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10)
* * *
“창아야, 어디 가니? 아이고, 내 새끼 잘도 걷네.”
석삼은 입이 쩢어져라 웃음을 머금은 채, 허리를 굽힌 채 아들 녀석이 뒤뚱뒤뚱 마당을 걷는 뒤로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 걷기 시작한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창아는 제법 먼 거리까지도, 쓰러질 듯 넘어질 듯하면서도 곧잘 걸어다녔다.
그러다 풀썩 주저앉거나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이내 인상을 쓰며 힘껏 일어나서 다시 서곤 했으니, 석삼의 눈에 그 모습이 너무나 어여쁘고 장했다.
“아이코, 또 넘어졌네.”
쿵.
이번에는 좀 아프게 넘어졌다. 걸음하던 한 발의 앞코가 땅바닥을 차는 바람에 앞으로 넘어진 것이다.
하나, 그래도 창아는 이번에도 의젓하게 울지 않고, 양팔로 땅을 짚고는 상체를 들어 올리더니 잠시 고개를 돌려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창아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얼른 가서 일으켜 주려다가, 넘어져도 제가 일어나게 기회를 주라는 아내의 말 때문에 멈칫하고 있던 석삼은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아기에 가까운 아들 녀석이 대견하게도 마치 아버지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웃어 주는 것이 너무나 감동이었던 것이다.
“창아야, 옳지! 잘한다! 일어나. 할 수 있어!”
아버지의 응원을 받으며 창아는 양팔로 상체를 지탱한 채 양 다리를 하나씩 바닥에 세우고는 허벅지를 쭉폈다.
엉덩이가 하늘로 치솟은 것도 잠시, 몸의 균형을 뒤쪽으로 슬쩍 옮긴 창아는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켰다.
기우뚱.
뒤쪽으로 옮겼던 무게 중심 탓에 허리를 세우자 다시 뒤로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창아는 기어이 중심을 잡고는 다시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내 새끼 잘한다, 잘해!”
석삼이는 다시 아들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저게 뭐 대단한 거라고 석삼 아재는 저리 난리람?”
마당 구석에 앉아 있던 강영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옆에 앉아 있는 몽건을 보며 툴툴거렸다.
그러자 순보를 보고 있던 몽건이 문득 강영을 힐끗거리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냥.”
“우씨, 그냥이 어디 있어? 왜 웃었어? 왜 웃었냐고?!”
멱살을 잡고 흔드는 통에 몽건은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리다가 결국 항복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언제?”
“너 처음 걸을 때, 그때도 창아랑 비슷했거든.”
“아…….”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넌 넘어질 때마다 소리를 좀 쳤지. 에잇! 하는 식으로. 그리고 뒤를 따르며 일어나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네 할아버지셨던 게 달랐고.”
“아…… 응?”
아아 하며 그렇구나 싶던 강영은 문득 놀란 눈으로 삼촌을 바라보았다.
“그게 기억나?”
“응.”
“삼촌이랑 나랑 얼마나 차이난다고 그게 기억나?”
“음, 어쨌든 기억 나.”
태어난 해는 다르지만, 똑같이 일곱 해째를 살아가는데, 자신은 전혀 기억이 없는 일을 삼촌이 태연하게 말해 주니 강영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난 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있었지. 네가 먼저 걷는 걸 부럽게 보면서 말이야.”
“헐, 대박.”
믿기진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짓말 같지 않은 삼촌의 말에 강영은 기가 막힐 정도로 놀라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뭐?”
“헐이랑 대박 말이야.”
“아, 이거? 몰라, 아빠가 가끔 이렇게 중얼거리길래, 따라 해 봤어. 놀랄 때 쓰더라고.”
“혹시 헐이 아니라 훨 아니야?”
“훨?”
쓰윽쓱쓱.
몽건이 땅바닥에 한자 하나를 썼다.
‘狘’
“짐승이 깜짝 놀라서 달아난다는 의미의 한자야. 훨이나 월로 읽지. 음, 근데 대박은 뭐지? 큰 박을 말씀하신 건가.”
몽건이 ‘대박’의 진의를 곰곰이 따지는 동안, 강영은 몽건과 땅바닥에 쓰인 한자를 번갈아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헐, 대애박.”
자신은 읽기라도 할 수 있는 한자를 다 합쳐도 100개도 안 될 것 같은데, 삼촌 몽건은 별 희한한 한자까지 쓸 줄 알았으니, 강영의 눈에 삼촌은 괴물 같았다.
