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91)
* * *
쿵! 쿠구궁! 쿠쿵!
제주 함대의 화포들이 연신 화염을 토하였으니, 시마즈씨의 배들은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았다.
공격이 시작된 이후, 시마즈씨의 배들도 움직여 저항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원거리에서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제주 함대에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도주할 수도 없었다. 나제 포구를 중심으로 제주 함대가 시마즈씨의 배들을 포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0척가량 침몰 내지 반파시킨 후, 제주 함대로부터 들리는 포성은 잠시 멈췄다.
나머지 시마즈씨의 배들은 포구에 닿아 있거나 가까운 곳에 있어, 납치된 아마미의 백성들이 승선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여, 이미 계획한 대로 배 한 척을 가까이 보내 포구에 경고문을 매단 화살을 몇 발 쏘게 하였다.
“음, 저기 시마즈씨로부터 전령이 오나 보네.”
제주 함대의 강대한 공격에 저항을 포기하고, 두려움에 떠는 분위기에 휩싸였던 시마즈씨의 배들 사이에서 한 척의 나룻배가 제주의 함대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창 선장은 함대 중 한 척을 내보내어 검선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그 배 위에 몇몇의 왜인들이 올라타는 게 보였다.
“일단 무장하진 않은 모양이군. 음, 장수라…… 시마즈씨의 장수가 직접 온 것 같네.”
검선을 수행한 제주의 배에서 보내는 깃발 신호로 전해진 정보에 석삼과 창 선장은 그들을 만나 보기로 하였다.
잠시 후, 기함으로 옮겨 탄 왜인들은 두 명이었다.
하나는 일반 관리인 모양이었고, 다른 한 명은 무장을 해제하긴 했지만, 왜국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느낌상 관리풍의 인물은 장수로 보이는 자의 수하인 듯했다.
왜국 장수가 가슴을 펴고 당당히 다가왔다.
그 모습이 갑판 중앙에 의자를 펴고 앉아 있는 석삼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콧김도 거세게 뿜어지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제주의 군병들이 창대로 그를 막아서고, 금방이라도 발도할 준비를 한 상태라, 그가 화풀이를 할 방법은 전무했다.
솔직히 말해서 석삼은 속으로는 살짝 겁을 먹었다. 예전에 제주공과 천마산에서 조우한 왜구에 의해 죽을 뻔한 기억도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했으니, 그 또한 몇 년 사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덕이었다.
“나는 시마즈의 우지히사(島津氏久)다.”
으르렁거리는 양 낮은 음성으로 장수풍의 인물이 말하니, 석삼은 통역을 받아 그 자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가독과는 무슨 사이오?”
“……내 형님이시지.”
석삼은 생각보다 지체 높은 자가 이곳에 왔다고 여길 뿐이었다.
하나, 몽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우지히사가 현 가독 모로히사의 아우이긴 하지만, 훗날 독립하여 시마즈씨 내 가독투쟁에 나선 인물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 먼 남쪽 바다에까지 나와 아마미의 백성들을 납치하는 일 따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지히사가 가독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점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이용할 생각까지도 했을 것이다.
하나,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하는 석삼은 태연한 연기에 몰두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어째서 우리를 공격한 것이오? 내 이미 전령을 보내 개입하지 말라 하였소.”
“그거야 그쪽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오. 나는 아마미 섬이 시마즈씨의 영토라 생각하지 않소.”
“그렇다 한들! 제주가 우리를 공격할 자격은 없소!”
격분한 음성으로 우지히사가 소리치자, 석삼이 시끄럽다는 양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말하였다.
“왜구를 때려잡는 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오?”
“뭐, 뭣이……!”
“하고 있는 꼴을 보자니, 딱 예전에 고려에서 행패를 부리던 왜구가 하던 짓과 같지 뭐요? 나는 고려인이고, 이 함대의 군병들 중 많은 이들 또한 고려 본토에서 왔으니, 왜구가 저지른 짓이야 아주 익숙하지. 그리고 왜구라면 죄다 쫘악쫘악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똑같이 품고 있고.”
