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01)
* * *
“자, 우리 실력을 보여 줄 때가 되었네. 다들 오늘을 위해 그간 숱하게 연습해 온 것을 잊지 말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도 말고. 알았는가?”
“예이!”
“잘해 보세! 지화자!”
“얼씨구!”
손을 모아 ‘화이팅’을 외친 일곱 사내들은 심기일전하여 화포 주변에 일렬로 도열하였다.
오늘은 화포 방포 심사가 있는 날.
하병들로 이루어진 그 화포조의 조장은 가장 좌측에 선 정지였다.
물론, 그는 하병이 아니라 하사였으니, 최근에 사급 군병으로 승진하여 화포조장을 맡게 되었다.
탐라국공을 믿고 탐라로 이주한 그는 처음 병급 군병으로 임하라는 명을 받고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훈련소에 입소하였었다.
탐라로 오는 길에 만났던 차현유 교리가 다시 만나 말하길, 탐라군은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빠르게 진급할 수 있다는 위로의 말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이었다.
훈련소에서 크게 능력을 보여 최우수로 수료한 정지는 이후, 하병부터 상병까지 반년 만에 진급하였다.
탐라의 군병들이 정예라고는 하나, 탁가 무인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대부분 일반 장정들이었으니, 10년간 군무에 이력이 쌓인 정지가 돋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 체력과 무예는 탁가 무인들이 아니고서는 정지에 견줄 만한 상대가 없었다.
물론, 그에게도 힘겨운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탐라군이 다른 곳과 달리 화포에 의지하는 바가 컸고, 그만큼 화포를 다루는 능력을 높이는 것에 집중하였으니, 그 점에서만큼은 정지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힘껏 노력하여 빠르게 화포의 기능을 익혔으니, 다른 부분에서 탁월했던 그인 만큼 쾌속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사급 군병이 된 후에도 화포는 여전히 정지에게 가장 큰 고난이었다. 다만, 이전에는 화포를 방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힘들었다면, 이제는 화포를 방포하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이 힘들었다.
굳이 어느 쪽이 힘드냐를 따지자면 솔직히 지금이 더 힘들었으니, 숙달되지 못한 군병들을 일일이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의 조를 이루고 있는 여섯 병사들은 모두 훈련소에서 퇴소한 지 길어야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이들이었고, 그중에는 한 달도 되지 않은 풋내 가득한 애송이도 있었다.
모두 훈련소에서 화포를 다루는 기본적인 훈련은 수료했으나, 그 정도로는 숙달된 화포병들의 실력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훈련 상황의 경우, 숙련병에 달하면, 7인이 아니라 4인 1조로도 첫 방포를 1촌각(약 1분 30초) 안에 하고, 이후에도 1각 안에 4회의 방포를 할 정도였다.
처음 국공께서 화포를 도입하여 쓸 무렵에는 1각 안에 2회의 방포만 하여도 대단하다 하였지만, 그간 군병들의 실력과 숙련도가 높아지고, 화포와 포탄이 보다 정밀해지면서 몇 가지 과정이 생략되자, 두 배는 빠르게 방포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오늘 방포 심사의 기준도 초포 이후 일각 안에 2회의 방포를 더 하는 것이었다.
심사에 통하면 이제 정지의 화포조도 더 이상 지상 훈련과 연안 근무가 아닌 본격적인 함대 근무를 시작할 수 있고, 통하지 못한다면, 다시 두 달 가까이 다음 심사를 기다리며 훈련해야 했다.
물론, 정지의 진급 속도는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느려질 것이니, 사급 군병부터는 본인의 실력뿐만 아니라 지휘력도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었다.
화포병들이 각자의 기능을 얼마나 숙달되었는지가 심사의 기준이라면, 화포조장은 화포병들을 얼마나 잘 이끌었는지가 심사의 기준인 셈이었으니, 빠르게 화포병들을 숙달시켰음을 증명한다면 그만큼 진급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아니라면 진급에 무게추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음, 오후 첫 심사는 자네였군?”
도열을 하고 잠시 기다리니, 심사관들이 다가왔다.
심사관들은 모두 현역 선장이거나 갑판장들로, 보통 3인으로 이루어졌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사 정지, 심사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자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네. 오늘 심사를 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의 도움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정지의 대답에 심사관인 선장 준성이 웃었다.
