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14)
* * *
녀석, 참 귀엽네.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도 또각또각 다기 소리를 최대한 작게 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입가에 아빠 미소가 서렸다.
조막만 한 손으로 제 머리통만 한 찻주전자를 들어 몽주의 찻잔에 찻물을 담으니,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서 고고한 선비의 기운이 느껴졌다.
포은의 아들을 바라보던 몽주는 문득 물었다.
“네 아비가 귀향하지 않으려 한 것이 그렇게 슬프더냐?”
또각.
몽주의 물음에 종성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
“아비께서 따로 품은 뜻이 있으시겠지만, 오랫동안 아비를 뵙지 못한 것은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아비의 얼굴은 기억하느냐?”
포은이 탐라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2년 정도였지만, 집을 떠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아마 종성이 걷지도 못할 아가 시절이었을 터이니, 녀석이 아비의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어렴풋하나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정말이냐?”
“사실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부친께서 자화상을 남겨 두신 게 있으니, 아비의 얼굴을 모르진 않습니다.”
“아…….”
몽주는 종성이 그림으로 아비의 얼굴을 익혔다고 여겼다. 종성보다 더한 놈이 그의 가까운 곳에 따로 있음을 알지 못하는 몽주로서는 아기나 다를 바 없을 때의 기억을 가진 이가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였다.
어쨌거나, 꼬마 주제에 성문 앞에서 곡하며 자신에게 아비를 돌려 달라 청원한 종성에게 성공적으로 그것이 오해임을 설득한 몽주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렇게나 아비와 같이 지내고 싶으면, 차라리 탐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
다섯 살짜리에게 묻기보다는 그의 어미에게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었지만, 워낙에 어른스러운 종성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으나, 주춧돌을 빼어 옮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잠시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내 가문을 옮기는 것이 어렵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포은이 연일 정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가주였으니, 그의 윗대가 남아 있지 않은 중에 포은의 아내마저 탐라로 떠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마 가문의 토지를 비롯한 부동의 가산을 버리기 어려움을 의미하는 듯도 했다.
“그렇더라도 잠시 탐라에 가서 아비만 뵙고 오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느냐. 만약 생각이 있고, 네 어미의 동의만 있다면 내가 탐라로 돌아가는 길에 너와 네 어미를 탐라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하면, 어머니께 여쭤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종성의 표정에는 개경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아이의 설렘이 묻어 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다시 실소한 몽주는 종성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였다.
“네 아비는 탐라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네가 아직 그것을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아비를 만나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네 어미께 탐라행을 청하면서 이 말도 함께 전하라. 연일 정씨가 지금 가진 것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만약 그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가문과 포은이 더 크게 흥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알아들었느냐?”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대로 외워서 전하겠습니다.”
“그래? 허허.”
몽주는 종성을 데리고 나가, 관리에게 사탕 한 상자와 함께 아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라고 명하였다.
포은의 가족을 탐라국으로 이주시키고자 함은 작게는 포은을 완전히 탐라인으로 자리 잡게 만들기 위함이고, 나아가 그의 가문 자체를 귀의시키려는 의도였다.
포은의 가문은 당대에도 명망가임이 틀림없고, 장차 그의 가문에서 숱한 인재들이 나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인재들 중 몽주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탐라로 이주한 것이 변수가 되어 역사와 달리 인재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 포은 하나만으로도 그의 가문이 가진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으니, 특히 연일 정씨 지주사공파가 탐라에 귀의한 것 자체만으로도 고려인들이 탐라국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더구나 정종성과의 만남은 흥미로웠고, 아이의 총명함에 감탄하였으니,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하나, 그다음 날 몽주를 찾아온 외부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자였으니, 그 만남은 정종성처럼 성문 앞에서 청원하는 대신 궁중후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분은 전 국사셨던 나옹 선사의 수제자이신…….”
“소승은 무학이라 하외다.”
염흥방이 소개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스스로 자신의 법호를 말하였으니, 궁중후도 그 비례에 놀라 무학을 바라보았고, 몽주도 어찌 저자가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하는지 의아해하였다.
