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11)
쪼르륵.
소주병에서 흘러나온 맑은 술이 잔을 채우자, 몽주는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쓰네요, 써.”
오만상을 찌푸린 채 소주의 쓴 맛에 진저리를 친 몽주는 얼른 꼼장어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겉모습을 보면 다시 안 마실 것 같건만, 몽주는 꼼장어를 씹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이미 많이 드신 듯한데, 그만하시죠.”
“……주십시오.”
몽주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하니, 두신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병을 들어 다시 몽주의 잔을 채워 주었다.
쑤웁.
“크하……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소주 냄새가 몽주의 잎에서 길게 뿜어져 나왔다.
붉은 기운이 도는 몽주의 눈매를 보면 분명 취기가 많이 돈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집안이 망하기라도 한 줄 알겠네요.”
“망한 건 아니지요. 여기나 거기나. 후후.”
여기나 거기나 망하기는커녕, 잘나가고 있었다.
현대의 몽주는 취미(?) 생활에 수백억 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고려의 몽주는 공국의 주인으로 동북아시아 전반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죽고 다친 게 그렇게 맘 아프십니까.”
두신의 물음에 몽주는 뭔 소리냐는 표정을 보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첫 천몽 때 제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인 줄 아십니까?”
“…….”
“아, 물론 저도 모릅니다. 첫 천몽이 끝나갈 무렵 예전 일을 되새김해 본 적 있는데, 도저히 셈이 안 되더라고요. 어디 기록해 둔 것도 아니니까요. 근데 한 번에 가장 많이 죽인 수는 대략 압니다.”
몽주는 그렇게 말을 하곤 잠시 생각하는 양 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많으면 1만 명 좀 넘을 거고, 적어도 6, 7천 명쯤은 될 겁니다. 대단하죠? 그야말로 대량학살이었죠.”
“…….”
재상이나 두신이나 몽주의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도 재상이 먼저 난감함을 정리하고 무어라 받아주었다.
“뭐, 전쟁에서 수천 명 정도가 죽고 다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아무리 청동기 시대라고 해도 이미 군대가 있던 세상이니 큰 전쟁이었…….”
“아뇨, 아뇨, 전쟁에서 죽는 거 말고요. 저항의 의지를 잃은 자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거 말하는 겁니다. 제 말은.”
“…….”
재상이 핑곗거리를 만들어 억지로 합리화해 보려 했는데, 몽주는 그것마저도 부정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그게 언제였냐면,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은 뒤 시간이 좀 지나서, 우리 부족이 가지고 있던 철기 기술이 유출되었을 때였어요. 우리 부족 주변에서 압제당하던 부족들이 철제 무기를 은밀히 나눠 갖고 한 번에 반란을 일으킨 거죠. 진짜 후달렸죠.”
그저 철기와 기마에 근본한 군사적 우위를 믿고 ‘깡패짓’을 하다가 여러 부족들이 일거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쉽게 생각하고 소수의 전사들만 보냈는데, 초전에서 대패하며 부족 전사 200여 명이 죽어 버렸었다.
그제야 상황이 위급한 것을 깨닫고, 몽주는 남아 있던 전사들을 깡그리 모아 직접 전장에 나가야 했다.
그의 부족 전사는 1,500명 정도였고, 반란군의 수는 1만은 족히 되는 듯했다.
말이 1만이지, 1만 명의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기세를 뿜고 있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 절로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몽주가 그대로 도주할까 말까 고민할 때, 부족의 대전사가 정면 승부를 피하고 기마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의 군세를 흩으러 뜨리자는 제안을 해 왔다.
그들이 우위에 있던 철기와 기마 중 철기는 잃었지만, 기마는 아직 남아 있으니 그에 의지하자는 것이었다.
