추자, 그 원이 크게 확대되었는데 상하로 반이 갈려 좌측은 파란색, 우측은 붉은색으로 구별되었고, 파란 부분 안에는 최대 35만, 붉은 부분에는 약 1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파란 부분 중에서 좀 더 새파란 부분이 있었는데 전체에서 사분의 일에 조금 모자라게 차지하고 있었다.
붉은 부분 또한 전체에서 십분의 일 정도가 더 짙은 빨간 색이었다.
파란 부분이 인구수를, 붉은 부분이 군병수를 뜻하였고, 새파란 부분은 청장년층을, 새빨간 부분은 기마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제주의 경우에는 원을 이루는 색이 더 다양했다.
화포의 수를 노란색으로, 군함의 수를 녹색으로 표기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다른 곳은 화포나 군함의 수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부정확하여 아직 생략해 둔 상태였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주요 고을 및 세력의 대략적인 인구와 군병의 수를 파악해 두었기에 상업적 잠재력과 군사 전력을 가시적으로 가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흠, 근데 정말 개경의 인구가 35만이나 됩니까?”
“더 많았다던데요. 몽골이니, 홍건적이니, 전란들 때문에 번번이 반토막 났던 걸 지금은 다소 회복한 거래요.”
재단 이사장 회의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를 향해, 세 남자가 회의 탁자에 나란히 발을 올리고 의자에 푹 기댄 채 태플릿 PC와 연동된 마우스 포인터로 모니터 여기저기 정보를 훑고 있었다.
몽주가 고려에서 직간접적으로 얻은 정보를 틈틈이 업그레이드해서 이제는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동북아시아의 상황이 가늠될 정도였다.
실제와 다른 것도 많을 것이고,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적힌 것도 있었다.
예컨대, 지금 개경의 인구도 그러하였는데, 개경의 인구가 당대에 35만에 이르고, 전성기 때는 그보다 많다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범(凡)개경의 인구가 그렇다는 말이었다.
즉, 개경의 성곽 안에 사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성밖에 거주하지만, 엄연히 개경의 ‘생활권’에 들어가는 영역의 인구까지 포함한 수였다.
실제 개경 성내 인구는 10만 명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추산되었지만, 사실 그 정도의 인구 밀집도도 전근대 시대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35만이 사실이라면, 남성 청장년층이 8만 명 이상이라는 의미니, 근대적 총력전 상황이면 점령하기 진짜 힘든 곳이네요. 지금이야 의미 없지만.”
소총이 보급된 근대적 전장에서, 1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남성 청장년층은 단기간에 군인이 될 수 있으니, 뒤가 없이 싸우는 총력전 상황에서는 개경은 공격하는 측의 무덤이 될 만한 수준의 도시일 것이다.
하나, 아직 그런 시대는 아니었고, 사실 지금 개경의 군사적 전력을 파악하는 이유에서 보자면 총력전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신돈을 축출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신돈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개경 주둔 군병만 따지면 그만이었다.
즉, 9천 명에서 1만 명 사이의 군병들만이 경계해야 할 모든 전력인 셈이었다.
그 군병들 모두가 전력으로 저항한다고 가정해도, 요동과 제주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렇다고 고려 본토의 군병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짐작하건대, 지방군이 약 3만 정도였다.
하나, 지방에 대한 행정력이 급속도로 떨어진 상황에서 지방군 또한 중앙의 지휘로부터 이탈하였으니, 그나마 말을 듣는 장수들을 개경으로 불러들인 덕에 1만에 가까운 군병이라도 개경을 지키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과 제주의 연합 공격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요동이나 제주 중 한 곳만 공격하는 것이라면, 저항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요동의 경우, 요동군이 육로로 진격해 오는 시간 동안 지방군을 닦달하든, 직접 금상을 몽진시켜 지방군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규합하든 군력을 부풀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제주의 경우도, 제주 군병의 절대적인 수가 적은 만큼 버티면서, 혹은 탈주하여 도망치면서 지방군을 합류시켜 역전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요동과 제주가 연합하여 공격한다면, 그래서 제주의 함대가 요동군을 실어 가서 예성강 하구부터 급습한다면, 개경의 신돈은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에 빠질 것이다.
