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90)
* * *
“제길…….”
응양군(鷹揚軍) 상장군 이운목은 궁궐의 주랑을 빠르게 걸음하며 잇소리를 내었다.
풍전등화의 위기.
요동과 제주의 군병들이 시시각각 개경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 이미 요격군이 괴멸된 고려군, 아니 개경군의 입장에서는 파멸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개경군의 수장인 이운목은 더 죽을 맛이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다시 잇소리와 더불어 욕설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니, 그 욕의 대상은 여럿이었다.
가장 먼저 요격군을 구성했던 응호군의 진윤검과 금오위의 김일기를 향한 욕이었으니, 요격군이 일격에 격파된 것에 대한 화풀이였다.
극히 일부만 돌아온 패잔병들의 말을 들으면, 적군의 화포 공격에 단번에 진형이 깨지고,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도주하였다고 하니, 적의 군력을 조금도 줄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물론, 진윤검이든 김일기든 돌아오지 않았으니, 죽었거나, 그대로 내뺐을 것이다.
다만, 이운목도 사실 요격군으로 나서기 싫어 평소 상전으로 모시던 기현에게 아첨하여 성에 남은 것이었으니, 실상 그가 욕을 할 자격은 없었다.
어쨌든 이제 홀로 개경성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그가 욕하는 두 번째 대상은 그와 같이 영산왕을 따르던 당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개경성에서 탈주했거나, 탈주하려고 노력 중이었으니, 이운목의 입장에서는 배신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성문을 모조리 막고 같이 죽자고 대서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라는 명이 없어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기야, 이미 기현조차 행방이 불명해졌으니, 그도 도주했을 것이 뻔했다.
고주망태의 영산왕은 물론, 그다음 명령권자라 할 수 있는 기현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개경을 탈출하는 권세가 놈들을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물론, 이운목 또한 도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나,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있었으니, 대체 어디로 도망가느냐는 답답한 물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쪽은 심양왕이 버티고 있고, 남쪽은 제주공이 이미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버틸 것이며, 바다로 나간다 한들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개경성을 지키는 체하다가 항복하여 자비를 구하는 게 목숨을 부지할 방책일 가능성이 컸다.
뚜벅뚜벅.
주랑을 걸음하는 이운목이 멈춘 곳은 대전 앞이었다.
불안한 기색으로 호위를 선 군병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평소에 쉽게 볼 수 있었던 내시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누구에게 그가 입실할 것임을 알리게 할지 애매하여 괜히 문 가까운 곳의 호위무사에게 물었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 목소리는 영산왕의 것이었으니, 이운목이 속으로 연식 욕하던 대상들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자였다.
스윽.
문이 열리고, 안으로 걸음을 옮긴 이운목은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에 기함하였다.
“어서 들어오시게, 이 장군. 날이 추우니, 얼른 그 문은 닫아 주고.”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운목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발밑에는 한 여인이 헐벗은 채로 엎어져 있었는데, 입가에 피를 토한 자국이나, 바닥의 모전(毛氈 : 카펫)에 선명하게 남은 손톱 자국을 보면, 고통에 겨워하며 바닥을 기다가 죽은 게 분명했다.
그 여인뿐만 아니라, 술상이 놓인 대전의 곳곳마다 여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대전의 옥좌를 향해 기어 오르다가 죽은 여인도 있었으니, 이운목이 그 많은 여인들의 시체들을 둘째로 하고 가장 놀란 이유인, 옥좌 위에 떡하니 앉은 영산왕을 향해 기어가다 죽은 게 분명했다.
고통과 원한으로 악귀처러머 일그러진 채 죽은 여인의 얼굴을 보면, 그 여인들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아, 너무 놀라지 마세요. 다들 술이 많이 취해 저러고 있을 뿐이니까.”
그 뻔뻔한 말에 이운목은 어이없이 영산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운목이 읍도 하지 않고, 고개와 시선을 내리지도 않았으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과거의 영산왕이라면 불호령을 내릴 태도였으나, 지금은 이 자리의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툭툭.
왕좌에 앉아 팔걸이를 손으로 두어 번 두드린 영산왕이 문득 실소하였다.
“아시오? 언젠가 선왕께서 나더러 왕이 되고 싶으냐 물으신 적이 있었소. 내가 그 무슨 황망한 말씀이냐고 했더니, 선왕께서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주면 왕위를 내려 주겠다 하였소. 후후후,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결국 왕위를 얻었지. 비록 선왕을 황제로 모시진 못했지만, 인자하신 선왕께서는 본인을 폐인으로 만들면서 나를 왕으로 만들어 주신 게요. 하하하. 혹시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불손해 보이시오?”
