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13)
* * *
나담제(Naadam Festival).
오래전 철목진(孛兒只斤 鐵木眞 : 징기스칸)이 초원을 일통한 이후, 전사의 용맹을 북돋우기 위해 시행한 축제.
그 시작은 몽골족이지만, 지금은 초원의 유목 민족이라면 어느 족속을 가릴 것 없이 다 즐기는 축제였다.
탁기가 녹둔도에 닿았을 무렵, 녹둔도의 호인들인 오도리 부족과 후르하 부족은 나담제를 열고 있었다.
본디 가장 큰 나담은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으나, 부족의 상황에 따라 여유가 있으면 수시로 열렸으니, 탐라의 지원 덕에 먹고 사는 문제를 던 녹둔도의 호인들은 봄맞이 나담 축제를 열었다.
녹둔도 언덕 위에 세워진 군영에 도착하자마자 탁기는 같이 도착한 탐라군으로 하여금 윤형 철조망을 펼칠 준비를 하라고 명하였다.
호인들과 대화를 해 보고 통하지 않으면 싸움이 있을 것이니, 그때를 미리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윤형 철조망은 펼쳐 놓기만 하면 되지만, 그래도 나무 기둥을 틈틈이 세워 놓으면 그 기둥에 기대 놓음으로써 철조망을 길게 펼쳐 놓을 때 흩어지거나 쓰러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걸 시험을 통해 알아 두었기에 준비시킨 것이다.
물론, 만약 호인들이 싸움을 붙는 대신 도주한다면 쓸모없는 준비겠지만, 그간 알려진 대로라면 이미 한껏 오만해진 호인들이 그대로 떠나갈 리가 없었다.
특히 식량이 쌓인 군영을 그냥 버려 두고 갈 호인들이 아니었다.
어쨌든 대략적인 준비를 마치고, 다음 날 탁기는 호인의 두 부족장을 호출하였다.
하나, 군영에서 기다리고 있던 탁기에게 온 것은 할 말이 있으면 네가 오라는 전언뿐이었다.
“지금 그들이 봄맞이로 축제를 벌이고 있어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갈을 가져온 군병이 오히려 송구한 양 이야기를 전하는 모습을 보자, 탁기는 분기가 솟구쳤다.
“하면, 네놈들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항의 없이 그냥 온 것이냐?!”
“…….”
전령을 향해 호통을 치긴 했지만, 사실 분풀이에 불과한 것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탁기는 앉아 있던 호상이 뒤로 넘어갈 만큼 분연히 일어나, 군영 밖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출병 준비를 해라! 내 이놈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서 곧장 나가려는데, 한 사람이 그의 앞을 슬쩍 가로막았다.
“장군, 진정하시지요. 주군께서 먼저 협상을 하라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보니, 녹둔도 탐라 주둔군을 지휘하던 허호필이었다.
“내가 협상을 위해 그들을 불렀고, 그들이 오지 않았으니, 이미 협상은 결렬된 것이 아닌가.”
“주군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겠습니까?”
“…….”
“설령 파탄이 나서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계획한 대로 싸우셔야지요. 아니면 예기치 못한 피해를 크게 입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달려가 싸움을 건다면 철조망을 준비해 둔 것도 다 쓸모없어질 뿐이었다.
“허 대위의 말이 맞군. 끙!”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도로 호상을 세워 앉으며 허호필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라도 출신으로 초기에 탐라로 이주한 자였다. 다만, 그 본인은 원래 유민이 아니었고, 오히려 어엿한 산원직의 군관이었다.
그런 그가 탐라로 온 건 유민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다가 역민을 이롭게 한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쫓기게 된 탓이었다.
얼핏 지금 교관대신인 홍길도와 비슷한 운명을 따르게 된 셈이었고, 실제로 군무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빠르게 승진하였음에도 무관보다는 문관에 가깝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허 대위를 보며 잠시 그에 대해 생각하던 탁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대체 저들이 무슨 축제를 벌인다는 겐가. 얼마 전까지 굶주리던 천둥벌거숭이 같다 들었건만, 아주 호의호식에 노난 모양이야.”