게다가 개경 내 내응하는 세력도 있고, 그 세력이 곧 금상의 세력임을 생각하면, 신돈의 파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신돈 축출 작전은 탁기 장군에게 일임하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맞습니다. 중요한 일이지만, 결과가 뻔한 사안인 만큼, 몽주 씨는 북쪽이든 남쪽이든 둘 중 한 곳을 가셔야 합니다.”
재상과 두신은 공히 같은 생각이었다.
아마 요동과의 연합이 아니었다면, 탁기조차도 다른 일로 돌려야 한다고 조언했을 것이고, 몽주도 그에 동의하고 있었다.
“문제는 남과 북 중 어느 곳을 우선해야 하는 것이고, 몽주 씨가 가지 않는 곳에 누굴 보내느냐는 것이죠.”
“이럴 줄 알았으면, 군의 규모가 더 커지길 기다릴 게 아니라, 장군을 한 명 정도 더 뽑아 둘 걸 그랬나 봐요. 미리 일군을 통솔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했어야 했는데…….”
“제 생각에는 장군도 장군이지만,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해외에서 특정한 분야나 특정 국가를 상대로 본국의 이익을 위해 협상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직책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사(大使)라는 개념은 국제적으로 외교 관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관련 절차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야 존재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몽주 씨를 대리하여 군사적인 문제를 포함한 외교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직책을 두어 몽주 씨가 직접 갈 수 없는 곳에서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특명전권대사, 약칭해서 그냥 대사.
개념적으로 근대시기의 대사나 현대의 대사나 다를 건 없지만, 실질적으로 근대시기의 대사는 현대의 대사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교통과 통신의 한계로 인해 본국의 훈령을 빠르게 받지 못하는 시대에 대사가 군사(軍事)를 포함한 급박한 문제를 임의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사가 본국의 정책에 해박하고, 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명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근대 시기에는 더 실제적인 의미였다.
특히 먼 해외 영토가 있어 그곳의 외교를 담당하는 대사는 더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셈이었다.
사실 만주나 류큐 정도는 아무리 전근대 시대라고 해도, 대사에게 일임할 정도로 먼 곳은 아니었다.
하나, 아직 첫발도 디디지 못한 상황이고, 교통 또한 안정되지 못한 걸 감안하면 당장은 전권특명대사가 필요했다.
차후에 얻을 더 먼 영토를 생각하면 미리 대사라는 직책과 그에 걸맞은 인물들을 육성해 놓을 필요도 있었다.
몽주는 전권대사에 임명할 만한 자들을 머릿속으로 물색해 보았다. 일단 교리들 중에는 없었다. 행정적인 능력이야 다들 출중해졌고, 몇몇은 자신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기도 했지만, 탁기를 제외하면 다들 군사적인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군사적 능력을 갖춘 자들 중에 자신의 생각이나 제주의 정책 및 대국적인 이익을 따질 수 있는 자를 생각해 보면, 그 역시 쉽게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지금 만주든 류큐든 군사적인 결정이 필수인 상황임을 감안하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나마 교리들 중에는 차현유, 그리고 교리이긴 하지만 장군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탁기 정도가 후보감이었는데,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었다.
차현유는 정보를 다루는 교리로서 큰 시야를 갖추기 시작했고, 실제로 왜국에서의 임무를 잘 수행한 바도 있으며, 성품이 대담하여 군사적인 임무를 맡길 만했지만 자질이 그렇다는 것이지, 당장 그런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탁기도 군사적인 능력이야 신뢰했지만, 그건 전술적인 영역에서 그럴 뿐, 대국적인 시야를 갖춘 건 아니었다. 그저 몽주가 판단하여 명을 내리면 그 명은 확실히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게 현재의 탁기였다.
“후우, 특명전권대사를 선발하는 문제야, 그건 제가 고려에서 행정 체계 개편과 더불어 판단할 문제겠지요. 근데, 일단 두 분이 보기에, 제가 북쪽과 남쪽 중 어느 곳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북쪽이죠.”
재상이 곧바로 대답하였고, 이어 두신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희도 현대에서 당시 만주를 비롯한 북쪽 초원의 상황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무어라 조언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번에 몽주 씨가 가져온 정보를 보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 싶습니다. 특히 이성계로 하여금 만주를 석권하게 하는 방법보다 백배 낫죠. 그건 이성계의 세력을 너무 키워 주고, 자칫 고려로부터 독립할 확률을 높이는 방식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진족을 따로 규합하여 몽주 씨의 영향권하에 세력을 세우고, 고려에 입조하게 만들면, 고려의 영토를 북방 멀리 넓히는 것임은 물론이고, 이성계를 견제하는 효과도 있지요. 진짜 나하추가 세력이 커진 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겁니다.”
