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1)
* * *
군복을 차려입은 허호필은 군모를 짚어 들다가 도로 내려놓고 모자 옆에 놓인 작은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검은 바탕에 한 가닥 노란색 줄이 드리운 작은 휘장이 두 개 들어 있었다.
공국군에서는 소령을 의미하는 바였으니, 허호필은 문득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지난번 녹둔도에 주군께서 오셨을 때, 그를 소령에 임명하셨으니, 이제 허 대위가 아닌 허 소령이었다.
소령이면 장령에 속하는 계급으로서 명명백백히 하나의 군을 이끌 만한 자격을 의미했다.
‘인생이란 참으로 변화무쌍하구나.’
새삼 속으로 소회를 느끼니, 고려군의 산원이었던 그가 어쩌다 유민에게 동정심을 가져 죄를 얻었고, 그것이 탐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근자에 이르러서는 이곳 녹둔도라는 이름의, 있는지도 몰랐던 북방의 섬에 닿아 장령의 자리에 임하게 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너를 녹둔도에서 지휘하게 한 것은 네 성품에 관용과 융통성이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탁 장군이 너의 지휘에 대해 평하길, 고려의 풍습과 많은 것이 다른 호인과 함께 군무를 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하니, 내 뜻이 틀리지 않은 듯하여 기쁘다.’
그를 소령에 임하면서 주군께서 하신 말씀이셨으니, 그제야 그가 어째서 녹둔도에 파견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고려군 산원 시절에도 스스로가 무관에 적합한 것인지를 여러 번 의심하기도 했었다.
무쌍한 무예와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이 훌륭한 무관의 기준인 세상에 그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 탐라에 왔을 때도 무관이었음을 감출 생각도 했었는데, 그가 이끈 유민의 무리가 그에 대해 말하는 바람에 절로 군에 들어가게 되었을 뿐이었다.
한데, 탐라군은 고려군과 많이 달라, 무관에게 요구하는 바가 사뭇 달랐다.
일신의 용맹과 무예보다는 일군을 이끄는 병법과 지휘에 능하길 바라니, 그런 쪽으로는 나름 재능이 있었던 그는 같이 임군한 자들보다 빠르게 승급하였다.
그러던 중에 녹둔도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 한구석에 언제라도 무관을 그만두기를 마음먹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녹둔도는 단지 군진을 건설하고 호인들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 북방을 정벌하는 거점이 될 것이다. 너 또한 호인들을 이끌어 북방으로 향해야 할 터이나, 네 행동에 많은 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 적군과 맞부딪쳐 싸우는 것은 호인들에게 맡기고 너는 녹둔도의 탐라군이 최대한 상하는 일이 없게 하고, 호인들의 돌발 행위를 막는 것에 집중하라. 뾰족한 창보다는 단단한 모루가 되라는 말이다.’
이제 그의 무관으로서의 삶이 제2막을 열게 되었으니, 녹둔도 호인으로 이루어진 2천의 기마에 탐라군 1천을 지휘하여 북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소령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런가. 알았네. 나가…… 아, 이것 좀 달아 주겠나?”
허호필이 나가려다가 휘장을 견착하는 것을 군병에게 부탁하였다.
그 군병이 얼른 다가와 휘장을 군복 양어깨 위에 달아 주자, 허 소령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잘 어울리는가.”
“암요. 대위 때와는 또 달라 보이십니다.”
“하하하. 말은 고맙군.”
함박 웃음을 지은 허 소령이 군막을 나서자, 장관이 눈에 들어왔다.
20문의 화포와 80문의 개복포를 양쪽에 정거해 놓은 1천의 탐라군이 도열한 뒤로 2천의 호인 기마 전사들이 3천 필은 족히 넘을 말과 함께 모여 있었으니, 그 규모는 숫자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북쪽 드넓은 대지에 비하면 한움큼밖에 안 되는 크기겠지만, 허호필은 왠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들로 북방을 정복하진 못하겠지만, 북방 정복을 위한 ‘마중물’의 역할은 충분히 해 줄 것이라 믿었고, 그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했다.
