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15)
도란도란 모여 있는 꼴을 보자니, 참 급하게도 달려왔다 싶었다.
수령의 복장을 갖춘 자들이 많았지만, 궁에 맞지 않는 복장을 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평복인데 겉옷을 걸치지 못한 자도 있었고, 심지어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이도 있었다.
몽주가 요구한 나흘째 아침에 개경에 허겁지겁 당도한 전라도 북부의 수령들.
마음 같아서는 좀 쉬게 하고, 의복도 제대로 갖춰 입게 하고 싶기도 했지만, 내일 오전에 위국공이 당도한다는 이야길 들은 데다, 또 오늘 오후에는 궁중후와 긴히 할 말도 있어, 당장 수령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어느 분이 돌아가셨는가.”
몽주가 수령들 중 상복 차림을 한 자에게 물으니, 그가 고개를 숙이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답하였다.
“저런, 명복을 비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몽주는 내심 다행이다 싶었으니, 만약 직계의 초상이라 상주를 맡던 중에 잡아 온 것이라면 조금 더 미안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홍 대신이 앞서 말하길, 전라도 북부 내륙의 수령들은 몽주의 명을 설명하고, 상경할 준비를 할 여유조차 없었으므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대로 납치하듯 데려왔다 했다.
아무래도 의복이 엉망인 자들은 모두 그렇게 얼결에 온 모양이었다.
어쨌든 수령들이 모였기에 몽주는 용건을 풀기 시작했다.
먼저, 탐라 상단이 보내온 녹계에 적힌 수령들의 행실에 대해 하문하기 시작했으니, 수령들은 진땀을 흘리며 기억나는 것이든 아니든 자신을 변호하고 처사를 합리화하였다.
반 시진에 걸쳐 수령들에게 하문을 위장한 문초를 시행한 뒤, 수령들 중에서 몽주의 마음에 꼭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이는 비단 전라도 북부뿐만 아니라, 이미 유임된 남면의 수령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으니, 당대에서 보자면 몽주가 수령들에게 바라는 기준이 너무 높다고 해야 마땅했다.
대신, 당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탐관오리라고 할 법한 자는 없었는데, 이는 애초에 고려의 지방 수령 인사가 잘된 덕이기보다는 몽주가 남면통관안찰사로 임하자마자, 뒤가 심하게 구린 수령들이 모조리 관인을 버려두고 도주한 탓이었다.
예전에 고려에 함포로 시위할 때, 남해안의 탐관오리들을 모조리 목 베어 버렸던 일의 여파였다.
“너희들은 모두 유임될 것이다. 그냥 삭탈시켜 버릴까 싶은 자들도 있긴 하다만…….”
몽주의 서슬 퍼런 말에 수령들 중 일부가 목을 움츠리며 움찔하였다. 앞서 몽주로부터 경고성 발언을 들은 자들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희 중에 내가 미처 그 저지른 악과(惡果)를 파악하지 못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나는 언제고 그것을 알아낼 것이다. 만약 그사이에 너희가 저지른 악행을 보상하고, 피해받은 백성들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를 참착할 것이나, 아니라면 반드시 엄중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물론, 앞으로 수령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선정을 베풀어야겠지.”
수령 전체를 향해 경고하는 말들이 이어지자 좌중의 분위기는 엄엄함을 넘어 숙연해질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몽주는 실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너희 중에 선정을 수행한 자가 있다면, 나는 다섯 해 뒤에 평가하여 그를 다시 관원에 임할 것이다. 물론, 아닌 자는 다섯 해 뒤에 관인을 반납해야 할 것이고.”
몽주가 말을 이어 펼치자, 듣고 있던 수령들이 서로 시선을 나누며 의아해했다.
왜 그런지는 몽주도 잘 알고 있었다.
“맞다. 나는 너희가 있는 전라도 북부뿐만 아니라, 남면의 모든 수령들을 다섯 해 뒤에 모조리 해임할 작정이다.”
그것은 몽주가 다듬고 있는 남면 구상 중 일부였다.
