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06)
몽주의 인사는 순리를 따랐다. 기존의 주요 교리들이 해당 관부의 대신이 되었으니, 크게 혼이 났던 홍길도와 초고불도 각각 교관대신, 농관대신이 되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대로한 모습을 보였던 터라, 홍길도나 초고불을 비롯하여 파벌 지어 싸운 교리들의 좌천이나 강등 가능성을 점친 이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몽주는 그들의 경험을 중시하여 대신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홍길도나 초고불 등은 그렇다고 국공이 그들의 잘못을 완전히 잊거나, 용서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담담하여 표현하지 않는 듯하나, 당사자이기에 국공이 그들을 대함에 있어 과거와 달리, 좀 더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홍길도는 마음이 번잡했으니, 그에게 있어 국공은 따르는 주군이기 전에 스승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양부 시절에 엉성하게 꿈꾸던 고려 변화에 대해 국공과의 만남,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통해 그 방향을 보다 선명하게 얻게 되었으니, 국공의 신임을 자못 잃은 지금은 그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사죄를 거듭할 수도 없었다. 말로만의 사죄를 국공이 기꺼워할 리도 없었고, 오히려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하면 오히려 냉소만 짙어질 따름이었다. 그건 비단 그뿐만 아니라 싸움에 관련이 있던 모든 전직 교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결과로 증명하라는 무언의 압박임에 틀림없었기에, 홍길도는 그저 새로이 공업을 세워 다시 국공의 신임을 크게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교리들이 대신직에 임한 중에 새로운 인물들도 몇 있었으니, 그중 가장 크게 주목받은 이는 당연히 포은 정몽주였다.
이미 국공이 포은을 불러 면담한 것이 알려지면서 포은이 조정에 입성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많았는데,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물론, 포은이 대신이 된 것 자체를 두고 누구도 이의를 가지진 않았다.
포은의 명성은 고려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그 실력 또한 인정하는 바였으니, 지난날 국공께서 그를 버려두다시피 했을 때도 언젠가는 그를 높이 쓰시지 않겠느냐 여기고 있었다.
다만, 포은이 조정의 대신이 된 것에서 다들 의아해 한 부분은 그가 담당하게 된 관부에 관한 것이었다.
다들 포은이 고려에서 세운 공으로 볼 때, 외관부나 교관부를 담당할 것이라 여겼는데, 포은이 임한 자리는 내관대신이었다.
사실 탐라 조정이 변하면서, 각 관부에 대해 논의를 할 때, 내관부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곳이었다.
국공께서 직접 설명한 글을 보아도 그랬다. 축약하면, 나라 안의 여러 문제를 관장하되, 특히 치안과 민심을 다스리고 여러 지역의 일을 총괄하는 것이 내관부의 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딱히 내관부만의 일은 아니고, 모든 관부와 군이 행해야 할 일이었다.
하여, 관원들이 느끼는 내관부란 다른 관부들을 지원하여 돕는 관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내관부의 대신에 포은을 임한 것을 두고, 관리들은 크게 둘로 나뉘어 여겼으니, 하나는 국공께서 아직 포은을 완전히 믿지 않으시어, 내관부를 담당하게 하고, 차후에 신임을 얻으면 다시 더 크게 쓰실 요량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요한 일이 내관부에 속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하여, 포은에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돌려서, 국공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포은은 순순히 아직 크게 쓰이지 않는 것이라 답하였다.
하나, 그러면서도 포은의 표정이 환한 것을 두고 혹시 포은이 뭔가 언질을 받아 놓고 숨기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다시 생겼으니, 포은과 내관부에 대한 궁금증은 탐라 조정이 확실히 정착될 때까지 이어질 듯했다.
다른 관부의 대신이나 관청의 청장이 된 자들 중에 새로운 얼굴로서 주목 받은 또 다른 이는 상관대신 희도라는 자였다.
그는 경상도 이주민 출신으로 탐라에 와서는 군병으로 일했는데, 고려에서 유민으로 전락하기 전에 보부상의 접장(接長 : 보부상인들의 지역 수장)까지 지냈던 인물이었기에, 그 경험을 사서 탐라군 내에 상선이 취역될 때 상선을 이끌게 되었다.
