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0)
“주액(注液)하오! 다들 조심하시오!”
한 공인이 크게 외치자, 잠시 후 몇몇의 공인들이 작은 기중기에 들린 통을 기울여 끈적한 액체를 부었다.
쇠로 만든 통 안에 구워 만든 백자기를 붙여 내열성을 높인 통 안에 든 액체는 굉장한 열기를 뿜으며 흘러나왔다.
그 액체가 부어진 곳에는 이미 또 다른 액체 상태의 무언가가 있었으니, 녹인 주석 주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녹은 주석 위로 끈적한 액체가 부어졌지만, 두 액체가 서로 섞이지 않고 층을 이루니, 잠시 가만히 놔두자 점점 더 평평하게 구분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판(移板)하시오. 흔들리지 않게 조심해야 하오.”
후끈한 열기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공인의 외침에 부하 직공들이 또 다른 작은 기중기에 두 액체가 들어 있는 넓은 판을 들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 판은 그 공소 외곽에 따로 건물을 지어 만든 정랭고(靜冷庫 : 가만히 식히는 창고)로 옮겨 굳을 때까지 두게 되어 있었다.
정랭고 안에는 칸칸이 쌓여 있게끔 되어 있었는데, 지붕이 높은 걸 넘어 아예 굴뚝 같이 솟아 있었다.
사람 눈높이 정도에 가로로 빗살이 쳐져 있는 창과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막힌 중에 높이 솟은 굴뚝에서는 은근히 바람이 아래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이는 국공 저하께서 굴뚝을 세우고 그 중심을 좁혀 두면 위에서 들어오는 바람의 빠르기가 세질 것이라 하여 만든 것인데, 과연 체감이 가능한 정도였다.
이 정랭고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공소도 있었다.
정랭고에서 충분히 식은 판을 옮겨 가서 작업을 하는 공소인데, 아래 주석판과 그 위의 또 다른 판을 떼어 내고, 정해진 규격대로 잘라 내는 작업이었다.
쩡!
“으아!”
“야, 이눔아, 또 깨뜨렸냐?! 그게 한 장에 얼마나 하는 줄 알고 그 지레를 떠는 것이야!”
“어허, 너무 타박하지 마시게.”
공소의 소장이 목소리를 높이던 중에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장은 몸을 돌려 한탄 겸 넉두리를 하려다가 문득 깜짝 놀라 서둘러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공관대신 화극 어른의 목소리였기에 그가 온 줄은 알았지만, 그의 곁에는 탐라공마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소장뿐만 아니라, 공소 안의 모든 공인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몽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수고들 많소. 이곳의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전해 들었소만, 직접 보고 싶어서 왔소.”
“황, 황공합니다, 저하.”
소장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화극의 눈치를 살펴보곤, 몽주를 보좌하기 시작하였다.
몽주는 예전에 이 공소를 지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 온 것임에도 주저함 없이 공소 안을 성큼성큼 움직였고, 그의 발길이 처음 닿은 곳은 공소의 최종 생산물이 적재되어 있는 곳이었다.
나무로 된 받침에 켜켜이 세워진, 종이에 싸여 있는 것을 하나 들어 종이를 벗겨 내자, 그 안에서 나온 건 판유리였다.
가로세로 50세미짜리의 작다면 작은 판유리.
그 판유리를 잡고 몽주는 몸을 돌려 입구 쪽에 비춰 보았다. 공소 안이 어두운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입구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환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를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여 눈으로 보는 입구와 유리로 비춰 보는 입구의 차이를 가늠하던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를 소장에게 건네주었다.
몽주가 대충 잡고 본 것에 비해 소장은 엄청난 보물인 양 소중히 받아서 조심스레 종이에 감아 다시 진열대에 올려 두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보던 몽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으니, 그에 화극이 물었다.
“그리 맘에 드는 얼굴은 아니로군.”
“솔직히 좀 그렇긴 합니다. 물론, 다들 최선을 다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몽주가 확인한 유리판의 투명도는 예상대로 그리 높지 않았다. 재에서 추출한 탄산칼륨과 철분 함유량이 높은 한반도의 석영 모래로 만든 유리의 한계였다.
