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16)
* * *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어느 집 마당에서 한 사내가 낮은 담장 너머로 좌우를 살피더니 이내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거리로 나왔다.
그는 착지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여 거리 반대편 집의 열린 문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는가.”
“없습니다. 사라졌어요. 이미 전해진 게 틀림없습니다.”
“어허.”
사내의 대답에 무리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안으로 들어가서 정리해 보세.”
무리를 이끄는 자로 보이는 자가 말하니, 여섯 사내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중유 하사의 말대로 그 그림이 이미 세작에게 전해진 것이라면, 저 세 왜인들이 어제와 오늘 만난 자들 중에 세작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섯 사내들의 수장인 탐라군 덕만 상사의 말은 이미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바였고, 그렇기에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작은 관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
한 사내가 내뱉은 말이 지금 그들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얼마 전, 도학생 출신으로 지금 탐라 조정에서 견습 관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 왜인들이 세작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도학생 출신 왜인 견습 관원에 의해 알려졌다.
이에, 세작을 색출하라는 탐라공의 명을 받은 내관대신 포은은 군관대신의 협조로 여섯 명의 사급 군병을 빌려 세작을 찾는 일을 맡겼다.
지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섯 사내가 바로 그들이었고, 그들은 내관대신의 명에 따라 2인 1조로 세 왜인 견습 관원을 쫓아다니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은밀히 살펴 왔다.
특히 최근 이틀 동안은 철저히 살폈는데, 삼 일 전에 가동이라는 이름의 왜인 출신 관원을 통해 세 왜인들에게 두 번째 정보가 건네졌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그림의 형태로써, 첫 번 째보다 크기가 큰 것이었으니, 은밀하게 전하기 어렵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그림을 그대로 전하든, 어디에 담거나 숨겨 전하든 겉으로 두드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군병들이 감시하는 중에 무어라도 전해지는 게 보이면, 그 전해 받는 자가 세작이거나 세작과 관련된 자일 게 분명했다.
하나, 지난 이틀 동안 세 왜인들은 견습으로 일하는 관부에 출퇴근을 하는 외에는 다른 곳에 들르거나, 다른 자를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기껏해야 찻집이나 주점에서 한 시진 안팎으로 머무는 게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주변에서 충분히 감시할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인 곳이었다.
또 찻집이나 주점에서 접하는 이들도 그곳에서 일하는 점원 정도일 뿐,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점원이 혹시 연결책인가 싶어 알아보았지만, 평범한 탐라 백성에 불과했고, 가장 중요한 관건인 그림을 전해 받은 일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자, 다소 급한 마음에 그들을 일부러 밤까지 관부에 매어 두게 요청하고, 그들의 집안에 들어가 그 그림이 아직 그대로 있는지 살핀 것이 조금 전이었다.
이미 가동을 통해 그림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알아 두었고, 첫날 세 왜인들이 관부에 나가 있을 때 은밀히 잠입하여 그 그림을 보관한 곳을 확인하기도 했었으니, 그 그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을 감시하지 못하는 때는 그들이 관부에서 일할 때뿐입니다. 하면, 그들과 같이 관부에서 일하는 자들 중에 세작이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서둘러 포은 영감께 알려야 합니다.”
“성급하게 굴지 말게.”
덕만 상사는 관원 중에 세작이 있을 수 있다고 포은 영감에게 당장에라도 고하려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수하를 책망하듯 바라보며 말렸다.
“어찌 만류하십니까? 어서 포은 영감께 고하여, 그들이 일하고 있는 관청을 감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포은 영감께서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해 주신 걸 잊었는가?”
“단정은 아닙니다. 하나, 그 가능성이 높은 건 맞지 않습니까?”
연이어 반론이 나옴에도 덕만 상사는 고개를 저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관부에서 일한다고 해서 어디 관원들만 상대하던가? 관부를 드나들며 용무를 보거나, 관부의 일을 돕는 백성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들 중에도 얼마든지 세작이 있을 수 있고, 그렇다면 세작은 관원이 아닐 수 있으니, 실상 우리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
덕만 상사의 지적에 반론하던 수하들도 입을 다물었다.
대저 지금 탐라에서 백성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이 관부와 연관되어 있었다.
월봉을 받는 일 태반이 나라나 국공에 의한 것이고, 식당이나 다점 및 주점 같은 작은 상점이 아닌 이상 관부에 속하거나, 관부와 거래하는 등 유관한 일들이었다.
그렇기에 과거와 달리, 백성들의 관부 출입이 잦았고, 백성들이 관부를 두려워하는 마음 또한 희미해진 상태였다.
