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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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小寒 : 1월 6일경)에 북방의 바다 위에서 맞는 바람은 그야말로 칼날과 같았다.
하나, 발해만을 벗어나 한반도의 서쪽 중심부로 향하는 40여 척의 배 위에 탄 군병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이길 수 있다는 건, 이기는 전쟁에 나간다는 건 군병들에게는 그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법이지 않은가.
그게 아니더라도, 당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잘 갖춰진 군장(軍裝) 덕에 매서운 추위를 견딜만 하기도 했다.
무수당의를 입은 제주의 군병들은 물론, 갑주 안에 양모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투구 안에 양피로 만든 모(帽)를 쓴 요동의 군병들도 예전보다 훨씬 추위에 강해진 상태였다.
“군병들을 보니, 요동의 군력이 한층 안정되었음을 느낄 수 있군요.”
기함의 이물에서 탁기가 청해백 이두란에게 말을 건네었다.
“하하, 그렇소? 지난 전쟁에서 제주공의 군병들이 잘 갖춰 입은 것을 보고 난 후에 저하께서도 군장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셨소. 나라 사정이 나아지기도 해서 힘을 좀 쓸 수 있기도 했고.”
함께 최영의 요동을 공격할 때, 남방 제주의 군병들이 북방 경흥의 군병들보다 오히려 방한에 힘쓴 것을 보고 놀라워했던 이성계가 이후에 각별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제주에 사정이 있어, 많은 군병을 이번 일에 투입하지 못하게 되어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요동군의 상태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하하, 어찌 군력을 군병의 수로만 따지겠소. 나야말로 제주군의 정예 중 정예라 하는 해병대가, 개복포를 열다섯 문이나 무장하고 온 것에 만족하고 있소.”
정말 그리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맹한 상황에서 괜한 불만을 피력하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두란은 온화할 뿐이었다.
확실히 제주가 신돈 축출을 위해 소용하는 군병의 수는 요동보다 적었다.
이는 애초에 현재 6천이 갓 넘는 정도로 작은 제주 군공군의 규모 때문이기도 했고, 그마저도 전력을 투입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40여 척의 배를 보내면서 투입한 제주 군병의 수는 2천여에 불과했으니, 사실상 운항 필수 인원만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획상에도 제주 군병들은 대부분 배에 남을 것이고, 해병대만이 요동군과 함께 개경으로 진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이번 일에 투입된 요동군은 7천에 달하였으니, 요동이 가진 배 10여 척과 함께 제주의 배들마다 가득히 실려 있었다.
개경에서 신돈의 명을 받들 군력이 최대 1만에 가까운 점을 생각하면, 그보다 적은 7천여 군력으로 공격하는 건 해병대의 개복포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 것이 분명했으니, 이두란이 한 칭찬의 어느 정도는 분명 진심이었다.
“아마 개경의 장수들 중에서도 창머리를 돌리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들은 바가 있소만, 구체적인 정황이 있는 말이오?”
“제주 상단이 은밀하게 염 현백과 통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길 남문의 수문장은 확실하다 하였습니다.”
이두란도 전해 들은 바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개경 공략에 있어 남문을 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개경으로 향하는 중에 탁기로부터 재차 확인을 받으니 더욱 믿음직했다.
“잘해 봅시다, 상장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두란은 굳이 탁기의 새로운 직책명을 불러 주며 웃음을 보였다.
제주공이 몇몇 인사를 발하였으니, 그 와중에 탁기도 상장군에 임하게 되었다.
몽주를 대신하여 요동과 더불어 충왕군을 이끌어야 하는 탁기의 지위를 위한 승진이었고, 차후에 있을 군 개편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 * *
“하면, 아마미의 나제에 입항하여 군검(軍檢)하도록 하겠네…… 아니, 하겠소…… 습니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말씀하시지요.”
“허허, 이거야 원…….”
창 선장은 말을 어찌해야 할지 애매하여 난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직속 부하였던 석삼이 높은 직위에 오른 터라, 존대를 해야 할지 평대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탓이다.