“…….”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석삼이 시마즈씨를 왜구로 규정하자마자, 배 안에 분위기가 경계 정도에서 완연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버렸다.
제주의 군병들 중 삼분지 일 정도가 본토 출신이라, 다들 왜구라면 이를 가는 심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제주 출신 군병이라고 왜구에 적대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살갗마저 따갑게 적대감이 소용돌이치자, 당당하던 우지히사조차도 당황하여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고, 관리 차림의 왜인은 아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시무라, 겁먹지 마라.”
애써 침착을 유지하던 우지히사가 두려움이 떠는 관리를 향해 말하니, 통역이 말해 주는 것을 듣고, 석삼이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이시무라인 모양이오? 가신이오?”
“……그렇소.”
“대낮에 양민들을 납치하는 주제에 겁쟁이인 모양이군.”
“……!”
통역으로 석삼의 말이 전해지니, 우지히사와 이시무라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특히 이시무라는 옷자락을 움켜쥐며 격분한 듯 말문을 열어 힘껏 말하였다.
“무슨 말로 겉치레하여도, 이번 일은 제주가 시마즈씨를 습격한 것이오! 이것이 진정 제주공의 뜻이오? 정녕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 여겨도 좋은 것이오?”
아마도 이 자리에 제주공이 없는 것을 알고, 제주공의 허락 없이 습격한 것이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제주공의 허락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냐는 압박으로 제주 함대의 기를 꺾을 속셈인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석삼은 특명전권대사였다.
아직 그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 심지어 석삼 본인도 다소 오해를 가지고 있는 특명전권대사.
“전쟁? 하게 되면 해야겠지. 아마 제주공도 굳이 마다치는 않으실 거요. 그리고 우리 군병들은 오히려 기꺼워할 것이고. 이보게들!”
석삼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시마즈씨 또한 고려에서 왜적질을 하던 자들이다. 이참에 시마즈씨와 전쟁을 하여 아주 절단을 내 버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물음은 수많은 대답들을 낳았다.
싹다 쓸어버리자는 둥, 가죽을 벗겨 버리자는 둥, 불에 태워 버리자는 둥 군병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표현으로 전쟁을 요구하였다.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진 갑판 위에서 쏟아지는 살기 어린 시선과 목소리들에 우지히사와 이사무라의 안색은 시꺼멓게 죽어 갔다.
“지, 지금 당장 위세가 등등하다고 전쟁마저 우습게 보니, 참으로 한심한 자가 아닌가! 아무리 제주공이라 해도 시마즈씨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오.”
애써 우지히사가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석삼은 콧방귀만 뀌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시마즈씨가 전쟁에 나서겠지.”
석삼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내 생각엔 그대들은 지금 당장 살아남을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우리는 다시금 방포할 것이고, 시마즈씨의 배들은 남김없이 침몰할 것이오.”
“……!”
화살로 날린 경고문을 보지 못하고 온 듯 우지히사가 당황하였다.
“서둘러 퇴함하라 명해야 군병들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이오. 물론, 뭍에 나간다 하여도 그대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군.”
“……!”
석삼의 말에 담긴 뜻을 우지히사가 약간 늦게 깨닫고는 크게 격동하였다.
지금 남은 군병들을 다 상륙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마즈씨에 줄을 댄 아마미의 호족들이 있긴 했지만, 이번 일로 그들도 더는 시마즈씨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배를 모두 잃고, 군병들도 크게 줄어든 시마즈씨가 아마미 섬에 고립된다는 건 적진 한가운데에 낙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노한 아마미의 백성들과 시마즈씨를 따르다 뒤통수를 맞은 호족들이 과연 자신들을 그냥 살려 둘 것인가.