일종의 색유리라고 할까.
다만, 색유리라 해도 투명도가 곳곳에 따라 천차만별로 일정하지도 않았다.
굴절도 좀 있는 편이라 유리에 비친 세상이 울룩불룩 왜곡되어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제조 및 냉각 과정에 당대의 기술적 한계가 영향을 끼친 탓인 듯했다.
물론, 이는 현대의 세련된 유리를 알기에 느끼는 것으로, 당대의 공인들은 그들이 판유리를 생산하게 된 것에 감격해했으니, 그들은 아마 금은보석을 만들어 내는 기분일 것이다.
유리라는 물건이, 특히 판유리라는 물건이 그런 취급을 받던 시대였으니.
아까 공소에 들어올 때 누군가 유리를 깨뜨리는 바람에 그게 얼마짜리인데 깨뜨리냐고 소장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는데, 사실 정확히 얼마짜리인지는 아직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부르는 게 값이었다.
“여기 있는 것이 지금까지 생산한 것들인가요?”
몽주가 세워져 있는 유리들을 훑어보며 물으니, 소장이 굽실거리며 그렇다고 답하였다.
“대략 이백 매쯤 됩습지요.”
“시품 생산한 지 닷새째쯤이죠?”
“네, 오늘이 닷새째입니다요.”
닷새 만에 200매이고, 한 판에 4매가 나오는 방식이니, 하루에 10판의 유리 모판을 생산하는 셈이었다.
“아직 공인들이 능숙지 못해 망치거나 깨뜨리는 게 많아서 그 정도이고, 숙달만 되면 현재 상태에서도 반 배는 더 나올 걸세.”
화극이 첨언하니, 소장이 죄를 지은 것처럼 더 허리를 굽실거렸다.
“처음에는 다 그런 거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유리를 자르는 중에 깨지는 건 숙달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리 자체의 문제니, 공인들을 야단치실 일도 아닙니다.”
지금 만들어진 유리는 불순물이 많았고, 불순물이 많은 유리는 그 특성상 당연히 작은 충격에도 금이 쩍 갈라지기 쉬웠다.
몽주는 걸음을 옮겨, 유리를 자르는 곳으로 향했다.
“이게 수정칼인가.”
“예, 그렇습니다!”
무심코 물은 말에 조금 전까지 그 수정칼로 작업하던 공인이 군기 바짝 든 이등병처럼 크게 소리쳐 답하였다.
몽주는 실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어떤가, 유리가 잘 잘리던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긴 했지만, 다이아몬드나 초경합금을 이용한 유리 커터가 아닌 유리의 경도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수정, 즉 석영으로 작업하면 상대적으로 부담이 클 것이 분명했다.
유리라는 게 부서지는 것의 대명사긴 하지만, 그건 강도가 약한 것일 뿐, 경도는 제법 높았다.
모스 경도 6.5 정도이니, 모스 경도 7인 수정 이상의 보석류를 제외하곤 가장 경도가 높은 물질 중 하나였다.
수정이 조금 더 딱딱한 물질이라곤 해도, 유리와 비슷한 수준인 터라, 아무래도 작업 중에 마모도 상대적으로 심할 것이고, 힘도 더 들 것이다.
그 때문에 실수로 유리가 파손되는 일이 더 잦으리라.
역시나 다이아몬드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대 동아시아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다.
다이아몬드는 금강석이라는 이름으로 인도 불교 신화 속 인드라 신의 번개 무기인 바즈라(vajra)의 상징으로 불교가 뿌리내린 고려에서도 생각보다 널리 알려진 물질이지만, 극동에 다이아몬드 산지가 없는 사정상 실제로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어디서 난다고 해도 당대에도 금이나 강옥(루비)과 더불어 최고의 보석으로 여기는 터라 유리 절단용으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경상도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정으로 유리를 절단하게 한 것이었다.
“일단 다음 번 명국행 때 백 매 정도 보내서 간을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시게.”
