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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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군병들이 나하의 사병들과 더불어 슈리왕성을 침범한 날로부터 닷새 뒤, 제주의 함대는 이미 유구섬을 떠나 아마미 섬 근처에 이르렀다.
“뭐하십니까?”
“군공께 올릴 장계를 쓰고 있었네.”
하릴 없이 선내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선장실에 들린 석삼은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창 선장을 보며 물어 답을 받았다.
“음, 혹시 제 욕 쓰고 계셨습니까?”
“허허, 이제야 걱정이 되는가.”
“걱정은요, 뭘. 저는 제 결정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런가? 나 또한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남지 않게 있는 그대로 쓰고 있다네.”
“…….”
창 선장이 그렇게 말을 받자, 석삼은 그가 장계에 무어라 쓰고 있는지 더 궁금해졌다.
하여, 슬쩍 몸을 기울여 창 선장이 앞에 둔 서궤 쪽을 힐끔 보았는데, 창 선장이 그것을 눈치채고는 손으로 쓰고 있던 장계 위를 가렸다.
“어허, 자네가 아무리 전권대사라고는 하나, 장계마저 간섭할 수는 없을 터인데?”
“……궁금해서 그러지요.”
“궁금해도 참게. 어차피 군공께서 이 장계를 보고 나면 무어라 말씀이 있으실 것 아닌가. 그러면 자연히 자네도 알게 될 걸세.”
“그게 궁금한 거죠.”
창 선장이 쓰는 장계에 대한 궁금증의 바탕은 그것을 보고 난 후, 군공께서 보이실 반응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석삼은 몇 번이나 창 선장의 장계를 훔쳐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틀며 시야를 확보하려 했으나, 창 선장은 여유만만하게 손으로 가렸다.
“쳇, 저도 장계를 올리거든요!”
“누가 뭐라 했던가? 자네도 장계를 올리게. 나 또한 장계를 올리고, 다른 자들도 보고하겠지. 그 장계들을 다 보시면 군공께서도 먼 유구에서 있었던 일을 파악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고.”
“……그러지 말고, 서로 보여 주는 것 어떻습니까? 서로 곤란한 건 좀 빼고.”
“됐네. 그러나 나중에 군공께서 아시면, 크게 경을 칠 수 있음을 기억하시게.”
기존의 고려에서도 먼 거리에서의 공무에 대한 장계는 다수를 받아 조정에서 더 정확히 판가름할 수 있게 하였지만, 제주공은 한발 더 나아가 공식적인 장계를 올릴 자와 비공식적으로 보고할 자를 따로 두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보고자가 있다는 것 자체는 알렸지만, 구체적인 신원에 대해서는 비밀을 준수하도록 하였기에 누구도 알지 못했고, 그것은 비공식적인 보고자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비공식 보고자는 다수가 있을 수 있고, 아예 없을 수도 있었으나, 그에 대해 오직 제주공만이 알고 있었으니, 이는 없더라도 장계를 올리는 자들이 저절로 경계하는 마음이 생겨 장계를 조작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창 선장이 장계를 맞춰 쓰다가 제주공에게 들켜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는 말을 한 것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저도 뭐 딱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되었군.”
창 선장이 논란 아닌 논란에 종지부를 찍자, 석삼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창 선장에게서 등을 돌려 선실을 나서려 했다.
한데, 문이 먼저 열리더니 석삼의 뒤를 이은 새 항해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보고하였다.
“두 분 모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제에 도착했나?”
“그렇기도 합니다만, 나제 포구에 많은 이들이 몰려나와 있습니다.”
“……?”
석삼과 창 선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하다가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나제 포구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제주 함대가 일단 멈춰 있었는데, 포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항해사가 일단 정선시킨 모양이었다.
“확실히 많군. 근방의 어지간한 백성들은 다 몰려나온 모양이야.”
포구에 보이는 수만 수백 명은 족히 넘을 듯했고, 그 뒤로 점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포구로 스며드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쩔 텐가?”
혹시 불온한 움직임이 있을 수도 있기에, 입항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들어가야지요. 이곳도 정돈이 필요한 곳 아닙니까?”
석삼의 결정 하에 나제 포구에 제주의 함대가 입항하니, 그사이 모여든 백성들의 수가 갑절로 늘어나 있었다.
“만세, 만세!”
하선할 준비를 하던 석삼은 귀에 들리는 만세 소리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심각했다.
그건 백성들이 천세가 아닌 만세를 불러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명 황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땅에서 명 황제의 신하도 아닌 자들끼리 만세를 불렀다고 석삼이 딱히 문제 삼을 이유는 없었다.
“반으로 갈렸군요.”
“그러게. 그것도 아주 극명하게 갈렸네.”