그 후 약 1년간 황해와 남해를 종횡무진하며 고려, 명국, 왜국, 요동 등에서의 상행을 무사히 이끌었고, 상행에 대한 경험과 공을 높이 평가받아 상관대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다만, 상관대신이 조정 인사에서 주목받게 된 건 희도라는 인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본래 상관대신이 될 것으로 예상된 인물이 아니기에 더 주목받은 것이었다.
다들 고신걸이 상관대신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가 전에 교리직을 내놓은 탓에 대신에 임하지 못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상단을 운영하며 경험과 실력을 더 쌓은 그가 상관대신의 적임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게다가 홍길도나 초고불처럼 크게 혼이 나고도 경험을 중시하여 대신에 임한 경우가 있는데, 작은 잘못으로 스스로 교리직을 내놓고 낮은 위치로 간 고신걸이 대신이 되지 못한 건 불공평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나, 그런 분위기는 국공의 말 한마디에 완전히 사그라졌다.
고신걸이 아예 관계에서 나가 국공의 상단이자, 장차 회사가 될 조직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탐라국에서 국공이 가진 절대권력을 생각하면, 어떤 이들은 고신걸이 오히려 더 출세한 것 아니냐는 평마저 할 정도였다.
* * *
외관대신 차현유가 몽주를 급히 찾아온 것은 술시(戌時) 정각쯤이었다.
저녁 식사 후 차과 다과를 즐기며 부모님과 아우, 그리고 앵도, 강영과 더불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참에 방해를 받은 것인데, 차현유의 표정을 보니, 허튼 일로 찾아온 게 아님에 확실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겐가.”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물으니, 차 대신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도학생 중에 간자(間者)가 있는 모양입니다.”
“간자? 도학생 중에?”
“그렇습니다.”
차현유가 이어 설명하니, 오늘 군기청에서 견습하고 있는 왜국 도학생 출신이 공관대신 화극에게 은밀히 왜국 도학생들 중에 간자가 있음을 고하였다는 것이었다.
화극은 그 사실에 대해 차 대신에게 전하고, 둘이 잠시 의논 끝에 고발한 자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 동의하여 국공에게도 전하게 된 것이었다.
차현유에게 사정을 들은 몽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 고발한 견습 관원은 어디에 있나.”
“지금 화극 어른이 일부러 그에게 잡무를 주어 군기청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거처로 돌아가지 않으면 혹여 누군가 그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잘했네. 하면, 그자를 은밀히 내 집무실로 데려올 수 있겠는가.”
조정의 구조가 개편되었지만, 문서적인 변화일 뿐, ‘소프트웨어’적인 정착은 멀었고, 아직 ‘하드웨어’적인 구분조차 시작 단계일 뿐이었다.
하여, 기존에 중앙관청의 관사처럼 쓰던 몽주의 집을 둘러싼 별채들로는 늘어난 관부와 관청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새로 관사를 짓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하나, 그 와중에 군기청만큼은 벌써 독립 관사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일반 공소와 구분되는 군기소를 이미 지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군기소에는 군기소를 관리할 관사도 따로 있었기에, 군기청으로 변하면서 그 관사를 군기청의 관사로 쓰게 된 것이다.
다만, 군기소가 무기를 다루고 여러 위험한 실험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 몽주의 사택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오는 중에 혹시 간자들에게 들킬 수도 있네.”
차현유로부터 들은 대로라면, 그 고발한 도학생 견습 관원은 왜국의 세작질을 하는 다른 도학생들에게 협박을 받은 것이니,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화극 어른이 말하길, 마침 군기소에서 개복포를 개선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가는 척하면서 함께 데려 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가? 잘되었군. 하면 데려오게.”
화극과 차현유가 먼저 논의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미리 해 둔 모양이었다.
개복포를 가져오려면 군병과 인부들도 함께 와야 하니 그 사이에 끼워 넣으면 될 것이다.