이는 석삼이 하루아침에 높은 직위를 얻은 탓이기도 했지만, 제주의 직책들 대부분이 상하 관계가 불분명한 탓이기도 했다.
제주공이 석삼을 남양 특명전권대사라는 직위에 임하면서, 남양의 일에 한하여서는 석삼이 자신을 대리한다고 하였으니, 분명 높은 지위임에는 틀림없었다.
제주의 유일한 공식적인 관직인 교리를 두고, 제주공이 교리를 각각의 임무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자라 하였던 바가 있었으니, 남양 특명전권대사 또한 교리에 준하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대사 직책이 교리 직책과 같은 위상인지는 살짝 애매했다.
교리와 같다 하더라도, 소령의 영급 군병인 창 선장이 교리를 받들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군무교리를 겸임하고 있는 탁 장군을 제외하면, 그간 제주군은 다른 교리와 더불어 군령을 수행한 바가 거의 없었다.
교리를 함선에 태우고 외국에 간 적이야 많지만, 그건 군령을 수행하는 목적이 아니었으니, 서로 존대하면 그만이었다.
하나, 이번 유구행은 엄연히 군령을 받들어 가는 것이었으니, 명령 체계의 일원화를 위해서라도 제주 함대를 이끄는 창 선장과 대사인 석삼 사이의 위계가 분명해야 했다.
물론, 제주공은 남양에서의 모든 일은 석삼이 결정한다 하였지만, 동시에 창 선장에게 전투 지휘를 잘 부탁한다고도 하였으니, 여전히 애매함이 남았던 것이다.
“이리하시지요. 저도 받은 명이 있어 유구에서의 모든 결정은 제 손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그 결정에 싸움이 있다면, 그 일은 창 선장님께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그러…… 럽시다. 흠흠.”
“그냥 편히 말씀하시라니까요.”
“허허, 이거 참…….”
“에효…….”
두 사람이 같이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유는 조금 달랐다.
창 선장은 석삼을 대하기가 곤란해서 그랬고, 석삼은 그런 거에 상관없이,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부담스러워서 그랬다.
어느 쪽이든, 제주의 성장과 더불어 안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이라 할 수 있었다.
커져 가는 제주에 비해, 아직 나라의 체계가 명확하지 않았으니, 임무의 세분이 미약하고, 그 지위가 불분명한 중에 이전에는 없던 지위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정리해야 할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지만 큰 혼돈의 근본적인 원인은 제주공의 위상에 있었다.
사실상 제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는 제주공이지만, 그 위상은 여전히 고려에 매여 있었으니, 독자적으로 관계를 정립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의 체계가 명확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 전에, 애초에 제주가 아직 ‘국가’가 아니기에 문제였다.
* * *
상장군 탁기가 개경으로 향하고, 대사 석삼이 창 선장과 더불어 유구로 항해하고 있을 때, 몽주는 여진족들이 ‘투먼(Tumen)’강이라 부르는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섬에 닿았다.
늪과 모래 언덕, 그리고 잡초가 무성한 그 섬은 알려진 이름이 없었지만, 몽주는 그 섬이 가질 이름을 알고 있었다.
녹둔도(鹿屯島).
현대 한국의 역사에 나름 그 이름을 새긴 섬으로, 이순신 장군이 수군으로 이름을 떨치기 전에 녹둔도 만호(萬戶)로 재직하였는데, 그 당시 여진족의 침입으로 입은 피해가 과장되어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던 원인인 ‘녹둔도 전투(사건)’의 무대가 바로 이 섬이었다.
훗날 두만강의 퇴적 작용으로 인해 러시아 쪽으로 연륙되고, 근대 시기 조선이 약소한 틈을 노린 러시아에 점령되었다가, 이후 식민지 시절과 남북 분단으로 대처가 미흡한 중에 유야무야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되어 버린 곳이기도 했다.
물론, 녹둔도라는 이름은 조선의 6진 개척 이후, 그 섬에 둔전을 설치하면서 지어진 이름이었기에 지금은 통용되지 않았다.
