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2)
* * *
방 안에 두 사내아이의 낭랑한 목소리들이 오가고 있는 중에 강영은 조금 떨어져 흔들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미쳤어. 또 미친 아이가 있었어.’
강영은 ‘그로기’ 상태였다. 그녀와는 다른 차원에 사는 자가 있음을 그의 삼촌을 통해 알고는 있었으나, 종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삼촌’이 등장하니, 세상이 참 허무했던 것이다.
그녀로서는 저 두 어린 것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삼촌 하나였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건만, 어쩌자고 저 종성이라는 아이까지 삼촌과 같은 ‘유형’의 아이란 말인가.
처음 포은 아저씨의 아들이라며 왔을 때는 같이 술래잡기할 친구가 하나 생겼다고 좋아했건만, 그저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고 기뻐했건만, 정작 종성은 삼촌과 찰싹 붙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렸으니, 강영은 같이 어울리고자 하여도, 오가는 어려운 이야기에 그저 정신이 혼미할 따름이었다.
억지로 끼어들고자 모르는 이야기마다 물음을 던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삼촌이나 종성이 기꺼이 대답을 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그 대답 안에서도 그녀가 물어야 할 것이 산더미였으니, 그녀 스스로 지치고 말았다.
강영은 멍한 표정으로 흔들의자에 흔들흔들 드러누워 있다가 문득 멍한 표정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종성과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삼촌이 그제야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디 가니? 이리 와서 차 한 잔 더 하지.”
삼촌이 말을 하니, 어린 종성이 그러라는 양 아까 강영이 마시던 찻잔에 차를 따르려 하였다.
그 모습마저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기품이 느껴졌다.
“징그러…….”
“응? 무어라 했느냐?”
물론, 강영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삼촌이 자신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다시 묻는 것을 모른 척한 그녀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안채였으니, 그곳에 어머니와 종성의 어머니 이씨가 있었다.
앵도 역시 차를 마시며 이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온 딸아이에게 무심코 시선을 주다가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말을 건넸다.
“왜 그리 시무룩하느냐?”
“…….”
강영은 딱히 대답없이 터덜터덜 걸어와 어머니 앵도에게 안겼다.
“무슨 일 있었니?”
이씨 부인도 물었지만, 강영은 어머니의 제법 부푼 배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동생은 평범했으면 좋겠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냐?”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요.”
그녀의 시무룩한 대답에 두 부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나누었다.
그러다 앵도는 문득 강영이가 몽건 도령과 함께 있다가 온 것임을 깨닫고는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이 또 어려운 말을 하였나 보구나.”
앵도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해, 이씨 부인도 그에 관심을 보였다.
하여 앵도가 그녀에게 몽건 도령이 남다른 머리를 타고 났음에 대해 말해 주었다.
“호호, 아가씨께서 몽건 도련님 때문에 위축이 크신 모양이군요. 너무 괘념치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잘하고 못하는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럼, 너도 도련님보다 싸움은 잘하지 않느냐.”
“…….”
앵도가 그러면서 이씨 부인에게 자기를 닮아 무예에 능할 거라면서 강영의 칭찬을 하였다.
지체 높은 부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식의 체력과 민첩성을 자랑하는 어미의 모습이었지만, 이씨 부인도 생김새부터 사나운 대공부인이 무인이었음을 들어 알기에, 당황하지 않고 감탄을 늘어놓았다.
강영에게도 그 재능에 대해 좋겠다며 부러워하였다.
“우리 종성이도 아가씨처럼 활기찼으면 좋겠네요. 아니, 무어라도 잘하는 게 있어 서방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따름이에요.”
“…….”
‘에효…….’
잠자코 이씨 부인의 말을 듣던 강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댁의 아드님도 만만치 않거든요!’
* * *
강영이가 답답함에 속으로 울부짖고 있을 때, 그녀를 답답하게 만든 두 사내아이들은 여전히 담소에 여념이 없었다.
“하여, 형님 저하께서는 외교의 방안으로써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걷고 계시는 거야. 하나는 교역으로서 탐라와 고려의 국력과 영향력을 키우시는 것으로, 잠재된 적이 그 적의를 드러내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된 군기와 철저히 숙련된 군병을 조련하는 것으로 명백한 적을 일소하시려는 것이지.”