곁에서 창 선장이 말한 것처럼 포구에 나온 아마미 섬의 백성들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제주의 배들을 보며 만세를 부르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사나운 시선이 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의 사나움이란, 만세를 부르는 쪽의 수가 더 많아 그러하지 못할 뿐, 아니었다면 욕설에 드잡이라도 시도했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 시선의 원인이 무엇에 있는지 짐작이 가긴 했다.
시마즈씨의 배들을 격침시키는 와중에 죽은 아마미 백성들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주긴 했지만, 실상 그것은 그 책임을 시마즈씨에게 전가하기 위한 명분 쌓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녕 아마미 백성들이 전투에 휩쓸려 죽기 바라지 않았다면, 아예 공격하지 않거나 확실하게 하선한 것을 확인하고 했을 것이다.
물론, 석삼은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시마즈씨가 아마미 백성들을 납치하는 것을 방관했다면, 지금 이 포구에 나온 자들 대부분이 이미 시마즈씨의 영토에 끌려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이웃 중에 희생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 아닌가.
만세를 부르는 무리들 중, 사나운 분위기의 무리와 가까운 이들은 눈치를 보며 손만 살짝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기죽을 필요 없죠.”
기함이 포구에 배를 대고, 하선용 널판을 내리자, 석삼은 창 선장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널판을 밟고 내려갔다.
한데, 그때 한 할머니가 문득 앞으로 넘어질 듯 달려오더니, 석삼의 저고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무어라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물을 마구 흘리며 소리치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자식을 잃은 노모가 그 한을 푸는 것이었으니, 석삼도 차마 곧바로 뿌리치지 못한 채 노모의 아귀에 이리저리 흔들려야 했다.
다행히 그 아마미 노모의 원통이 또 다른 파급으로 이어지기 전에 일단의 무리들이 그 노인을 떼어 냈다.
다만, 그것이 상당히 거칠어 그 노모가 부두 바닥에 쓰러졌다.
“거칠게 하지 마시오!”
석삼이 크게 소리치자, 노인을 완전히 끌어내려고 다가가던 장성들이 멈칫하다가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고함에 담긴 어조와 날선 시선으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
석삼은 아직 바닥에 널브러져 눈물범벅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잠시 마주 보다가 살짝 목례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석삼이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본 제주의 군병들과 창 선장이 주변을 둘러쌌다.
“괜찮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별일도 아니었기에 석삼은 담담하게 천천히 걸음하며, 전면에 허리를 숙인 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 중 낯선 자들도 있었으나, 몇몇은 얼굴이 익은 자들이었으니, 예전에 처음 유구 제도를 방문했을 때, 찾아와 고려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한 아마미의 호족들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도미 기요니시(富 淸西)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가장 먼저 인사를 한 자에 이어, 아카리(碇)씨, 도쿠(得)씨 등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니, 그들이 지난번에 고려를 따르겠다 의사를 밝힌 자들이었다.
그들 외에도 여러 가문의 가주들이 석삼과 창 선장에게 인사를 올리니, 어떻게든 눈에 띄길 바라는 마음이 역력하게 전해졌다.
다만, 그 와중에 석삼은 엉뚱한 것에 궁금증을 가졌다.
“이곳은 왜국이나 유구섬과 달리 성씨가 모두 한 자인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두 자 성이나 세 자 성도 있지만, 외자 성이 가장 많습니다.”
쓸데없는 물음에도 기요니시는 공손하게 답해 주었다.
만약 몽주가 직접 그 대답을 들었다면, 아마 더 캐물었을 것이다.
아마미 섬의 성씨가 외자가 많은 것이 훗날 그곳을 병합한 시마즈씨에 의해 출신 구별을 위해 강제로 개명된 것이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훗날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마미 출신들이 조선인으로 오인받아 덩달아 많이 죽기도 했다.
한데, 실제로는 본래부터 외자 성이 대세를 이루었으니, 현대에서 알아본 것과는 다른 것에 흥미를 가졌겠지만, 석삼이야 특이하다는 소감만을 가질 뿐이었다.
사실 석삼이 몽주가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건 비단 성씨만이 아니었다.
“시마즈씨들은 어찌 되었소?”
창 선장이 물으니, 아마미 호족들의 고개가 한 곳으로 일제히 향했다.
그 시선들을 따라 제주 출신들도 고개를 돌려보니, 나제의 관청 쪽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관청 앞에 장대를 몇 개 세워 두었는데 얼핏 봐서는 정체 모를 덩어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덩어리들이 누군가의 머리였음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혹시 살려 두길 바라셨습니까?”
도미씨의 가주가 조심스레 물으니, 석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목이 베인 지 오래된 탓에 부패하여 시커멓게 번한 수급들을 두고 아쉬워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될 것을 알고 내버려 둔 것이기도 했고.
다만, 몽주였다면 달리 결정했거나, 적어도 아쉬워하긴 했을 것이다.