4척으로 이뤄진 몽주의 함대는 두만강 안쪽 강가에 배를 대고, 녹둔도의 북쪽 언덕 아래에 군막을 세웠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차돌이 녀석이 잘 데려오려나……?”
군막 안팎을 정리하는 군병들을 뒤로하고, 언덕 위에 나란히 서서 북쪽을 살펴보던 화극이 혼잣말인 양 한마디 하였다.
근래에 계속 제주에만 있던 탓에 좀이 쑤신 듯 따라나서겠다고 하여 같이 온 것이었다.
차돌이는 차현유 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끔 머리가 돌인 것처럼 멍청한 짓을 한다며 화극만이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차 교리는 이미 열흘 전에 먼저 함주를 통해 북방으로 향했으니, 오도리 부족과 후르하 부족을 설득하여 몽주와 협상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추천서도 있고, 제 뜻을 담은 서찰도 있으니, 일단 만나러는 오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차돌이 녀석이 길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지.”
“함주 주션족 출신 군병과 함께 간 길이니 길을 헤매지는 않겠죠.”
“혹시 모르지. 그 주션족 군병이 일부러 골탕을 먹일 수도 있지 않나. 심양왕이 몰래 강짜를 부릴 수도 있단 말이야.”
“서로 약속한 게 있으니, 그렇진 않을 겁니다.”
심양왕의 추천서를 얻는 과정에서, 몽주는 이성계과 몇 가지 합의한 것이 있었다.
오도리 부족과 후르하 부족이 두만강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할 것과 그들에게 화포류의 무기를 전수하지 않을 것 등이었으니, 그리 과한 요구는 아니었다.
물론, 이는 몽주 또한 진심을 모두 밝히지 않은 덕에 맺을 수 있었던 합의였다.
그저 주션족들을 규합하여 나하추를 견제하고자 한다고만 밝혔는데, 이성계로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라’를 세워 견제하려는 의도임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주션족이 이전에 세운 금나라가 망한 지 근 150년이 흘렀으니, 원의 지배하에 주션족은 분열되어, 제대로 된 중심지도 없음은 물론, 금나라를 세웠던 정신적인 기상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호인에 불과한 상태로 전락한 주션족인 데다가, 그중 겨우 두 부족과 접촉하는 걸 두고, 주션족의 새로운 건국을 상상하는 건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제주의 교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주션족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입조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껏해야 나하추를 견제한다는 것인데, 그 또한 결국 요동을 돕는 것에 불과하니, 제주의 소중한 자원을 소모하여 남을 돕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정말 이 거친 땅이 쓸 만한 곳인 겐가?”
“물론이죠.”
“이제껏 이런 쪽으로는 자네 말이 틀린 적이 없으니, 믿긴 하네만, 어찌 호인들이 나라를 운영할 줄 알겠는가. 금나라는 송나라 털어먹기만 잘했고, 원나라도 사실 엉망이었지 않았나.”
화극의 냉정한 지적에 몽주는 실소하였다.
호인들에 대한 폄하가 섞인 평가긴 했지만, 상당히 정확했다.
비단 금이나 원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원의 기마 민족이 세운 나라들은 그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한 지배력을 제외하면 크게 평가할 만한 게 없었다.
게다가 그 군사력이라는 것도, 국가 체계를 기반으로 둔 게 아닌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안락한 지배층이 되어 그 기질이 무뎌지면, 그 순간부터 자멸하거나, 그들이 지배하던 이들에게 오히려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나, 몽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인들이 세운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보다 근대적인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의 차이가 더 컸다.
고려는 어떻고, 지금 승천하고 있다는 명국은 어떤가.
어차피 제주를 중심으로 고려를 근대적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어려운 도전에 나선 몽주의 입장에서는 호인이든 아니든 별차이가 없었다.
“적어도 시키는 건 할 줄 알겠죠. 나머지는 천천히 바꿔야 할 거고요.”