“굶던 중에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치를 정도로 저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하면, 오늘 중에는 끝나는 겐가?”
“아닐 겁니다. 전날에 맹특목이 저를 초대하며 말하길 나흘에 걸쳐 잔치가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흘? 하면 아직 삼 일이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탁기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묻자, 허 대위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장군께서 직접 행차하지 않으신다면, 온화한 분위기에서 그들을 볼 수 있는 건 사흘 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재수 없게 꼬였다는 생각에 탁기는 다시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안 그래도 한 달 안에 왜국을 상대해야 하는 일 때문에 군관대신으로서 그는 하루라도 빨리 녹둔도의 일을 정리하고 돌아가려 작정하고 있었는데, 엉뚱한 문제로 시일이 걸리게 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마시고, 한번 행차해 보시지요.”
“나더러 그 야인들의 놀이에 가라는 것인가?”
“야인들의 놀이라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흥겨워하는 판입니다. 생각보다 볼만할 겁니다. 물론, 장군께서 가시는 건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 부족장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이지요.”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인데 가 본다고 한들 무슨 문제겠느냐는 말이었고, 이어 상장군이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해 주니, 탁기도 마음이 움직였다.
“제 생각에는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들에게 나담제는 보기보다 중한 일이라, 가을에 열리는 큰 나담 때는 어제까지 싸우던 부족들도 초청해서 함께…….”
허호필이 말을 이어 가는 것을 지켜보던 탁기는 문득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잘 아는 걸 보니, 허 대위는 그 나담이라는 잔치에 가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
“아, 사실 저도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맹특목이 하는 말을 통역 군병을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지요.”
허 대위가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그 표정이 은근히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탁기도 분기가 조금 풀리는 것을 느끼며, 허 대위가 어쩌면 적재적소에서 근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겼다.
그가 맹특목과 말이 안 통하는 중에도 여러모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걸 보면, 그 괄괄한 호인이 참을성 있게 말이 전해지는 걸 기다렸다는 의미일 터이니, 다 허 대위의 타고난 능력 덕일 것이다.
어쨌든 허 대위 덕에 마음이 어느 정도 동한 탁기는 짧은 고민 끝에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한번 가 보지.”
탁기가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탐라의 군영에서 수십 필의 기마들이 달려 나갔다.
“이보게, 허 대위!”
“예, 장군.”
사람과 말들이 오간 흔적이 길로 변한 곳을 제법 빠르게 달리는 중에 탁기가 허 대위를 불러 물었다.
“주군께 보낸 장계를 쓴 자가 자네 맞는가.”
“물론입니다.”
“하면, 이상하군. 그 장계에 쓰인 것을 보면, 이곳 호인들이 오만해져 다루기가 어렵다고 성토하였는데, 정작 이곳에서 자네를 보니, 오히려 호인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 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 겐가?”
“둘 다 사실입니다.”
허 대위의 대답에 탁기는 고삐를 슬쩍 잡아당겨 속도를 늦추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 둘이 모두 사실일 수 있다는 겐가?”
“호인들이 처음 이곳에 와서 식량을 얻어 갈 때보다 오만해진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호인들은 그들이 얻는 식량을 공으로 얻은 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실제로 녹둔도 군영과 포구를 세우면서 호인들이 일을 하기도 했지요. 하나, 저들이 그렇게 대가를 받으며 일을 할 기회를 얻은 것 자체가 호의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여, 이곳을 담당하는 장교로서 그들의 착각에 대해 주군께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소졸이 호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풍습과 생각을 적잖이 이해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이고, 착각일 뿐, 그 때문에 탐라군의 장교인 제가 그것까지 이해해 주고, 주군께 보고를 아껴야 할 까닭은 없었습니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기에 탁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하면, 자네는 내가 여차하면 저들과 크게 충돌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군.”