혼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몽주는 그게 맞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대전사의 경험과 실력을 믿고 그에게 지휘를 맡겼으니, 그 시절 몽주가 했던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수를 믿고 일시에 쳐들어오는 반란군과 충돌하는 대신, 기마로 날래게 후퇴하면서 틈틈이 화살을 쏘아 적병들을 조금씩 소모시켰고, 적이 추격하다 지치면 시야 밖으로 돌아 쉬고 있던 적군의 후미와 측면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적군 2천여쯤을 죽고 상하게 만들었을 때, 반란의 수뇌가 몽주의 전사들을 무시하고 몽주의 부족 근거지를 향해 돌격하듯 쳐들어왔다.
뒤에서 몽주의 전사들이 반란군의 대오를 끊어 죽이고, 화살을 날려 발목을 잡았지만, 그럼에도 적군의 선두는 기어이 몽주의 부족 근거지에 난입하여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부족민들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그때부터는 작전이고 뭐고, 난전에 돌입하여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한 나절을 싸우고 나자, 몽주의 주요 근거지 중 한 곳이 폐허로 변했지만, 적병들을 모조리 참살할 수 있었다.
물론, 몽주의 부족 전사들도 다시 3백 여가 죽고 다쳤으니, 수적으로 압승이라고 해도 몽주는 분노에 미쳐 날뛸 지경이었다.
그렇게 분노로 이성을 잃은 중에, 부족 대전사가 복수를 요구하자, 몽주는 당연히 그에 응했다.
그 복수란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지워 버리는 것.
이미 그 부족들에서 싸울 수 있는 사내들은 모조리 병사로 나왔다가 다 죽었으니, 그 부족들은 아무런 저항도 불가한 상태였다.
몽주의 남은 1천여 기마 전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부족의 주요 마을을 습격하였고, 그 마을들은 모조리 초토화되었다.
“나중에 보고 받기로, 그 부족들을 다 더하면 대략 1천 5백호쯤 된다고 하더군요. 당시엔 기본적으로 1호당 7명은 되었으니, 일부 도망친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많으면 1만 명도 넘었겠죠. 게다가 초토화된 마을의 시체들을 어찌했는 줄 아세요? 시체들을 대충 모아서 구덩이에 처넣고 기름을 뿌려서 불태웠어요. 그리고 그 위를 말의 똥오줌으로 덮고, 묻었지요. 10년 뒤에 이곳을 경작하여 얻은 것으로, 죽은 전사들의 아이들이 전사로 싸울 수 있게 하겠노라 하면서요.”
“……실제인 줄 모르고 하신 거지 않습니까.”
두신이 한숨과 함께 다시 정당화시켜 주려 하였다.
“아, 그렇죠. 꿈치곤 이상하다는 생각은 늘 했었지만, 설마하니, 그게 현실이고, 훗날 변할 현대의 과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하지만,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알았다 하더라도 제 선택이 달랐을까요?”
“달랐을 겁니다.”
두신은 단호하게 그럴 리 없다고 답했지만, 곁에 있던 재상은 포장마차 천장을 보다가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현실이면, 더 분노했겠죠. 자기 전사들이 떼로 죽고, 근거지가 박살 나면서 부족민들도 죽어 나갔으니까요. 꿈속이라고 생각함에도 그렇게 분노가 치솟았다는데, 그게 진짜로 죽은 거라는 걸 알았다면……. 물론, 아닐 수도 있겠…….”
“아뇨, 그 말이 맞아요. 첫 천몽 때는 중고딩이라 철없어서 그랬다고 저도 스스로 변명하곤 했지만, 솔직히 지금이라도 다를 것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똑같거나 어쩌면 더 했을 게 분명해요.”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두신이 걱정스레 물은 말에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말한 이번이란 몽주가 고려에서 처한 상황을 말했다.
이미 왜국 누군가의 음모로 27명의 탐라 군병과 백성들이 죽은 것에 더해, 탐라에 귀의한 아마미 섬 사람들 300여 명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아마미 섬에서 있었던 ‘테러’는 순전히 테러를 위한 테러였다.
데카이에서는 비싼 사탕이라도 훔쳐 갔지만, 아마미 섬에서 저들이 강탈해 간 건 의외로 적었다.