“특히 나는 사야가, 그자가 의심스럽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중에 덕만 상사가 다시 말문을 열면서 세 왜인 견습 관원들 중 하나를 지목하였다.
“우리가 감시에 실수한 게 없다면, 분명 세작은 그들이 관원으로 일할 때 접촉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네. 일하는 곳이 모두 관원 외 백성들과 접촉할 수 있기는 하나, 사야가가 맡은 일을 생각하면 외부인들을 만나고, 은밀히 작당할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네.”
덕만 상사의 말에 수하들도 과연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야가는 체관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교관부 교사청에서 일하고 있고, 다른 자는 법관부에서 일하고 있어, 아무래도 외부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에 비해, 사야가는 체관부 관원으로서 관부의 성격상 외근이 많았고, 제주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작의 수가 굉장히 많거나, 세작의 부역자들이 대단위로 있지 않은 이상, 같은 자와 빈번히 만날 수밖에 없을 테니, 같은 이를 반복해서 만나기 어려운 교사청이나 법관부에서 일하는 왜인들이 일하는 중에 세작과 접촉하기는 어려울 것이네.”
하는 일의 성격상 교사청은 교사를 교육시키는 곳이고, 법관부는 사람을 직접 대하기보다는 문서를 다루는 일에 집중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관부에 물자를 대는 자들도 있고, 억지로 일을 만들어 연이어 접촉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더 나은 선택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야가가 바로 그 더 나은 선택이었으니, 안 그래도 포구 건설 때문에 외근이 많은 중에 국공께서 제주에 환형의 도로를 건설하길 원하시어 그에 대한 사전 조사를 위해 제주 곳곳으로 체관부 관원들이 나가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외근을 나오면 다시 감시가 붙긴 하지만, 아무래도 관원으로 일할 때는 면밀히 감시하기 어려웠으니, 사야가가 세작과 접촉하는 것을 놓쳤을 가능성이 컸다.
“명일(明日)부터는 다른 이들은 일인으로 감시하고 나머지 사인은 사야가를 맡도록 하지.”
덕만이 결정하여 인원을 나누니, 사야가 외 다른 두 왜인을 감시하게 된 자들은 울상을 지었다.
혼자 감시한다는 건 그만큼 더 고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데, 더 잠을 줄여야 할 것이고, 대소변을 해결하는 것조차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원이 두 배쯤 늘어야 할 듯하지만, 이 여섯 군병조차도 탐라군에서 힘겹게 빼낸 것이었다.
탐라국의 최대 약점인 인력의 부족은 곳곳에서 아쉬운 소리를 내게 만들었고, 특히 군부의 일처럼 고려 남면이나 왜국 서규슈의 사람을 쓰지 못하는 직종에서는 더욱 그랬다.
어쨌든 여섯 군병들은 또다시 ‘미끼’용 정보를 흘리면서 사야가를 중심으로 세 왜인 견습 관원들을 감시하였다.
하나, 보다 면밀히 살폈음에도 좀처럼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덕만 상사는 어쩔 수 없이 내관대신 포은에게 그들이 한계에 부딪쳤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바로 그 자리에서 포은이 한마디 하였으니, 그 말이 후에 세작을 밝혀 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자네들의 탐색은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네. 한데, 녹계에 적힌 것을 보면, 정작 사야가 그자가 일을 하기 위해 타고 다니는 배의 노꾼에 대한 조사는 없군.”
“하나, 탐라에서 사람을 싣는 배들은 모두 문씨 가문에 속하여 있습니다.”
당황한 덕만이 어설프게 변명하니, 포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질책하였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이미 세작이 고려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으니, 문씨의 종복이라 할지라도 어찌 예외일 수 있겠는가.”
덕만은 말없이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사실 노꾼들에 대한 조사가 없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오래전부터 문씨 소속으로 일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안이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탐라에서 고씨와 더불어 크게 힘을 쓰는 가문인 문씨와 마찰이 생길까 염려한 탓이기도 했다.
아무리 탐라에서 국공이 홀로 우뚝 서 있다고는 하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고씨와 문씨 또한 우러러야 하는 권세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니, 그런 백성들의 ‘상식’은 탐라 출신 군병들에게도 동일하였던 것이다.
그 점을 짐작한 포은은 진중한 어조로 덕만을 훈계하였다.
“국공 저하께서 이번 일을 명하시며 말씀하시길, 필요하다면 대공부인도 조사하라 하셨네. 문씨 가문이 대공부인보다 더 두렵던가?”
“어찌…….”
“하면, 망설일 필요가 없지 않나. 당장 가서 사야가가 자주 접하는 자들을 모조리 다시 조사하게. 그들 중에 권세가에 속한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빠짐없이!”