“허 장군, 우리는 당장이라도 떠나갈 수 있소.”
장군이 아니라는데도, 언젠가부터 자꾸 장군이라 부르는 맹특목이 흥분된 어조로 말하였다.
“하면, 바로 출발하시지요. 저희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하, 좋소. 이거 참 살 떨리도록 흥분되는군! 다시 일란 할라를 밟을 수 있다니 말이오!”
일란 할라(ilan hala)는 주션족의 말로써 ‘세 씨족’이란 의미였다. 그리고 동시에 원나라의 지배하에 주션족 다섯 만호부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본디 주션족 다섯 부족이 살던 중에 두 부족이 사라지고 남은 세 부족의 땅이 되었기에 그리 부른 것이었다.
물론, 그 세 부족 중 두 부족은 오도리 부족과 후르하 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온(桃溫) 부족으로, 그들 역시도 나하추와 우디거 부족의 압박에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였다.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난 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앞둔 맹특목과 아합출이 기대감에 젖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숨에 그곳으로 말을 달리게 할 수는 없지만, 이번 출정의 끝에는 반드시 일란 할라를 밟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 * *
톡. 톡.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는 몽주의 손끝에서 나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22명의 서규슈 무가의 가독들이 떠난 성주실은 몽주만 있는 건 아님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문득 몽주가 한 장교에게 시선을 주니, 묻지 않아도 신시(申時 : 오후 4시) 가까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더는 없는 건가.”
몽주가 문득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성주실 밖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의 끝에 문이 열리며 등장한 자는, 숨을 헐떡이며 체통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던져 버린 다의홍이었다.
“가쓰라다씨도 승복하였습니다. 후우, 후우.”
급히 보고를 한 뒤 숨을 고르는 다의홍의 모습에 몽주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물이 들어왔군. 하면, 아홉 가문으로 끝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다의홍은 송구한 양 대답하였다.
22곳의 서규슈 무가들 중 몽주의 제안, 즉 사실상 용병으로 고용되는 것을 받아들인 무가는 9곳뿐이었다.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사실이 다의홍은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무리 몽주의 명에 따라 무가를 천시(?)한 탓이라곤 하지만, 서규슈를 다스리는 그로서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협조해 주는군.”
“…….”
하나, 몽주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9곳이면 그의 기대를 월등히 넘어선 숫자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단 한 곳도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겼으니, 앞서 다의홍이 진정 믿을 수 있는 무가는 없다고 한 것을 생각하면 그 예상이 과소한 것도 아니었다.
몽주가 무가들에게 제시한 것은 그 자체만 보면 꽤 너그러운 거래였다.
참여하는 가문마다 은 1관, 즉 4길그람에 가까운 은 혹은 그에 해당하는 현물이나 양곡을 주고, 따로 무사 1인당 은 1근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으니, 만약 22가문의 2천여 명에 이르는 모든 무사들이 응하였다면, 몽주라 해도 일시에 지급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게다가 죽은 자가 있으면 그 몫을 폐기하지 않고 그 속한 가문에 고스란히 보전해 주기로 하였으니, 용병의 계약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천사의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그 스물두 가문의 무사들은 용병이 아니었고,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지배층으로서 행세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대가의 크기와 상관없이 몽주의 제안 자체는 어찌 보면 그들에게 모욕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별로 따를 맘이 없는 외국인 지배자의 모욕적인 제안에 10분의 4 이상이 응하였다면 그게 오히려 신기하다 할 판인 것이다.
“혹시 요새 무가들이 벌이가 신통치 않던가?”
몽주가 집히는 것이 있어 물으니, 다의홍이 확신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서 무가를 경계하라 하셨으니, 저 또한 나랏일에 그들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하면, 아무래도 무가들은 본디 가지고 있던 토지의 소출 외에 특별한 수입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역시 그런가.”