재상의 말과 함께 세 사내들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모니터의 마우스 포인트가 움직여 북쪽의 나하추 세력을 가리키는 원 위에 올라가자, 그 원이 확대되면서 정보를 보여 주었다.
다른 곳과 달리 군력에 대한 정보만 있고, 인구에 대한 정보는 없었지만, 대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부분이 따로 있었다.
최대 20만이라는 군력 중 사분의 일 정도가 검은 부분이었으니, 그건 몽골계인 나하추의 세력 중 여진족의 비율을 추정해 놓은 것이었다.
즉, 나하추가 동원할 수 있는 20만 중 5만 정도는 여진계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본디 역사에서 훗날 해서여진(海西女眞)을 세우는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이미 나하추를 따르고 있음을 요동에서 알아 온 터였다.
우디거 부족이 오도리 부족 및 후르하 부족과 경쟁 부족인 건 현대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우디거 부족은 나하추에 복속되는 대신, 지원을 얻어 오도리와 후르하 부족을 밀어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이 재밌는 건, 본디 역사에서 우디거 부족은 반원 세력이고, 오도리와 후르하는 친원 세력이었는데, 지금은 정작 원의 유신인 태위 나하추를 우디거 부족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들 부족들이 친원과 반원으로 갈린 건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고 반목한 결과에 불과했으니, 이제 조금 다른 형국이 되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은 ‘만주’의 호인들을 크게 세 계열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하나는 요 지역에 위치한, 과거 요(遼)나라의 후예인 키타이(Qitay ; Cathay)족, 즉 거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나하추가 대표하는 몽골족이며, 마지막으로 남동쪽의, 훗날 여진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주션(Jushen ; 몽골어로는 Jurchen)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중 거란족은 지금 이성계의 세력에 흡수되고 있었으니, 이미 요동에 거주하고 있는 호인들 중 대부분이 거란족이었고, 이성계가 손을 잡기로 한 4개의 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성계가 거란족을 흡수하는 건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었는데, 만약 거란족이 이성계 아래에서 고려와 융합할 수 있다면, 훗날 원나라가 완전히 무너진 시기에 이성계는 중국 하북 이북의 광대한 요서 지역을 전쟁 없이 외교적으로 점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사는 이들이 대부분 거란계 호인들이니, 같은 거란의 종주권을 가진 이성계가 얼마든지 협상하여 그들마저 자신을 따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성계의 요동이 고려의 신하임을 유지한다면 고려의 강역 또한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몽주가 새로 품은 ‘꿈’도 더하면, 고려의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유발시킬 수도 있었다.
그건 오도리와 후르하 부족을 중심으로 주션(여진)족 전체를 통합하고, 그 세력을 도와 몽골족을 쫓아냄으로써 요 지방을 제외한 만주 지역을 차지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것에 성공하고 만주 이북의 퉁구스(Tungusic)계 다른 부족민들마저 흡수 포용한다면, 만주부터 동시베리아 지역 일대까지 고려의 강역이 되는 셈이었다.
역사에서 거란, 여진족을 비롯하여 여러 유목 민족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한민족에 동화된 것처럼, 그리고 잘 알려졌듯 중국을 점령한 유목 민족들이 중원화된 것처럼, 긴 시간을 두고 제주의 주도로 더욱 발달한 고려의 문화를 퍼뜨려 문화적으로 동화시킨다면, 한반도부터 북쪽 시베리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가 ‘실질적인’ 고려의 영토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위도 불확실한 특정 역사책의 프로파간다에 의지하여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성 높은 길일 것이니, 몽주가 새로이 품은 꿈이 바로 그것이었다.
“첫 천몽 전의 한국에는 환빠들이 없었습니까?”
