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198)
* * *
국개국공(國開國公).
줄어서 국공이고, 군공(郡公)과 마찬가지로 그냥 공(公)이라고도 호칭하는 작위.
250년 전, 이자겸이 조선국개국공에 봉해진 이래로 없었던 국공의 작위가 새로 생겼다.
그것도 한꺼번에 둘이나.
요동국개국공(遼東國開國公) 이성계.
탐라국개국공(耽羅國開國公) 석몽린.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하였음에도, 열흘 가까이 이어진 논공행상이 마침내 그 결론을 내놓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왕위를 받고자, 그래서 심왕이 되길 바란 이성계의 욕심은 결국 몽주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삼봉이 어떻게든 타협점을 만들고자 심양왕과 몽주 사이를 오가며 노력하였지만, 몽주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가운데 심양왕이 새로운 왕위를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양왕이 금상을 압박할 수 있는 만큼, 몽주도 금상을 강요할 수 있었으니, 그 사이에 낀 어린 금상만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심양왕이 미련이 남아 시간만 죽치고 있자, 몽주가 따로 금상과 단판을 지어 그만의 논공행상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에 심양왕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심왕의 위를 포기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몽주가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절감하였던 탓이다.
심양왕 덕에 몽주에게 내려진 상찬도 조금 더 커지게 된 면도 있었다.
사실 심양왕이 심왕에 미련을 가진 것은 독립된 나라에 대한 꿈도 있지만, 동시에 요동을 다스릴 더 큰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양왕은 이자왕(二字王)으로서 명목상 군림의 명분이 지역이 아닌 심양이라는 일개 고을에 불과했다.
그래서 심 지역, 즉 요동을 군림의 영역으로 하는 명분을 가진 심왕에 욕심이 컸던 것이다.
하여, 심왕이라는 지위 자체는 포기하더라도 어떻게든 군림의 명분적 영역을 넓히고 싶었던 심양왕 측이 고심하다가, 제주공이 금상에게 고하여 ‘공국(公國)’의 설립을 윤허받자, 그것에 착안하여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그 새로운 제안이 바로 국개국공의 부활이었으니, 고래의 예를 본떠, 정1품의 국개국공을 다시 만들자는 것이었다.
각자의 지역에서 군림할 수 있는 국공의 작위를 나누어 갖자는 제안이었으니, 몽주는 검토 끝에 이에 응하였다.
어쨌든 심왕만 아니면, 요동은 고려에 매인 것이고, 심양왕은 계속 고려국왕의 신하로 남을 것이니, 몽주도 이왕지사 공국을 열게 된 마당에 국왕에 필적할 만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성계는 작위를 추가로 얻었으니, 그의 지위를 고스란히 밝히자면 한참 걸리게 되었다.
명나라의 번왕으로서 요동왕이고, 고려의 심양왕이자, 고려국 요동공국의 요동국개국공이고, 경흥현후인 데다가 금상으로부터 북면통관안찰사(北面統管按察使)라는 종1품의 벼슬까지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관안찰사는 현대의 도지사 격인, 그러나 실권은 형편없는 당대의 안렴사라는 벼슬의 전대 명칭인 안찰사에서 비롯되었으나, 통관(統管)이라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여러 분야를 통합하여 다스릴 수 있는 안찰사로서 조세와 군사 등을 독단적으로 행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지방 수령 임면권 같은 인사권까지 가진 엄청난 직책이었다.
한마디로 해당 지역을 한 손에 넣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벼슬인 셈으로, 심양왕은 북면통관안찰사로서 명목상 고려왕의 영토인 양북면을 자기 것인 것처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몽주에게도 같은 벼슬이 하사되었으니, 남면통관안찰사(南面統管按察使)가 바로 그것이었다.
심양왕과 마찬가지로, 경상전라 양남 지역의 모든 것을 쥐었으니, 몽주의 지위를 모두 말하자면, 이성계 못지않게 한참이나 걸렸다.