당장은 여러 자원이 부족하고, 특히 관리로 쓰일 만한 고급 인력들이 적어 어쩔 수 없지만, 5년 정도 흐르고 나면 지금 탐라의 기술학교와 고학교를 통해 어느 정도 감당할 만큼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도 넉넉할 리는 없겠지만, 남면의 지역 체계를 광역으로 나누고 모으면, 그 광역을 다스릴 만한 인재들 정도는 따로 마련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때 평가하여 적어도 학정을 펼치지 않은 자는, 내게 쓰이지는 못하더라도, 서른 근의 은을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
“그것도 아주 양질의 은일 터이니, 후에 먹고 사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한 수령들은 모두 몽주의 말이 진심인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삼십 근의 은은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 근짜리 은병 여섯 개로 절도 짓는다는 걸 생각하면 사치를 부리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먹고살 만한 수준이었다.
몽주가 재차 말하여, 겨우 5년 동안 학정만 펼치지 않는다면 그리해 주겠다 확언하니, 수령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솔직히 이 시대에 가난한 백성들을 수탈해 봐야 5년 동안 서른 근의 은에 해당하는 재물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 내심 몽주의 경고와 으름장을 무시하던 이들도 5년만 참으면 거금이 들어온다는 말에 혹한 것이다.
“내 말에는 한 점의 의혹도 가질 필요 없다. 나는 고려는 물론이거니와, 명국의 황제를 제외하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라고 할 수 있으니.”
아예 몽주는 호기로운 자랑까지 하였다.
당연히 그 말은 거짓에 가까운 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당대 전제 군주들 중 태반이 몽주보다 부유할 것이다.
당장 고려왕도 그가 가진 것을 명목상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몽주보다 더 부유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몽주가 그리 호언장담한 것은 당장의 ‘재산’은 아닐지 몰라도 그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자산’만큼은 진정 명국 황제 못지않다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가진 것에 더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제도와 기술, 그리고 정보까지.
당대 세상에 몽주보다 나은 자는 절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은이라면 이와미 은광이 있으니…….’
몽주는 왜국 서국에 아직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잠재하고 있는 거대한 은전(銀田)을 떠올렸다.
주고쿠 이와미국(石見國)에 위치한 이와미 은광은, 지금도 은이 매장된 것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왜국이 은 채취법에 어두워 채산성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만약 곧 왜국에서 벌어질 일이 잘 진행된다면, 그리고 예상대로 왜국 서국의 여러 나라가 개입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참에 이와미 은광을 강탈할 생각이었다.
왜국의 음모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보상은 물론, 당한 것을 갚는 걸 넘어 제대로 벌을 내리기 위해서 왜국은 이와미 은광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왜국의 일을 떠올리다 보니, 몽주의 표정에 은은히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 속사정을 모르는 수령들은 몽주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지를 두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다, 몽주의 얼굴에 서린 냉소가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 지레짐작하곤 얼른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몽주의 말을 기다렸다.
몽주도 곧 왜국의 일을 뒤로 미루고, 눈앞에 있는 수령들을 다시 보며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나는 너희를 재신임하고, 다시 기회를 줄 터이니, 다섯 해 동안 최선을 다해 선정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조만간 탐라 상단을 통해 너희가 어느 고을을 어찌 정치해야 할지 정하여 알려 줄 터이니, 그것을 따르도록 하라.”
“예, 저하.”
별 훈계 없이 말을 끝내자, 수령들은 안도하였다.
하나, 십여 일 후에 각 임지로 돌아간 그들이 탐라 상단의 상인들을 통해 전해 받은 영장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이 대단히 어려운 시험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탐라에서 몽주가 선도한 제도와 법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당대 수령들이 마음대로 처리하고, 이용할 수 있었던 많은 권한들이 제한되었으니, 수령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수령이 맞긴 하느냐는 식으로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비단 전라도 북부뿐만 아니라, 남면 전역의 수령들이 공히 떠 앉게 된 사정이었다.
* * *
입하가 내일모레건만, 이제야 싸늘함이 가신 북방의 봄날.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환영하듯 차례대로 허리를 굽힌 수풀의 물결이 마침내 앞까지 닿으니, 바람도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내의 온몸을 휘감으며 스쳤다.
“어찌하겠나.”
“무얼 말입니까?”