“하하, 오늘은 날이 맑고 습기도 적은 데다 바람도 강하지 않으니, 이만하면 하늘도 돕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간 화포가 발전하고, 화포병들이 숙달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부분은 환경에 따라 결정되고 있었다.
때문에 심사할 때의 날씨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 날씨가 너무 나쁘면 아예 심사가 취소되곤 했다.
“오늘 심사 받을 조들이 많습니다. 이만 시작하시지요.”
다른 심사관이 재촉하자, 준성 선장도 고개를 끄덕이곤 정지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심사석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정지가 군병으로 근무하던 배의 선장이었으니, 정지가 빠르게 진급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정지를 인정해 준 덕이었다.
정지는 자신을 알아준 준성 선장에게 실망감을 주기 싫었고, 그만큼 부담도 생겼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 정지는 다음을 다스리며 크게 소리쳤다.
“방포를 개시하겠소!”
정지의 호령과 더불어, 모래주머니로 담을 쌓은 뒤에 있는 심사석에 ‘0’이라 적힌 널판이 세워졌다.
그것은 현 조의 상황에서 아무런 변화없이 방포를 하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확인한 정지가 휘하 포병들에게 각자 배치하라 명하자, 포병들이 일제히 약속된 위치에 섰다.
그사이에 정지는 시선을 돌려 표적을 확인하였으니, 먼 곳 두무악 기슭 중 어느 곳에 붉은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정지는 곧바로 거측기를 들어 깃발과의 거리를 측량하니, 대략 약 825미였다.
“더하기 넷에 삼에 넷!”
“더하기 넷에 삼에 넷!”
거리를 확인하자마자, 정지의 머리는 곧바로 목곡에 감을 도화선의 길이를 연산하였고, 손가락으로 표시함과 동시에 입으로 외쳤다.
탐라군은 그간 숱한 시험과 실전 경험을 통해 거리에 맞춰 천뢰탄에 쓰는 도화선의 길이를 구별해 두었다.
500미를 기준으로 도화선이 감겨 있는 목곡을 돌려 거리에 따라 도화선을 늘리고 줄여 사용하였다.
물론, 이는 그만큼 제조 과정이 정밀해져, 도화선의 타는 속도를 상당히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된 덕이기도 했다.
‘밀리세컨드(ms)’단위로 측정할 만큼 정밀한 현대의 도화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당대의 시선에서 보자면 신뢰하기 충분할 정도로 표준화되어 있었으니, 숙련된 화포병들도 그들이 쏜 천뢰탄이 제때에 터지지 않아도 도화선을 탓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지의 계산을 들은 화포병들 중 장탄(裝彈) 분조 2인이 복창하며, 손을 나눠 천뢰탄에 박힌 목곡을 돌려 도화선을 감았다.
목곡을 4회전 더하고, 다시 세 눈금만큼 더 더한 후, 한 눈금을 다섯의 작은 단위로 나눠 사 단위만큼 더 돌리자, 목곡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훈련한 대로 성인 손으로 한 뼘만큼 더 남기고 도화선을 잘라 내었다.
그동안 화약분조 2인은 주먹만 한 화약포를 나무봉에 매달고 포신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은 후, 화약포의 반대쪽에 길게 달려 있는 실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화약포의 한쪽이 툭 터졌고, 나무봉을 흔들며 뽑아내니 깨알처럼 뭉친 화약가루는 안에 남은 채 빈 화약포만 빠져나왔다.
다시 나무봉을 거꾸로 들어 천뭉치가 달려 있는 쪽으로 포신을 쑤셔 대었는데, 그 전에 회색 종이를 감아 넣었으니, 나무봉으로 쑤실 때마다 종이에 밀린 화약은 포신의 뒤쪽에 바짝 장약되었다.
본래 예전 같으면 이후에 격목이라 하여 포구에 알맞은 나무토막을 밀어 넣어 폭압을 제대로 받게 하였지만, 근래에는 생략하였는데, 포신과 포탄의 크기가 그만큼 정밀해져 격목을 밀어 넣으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진 덕분이었다.
“점화!”
정지가 다시 소리치자, 준비하고 있던 장탄분조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사이에 장탄분조는 서둘러 그 도화선을 목곡이 박힌 주변에 솟은 돌기 밖으로 둥글게 감은 후, 곧바로 철편으로 그 위를 막고, 쇠대로 고정시켰다.