몽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사 계급의 지리멸렬을 바라는 입장이기에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
하나, 지난번 데카이의 화재 사건에 무가들의 배신이 있음을 생각하면, ‘연착륙’시켜야 할 것을 ‘경착륙’시킨 실수를 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생산은 없이 큰 소비만을 행하는 전문 ‘싸움꾼’으로 이루어진 가문들이 소득의 부족으로 곤란했던 것은 분명한 모양이었다.
“가쓰라다 가문이 백오십 인에 이르지?”
몽주가 그의 앞 상 위에 펼쳐진 녹계에 손끝으로 가쓰라다(桂太) 가문을 찾으며 물으니, 몽주가 가쓰라다 가문에 대한 내역을 찾기 전에 다의홍이 답하였다.
“정확히 백사십칠 인입니다.”
서규슈에 속한 무가들 중 세 번째로 규모가 큰 가문이고, 축후국 최대의 무가였다.
가장 많은 무사를 거느린 가문과 그 다음 가문은 모두 비후국에 속해 있으니, 오우치씨에 의해 권세에 가까웠던 주요 무가들이 몰살당한 비전국이나, 전란 중에 외적에게 내응했다가 실패하자 도주한 무가들이 많은 축후국과 달리, 역시나 전란을 겪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여파는 없었던 비후국의 무가들이 상대적으로 전력을 보존한 덕이었다.
물론, 그 두 비후국의 무가들은 몽주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 분위기를 전한 말에 의하면, 그들이 중심이 되어 험한 말로 탐라공을 욕하며 불복하자고 선동에 나섰다고 했다.
그러니, 그런 와중에도 22곳 중 9곳의 무가가 몽주에게 응했다는 건 기대 이상임에 틀림없었다.
“저, 며, 명하신 대로 시행하오리까?”
문득 다의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숨 가쁘게 손수 움직이고, 마음속에 긴장과 당황을 가득 담고 있었던 것은 몽주가 밝힌 하나의 계획 때문이었으니, 그것의 시행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물론.”
몽주가 문득 냉정한 표정으로 간단하게 대답하자, 다의홍이 크게 숨을 고르더니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갈등을 접고 결단을 내린 모습이었다.
“하면, 곧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다의홍.”
“네!”
“너무 걱정 말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따를 따름입니다.”
애써 흔들리는 모습을 감추려 노력하는 다의홍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니, 그가 목례한 후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그의 뒤로 탐라군의 장교 몇몇도 몽주에게 군례를 표하고 따라갔으니, 몽주가 명하고 다의홍이 응한 그 계획이 군사와 관련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어찌 걱정이 되지 않을까. 하나, 훗날에는 오늘의 결단이 최선이었음을 알게 될 걸세.”
문득 중얼거리니, 이미 자리를 떠난 다의홍을 향한 위로의 말이었다.
아직 젊은 그이지만, 그의 피와 뼈 속에 깊이 박힌 무사에 대한 관념을 저버리는 일을 해야 하니, 당장 그 계획을 성공적으로 시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이전에, 그 후에 있을 여파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다의홍과 탐라군 장교 몇몇이 성주실을 떠난 지 한 시진쯤 지나 노을이 질 무렵, 축후성 동편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 * *
“갈 테면 가라, 이 고려의 개놈들아!”
가쓰라다씨의 가주 타카히로(貴宏)는 등 뒤에서 떠들썩한 조롱과 욕설에도 표정은 담담하였다.
가쓰라다의 무인들과 다른 여덟 무가의 가주 및 무인들이 분개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거나, 반대로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것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의 결정에 일절 후회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 남아 있는 저들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으니, 아직도 고려 탐라공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탐라의 규슈 지배가 결코 일시적이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이제는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쓰라다의 무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지금 서규슈를 다스리는 삼국의 슈고 다의홍과 더불어 축후성에서 피땀을 쥐어짜는 수성전을 펼친 바 있었다.
아직도 당시도 가주였던 타카히로는 왜 그때 다른 무가들처럼 다의홍과 탐라를 저버리고 도주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화포의 위력에 감탄하고 신기해서였을까? 아니면, 가문에서 버림 받듯 떨어져나와 살아남고자 발악하는 다의홍에 대한 동정심이었을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으니, 여전히 자기자신에 대한 풀지 못할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하나, 한 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선택이 옳다는 것이었다.