“알겠습니다!”
포은의 결단으로 세작을 찾는 사안은 급전하였다. 하나, 그 일로 말미암아 탐라의 또 다른 약점이 두드러져야 했다.
* * *
위국공은 다행히 일정을 더 늦추지 않고, 요동에서 연락한 대로 닷새 후에 개경에 당도하였다.
몽주는 예성강 하구에 위국공이 탄 명국의 배와 요동공의 배가 포구에 닿는 것을 궁중후와 더불어 바라보았다.
왕성에서 기다리는 대신 예성강 하구에 마중 나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궁중후의 간곡한 권유를 마지못해 승낙한 것이다.
그로 인해 몽주는 마치 현대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중국 사신의 ‘클리셰’와도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비슷하게 포구에 각각 배를 대었는데, 요동공이 서둘러 하선하여 몽주와 궁중후 등과 더불어 인사를 나누고, 직접 환대한 것에 감사의 말을 전한 것에 반해,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위국공은 좀처럼 하선하지 않고 고려 일행들을 기다리게 만든 것부터 ‘스테레오 타입’의 시작이었다.
거의 한 식경가량이나 기다린 후에야 40대 중반의 한 인물이 수많은 호위와 시중들 사이에서 천천히 하선하였다.
별로 나오지도 않은 배를, 뒷짐 지고 억지로 허리를 꺾어 크게 내밀고 팔자로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는 꼴은 몽주의 입장에서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지만, 당대의 시선에서는 위국공이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선언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위국공이 괜히 시선을 딴 곳으로 이리저리 돌리면서 슬슬 몽주들이 있는 곳 앞까지 다가오자, 비슷하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던 궁중후 염흥방이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위국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위국공 서달 저하, 어서 오십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크십니까.”
“왜 아니 그렇겠소. 천자께옵서 친히 명하시어 고려에 은문하라 하시지 않았다면, 내가 이 멀고 누추한 곳까지 올 일이 있었겠소?”
“…….”
역(譯)하여 전해진 말을 들은 몽주는 속으로 그 한심함에 실소하였고, 요동공은 위국공의 시야 밖에서 인상을 잠시 찌푸렸으며, 궁중후는 억지 미소를 유지하느라 볼살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문(恩問)이라 함은 방문의 높임말이었으니, 보통은 자기 자신에게는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썼다 함은 상대를 얕잡아보고 있음을 뻔뻔하게 밝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포구 주변을 보며 누추하다고 비방한 것만 봐도 위국공 서달의 태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근자에 고려에 혼란이 잦았고, 예성강 포구는 몽주에 의해 한 번 박살 난 적도 있어, 확실히 과거 벽란도의 위상 같은 건 조금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대놓고 누추한 곳이라고 핀잔받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명국 또한 응천부 주변을 제외하곤 아직 원명교체기의 혼란한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곳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진해져 가는 중에 문득 위국공이 몽주를 빤히 보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였다.
“그대가 석몽린이오?”
전해 들은 말에 몽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명국에도 고려의 탐라공이라는 자가 꽤 오만하다는 소문이 있더니, 과연 틀림이 없군.”
“……?”
몽주는 초면에 힐난부터 하는 위국공을 보며 그가 왜 이러나 싶다가, 문득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은 걸 질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코웃음이 나는 걸 애써 참은 몽주는 생각 같아서는 그냥 대들어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기에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며 공손히 읍하였다.
“탐라국개국공 석몽린이 저명하신 위국공께 인사드립니다. 상승의 장군 위국공의 존안을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지난날 고비 사막까지 명군을 몰아 쳐들어가 구원의 무리들을 벌벌 떨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위명에 깊이 탄복한 바 있으니, 그 뒤의 사정은 모르나, 분명 구원의 화령(和寧 : 카라코룸)마저 무너뜨렸을 거라 응당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 방려 내내 바쁘시겠으나, 차후에 여유가 생기신다면 그때의 무용담을 한번 풀어 주시길 청합니다. 귀를 크게 열어 공의 무업을 소중히 담고, 그 위명을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
아첨의 표정으로 길게 인사를 하니, 처음에는 그 깍듯한 모습에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위국공은 잠시 후 그의 ‘흑역사’를 들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바짝 굳었다.
그가 고비 사막으로 진격한 것은 사실이나, 그 결과는 패전하여 오히려 명국에 위기를 선사한 것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대놓고 화를 내지도 못하였으니, 몽주가 정말로 개전 이후의 일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굴었기 때문이고, 굳이 스스로 패전을 밝히기도 애꿎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여, 위국공 서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중에도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거절하였다.
