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94)
* * *
“가주, 하명하신 대로 처리하였습니다.”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구릉 위에서 바다를 묵묵히 보던 가네시로씨의 가주는 심복의 말에 말문을 열었다.
“저들이 방포를 시작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면 안 될 것이야. 두렵고 당황하여 도망치고 싶어도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일임을 분명히 알려 두게.”
“도주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심복은 가주의 말을 사병들의 도주를 우려하는 것이라 여기고 대답했으나, 가주의 뜻은 그게 아니었다.
“저들 화포가 단지 무쇠나 돌덩이를 쏘는 게 아니라 따로 다시 폭발한다 하니, 그것에 당하는 자가 없게 하라는 말이네.”
“그리하겠습니다.”
가네시로씨의 가주는 잠시 시선을 돌려 슈리성이 있는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고려에서 온 이들이 싸움을 선언하자마자 사토왕은 급히 왕성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그 자리에서 가급적 빨리 원군을 보내겠노라 하였지만, 한 시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군이 출진했다는 전령조차도 없었다.
사실 가네시로씨의 가주도 그리 기대한 건 아니었다. 사토왕이 그러고자 하여도 주변에 가득한 슈리의 호족들이 막아섰을 것이다.
이참에 나하 호족들의 힘을 좀 빼놓자면서.
이곳 유구가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는, 물론 세상이 넓다는 거야 알겠지만, 유구의 세상은 다른 세상과 동떨어졌다 여기고 있는 슈리의 호족들은 설마 나하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리라고는 여전히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하가 배반하여 적을 들이지 않는 이상 말이다.
하나, 직접 북방의 화국(왜국)과 서방의 명국을 오간 경험이 있는 가네시로씨의 가주는 유구의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를, 또 유구와 다른 곳이 전혀 동떨어진 곳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낡은 배로도 며칠이면 닿을 수 있는 화국에 갔을 때, 그 넓은 땅과 많은 백성들을 보고 기함했던 가주는 몇 년 전 그가 왕명을 끌어내어 입조를 청하기 위해, 명국에 갔을 때는 아찔함마저 느꼈었다.
크다, 넓다 말은 들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세상 속의 유구는 정말 쌀 한 톨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껏 유구가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화국이나 명국이 유구에 관심이 없는 덕임을 명백히 깨달은 가주는 언젠가 외국에서 유구에 관심을 가지는 날, 유구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그게 고려일 줄은 몰랐지만…….”
화국보다 더 북쪽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도는 유구에서도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온 유민들이 유구에도 뿌리를 내렸으니.
하나, 그들의 말마따나 너무나 먼 곳이라 유구와 또 다른 인연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는데, 세상은 정말 영문 모를 일로 가득했다.
“여기 계셨습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아들 준(駿)이었다.
“언제 적들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데 가택으로 돌아가시지요.”
이제 언제라도 가주직을 건네주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믿음직하게 큰, 서른 살에 이른 아들을 보며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발걸음을 바로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손짓하여 아들을 곁에 두고 말하였다.
“너는 세작이 전해 온 전언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뜬금없는 물음에 준은 잠시 당황했다.
이미 고려가 남산국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것은 세작들의 전서로 중산국에도 전해졌고, 주요 호족 중 하나인 가네시로씨에도 알려졌다.
“아무래도 세작이 크게 놀라 과장되어 적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도 과장되었다 여기긴 한다.”
세작의 전서에 담긴 내용의 태반이 고려의 화포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고려의 화포는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뒤집어엎을 정도임에 틀림없었다.
“문제는 어느 정도 과장되었느냐는 것이야.”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뒤집어 놓을 위력은 아니더라도, 성벽을 무너뜨리고 집을 뒤집어 놓을 위력이라면 유구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가주의 얼굴에 불길한 근심이 가득하니, 아들 준이 물었다.
“혹시 아버님께서는 왕이 잘못된 선택을 하셨다고 여기시고 계십니까?”
“…….”
선뜻 대답은 없었지만, 가주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의중을 짐작할 만 했다.
그러자 준은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나라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토왕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또, 아버님께도 손해일 것이고요.”
“그렇지. 왕권을 높이고 싶은 왕은 유구의 일통이 그 방법이라 여기고 있지. 우리 가문 또한 나하를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특히 남산국이 바다로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 이익이고.”