이제 많은 것이 바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탐라의 서규슈 지배를 통해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으니, 비단 군기의 발달 같은 문제를 떠나, 지배층의 자격 자체가 바뀌는 시대라 여겼다.
막부와 국주, 그리고 국인과 무사로 이루어지는 상하의 관계이자, 동시에 만약 힘만 있다면 언제든 하(下)가 상(上)을 범할 수 있는 불안한 구조는 탐라의 지배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석상의 기물에서 비롯된 부, 그리고 그 부를 기반으로 하는 고품질의 군력은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으니, 그런 시대와 그런 시대가 드리운 규슈에 발을 딛고 있는 무사들 역시 그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 가문의 무사들에게도 그에 대해 속을 터놓은 적은 없었다.
그건 무사 정신을 잃은 것이라 비난 받을 여지를 주는 것이며, 그의 가독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가문의 주요 무사들에게 탐라공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그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실된 이유를 뒤로 감추고, 그저 여건을 탓하고, 가문의 경제적 어려움만을 이유로 그들의 굳은 정신을 꺾는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십 년 넘게 가쓰라다 무가를 이끌어온 가독으로서의 권위가 무소용은 아닌 터라, 약간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러, 온갖 욕과 조롱을 받는 중에도 그의 무사들 모두가 그를 따라 무사들의 군진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가쓰라다 가문뿐만 아니라, 여러 이유로 탐라공에게 기탁하기로 마음 먹은 다른 군소 무가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으니, 150에 이르는 많은 무인을 거느리는 데다가, 특히 축후국의 무가들에게는 큰 형뻘인 터라 가쓰라다의 이름에 기대어 다른 무가들의 비난을 견딜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잘 왔소.”
축후성의 동문으로 들어가니, 다의홍이 그의 무사들은 물론, 탐라군 몇몇과 더불어 그들을 맞이했다.
“…….”
하나, 가쓰라다 타카히로를 포함한 800여 무사들 모두가 다의홍의 환대(?)에 화답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느라 바빴다.
성내의 분위기가 출정 직전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그 후끈한 전투 직전의 소란과 흥분을 확인한 타카히로가 다시 다의홍을 보고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싹을 제거하려는 거요.”
“싹?”
“불신과 배신의 싹이지요.”
“……!”
감각적으로 이미 눈치채고 있던 것이지만, 다의홍의 입을 통해 들으니, 더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응하지 않은 무사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입니까?”
끄덕.
다의홍의 고개짓 한 번에 성안으로 들어온 삼국의 무사들이 크게 들썩거렸다.
아무리 생각이 다르고, 선택이 갈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 밖 군진의 무사들 역시 서규슈의 무가이고, 그중에는 서로 왕래하여 친분이 있는 가문도 있었으니,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무, 무모한 짓이오!”
“전쟁이란 본디 무모한 짓이오. 외적과 맞서기에 앞서 내부의 적부터 소탕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니지 않소?”
“하나……!”
가쓰라다 가주가 무어라 반론하려 하였으나, 다의홍이 손을 들어 그의 발언을 멈추었다.
“그대들과 말싸움을 할 이유는 없소. 이미 저들에 대한 처분을 결정되었소. 그리고 그대들이 할 일은 따로 있소.”
“아무리 탐라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이 일에는 동참할 수 없소이다!”
타카히로가 분개함을 표하며 소리치니, 그 뒤의 무사들 역시 시끄럽게 반발의 외침을 터뜨렸다.
“누가 그대들더러 나가서 싸우라 하였소?”
“……?”
타카히로는 당황했고, 똑같은 당황에 시끄럽던 무사들도 조용해졌다.