간자가 있다는 고발에 마음이 무거워진 것과 별개로, 두 대신의 대처가 만족스러워 몽주는 웃음을 지었다.
차 대신이 그 견습 관원을 데리러 떠난 후, 몽주는 책상 위에 놓은 촛불을 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간자가 있다는 건 물론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그렇다고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석상(昔商)의 기물이란 이름으로 탐라의 물산에 대해 널리 알려지고, 탐라의 권세가로서 왜국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니, 몽주의 위세에 근간이 되는 것들을 훔치고자 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소 늦은 움직임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도학생들 중에 왜국의 회유를 받아 세작이 될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아무리 왜국이 총체적인 체제하에 있지는 않다 하나, 화국이라는 이름 정도야 머릿속에 넣고 있었을 터이니, 외적이 침범한 중에, 탐라가 서규슈를 얻은 건 분명 왜국의 입장에서는 침범을 받은 것이니까, 화국이라는 애매모호한 경계 안에서 힘입으려는 자가 생길만도 했다.
그것을 민족주의라고 하기에는 모자라겠지만, 그런 경향이 생기는 것은 침략을 당한 곳에서는 시대와 지역을 방불하고 늘 있지 않았던가.
모르긴 몰라도, 그 도학생들 외에도 간자는 더 있을 것이고, 앞으로 탐라의 영역이 더욱 커질수록, 그리고 유통과 교통이 활발해질수록 간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생각에 잠긴 몽주의 표정에 고민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웠다. 방첩(防諜) 조직에 대한 고민이 다시 생긴 탓이었다.
그 고민의 방향은 두 가지였다. 방첩 및 정보 조직을 운영하느냐, 마느냐. 그리고 만약 운영한다면 공식적인 기구로 만드느냐, 비밀 조직을 만드느냐.
현대에서 재상은 비공식적인 조직으로 정보기관을 운영할 것을 조심스럽게 권했었다.
근현대 시대에 정치 경찰화된 정보기관의 경우는 물론, 명나라 동창의 경우를 봐도 조심해야 마땅하나, 교통과 통신이 낙후된 세상에서 공식적인 루트 외 따로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비밀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더욱 대두되기 때문이고, 기술적 한계가 명백한 만큼 인간에 의한 첩보 및 방첩 활동이 극대화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일단, 후자에 대한 고민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조정에 대한 구상 중에 비공식적인 조직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했는데, 현재까지는 비공식적인 조직을 두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본래 정보의 수집을 담당하던 차현유를 외관부에 임한 것 또한, 아직 외교관계에 대한 국제적인 통례가 존재하지 않은 탓에 상대적으로 할 일이 적은 외관부가 국외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도 하기 위함으로, 일종의 정보를 다루는 공식적인 조직의 역할을 맡긴 셈이었다.
비밀 조직은 몽주가 완전히 손에 넣고 있다면,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만약 몽주가 흔들려 그 조직이 몽주에 대한 충성보다 독자적인 권력에 집중하게 되면, 그때는 명나라 동창 꼴이 나게 될 것이다.
동창은 명국 내시들의 공식 관부임에도 그랬으니.
몽주는 그 비밀 조직을 휘어잡고 있을 수 있다 내심 자신하면서도 역사적으로 볼 때, 시대를 막론하고 첩보와 방첩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은 늘 권력 기관화되었음을 알기에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탐라 조정을 세우면서도 훗날, 10년, 20년 뒤가 아닌 몽주가 사라진 세상까지 염두에 두고 고심하였으니, 정보기관 역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했다.
과연 몽주의 후대들도 그 정보기관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몽주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여겼다.
비밀 조직을 쥐고 있어야 할 몽주의 후대가 오히려 비밀 조직에 휘둘린다면, 그에 탐라 조정도 비밀 조직에 의해 휘둘릴 것이니, 이는 몽주가 탐라를 중심으로 고려에 뿌리내린 체제 자체마저 무너뜨릴 것이다.
최선을 놓치더라도, 최악은 막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에 몽주는 아무리 정보기관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세워, 그 움직임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편을 택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국내를 대상으로 하는 방첩 기관 역시도 공식적인 기관으로 하고자 하였다.