“그것이 저들의 착각을 깨우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응당 치러야 할 일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군께서 이미 판단하시어 명하신 것 아닙니까.”
“옳거니. 그야말로 명답일세.”
탁기는 빙긋 웃고는 다시 말의 속도를 높였다.
주둔군의 군영과 호인들의 거처는 의외로 제법 멀어 2길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 군영이 있는 언덕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늪지 때문이었다.
하나, 말을 달리면 순식간에 닿을 곳이기도 했으니, 탁기가 속도를 높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천막이 세워진 장소에 닿을 수 있었다.
* * *
기세 좋게 주션족의 거주지에 도착한 탁기가 먼저 본 것은 수많은 호인이 거주지 중앙의 평지를 크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고, 이어 눈에 들어온 것은 호인들의 머리 너머로 날아서 흘러가는 한 줄기 화살이었다.
그리고 직후에 호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크게 환호하였으니, 다들 즐겁고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수십 필의 말을 타고 온 탐라군을 향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으니, 탁기는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허 대위는 이미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길을 안내하여 천막들 사이를 지나 부족장들의 ‘게르’로 직행하였다.
호인들이 크게 둘러싼 한쪽 끝이 부족장의 게르 앞까지 이어져 있었기에 그 게르에 다가갈수록 호인들이 둘러싼 곳의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볼 수 있었다.
한 젊은 호인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화살을 쏘고 있었는데, 한쪽에 활을 손에 쥐고 화살통을 등에 맨 몇몇 호인들이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으니 차례대로 기마 궁술을 시합하는 것이 분명했다.
“흠, 제법이군.”
궁술을 선보이고 있는 자를 보던 탁기의 평가였다. 솔직히 말하면, 제법 이상의 실력이었다.
기마 중에 전사(前射)나 측사(側射)는 물론이고, 어지간히 기마와 궁술 모두에 능숙하지 않으면 시도도 어려운 배사(背射 : Parthian shot)도 곧잘 해내고 있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목적(木的)에 꽂히고 있었다.
탁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멈춰 선 말 위에서 고개를 길게 뽑아 호인들 너머의 기마전사를 바라보고 있다가, 허 대위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군, 저기에 맹특목과 아합출이 있습니다.”
탁기가 허 대위가 가리킨 곳을 보니, 커다란 게르 앞에 두 사내가 호상 위에 앉아서 기마 궁술 시합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탁기가 말을 움직여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호인들 중 몇몇 사내가 나서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허 대위와 통역군병이 그들에게 무어라 말을 하니, 그들 중 하나가 부족장들에게 돌아가 말을 건넸고, 두 부족장들의 시선이 탁기 일행에게로 향했다.
한데, 그 직후에 있는 일은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부족장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어딘가에 손짓하니, 크게 나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기마 궁술 시합이 일시로 정지되었다.
한창 즐거워하던 호인들이 급작스러운 시합 중지에 다들 시선을 부족장들 쪽으로 향하였고, 자연히 탁기 일행들에게도 수많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우리를 무안하게 만들려는 겐가.”
그 시선들에 짐짓 코웃음을 친 탁기가 중얼거리자, 허 대위가 실소하며 대답하였다.
“나름 저희를 대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중요한 손님이 왔다고 알리는 거지요.”
실제로 잠시 후에 부족장 하나가 무어라 크게 소리쳤는데, 그것을 통역하니 탐라 최고의 전사가 도착하였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다만, 최고의 전사라는 건 장군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실제로 탁기는 탐라 최고의 전사라 할 수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손이라도 흔들어 줘야 하는 겐가?”
탁기의 말에 허 대위는 허허 웃을 뿐이었고, 탁기도 손을 흔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소개(?)가 끝나자 다시 시합이 재개되었고, 탁기도 말에서 내려 부족장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심 그 부족장들이 그를 뒤에 있는 부족장의 게르로 안내할 것이고,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정작 부족장들은 손짓하며 자기들 옆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낼 따름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자신이 놀러 온 게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놀이판을 구경하는 자리로 부르는 것이 어이없었지만, 탁기의 발걸음은 어쨌든 그들에게로 향했다.