그 물음의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우지히사가 떨리는 입술을 애써 움직이려 하였지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석삼은 비소를 머금으며 말하였다.
“이제 돌아가시오. 이미 말했듯 곧 다시 방포를 해야 하니.”
“사정을 좀 봐주시오. 살려 주시오…….”
“안 돼. 안 봐줘. 돌아가.”
석삼이 짧은 왜어와 함께 턱짓하여 명하니, 제주의 군병들이 우지히사와 이사무라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몸부림치며 더욱 소리쳤지만, 어차피 통역도 하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속은 시원하군.”
구질구질한 왜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던 창 선장이 실소하며 말하였다.
“나중에 유구국에서 귀환할 때 들르도록 하죠. 잘하면 재밌는 상황이 되어 있을 듯합니다.”
“근데 자네, 정말 제주공의 심복이 맞긴 하군. 생긴 건 전혀 딴판인데, 얼핏 제주공께서 이 자리에 계신 듯했네.”
“배운 도둑질이 그거라…….”
“…….”
석삼은 다시 멀어지는 나룻배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우지히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략 일다경이 흐른 뒤에 다시 제주의 함대가 일제히 포격하니, 시마즈씨의 남은 배들은 이내 전몰하였다.
힘껏 울리는 고동 소리와 더불어 삼태극의 문장기를 휘날리는 제주의 함대는 남쪽으로 사라졌다.
* * *
‘녹둔도’에서 바라보는 ‘두만강’의 하구 안쪽은 상당히 넓었다.
만약 녹둔도를 중심으로 일대에 고을을 세운다면, 해안 대신에 강 하구 안쪽으로 포구를 세우는 게 나을 듯했다.
아무래도 해안과 마주하는 섬이 없어 자연적인 방파제로 삼을 만한 게 없고, 수심도 깊어 인공적인 방파제를 세우는 것도 힘들 것임을 생각하면 그게 나았다.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해안에 모래가 두둑하게 쌓여 두만강 하구 끝을 좁히고 있는데, 그것 또한 하구 안쪽에 포구를 만드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하였다.
먼 바다의 물결이 사구(砂丘)에 막혀 강 안쪽까지 영향을 주지 않을 테니, 보다 안전하지 않을까.
“에휴…….”
강 하구를 바라보던 몽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에 아직 섣부른 망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녹둔도를 중심으로 고을을 세우는 건 결국 해야 할 일이긴 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위도 0.5도 만큼만 올라가면, 현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이었다. 그곳은 겨울에 바다가 얼기에 녹둔도 근방이 부동항을 건설할 북쪽 한계 지역이었다.
그러니 제주와 연계된 나라를 북방에 따로 세운다 할 때, 녹둔도에 고을을 세워 출입항으로 써야 할 것이다.
문제는 출입항 역할을 할 고을을 세우는 일에 앞서 주션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것이 예상보다 힘들 것 같다는 점이었다.
주션족은, 아니 정확히 녹둔도에 모여든 거지 떼와 같은 일부 주션족들의 두 족장 아하추와 먼터무는 답답하기 그지없을 만큼 ‘시원한’ 인간들이었다.
“바람이 찬데도 여기 있는 걸 보니, 속이 많이 답답한 모양이구먼.”
문득 등 뒤에서 화극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곁에 그가 와서 서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인은 호인인 모양입니다.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허허, 자네도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지 않나.”
“그렇죠. 정말 작은 걸 기대했을 뿐인데, 그 정도도 안 되는 자들이라 답답합니다.”
주션족들이 몽주의 뜻을 따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하추와 먼터무는 몽주가 제안한 모든 것에 ‘OK’였다.
그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건 당연히 OK.
그들에게 지난날 금나라와 같은 나라를 세우는 것을 제안하니 그것도 OK.
같은 부족이지만 동떨어져 살고 있는 같은 오도리 및 후르하 부족들을 끌어와 달라는 것도 OK.