당연히 그들에게 따로 있다는 임무는 지금 출정하려는 군병들과 더불어 동편 군진에 남아 있는 무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습격에 나서려는 자들을 대략 셈해 보면, 다의홍의 무사 700 정도에 탐라공과 함께 온 탐라군 선발대 1천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동편 군진에 남아 있는 무사들의 수가 1200여이니, 수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동시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기도 했다.
“저들이 어찌 싸울지는 걱정할 필요 없소. 잘되든 아니 되든, 결국 되긴 될 것이니.”
“하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게 무엇이오?”
자연히 묻게 된 그 물음에 다의홍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풀었고, 그의 손에는 두루마리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그 두루마리 녹계가 타카히로에게 건네지니, 그것을 확인한 타카히로는 이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열흘이면 가능하겠소?”
“가능……. 아니, 아직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하면, 하지 않을 것이오?”
“…….”
타카히로는 말문이 막힌 듯 답하지 못했고, 그사이에 그에게 건네진 두루마리 녹계의 내용이 다른 무가의 가독을 시작으로 무사들에게 전해졌다.
다들 반응은 비슷했다. 타카히로가 그러했듯 경악하면서도 절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 제안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오늘 이후 서규슈에는 그대들 여덟 가문만이 무가로 남을 것이고,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면 규슈 전체에서도 여덟 가문만이 남을 것이오. 그게 싫소?”
싫다는 말도 없었다. 다만, 조금 전까지 응하지 않은 무가들을 처단하는 것에 반발하다가, 지금 다른 방식으로 그 무가를 지워 버리는 일에 동참하려니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결정은 가쓰라다 무가보다 다른 군소 무가의 가독들 중에서 먼저 나왔다.
“하겠습니다!”
“우리도 하겠습니다!”
한 자가 앞서니, 그에 뒤질세라 다른 가문들에서도 응하겠노라 소리치는 자들이 생겨났고, 이내 대세가 되었다.
“얼른 결정하시오. 가쓰라다씨가 하지 않겠다 하면, 다시 조정을 해야 하니까.”
그 조정이란, 지금 다의홍의 앞에 있는 무가들에게 배정된 다른 무가에 대한 ‘습격 권한’이었으니, 동편 군진에 있는 무사들이 아니라, 그 무사들의 무가 자체를 약탈하는 것에 대한 조정이었다.
여덟 무가로 열넷의 무가를 약탈해야 하니, 규모에 따라 배정을 해 줘야 빠짐없이 재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겠소.”
“선택 잘하셨소.”
다의홍은 친근 어리되 냉정한 미소를 띤 채 한 마디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후, 다의홍의 수하가 실무(?)에 대해 가독들에게 설명하고 논의하니, 가독들의 눈빛에 탐욕이 가득했다.
배정된 무가에 대한 약탈권. 그것은 토지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약탈 허가였다.
심지어 인명에 대한 것까지.
좋게 말하자면, 한 무가가 다른 무가를 적대적으로 M&A할 수 있는 권한이었으니, ‘백기사’가 되어야 할 무사들이 축후성 동편에 묶여 있고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동안 무주공산 격으로 ‘합병’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그 유혹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 * *
성주실에서 축후성 안의 분위기를 보던 몽주는 실소하였다.
9.5//‘중세 서양의 영주제든, 왜국의 슈고 다이묘든, 본질은 간단해요. 조폭. 딱 조폭이에요. 그중 시다바리급 조폭조직이 나이트고 사무라이인 거죠. 정의? 기사도? 무사 정신? 뭐, 진짜 그에 목맨 자들도 있기야 하겠죠. 돈키호테 같은 놈들…… 근데 자기 나와바리의 안전과 확장 앞에서 대개는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확실한 이득이면, 자기 보스나 동료의 등에도 칼을 꽂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조폭이라는 거죠.’//
문득 그의 귀에 포장마차에서 들었던 재상의 목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그저 우스개라 여기고 웃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좀 더 당대의 현실에 주목하기로 한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적응할 현실은 적응하고, 정말 아니다 싶은 현실은 깨부수어야 했다.
언제라도 외적에 내응하여 소란을 피울 수 있는 구태(舊態)의 무사들은 깨부숴야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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