아무리 세속의 연을 중히 여기지 않는 승려라고는 하나, 고려 안에 고려국왕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몽주에게 말본새가 짧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라보는 시선에 사나움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몽주는 그간 말로만 전해 듣던 무학 스님을 마침내 본 것이 흥미로워 그의 비례는 그냥 넘기고 인사하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탐라국개국공 석몽린이라 합니다.”
“무슨 말을 들으셨소?”
“……여러 가지지요. 특히 요동국공으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지요.”
궁중후가 곁에 있어 무슨 말인지 그 내용을 말하기에는 어려웠으므로 대신 말을 전해 들은 이의 신분을 밝혔다.
그에 무학도 짐짓 고개를 끄덕여 몽주가 이성계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짐작하겠다는 양 행동하곤, 궁중후를 보며 말하였다.
“탐라공을 배알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탐라공과 독대하고자 하니, 궁중후께서는 바쁜 용무에 신경 쓰십시오.”
한마디로 그만 나가 달라는 말이었기에 궁중후가 다시 당황하여 몽주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그냥 나가기 무안하니 뭐라도 핑계를 대 달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기야 궁중후도 공사다망하시지 않습니까. 내일 전하께옵서 명하신 후원 산보 준비도 해야 하시고, 탐라에서 곧 상선이 올 터이니, 그 물건을 인수하시려면 시전 상인들을 조율하셔야지요.”
“아, 그렇긴 하지요. 하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명분을 만들어 주자 염 궁중후가 다행이다 싶은 표정으로 몽주에게 인사를 하곤 무학에게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물러났다.
궁중후가 떠나자, 무학은 잠시 주변의 호위군병들을 훑어보곤 이어 몽주를 바라보았다.
저들마저 물리쳐 달라는 의미였겠지만, 몽주는 그럴 생각은 없었다.
“모두 입이 무거운 자들입니다.”
“…….”
“저들마저 자리를 피해야 한다면 제가 굳이 대사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몽주가 다시 강경하게 말하니, 무학도 더는 강요하지 못하겠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소승은 오래전부터 공을 지켜보았소.”
“저를요?”
“물론,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오. 부처님의 눈이 내 눈을 대신하였단 말이오.”
“…….”
몽주는 묘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서리는 걸 애써 감추었다.
불교가 고려의 생활 문화로서 자리 잡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그 자신도 부처를 빌미로 여러 일을 처리하기도 한 바가 있지만, 부처의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았다는 무학의 말은 사이비 종교가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믿지 않는군.”
“무얼 말입니까.”
“무엇이겠소. 그대가 부처님을 신실하게 믿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오.”
“스님께서 부처의 눈으로 절 바라볼 수 있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제가 부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사뭇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삼라만상이 부처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이들일지라도 무학이 부처의 눈을 빌릴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지 의아했다.
“상관없소. 어차피 그대가 역천의 운을 타고 난 자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
역천이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언젠가 포은이 취하여 자신에게 천리를 역행할 마음을 품었는지 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가 포은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신돈을 피하여, 당시 경흥후였던 이성계 아래에 숨죽이고 있을 때였으니, 이성계와 무학의 인연을 생각하면, 어쩌면 포은이 무학과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역천자입니까?”
“아니오?”
“저는 제 자신이 천리를 따르고, 순리대로 산다고 믿습니다만.”
“하하하.”
몽주의 말에 무학이 대소하였으니, 그 명백한 비웃음에 몽주도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역사에 남은 무학 대사의 이름 때문에, 그리고 그간 여러 경로로 전해 들은 무학 대사의 예언 때문에 적지 않은 비례에도 참고 있었지만, 자신을 면전에서 대놓고 비웃는 걸 보고 있자니,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어째서 웃는 겁니까.”
“웃기니까 웃는 게지. 다른 이의 눈에는 네가 석몽린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아니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자이고, 있어서는 안 될 자다!”
“…….”
“……너는 누구냐?”
“제가 누군지 모르고 찾아오신 겝니까?”
어이없어 대꾸하는데, 갑자기 무학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짧은 법봉을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크게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
무학이 거친 말을 소리칠 때, 이미 몽주와 무학 사이에는 주변에서 없는 존재인 듯 서 있던 호위군병들이 재빨리 달려와 몽주의 안위를 보호하고 있었다.