다른 주션족 부족들을 포섭해 달라는 말에도 OK.
심지어 그들을 몰아낸 우디거 부족을 공격하고, 나아가 나하추를 몰아내는 계획에도 OK.
그 어떤 어려운 제안에도 곧바로 수긍하는 걸 본 몽주는 결국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제안에 진심으로 응하고 있지 않음을.
그저 무기와 식량만 얻을 수 있다면 지옥이라도 따라가겠다는 자세가 아니라면, 무기와 식량을 얻기 위해 지금은 거짓으로 따르는 척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뻔했다.
그렇기에 몽주는 꺼림칙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서 더 큰 지원을 한다면 저들 주션족은 곧바로 배신할 테니까.
“아무래도 그들이 주도하는 나라를 세우게 만드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세력만 키워 주고 훗날에 뒤통수를 맞고 싶진 않으니까요.”
화극은 대답하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시야 외각에서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더 깊숙이 개입할 생각입니다.”
“……?”
주션족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화극은 의아한 시선으로 몽주를 바라보았다.
“더 깊숙이?”
“그렇습니다. 주션족 왕가를 세우는 대신 각 부족 족장들의 연합체가 왕의 역할을 하고, 그 연합체에 제주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 생각이죠. 물론, 공식적으로는 한 자리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연합체의 의사 결정을 제주가 주도하게 만들 것이고요.”
화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지었다.
무슨 놈의 나라가 그 모양이냐는 화극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왕국이 아닌 국가 체제를 생각하기 어려운 게 당대의 상식임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왕권이 강한 나라, 약한 나라가 있을지언정 왕이 없는 나라라는 건 이 시대의 시선으로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엄연히 문명국의 백성이자 그중 가장 주도적인 위인인 몽주가 몽매한 지경에 스스로 처하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은 꼭 제주가 이곳에서 하나의 부족이 되겠다는 말처럼 들리네만?”
“그렇게 생각하셔도 될 겁니다. 주션족들의 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입조하게 하여 고려와 공동 운명을 걷도록 만들기에는 너무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깊이 개입해야 하지요. 생각 같아서는 아예 저들을 정복하여 지배하는 게 맘 편하겠으나, 그게 실현되기는 어려우니, 식량과 무기를 미끼로 저들의 우위에 서서 대국(大局)을 이끌고자 하는 겁니다.”
일종의 금력을 바탕으로 한 귀족 정치였고 과두 정치를 노리는 셈이었다.
“허허, 어려운 소리로구먼. 어쨌든 자네가 호인들을 너무 믿지 않기로 한 것 같아 일단은 다행이네. 근데 저 똘추 같은 두 족장들이 그에 응할까?”
“설마 거절할까요? 지금은 별소리를 다 해도 일단은 하겠노라 할 겁니다. 아마 식량과 무기를 주겠다고 둘이 서로 엉덩이를 핥으라고 요구해도 하겠노라 대답은 잘할 겁니다.”
“……으엑, 그 무슨 해괴한 소린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 * *
얼마 후, 군진으로 돌아간 몽주는 다시 아하추와 먼터무를 불러 물었다.
“앞서 제안한 것들은 모두 취하하겠다. 대신 이곳에 고을을 세우는 것을 도와라. 그리하면 식량과 무기를 줄 것이다.”
몽주 ‘녹둔도’에 고을을 세우는 것을 조금 더 설명해 주니, 아하추와 먼터무가 무어라 말하였는데, 조금 불만스러운 모습이었다.
몸살로 아프다는 요동군 소속 주션족 출신 군병을 억지로 불러다 통역을 시켰더니, 한참이나 걸려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 제안한 것보다 많이 축소된 제안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에 고을을 세운 후에도 너희에게 시킬 일이 많을 것이니, 그 일을 하면 당연히 식량과 무기를 줄 것이다.”