만드는 것이 아닌 파는 것은 별 관심이 없다는 양 대답하던 화극은 이내 기대감이 묻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면, 한 장에 얼마쯤 생각하고 있으신가?”
“글쎄요. 명국의 권세가와 부자들이 얼마나 탐을 내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못해도 10장에 은 한 근 정도는 받지 않겠습니까.”
“오호, 정말 그리되었으면 좋겠구먼.”
화극은 이미 거래가 성사된 것처럼 좋아했고, 몽주는 너무 기대를 키운 건 아닌가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나, 후에 명국에서 처음 선보인 탐라산 판유리의 가치는 몽주의 예상과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로고스(logos)적인 의미에서는 배신했다.
그렇게 탐라를 살찌울 또 하나의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을 기분 좋게 확인한 몽주는 그다음 날 서구주로 떠났다.
* * *
“너희에게 거짓을 지어 내라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만약 지난번 내게 한 말 중에 거짓이 있었다면 자백하고 사실을 고하라. 설령 거짓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따로 추궁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너희에게 준 것 또한 빼앗지 않을 것이다.”
동경(경주)의 중심지인 구 시전 거리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 위치한 한 마을, 고신걸은 일단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담담하나, 조금은 날선 목소리로 말하였다.
모인 자들은 모두가 여인들이었으니, 이들의 공통점은 탐라공의 처사촌인 최종도에 의해 강제로 간음당하거나 추행당했다는 것이었다.
고신걸의 말이 있은 후에 그 여인들 사이에서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하나, 그렇다고 고신걸에게 무어라 구체적으로 말하는 이는 없었기에 다시 물어야 했다.
“어찌 답이 없는 겐가? 진정 지난번에 한 말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지 않았나.”
고신걸은 조금 짜증이 더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눈앞에 있는 여인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건 이들이 최종도에게 추행당했고, 그 때문에 귀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모두 과거 동경 시전 상인 및 경상도 상인들의 일가족이기 때문이었다.
탐라의 상단이 고려에 자리 잡기까지 그들 토박이 상인들의 텃세 수준을 넘어선 방해에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를 생각하면 이 여인들조차도 차마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경에서 탐라 해병대와 경상도 상인들 및 그들에게 고용된 왈짜패들간에 큰 싸움이 있었고, 그 결과 경상도 상인들과 왈짜들 중에 죽고 다친 이들이 상당히 나왔는데, 그렇게 다친 상인들에게마저 이들 여인들이 최종도에게 추행당하는 바람에 몽주가 은과 쌀을 들여 호구지책을 마련해 준 셈이었으니,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 것 같아 찝찝하기도 했다.
고신걸이 조금 더 사납게(?) 대답을 채근하니, 그중 한 여인이 대표인 양 답하였다.
“저희는 이미 말씀드려야 할 말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자 또한 인정한 것입니다. 한데,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에 와서 어찌 다시 캐묻는 것입니까? 이는 저희를 두 번 농락하는 일이 아닙니까?”
고신걸은 그 대답에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거짓이 없단 말이렸다?”
“그렇다 말씀드렸습니다.”
“알겠다. 다만, 이건 알고들 있어라. 오늘 너희가 재확인시켜 준 것에 따라, 그자는 탐라에서 죽을 것이다. 탐라공께서 내게 하명하시길, 그자가 저지른 일의 진상을 다시 확인하라 하시며, 만약 그 악행이 진실이라면 그 자가 공의 인척이든 아니든 죽음으로써 그 죄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라 하셨단 말이다.”
고신걸의 말이 있자, 여인들 사이에 일순 술렁거림이 있었다. 어찌보면 당황한 듯도 했고, 달리 보면 충격적인 기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 그 반응은 그녀들이 밝힌 진상에 거짓이 있는 건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신걸은 그렇게 탐라공의 의사를 공표하고는 곧바로 수하들과 더불어 마을을 떠났다.
‘정말 탐라공께서는 최종도를 죽이실 요량이신가. 아무리 그래도 대공부인의 아우나 마찬가지인데…….’