무학이 큰 소리를 내며 위협하듯 법봉을 움켜쥐니,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한 것이었다.
그 이상의 행동, 즉 감히 국공을 욕하는 자를 때려눕히지 않은 것은 몽주가 호위군병들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는 것을 넘어서는 행동은 반드시 자신의 허락을 얻은 후에 하도록 명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호위군병의 뒤에서 부들부들 떠는 무학을 바라보던 몽주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짧게 숨을 토하며 말하였다.
“그만 물러나십시오. 돌아가신 장인을 생각해서 참아드리는 겁니다.”
몽주가 냉랭한 어조로 경고하자, 무학이 문득 움찔하였다.
그가 오래전에 몽주의 돌아가신 장인 최정첨과 친분을 쌓았던 것을 언급한 탓이었다.
몽주의 장인은 무학의 부탁으로 불경을 구하느라 지체하는 바람에 바다에서 폭풍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아직 그 마음의 짐이 무학에게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잠시 처연하게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때 어르신께 그리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리석은 내가 그저 큰 사람이라 여기고, 역천자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
몽주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한탄하던 무학은 이내 표정에 굳은 결의를 띄우더니, 다시 소리쳤다.
“어쨌든 네놈은 존재해서는 안 될 놈이다! 대체 무슨 수작으로 이 세상에 왔느냐! 당장 돌아가라, 어찌 사해천지에 부처님의 안배를 벗어나는 족속이 있을 수 있더냐! 네놈은 겉은 석씨이나 속은 그게 아님이 틀림없다! 내 네놈의 머리통을 깨부수어 그 속을 드러내 보이리라!”
미친 것처럼 마구 소리친 무학은 기어이 법봉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물론, 호위군병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그들은 쥐고 있던 곤봉으로 무학의 법봉을 막고, 어깨로 그를 밀쳐 넘어뜨렸다.
그사이에 다른 군병들이 몽주를 바라보니, 명을 청하는 눈빛이었다.
“제압하라.”
몽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군병들이 일제히 무학에게 달려들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묶어 버렸고, 험한 말을 연신 뱉는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으으읍! 으어으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음성이 막힌 입 대신 비강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몽주는 포승에 묶인 상태에서도 마구 발버둥 치며 무어라 소리치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는지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제게 죽고 싶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건 죽고 싶냐는 식의 위협이 아니었다.
오히려 순순한 물음이었으니, 처음 당도한 이래 내내 불손한 것은 물론, 급기야 습격까지 감행하는 무학을 보며, 그가 이렇게 행동할 연유는 그것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한데, 몽주가 그리 묻기 무섭게 무학이 갑자기 발버둥과 아우성을 멈추더니, 안광을 빛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제발 자신을 죽여 달라고 청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제가 다른 자였다면 이미 화상을 죽었겠지요.”
몽주는 실소하며 무학을 보고 말했으니, 다른 지체 높은 자들, 굳이 국공씩이나 되는 지위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권세가 있는 자에게 무학이 앞서 하던 짓과 똑같이 행동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몽주는 한참을 광인처럼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죽여 달라 무언의 시위를 하는 무학과 눈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군병들에게 명하였다.
“이자를 데려가라. 데려가서…….”
* * *
“이런, 제길…….”
탁기는 깨질듯한 머리를 움켜쥐고는 괴로워했다.
질 좋은 아락주에 이어 뭔지도 모를 술을 이것저것 마구 속에 들이부은 결과였다.
다만, 그가 괴로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른 후에야 깨어난 그는 갈증에 물을 마구 들이켠 후 슬슬 정신이 들자, 지난 하루 동안 그가 저지른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으니, 그 짓들이 너무나 후회막급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군, 기침하셨습니까.”
호인들의 게르 천막 밖에서 허호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말을 할 기운도 없이 그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니, 천막 안으로 허 대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찌 말리지 않았소?”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탁기는 허 대위를 탓하는 양 물었다.
“그리 물으시는 걸 보니, 소졸이 말릴 수 없었음도 잘 아실 것이라 봅니다만.”