몽주는 굳이 벌써부터 부족 연합체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비슷한 형식의 정치 체제가 부족들에게 있으니, 그들이라면 오히려 화극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벌써부터 많은 걸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계속 식량과 무기를 준다는 말을 해 주니, 아하추와 먼터무는 그렇다면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나 그들이 오직 바라보는 건 식량과 무기, 정확히 말하자면 생존뿐이었다.
그들 부족들의 미래상이나, 발전, 혹은 시국을 틈탄 봉기 같은 건 상상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역사에서 아하추나 먼터무의 운명은 명의 흥기와 더불어 건주위 만호(建州衛 萬戶)라는 관리에 임하는 행운으로 이어졌지만, 그야말로 운이 닿은 결과가 그러할 뿐, 실상 그들은 생존을 따라 움직인 게 전부였다.
물론, 역사에서 그러했듯 누르하치 같은 희대의 영웅이 등장한다면, 초원을 일통하고 나아가 중국을 지배하는 업적을 세울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아하추나 먼터무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몽주는 이번에도 아하추와 먼터무에게 행운이 따른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신을 만났지 않은가.
* * *
“고려의 국왕 전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추라.”
“…….”
해가 진 후, 현백 염흥방이 나타나 자신이 금상을 보위하고 있음을 알렸고, 이어 내시들이 금상을 데려왔다.
왕성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는지 양민의 차림을 한 채, 역시 양민의 차림을 한 내시의 등에 업혀 울상을 짓고 있는 12살쯤 된 소년을 본 탁기의 소감은 참으로 허탈하다는 것이었다.
“힘들다…… 이만 쉬고 싶구나…….”
금상의 울상은 본인의 고달픔만을 향한 것일 뿐, 화재로 폐허가 된 왕도 개경과 그 안에서 큰 피해를 입은 개경 백성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여염집 일개 아이도 상황의 위중함을 알 수 있을 터인데, 이 나라의 임금이라는 소년은 매캐한 탄내에 코를 훌쩍이고 인상을 찌푸릴 뿐, 백성들의 고난을 직시하려 하지도 않았다.
금상도 불길을 피하기 위해 고생을 한 흔적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 봐야 결국 내시의 등에 업혀 있던 게 전부였다.
설령 마음에 없더라도, 보는 눈을 생각해서 백성들을 위무하거나, 소화하느라 지친 군병들을 향해 위로의 한 마디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 내시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금상은 오직 따뜻한 휴식처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시겠나이다.”
청해백 이두란이 수하를 부려 금상의 일행을 안내하게 하니,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 군진 중 가장 큰 군막을 금상에게 내주었다.
“우리는 왕성으로 가십시다. 신돈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확인해야지.”
“금상을 보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탁기가 물으니, 이두란이 피식 실소하였다.
“내가 심양왕 저하께 명을 받은 건, 금상의 안위를 확보하라는 것이지, 금상에게 아첨하라는 건 아니었소.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요.”
이미 금상은 상징일 뿐이었고, 심양왕의 양계 지배와 제주공의 양남 지배를 인정하는 역할만이 존재의 모든 이유였다.
씁쓸한 표정으로 탁기가 말에 올라타 이두란과 더불어 왕성으로 향했다.
남문 근처에서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진, 낮은 언덕 위의 왕성으로 길을 나서니, 나아가는 족족 죽은 자들, 다친 자들, 그리고 지친 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군병들이 힘껏 화마와 싸워 화재를 진압하는 데에 나섰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이 사단을 일으킨 자들에 불과했다.
그나마 초기의 소요(騷擾)적 분위기가 화재 진압의 급박함 앞에서, 그리고 연합군의 노력을 보면서 빠르게 잦아들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악다구니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니, 군병이 군병처럼 보여서 더 이상 대들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개경 백성들의 그런 시선 앞에 화공은커녕, 그저 천뢰탄도 아닌 철 덩어리 포탄으로 개복포 두어 발을 쏘았을 뿐인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연합군의 장수들은 물론이고, 군병들도 그 억울함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당장 백성들에게 해명해 봐야 통하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감정만 북돋을 것임을 안 탁기와 이두란의 자제하라는 명 때문이었다.