기존의 제주군공에서 지위를 승작하는 형태로 탐라국개국공이 되었기에 고려 내의 지위는 덜하였지만, 대신 해외 영토가 더 많기 때문이었다.
고려에서의 공식적인 지위는 고려 탐라공국의 탐라국개국공이자, 남면통관안찰사가 전부였지만, 실제로는 대마도와 일기도의 도주이기도 하였고, 왜국 서구주의 실제 주인이라는 지위도 있었다.
여기에 장차 주션족을 이끌어 토문강 유역에 세력을 얻고 나아가 나라를 세울 것이고, 유구 제도를 시작으로 남양의 여러 섬도 얻을 것이니, 몽주의 지위는 실로 복잡했다.
하나, 다행히도 공국의 설립을 윤허받았기에 조만간 몽주의 소소한 지위들은 탐라국개국공, 즉 탐라공국 하에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계와 달리 해외 영토는 고려왕의 책봉으로 얻은 게 아니기에 상황만 족하면 얼마든지 공국의 영토로 복속할 수 있었다.
“한데, 공국이라는 나라는 처음 듣습니다.”
몽주와 함께 심양왕 측과의 합의를 적은 문건을 보던 탁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 춘추시대에 공국이 있었네.”
“그렇습니까. 제가 무식해서 잘 몰랐습니다.”
“아닐세. 그리 널리 쓰인 건 아니니까. 게다가 2천 년 전 쓰인 게 아닌가.”
중국에서 쓰인 바 있지만, 몽주가 금상으로부터 윤허를 받으며 정립한 고려의 공국은 그것과는 좀 달랐다.
춘추시대의 공국은 공작(公爵) 작위를 얻은 자가 다스리는 영지를 의미한 것으로, 차라리 제주군공인 몽주가 다스리는 제주와 가까운 의미였다.
하나, 탐라국개국공의 탐라공국은 그보다는 훨씬 독립적인 의미였다.
따로 사직을 세우는 건 아니고, 고려의 신하임을 천명하긴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분야에서는 독자적으로 나라를 경영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서양의 공국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서양의 공국(Duchy)은 공작(Duke)을 군주의 호칭으로 삼은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목과 실제를 구별할 필요 없는 ‘독립국’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왕(King)을 칭하여 주변국을 도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왕이 아닌 공작이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남았을 뿐, 모든 면에서 독립국인 서양의 공국과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에 준하나, 명목상은 분명 고려 아래 남은 고려의 공국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만, 국명을 탐라로 한 것에 제주 백성……. 아니, 탐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제주공국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몽주가 금상을 압박하여 탐라공국으로 만들었는데, 그에 금상의 측근들이 제법 반발하였다.
탐라라는 이름에 고려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렇기에 몽주는 기어이 탐라라는 이름을 얻어 내었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탐라의 독자성을 표명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염 현백, 이제 곧 신설될 궁중부(宮中府)의 수장인 궁중후(宮中侯)에 봉작될 염흥방과 거래하여 탐라라는 국명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염흥방을 궁중후에 봉하는 것에 몽주가 동의해 주는 대가였다.
몽주와 이성계가 국공에 봉해지게 된 것에 미치지 못하나, 염흥방도 대단한 출세를 한 셈이었다.
곡성현남으로 시작해 곡성현백을 거쳐 후(侯)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니, 현후(懸侯)가 아닌 과거 왕실 종친에게만 부여되던 외자의 후에 봉작되게 된 건 그가 실상 고려의 새로운 권왕(權王)이라는 증거였다.
실제로 국왕의 자질이 없는 금상이 북면과 남면 사이의 실질적인 왕토 중, 개경 주변 지역인 서해도와 경기를 궁중후의 이름으로 염흥방에게 맡겼으니, 과거 권왕이라 불린 신돈에 못지않은 권력을 쥐게 되었다.
위아래로 이성계와 몽주가 있어, 여차하면 숨도 쉬지 못할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과거의 염흥방이나 천몽 이전의 역사 속 염흥방에 비하면 그 운명이 크게 솟은 것이었다.