탁기의 속내에 두 가지 마음이 있었으니, 하나는 부족장들에게 따로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요구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잘 보이는 자리에서 기마 궁술을 구경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하여, 성큼성큼 걸어가 부족장들 옆에 호상을 펼쳐 놓고 앉았는데, 막상 앉고 나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부족장에게 말을 걸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까 기마 궁술을 선보이던 젊은 전사가 먼 곳에서 말을 달려오고 있는데, 그 와중에 몸을 일으켜 말 위에 선 채로 몸을 돌려 배사를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오……!”
그 기마술에 놀라 탁기는 절로 감탄했다. 보기에는 평범한(?) 배사와 별다를 바 없을지 모르지만, 탁기는 알고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일어서기 위해서는 균형 감각도 좋아야 했지만, 흔들리는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양다리가 말의 등을 꽉 억죄고 있어야 했다.
이는 어지간한 수련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몸을 꼬아 뒤로 화살을 쏘려 하고 있고, 또 이번에는 아까 배사할 때와는 달리 먼 곳의 과녁, 그러니까 탁기가 있는 곳에서 공터 반대쪽 끝에 위치한, 거의 100미는 떨어진 과녁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으니 그 도전만으로도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팅!
궁의 현이 튕김과 동시에 주변 모든 시선들이 화살을 좇아 동시에 움직였다.
탁기도 허공을 가로질러 멀어져 가는 화살을 잘 보기 위해 절로 몸을 일으켜 목을 길게 빼고 주시하였다.
턱!
“아이고…….”
화살은 과녁의 위를 스쳐 그 뒤에 있는 나무 기둥에 꽂혔다.
탁기가 아쉬워함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호인들이 아쉬움의 탄식하다가 이어 화살을 쏜 전사를 향해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통역이 되진 않았지만, 대략 명중하지 못한 전사를 향해 격려를 보내는 것이 틀림없었다.
앞으로 말을 달리는 중에 그 위에 서서, 뒤를 향해 먼 곳으로 아슬아슬하게나마 화살을 날린 것도 굉장한 것이었다.
“맞추진 못했지만,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아쉬워하며 말을 몰아 스쳐 지나는 전사를 보며 감탄하던 탁기의 앞에 문득 술잔이 내밀어졌다.
그걸 얼결에 받아 쥔 탁기는 허허 웃으며 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문득 멈칫하였다.
이곳이 호인들의 소굴(?)임을, 자신이 놀려고 온 게 아님을, 그리고 잔에 든 술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음을 연달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정색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술잔을 건넨 자, 부족장들 중 아합출(아하추)이라 소개받았던 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비뚤비뚤하게 난 누런 이를 한껏 드러내며 웃는 표정을 보이던 아합출이 무어라 말하였다.
“귀한 손님에게만 드리는 좋은 술이라고 합니다.”
통역 군병의 말을 듣고 보니, 아합출의 양다리 사이에는 몇 되나 들어갈까 싶을 정도의 크지 않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게 전부라면 확실히 아껴 먹어야 할 술인 듯하나, 탁기는 혹시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 선뜻 술잔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제야 탁기가 술을 얼른 마시지 않는 이유를 눈치챈 두 부족장들은 무어라 대화를 나누었고, 갑자기 맹특목(먼터무)이 퉁명스런 손짓으로 탁기의 술잔을 빼앗아 들고는 그대로 꿀꺽꿀꺽 마셨다.
술을 쭉 들이켠 맹특목은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는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남겼다.
“이자가 지금 무어라 한 겐가?”
“그게…….”
역병이 말을 하길 주저하자, 탁기가 그를 쏘아보아 얼른 말하게 하였다.
“……겁쟁이라 하였습니다.”
“……!”
탁기가 노한 눈빛으로 맹특목에게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사이 맹특목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아합출로부터 술동이를 받아 들더니 다시 술잔에 술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 술잔은 다시 탁기 앞에 내밀어졌다.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보이라고 합니다.”