그 와중에 정지는 왼 팔뚝을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으니, 목곡 외부에 감긴 도화선이 목곡에 감겨 본격적으로 타들어 가기 전까지의 시간을 셈하기 위함이었다.
숙달되면 굳이 팔을 흔들지 않아도 되겠지만, 정지도 화포조장으로서는 아직 초보라 교본대로 행하고 있었다.
장탄분조 중 일인이 포신 안에 천뢰탄을 넣자, 화약분조가 나무봉으로 천뢰탄을 깊숙이 밀었다.
임무를 마친 장탄분조는 얼른 화포 곁에 섰고, 화약분조도 천뢰탄을 최대한 밀어 넣기 무섭게 좌우로 비켜섰다.
“견착!”
정지가 다시 명하자, 조준분조에 더해 장탄분조 4인이 포가 좌우로 나와 있는 손잡이를 밀어, 용수철이 연결된 고정대에 바짝 붙였다.
“상조준 둘에 삼에 셋! 하조준 좌공에 이에 하나!”
정지의 명에 따라, 조준분조의 2인이 각자 바퀴형 손잡이를 잡고 돌렸으니, 상조준에 따라 포구가 위로 올라갔고, 하조준에 따라 포구가 좌측으로 미세하게 더 움직였다.
조준분조 둘이 명대로 조준했음을 손을 들어 알리자, 정지는 마지막으로 포신에 얼굴을 붙여 포신의 양쪽 끝에 달린 돌기를 나란히 하여 제대로 조준이 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하조준 우공에 영에 하나!”
좌우 조준을 다시 조정하게 한 정지는 이미 불이 붙어 있는 점화선을 손으로 쥐었다.
도화선과 달리 점화선은 매우 느리게 타들어 간 채 불씨를 머금고 있었다.
‘여덟…… 아홉…….’
팔을 흔들며 숫자를 가늠한 정지가 크게 소리쳤다.
“방포!”
그와 함께 포가의 좌우에 붙어 화포가 움직이지 않게 견착하고 있던 4인의 화포병들이 일제히 몸을 화포의 반대쪽으로 기울여 방포에 대비하였다.
이는 화포가 방포하면서 뒤로 주퇴할 것이기에 미리 몸을 피하는 것이었다.
사실 견착하는 것은 훈련 상황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고,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보통 함에서의 방포를 가정하여 훈련하기 때문에 물결과 함의 회전으로 인해 화포가 제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어쨌든 방포 구령과 더불어, 정지는 힘껏 점화선을 당겼고, 그 역시도 몸을 기울여 화포의 주퇴로에서 피했다.
쾅!
폭음과 함께 방포되니, 포가가 뒤로 훅 밀려났지만, 용수철 덕분에 어느 정도 밀려난 상태에서 멈췄다.
“복좌!”
정지는 다시 화포의 복좌를 명하면서 시선을 돌려 방포된 천뢰탄이 목표한 대로 떨어졌는지를 확인하였다.
붉은 깃발의 우측 아래쪽 20미쯤 떨어진 곳에 박혔는지 그곳에 자갈과 먼지가 튀는 것이 얼핏 보였다.
그 정도면 명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정지는 찰나 동안 초조한 빛을 얼굴에 드러내었으니, 명중했다고 하더라도, 착탄 후 십분촌각(十分寸刻 : 약 9초의 오차, ±4.5초) 안에 천뢰탄이 폭발하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터져…….”
저도 모르게 정지의 입에서 이를 악문 소리가 나올 참에…….
쿠궁!
마침내 착탄한 천뢰탄이 터져 누렇고, 붉은 화염과 더불어 돌가루, 먼지구름을 뿜어내는 게 보였다.
“좋아!”
주먹을 불끈 쥔 정지는 화포병들에게 재정비를 명한 후 시선을 돌려 심사석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널판 하나 세워져 있었으니, 붉은색으로 숫자 2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2번 군병을 제외하고 다음 방포를 하라는 의미로 전투 중에 화포병이 이탈하게 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다.
“명재!”
정지가 소리쳐 장탄분조의 한 화포병을 부르니, 그가 조장을 보다가 심사석 쪽을 확인하곤 아쉬워하며 손을 놓고 물러났다.
“한일이, 잘할 수 있겠지?”
“걱정 마십쇼!”
홀로 남은 장탄분조의 화포병이 믿음직하게 답하였다.