“…….”
허 대위의 말에 탁기는 혀를 차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하기야 허호필이 자신을 어찌 말릴 수 있었겠는가.
아니, 녹둔도의 탐라 군병 중 누가 자신을 말릴 수 있을까.
탁기의 기억에 남은 추태는 많고 많았다.
대낮에 시작된 술내기는 저녁때까지 이어졌으니, 맹특목과 더불어 이미 만취하였음에도 오기로 버텼다.
술내기의 승부가 좀처럼 나지 않자, 아합출이 ‘브흐’로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왔으니, 브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호인들의 씨름이라는 말에 덜커덕 승낙하였다.
취해서 반쯤 정신이 나가 비틀거리는 중에 누군가 입히는 요상한 갖옷 차림으로 맹특목과 어깨를 잡고 힘을 겨루기 시작하였는데, 그쯤에 잠시 기억이 끊겼다.
아마도 취기가 가득한 중에 힘을 쓰니, 술기운이 더욱 돋아 기억조차 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다시 기억나는 부분은 맹특목과 더불어 활을 쏘는 것이었으니, 아마 브흐로도 승부가 나지 않아, 궁술로 겨루기로 한 듯했다.
거의 세 순(삼십 발)가량 쏜 듯한데 얼마나 관중하였고 ,누가 이겼는지는 또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로 끊긴 기억이 다시 이어진 건 또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바로 거기가 문제였다.
내기로 대취한 것도, 씨름을 한 것도, 활을 쏜 것도 애써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변명할 수 있겠건만, 다시 앉은 술자리에서 한 짓은 탁기로서도 이제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술김에 맹특목과 의형제를 맺어 버린 것이다.
서로 대단하다며 추켜세우다가 급기야 그런 형제의 맹약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맹특목이 형이고, 탁기가 아우를 자처했으니, 태어난 해를 따져 그리했을 뿐이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에서는 절로 후회의 한숨을 내뱉을 짓이었다.
“맹특목은 일어났나?”
“맹 형님도 조금 전에 일어났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
굳이 맹특목을 맹 형이라 칭하는 것을 들으니, 그를 돌려서 조롱하는 것임을 눈치챈 탁기가 허 대위를 노려보았으나,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화를 내 봐야 엉뚱한 화풀이에 불과하다 싶었다.
“내 다시는 주군의 앞이나 집이 아닌 곳에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
어째 조건이 많은 듯한 말에 후회를 가득 담아 자책하며 각오를 중얼거리는데, 문득 게르 밖에서 걸걸한 호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맹특목의 것임을 절로 깨달으니, 탁기가 괜히 긴장하여 허 대위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했느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냥 아우가 일어났는지를 묻는 말인 듯합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날 아우라 부른 게 분명한가?”
“정확히는 장군을 더오라 칭하였는데, 더오의 뜻이 바로 아우입니다. 제가 아는 얼마 안 되는 호인들의 말이지요.”
“……제길!”
혹시나 술김에 맺은 언약이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여차하면 군을 몰아 크게 부딪치려 했는데, 그 상대를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었다.
* * *
끼익.
왕성의 문이 열리고 잠시 뒤 한 사람이 등 뒤를 밀려 문밖으로 튕겨 나왔다.
밀린 힘에 넘어질 듯 겨우 중심을 잡은 자는 딱 봐도 승려였다.
그가 왕성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쉴 때, 한 젊은 승려가 다가왔다.
“죽지 않고 살아 나오셨습니다?”
어째 비아냥이 다분한 말에 왕성에서 쫓겨 나온 무학이 제자 지성을 보았다.
“그러게 말이다. 죽자고 대들었는데, 죽이기는커녕 좋은 밥만 먹이고 내보내 주더구나.”
“역천자가 꼭 성미가 사나운 건 아닌 모양이군요.”
“어디 성질이 사나워야 역천자라더냐.”
“그렇게 말하기에는 탐라공은 현군이라는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긴 합니다만.”
“현군인 것과 역천자가 아닌 것과도 상관이 없느니라.”