그가 바쁜 와중에도 동경에서 최종도에게 추행당한 여인들을 만난 것은, 앞서 밝힌 대로 탐라공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의 사정상 상단의 아무개에게는 맡길 수 없어, 소수의 심복들만 대동하고 직접 와서 물은 것이었으니, 그녀들에게 그가 마지막에 한 말 또한 탐라공이 그대로 밝히라 명한 대로였다.
아마도 탐라공께서는 만약 어떤 이유로 여인들이 거짓을 고하고, 최종도가 이를 인정하였다면,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그녀들의 자백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하나, 진실은 몰라도 여인들이 따로 자백한 것은 없었으니, 최종도의 악행은 악행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이번 일을 탐라공께서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고자 하신다면, 탐라공 가문에 처음으로 큰 추문이 생기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고신걸은 말이 매여 있는 마을 어귀까지 걸음을 옮기며 탐라공께서 최종도의 일을 어찌 처리하실지, 그리고 그 처리 방향에 따라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올지를 곰곰이 따져 보았다.
한데…….
“단주님! 고 단주님……!”
뒤를 돌아보니, 몇몇 여인들이 치맛자랏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고, 시선을 조금 멀리 드니, 아까 본 여인들이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저들이 지금 달려오는 여인들을 대표로 보낸 것 같기도 했고, 저들은 반대했으나 달려오는 여인들이 뭔가 할 말을 해야겠다며 끝내 그를 부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상념 중에 그를 부른 여인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앞에 와서 섰다.
그들 중에 한 여인은 앞서 그에게 거짓이 없다며 대표로 답한 여인이었고, 이번에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단주님, 후우, 후우…… 실은 거짓이 있었습니다.”
숨을 달래며 그녀가 건넨 말부터가 자백이었다.
“그런가? 정확히 어떤 점이 거짓인지를 말해 보아라. 숨이 가쁘면 조금 쉬었다 해도 된다.”
고 단주는 탐라공의 서편에 거짓이 있다더라도 화내거나 다그치지 말고 차근히 자백을 이끌라 하신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한데, 그녀의 답은 간단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어낸 것입니다.”
“……?!”
그건 좀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그녀들 중 누구도 최종도로부터 간음은커녕 추행조차 당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오히려 혼란 중에 싸움에 휘말릴 처지에 있는 그녀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켜 주었다고 했으니, 그녀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한 것도 최종도였다고 했다.
“탐라 상단과 저희네들과의 악연이 짧은 중에도 깊고 험하여, 이대로라면 저희 모두가 한순간에 거리로 쫓겨날 것이라 하면서, 자신이 거짓된 죄를 지을 터이니, 그를 빌미로 호구지책을 얻어 내라 하였던 것입니다.”
여인의 말끝에는 죄책감 내지 미안함이 묻은 울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달려온 몇몇 여인들은 이미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그녀들 또한 최종도를 악인으로 몰아 자신들의 처지를 살핀 것에 대해 죄의식을 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신걸은 그런 그녀들의 자백을 듣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최종도가 자신의 죄를 자랑하듯 떠벌릴 때도 쉽게 믿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동경에서의 싸움이 길고 험했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하루 만에 끝난 일인데, 그사이에 물경 스물이 넘는 여인들을 간음하고 추행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본인이 실토하고, 여인들 또한 공히 같은 진술을 하니, 부정할 수가 없었고, 최종도의 지위 때문에 여인들에게 배상하여 입을 다물게 하였으니, 최종도와 여인들의 합작은 성공적이었다.
‘대단한 자인 것 같기도 하고, 미친 자 같기도 하구나.’
어쩌자고 그 큰 죄를 뒤집어쓰면서까지 이 여인들과 여인들의 가족들을 살리려 한 것인가.
단지 이 여인들이 가족과 더불어 거리로 쫓겨나 거지꼴이 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당시 고려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게 거지였다.
원래 거지였던 자는 안타깝지 않고, 아니었던 이들이 거지가 되는 건 안타까웠던 겐가?
고신걸은 최종도의 의도에 궁금함을 잠시 가진 후에, 여인들을 보며 말하였다.
“내 약속한 바가 있어, 너희에게 준 것을 도로 가져가진 않겠다. 잘 먹고 잘 살거라.”