몽건의 말에 종성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말하였다.
“그것은 실상 두 가지 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길이 아니겠어요? 탐라의 국력을 성장시켰기에 군기를 발달시키고, 군병을 정예화할 수 있었을 것이며, 탐라의 군력이 강한 만큼 그 군력이 투사된 곳에서는 탐라의 교역 또한 수월할 수 있을 거예요.”
조그만 입술 사이로 나온 의견에 몽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과연 틀림이 없구나. 그나저나 너도 많이 혼란스러웠겠어. 내가 상식이 넓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 탐라의 모습과 포은 선생의 익힘이 많은 면에서 다르다 들었는데, 포은 선생께서 몇 년 사이에 기존의 익힌 것을 깨뜨리면서까지 형님 저하를 따르고 계시니, 너 또한 포은 선생께서 남기신 것을 익혀 온 만큼 그 변한 모든 것에 당황스러울 테지.”
“사실 그런 면이 없진 않아요. 하지만, 저는 아직 어리고 배움이 짧으니, 제 아버님께서 변하신 면모와 그 변함의 이유 또한 장차 제가 익혀야 할 것이라 믿어요. 그 모든 것을 섭렵한 후라면 저 또한 저만의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하하, 과연 동생은 남다른 것 같아. 그런 포용력을 나도 배우고 싶군.”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저야말로 형을 보고서야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는 걸 느끼고 있는걸요.”
누군가에는 징그러운 모습이었지만, 두 사내아이들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이 크게 기쁜 중이었다.
“한데, 이번 왜국에서의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요?”
“죽고 상하는 자들이 없을 수가 없겠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니, 우울한 모양이구나.”
몽건이 시무룩한 종성의 표정을 보곤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더 어릴 적에는 너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 한데 말이야. 권력이라는 건 대화와 타의(妥議)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더라. 출해교역소에 불을 지르고, 아마미 섬을 습격한 왜국의 귀한 자들도 우리 탐라와 교류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이익이고, 자기 것들 보존하는 최선의 화평책임을 모르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일을 저질렀지. 그게 아마 권력이라는 놈의 이해할 수 없는 생리일 거야. 마찬가지로 형님 저하도 일을 당한 마당에 끝까지 말로써 뒷마무리를 하긴 어려우셨겠지. 얻어맞아도 먼저 화해를 청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칭찬할 수는 있어도, 나라는 보살일 수 없겠지. 그리고 권력 중에서도 나라를 지키고 보살피는 국권을 가지신 형님 저하께는 그게 최선일 리도 없을 것이야.”
“세상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이치에 따라 성품을 연마하고, 마찬가지로 나라와 권력 또한 성리의 길을 좆는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터인데요. 정말 권력이란 것은 그것을 쥐면 모두 괴물이 되는 것인가요?”
종성의 말에 담긴 유자적 기질을 엿본 몽건은 미소를 띠며 말하였다.
“고사에도 요임금이 신하 소부에게 다음번 천하를 다스리라 하자, 이를 거절하고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씼었다고 하였고, 소부가 귀를 씻는 걸 본 친우 허유가 그 까닭을 물어 답해 주자 허부 또한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은 물을 말에게 먹일 수 없다 하여 상류로 올라갔다고 하지.”
“영천세이(潁川洗耳)의 고사로군요. 전에 들었을 때, 정말 소부와 허유 모두 고고한 성품을 가졌다고 생각했었어요. 천자의 자리마저 거부할 수 있으니, 그 성품이 하늘에 닿은 것이니까요. 오늘에도 치자가 마땅히 본 받아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글쎄, 나는 달리 생각하는데. 요임금이 아무에게나 천하를 맡기려 하진 않았을 것이니, 소부가 진정 천하를 위한다면 마땅히 그 노고를 감당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하늘 높다 하더라도 결국 두 다리는 땅을 딛고 있는 거잖아.”
몽건의 말에 종성이, 너무 어려 주름조차 지지 않는 얼굴에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말하였다.
“결국 치자(治者)라면 땅 위의 더러움조차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군요.”
“난 그렇게 생각해. 내 형님 저하가 그런 길을 걷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내 형님이라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저하는 이 와중에도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실 거야. 가장 낮은 이부터 가장 높은 이까지 사람답게 대하고자 하시는 분이니까.”