“하면, 대체 무엇이 역천자이고, 탐라공이 역천자라서 좋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후우, 되었다. 그만 조롱하여라.”
지성의 불만 어린 표정을 보며 대화를 일단락시킨 무학은 곧바로 휘적휘적 크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탐라공에게 죽어 그가 역천하는 것을 막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
뒤를 따르며 지성이 연신 물음을 토했다.
“선사님의 다비식(茶毘式)에서 울먹이며 역천을 반드시 막겠노라 하셨던 것은 잊으신 겝니까?”
“…….”
“자신의 죽음으로써 탐라공의 실체를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이라 하셨던 것도 이제 보니, 그리 크게 마음먹었던 게 아니었나 봅니다?”
“……이놈아!”
등 뒤에서 들리는 비아냥 반, 의문 반의 말들을 듣고만 있던 무학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제자를 쳐다보며 호통쳤다.
“나도 내가 살아나온 것이 원통하기 그지없다!”
“…….”
돌아선 무학의 두 눈은 핏발이 선 듯 붉어져 있었으니, 그 기세를 느낀 지성이 기함하곤 연신 가볍게 놀리던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살아 나온 것 자체가 탐라공이 진정 역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임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너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저 이 세상에 탐라공만큼 귀한 자가 보잘것없는 승려의 행패조차 웃음으로 넘기고, 오히려 잘 먹여 내보내는 경우가 또 어디 있겠느냐!”
“…….”
“그자는 이 땅을 밟고 사는 자가 아니다. 구름 위 하늘을, 아니 부처님의 머리 위를 걷고 있는 자이지…….”
문득 읊조리다 어깨가 축 처친 무학은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기운이 한껏 빠진 걸음걸이였다.
그가 탐라공에게 대선 것은 시험이기도 했고, 진실로 죽고자 한 바이기도 했다.
그가 보는 대로 탐라공이 역천자라면 자신이 아무리 날뛰어도 자신을 죽일 만큼 분개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에 대한 시험이었으니, 그것은 하룻강아지가 아물지도 않은 이빨로 사람을 물어봐야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 탐라공이 그런 거대한 존재가 아님을 알고, 웃으며 죽고 싶었다.
물론, 진실로 죽고자 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나옹 선사께서 입적하시어 다비식을 진행하던 중에 문득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것이 스승께서 제자의 고심을 아시고 주신 깨달음이라 여겼다.
오래전, 이 땅에 부처께서 찾아오시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으니, 그 길을 좇고자 한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순교가 아니었다. 차라리 부처를 좇는 자들의 각성을 부르는 외침이었고, 탐라공에게 지워지지 않은 각인을 남기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죽는다면, 부처를 따르는 이들의 마음속에 탐라공은 영원히 불제자를 죽인 무도한 자라는 낙인이 남을 것이니, 그것이 탐라공에 의해 이 세상에서 불자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하나, 탐라공은 그마저도 유유히 피하였으니, 자신이 그의 손에 죽길 바람을 깨달은 뒤에는 무슨 짓을 해도 웃어넘겼다.
그의 아내에 대한 소문을 들먹이고, 그의 아비와 어미마저 욕했음에도, 심지어 그와 유관한 그의 장인의 죽음마저 조롱하였음에도, 잠시 씁쓸해하는 기색으로 입을 막으라는 명은 있을지언정 끝끝내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제야 무학도 탐라공이 자신을 죽일 리 없음을 인정하고 포기하였으니, 하룻밤을 갇혀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 먹고 잘 잔 후에 왕성을 나올 수 있었다.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다시 등 뒤에서 제자 지성으로부터 예전부터 곧잘 듣던 물음이 조심스럽게 들렸다.
“요동으로 가야지. 그곳에 진정 부처를 위한 고행이 있을 것이다.”
대답한 무학의 발걸음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 * *
탁기는 맹특목과 아합출을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술로 인해 일이 꼬여 호인 부족장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주군께 고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의형제를 맺은 것을 없던 일로 취급할 수도 없었다. 술기운에 일어난 일이라곤 하지만 두 부족장들, 특히 맹특목은 사내답게 우직하여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도 괜찮을 자였다.