몽주가 접촉하려는 오도리 부족과 후르하 부족은 농경도 같이하는 반농반목의 부족인 만큼 아주 야인(野人)인 부족보다는 좀 더 나을 것이다.
그게 몽주가 두 부족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는 중에 기대하는 전부였다.
* * *
차현유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건 몽주가 ‘녹둔도’에 군진을 세운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먼저 첨병을 보내 도착을 알렸기에, 몽주가 군진 입구로 나아가 그들을 기다렸다.
몽주의 표정에는 근심과 기대가 겹쳐 있었으니, 차현유가 등장하자, 그 모순된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 교리의 뒤로 한 무리의 호인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 무리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저, 저, 차돌이 녀석이 기어이 사고를 쳤네, 쳤어. 협상할 대표를 데려오랬지, 누가 부족을 다 끌고 오랬나? 대체 어쩌자고…… 에잉!”
“…….”
몰려온 호인들의 수는 얼핏 봐도 수천이었다.
그리고 그 부족민들의 몰골이란, 호인들임을 감안해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거지 떼들을 몰고 온 것이었다.
“구, 군공…… 임무를 수행하고 와, 왔습니다.”
차 교리도 자기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 있는 듯 몹시 궁한 표정으로 몽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찌 된 사정인지는 차차 이야기하고……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대략 육천쯤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빼고요…….”
“……많군.”
“죄송합니다. 저들을 설득하기 어려워, 여러 말을 하다 보니…….”
차현유가 궁색한 변명을 하던 찰나에, 문득 호인들 중에서 두 명의 사내가 몽주 쪽으로 다가왔다.
몽주에 비하면 키가 작았지만, 둘 모두 다른 호인들에 비하면 상당히 건장한 체구였다.
그 두 사람은 나란히 다가와 차 교리와 시선을 나누더니, 이내 몽주를 향해 자신들의 양 주먹을 서로 맞대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게 주션족식 인사인 모양이었다.
“이쪽은 후르하 부족의 아하추이고, 이쪽은 오도리 부족의 먼터무입니다.”
“반갑소. 고려 제주군공 석몽린이오.”
몽주도 가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숙여 호응한 뒤, 문득 차 교리를 향해 무어라 말하였다.
차 교리가 그사이 주션족의 말을 배웠을 리는 만무했지만, 대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그의 궁색한 표정이 한결 더 주눅들었다.
“무슨 일인가.”
“그게…… 아마 밥을 달라는 말일 겁니다. 이미 여기 도착하기 이틀 전에 식량이 다 떨어져, 사냥으로 구한 고기를 조금씩 나눠먹으면서 온 터라…….”
그 말에 불만을 누르고 듣고만 있던 화극이 기가 막히다는 양 말하였다.
“허이구, 선물로 이천 석이나 실을 때만 해도 너무 많이 가져간다 싶었는데, 오히려 적었네, 적었어.”
“…….”
차 교리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자, 몽주는 허탈감을 섞어 실소하다가 말하였다.
“어쨌든 다행히 식량이 좀 있으니, 그걸로 굶주림을 면하게 하게. 두 분도 부족민들을 안정시키고 다시 오시오.”
몽주가 말하니, 저게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의 두 부족장을 향해 차 교리가 손짓 발짓을 열심히 놀렸다.
“근데 함께 간 요동의 군병은 어디 있는 겐가? 그가 통역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자는 몸살이 걸려 앓아누워 있습니다. 어찌나 약한지 저희보다도 더…….”
“…….”
얼마 후, 녹둔도에 수백 개의 ‘게르’가 세워졌다.
* * *
파리한 안색의 노인이 급하게 왕성의 별궁 안을 달렸다.
그를 본 궁의 호위무사들도 딱히 막지 않았으니, 그 노인의 신분이 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안하무인의 기세로 한참이나 달린 그가 겨우 멈춰 숨을 돌린 곳은, 한창 주연이 열리고 있던 어느 전각 앞이었다.
“……알리게.”