아무래도 아빠한테 말해 줘야 할 듯했다.
삼촌이 이상해요!
“도련님, 그거 오늘 나온 순보인가요?”
문득 들려온 석삼의 목소리에 두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석삼이 창아를 품에 안고 다가오고 있었으니, 창아는 걷기 훈련(?)에 지친 듯 아비의 품에 안겨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했다.
“예, 전 다 봤는데, 드릴까요?”
“하면, 이 옆에 펼쳐 주실래요?”
창아를 품은 안은 채 석삼은 두 아이들이 앉아 있는 마루에 조금 띄어 앉았고, 몽건은 석삼의 옆에 순보를 바른 방향으로 펼쳐 주었다.
순보의 첫 장 중앙에는 정몽주 내관부 대신이 투고한 기사가 있었다.
‘지난 출해 교역소 재해에 관하여 백성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출해 교역소의 화재는 방화로 추정되고, 그 전후로 그곳 탐라 백성들에 대한 살상이 있었으며, 따라서 이는 탐라에 위해를 가하려는 적당의 짓임에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또 아직 그 적당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못했지만, 조정에서 심혈을 기울여 탐구하고, 조사 중이므로 곧 명명백백히 밝혀 엄벌을 가할 것이라 하였다.
석삼이 그 기사를 읽고 있을 때, 문득 몽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해 교역소의 사건은 왜국에서 저지른 일이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석삼은 계속 기사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였다.
“하면, 왜국 막부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왜국은 나라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중 한 나라가 홀로 탐라에 대항하려 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 여럿이 모의한 것일 테고, 그러면 왜국 무왕 측도 그것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설령 아니더라도 여러 권세가가 모여 무왕 측을 압박했을 수도 있겠지요.”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일리가 있는 말……? 음?”
순보를 훑으며 기계적으로 반응해 주던 석삼은 불현듯 자신이 누구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를 깨닫곤 황급히 시선을 올려 몽건을 바라보았다.
탐라공의 아우라지만, 이제 7살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 아이가 왜국의 정세를 살펴서 출해 교역소에서 일어난 사건의 배후를 짐작하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삼은 자신이 7살 때 뭐했던가를 잠시 떠올렸다.
당시 주인 도령이었던 탐라공과 함께 호장댁에 있던 감나무 오르기에 열중했던 기억 정도가 전부였다. 당연히 세상 돌아가는 건 아무것도 몰랐다.
한데, 몽건 도령은 마치 어른처럼, 아니 그냥 나이만 먹은 어른이 아닌, 나랏일을 하는 관원처럼 정세를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석삼의 기함은 보지 못한 듯 몽건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하였다.
“제가 보기에 남양의 고을들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제가 추측한 것이 맞다면, 적당들은 탐라를 혼란하게 만들고, 형님 저하의 치세를 뒤흔들고자 할 테니, 아무래도 형님 저하의 치세가 확고하지 않은 남양의 섬에도 위해를 가하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곳은 탐라에서 멀기도 하고, 탐라의 군력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
석삼은 입이 떡 벌어졌다. 몽건의 추측이 그의 나이에 비해 출중하고, 일리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추측의 내용이 자신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양의 고을들은 남양 특명전권대사인 석삼의 소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만약 정말 적당이 왜국의 여러 나라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세력이라면, 그래서 탐라를 뒤흔들어 혼란하게 하려 한다면, 약점을 노릴 것이다.
남양의 고을들은 분명 탐라의 약점들 중 하나였다.
만약 지금 남양의 고을에 왜국의 적당들이 위해를 가한다면, 그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 남양의 고을에 관원들도 나가 있지 않고, 군력도 고작 200명 정도만 파견되어 있었으며, 경함선도 몇 척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유구섬 나하현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아마미 섬이나 다른 주변의 섬들은 물론, 유구섬 내 경계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만약 그런 빈약한 틈으로 적당이 탐라공국에 속한 고을을 공격한다면, 그래서 큰 피해를 입게 된다면, 이제 막 뿌리 내리기 시작한 탐라의 남양 치세는 초장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비단 탐라의 고을뿐만 아니라 탐라의 고을 주변 다른 고을도 마찬가지였다.
탐라공께서는 유구섬과 아마미 섬의 고을을 통해 주변을 흡수하길 바라시는데,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다는 인상을 남기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것에 생각이 닿으니, 석삼은 경기를 일으키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달려가려다가 품에 안고 있는 창아를 깨닫곤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문득 몽건과 강영을 보며 말했다.