“…….”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오. 이 자리는 고려국왕을 위한 자리이지, 영산군왕을 위한 자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 뭔들 어떻소? 금상이 스스로 왕좌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이 자리는 빈 것이고, 그 빈 자리에 내가 앉는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냐는 말이오.”
낄낄 웃음을 흘리면서 계속 말을 잊던 영산왕이 문득 한숨을 흘렸다.
“나는 고려를 위하여 내 삶을 바쳤소. 권문세가들이 강탈한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주었고, 유자들이 담합한 관직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 내렸소.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방량해 주었고, 거대 사원에 착취당하는 백성들을 구제해 주었소. 어쩌면 나는 벌써 죽었어야 할 몸인지도 모르지. 그 많은 적들, 그 대단한 적들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이제껏 살아남은 게 오히려 신기한 노릇일 것이오. 하나,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소.”
그 담담하면서도 일절 머뭇거림조차 없는 단호한 말에 이운목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영산왕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것이 모두 그가 권세를 얻은 초년 시절의 일일 뿐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나는 죽음이 내 목 언저리에 도사릴 때도 부처님께 빌었다오. 뜻을 이루기 위해, 이 고려를 되살리기 위해, 이 하찮은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시더라도 부디 진명을 이루게 하소서. 부처께서는 내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셨소. 아니, 그런 줄 알았소. 나를 고려에 우뚝 세우셨으니까 말이오. 하나…….”
문득 영산왕이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고려는 이미 지옥이 아닌가. 아니라면 어찌 이토록 불심을 막아서는 마귀들이 많단 말인가! 부처께서 내 뜻을 널리 펼치라 하시며 고려를 내 손에 쥐어 주셨건만, 어찌 그것을 앗아 가는 자들이 사방에 넘실거리느냔 말이오!”
쿵쿵쿵!
“……!”
격분한 얼굴을 한 영산왕이 단상의 계단을 뛰어내리듯 달려오니, 이운목도 움찔하며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영산왕은 이운목에게 달려들듯 다가와 멱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하여! 나는 마귀들을 모두 불태워 죽여야겠소. 장군이 도와주시오!”
“그 무, 무슨……!”
이운목은 영산왕의 광기 어린 기백에 밀려 우물쭈물 물었다.
“마귀들이 왕성을 범람하면 이 왕성을 불태워 버리는 거요. 그리하면 감히 지고의 왕도를 범한 마귀들을 모조리 불태울 수 있지 않겠소?”
“이…… 미친!”
이운목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나, 영산왕을 힘껏 뿌리쳤다. 그에 영산왕이 넘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는데, 오히려 웃음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 이 장군! 맞소! 나는 미쳤소! 하나, 본디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미쳐야 하는 법! 어찌 정도(正道)만으로 마도(魔道)를 이길 수 있겠소?!”
“못들은 걸로 하겠소이다!”
이운목은 더 이상 예를 지킬 필요도 없는 자를 상대로 귀를 더럽힐 필요가 없다 여겼고, 곧바로 몸을 돌려 대전을 나가려 하였다.
“이 장군! 그대가 살고자 한다면, 내 말을 따르시오!”
“……!”
“왕성이 불타 혼란한 중이라면 그대도 탈주할 수 있지 않겠소? 혹시 저들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할 속셈이라면 꿈에서 깨시오. 저들이 나와 관련된 자들을 한 명이라도 살려 둘 것 같소?”
“…….”
“이미 개경에서 도망친 당여들은 정말 항복을 떠올리지 못해 피신한 것이라 생각하오? 이 장군, 잘 생각해 보시오.”
“그래도 그건 아니외다!”
쾅!
이운목은 대전의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나왔다.
우습게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보였던 호위군병들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기가 막힐 상황이었으나, 이미 기가 막힐 대로 막힌 이운목으로서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왕성과 적군을 함께 불태우라는 명은 절대 따를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최악의 상황에 쳐했다 한들, 그럴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왕성에 불을 놓으면, 어디 왕성만 불탈 것인가.
눈도 쌓이지 않은 개경이었으니, 왕성 바로 바깥에 고관대작의 저택이 있으며, 그 저택들은 결국 개경 백성들의 터전과 연이어 있었다.