술잔을 내밀며 맹특목이 한 말이 그러했으니, 탁기는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이런 식의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 때도 아닌 술을 마실 수야 있…….
당장에 술잔을 내팽개치고 겁쟁이가 아님은 싸움으로 증명하겠다고 소리치려던 탁기는, 문득 콧구멍을 통해 들어온 향긋한 주향에 시선을 절로 술잔으로 향했다.
“이건 아락주가 아닌가.”
탁기가 언젠가 음미했던 술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니, 허호필이 끼어들어 대답하였다.
“이들은 아르히라고 부르는데, 아마 아락주와 같은 것인 듯합니다. 애초에 호인들이 마시던 게 고려에 들어온 것이니까요.”
허 대위까지 확인해 주니, 탁기는 좀처럼 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군을 따른 뒤로 술을 멀리하긴 했으나, 그는 본디 주당이었다.
고려군을 나온 후 떠돌던 그가 하필 왜 다른 곳도 아닌 기방에 의탁하여 살았던가.
그게 다 술을 공으로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아락주(阿樂酒)를 좋아했는데, 좋아한 만큼 실컷 마셔 본 적은 없었다.
고려에서 흔히 마실 수 있는 탁주와 마찬가지로 곡물을 빚어 만든 술이라지만, 증류함으로써 그 양이 몹시 적어져 그만큼 비쌀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식량을 낭비한다 하여 나라에서 제조를 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락주를 눈앞에 두니, 앞서 다짐했던 모든 생각들이 희미해졌다.
“이 잔은 나와 탐라군의 명예를 위해 비우겠네.”
“……마실 요량이십니까?”
“마시지 않으면 겁쟁이가 될 판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
그렇게 음주를 정당화한 탁기는 천천히 술잔을 입에 대고는 술을 입술 너머로 넘겼다.
싸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탁기는 작은 호리병에 담긴 아락주를 아껴 먹던 시절이 떠올라 잠시 감격에 젖었다.
아까 그 술동이가 작다 여겼는데, 그 안에 아락주가 가득 담겨 있다면 충분히 큰 것이었다.
어쩌면 그 술동이의 아락주를 다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상상과 이 잔을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부족장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굳건한 의무감이 마구 충돌하는 걸 느끼며 탁기는 입안의 아락주를 삼켜 넘겼다.
쭈욱.
한번 넘어가기 시작한 아락주는 사발을 완전히 비울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다 들어갔다.
“후아…….”
다 마신 후 술잔을 내려놓으니, 탁기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렀다.
질 좋은 아락주를 마신 것에 대한 행복감, 입안에 감도는 달콤쌉쌀한 맛, 그리고 꽤 독하여 뱃속에 불덩이를 삼킨 듯한 찌릿찌릿한 파괴적 쾌감까지 한 번에 표현하는 감탄이었다.
“그래…… 이 맛이야. 이 술이라면 열 동이도 마실 수 있을 것 같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탁기가 중얼거리니, 부족장들이 역병에게 무어라 묻고 대답을 받았다.
그러고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무릎을 치고 웃음을 터뜨렸으니, 탁기가 역병에게 그들이 왜 그리 웃는지를 물었다.
“자기들도 한 동이를 비우는 게 어려운데, 열 동이를 비운다는 게 말이 되냐며…….”
“……날 비웃는 거로군?”
“꼭 비웃었다기보다는…….”
역병이 당황하여 변명하려는데, 탁기는 듣지 않고 술잔을 내려놓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그 엄지손가락은 이내 땅으로 뒤집혔으니, 그런 수신호가 호인들에게도 통용되는 건지 부족장들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대들이 술이 약한 것을 두고, 나까지 그렇다고 여기다니 그야말로 우습군.”
탁기의 말이 흘러나오자, 부족장들이 역병을 채근하며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역병이 더듬더듬 답하니, 두 부족장 중에서 맹특목이 폭소하며 탁기를 보고 손가락질하였다.