물론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크겠지만, 수십 척의 배를 끌고 아마미 섬까지 가는 데 들인 인적, 물적 소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크게 손해일 게 분명했다.
그건 아마미 섬 습격이 물적 동기보다는 탐라에 귀의한 아마미에 대한 처벌 내지, 탐라의 위신과 안정성을 해치기 위한 동기가 밑바탕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못할 것 같습니까?”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첫 천몽 때는 몽주 씨의 부족이 압도적인 세력이었으니 가능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요. 시작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압도적이죠.”
“그래도 탐라군이 7천 정도인데 어떻게 ……?”
“탐라군이 7천이지, 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건 아니지요.”
“……?”
두신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 재상이 끼어들어 물었다.
“혹시 징집을 생각…… 아, 서규슈의 무사들을 염두에 두신 거군요.”
“오기 전에 다의홍에게 보고를 요구해서 받아봤는데, 당장 동원 가능한 수가 6천이고, 한 달의 시간을 주면 1만 5천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 병력을 모두 폭죽으로 무장시키고, 화포와 개복포의 엄호를 받는다면, 그 군대는 당대에서는 분명 압도적인 위력을 가진 것이겠죠.”
말을 하는 몽주의 눈매가 더 붉게 달아올랐다. 결코 더 취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규슈의 병력을 이용하는 건 몽주 씨가 바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까지 군사력이 필요할 때도 전혀 쓸 생각도 안 하셨고요.”
“예, 그렇긴 하죠.”
서규슈의 무사들을 무시한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탐라에 비해 월등히 넓고, 치안의 수준이 더 낮은 서규슈의 안정을 위해 다의홍이 무사들을 원활하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더 근본적인 이유였는데, 서규슈의 무사들을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그들을 더 대우해 줘야 하니, 그것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몽주가 탐라를 중심으로 그의 영역에서 세우고자 하는 세상에 무사 계급은 필요 없는 걸 넘어, 배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군력은 정부에 의해 조직되고 관리되는 군대에 의지하고, 치안 역시도 장차 정부에 속한 경찰 조직을 통해 유지하고자 함이니, 기존의 무사 계급은 군대나 경찰에 직업적으로 흡수되어야지, 계급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게 몽주의 생각이었고, 재상과 두신도 동의한 바였다.
만약 서규슈의 무사들이 당장 필요하다고 해서 그 힘을 빌린다면, 그것도 치안 정도가 아니라 외국과의 싸움에 동원한다면 그만큼 그들을 대우해 줘야 하고, 반대로 무사 계급의 폐지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그래도 서규슈의 무사 가문들이 탈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극심해지거나 아예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게다가 데카이의 일에 무사 가문들이 연루된 게 확실한 중에 남아 있는 무사들 중에서도 적들과 내통하는 자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요.”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서규슈의 무사들을 동원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게 현실에 맞으니까요.”
“…….”
몽주의 간단한 대답 안에서 재상과 두신은 이번 일을 통해 몽주의 생각이 여러모로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탐라 공국을 세우고, 기세 좋게 세상을 선도해 보겠노라 시도하면서 깨달은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
“주도는 하되 선도는 말았어야 했다는 거고, 어떤 시대든 그 시대 상황 맞는 해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거야 애초에 저희와 함께 ‘놀이’를 하면서부터 아시…….”
“알죠! 아는데 머리로만 아는 거였죠!”
문득 몽주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끊었다. 그러곤 다시 소주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우리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고려 당대인들이 그 시대에 갇혀 있다고 폄하했지만, 우리도 결국은 현대의 종속물이라는 겁니다. 특히, 한국인인 우리들은 현대 한국이라는 지금 이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몽주는 양손을 벌려 포장마차 안을 휘휘 돌려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 모습에 별로 많지 않던 포장마차 손님들 중에 저 사람 취했다며 흉보는 모습도 보였다.