한데, 국내를 영역으로 하는 정보 조직은 현재 없었다. 치안이 그러하듯 탐라군이 그 역할을 하는 셈이라지만, 실제적으로는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분명 장차 세작들이 들끓을 것이 분명한 중에 방첩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없는 것은 문제였다.
다만, 조금 더 걱정스러운 것은, 국외를 대상으로 하는 기관보다 국내를 대상으로 하는 정보기관은 본질적으로 권력과 밀접해질 수 있고, 그에 따라 보다 권력 기관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조직의 구조와 인적 구성, 그리고 재정의 출처에 보다 신경을 써야 했는데, 여러모로 따져 보아도 다 장단점이 있었다.
“후우,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가.”
한참의 고민 후에 몽주는 실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여전히 14세기 말.
몽주가 아무리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고 해도 수백 년, 아니 만약 몽주가 정말 많은 것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다면, 고작 수십 년 후의 세상과도 크게 다를 것이다.
그렇게 다른 세상을 관통하여 존재해도 안정적으로 적합한 조직을 세우겠다는 건 결국 욕심임에 틀림없었다.
비단 정보 조직뿐만 아니라, 일반 관료 체계 자체가 그럴 것이다.
지금은 지금에 맞춰 조직을 세우고, 그러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조직을 재정비해야 할 것이며, 몽주가 사라진 후의 변화는 후대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모든 면에서 필멸자의 몸을 빌려, 그저 꿈으로 또 다른 인생을 사는 몽주의 운명적인 한계였다.
몽주는 그 순간 그 깨달음을 실소와 함께 넘겼지만, 머지않아 그것을 더 절실하게 느껴야 했다.
* * *
차현유 대신이 화극과 함께 집무실을 찾은 것은 약 두 식경 후였다.
물론, 두 사람만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자네 이름이 뭐였지? 가동이랬던가?”
몽주가 차 대신과 화극 사이에 서 있는 젊은이를 보며 물으니, 그가 우물쭈물하다가 문득 바닥에 부복하여 고하였다.
“저하, 소인은 비후국 출신의 가토 히로유키라 하옵니다. 가동은 본래 소인의 이름을 고려식으로 읽으면 가등전지라, 작칭(作稱 : 별명화)된 것이옵니다.”
“아, 그래. 하면, 가동이라 부르는 대신에 가토 히로유키라 불러 달라는 게냐?”
과례하여 고하는 가동을 보곤 몽주는 실소를 흘리며 물으니, 가동이 여전히 부복해 있다가 허리를 조금 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것이 아니옵고. 소인의 이름이 그러하다 말씀드린 것뿐이옵니다.”
“하면, 가동이라 불러도 되겠느냐?”
“편하신 대로 하시옵소서.”
“그래, 내 편한 대로 가동이라 부르지. 그리고 내가 편하기 위해 또 명하니, 그만 일어나라. 말도 그렇게 크게 높여 존대할 필요도 없다. 그런 말은 궁중에서나 어울리고, 탐라에는 궁이 없으니.”
몽주의 명에 따라, 도로 일어난 가동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름 권세 높은 국공 저하 앞에서 예로 눈총을 받을까 싶어 선택한 언행인데, 오히려 국공께서 내켜 하지 않은 기색을 보였으니, 실수를 했다 여긴 것이었다.
그런 가동을 보며 다시 웃음을 흘린 몽주는 각자 의자에 앉으라 말하곤 잠시 후 가동에게 물었다.
“아까 들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직접 자네의 이름을 입으로 말하고 나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 같군.”
“…….”
그에 가동이 다시 긴장하여 우물쭈물 하니, 곁에 있던 화극이 대신 말해 주었다.
“아마 축구 때문에 들어 봤을 게야.”
“축구요? 아…….”
그러고 보니, 순보에 축구 경기에 대한 소식 중에서 그 이름을 본 기억이 났다.