몽주가 만주를 민족 영토화하기 위한 포부를 밝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재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있었어도 당시의 저란 놈이 그런 걸 알 만한 녀석이 아니었어서요. 매일 노느라 바빴던 놈이라……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의 저는 한국이 작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거죠. 제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고, 어른들도 한국이 작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보질 못했던 것 같아요. 당시 한국의 러시아 쪽 국경이 지금의 아무르 강이라, 동쪽 해안 지역은 쭉 올라가 오호츠크해 남쪽에 닿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작지 않았죠. 물론, 옆에 워낙 큰 중국이 있어서 비교되긴 했겠지만, 그저 중국이 너무 크다 정도였죠.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의 환빠적인 사상이 크게 자리 잡을 환경은 아니었을 거예요.”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이 꼭 작은 영토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겁니다만, 확실히 크게 각광받을 만한 환경은 아니었겠네요.”
“오오, 어째 환빠들을 두둔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몽주의 말을 받아 두신이 한마디 하니, 재상이 과장스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놀림조로 말하였다.
“내 말은 영토에 대한 욕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근대 이후 한국이 경험한 한 많은 역사에 대한 반발이 근본 바탕이라는 말이야. 만약 우리가 아는 한국의 역사가 몽주 씨의 첫 천몽 전의 한국처럼 보다 자주적으로 발전했다면, 설령 영토가 지금과 같다고 해도, 환단고기 신앙이 뿌리 내리기 어려웠을 거라는 거지.”
“그게 그 얘기지 뭐. 식민지 시절도 없고, 분단도 없었다면 영토야 더 컸을 테니까.”
몽주는 재상과 두신의 이야기를 씁쓸한 표정으로 들었다. 첫 천몽을 생각하면 지금의 한국 역사를 만든 근본이 바로 그였으니까.
후회가 가슴속에서 들끓는 걸 느낀 몽주는 크게 심호흡하여 마음을 달래면서 주제를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류큐 쪽 이야기 좀 해 보죠. 본래 제 계획은 삼산(三山 : 중산국, 북산국, 남산국) 중 가장 강한 곳을 선택, 지원해서 류큐를 빨리 일통하게 유도한 후, 그 대가로 지금의 나하시나 오키나와시 위치에 조차지를 얻어 그곳을 통해 경제, 문화적으로 서서히 류큐 전체를 흡수하고자 했었죠. 한데, 삼별초의 후예가 등장하는 바람에 꼬였어요. 완전히.”
삼별초 이야기가 나오자, 재상과 두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앞서 류큐섬에 사는 삼별초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를 몽주가 해 주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어이없어한 바 있었다.
만약 지금 회의가 여전히 ‘놀이’였다면 그 ‘설정’에 크게 반발했을 터였다.
“그 후예…… 김한정의 손자라는 자가 남산국의 신하이고, 제주에 남산국을 도와 달라 청했다는 거죠?”
“네, 류큐의 통일까지 역사적으로 20년 가까이 남은 터라, 아직은 세 나라가 비등비등할 줄 알았는데, 이미 중산국이 크게 앞서고 있는 모양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류큐의 삼산 시대(三山時代)는 북산국과 남산국이 혼란을 틈타 분리되었던 시대로, 명분과 국력 모두 애초에 중산국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어쨌든 창 선장과 석삼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제주에서 탈출한 100여 명의 삼별초 및 제주민들이 왜국으로 항해 중에 표류하게 되어 류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는 삼산 시대 이전으로 류큐의 에이소(英祖) 왕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고려인들을 하늘이 보내 준 신하로 선언하면서 크게 대우해 주었다.
스스로 천손(天孫)의 후예라 선전하여 왕권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운 좋게 살아남고 외딴 곳에서 대우받으며 살게 된 삼별초들은 류큐의 일원으로 일단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데, 이주 1세대가 죽은 후에도 그 후예들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으면서도 류큐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보니, 원주민 신하들이나 호족들의 질시와 배타가 심해졌다.
결국 30년 전쯤에 크게 난리가 나 중앙에서 축출되고, 원주민들이 고려인이라 부르는 삼별초의 후예들 전체가 남쪽으로 피신하는 위기에 처했다.
한데, 때마침 에이소 왕조가 무너져, 삼산 시대가 열리면서, 고려인들은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남산국의 오사토(大里) 왕이 국력을 키우기 위해 고려인들을 전격적으로 수용하고, 등용했던 것이었다.