“가장 큰 착각이 뭔지 아십니까? 내가 백성들을 너무 아꼈다는 거죠. 아마미 섬의 일까지 전해지고 나서 백성들이 저를 어찌 보시는 줄 아십니까? 나약하다고 합니다. 너무 맘이 좋아서 문제랍니다. 그래서 왜국이 우리를 우습게 본답니다. 제가 이번 천몽에서도 꽤 단호하게 굴었던 적도 제법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대의 시선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애초에 현대적인 시선에서 백성의 권리 따위에 신경 쓴 저희가 병신이었던 게죠. 그거 아십니까? 공국경론에 쓴 거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기본권을 제시할 수 없어서 엄한 가족을 끌어다가 가족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기본권을 최소로나마 지키게 해 주려는 거, 그 의도 따윈 아무도 몰라 줘요. 존중? 교육? 그냥 제가 맘이 좋은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그건 다 필요해서 하신 거 아닙니까.”
“그쵸! 필요해서죠! 한데, 그 필요를 권리로 접근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거죠. 권리가 아니라 의무와 책임만으로 했어야 합니다. 권리는, 그게 무슨 권리든 간에, 신분 해방처럼 저들이 직접 강렬히 원하고, 제 손으로 쟁취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거였습니다. 먼저 손에 꼭 쥐어 준다고 해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죠.”
“맞는 말씀입니다.”
말을 받아주던 두신 대신 재상이 끼어들어 말을 받았고, 이어 두신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저번에 말했던 거랑도 일맥상통하는 말씀이시네.”
“무슨 말?”
“우리도 동의하긴 했지만, 몽주 씨가 유사 헌법으로 공국경론을 제정하고, 세 가지 법령을 반포하신 거, 결국 현대 한국의 법제를 베끼는 건데, 그게 과연 고려 말에 적합할까 고민했던 거 말이야. 현대 한국의 법제가 근현대 역사를 거치면서 대륙법 계통을 따라 정해졌던 건 현대 한국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바에 기반한 건데, 당대 고려에서는 뜬금없을 수도 있지.”
“글쎄, 지금에야 대륙법, 영미법 나누지. 고려 말 시기에는 그런 구분조차 없었을 텐데? 뭘 하든 몽주 씨와 탐라공국만의 법체제지.”
“그러니까 대륙법과 영미법으로 나뉜 것부터 유럽 여러 나라들의 법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서로 닮아 가고, 구분되면서 나뉜 거고, 그게 그들이 경험한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행된 거라는 말이야. 한데, 몽주 씨가 고려에서 세우려한 체계는 현대 한국의 대륙법적 법제를 본떠서 이식하려 한 거고. 고려와 탐라의 역사적 경험과는 큰 관련이 없는 만큼 당연히 뜬금없는 짓이겠지. 법제만 그런 게 아니라 몽주 씨가 탐라 조정을 세우면서 실행하려 한 모든 제도가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도 반대한 회사령은 두말할 것도 없고, 공벌령이나 국토령도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을 거야.”
쭈웁! 탁!
재상과 두신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몽주는 다시 소주을 들이켜곤 잔을 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캬아! 웬일로 재상씨가 절 다 이해해 주시네요? 흐흐,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비단 공국 내의 일만 그런 게 아니지요.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야 교역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지만, 저들은 잘 몰라요. 물론, 교역하면서 얻는 이익이 좋은 거야 알고 있지만, 권력 앞에서는 다 하찮은 거라는 걸로 생각하죠. 있던 돈줄이 줄어들고, 사라지면 자기 권세에 도움이 안 돼서 아쉬울 뿐이지, 그 돈줄이 있어 먹고 살던 백성들이 밥숟가락 놓게 되는 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특히, 왜국 놈들은 진짜 상관없나 봐요.”
“아주 모르진 않겠죠.”
“아는 새끼들이 우리한테 그런 짓거리를 할까요? 지들 시장성을 믿고? 지랄……. 왜국 시장이 탐나지만, 한동안은 끊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명국에서 탐라 물건 더 가져다 달라고 난리니까.”