“좋은 술을 더 마시고 싶어서 일부러 꾀를 내는 거라고 합니다.”
“뭣이?”
솔직히 그런 마음이 조금 있긴 한 탓에 자존심이 상한 탁기가 성난 눈빛으로 맹특목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웃던 맹특목도 탁기를 노려보았으니, 잠시 두 사내 사이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그러길 잠시, 아합출이 끼어들어 맹특목과 탁기를 번갈아 보며 조곤조곤 제안하였다.
“그러지 말고, 사내가 내뱉은 말이 있으니 증명하면 그만 아니냐고 합니다.”
“무엇으로 증명한다는 말이냐?”
“그게…… 술내기를 청하는 것 같습니다.”
즉, 누가 더 술이 센지를 두고 내기하자는 것이었다.
맹특목이 가슴을 손으로 퉁퉁 두드리며 호기롭게 말하였으니, 통역 군병이 다시 조심스럽게 전하였다.
“진 자가 이긴 자를 군말 없이 형으로 모시라 합니다.”
“하하하!”
역병의 말에 탁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대소하였다. 그 모습에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감한 허 대위가 급히 나섰지만, 이미 늦었다.
“저, 장군……!
“좋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탁기가 맹특목을 노려보며 일갈하니, 굳이 통역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아차린 듯 맹특목도 무어라 탁기에게 말하곤 곧바로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형제지간을 나누는 술내기가 있다고 사방에 알리고 있습니다.”
역병이 마치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울상으로 말을 전했지만, 탁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맹특목과 눈싸움을 벌였고, 맹특목의 외침을 들은 호인들이 크게 환호성하며 술내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허, 이런…….”
예상치 못한 대결에 허호필은 당황하였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 * *
“지랄하고 자빠졌네.”
개경 왕궁의 모처에 이미 도착한 몽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해진 전갈을 보고는 기가 막혔다.
“고비 사막에까지 쳐들어 갔던 작자가 뭐가 힘들다고 요성에서 오 일이나 쉬겠다는 거야.”
그것은 명국 사신단이 전해 온 소식에 대한 것으로, 위국공 서달이 피로로 인해 요동에서 닷새간 휴식을 취한 뒤 출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전한 요동의 전령보다 명국 사신단이 더 빨리 바다를 건너올 리는 없으니, 위국공이 개경에 닿는 것은 닷새 이상 시간이 흐른 뒤라는 의미였다.
“아니, 위국공은 그렇다 치고, 요동공도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무슨 생각으로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닷새나 노닥거리게 둔단 말이야?”
짜증이 난 몽주가 연신 불평을 토하자, 홍길도 대신이 주군을 위로하였다.
“진정하십시오, 주군. 요동공이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명국에서 위세 높은 위국공이 그러겠다니 요동공도 말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휴!”
답답했지만 홍 대신의 말이 맞긴 했다.
탐라와 달리 명국과 맞닿아 있는 요동의 입장에서는 강대한 명국의 권세가인 위국공의 뜻을 꺾기 어려웠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몽주의 짜증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거, 같은 국공끼리 뭐가 그리 무섭다고…… 쳇!”
그래도 잠시 짜증을 부리고 나니, 기분이 다소 풀렸고, 몽주는 닷새라는 예기치 못한 시간을 어찌 쓸지 생각했다.
그냥 같이 쉬고 노는 건 취향도 아니고, 팔자도 아닌 터라, 이내 그의 머릿속에 개경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떠올랐다.
“이보게, 홍 대신.”
“예, 저하.”
“이참에 전라도 북부의 수령들을 감관해야겠네. 무슨 말인지 자네라면 알겠지.”
“예, 그렇긴 합니다만…….”
홍 대신은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전라도 북부는 남면통관안찰사로서 몽주가 기존 수령들에게 아직 신임을 부여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본디 몽주는 고려왕에 의해 임한 기존의 모든 수령에게 ‘일괄 사표’를 받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 많은 수령들을 일시에 교체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여, 평판을 수소문하여 그중 악질이나 무능이 확인된 수령만 파직하거나 벌하고, 평판이 괜찮은 자들은 유임시켰다.