사토왕은 호족들의 간섭을 뿌리칠 수 있는 왕권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가주가 왕에게 명국으로의 입조를 제안하여 설득에 성공한 것도 명국의 인정을 받아 사대를 함으로써 권위를 높이고, 나아가 유구를 일통하는 또 하나의 큰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아직 명국으로부터 사대의 관계를 허락받은 건 아니었지만, 일단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조만간 다시 입조하여 사대의 예를 갖출 것이 분명한 바, 그때가 되면 그것을 명분으로 사병의 착출을 거부하는 호족들을 압박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남산국과 북산국을 병합할 생각이었다.
나하의 입장에서도 다른 경쟁 고을이 있는 것보다는 유구의 출입항으로서 나하가 홀로 우뚝 서는 게 나았다. 가네시로씨 자체가 중앙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대신 교역으로써 큰 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힘을 쏟고 있었으니, 사토왕과 가네시로씨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셈이었다.
“하나, 그 또한 유구가 살아남고서 해야 할 걱정이 아니겠느냐.”
가주는 한숨 섞인 토로와 함께 다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보았고, 포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스무 척이 넘는 거함들이 있었다.
그 함대로부터 유구의 작은 배들은 아무리 모아도 도저히 대적할 마음이 들지 않는 기세가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조용히 바다에 떠 있지만, 조만간 저들이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나하가 피해를 입을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것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앞서 왕에게 요구하여 그 피해를 상쇄할 이득도 얻었다.
하나, 만약 나하가 피해를 입는 걸 감수하여도 저들을 막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해 보고 고려의 유민들에게 땅을 내주었다는 남산국이 그렇게나 형편없는 나라였던가?
“아들아.”
가주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면서 준을 불렀다.
“네, 아버님.”
“긴 장대를 하나 마련해 두어라.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
준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 못하고, 앞서는 가주의 발걸음을 뒤쫓았다.
* * *
제주 함대의 포문이 열린 것은 석삼이 전투를 선언한 지 한 시진 넘게 흐른 뒤였다.
워낙에 대사 석삼이 전격적으로 전투를 선언하는 바람에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시(申時 : 오후 4시)에 이르러 방포를 시작하니, 첫 목표는 나하 포구에 인접해 있는 관청이었다.
삼별초의 후예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남산국에서 얻은 조잡하지만 판별이 가능한 지도를 얻은 덕에 중산국 슈리의 지리는 이미 대략 파악된 상태였으니, 방포를 함에 있어 주저가 없었다.
쿠쿵 소리와 함께 천뢰탄에 연달아 직격된 관청, 포구를 관리하기 위해 근래에 새로 지었다는 제법 높은 담벼락을 가진 그 관청은 삽시간에 무너지고, 불에 타기 시작했다.
관청을 가장 먼저 목표로 한 것은 그곳에 사람이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본래 관리들이 가장 먼저 도망가는 법 아닌가.
만약 포구에 가까운 곳에 평범한 백성들이 남아 있다면 관청이 삽시간에 박살 나는 것을 보고 겁을 먹고 도주하기라도 바란 것이었다.
물론, 이미 해안에 가까운 나하의 백성들이 소개한 것을 알고는 있으나, 혹시 모를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군진들을 향해 방포하겠네.”
“예. 그리하십시오.”
석삼에게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창 선장은 신호병에게 명하여 함대에 깃발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얼마 뒤, 두 줄로 늘어선 제주의 함대에서 쉼 없는 방포가 시작되었다.
귀청을 울리는 포격음에도 표정의 변함이 없이 나하를 바라보는 석삼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중에 살짝 못마땅함이 묻어 있었다.
포격이 너무나 ‘얌전’하다는 것에 대한 작은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결정하는 건 그의 몫이고, 전투 자체를 수행하는 것은 창 선장과 다른 선장들의 몫이기에 굳이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하나, 만약 그가 창 선장이었다면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니까 중산의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덕을 위주로 먼저 포격하는 대신 처음부터 나하의 마을로 직접 포구를 향했을 것이다.
누가 지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하의 병사들은 언덕 위에서도 약간 뒤쪽에 자리 잡고 모래를 쌓아 앞을 막았다.
화포의 공격에 나름 제대로 된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천뢰탄에 직격을 당한다면 살상이 있는 건 변함없지만, 직격만 피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비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적병들을 목표로 포탄을 날려 봐야 효과는 적고, 포탄의 낭비만 가중될 뿐이었다.