정지는 웃음을 보이곤 다시 다음 방포를 위한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방포 후에는 다시 한두 명의 화포병을 더 ‘사망’ 처리하거나, 분조를 뒤섞이게 하는 명이 있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정지를 비롯한 화포병들은 긴장을 버리고 자신감을 얻었으니, 여러 경우에 대비하여 숱하게 연습을 한 결과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솔직히 재밌군, 재밌어.’
방포 준비로 바쁜 와중에 정지의 머릿속에 그런 소감이 스쳤다.
고려의 군관 시절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한 성취감이었다.
* * *
“단주 나리! 오셨습니다, 오셨어요!”
상단에서 일하는 수하의 호들갑에 고신걸도 보고 있던 장부를 덮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존의 상단일에 더해, 국공께서 남면통관안찰사를 겸하시게 되면서, 남면 상황에 대한 조사를 상단을 통해 하라 명을 내리신 탓에 정신없이 바쁜 그였다.
하나, 지금은 아무리 바빠도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해야 마땅한 손님들이 오셨기에 서두른 것이다.
경상도 진주(晉州)에 자리 잡은 상단의 본청 앞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잠시라도 시간을 낼 수 있는 상단 직원들 수십 명이 나와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으니, 곧 입구로 들어올 손님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국공께서 오신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환대를 할까 싶었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국공보다 더 공대하여 맞이해야 할 분들이기도 했다.
입구에 서서 잠시 기다리니, 멀리 휘어진 길목으로 몇 필의 말과 가마 한 대, 그리고 소달구지 석 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왔습니다요, 왔……!”
“나도 보고 있다. 경박하게 굴지 마라.”
수선 떠는 이들을 조용히 시킨 고신걸은 점점 다가오는 행렬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매만져 굳은 표정을 풀었다.
상단을 맡은 이후, 많은 일을 하느라 피곤하고, 그 와중에 성을 내는 일이 많아져서인지, 웃음을 짓는 게 오히려 불편해졌다.
열심히 얼굴을 문지르던 고신걸은 대략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이르자, 입가에 미소를 띠웠고, 손님들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미소는 점점 커져 나중에는 결코 미소가 아닌 수준의 웃는 낯을 만들었다.
뺨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억지 웃음을 한가득 담고 있던 고신걸은 손님들이 거의 당도하자, 몇 걸음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가마에 탄 노인을 향해 허리를 크게 굽히며 읍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장조 어른! 다시 뵙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오랜만이오.”
다소 기력이 모자란 대답을 들은 고신걸은 살짝 허리를 폈다가 다시 굽혀 또 다른 이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 모가 두 분 도련님께도 인사드립니다.”
고신걸이 인사를 하는 상대는 말에 탄 두 젊은이들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큭큭.”
전혀 느낌이 다른 두 가지 대꾸가 동시에 들렸다. 물론, 정중한 대응은 뚜렷이 들렸고, 경박한 웃음과 함께 들린 말을 작았다.
“…….”
다른 이는 몰라도, 인사를 나눈 두 형제와 고신걸은 들었으나 다들 모른 척하였으니, 당사자는 당사자라서 모른 척하였고, 다른 형제는 형이라서 무어라 하기 어려웠으며, 고신걸은 그들이 귀한 손님이기에 모른 척한 것이었다.
“쿨럭쿨럭.”
그때, 문득 노인이 무거운 기침 소리를 내니, 고신걸은 그걸 기회 삼아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며 서둘러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게 하였다.
“아직 날이 찹니다. 안으로 어서 들어가시지요.”
“쿨럭, 어허……. 번거롭게 하여 미안하오.”
“번거롭긴요, 장로존자(長老尊者)신데, 제가 당연히 성심껏 모셔야지요.”
손님들이 상단 본청의 대문으로 들어가니, 양쪽에 도열한 상단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노인은 마른기침을 점점이 이으며, 직원들에게 연신 번거롭게 하여 미안하다 하였고, 뒤를 따르는 두 형제들 중 형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는 거들먹거렸으며, 아우는 눈이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고개를 숙여 환대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집 형제는 여전하구먼.”
“옛말도 틀릴 때가 있는 법이여. 형만 한 아우가 없다더니, 저 집을 보면 형보다 나은 아우도 있네그려.”