“도련님, 우리 창아를 집에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네!”
부탁은 몽건에게 했는데, 강영이 좋아라 하면서 양손을 뻗어 창아를 받아 들려 하였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아기를 맡기는 게 영 불안했고, 특히 강영이는 아기를 무슨 장난감 가지고 놀 듯하는 것을 알기에 더 불안했지만, 그 뒤로 몽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 하니, 그를 믿고 아기를 강영의 품에 안겨 주었다.
하기야 근처에 아이들을 지키는 호위군병들이 있으니, 가면서 그들에게 부탁을 해 두면 될 듯했다.
“헤에.”
별로 힘들지도 않은 양 너끈히 아기를 받아 든 강영이 찹살떡 같은 아기의 뺨과 자신의 뺨을 부비며 기뻐하자, 몇 번이나 잘 봐 달라 부탁한 석삼이 서둘러 탐라공에게 달려갔다.
그의 어깨에는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이 짊어져 있었고, 또 동시에 대신들과 동급인 1품 직위의 특명전권대사직에 임한 자부심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다.
* * *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지만, 사실 때로는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갈고닦고 집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지금 몽주의 경우가 그랬다. 물론, 관심없는 ‘수신’이 문제가 아닌, ‘제가’가 문제였다.
“자네 누이와는 말을 나누어 보았나?”
정확히는 사촌 누나겠지만, 남매나 다름없이 큰 탓에 누이라 칭하곤 했다.
“어찌 장부의 일을 아낙과 논하고자 하겠습니까.”
“……자네 누이는 일개 아낙이기 전에 이 나라의 대공부인이고, 비서원장이네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비서원의 수장직은 앵도에게 쥐어졌다.
다른 이 누구에게 주어도 뒷말이 나올 상황에서는 어차피 대공부인으로서 위세를 가진 앵도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고, 여전히 호위군병들을 직접 관장하고 있는 그녀인 만큼 비서원장의 직위가 잘 어울리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이가 저를 관원에 임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네만…….”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얼버무린 뒷말이 사실 몽주의 진짜 심정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네는 내 외척이네. 외척의 등용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는 건 고래로부터 잘 알려져 있지.’
하나, 몽주의 속마음은 전혀 모르는 건지, 앵도의 사촌 동생들 중 하나인 청도는 몹시 굳건한 표정을 빤빤히 보이며 다시 청하였다.
“저는 저하께서 내신 만행지론도 수번이나 독파하였고, 상문도 이미 깨우쳤으며, 탐라에 와서는 관자와 손자도 익히고 있습니다. 산학계몽도 보아 수에 밝은 편이기도 하니, 저하께서 바라시는 관원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 같기는 하군. 한글을 상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걸리네만…….”
“고려에서는 한글을 다들 상문이라 합니다.”
상문(商文), 즉 상인들이 쓰는 문자. 탐라 상단이 고려에 진출하면서 고려의 상인들 사이에도 한글이 퍼졌고, 그래서 절로 붙은 한글의 별칭이었다.
역사에서 한글을 낮춰 부르던 언문(諺文) 같은 멸칭은 아니었지만, 세종대왕께 부채 의식이 있는 몽주의 입장에서는 마땅치 않았다.
차후에 공문을 내려 한글이라 제대로 부르게 해야 하나 싶다가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님을 다시 깨닫고 청도에게 집중하였다.
“나는 자네에게 기술학교부터 수료하길 권하고 싶네.”
“이미 학교에서 배운다는 교과서를 훑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이 이미 제가 익힌 것이니,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럴 리가? 하면, 자네는 제철하는 방법이나 선반을 다루는 방법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겐가?”
“그건……. 하나, 관원이 될 자가 그런 바치들의 일까지 익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신들 중에서도 기술학교를 나온 이는 없지 않습니까.”
“그야 기술학교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일 뿐이네. 교관대신 홍길도는 자네가 훑어봤다는 교과서를 만든 자이고, 공관대신 화극 어른은 자네가 무시하는 바치들의 일을 몸소 이끄는 분이시며, 체관대신 박무는 목장 출신이네. 또, 재무대신 점녀는 자네 누이의 몸종 출신이라 온갖 잡일을 다 경험하였고, 농관대신 초고불은 말을 키우던 목자였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포은 정몽주 선생은 바치로서 이 년여 동안 일했고, 기술학교에서 일 년간 수학하기도 했네.”