크게 한 방 얻어맞은 탓인지, 이후 위국공은 더는 거드름이나 쓸데없는 시비 없이 곧장 가마에 올라 개경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었다.
“후후, 잘하셨소.”
말에 올라 위국공의 행차를 따르는 중에 요동공 이성계가 다가오더니, 소매로 입가를 감추며 조그맣게 말하였다.
그것이 위국공의 거만을 말로 꺾은 것 칭찬하는 말임을 깨달은 몽주도 마주 웃어 주고는, 안 그래도 그에게 물어보고자 한 것도 있어 잘되었다는 양 질문을 던졌다.
“요동에서 위국공은 정말 휴식을 취한 것입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까.”
“금산 근처에까지 가 보긴 했소.”
숨길 것 없다는 양 요동공은 어렵지 않게 답하였다.
“금산이라 하면…….”
“우리 요동과 나하추의 강역이 북쪽에서 만나는 곳이오.”
“일종의 적진 시찰인 셈이군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오.”
“다른 용무는 없었습니까.”
가볍게 물으니, 요동공도 가볍게 대꾸하였다.
“그대에 대해 많이 묻더군.”
“절요?”
……라고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지만, 사실 몽주는 위국공의 고려 행차에 자신을 만나는 것 또한 주요 목적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자신을 굳이 개경까지 미리 불러다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방문이 북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탐라군을 북벌에 끌어들이려 함을 짐작할 수 있고, 나아가 북벌을 위한 명군의 규모가 생각보다 작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했다.
고려의 가담을 예상하고 북벌에 쓰일 명군을 줄였을 수도 있고, 반대로 명군의 규모를 크게 할 수 없어 고려의 가담. 즉, 탐라군의 참가를 원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엎어치나 메치나, 선후 관계야 어쨌든 몽주로서는 명국에 꿀릴 이유가 없는 상황이 틀림없었다.
앞서 위국공 서달이 거드름을 심하게 피운 것도 고려에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행동 같았다.
역사에 서달의 인덕을 칭송하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그저 그의 주군 주원장과 권세가들을 대할 때에만 한정된 성품이 아니라면, 앞서 위국공이 보인 거만은 분명 위장일 것이다.
어쨌거나, 몽주가 의외라는 반응을 역력히 보이자, 요동공이 자신이 미리 조언해 준다는 듯 차근히 말을 건넸다.
“탐라공은 명국의 요동 북벌에 동참할 의사가 있으시오? 만약 있다면, 이리저리 간을 보려 하지 말고, 흔쾌히 응하시오. 요동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눠 보면서 느낀 것인데, 명국과 위국공은 탐라공의 군력에 관심이 크오. 만약 흔쾌히 북벌에 응한다면 명국과 위국공 또한 크게 감명을 받을 것이니, 후에 그대에게 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크지 않겠소?”
이성계의 말을 들은 몽주는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하나, 가타부타 무어라 속내를 보이지 않자, 요동공이 오히려 궁금함이 생겨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어찌할 생각이오? 내가 보기에…….”
“저도 흔쾌하게 결단을 내릴 생각입니다.”
요동공이 설득하는 듯한 말을 꺼내려는데, 대뜸 몽주가 끼어들어 결론을 지어 버렸다.
그 말에 요동공이 오히려 조금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하, 하면 탐라군이 요동 정벌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이오?”
“네, 흔쾌하게 내지르고 참여할 것입니다.”
뭔가 ‘뉘앙스’가 다른 대꾸였지만, 요동공은 참여한다는 말 자체에 꽂힌 것 같았다. 곧 표정 관리를 하긴 했지만, 얼굴에 기쁜 낯이 완연했다.
겉으로는 명국과 위국공의 속내를 알려 준다 하면서도, 자신의 바람을 피력했던 것인데, 그것이 통한 듯하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탐라군의 힘을 요동공만큼 잘 아는 이도 없을 터이니.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명국이 북벌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한다면 그 참에 뭔가를 얻기 위해 억지로라도 끼어들어야 할 판이다.
다만, 몽주가 말하는 흔쾌는 무조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흔쾌하게 조건을 내걸겠다는 의미였다.
먼저 잘해 주고 보답을 바라느니, 대가를 확정하고 딱 그만큼만 잘해 주는 게 낫다는 걸 근래에 몽주만큼 절실히 느끼는 이도 없었다.
그렇게 삼 인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 개경으로 흘러갔다.
* * *
마침내 명국 위국공이 고려를 방문한 그 근원을 밝힌 것은 다음 날이었다.