거짓된 증언으로 재산을 얻은 여인들에게 애써 냉소를 참은 고신걸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단주님! 만약 탐라 상단에서 일하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너희에게 자격이 있을 것이라 여기느냐?”
“…….”
고신걸이 잠시 돌아서 짧게 답하였으니, 그건 일종의 분풀이었다.
다만, 조만간 상단을 확대 세분화하면서 많은 이들을 쓰게 될 예정인데, 탐라공께서 저들의 입문을 막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아니, 애초에 탐라공께서 저런 여인들에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으니, 자신이 알아서 막으면 그만이었다.
* * *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군.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
하선하여 그를 맞이한 다의홍이 허리 굽혀 제법 능숙해진 고려말로 인사를 올리니, 몽주는 실소할 뻔하였다.
이는 다의홍의 말과 행동에 긴장이 너무 진하게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주군이라는 말을 할 때는 아예 목소리마저 ‘삑사리’가 섞여 있었다.
“긴장이 너무 심한 것 같군.”
“…….”
“그렇게나 긴장한 것을 보니, 내가 강녕하지 못할 이유 또한 잘 알고 있을 것 같고.”
“…….”
이미 서신을 주고받으며, 몽주는 다의홍을 질책할 생각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비추긴 했지만, 다의홍의 입장에서는 탐라공을 직접 만나 말과 분위기로 확인받지 못한 이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한데, 첫 만남부터 몽주가 은근히 뼈 있는 말을 전하니, 다의홍은 속이 쓰릴 정도로 두려웠다.
턱.
한데, 문득 몽주의 손이 굽어 있는 다의홍의 어깨에 올려졌다. 그 손이 아귀힘을 써 어깨를 몇 번 주물주물 매만졌다.
“네가 잘했다는 건 아니나, 왜국의 작당은 나 또한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으니, 너만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긴장 풀고, 앞으로 잘 해내면 된다. 물론, 내가 해 놓으라 한 것은 잘해 두었어야겠지만.”
“다, 당연히 성심을 다하였습니다.”
“그래? 하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성으로 가지.”
몽주가 앞서 걸음을 옮기니, 다의홍과 축후국의 무인들이 서둘러 앞에 길을 열었다.
한데, 몽주가 말에 오르기 전에 주변을 살핀 후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 축후의 백성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겐가? 집도 모두 창을 닫았고.”
“주군의 안전을 염려하여 반 시진 동안 통행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흠…….”
너무 과한 대처라 지적하려던 몽주는 이곳이 탐라가 아닌 서구주임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탐라에도 왜국의 입김이 닿은 세작들이 있는 바, 서구주에는 그 수가 더 많을 것임은 물론, 하는 짓도 단지 군기(軍機)를 노리는 수준을 넘어설 자들도 있을 것이다.
탐라군이 몽주의 바로 곁을 지키고 그 바깥으로 축후의 무인들이 다시 경비를 서고 있었으나, 서구주는 아직 그조차도 안전하다 확신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포구부터 축후성까지 이동하니, 그사이 본 광경은 마치 ‘유령 도시’의 중세 왜국판과 같았다.
분명 사람이 얼마 전까지 일하고 움직이던 흔적은 남아 있었는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어째 음침함마저 느껴졌다.
하나, 그래도 그 와중에 다의홍의 명이 축후국에서는 칼같이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개중에 좀 나은 부분이었다.
몽주는 성안에 이른 후에 곧바로 성주실을 제 방인 양 차지하고 다의홍과 그 수하들의 보고를 받았다.
“구천 여에다가 이천 여라…….”
앞서 말한 9천은 다의홍이 서구주 삼국의 장정들을 징집하여 간략하나마 조련한 군병들의 수였고, 뒤의 2천은 역시 삼국에 남아 있는 무인들의 수를 셈한 것이었다.
“이 이천의 무인들 중 믿을 만한 자들은 몇이나 되는가.”
다의홍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주저하였으니, 그 믿을 만하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도 잘 모르기 때문인 듯했다.
“쉽게 말해서 내 등 뒤에 세워도 괜찮을 자들이 몇이나 되느냐 물은 것이다.”