하나, 아예 평판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지역도 있었으니, 전라도 북부가 바로 그러했다.
이는 평판을 확인하는 방법이 탐라 상단을 통하는 것에서 기인한 결과였는데, 탐라 상단이 동경(경주)과 진주를 중심으로 뿌리내리고 있어, 그 두 거점에서 먼 지역은 그만큼 소문에 어둡거나, 소문이 있더라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탐라로 가는 길에 진주에 들러 상단의 상황을 확인하면서 아직 수소문하지 못한 수령들에 대해 재촉할 참이었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여유가 생긴 만큼 아예 몽주가 개경에서 직접 수령들을 만나 감관(監觀)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부지런히 움직이면 나흘 안에 개경으로 소환할 수 있을 것 같네만.”
“…….”
홍길도가 머릿속으로 따져 보니 될 것도 같긴 했다.
전라도 북부라 함은 금주(금산군)와 완산(전주시) 주변이었으니 김제까지 배로 하루 안에 가고, 거기서 말을 달려 수령들을 김제로 불러 모으는 걸 이틀 안에 처리한다면 개경으로 나흘 안에 불러들이는 게 가능했다.
“나흘 안에 데려오게. 늦으면 감관이고 뭐고 그냥 삭탈할 것이라 해. 그러면 자다가도 뛰어나오겠지.”
“알겠습니다. 하면 바로 배를 보내겠습니다.”
홍 대신은 마치 자신이 전라도 북부의 수령이라도 된 것처럼 급한 마음으로 서둘러 몽주 앞에서 물러났다.
약 반 시진 후, 사시 정각(10시)에 몽주가 거느리고 온 여섯 척의 경함선 중 한 척이 예성강 하구를 급히 떠났으니, 그날부터 사흘 간 전라도 북부는 수령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바쁘게 만든 몽주였지만, 정작 그의 입장에서는 수령들이 올 때까지의 시간이 다소 애매했다.
수령들이 올 때까지 사흘 동안, 앞서 입궁 인사를 올리긴 했어도 고려국왕을 한 번 더 배알하고, 궁중후 염흥방과도 이야기를 나눌 것이며, 불려 올 수령들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적힌 녹계도 다시 훑어봐야 했고, 또 무엇보다 장차 왜국과의 ‘승부’에 대한 계획을 고민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도 부족할 터였다.
그래도 탐라에서 바쁜 것에 비하면 여유가 있었고, 그 여유가 영 내키지 않았다.
한데, 하늘이 몽주의 낯선 여유를 두고 볼 생각이 없었는지, 그에게 새로운 자들과의 만남을 선사하였으니, 어린아이와 노인 각각 한 명씩으로, 어느 쪽이든 몽주로서는 충격적, 혹은 감격적인 만남이었다.
먼저 찾아온 자는 어린 쪽이었으니, 왕성 앞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부복한 뒤 곡을 하며 몽주를 찾았다.
“요동국공 저하께 고하나이다! 부디 제 아비를 돌려주십시오. 어찌 두 해가 넘도록 연고도 없이 먼 곳 외딴 섬에 제 아비를 묶어 두시는 것입니까? 제 어미는 서방의 정을 그리워하고, 저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식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저하께옵서 제 아비를 놓아주지 않으시면, 인정(人情)이 무너지는 것을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나이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에 왕성 앞에 백성들이 어린아이의 간소(諫疏)를 듣고 모여들었으니, 그가 명망 높은 포은 정몽주의 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려도 너무 어린 탓이기도 했다.
이제 고작 다섯 살의 어린 꼬마가 배짱 좋게도 왕성 앞에서 고려를 좌지우지한다는 탐라국공을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말의 아홉 효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포은의 장남 정종성.
그도 아비처럼, 평범한 태생의 인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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