“뭐긴, 자네 아우님의 주군이 권한 거 말이네.”
“…….”
뭐냐고 물을 때도 이미 뭘 물은 건지 알고 있던 맹특목은 아합출이 물은 의도를 꼭 집어 알린 뒤에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게 도와줄까?”
“형님이요?”
맹특목은 이 무슨 수작인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어렵지 않아. 두 가지 질문에만 답하면 되는 거네. 하면 자연히 마음 속에 결심이 설 걸세. 먼저 이것부터 답해 보게.”
“……?”
“탐라의 군병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는가?”
“……지진 않을 겁니다.”
애써 답하였지만, 자신감은 결여된 대답이었다.
어제 본 탐라군의 훈련은 맹특목에게 새로운 세상을 일깨워 주었다.
화포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긴 했다. 중원의 한족들이 커다란 무쇠통으로 뻥 소리를 내면 쇳덩이가 화살처럼 먼 곳까지 날아간다고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래 봐야 크고 무거워서 성이나 배 위에서만 쓰이므로 초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기라는 말도 들었다.
하나, 탐라군의 훈련을 보고 나니,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탐라의 화포는 그가 들으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고, 그래서 말과 사람이 움직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위력이란 그로서는 아예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수준이었다.
기마들 사이에서 포탄 하나가 터지면 그 주변의 모든 기마들이 한꺼번에 죽을 게 분명했다.
그때까지도 화포를 방포하는 걸 보면서 맹특목은 애써 놀라움을 감추었으니, 아무리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 기마의 기동성에 맞춰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탐라군이 가진 또 다른 화포를 보고 나니, 그런 억지도 더는 부릴 수가 없었다.
‘개복포라 하였던가.’
튼튼한 장정 둘이면, 조각내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벼운 데다가, 그 위력도 앞서 봤던 화포의 팔 할은 족히 되었으니, 열 명쯤으로 이뤄진 작은 무리가 순식간에 움직여 수십 발의 방포를 시행할 수 있었다.
상당히 급하게 방포하였음에도 곧잘 먼 곳에 둔 훈련 목표에 관중하자, 맹특목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 정도면 말에 지고 다닐 수도 있을 터이니, 기동력 또한 무리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기마의 궁술로도 대항하기 어려움을 절감한 탓이었다.
비단 화포와 개복포같이 방포하여 쓰는 무기 외에도 맹특목이 보고 섬뜩했던 것이 있었으니, 철조망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철을 가늘게 뽑아 둥그렇게 말아 놓은 것에 철로 된 가시를 붙인, 얼핏 보면 단순하다 싶지만, 어찌 철로 저렇게 할 수 있나 싶은 기물이었다.
탁기 아우가 감추려 했으나, 보이는 김에 다 보인다는 식으로 철조망을 펼쳐 기마의 움직임을 막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과연 말을 타고 싸우는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잠시 피해를 감수하고 앞선 기마로 철조망을 끊어 버리면 될 것이라 간단히 생각하기도 했지만, 늙은 말로 시험을 해 보니, 달려가던 말이 철조망의 가시에 찔리자마자 난동을 피워 소수의 기마로 철조망을 뚫는 건 지극히 힘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지지 않을 자신이 있나?”
어제의 기억을 더듬는 중에 문득 아합출이 다시 물었다.
“형님은 없습니까?”
“난 없네.”
너무 쉽게 나오는 대답에 맹특목은 어찌 초원의 사내가 그렇게 쉽게 진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힐책을 담은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하나, 아합출은 어깨를 으쓱할 뿐, 대답을 고치지 않았다.
“탐라군의 무기와 여러 기물들도 훌륭한 것이지만, 그 군병들 역시도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네. 다들 궁법에도 능숙하여 일시에 쏘아 집중하여 시착(矢着)할 수 있으니, 굳이 화포가 아니더라도 남방의 군병 중에서는 손꼽힐 수준일 것이네.”
“그래 봐야 땅을 밟고 선 군병은 기마의 먹이일 뿐입니다.”
“허허, 그렇긴 하네만, 탐라군은 그저 땅을 밟고 선 군병이 아니지 않나.”
“…….”