류큐의 고려인들이 1천 명에 달하기도 하거니와, 그 중에 관리와 군인 출신들이 많았으니, 단번에 인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기회를 얻긴 했지만, 워낙에 애초에 중산국의 국력이 워낙 강했던 터라, 북산국이든 남산국이든 늘 중산국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남산국의 고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남산국의 전면에서 중산국에 대항해야 했으니,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당대에 이르러 여전히 1천 명 정도의 세를 유지하곤 있었지만, 전란으로 젊은 남성들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냥 그 류큐의 고려인들이 없다고 치면 안 됩니까? 좀 맘에 걸리면 중산국을 도와주는 대가로 고려인들을 잘살게 해 주거나, 아니면 아예 제주로 데려가면 될 것 같은데요.”
“사실 그렇게 결정하기에는 제주의 민심이 문제죠. 특히 홍로현을 비롯한 남제주에서 삼별초에 대한 기억이 워낙에 좋거든요. 김통정이 막 도술을 부려서 원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백성들을 구했다는 식의 전설도 있을 정도죠.”
김통정은 제주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수장이었고, 류큐의 고려인들이 공통의 조상으로 모시는 신의군 김한정 지유라는 자도 그의 일족인 듯했다.
“아무래도 남제주 출신의 군병들이 많다 보니, 류큐에 갔다온 군병들 중에서도 류큐의 고려인들이 삼별초의 후예라는 것에 꽂힌 자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그들이 제주에 그 소식을 전해서 제주 백성들 사이에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들이 떠돌고 있고요. 그래도 무시하려면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좀 그러네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몽주가 얼버무리자, 재상과 두신이 피식 웃다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자 재상이 말문을 열었다.
“결정이야 몽주 씨가 하셔야겠지만, 저희가 생각하기에 류큐에 대한 처분은 가능한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안 그래도 만주의 일이 복잡해졌는데, 류큐까지 그 안의 사정을 일일이 감안해야 한다면, 몽주 씨나 제주가 감당하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재상과 두신은 몽주에게 그 ‘간단하고 쉬운 방법들’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이어, 다시 만주의 일로 돌아가, 주션족들을 회유하고, 나하추와 대결하는 문제에 대해 한참 논의하였다.
몽주의 고민은 계속 깊어만 갔으니, 대개 그랬듯 이번 현대로의 복귀 또한 천몽 속 문제에 대한 논의와 고민으로 가득했다.
* * *
“네가 남양(南洋) 특명전권대사를 맡아 줘야겠다.”
“……그게 뭐, 뭡니까요?”
집무실에 불려와, 몽주 앞에 선 석삼은 몹시 경계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좋은 거야. 더 이상은 군인이 아니고, 대신 높은 벼슬을 가지는 거지.”
“에……?”
전역시켜 준다는 말에, 그리고 따로 관직을 준다는 말에 석삼은 반색하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석삼은 여전히 얼른 약속한 5년이 지나 군대를 벗어나길 고대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도 많이 있었지만, 죽을 고비도 넘긴 만큼, 처자식과 더불어 오래 살고 싶은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몽주는 특명전권대사에 대해, 그리고 남양 대사로서의 임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석삼의 표정은 점점 더 구겨졌다.
“아니, 그게 뭐가 좋은 겁니까요? 군병만 아닐 뿐이지, 더 위험한 일이지 않습니까요! 게다가 저더러 알아서 하라니요.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저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구먼요!”
“다 알아서 하라는 건 아니다. 내가 구체적인 지침을 당연히 줘야지. 다만 현지에서 사정을 봐서 네가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그거지 않습니까요.”
“어쩌겠냐, 네가 거기까지 다녀왔는데.”
“저만 갔다 왔습니까요? 창 선장도 있고, 다른 선장도 네 명이나 있었는데요.”
“네가 믿을 만하니까, 널 택한 거지.”
“믿지 마십시오. 대체 언제부터 절 믿으셨다고…….”
몽주는 연신 어쩔 수 없다며 석삼이를 어르고 달랬다.
그가 군병으로서 보인 임기응변과 가끔 번뜩였던 결단력을 볼 때, 대사로서 적합하다 여긴 것이다.
물론, 석삼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사로 전용할 만큼 바쁘지 않은 인물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또 삼별초에 쓸데없는 감정을 품고 있지 않은 외지인인 것도 선택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우쩌겠냐, 일이 예까지 왔는데.”
“…….”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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