첫날 고려왕 왕우를 알현하는 등 의례적인 행사를 마친 위국공은 몽주와 요동공, 그리고 궁중후를 불러 모아, 명국 자랑을 한참 늘어놓고, 구원에 대한 비난 또한 크게 퍼부은 뒤에야 속내를 내비쳤다.
당연히 요동 북벌에 대한 이야기였다.
“태원을 비롯하여 섬서에 구원의 잔당들이 크게 힘을 집중하여 전선이 고착되었으니, 응당 머리가 있는 자들이라면 두껍게 막힌 곳을 애써 뚫기보다는 그로 인해 약해진 곳을 찾아 실리를 얻으려는 것이 옳음을 알 것이오. 천자께옵서는 그 약해진 곳이 바로 요동이라 여기시니, 만약 요동에서 구원을 좇는 나하추를 몰락시킨다면, 구원의 무리들 또한 혼미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오. 아니 그렇소?”
묻는 말로 끝나긴 했지만, 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는지 위국공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듣자 하니, 고려 또한 오래전부터 북방의 호인들로 인해 크게 고생하였음을 알고 있소. 하여, 명국은 요동 북부를 정벌함에 있어 고려 또한 그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명분과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바, 오늘 이 자리에서 요동 정벌을 공식적으로 권할 터이니, 그 호사를 받들고, 만세를 부르도록 하시오.”
마치 거부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 뻔뻔히 요구한 위국공은 곧바로 몽주를 직시하였다.
이미 요동공은 북벌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북면과 남면을 잃은(?) 고려는 참여한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 결국 관건은 탐라공의 의사였다.
비단 위국공뿐만 아니라, 요동공과 궁중후도 같이 몽주를 바라보았으니, 고려의 북벌 참여는 탐라공에 선택에 따라 결정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쏟아지는 걸 느낀 몽주는 웃음을 흘리며 그 시선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마주한 뒤, 위국공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공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요동 북부의 나하추를 치는 것은 실로 중원의 안정과 명국의 승승장구를 위한 훌륭한 계책일 것입니다. 사실 이미 저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입니다.”
“하면…….”
“거절합니다. 억만금을 주신다고 해도 싫고, 심지어 응천부를 제게 주신다고 해도 싫습니다.”
몽주의 말을 전해 들으며 은근히 기대감을 높이던 위국공 서달은 마지막 말까지 전해 들은 뒤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자가 감히……!”
마구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분통을 터뜨리려 할 때, 몽주도 마주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같이 손가락질한 것은 아니고, 손바닥을 보인 것이었으니, 화를 낼 때는 내더라도 말을 마저 듣고 내라는 신호였다.
“단! 이것부터 보시지요.”
몽주가 예복 자락 아래 놓아둔 두루마리 족자를 꺼내 상 위에 굴려 펼쳤다.
또르르 굴러가 펼쳐진 족자 안에는 고려 북부와 요동 일대가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물론, 탐라에서 쓰이는 비교적 정밀한 지도가 아닌, 명국에서 쓰이는 수준 낮은 지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 붉은색으로 타원이 그려진 부분이 있었다.
녹둔도를 아래로 하여 북방 일대를 따로 표시해 둔 것이다.
펼쳐진 지도를 보고 이어 붉게 표시된 부분이 있음도 확인한 위국공은 여전히 검붉은 안색을 한 채 몽주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수작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에 몽주는 차분한 어조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이제이야말로 호인을 다스리는 최고의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해서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말에 위국공은 가슴에 화기를 여전히 담은 중에도 솔깃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이제이의 대표적인 것은 훗날 명국이 요동의 여진족들을 건주(建州)와 해서(海西), 그리고 야인(野人)으로 구분하여 서로 싸우게 한 것이지만, 중원의 통일왕조라면 사방의 오랑캐를 다스리고자 늘 시도하고, 사용해 온 방법이기도 했다.
이어서 몽주가 이이제이에 대해 설명하니, 위국공뿐만 아니라, 몽주가 명국의 요구를 거절한 것에 기겁했던 요동공과 궁중후도 크게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몽주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위국공은 여러 번 물음을 던지며 그것이 가능한지를 따지기 시작했고, 그의 머릿속에 담긴, 천자로부터 탐라공을 제어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 즉, 협박책들은 어느새 잊히고 있었다.
물론, 몽주가 그들에게 말한 이이제이의 방책에는 중요한 부분이 하나 빠져 있었다.
탐라국이 스스로 이이제이 중 하나의 이(夷)가 될 것이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이제이의 주체는 명국이 아니라 탐라일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이평이(以夷平夷 :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평정하다)에 이를 것이라는 뜻은 오직 몽주의 가슴속에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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