“조만간 대마도와 일기도를 탐라공국의 영토로 삼을 것이네. 그리고 다른 곳도 서서히 공국령으로 변모시킬 것이야.”
몽주가 공국을 얻어 낸 일차적인 목적을 탁기에게 밝히니, 탁기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기쁜 낯을 보였다.
몽주가 공국령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양남 지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칫 요동공국에 양북면 지방이 병탄되는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국을 윤허 받으면서 획토(獲土 : 땅을 얻다)의 대상을 고려 외로 한정한 것도 있었으니, 탐라공국의 확장 역시 해외가 주된 목표였다.
“하면, 이제 주군이라 칭하여도 되겠습니까.”
“……?”
주군(主君)은 나라의 우두머리, 즉 군주에게만 쓰는 호칭인데, 고려에서는 그리 널리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훗날 주인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일 때와 달리, 아직 의미의 확장이 없었던 탓이다.
하여, 오직 고려 장수들이 임금을 호칭할 때 쓰였으나, 그마저도 금상이라는 통칭이 더 널리 쓰였다.
언젠가 탁기가 몽주에게 주군이라 칭했다가 금하게 한 바 있었으니, 그땐 몽주가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제 공국을 세워 한 나라의 주인이 되었으니, 주군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 부른다고 해도 이제는 예에 어긋나지는 않겠지.”
몽주가 허락하자, 탁기가 문득 일어나 군례를 취하며 말하였다.
“주군! 소신 탁기 앞으로도 충심을 다하여 보필할 것입니다.”
탁기의 눈가에 촉촉함이 묻어 있었으니,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군을 주군으로 부를 수 있는 날을 고대해 온 듯했다.
그 감개무량함을 본 몽주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게 무슨 그리 대수라고 그처럼 좋아하는 겐가.”
“저는 진심으로 좋습니다, 주군.”
몽주는 얼굴을 붉힌 탁기로부터 다시 들린 주군이라는 말에 뺨을 긁적거렸다.
몰랐는데, 주군이라는 말이 좀 간지러운 말이었다.
* * *
“정이나 맘에 안 드신다면, 전에 군공께서 신돈을 압박하기 위해 쓴 것과 같은 방법을 쓴다고 여기십시오.”
“…….”
창 선장은 딱히 말이 없었다. 비단 지금 석삼이 한 말뿐만 아니라, 이틀 전에 있었던 그와의 다툼에서 밀려 버린 터였다.
나제의 포구를 얻고 아마미 섬을 보호하겠노라 약조한 석삼이 그 방법으로 제안한 것은 시마즈씨에 대한 포격이었다.
제주로 돌아가는 중에 지나가는 시마즈령 사스마국에 포격을 통해 경고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미 섬이 이미 제주의 영역이고, 그곳을 침탈한 시마즈씨들을 도륙한 것도 제주의 처분임을 밝히면서 차후에 다시 아마미 섬에 시마즈씨가 개입하려 한다면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선언하겠다는 의미였다.
그에 창 선장은 거세게 반대했다.
아무리 석삼이 특명전권대사라곤 하지만, 이는 남양의 일에 한할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왜국에 속한 시마즈씨를 위협하는 건 월권이라 비난했던 것이다.
반면, 석삼은 아마미 섬이 남양에 속하는 곳이니, 그곳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일인 만큼 남양의 일이라고 반론하였다.
그에 창 선장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시마즈씨는 왜국에 속한 곳이니, 남양 대사가 전적으로 일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데, 석삼이 그렇다면 지난 시마즈씨의 함대를 괴멸시킬 때는 왜 반대하지 않았느냐 묻자, 창 선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남양의 일이지만, 시마즈씨를 공격하는 것인 만큼 왜국의 일이기도 함에도 당시에는 창 선장이 반대하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아직 무엇이 특명전권대사의 권한이고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결국 창 선장은 이번 항행의 수장인 석삼의 결정을 끝내 반대하지 못하였다.