몽주가 마치 두신이 왜국 테러범인 양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이자, 두신이 옅은 한숨과 함께 재차 물었다.
“그래서 첫 천몽에서 그랬듯…… 대대적인 보복을 할 생각입니까?”
“후우…….”
첫 천몽 이야기를 꺼내며 돌려 묻는 말에 몽주도 한숨을 마저 쉬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예, 해야죠. 민간인 학살은 피해야겠지만, 테러 저지른 새끼들은 씨 한 톨 남겨 두지 않을 겁니다. 아직 어떤 놈들이 어떻게 작당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마즈씨랑 고노씨가 연관된 건 분명하죠. 거기에 시마즈씨가 나섰으니 키쿠치씨도 덩달아 얽혀 있을 거고요. 그놈들부터 족치면 뭐라도 튀어나오겠죠.”
몽주가 낯선 고노씨를 언급한 건, 아마미 섬을 침략했던 왜국 배에 붙은 삼(三)자 가몬이 시코쿠(西國)섬의 고노씨(河野氏)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탐라에서 보고 받을 때는 전혀 몰랐고 찾아볼 겨를도 없었던 가몬이었지만, 현대에서는 간단한 검색으로도 찾을 수 있었다.
삼자 가몬을 쓰는 가문이 고노씨만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미 섬까지 대단위 선단을 이끌고 올 수 있는 가문은 고노씨뿐이었다.
고노씨는 본디 오치씨(越智氏)의 분가로, 오치씨의 분열 중에 본가가 왜국 혼쥬로 이주한 뒤, 남은 오치씨 분가가 고노씨가 되었다.
고노씨는 시코쿠의 이요국(伊予國)을 다스렸는데, 이요국의 위치가 현대의 에히메현(愛媛県), 시코쿠 섬의 북서쪽 세토내해 방면이라 규슈와도 매우 가까웠다.
게다가 고노씨는 왜국 최대 수군을 보유하였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아직 역사적으로 그런 시기는 아니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강한 수군을 보유했을 것이다.
즉, 만약 시마즈씨가 규슈가 아닌 곳에서 큰 수군을 얻고자 하였다면, 고노씨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니, 이미 가몬으로 확인한 바도 있는 바, 정황상 고노씨가 탐라에 적대한 것은 거의 분명했다.
몽주가 고노씨를 언급하자, 재상과 두신은 걱정스레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큰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노씨가 시마즈씨를 도왔다는 게 사실이면, 막부까지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막부가 배후에 있다면, 왜국 전체는 아니더라도 왜국 서부는 거의 다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은 고노씨가 역사에서 막부 칸레이(관령)인 호소카와 요리유키와 사이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이가 좋지 못한 정도를 넘어 고노씨의 가독 두 명이 호소카와씨와의 분쟁으로 전사할 정도로 철천지원수였다.
나중에 호소카와씨가 관령에서 실각한 후 막부의 중재로 화해할 때까지 두 가문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싸움을 빈발했다.
물론, 아직 시기적으로 두 번째 가독 전사는 일어났을 때가 아니고, 호소카와씨가 기세등등한 시기인 터라 고노씨가 상대적으로 조용한 때이긴 했다.
게다가 역사가 많이 바뀌었으니, 왜국 내 갈등과 대립의 구도도 역사와 사뭇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아마 웬만하면 그랬을 것이다.
고노씨가 대량의 수군을 동원하여 아마미 섬까지 갈 정도라면 그건 호소카와씨와의 대립이 없거나, 약하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는 건 탐라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이든 아니든 막부가 배후에서 고노씨와 시마즈씨를 지원한다는 정황을 의미했으며, 막부가 배후에 있다는 건 결국 왜국 내 다수의 나라들이 이번 일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결론이었다.