그러니, 왕성에 불을 놓는 건 곧 개경 전체에 불을 지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대대로 욕을…….
“……!”
성난 발걸음으로 군진으로 돌아가던 이운목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멈춰 선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 조금 전 그의 뇌리를 스친 악랄한 생각에 스스로를 향해 치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불태우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다른 이가 불태운 것이라 여기면 되는 일이지 않은가.
이운목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정말 마귀가 그의 몸을 차지하기라도 한 듯이.
* * *
“어찌할 것이…… 겐가?”
여전히 적당한 말투를 찾지 못한 창 선장의 물음이 있었고, 석삼은 쉽게 답하지 못한 채 고민에 찬 얼굴로 나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미 섬의 앞바다에 당도한 지 대략 한 시진이 흘렀다.
그리고 곧바로 나제에 난리가 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여기저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고, 먼 곳임에도 도망치다가 잡혀 군병들에 의해 끌려가는 아마미의 백성들을 볼 수 있었다.
나제의 포구에 제법 큰 배들이 스무 척 넘게 있었으니, 모두 열십자 문장기가 달려 있었다. 시마즈씨의 배였다.
석삼이는 군병들 몇몇을 나제로 보내 사정을 알아 오게 하였는데, 한 식경 후 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시마즈씨의 배에서 전령이 왔다.
아마미 섬이 시마즈씨의 영토이고, 지금 아마미 백성들 중 죄인들을 잡아가는 중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전언이었다.
“죄인은 무슨…… 지랄하고 자빠졌네.”
문득 석삼이 중얼거리니, 시마즈씨의 전언과 군병들이 알아 온 내용으로 파악하건대, 시마즈씨가 아마미의 백성들을 납치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제주가 남양에 세력을 뻗치니, 아마미 섬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시마즈씨가 강수를 두어 아마미의 백성들이라도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땅을 얻지 못하면, 노예라도 얻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결국 제주의 함대에게 주어진 선택이자, 석삼이 결정해야 할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개입하느냐, 마느냐.
남양의 일을 전담하는 직책으로서 석삼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이번 출항의 목적은 유구섬에 있었다. 아마미 섬은 차후에 유구섬에 세력을 얻은 후 차차 그 세력에 흡수할 예정인 곳이었다.
게다가 유구섬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군사(軍事)가 있을 가능성이 크니, 안 그래도 그리 많은 군병을 데려오지 못한 상황에서, 아마미 섬의 일에 개입했다가 군병들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곤란했다.
개입할 명분도 없었다. 아마미 섬이 제주의 세력권도 아니고, 아마미 섬의 호족들 중 일부가 제주를 따를 수 있다는 의사를 표현한 바는 있으나, 명백하게 그것을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냥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뇨. 그럴 수는 없지요.”
“……?”
고심하는 게 안쓰러워 그에게 지워진 판단의 무게를 덜어 줄 셈으로 한마디 하였는데, 석삼은 의외로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어쩔 셈인가.”
“지금 아마미 섬에 상륙할 수는 없습니다. 뭍에서 시마즈씨의 군병들과 충돌하면 우리 군이 상하는 일이 분명 생길 테니까요.”
“그렇지.”
“하나, 바다에서는 아니지요. 우리가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지 않습니까.”
“하면……?”
“배를 모조리 수장시키겠습니다. 하실 수 있겠지요?”
시마즈씨가 당장 아마미 섬의 백성들을 데려가지 못하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물론이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만, 외곽에 있는 것부터 천천히 무너뜨려 주십시오. 포구에 닿아 있는 배에는 사람이 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시마즈씨의 군병들이 배에 태운 이곳 백성들을 인질로 삼고 배를 구하려 한다면 어찌해야겠는가.”
“하면, 포구에 닿은 배들을 치기 전에 먼저 서시(書矢)를 날려 반 식경 후 배를 침몰시키겠다고 경고하도록 하지요. 만약 그 후에도 배에 남은 자들이 있다면 그는 모두 시마즈씨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창 선장은 대사 석삼의 의견에 반대하진 않았다.
남양에서 그가 내린 결정은 제주공의 결정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다만, 우려스러운 건 이번 일이 시마즈씨와의 전쟁으로 번지는 건 아닌지 하는 것이네.”