몽주가 부연하여 말하니, 다의홍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그 정도로 믿을 자는…… 없다고 보심이 맞을 듯합니다.”
“…….”
역시나 싶었다.
“하면, 무가의 가독들부터 만나야겠군. 내가 전한 대로 처리했다면 모든 무인들이 축후에 소환되어 있어야 할 터…….”
“따로 사정이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 성의 동편에 군진을 세워 머물고 있습니다.”
“그럼, 그 가독들을 불러들이게.”
몽주가 결정을 내려 명하자, 다의홍이 수하들에게 채근하였다.
그러자 반 식경 후에 대략 스물이 넘는 자들이 우르르 성주실로 들어왔으니, 입실 전에 검사를 받으며 검을 반납하긴 했지만, 모두가 당대 왜식 무장의 차림을 한 자들이었다.
몽주는 서구주 삼국 내 있는 무가의 가독들을 한 명씩 얼굴을 확인하듯 찬찬히 훑어본 후에 말하였다.
“반갑소. 나는 고려 탐라국개국공 석몽린이오.”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몽주가 신분을 밝히니, 가독들이 군례를 차려 몽주에게 인사하였다.
다만, 가만히 보면 나름 성심껏 인사를 올리는 자들 사이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충 시늉을 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차이를 느낀 몽주는 속으로 실소하며 다음 말을 이었으니, 다분히 단도직입적인 것이었다.
“이중에 나에게 불만이 많은 자들도 있을 것이오. 나 또한 그대들 무가에 대해 신뢰가 없었소. 그런 중에 오늘에 이르러 그대들을 부른 것은 그대들의 무력이 필요하기 때문일 뿐이오.”
“…….”
몽주의 말이 전해지자, 가독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으니, 당황하거나 심기불편하거나였다.
몽주가 한 말을 간추리면 ‘너희를 믿지는 않는데, 필요해서 불렀다’였으니, 마치 모욕을 당한 기분인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 동시에 그간 없던 상호 간의 신용을 도탑게 할 기회라고도 생각하오. 내가 그대들을 그저 무략만을 좇는 몰상식한 자들이라 여기는 것이 착각이고, 그대들이 나를 편협하게 무도를 배척하는 자라고 여기는 것이 오해임을 깨닫게 되는 기회 말이오.”
몽주의 말이 다시 전해지자, 이번에도 가독들 중에 대세적 분위기가 바뀌었다.
뭔가 자신들을 냉탕과 온탕에 번갈아 넣다 뺐다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 한 사람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그 기회라는 것이 탐라공의 명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통역된 것을 전해 들은 몽주는 입가를 삐죽이며 웃음을 흘렸다.
“물론, 내 명에 복종해야 하는 건 당연하오. 하나, 그 복종을, 애초에 있지도 않은 충성심에서 거짓으로 발현할 필요는 없소.”
몽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 말이 전해지길 기다렸고, 가독들이 다 전해 들은 반응을 보이자 다시 말을 이었다.
“받는 만큼만 움직이시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오. 다만, 나는 그대들과 그대들의 무사들 중에 금번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가문과 당사자에게 작위나 벼슬을 내릴 생각이 전혀 없소. 보상은 오직 은과 쌀로 대신할 것이란 말이오.”
몽주의 이어진 말이 전해지니, 가독들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앞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모욕 그 자체라 여긴 탓이었다.
전공이 있다면 금전적 물질적 보상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나, 그건 명예를 얻음으로써 덩달아 따라오는 것이어야 했다.
게다가 물질적인 보상이란 것도, 토지가 아닌 현물로만 대체한다 하니, 큰 장원을 세우는 것만이 믿을 수 있는 재산이라 여기는 가독들로서는 제대로 된 보상이라 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성주실의 분위기는 허공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쩌릿쩌릿했으니, 몽주의 주변에 선 호위군병들이 슬쩍 검자루에 손을 얹을 정도로 사나움이 흘러다녔다.
“썩 좋아하는 얼굴들은 아니군.”
그 와중에 몽주만이 빙그레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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