“지난밤에 의형제를 맺은 것을 잠시만 연기하고자 합니다.”
한참이나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던 탁기가 그리 말하니, 그 말을 전해 들은 맹특목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호인들에게 있어 의형제를 맺은 자가 뒤에 그것을 거부하면 원수가 되자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취소하자는 것이 아닌 연기하자는 말이 있었기에 맹특목도 바로 화를 내기보다는 애써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내 주군으로부터 군령을 받아 왔소이다. 녹둔도의 호인들이 탐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모른 척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니, 탐라를 추종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면 차라리 군력으로 크게 혼쭐을 내라는 것이었소.”
“…….”
탁기의 말을 전해 들은 두 부족장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고, 직후에 아합출이 발끈하듯 무어라 쏘아붙였다.
“고작 일천여 잡졸을 가지고 어찌 자신들을 혼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통역된 말에 탁기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하긴 탐라군이 어찌 싸우는지를 모른다면 그렇게 얕보일 법도 했다.
만약 이 자리가 어제의 기억이 없는 자리였다면, 단박에 협상이 끝났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군령을 받았고, 반드시 그 임무를 수행할 각오를 하고 왔소. 하나, 어제의 일이 내 각오를 무디게 만들었소.”
“…….”
“그것은 단지 의형제의 연을 맺은 것 때문은 아니오. 솔직히 나는 그대들을 호인들이라 하여 나와 같은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소.”
탁기는 고려군에 소속되어 있던 시절에 북방의 호인들과 수없이 싸웠고, 그 시절 양계의 고려군 장졸들이 호인들을 대할 때의 취급은 사나운 짐승,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은 탁기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군을 나와 방랑하고, 이제 주군을 따르면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북방의 호인들을 같은 사람으로 여길 수 없었다.
하나, 고작 하루 동안이었지만 그들과 더불어 어울리니, 그들 또한 고려의 백성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들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똑같이 아락주를 귀하게 마시고, 고려의 씨름과 유사한 씨름을 즐기며, 웃고, 떠들고, 노래하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세상 여타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다 주장할 수 있을까.
그들도 풍요롭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얼마 전 그의 주군 앞에서 강하게 주장했던 것과는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 생각이 달라진 만큼, 두 부족장에게 할 말도 달라질 수밖에 없소.”
탁기는 말을 하며 앉아 있던 호상에서 일어났다. 그에 두 부족장도 어리둥절하며 몸을 일으키니, 탁기는 게르를 나가자는 손짓을 하였다.
“나는 그대들이 탐라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하나 풀어 줄 것이오. 그 오해가 풀린 후에 그대들은 내 주군의 요구를 따를지 말지를 심사숙고하여 정해야 할 것이오.”
탁기가 앞서 게르를 나간 직후에 두 부족장에게 말하니, 맹특목이 급히 물었다.
“그 요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역병의 말에 탁기가 한쪽 입가를 비죽이 올려 웃으며 말하였다.
“주군의 뜻은 원대하여 나조차도 다 이해하기 어려우나, 하나만은 확실하오.”
“…….”
“초원 일통.”
녹둔도 북쪽, 수풀이 우거진 평야를 바라보며 탁기가 말하였다.
물론, 주군께서 바라신 것은 녹둔도에서 이어져 요동의 북부를 다스리는 나라의 건국이었지만, 그것을 호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말하고자, 초원의 일통이라 고쳐 말한 것이었다.
호기롭게 답한 것에 대한 두 부족장의 반응은 이자가 아니 이자의 주군이 미쳤나 싶은 것이었다. 딱히 말은 없었지만,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하하, 내가 말했지 않소. 우리 군에 대해 그대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웃음과 함께 대꾸한 탁기가 휘하 군병들에게 방포 시험을 준비하라 명하고는 다시 두 부족장에게 말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군이 선보이는 것을 그대들이 본 후에 우리 주군을 따를지 말지를 결정하시오. 따른다면 어제 맺은 의형제는 유효할 것이고,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볼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처럼 될 것이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녹둔도 북부 너른 들판에서 개복포를 포함한 방포 시험과 더불어 탐라군의 전투 개진 훈련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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