“각오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아마 제주공께서도 이 자리에 계셨다면 저와 같은 판단을 내리셨을 겁니다. 아니라면, 제주공께서 저를 대사로 임한 것에 잘못이 있었다는 뜻이니, 그 또한 제주공의 책임이겠지요.”
“허허…….”
“우짜겠습니까. 일이 예까지 왔는데…….”
석삼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고, 일각이 지난 후 1천 5백 여의 군병과 20여 척으로 이뤄진 제주의 함대가 포성을 울리며 나제의 포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군사를 예상한 원항이긴 했으나, 유구섬이 아닌 아마미 섬에서 예기치 못한 첫 전투가 일어났다.
* * *
펑! 펑!
그저 두어 발을 쏘았을 뿐이었다.
개복포의 탄착지를 파악하기 위해 천뢰탄이 아닌 멍텅구리 탄을 쏘았고, 그마저도 개경성 남문 근처 무인지경의 땅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신호이기도 했다. 만약 약속대로 남문의 수문장이 창머리를 돌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하라는 신호.
한데, 기다리던 반응은 없었고, 당황스러운 광경만을 목격하게 되었다.
“불이야! 불이야!”
“적들이 화공(火攻)을 한다!”
성벽 너머로 불길과 연기가 비추기 시작한 뒤로, 그런 고함 소리도 연신 들리기 시작했으니, 연합군을 이끄는 탁기와 이두란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예정과 달리, 개경성의 수문장과 그 수하들 대신 응양군 상장군의 직속 수하들이 자리를 대신한 것을 알 길이 없었던 요동 제주 연합군으로서는 그냥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남문 수문장의 호응을 기다려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러는 중에 성벽 너머로 보이는 불길과 연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 * *
“으하하! 타올라라! 모두 불태워 버려라! 마구니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구나! 으하하하!”
왕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전 지붕의 평평한 서까래 위에 올라선 영산왕이 넝실넝실 춤을 추며 광소를 터뜨렸다.
이미 왕성 내 여러 전각들이 불타고 있었고, 그 불이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번지고 있는 와중에 영산왕이 그런 꼴을 하고 있으니, 누가 보아도 광인의 그것이었다.
하나, 영산왕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주변 어디에도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끌끌끌…… 쿨럭, 쿨럭!”
광기의 춤사위도 지쳤는지 문득 영산왕이 호흡을 거칠게 내뱉으며 기침을 해 댔다.
한참 기침을 하며 힘들어하던 영산왕은 문득 하늘 먼곳을 쳐다보며 허리를 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임에도 희뿌연한 느낌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신돈은 두 손을 뻗었다.
“다 잡힌 줄 알았거늘…….”
손가락을 오무렸다 폈다 하길 몇 번, 그마저도 힘에 겨웠는지 양팔을 떨군 영산왕은 문득 머리에 쓴 긴 모자를 벗어 던졌다.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금모(金帽)를 날려 대전 앞 조정에 떨어져 굴러다녔다.
단정히 빗은 영산왕의 머리카락도 불기운을 머금어 거칠어진 바람에 몇 번 맞으니 어느새 마구 헝클어졌다.
이어, 망포(蟒袍 : 이무기가 그려진 왕의 옷)도 벗어던지니, 앞서 모자가 그러했든 망포도 조정 위에 구겨져 바람에 쓸려 갔다.
털썩.
서까래 위에 주저앉은 영산왕은 옆에 가져다 놓은 몇 개의 호리병들 중 하나를 집어,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부처시여, 고려를 구원하소서. 온갖 마귀들이 날뛰는 고려를 정화하소서. 이 못난 불자를 공양하여 기원하나이다.”
격앙된 중에도 애써 마음을 억눌러 기도를 마친 영산왕은 머리 위에 쳐들고 있던 호리병을 천천히 거꾸로 돌렸다.
주르르륵!
병 안에 든 액체가 쏟아져 영산왕의 머리부터 적셔 내려갔다.
이내 병이 비자, 영산왕은 그 호리병을 지붕 아래로 던져 버리고는 다른 호리병의 액체로 연신 몸을 적셨다.
호리병들을 다 비우자, 영산왕은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었고,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나, 그가 몸을 떠는 이유가 비단 추위에만 있는 건 아닐 터였다.
그가 다른 쪽에 놓아 둔 주머니를 집어 그 안에 든 물건들을 꺼내니, 하나는 납작한 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쪽을 가죽으로 감아 문양을 낸,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긴 쇠붙이었다.
부싯돌과 부시.