순보에 실리는 축구 시합에 대한 기사라는 건 대부분 경기 일정이나 결과 정도를 알려 주는 수준이지만, 가끔 큰 시합이나 흥미로웠던 경기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감상평도 실렸는데, 그런 기사들 중에서 가동의 이름을 몇 번 봤던 것이다.
“자네가 축구를 굉장히 잘하는 모양이군.”
“그저 망극할 따름입니다. 모두가 저하의 은혜 덕분이옵니다.”
“응? 내가 뭘?”
“저하께옵서 축구를 만들어 내려 주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소인은 어찌 축구를 알고, 축구를 한 덕에 사람들의 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겠사옵니까, 저하.”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연신 굽실거리며 고하는 가동의 말에 몽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저 공소 공인들과 잠시 어울리다가 한번 해 본 축구를 탐라에 퍼뜨리게 된 것이었으니, 본의 아니게 축구의 창시자가 된 셈이었다. 물론, 현대 축구와는 조금 다른 형태긴 하다만.
그래도 탐라에 축구가 크게 흥하는 건 몽주로서도 즐거운 일이었다.
탐라 백성들의 생활이 제법 윤택해져, 여가를 보낼 시간과 여윳돈을 가지게 되면서, 여가거리로 쓸 게 필요했는데, 축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음주와 윤락이 퍼지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일이었다.
“저하, 축구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차 대신이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자 끼어들어 분위기를 전환하였다.
하나, 몽주는 손짓으로 알고 있다는 신호를 하고는, 가동에게 다시 말하였다.
“듣자 하니, 고학교에서 축구를 처음 하게 된 것이 탐라 출신과 왜국 출신 도학생들 사이에 배타가 심하였기 때문이라는데 맞나?”
“그러하옵니다, 저하.”
“그러하옵니다 말고 그렇습니다로 답하게. 말마다 저하를 붙일 필요도 없고. 고려말을 익숙하게 하는 것을 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알겠사옵니…… 알겠습니다.”
곧바로 알아들어 말을 고치는 것을 본 몽주는 다시 말하였다.
“축구로 그런 배타를 깨뜨렸다면 기쁜 일이나, 그만큼 애초에 탐라 학생과 왜국 도학생 사이가 나빴다는 말이겠지. 얼마나 나빴나, 자네가 보고 듣고 경험한 대로 말해 보게.”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닌 듯 가동의 표정에는 곤란함이 가득했다.
“솔직히 말해 보게.”
몽주가 다시 채근하니, 가동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나둘씩 그가 경험한 것을 고하였다.
처음 탐라에 도착할 때부터 탐라 백성들의 백안시는 극심했다. 욕설을 내뱉거나 왜구라 손가락질을 하는 건 흔했고, 심지어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그건 고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고학교에서는 탐라 학생과 왜국 도학생의 수가 비슷하기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아니었고, 반대로 왜국 도학생들이 탐라 학생들에게 욕이나 가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나, 아무래도 도학생의 신분도 그렇고, 이곳이 탐라인 것도 있어, 도학생들이 조금 더 많이 당하는 편이었다.
“내가 보기에 시간이 제법 흘렸고, 축구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탐라에서 당한 일에 분개하는 이들이 없진 않을 것 같군.”
“그렇긴 하옵…… 합니다. 하나, 대부분의 도학생들은 그런 작은 상처는 이미 잊었고, 고학교에서 배울 수 있게 된 것에 크게 감읍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몽주는 그렇게 답해놓고는 가동을 지그시 보며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래도 자네에게 물어보지. 자네가 고한 것을 보면, 왜국의 누군가와 연계되어 세작질에 나선 도학생들이 그 셋뿐인 것처럼 하였는데, 정말 그 셋뿐이겠는가.”
“제가 아는 것은…….”
“자네가 아는 것을 물은 게 아니네. 아는 것을 넘어 추측해 보라는 말이야. 도학생들 중에 세작이 그 셋뿐일 가능성과 그 셋 외에도 또 있을 가능성 중에 어느 쪽이 더 크겠냐고 묻는 걸세.”
“…….”