속으로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이미 시마즈씨를 공격한 일이 있어 스스로 모순되는 상황이라 강력히 반대를 주장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시마즈씨의 사쓰마국이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르러, 창 선장은 석삼이 마음을 돌리길 바라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였다.
“아마미 섬을 지키기 위해 시마즈씨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 또한 남양의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 동의하겠네. 다만, 단지 남양의 일이라고 해서 남양에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일 것이야. 남양의 일은 곧 제주 전체의 일이니, 제주에 미칠 영향 또한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창 선장의 말은 전란의 발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만약 시마즈씨가 경고를 도발로 받아들여 전쟁을 일으키면 이는 남양뿐만 아니라, 제주 전체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 저는 만약 시마즈씨가 전쟁을 일으킬 마음이 있다면, 시마즈씨의 함대를 몰락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여깁니다. 여기서 다시 화포로 경고하는 것은 시마즈씨의 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겁니다.”
“어허, 먼 곳에서 싸움이 있는 것과 저들의 코앞에서 무력시위 하는 것이 어찌 같겠는가.”
“아니지요. 그저 별 피해 없는 화포 소리가 들리는 것과 시마즈씨의 자산과 병사들이 사라진 것을 비교해야지요.”
“…….”
석삼의 일리 있는 변론에 창 선장은 다시 말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저 지금의 결정이 오로지 석삼의 책임이라 여기기로 하였다.
자신은 만류할 만큼 만류하였으니, 만약 제주공께서 후에 분노하신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대사 석삼이 감당해야 하리라.
한 식경 후, 석삼이 이끄는 제주 함대는 사쓰마국의 서남쪽 끝이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촌 가와나베(川辺)에 함포 사격을 실시하였다.
포성은 고작 일다경 동안만 있었을 뿐이고, 인명 피해가 없음은 물론, 재산 피해도 포구의 부두 하나만 상했을 뿐이었다.
하나, 함포 시위 후에 몇 발의 서시(書矢)가 날아갔으니, 모두 같은 내용을 담은 그 녹편에는 엄중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사쓰마, 휴가, 오스미의 시마즈씨는 보아라. 아마미 섬은 이미 제주공의 영역으로, 아마미 섬을 침탈한 시마즈씨의 병력은 제주군이 괴멸시켰음을 알린다. 백주에 양민을 납치하는 악랄한 행각을 시도한 시마즈씨에 제주공을 대리하여, 나 남양 특명전권대사 석삼(南洋 特命全權大使 石三)이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니, 다시는 아마미 섬에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 만약 이를 어길 시, 시마즈씨가 제주공께 적대하는 것으로 알고, 제주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시마즈씨를 파멸시킬 것이다.
* * *
‘고려의 왕들이라…….’
제례복장을 한 몽주는 고개를 숙인 와중에도 시야를 슬쩍 돌려 제상 위에 놓인 23개의 신위(神位)를 훑어보았다.
가장 우측의 태조로부터 가장 좌측의 선왕 공민에 이르기까지 일렬로 놓여 있었으니, 470년에 이르는 고려의 긴 역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은 개경 왕성 내 서편에 위치한 종묘정전(宗廟正殿).
평생 들어가 볼 리 없을 것 같던 곳에 몽주가 서 있었다.
제례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제상 앞에서 금상이 제례에 친림(親臨)하고, 그 뒤에 심양왕이자 요동국공 이성계와 탐라국공 몽주가 있었다.
본디 왕실의 핏줄이 아니면 감히 제상 앞에 서지 못함에도, 이성계와 몽주가 금상의 뒤에 서서 제례에 참석하게 된 것은 고려 안에 새로 공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것을 선군들께 고하여 정헌(靖獻)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책봉례를 대신하는 것으로, 개경의 절반이 불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왕성에서 화려한 예식을 거행하기 곤란한 탓이었다.