노인이 말하니, 전각 앞의 궁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 상당히 오래 기다림에도 좀처럼 안으로 들라는 명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만큼 노인의 표정도 시시각각 바뀌었으니, 표정에는 초조함 대신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그가 저녁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숨 섞인 말이 끝나자, 그제야 안으로 들라는 전언이 있었다.
“…….”
전각의 내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얇은 비단이 드리운 중에 여기저기 헐벗은 여인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술내가 진동하는 주연상은 먹다남은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노인은 두리번거리며 영산왕을 찾았는데, 궁인이 가리켜 준 후에야 나체의 여인들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사내가 그곳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감에도 영산왕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고, 반라의 궁녀가 입으로 먹여 주는 술을 받아먹고 있었다.
“으…… 응? 이게 누구신가!”
영산왕은 노인이 읍한 후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노인을 바라보곤 궁녀를 밀쳐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 고려에서 하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높은 기현 영감이 아니신가! 어서 오시오! 이곳은 무릉 계곡이니, 먹고 싶은 걸 먹고, 취하고 싶은 계집을 마음껏 취하셔도 되오! 하하하!”
“……소신은 아까 전해 드린 문제에 대해 전하고자 왔을 따름입니다.”
“문제? 무슨 문제? 이 태평성대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게요?”
“…….”
기현은 이를 악물었다. 낮에 이미 요동과 제주에서 출병한 군병이 예성강 하구에 상륙하고 있음을 알렸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금상을 모시고 몽진해야 한다 고한 바 있었다.
그에 영산왕은 적군의 수가 생각보다 적다며 요격을 하라 강요하였고, 그사이에 몽진을 준비하겠다고 했었다.
한데, 정작 때가 되었음에도 영산왕은 그마저도 새까맣게 잊고 술에 취해 있었다.
아니, 그러고 싶어서 일부러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몽진 준비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으니, 그건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확인한 바였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아아! 맞다, 맞아! 위아래의 역적놈들이 감히 고려를 침공하였다 했었소.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하면, 어찌 되었소? 그 역적놈들을 물리쳤소? 고려의 정예들이 나섰을 터이니, 그 불학한 자들이야 단번에 깨부쉈을 것이오. 아니 그렇소?”
입을 크게 벌린 채, 승전보에 대소를 터뜨릴 준비를 하는 영산왕을 보며 기현은 찰나지간에 고민하였다.
“……물론입니다. 어찌하찮은 무리들이 고려에 발을 디디는 걸 허락하였겠습니까.”
“으하하하!”
역시나 영산왕이 세상이 떠내려갈 듯 대소를 터뜨렸고, 그 전각 안에 있는 수십의 여인들이 색기 어린 웃음을 따라 흘렸다.
하나, 기현의 귀에는 귀곡성과 다를 바 없는 웃음이었다.
영산왕이 다시 술을 마시고 여인들과 뒤엉키는 걸 뒤로하고, 기현은 천천히 그 전각을 나섰다. 다만, 얼핏 영산왕의 눈매가 촉촉해진 것을 보았으나,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개경의 요격군은 요동과 제주의 무리에 의해 삽시간에 무너졌고, 퇴주한 군병들마저 귀환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금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금상이라도 있었다면 몽진을 감행하여 어떻게든 전란을 장기적으로 끌어 봄으로써, 협상할 여지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금상을 놓쳤고, 그 시기가 오묘하니, 애초에 금상이 이미 요동과 제주의 무리를 불러들인 게 분명했다.
“좌제우휴의 결의라더니…….”
비소 어린 혼잣말이었으니, 그것을 믿고 영산왕이 저렇게 망가진 것이라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어차피 금상의 윤허하에 맺어진 맹약이기에, 금상이 다시 허락하면 얼마든지 깨질 수도 있는 비루한 약계이지 않은가.
기현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저들이 개경 성벽을 넘기 전에 서둘러 도망쳐야 했다.
“한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것이 기현뿐만 아니라, 개경 성내에서 도주할 준비를 하는 모든 당여들이 앓고 있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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