가동은 선뜻 어느 쪽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단, 그것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고, 속으로는 이미 선택이 끝났으니, 아무래도 그 셋만이 전부라고 하는 것은 속단일 것이라 여겼다.
“주저하는 걸 보니, 자네의 대답 때문에 혹시 다른 애꿎은 도학생들마저 세작으로 의심받아 고초를 겪을까 걱정하는 모양이군.”
“실은 그렇습니다.”
몽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정색하며 말하였다.
“자네의 고발에 대해 가장 쉬운 방책을 선택하자면, 그 세 도학생을 잡아다가 고신하고, 도학생들 전원을 놓고 문초하는 것이지. 자네도 포함해서. 비록 죄 없는 이들도 고생하겠지만, 중대한 군기의 기밀이 누설되는 위협을 방비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최선일 것이야.”
“……!”
가동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안색이 흐려졌다.
“저하, 어찌……!”
뒷말은 없었지만, 어떻게 그런 무자비한 방법을 쓰려 하느냐고 묻는 듯했다.
“내 생각에 왜국의 영주들이라면 백이면 백, 내가 말한 대로 행했을 것 같은데.”
“…….”
비단 왜국의 영주뿐만 아니라, 당대 세상 태반의 권력자들은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죄 없는 피해자들이 생기겠지만, 자신의 권세에 흠집이 나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하나, 나는 그러고 싶진 않아. 세작을 모조리 잡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죄 없는 자들마저 다치는 걸 바라진 않지. 물론, 다른 방도가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러니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몽주의 말에 가동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당혹스러움이란, 애초에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가동은 그의 고발이 국공에게 전해지면 국공이 친히, 혹은 다른 이를 시켜 그를 상찬하고, 세작을 잡고 제거하는 일은 따로 관부를 움직여 해결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고발까지만 그의 역할이고, 그 후에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한데, 상찬은 없고, 다른 도학생들의 안위를 두고 협박하듯 그를 압박하니, 가동은 자신이 죄를 지은 느낌마저 들었다.
가동이 혼란스러워하는 중에 몽주가 이어 말하였다.
“너는 한동안 그 도학생 세작들에게 협력하는 척해라. 우리 또한 군기에 대한 적당한 내용을 알려 줄 터이니, 그것을 통해 그들의 신뢰를 얻으라는 말이다.”
“예…….”
“당연히 너는 그 틈에 그 세 도학생 외 또 다른 간자들을 색출해야 할 것이다.”
“하오나, 도학생 중에 세작이 더는 없을 수도 있지 않사오…… 습니까.”
“누가 반드시 도학생들 중에 세작이 있으니, 그들을 찾아내라 했더냐. 없을 수도 있지. 하나, 적어도 너를 협박한 그 세 도학생들과 왜국에 있는 그 누군가 사이를 연결하는 이는 있을 게 아니냐.”
“아…….”
사야키를 비롯한 세 도학생들이 왜국과 직접 오갈 수는 없으니, 명령 하달과 상부 보고를 대신해 주는 이는 있어야 했다.
도학생들이 왜국에 서찰을 보낼 수 있긴 하지만,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가능할 뿐이고, 그 대상도 부모나 형제에 한하며, 서찰의 내용 또한 확인받아야 했으니, 평범하게 서찰을 통했을 리도 없었다.
“할 수 있겠느냐.”
“…….”
“할 수 있는지를 묻고 계시지 않은가.”
차 대신이 몽주를 대신해 채근하자, 앉은 자세에서도 내내 조아리고 있던 가동이 문득 허리를 펴며 크게 숨을 들이쉬곤 몽주를 직시하며 말하였다.
“관원으로서 명을 받드는 것입니까.”
기세가 달라진 물음에 몽주는 입가에 크게 웃음이 번졌다.
“견습 관원도 결국은 관원. 내 명이 있으면 그 완수를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지. 물론, 내 명을 착실히 수행한다면 상 또한 있을 것이고.”
몽주가 단지 견습하는 고학교 수료생으로만 대하지 않고, 관원으로서 대할 것이라는 말을 하니, 가동의 표정에 각오가 스쳤다.