“아아,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일단 시마즈씨와 고노씨를 팰 겁니다. 우리가 그 두 가문에 키쿠치씨까지 더해서 세 가문을 박살 내 놓는 걸 보면, 반항을 하든 항복을 하든 튀어나오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요. 반항하면 때려잡고, 항복하면 그놈을 통해서 진실을 밝히면 되는 거죠. 뭐, 잘하면 이참에 오우치씨에 속한 북규슈 빼고 규슈 전체를 석권해 버리는 거죠. 아니, 오우치씨마저도 규슈에서 쫓아낼 수도 있고!”
주절대는 몽주의 얼굴에는 취기가 완연해져 있었다.
두신이나 재상은 그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 특히 왜국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 여겼지만, 지금 그 말을 해 봐야 기억도 못할 듯했다.
“아우, 저 화장실 좀…….”
소주 한 잔을 더 들이켠 몽주는 화장실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하나, 취기를 못 견딘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뒤쪽으로 넘어지려 하자, 두신이 얼른 일어나 우람한 그의 팔로 몽주의 몸을 잡아채었다.
“안 되겠다. 이만 가자. 몽주 씨는 내가 엎을 테니, 넌 계산이나 해.”
두신이 몽주를 번쩍 엎고 포장마차에서 나가기 시작하자, 몽주의 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차랑! 달리는 거야! 저 수평선까지 마구 달리는 거다! 히랴! 히랴! 쉬지 않고 달리면 다음번에 네게 가장 예쁜 암말을 네게 주마! 으하하!”
“…….”
대략 주정하는 말이나 두신의 등 위에서 날뛰는 폼을 보아하니, 두신을 말이라 여기고 자신이 승마 중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그 특이한 주정을 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혀를 쯔쯧 차대니, 얼결에 말이 된 두신은 쪽팔려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재상! 얼른 안 와!”
등 위에서 여전히 헛소리와 발버둥을 치고 있는 몽주를 애써 붙들고 있던 두신이 좀처럼 안 오는 재상을 찾아 몸을 돌리니, 저 멀리 재상이 반대쪽으로 도망가듯 급하게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새끼……!”
“히랴! 어허, 미차랑! 어찌 달리지 않는 게냐! 이러면 다음 새끼배이 때 늙은 씨암말을 줄 것이다!”
“…….”
* * *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찰을 편 다의홍은 그 안의 내용을 읽고 나자 크게 안도하였다.
“후우.”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자, 다의홍의 주변에서 눈치를 살피던 수하들 사이 분위기도 다행스러움이 밝아졌다.
“탐라공께서 무어라 하셨습니까.”
“다행히 나를 탓하는 말씀은 없으셨네.”
걱정하던 부분을 다의홍이 확실하게 매조 짓자, 수하들 사이 감도는 다행스러움은 이내 웃음으로 변했다.
데카이에서 사건이 일어난 후, 두 번째 탐라공의 전언에도 그들의 주인에 대한 책망이 없다면, 이번 일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뜻이고, 자신들도 무탈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어허, 지금 웃음이 나오는 겐가!”
“…….”
그런 분위기의 변화를 느낀 다의홍이 크게 호통치니, 다시 주위가 숙연해졌다.
“데카이가 그렇게 당한 게 대체 언제인가! 아직도 적괴의 정체를 알아내기는커녕, 실마리조차도 제대로 찾지 못한 중인데, 그대들이 웃을 여유가 있는 것인가? 지금 제 정신들이야?!”
연이어 호통을 친 다의홍은 성난 얼굴로 서찰을 둘둘 감아 그걸 쥐고 수하들을 향해 내밀며 힐난했다.
“지금 이 서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 줄은 짐작이나 하는 겐가? 탐라공께서 얼마나 극심한 분노를 품으셨는지 그대들은 알기나 해? 차후에 탐라공께서 서규슈에 방문하실 때, 내가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게 해 줘야 할 것 아닌가!”
“송구하옵니다!”