“하면, 탐라에서 관원이 되기 위해서는 천한 일을……!”
“천한 일이 아니라!”
쾅!
몽주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치곤, 잠시 청도를 노려본 후에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백성들의 일이네. 이 탐라의 백성이 무슨 일을 하는지, 탐라가 무엇으로 번성하고 있는지, 그런 일들 중 적어도 하나는 잘 알아야 내가 자네를 믿고 그와 관련된 직위를 줄 수 있지 않겠나.”
몽주의 일갈과 낮은 으름장에도 청도의 표정은 몹시 불만이 가득했다.
대충 꼭 자기한테까지도 그렇게 깐깐하게 굴어야 하느냐는 불만인 듯했다.
그때, 문득 집무실 문이 스윽 밀려 열렸다.
“청도는 그만 나오너라.”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앵도였다. 기분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니, 청도가 누이의 등장에 잠시 놀라다가 이내 뭔가 맘을 먹었는지 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가 말하였다.
“누님, 자형께 말씀 좀 해 주세요. 저는 정말 열심히 수학하였습니다. 절대 자형께 누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
청도의 말에는 떨림이 있었다. 몽주에게 말할 때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종도, 청도 형제에게 앵도는 사촌누이이기 전에 누나였고, 누나이기 전에 어머니 같은 존재였지만, 그 어머니란 마냥 인자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여, 일부러 누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자형을 만나러 온 것이기도 했다.
“네가 열심히 갈고닦은 것은 나도 전해 들어 알고 있다.”
“그렇지요? 절대 실망스러운 …… 억!”
빠악!
쿵!
전광석화 같은 앵도의 손놀림에 목덜미를 얻어맞은 청도가 통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다.
“……!”
“제 아우들의 일로 심기 불편하셨네요. 죄송해요. 제가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 잘 타이르도록 할게요.”
“아니, 뭐, 괘, 괜찮소. 한데, 너무 세게 때린 거 아니오?”
“그냥 기절한 것뿐이에요.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니 걱정 마세요.”
앵도는 그리 말하곤, 쓰러진 청도의 옷자락을 한 손으로 잡더니 질질 끌어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몽주는 절로 손으로 자신의 목과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앵도가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라는 그 손속을 직접 경험해 본 부위들이었다.
“휴우, 뭐, 어쨌든 넘어갔군. 종도는 모르겠는데, 청도는 아무래도 좀 더 익혀야 쓸 만하겠어.”
중얼거리며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려던 몽주는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책상 한쪽에 놓인 장궤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장궤는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관원이 아닌 고신걸이 상단의 주인인 몽주에게 올려 보낸 보고서일 뿐이었다.
형식이야 어쨌든 그 내용을 다시 살핀 몽주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종도가 이런 인물은 아닌 듯한데…….”
고신걸이 보낸 보고서는 그 대부분이 상단에 대한 것이고 몽주가 명한 것을 처리한 결과에 대한 것들이지만, 그 외의 내용도 있었으니, 이번에는 종도에 관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내용도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고신걸이 밝힐까 말까 크게 고심한 끝에 전해 올린다며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날 탐라 상단을 해코지하던 고려 상인들과 몽주가 파견한 해병대가 동경(경주)에서 크게 충돌했을 때, 종도가 그 혼란한 틈을 노려 고려 상인들의 처와 여식들 이십여 명을 간음하고, 추행하였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인들을 모아 두고, 고신걸을 불러 자신이 이들을 강제로 범했음을 자랑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에, 고신걸은 고민 끝에 그 여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대가로 소문이 나가는 걸 막았다고 하였는데, 종도가 몽주의 처사촌이기에 자칫 그의 악명이 몽주에까지 누를 끼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고신걸이 밝힌 것이 사실이라면 종도를 그냥 두어 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 인면수심의 짓거리를 했다면 처사촌이든 뭐든 당장 매로 곤죽을 내고 목을 매달아 버려야 할 것이다.
하나, 목을 매달기는커녕, 몽주는 종도를 불러 따로 추궁하지도 않았다.
여인들을 강제로 간음하고 추행한 것도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그걸 자랑했다면 정말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런데 종도는 정말 그런 작자일까.
몽주는 그가 포구에서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던 것을 기억했다.
데카이에서 죽은 시신들과 그 유가족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슬픔이 자신의 해금 연주와 뒤엉켰던 그 시간에 종도는 처음 본 자들의 슬픔에 공감했다.