차라리 나하의 포구 마을과 그 배후를 직접 공격하여 불태운다면, 차후에 상륙한 뒤에도 진군함에 유리할 것이고, 운이 좋다면 격분한 적병의 돌출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창 선장이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제주공으로부터 받은 명 때문이라는 걸 석삼도 잘 알고 있었다.
창 선장에게 전투 지휘를 맡기면서, 가급적 유구의 백성들이 다치는 것을 피하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주공이 그런 명을 내린 이유도 가늠하지 못할 건 없었다.
지금은 유구의 백성이지만, 유구가 제주의 영역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제주의 백성이자, 제주공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 석삼은 그것이야말로 제주공의 단점이자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다.
안민하려는 제주공의 뜻은 아나, 그거야 백성이 된 후에 아껴 주면 되는 일이지, 지금은 그저 중산국의 백성일 뿐이지 않은가.
“이래서야 해가 지기 전에 상륙을 시도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제주 함대의 방포는 계속되었다.
* * *
“하시몬, 안 돼!”
쾅!
폭발과 함께 한 사내의 몸이 분시(分屍)되어 흩어졌고, 주변의 다른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비산한 먼지와 흙이 후두둑 그들의 몸 위로 떨어지니, 그때마다 병사들은 죽음이 그들을 두드리는 것 같아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바다에서 누군가 소심한 방포에 불만을 표하고 있을 때, 정작 포격의 대상인 나하의 사병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고려의 화포가 가진 위력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포탄이 따로 폭발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위력이 셀 리가 없다 여겼는데, 막상 경험한 고려의 화포는 진정 재앙과도 같았던 것이다.
땅을 파서 흙담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파낸 깊이가 얕고, 쌓은 담도 약한 탓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포탄이 바닥에 떨어진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 터지니, 가끔은 바깥에 떨어진 포탄이 굴러서 병사들이 있는 곳에까지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진지가 언덕 꼭대기에서 뒤쪽 아래로 살짝 경사진 곳에 위치한 탓이었다.
물론, 직격되면 그 주변의 사병들이 박살 나는 건 당연했다.
가끔 만용을 부리거나 오히려 겁을 크게 먹어, 근처에 떨어진 포탄을 들어 다른 곳에 던지려는 자들이 있기도 했다.
조금 전 하시몬이라는 녀석이 그런 것처럼.
포탄이 곧바로 터지는 게 아님을 알고 그리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건 결코 아니었으니, 빠르면 착탄과 거의 동시에 터졌고, 아무리 늦어도 숨 몇 번 쉬고 나면 터지니, 사병들로서는 포탄이 떨어지면 반대편으로 몸을 던지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가끔은 머리 위 공중에서 터지는 포탄도 있었고, 그런 재수가 없는 경우를 당한 사병들은 피할 기회도 없이 피를 뿌리며 죽거나 고통에 나뒹굴어야 했다.
“그만해! 이 개자식들아!”
포탄에 맞서 창과 활을 든 사병들은 공포에 이기지 못한 고함을 쳐 댔다.
그들의 신세는 그물에 걸려 무력한 사냥감과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포격이 멈춘 것은 방포가 시작된 지 한 식경이 넘게 흐른 뒤였다.
슬슬 태양이 서편 바다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그 시간, 하나 제주 함대의 방포가 아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앞선 열의 함선들이 포구로 접근하고 다시 진형을 갖춘 후, 방포를 재개한 것이다.
그렇게 재개된 방포의 목표는 앞선 공격과 달리 마을을 향한 것이었으니, 포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건물부터 일일이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한 면에 12문의 화포를 가진 12척의 배가 일제히 방포하니, 한번 방포할 때마다 포구 마을이 뒤로 쭉쭉 밀려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하가 성황을 이룬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석벽을 세워 둔 건 아니니, 포격하는 족족 건물에 명중되고, 그중에 섞인 천뢰탄이 터질 때마다 나무와 흙, 그리고 풀 쪼가리로 지어진 집들은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대략 각 함선에서 약 십 회의 방포가 있은 후에 포구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평범한 양민들의 집이었으니, 방포를 견디지 못하는 건 물론, 가끔은 두어 집이 천뢰탄 하나에 한꺼번에 무너지기도 했다.