아마미 섬을 침탈한 시마즈씨들의 수장이 우지히사였으니, 그가 후에 현 시마즈씨의 가독이자 형인 모로히사와 갈등을 빚어 가독 투쟁에 나섰고, 그의 아들 대에서는 오히려 승리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잘 이용하면 시마즈씨를 분열시켜 크게 이득을 노렸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걸 알지 못하는 석삼의 결단에 의해 시마즈씨 내에 잠복한 분열의 씨앗이 하나 사라진 셈이었다.
석삼과 창 선장 등 하선한 제주 출신들이 향한 곳은 관청이 아닌 도미씨의 가택이었다.
유구섬에 속하지도, 왜국에 속하지도 그렇다고 따로 왕이 있는 것도 아닌 아마미 섬에 관청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실상 그곳이 본래 시마즈씨에게 연줄을 대던 호족들이 세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시마즈씨의 군병들이 다른 호족들과 백성들에 의해 처참히 도륙되자, 위기감을 느낀 그 호족들이 그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앞에 시마즈씨들의 머리를 걸어 둔 것도 그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도미씨의 가택에 들어가 가주 기요니시로부터 들은 말에 창 선장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은 어찌할 속셈이오?”
“그것은 오히려 저희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시마즈씨를 따르던 아마미의 호족들에 대한 처분을 제주에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그에 석삼이 실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그대들의 말을 듣자 하니, 마치 우리 제주가 그대들을 이미 받아들인 것처럼 들리는군.”
“…….”
도미씨를 비롯하여 여러 호족들이 그 말을 전해 듣자 표정에 크게 요동이 생겼다.
“저희는 당연히 제주공께서 유구섬과 같이 이곳 아마미 또한 다스리려 하신다고 여겼습니다만…….”
“사실과 조금 다르군. 제주공께서는 유구섬을 다스리지 않소. 그저 나하라는 고을에 수령을 두고 그 옆에 본래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 따로 고을을 하나 마련해 주셨을 뿐이오.”
호족들의 표정은 그게 그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지난번 제주의 함대가 시마즈씨의 함대를 격파한 뒤, 아마미 섬의 호족들은 나름대로 유구섬에 사람을 보내 사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제주의 함대가 어마어마한 위력을 선보이며 시위만으로 남산국으로부터 영토를 빼앗고, 중산국의 왕성마저 범하는 걸 여실히 전해 들었으니, 이미 유구 섬 자체가 사실상 제주의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물론, 유구섬에 제주의 수령들이 있으니 그곳에 제주의 힘이 뻗을 것은 분명하오. 하나, 아마미 섬에 대해서는 따로 명을 받은 바가 없소. 그에 비해 시마즈씨는 이곳과 가깝고, 소식이 두절된 그들의 배를 수소문하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이곳을 방문할 것이니, 제주공께서 아마미 섬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리기도 전에 그대들은 시마즈씨에 먼저 대항해야 할 것이오.”
“하, 하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호족들이 크게 당황하여 애달프게 물었지만, 석삼은 그저 찻물만을 입에 삼키며 말을 아꼈다.
그러자 호족들은 더욱 애가 타, 울먹이기까지 하며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당연히 제주가 아마미 섬을 포섭할 줄 알고, 백성들이 시마즈씨의 잔병들을 도륙하는 것을 도와 일을 벌였는데, 막상 이제 와서 제주가 모른 척하니, 시마즈씨의 복수가 크게 두려워진 것이었다.
애원하는 소리로 소란스런 중에 창 선장이 석삼을 보며 눈짓하니, 그 눈빛에 의문이 있었다.
대체 어쩌자고 이들을 곤궁하게 만드느냐는 의문이었다.
제주공께서 아마미 섬에 대해 따로 하명하신 바는 없지만, 그 전에 유구 섬으로의 항로를 개척할 때, 이미 아마미 섬의 중요함을 지적하여 말씀하신 바가 있었으니, 아마미 섬을 제주가 가져야 하는 건 이론의 여지조차 없었다.
한데, 그러함에도 석삼이 마치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여 호족들을 압박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절로 의문이 생긴 것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석삼은 옅은 미소와 함께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득 말문을 열었다.
“흠흠, 그만 조용히들 하시오.”
그 말에 통역이 여러 번 말하여,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시켰다.
“나는 제주공의 특명 전권대사로서 개인적으로 이곳 아마미를 받아들이고 싶소. 하나, 따로 명을 받은 것이 없는 상황에서 독단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럼에도 내가 다소 월권하여 아마미 섬을 돕고자 한다면, 제주공께 내가 보여 드릴 무언가가 필요하오.”
“…….”
호족들이 선뜻 석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이에 석삼이 실소하며 물었다.
“그 관청에 모여 있다는 호족들의 수는 몇이나 되오?”