공감할 줄 아는 자가 사이코패스일 리 없었고, 여인들을 강간해 놓고 자랑할 리도 없을 것이다.
혹시 ‘소시오패스’일 가능성도 없다.
감정을 이용할 줄 아는 소시오패스라면 거짓으로 눈물 연기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소시오패스면 자신에게 크게 손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아녀자를 강간한 일을 자랑하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다 죽이고 모르는 척을 했겠지.
“아이고, 이 시대에 무슨 사이코고, 소시오냐. 조금만 혼란하면 인면살귀들이 날뛰는 세상에…….”
몽주는 머릿속 생각을 자조와 함께 날려 버렸다. 하나, 그래도 고신걸에 종도의 강간과 추행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라 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만약 그게 아니라면, 고신걸이 밝힌 것이 진실의 전부라면, 종도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일하자, 일.”
종도에 대해 결론을 내린 몽주는 당면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사대 후보로 추천받은 자들을 검토해야 했고, 데카이에서 전해 온 장계도 살펴야 했다.
석삼이 전해 온 남양 고을의 위험에 대비할 방책도 강구해야 했고, 녹둔도의 호인들에게 ‘최후 통첩’할 내용도 최종 정리해야 했다.
강영이가 말해 준 ‘우리 몽건 삼촌이 이상해요. 머리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도 잠시 떠올랐지만, 얼른 지워 버렸다.
머리가 너무 나쁜 것 같다는 것도 아니고, 좋은 거라면 뭐가 문제일까.
그런 거에 신경 쓰기에는 특별한 일과 평범한 일들이 몽주의 앞에 잔뜩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특별한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고려 궁중후 염흥방이 서찰을 보냈는데, 명국 위국공 서달이 다음 달 초순 안에 고려에 오고, 그가 탐라공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먼저 전했다며, 개경으로 오길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딱 봐도 요동 북벌과 관련된 일임에 분명했다.
그 일까지 얻고 나니, 몽주는 그저 얼른 현대에서 깨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이러다 꿈에서 과로사할 지경이었다.
* * *
탐라에서 남양의 고을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정을 파악할 무렵, 안타깝게도 실제 남쪽의 바다에서는 이미 일이 벌어졌다.
수십 척의 배들을 타고 온 왜인들이 아마미 섬을 침략하여 아마미 백성들을 마구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으니, 아마미 섬 전체가 통곡과 비명으로 가득했다.
아마미 섬에서 탈출하여 유구섬에 소식을 전하러 간 이를 통해 이 사실을 안 나하현 주둔군이 급하게 네 척의 경함선을 이끌고 아마미 섬으로 향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아마미와 유구섬은 200길 이상 떨어져 있으니, 아무리 배를 타고 그 두 섬 사이의 여러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하여 급히 움직인다고 해도 오가는 데 하루 가까이 걸려야 할 형편이었으니, 급히 난리를 벌이고, 도주한 자들을 잡는 건 불가능했다.
나하현 주둔군의 지휘자는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군병으로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토호들을 불러 침략한 자들이 누구인지, 예상컨대 시마즈씨인지를 물었다.
“시마즈씨는 아니었소. 가문기의 모양이 열십 자가 아닌 삼(三) 자였소.”
삼자 가몬(家紋 : 가문 문장)은 아마미의 토호들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마미가 직접 접촉해 본 왜국 가문은 시마즈씨가 전부였으니, 다른 가문의 가몬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분명 왜국 말을 쓰고 왜국 방향으로 도주했는데, 정작 왜국에서 아마미 섬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시마즈씨가 아닌 다른 가문이 아마미 섬을 침략했다는 건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장을 거짓으로 바꾸고 저지른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예 문장을 달지 않으면 모를까 다른 가문의 문장을 도용하여 약탈한 게 알려지면 왜국에서 그 가문은 다른 가문과의 인연을 모조리 끊어야 하는 터라, 그조차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남은 가능성은 시마즈씨가 다른 가문이 아마미 섬을 침탈하는 것을 허락하여 뱃길을 내어 주었거나, 혹은 두 가문이 모의하여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의미심장한 추정이었으니, 나하현 주둔군 지휘관은 이 상황을 서둘러 탐라공에게 고해야 한다 여겼다.
하나, 당장은 탐라에 귀의한 것을 후회하고, 원망하는 아마미의 토호와 백성들 앞에서 탐라군병들이 할 수 있는 건 심각한 표정으로 난감한 심정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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