수하들이 일제히 허리 굽히며 사과를 올렸지만, 다의홍은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당장 수하들에게 말하지는 못할 내용이지만, 탐라공이 보낸 서찰에 담긴 내용은 그가 책문당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조차도 일단 문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긴 했지만, 서찰의 내용을 곱씹어 보니, 결코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궁서//……하여, 너는 급히 서규슈의 무인들을 점검하고, 그 수와 능력을 판별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크게 믿을 수 있는 자들과 아닌 자들도 구분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유휴한 장정들도 골라 징집하여 훈병시켜 두어야 할 것이니, 네가 지난번 밝힌 것이 사실이라면 최소 1만은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기한은 한 달을 주겠다.//
지난번에 서규슈가 동원할 수 있는 군력에 대해 하문하시더니, 이번에는 아예 동원을 준비하라는 명까지 적혀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전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의홍은 문득 흐려졌던 시선의 초점을 수하들에게 맞추곤 명하였다.
“다들 나가라. 차후에 너희들을 일일이 불러 따로 명할 것이 있을 것이다.”
“……?”
한참 훈계와 호령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세 기세를 죽인 다의홍의 모습에 수하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지만, 다의홍이 손짓까지 하며 나가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인사를 올리곤 물러났다.
홀로 남게 된 다의홍은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생각에 잠겼다.
전쟁이다. 그것도 탐라공께서 경험하신 수준을 넘어선 큰 전쟁임에 틀림없다.
아니었다면 서규슈의 군력까지 쓰실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지난날, 탐라가 여러번 군력을 씀에 있어, 탐라공은 한 번도 서규슈의 군력을 쓰려 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그저 서규슈의 안정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이라 여겼지만, 다의홍도 그것만이 이유가 아님을 이제는 짐작하고 있었다.
서규슈의 군력을 빌리면, 서규슈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이니, 전투에 참여한 다의홍과 서규슈의 호족 및 무사들도 그 정치적 기반이 튼튼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탐라공은 그게 마땅치 않아, 일부러 그간 서규슈의 군력을 없는 셈 취급했을 것이다.
특히 탐라공은 무사 가문이라는 걸 크게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다의홍에게 서규슈를 다스리게 하면서 명한 것들 중에는 무가에게 지역의 치안을 맡기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대신, 따로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에 무인들을 넣어 다의홍이 직접 관리하라 하였으니, 무인의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무인으로 이뤄진 가문이 득세하는 것을 혐오하였던 게 분명했다.
실제로 서규슈의 무가들 중에 실망하고 탈주한 가문이 적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무가를 홀대한 것에 있었다.
한데, 그렇게 멀리하던 무가를 다의홍더러 직접 점검하고 싸움을 준비하게 명했으니, 그만큼 탐라공이 한 손이라도 더 끌어모으고 싶어 할 정도로 엄엄한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데카이의 화재 사건과 유관할 것이다.
“탐라공께서는 이미 적당들을 찾아내신 것인가.”
다의홍이 중얼거리니, 그 안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정작 서규슈를 다스리는 그는 아직 그 적당들의 정체에 대해 알아낸 것이 드문데, 먼 탐라에 계신 탐라공은 어찌 적당들을 알아내신 것일까.
그저 짐작만으로 일을 내시려는 걸까 싶기도 했고, 짐작이라면 다의홍도 염두에 두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 달 뒤를 명백히 정하고 군병을 준비하게 할 정도면 짐작 그 이상일 것이라 여겼다.
어쨌거나, 다의홍은 이번이 그와 서규슈에 큰 기회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슈고일 따름이니, 탐라공을 따르면서도 탐라공국에서는 아무런 직위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탐라공을 주인으로 모시는 그의 입장에서는 크게 난감한 부분이었다.
왜국의 정치는 주인과 수하의 관계가 분명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서규슈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규슈 전체를 시야에 두고 있고, 나아가 왜국 막부와 구분되는 세력으로서의 왜국 내 입지와 탐라국 내 정치 세력을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탐라공으로부터 직위를 얻어야 했다.
“군공을 세운다면 상을 청할 기회가 생기겠지.”
문득 끓어오르는 긴장감과 각오에 마른 입술을 마주 문지르며 다의홍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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