사실 금상은 그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책봉례를 감행하고자 하였으나, 이성계나 몽주는 예식보다 오히려 세간의 평에 신경을 더 많이 썼기에 금상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금상은 무엇이라도 하여, 두 국공이 자신의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길 바랐고, 그에 염 궁중후가 고심 끝에 제안한 것이 중묘의 선군들 앞에 두 국공들이 치향(致享)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두 공국이 고려의 종묘사직에 속한 것임을 알리는 한편, 선군들께 알묘(謁廟)함으로써 고려 왕실의 우위를 명시적으로 선보이자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는 이성계나 몽주의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왕씨가 아님에도 종묘정전에 들어가 선대 국왕들에게 제주(祭酒)를 바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들이 이전의 다른 권세가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증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왕실 종친(宗親)에서는 왕씨가 아닌 자를 종적(宗籍)에 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크게 반발했고, 일부 용종(龍種 : 왕족)들은 제례에 참석치 않으려다가 억지로 끌려오기도 했다.
그렇다 한들, 두 국공의 면전에서는 누구도 비난의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미 고려 왕실의 존폐 여부는 물론, 왕실의 생활 수준 자체가 두 국공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종묘제례 직전까지 불만에 가득해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막상 당일에 이르러서는 조용하기만 했다.
초헌례(初獻禮)는 당연히 금상의 몫이었다. 예의사(禮儀使)의 인도하에 금상이 제주(祭酒)를 받아 신위 앞에 헌작(獻爵)하고, 절을 한 후 동향으로 몸을 돌려 축문을 낭송하였다.
잠시 예악도 멈춰 고요한 가운데 금상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제법 능숙함이 묻어 있었다.
하긴, 왕좌에 앉았으면서도 왕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이런 예식뿐이었으니, 다른 헷갈릴 거리도 없는 중에 궁례에만 능해졌을 것이다.
“……하여, 선군고(先君考), 효현손(孝玄孫)이 두 국공과 더불어 제물을 바치오니 흠향(歆饗)하옵소서.”
축문송을 마친 금상이 다시 제상 앞에서 절을 하니, 주변의 모든 이들도 함께 절하였다.
금상이 출호(出戶)한 뒤, 아헌례(亞獻禮)는 이성계의 몫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고, 심양왕으로서 봉작이 높은 이성계이기에 몽주가 먼저 양보한 것이었다.
아헌례도 초헌례와 대동소이하였으나, 다만 축문을 읽을 때, 북쪽으로 서서 하였다.
“제왕고(諸王考), 신 요동국공 이성계는 고려를 받드는 공국을 세웠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존령(尊靈)께옵서도, 구례(舊例)를 떠나 신례(新例)에 임하여 의지하옵소서.”
축문을 읊은 이성계가 본위치로 돌아오자, 몽주가 종헌례(終獻禮)를 행하였다.
“제왕고, 신 탐라국공 석몽린은 고려를 받드는 공국을 세웠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중춘(仲春)에 이르러서는 존령의 혜은을 신국(臣國)에도 분급하여 주시옵소서.”
축문 후, 신위 앞에 동향으로 서서 헌관이 주는 홀을 관에 꽂으니, 문득 제례에 참관한 종친들 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보였다.
몽주는 문득 지금 이 자리가 고려가 더 이상 왕씨 왕실만의 나라가 아님을 선언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들에게는 오늘이 실로 치욕스러운 날인지도 모르지.’
하나, 진정한 고려 왕실의 치욕이 무엇인지 명백히 기록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몽주로서는, 그리고 그 치욕의 주도자인 이성계가 오히려 고려의 선군들에게 술을 바치고 절을 올리고 있음을 아는 몽주로서는 종친들의 눈물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하기야 나라를 나라이기 전에 왕실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저들의 시선에서는 왜구에 고려가 수십 년을 시달리고 혼란에 휩싸여 무너지는 것보다 지금 왕씨가 아닌 자가 종묘대례에 참석한 것이 더 큰일로 느껴졌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