“초원의 전사들이 숱한 나날 남쪽의 허약한 병사들을 조롱하듯 상대한 식으로 탐라군을 대했다간,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의 꼴이 되고 말 것이야.”
아합출이 담담한 중에 약간의 탄식이 섞인 어조로 말을 마치자,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맹특목은 어떻게든 아합출의 말과 그의 기억에 남은 탐라군에 대한 인상 속에서 틈을 찾으려고 애썼고, 아합출은…… 그냥 별생각 없이 들판을 보며 바람을 맞을 따름이었다.
그러길 한참 뒤, 문득 맹특목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뭡니까?”
“응?”
“두 가지 질문이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아아, 맞네. 그랬지.”
깜빡했다며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둥 너스레를 떤 아합출이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만약 탐라군과 손을 잡고 초원을 일통하겠노라 도전한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네.”
“……!”
계속해 온 생각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물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탐라군을 이길 수 있을지에 골몰하던 중에 탐라군과 함께한다면 얼마가 강해질 수 있는지 상기시키는 그 질문은 분명히 충격적이었다.
“어렵나? 하면, 달리 묻지. 우리네 전사 이천과 탐라군 일천이 힘을 합하면, 기마 몇 기까지 상대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
“…….”
조금 더 질문이 쉬워지자, 맹특목의 머릿속에서는 탁기 아우의 군병들과 자신이 이끄는 기마가 연합하여 싸움을 치르는 장면이 절로 그려졌다.
초원 저 먼 곳에 원수 같은 우디거 부족이 있었다.
오도리 부족과 후르하 부족을 조각내고 쫓아낸, 같은 주션족임에도 몽골족에 빌붙은 더러운 족속들.
그 우디거 부족이 가상의 적이었다.
견진을 이룬 탐라군을 향해 우디거 부족의 전사들이 돌진해 오는 것부터 시작된 그 상상은 탐라군의 화포와 개복포가 방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에 곤죽이 난 우디거의 전사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억지로 돌진하다가 철조망에 걸려 수많은 기마들이 나뒹굴었다.
쓰러진 아군에 의해 앞이 가로막혀 기동력을 잃은 후미의 기마들은 탐라군의 터지는 화살 공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덧 상상 속의 그가 우디거 전사들이 사기를 잃을 무렵, 전사들을 이끌고 측면에서 돌진하니, 우디거 전사들이 혼란한 중에 더욱 당황하여 싸울 의지를 잃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사들과 함께 그 뒤를 추격하여 화살과 창칼로 전공을 확대하는 상상에까지 이르자, 어느새 맹특목의 입가에는 커다란 웃음을 서려 있었다.
“이보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 겐가?”
“……할 수 있겠군요.”
“응?”
“초원 일통……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
맹특목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벅차오르는 풍운(風雲) 탓에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 전사 이천에 탐라군 일천이라면 적 기마 오천은 쉽게 막을 것이고, 일만도 가능할 것입니다. 특히 탐라의 전력을 모르는 상대라면 더욱 쉬울 것입니다.”
“음, 나도 동의하긴 하네. 하나, 초원의 일통을 위해서는 일만이 아니라, 십만 그 이상을 상대해야 하네.”
“우리가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면…….”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수백 리 안에 우리 부족과 형님의 부족이 수없이 조각나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을 결집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나하추의 무리들에게 배척된 다른 부족들도 끌어온다면 우리도 수만의 기마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승리가 결집을 부를 테니까요.”
아합출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맹특목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결코 그의 머리 뒤로 태양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승리가 결집을 부른다라…….”
지금 북방 초원은 여전히 몽골계 부족들의 것이고, 그들에 빌붙은 일부 주션족들만이 함께 초원을 누빌 수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주션족 부족들이 나하추와 몽골족의 세력에 밀려, 살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몽골족에 대한 그들의 원한은 실로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만약 그런 중에 누군가 주션족의 이름으로 나하추와 몽골족, 그리고 그 앞잡이들을 물리쳐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게 한다면, 그것은 모든 주션족들에게 매혹적인 소식이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초전이 중요하겠구먼.”
“초전을 이길 수 있다면, 결전 또한 승리할 것입니다.”