화재에 대한 두려움 탓에 불빛도 거의 없는 황량한 거리를 지나 왕성에 닿으니, 왕성 또한 엉망이었다.
문짝이 불타 넘어진 성문으로 들어가니, 무너진 전각들이 보였고, 그 폐허를 넘어 대전 앞에 닿았다.
대전은 불타지 않았으나, 앞쪽 지붕의 서까래에 그을린 흔적이 모닥불에 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대전 앞에 몇몇의 군병들이 지키고 있는, 거적때기에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대체 뭐하다가 여기서 혼자 불탄 건지 모르겠군.”
“신돈이 확실하긴 한 겁니까?”
“신돈의 내관과 의관을 불러다 확인시켰는데, 맞다고 했다더군. 남아 있는 장신구도 신돈의 것이고, 무엇보다 덧니의 모양과 위치가 같다고 했다네.”
여전히 아닐 수도 있지만, 정황상 맞긴 맞은 모양이었다.
탁기와 이두란이 거적때기 앞에 서자, 고기 탄내를 훅 느낄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군병에게 그 거적때기를 걷게 하니, 검게 탄 끔찍한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전장에 이력이 쌓여 온갖 잔인한 광경에 익숙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석년 오늘 먹은 것까지 토할 만한 모습이었다.
“신돈 느낌이 나긴 하군요.”
“나도 그렇소.”
완전히 연소되어 좀 작아진 느낌도 있었지만, 상상으로 살을 붙여보니, 신돈이 불에 탔다면 딱 이 정도일 듯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주공을 따라 다니며 신돈을 본 적이 여러 번이니, 충분히 가늠할 만했던 것이다.
탁기는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신돈의 치아를 살폈다. 본래 신돈의 치아 상태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치아에 특별한 구석이 있나 싶었던 것이다.
타 버린 덕에 그냥 드러난, 검댕이 낀 치아를 보니 확실히 덧니가 하나 보이긴 했다.
의관이 그 덧니의 모양와 위치가 같다 했다면 분명 구분이 갈 만한 증거였다.
“눈이 오는구려.”
신돈의 시체를 따로 치워 보관하라 명하고 나니, 하늘에서 촉촉한 무언가가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입니다. 잔불 걱정은 덜었군요.”
“조금 더 일찍 내렸으면 좋았으련만.”
탁기와 이두란이 다시 왕성을 나서니, 언덕 위에 있는 덕에 개경의 남쪽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중에도 곳곳마다 전소되거나 크게 불탄 가옥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북쪽은 괜찮다 하는데 남쪽, 특히 동남쪽은 완전히 새로 지어야 할 듯하다 하더이다. 왕성도 반은 새로 세워야 할 듯하고.”
“차라리 다른 곳에 왕성을 세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셈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이들이 타 죽거나, 큰 화상을 입은 개경이었다.
귀신을 믿진 않지만, 정말 귀신이 있다면 원한이 쌓인 귀신들이 개경 안에 가득할 것이다.
“그거야 우리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 않겠소.”
심양왕과 제주공이 결정할 일이니, 왕성과 개경 시가지의 재건 여부는 물론, 고려의 존위 자체부터도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큰 불이 난 것일까요? 우연 같지는 않습니다만.”
“신돈의 당여들이 모두 사라졌다는데, 아무래도 그들 중 누군가가 사주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소. 혼란이 있다면 그들이 벗어나기 편할 터이니.”
이두란의 짐작에 탁기는 이를 악물었다. 신돈의 당여들이야 끝까지 잡아낼 터이니, 일일이 추심하여 반드시 방화한 자들을 잡아내고 말겠다 각오한 것이었다.
“그런 자가 있다면, 절대 곱게 죽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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