“같은 부모에서 나서, 같은 조부 아래 컸으면서도 저리 다른 걸 보면, 사람이란 타고난 인성이 중요한 모양이야.”
“그러게. 쯧쯧.”
직원들 사이에서, 손님들 중 두 형제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니, 전에 그들을 본 적이 있든 없든, 상단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국공의 처사촌.
대공부인(大公夫人)의 사촌이라는 것도 결코 먼 친척이 아닌 데다, 일찍이 장조 어른의 손에 2남 1녀의 남매처럼 같이 자란 탓에 사촌이기보다는 남매와 같았으니, 국공께도 처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국공께서 대공부인과 혼인을 한 뒤, 장조 어른은 고려 본토에 남아 국공의 일을 도왔으니, 처음에는 개경에서 상행을 도왔고, 지난 중란 이후에는 동경으로 이주하여 동경에서 상단 일을 도왔다.
워낙에 상행에 이력이 높아, 초창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단을 크게 도왔기에 상단 직원들 모두 장조 어른이라 부르며 우대하였다.
본디 장조(丈祖)는 처조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오직 국공만이 그리 부를 수 있겠지만, 다들 장조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리 칭한 것이고, 장조 어른도 흡족해하였다.
장조 어른이 상단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만큼, 그 손자들도 상단에 나와 일하였는데, 두 형제의 언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형은 게으른 데다 경박한 데 비해, 아우는 성실하고 예의가 밝았던 것이다.
사실 두 형제가 상단에서 일했다곤 하지만, 진정 일을 한 자는 아우 청도였고, 형 종도는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었다.
물론, 누구도 종도의 행동거지를 두고 면전에서 탓하지 못했으니, 국공의 처사촌이라는 지위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종도를 타박할 수 있는 장조 어른도 조실부모한 손자에게는 모질게 대하지 못했으니, 그저 자제하라 훈계만 종종할 따름이었다.
별채에서 장조 어른이 자리에 눕는 것을 살피고 나온 고신걸 또한 의원을 부르고, 식사 준비 등을 명하면서도 종도와 마주치기를 꺼려 했다.
예전에 동경에 갔다가 종도의 행패를 뒷감당한 경험이 몇 번 있는 그로서는 가급적 안 엮이는 게 낫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며칠 쉬어 장조 어른이 체력을 회복하시면 곧바로 탐라로 떠날 것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이보게, 단주.”
“…….”
일을 보러 별채를 나갈 참이었던 고신걸 앞에 문득 종도가 길을 막으며 그를 부르니, 속내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기어이 저놈과 직면하는구나 싶어 속으로 재수 없어 하면서도, 공손히 고개 숙여 부름에 응하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내 예전부터 이곳 진주가 크고 번성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네.”
뒷짐을 지고 거드름을 피우며 종도가 말을 시작하니, 고신걸은 대충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었다.
“자고로 사람이 많은 곳은 미인도 많은 법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진주의 기방은 풍류가 높다 소문이 자자하고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종도는 한 걸음 고신걸에게 다가서서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속닥거렸다.
“아무리 곧 탐라로 간다고는 하지만, 소문난 풍류의 고을을 그냥 지나갈 수야 있겠는가? 하니, 자네가 좀 도와주게.”
“장조 어른께서 편찮으신데…….”
고신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공부인과 같은 핏줄이기는 한 지 키가 큰 종도 도령을 보며 자제하라는 뜻의 말을 전하려 하였다.
하나, 종도는 고신걸의 어깨 위로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더 나직이 말하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은밀하게 자리를 마련해 보게. 야밤에 조부께서 잠이 드셨을 때 잠시 다녀오면 누가 알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자네만 믿네. 하하하.”
웃음을 흘리며 떠나는 종도의 뒷모습을 고신걸은 한숨으로 지켜보았다.
전에, 국공께서 서찰을 보내신 중에 처조카들에 대해 물은 바 있으셨다.
그때, 어찌 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아우인 청도 도령을 조금 더 칭찬하는 정도로만 고하고, 종도 도령의 행각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처남이나 다름없는 처조카에 대해 험한 말을 전했다가 그것을 종도 도령이 알게 되고, 정작 국공께서는 어려운 관계라 딱히 종도 도령을 자제시키지 못한다면, 고신걸 자신만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솔직히 말했을 것을 그랬나.’
후회가 스쳐 지나갔지만, 고신걸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곧 탐라로 떠날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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