그렇게 200미 넘게 방포의 위력에 쓸려 가니, 이대로 제주의 군병들이 포구로 상륙한다 하더라도 방해를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앞서 나선 함선 중 하나가 포구를 향해 서서히 진입하기 시작했으니, 제주의 군병들이 상륙을 시도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물론, 제주의 함대는 방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먼저 상륙하는 군병들이 진지를 세우기 전에 엄호 방포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시 나하의 군사들이 숨어 있는 언덕 위를 향해 방포하니, 잠시 함포가 마을을 향한 사이에 뒤쪽으로 후퇴하던 나하의 군사들이 포격에 휩쓸리는 참변마저 있었다.
“아버님! 어찌 여기까지?!”
군사의 퇴각을 지휘하다가 다시 덮쳐 온 포격에 분노하고, 또 당혹하던 준은 갑자기 등장한 가주의 모습에 더욱 놀라워하였다.
포격이 쏟아지는 곳보다 더 뒤에 있다곤 하나, 눈먼 포탄이 떨어질 수도 있는 곳까지 가주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크게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당한 게냐?”
하나, 가주는 위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들의 피해를 물었다. 준은 고개를 숙이며 그가 아는 대로 대답하였다.
“일단 죽은 자가 최소 일백은 넘은 듯합니다.”
“다친 자는?”
“세기 어렵습니다. 작게라도 다치지 않은 자가 드문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의 화포를 경시한 셈이었구나.”
“…….”
나하의 군사들이 몸을 숨긴 언덕은 포구에서 1리 가까이 떨어진 곳이었다.
제주 함대와 포구의 거리를 생각해 포격이 닿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곳에 진지를 차렸건만, 실상은 그 사정거리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본디 세작이 보내온 전서를 통해 파악한 거리는 2리 정도였는데, 남산국의 남성을 포격했다는 거리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장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는데, 나하 포구 앞에 등장한 고려 배에서 볼 수 있는 화포가 알려진 것보다 더 작은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실상은 과장되었다고 여겨진 것보다 더 먼 곳까지 포격할 수 있었으니, 그 사정거리에 안에 몸을 둔 군사들이 다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포읍(浦邑)도 전소되었다지……?”
가주가 우울하게 물으니, 아들 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애써 힘을 내 답하였다.
“저들의 화포가 강대하나, 아직은 막을 수 있습니다. 저들의 수가 일천을 조금 넘는 정도이지 않습니까. 아직 우리 군사가 이천이 넘게 남았고, 원군이 와 준다면, 수적으로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적 우위가 소용 있는 것은 적과 맞붙을 수 있을 때 아니겠느냐.”
가주가 물으니, 준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접전하기까지가 문제였다. 상륙하는 고려군을 치고자 하여도 함대에서 방포하면 달려가는 사이에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했다.
포읍이 무너져 내렸으니, 따로 몸을 피할 곳도 없을 것이다. 설령 피한다고 해도 폭발하는 포탄에서 안전을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더 뒤로 물러나서 싸우자고 해도, 저들이 작은 화포를 끌고 가까운 곳에서 쏘면 나하의 다른 마을 또한 포읍처럼 박살 날 게 분명했다.
게다가 포읍 뒤로는 가네시로씨를 비롯한 호족들의 농토와 집이 있었으니, 그곳이 무너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가만히 있을 수도, 앞으로 나설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형국.
준은 화포라는 무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함에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아무리 나하가 큰 피해를 입을 것을 각오하였다곤 하나,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장대를 가져오너라.”
“……?”
문득 들린 가주의 말에 준은 고개를 들어 왜 그런 명을 내린 것인지 물었다.
“준비하지 않은 게냐?”
“마련해 두긴 했습니다.”
“하면, 그 장대 끝에 하얀 천을 걸어 가져오너라.”
“……!”
준은 가주의 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군웅 소설에 항복하는 장수가 흰 천으로 그 의사를 표하지 않았던가.
“아버님…….”
“고려의 위력이 상상을 뛰어넘었으니, 버티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나하뿐만 아니라 슈리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가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차후에 보상을 받을 곳이 없을 것이다. 이런 중에 차라리 항복하여……!”
쿵!
가주가 말하는 중에 문득 포탄 하나가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터졌다.
부상병을 둘러메고 도망치던 병사들 몇몇이 그 폭발에 휩쓸리는 것도 보였으니, 절로 안색이 하얗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항복을 종용하는 재촉과 같았으니, 준도 더 이상은 가주의 결정에 항의할 생각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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