“하인들까지 포함하면 이백에 이를 것이고, 빼면 대략 오십여 명쯤 될 것입니다.”
“별로 많지는 않군. 한데, 그들이 나제 포구 근방에 관청을 세운 것을 보면, 나제 포구에 그들의 입김이 제법 센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석삼이 대수롭지 않게 물으니, 기요니시도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그의 말을 들으니, 2천 호 정도에 불과한 아마미 섬의 호족들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나제 포구를 중심으로 상업에 치중하는 호족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제로부터 북동쪽에 있는 아마미 섬의 거의 유일한 평야 지대에서 농사에 집중하는 호족들이었다.
그리고 상업 호족들이 시마즈씨와 결탁한 것이니,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한 것도 시마즈씨와의 교역을 통해 이문을 획득하기 위함이었고, 자연 농업 호족들은 그로부터 소외되고, 그래서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도미씨를 비롯하여 제주를 따르겠다고 청원하는 호족들 모두 농업 호족들이었다.
이런 구분은 소유한 토지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니, 농업 호족들은 나제의 북쪽에 살면서 북동쪽 평야 지대를 소유하고 있었고, 상업 호족들은 나제 포구가 위치한 남쪽에 살면서 그 주변의 토지와 포구, 그리고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상황이 파악되자, 석삼은 통역에게 호족들에게 말을 전하지 말라 명하고는 창 선장에게 말하였다.
“어차피 제주공께서 아마미 섬에 고을을 가지셔야 한다면 나제 포구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 설마 자네……?!”
창 선장이 대꾸하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으니, 석삼이 크게 호흡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곳 백성들도 모두 시마즈씨와 붙어먹은 저들을 몹시도 혐오하고 있으니까요.”
석삼이 무엇을 마음먹었는지 짐작한 창 선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말마따나 그런 일을 하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창 선장이 질끈 눈을 감은 채 딱히 반론하지 않자, 석삼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호족들을 바라보았다.
“이곳 아마미 섬에도 제주의 고을을 세우고자 하오. 나제 포구를 가져야겠다는 말이오.”
“그, 그리하신다면 아마미 섬을 지켜 주실 것입니까?”
“그렇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
기요니시가 곧바로 응하려 하니, 석삼이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나제 포구가 저들의 것이라 하지 않았소?”
저들이 누굴 의미하는 건지는 뻔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미 관청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기요니시가 석삼의 굳은 표정을 보며 말을 하다가, 문득 석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 크게 기함하였다.
“저, 저들마저 모두 도륙하시길 바라시는 겁니까?”
석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먼저 항복했다면, 혹은 나제 포구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게 아니니 어쩔 수 없소. 또 이곳 백성들 중에 시마즈씨의 침탈로 자식을 잃은 자들이 많아 그 원성이 높으니, 그를 달래 줘야 할 필요도 있소. 저들이라면 적합한 희생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나제 포구를 중심으로 제주의 고을을 얻기 위한 실리적인 이유에 더해, 시마즈씨의 침탈로 인한 피해…… 라기보다는 시마즈씨를 격멸하기 위한 제주 함대의 공격으로 야기된 백성들의 부수적인 피해를 달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로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꼭 죽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저 불러다 토지를 빼앗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지.”
도미 기요니시는 조심스럽게 다른 선택을 권했다.
가재는 게 편이라 했다.
아무리 서로 갈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죽일 만큼 미운 사이는 아니었던지라, 다른 호족들이 살육당할 처지에 놓이니, 절로 만류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방법은 다르더라도 어쩌면 저들의 운명이 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한 육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나, 석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제주공의 치세에 불만을 마음에 품은 자를 두고 싶지 않소. 저들이 잃은 것에 앙심을 품고 어두운 곳에서 음모를 꾸밀 수 있으니, 애초에 싹은 도려내야 마땅하오.”
석삼이 물러서지 않고 확답하니, 호족들은 한참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석삼이 생각을 돌리지 않는 이상, 그들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같은 호족이라 동정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안전과는 바꿀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호족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진해지기 시작할 무렵, 문득 피로한 표정의 기요니시가 석삼에게 물었다.
“저희를 지켜 주시겠다 하셨으니, 이곳에도 유구와 같이 군병들과 배를 남겨 주실 것입니까.”
유구에 다섯 척의 배와 삼백의 군병들을 남겨 두고 온 것을 알고 그리 물은 것이었다.
하나, 석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잔류 예정된 군병들은 모두 유구에 남겨 둔 바, 아마미 섬에 또 남겨 두기는 어렵소. 하나,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그리하면 시마즈씨는 아마미 섬에 오지 못할 것이오.”
석삼이 그가 생각한 방책을 말하니, 그 과단함에 호족들보다는 오히려 창 선장이 기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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