그 두 가지를 양손에 쥔 영산왕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부싯돌에 부시를 부딪쳤다.
탁!
얼핏 불꽃이 튀는 듯도 했으나, 바람 탓에 영산왕이 바라는 쪽으로는 튀지 않았다.
틱!
다시 부딪쳤으나, 이번에는 제대로 부딪치지 않아 불씨조차 없었다.
“으하하! 이 마귀들이 마지막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마귀야, 물러가라!”
탁! 탁! 탁! 탁! 따악!
본능적으로 그 결과가 두려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두고 광소하던 영산왕이 미친 듯이 부싯돌을 내리친 끝에, 마침내 제법 큰 불꽃이 튀었다.
화르륵!
무릎 언저리에 떨어진 불꽃이 기름에 젖은 비단옷 위에 떨어졌고, 그 순간 흰 천에 번지는 붉은 물감처럼 불길이 몸을 타고 번져 나갔다.
“흐흐읍!”
그것에 놀란 영산왕이 얼결에 손으로 불길을 쳐 내려다가 겨우 멈추었고, 극통에 마구 떨리는 몸으로 겨우 가부좌를 틀었다.
“흐으, 부, 부처시여! 이, 이 나라, 나라를 보, 보우하소서! 화, 화상과 고통으, 을…… 이겨 내어…… 제 지, 진심을 즈, 증거하겠…… 나이다! 으아아악!”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앉아 있던 영산왕의 신형이 튕기듯 일어섰으니, 손발을 마구 휘저어 몸에 붙은 불을 떨쳐 내려 하였다.
“흐아, 흐아악! 사, 살려 줘! 사람 살려……!”
하나, 기름에 젖은 옷에 붙은 불길은 이미 그의 육신마저 제물로 삼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서까래 위에서 홀로 몸부림치던 영산왕은 기어이 발을 헛디뎌 높은 지붕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쿵.
“커어어…… 오아어어…….”
불길에 휩싸인 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검게 변해 가는 손을 뻗어 마지막까지 도움을 청하였으나, 이미 그의 입과 목은 불에 녹아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툭.
구원을 기대하며 손짓하던 팔마저 바닥에 떨어진 순간, 영산왕 신돈은 권력에 물든 괴물의 마지막 숨을 뜨겁게 토해 냈다.
* * *
“왕성마저 불이 가득합니다!”
수하들의 보고가 연이으니, 탁기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아무리 위기라지만 어찌 왕도에 불을 지를 생각을 한단 말인가.
성밖에서 한참이나 기다리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탁기와 이두란이 즉시 성을 향해 진격했으니, 성벽에서의 저항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문을 부수고 들어간 그들이 목격한 광경은 그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불지옥이었다.
곳곳에 큰 불길이 솟구쳐 화마를 낳으니, 그 화마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개경의 백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족을 구하기 위해, 불길을 끄기 위해 물통을 들고 난리법석이었지만, 워낙에 사방에서 번져 오는 불길인 터라,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미 싸움은 문제가 아니었다.
탁기와 이두란은 각각 일군을 이끌고 불길을 잡기 위한 소방군을 자처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여러 번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놈들아! 신돈을 불태우고 싶으면, 신돈만 불태우면 될 것이지, 어찌 우리까지 불태우려하느냐!”
“이 찢어 죽을 놈들아! 내 아이를 살려내라! 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곳곳에서 양민들이 몰려와 요동과 제주의 군병들을 붙잡고 늘어지니, 화상 때문에 뭉그러진 얼굴들과 연기에 질색되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 앞에서, 탁기는 자신들이 어떤 누명을 쓰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어찌 합니까? 상장군, 양민들이 우리 군병들마저 습격하고 있습니다!”
“……불을 꺼라.”
“하나, 자칫…….”
“불을 끄라 하였다! 때리면 맞으면서라도 불을 꺼라! 이대로 물러나면 다시는 개경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개경땅을 밟지 못한다. 탁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밟지 못하는 개경땅은 제주공 또한 밟지 못할 것이니, 탁기는 고려를 구원할 제주공을 위해서라도 불길을 잡고자 하였다.
누명이야 훗날 벗으면 되는 것, 그를 위해서라도 화마를 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불을 꺼라!”
화마의 횡포와 죽은 자들의 원한, 그리고 산자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요동과 제주의 군병들이 악과 오기로 물을 나르고, 불길을 때려잡았으니, 그 어떤 전투보다도 어려운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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