그들의 결의와 상상 속에서 그들은 이미 초원의 주인이었다.
하나, 아직 그들은 흩어진 부족 중 두 개의 작은 부족을 이끄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였고, 또 탐라군과의 연합이 큰 이점인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그들 부족과 주션족에게 무엇을 더 가져다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 탐라공이라는 자를 다시 봐야겠어.”
아합출의 말에 맹특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그들이 녹둔도에서 본 탐라공은 멀대같이 키만 큰 자에 불과했다.
지체 높은 자라고는 하나, 그들에게는 상관없었고, 그가 성가신 일을 요구할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식량과 무기를 준다면야 뭐든 하겠노라 말했어야 할 때였으니.
그때도 그자가 대계랍시고 뭔가를 한참 말해 준 것 같기는 한데, 통역이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또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기에 귀에 신중히 담아 듣지도 않았었다.
사실 그를 일종의 장사치 같은 것으로 여길 뿐이었다.
가끔 남쪽의 장사치 중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가죽과 귀금속을 구하러 초원에 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들 중 운이 좋은 자들은 거래에 성공하여 돌아가기도 하지만, 운이 나빠 성난 부족을 만나면 꼼짝없이 털리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데도 크게 한 몫을 노리고 종종 초원으로 발을 딛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렇기에 맹특목이나 아합출은 탐라공 또한 규모가 좀 클 뿐이지, 그런 장사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해 왔었다.
실제로 그가 식량을 주었을 때, 보답 삼아 질 좋은 담비 가죽을 몇 장 주었더니, 매우 좋아했으므로 다른 식으로 생각할 이유조차 없었다.
한데, 이제 탁기를 통해 새삼스레 탐라공의 진정한 힘을 깨닫게 되니, 후에 다시 만난다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시원하게 뚫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탁기 아우에게 말하면, 탐라공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글쎄, 듣자 하니 꽤 바쁜 사람 같던데…….”
“그래도 탁기 아우에게 한번 부탁은 해 봐야겠습니다. 그가 초원을 원하는 이유가 뭔지, 그것을 함께한다면 우리가 얻는 건 무엇인지를 듣고 싶습니다.”
맹특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으니, 아합출 역시 그것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몽주가 그들의 말을 들었다면 답답해 죽을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말해 줬을 때는 뭘 듣고 인제 와서 딴소리냐며.
“그나저나 정말 탁기 그자를 아우로 삼을 생각인가?”
“그러기로 그자와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속임수가 좀 있지 않았나.”
“…….”
“자네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버린 것도 그렇고, 브흐에서 졌는데 무승부인 것처럼 속여 넘긴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의형제를 맺더라도 사실 자네가 아우 아닌가?”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자에게 아우가 된다면, 제가 애초에 부족장이 되면서 나이를 속인 것 또한……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형님도 나이를 속였지 않습니까?”
맹특목은 절로 변명을 늘어놓다가 문득 아합출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공식적으로 그 둘의 나이는 열 살가량 차이 났지만, 실제로는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차이가 있었다.
맹특목은 오 년 정도 나이를 늘렸고, 아합출은 반대로 오 년 정도 줄인 것이었다.
각각의 부족을 규합하면서 필요에 따라 그리한 것이었으니, 부족들이 흩어지고, 다시 뭉치면서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진짜 나이를 모르기도 했다.
게다가 초원의 사내들은 15살만 되어도 겉으로는 어린 티가 사라졌고, 스무 살이 넘으면 마흔 살과 별 차이가 없었다.
초원은 그저 말을 타고 싸우는 실력으로 우위를 가릴 뿐 나이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었다.
물론, 부족장쯤 되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을 필요가 있기도 했지만, 너무 어리거나 많아 무시 받지만 않으면 되었고, 그것이 아닌 이상 나이는 상관없었다.
하나, 남쪽 나라에서 온 탁기는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의형제를 맺자고 하곤 나이를 물으니, 공식적인 나이로 답하자 한 살 차임에도 탁기 스스로 아우를 청했고, 그것이 확정되고 말았다.
“먼저 아우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니, 사실 제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지요. 험험.”
맹특목은 애써 당당한 척하였다.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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