“하면, 명을 받잡겠습니다.”
가동이 읍하여 고하는 모습을 보며 몽주는 다시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비웃음 같기도 하고, 그저 재밌어 짓는 웃음 같기도 했다.
“자세한 일은 화극 어른을 통해 전해질 터이니, 너는 이만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처음 ‘나이브’해 보이던 모습은 사라져, 마치 군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가동은 그렇게 집무실 입구를 발걸음을 옮겼다.
“아, 이보게, 가동.”
“예.”
가동이 몸을 돌려 몽주를 바라보았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네. 듣자 하니, 자네 부친을 포함하여 일가족들 중 일부가 왜국에서 납치되었다더군. 그들의 목숨으로 자네가 협박당한 것이고. 한데, 자네는 어찌 세작을 고발하기로 한 겐가.”
“……저는 탐라로 오기 전에 이미 가문으로부터 의절당했습니다.”
“……?”
“가문을 나오기 전에 제 아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네 살길은 네가 알아서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동의 대답을 들은 몽주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았네. 돌아가 있게.”
가동이 떠나자, 화극이 몽주의 곁으로 더 가까이 앉으며 물었다.
“이보게, 대체 무슨 꿍꿍이신가?”
“세작들을 잡으려는 꿍꿍이죠.”
“저 녀석을 통해서?”
“네.”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해야 하나. 그냥 그 세 도학생을 잡아다 문초하면 그만이지. 다른 도학생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응? 아, 그야 그렇지. 탐라는 섬이니까.”
탐라는 섬이기에 그 세 도학생들이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고, 그렇기에 잡아다 문초하는 거야 언제든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한번 해 보는 거죠. 만약에 그 세 도학생 외에 더 많은 세작들이 있거나, 그 세 도학생 뒤에 있는 진짜 간자들이 탁월하다면, 단지 그 세 도학생을 고신하는 것만으로는 다 색출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화극과 차현유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몽주의 ‘꿍꿍이’에 동의하였다.
“한데, 가동이란 녀석, 처음 고발하러 왔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아까 저하 앞에서 허리 펴며 말할 때부터는 기세가 완전히 달라지더군요. 혹시 예상하시고 압박하신 겝니까.”
“어느 정도는. 아까 녀석이 처음 탐라로 왔을 때, 탐라 백성들과 탐라 학생들로부터 당한 일을 이야기할 때 보았지 않나. 자기 외에도 다른 도학생들이 당한 일까지 이야기하며 표정에 분개가 어렸지. 그런 자가 이번 고변을 하기에 앞서 그 고변으로 도학생들 전체가 문초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 없지.”
“하면 …….”
“그럼에도 가동은 고변하기로 작정한 것이니, 나는 녀석이 출세에 목맨 자인가 싶었네. 그래서 그 출세욕을 이용해 볼까 했네만, 가문에서 의절당했다는 말을 할 때의 표정을 보니, 그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 고변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군.”
가문으로부터 의절당한 이야기를 할 때, 가동의 표정은 담담한 척하긴 했지만, 그 복잡한 심기가 완전히 감춰지진 않았다.
버림받은 자의 발버둥.
그 오기 어린 마음은 한번 써 볼만 하다 싶었던 것이다.
몽주는 가동을 이용하여 세작들을 낚는 방법에 대해 화극과 차현유와 논하였고, 늦은 밤에야 다시 사택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이미 잠들어 있었기에, 조심스레 그녀의 곁에 누웠는데, 옅은 잠이었는지 앵도가 몽주의 허리를 팔로 둘러 안으며 말하였다.
“안 좋은 일이었어요?”
“예상한 수준 정도. 아주 큰일은 아니었소.”
“느낌은 제법 큰일 같은데요?”
“후후, 점쟁이였소?”
몽주가 웃음으로 때우곤 앵도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잠을 청하는 양 눈을 감았다.
“내일은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앵도의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가벼이 끄덕인 몽주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녀의 손길 속에 잠이 들었다.
하나, 정작 다음 날, 몽주가 처음 맞이한 대신은 파리한 안색의 상관대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