“역시 어려워요. 전 그냥 인과 덕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세상이라면 낙원이라 하겠지. 그런 낙원을 위해서라도 더러운 걸 치워야 하고, 그러면 더러운 것에 손을 대야 할 것이고.”
* * *
푹!
“크어…….”
탐라군병의 창끝에 목이 꿰뚫린 서규슈의 무사가 비명이라기보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곤 이내 절명하였다.
심각한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에 젖은 상태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던 그 무사가 ‘확인 시살’에 죽은 것처럼, 본디 서규슈 무가의 군진이 있던 축후성 동편의 야지에는 시체들로 가득했다.
동쪽 성벽 위에서 잔인한 대지를 바라보던 몽주의 곁에 다의홍이 다가왔다.
“대략 일백 정도가 살아서 도주한 듯합니다.”
“그래? 생각보다 적군.”
“아무래도 저들이 방심한 탓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도 하겠지.”
“도주한 자들은 끝까지 추격하겠습니다.”
“추격하되, 풍후국(분고국)으로 넘어간 자들은 굳이 침범하여 쫓을 필요는 없네.”
어차피 키쿠치씨의 풍후국도 이번 전쟁의 주요 목표였으니, 풍후국으로 도주에 성공한다 한들 잡히는 시간만 늦출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시체들은 한 곳에 모아 묻되, 간략하나마 장사를 치러 주고 석비도 하나 세워 주게. 망시라는 글자를 새긴 석비 말이야.”
“……알겠습니다.”
망시(亡侍).
시(侍)는 일본 무사를 의미하니 곧 죽은 무사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단지 서규슈 무사들이 죽어 묻혔음을 뜻한 것을 넘어, 무사 계급이 망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음을 다의홍은 감지할 수 있었다.
정말 무사는 사라지는가. 왜국은 아닐지라도 서규슈에서는, 규슈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인가.
오늘 동편 야지에서 죽은 무사들 외에 선택을 잘해서 죽음 대신 일확천금을 얻은 무가들이 있긴 하지만, 다의홍은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이후로 서규슈에서 무가는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선택을 잘못한 무가들의 재산을 털어 낸 아홉 무가들은 당장 흥성할지 몰라도, 소출을 얻을 토지의 증가도 없는 중에 그저 가진 것을 소비만 하는 그들이기에 이내 다시 돈줄에 목이 마를 것이고, 용병의 처지를 받아들이거나, 그마저 없다면 마지막 발악을 하든 말든 결국 지리멸렬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다의홍은 왠지 모르게 아련한 마음마저 품게 되었다.
“이보게, 다의홍.”
“예, 예?”
감상에 젖어 있던 다의홍은 그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탐라공에게 서둘러 답하였다.
“자네는 무사가 아니네, 이미.”
“…….”
“나는 왜국의 무사를 수하로 둔 적이 없단 말이야.”
그건 마치 다의홍의 흔들리는 감상을 알아챈 듯한 말이었다.
다의홍이 무사 가문인 오우치씨에서 비롯되었고, 나서 성장하길 무사였던 만큼 무사에게, 심지어 낭인에게조차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너는 무사가 아니니 무사의 몰락에 가슴 아파하지 말 것이며, 만약 계속 그러하다면 수하로 둘 수 없다는 경고나 다름없다고 할까.
“제 길은 주군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다의홍은 얼른 어지럽던 마음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올렸다.
그건 비단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탐라공의 손에 달렸음을 알고 승복한 것 이전에 감상에 젖은 것과 달리, 무사가 쓰여야 할 전장에서 정작 무사가 필요 없어졌음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편 군진에서 있었던 일이자, 지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처참한 광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는 무사들의 안이함 때문이기도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탐라공의 제안을 거부한 무사들은 마치 전투에서 승리라도 한 것처럼, 마치 서규슈에서 따로 독립이라도 한 것처럼, 저녁상 겸 술자리를 펼쳐 놓고 자기들끼리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 덕에 북문과 남문으로 빠져나간 탐라군과 축후군은 아주 수월하게 북남으로 그들을 포위하였다.
무사들은 그 포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포위망이라는 것이 무사들의 상식과는 달리 상당히 먼 거리에서 이루어진 탓이었고, 그건 탐라군이 그만큼 먼 거리에서도 위력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개복포라 불리는 작은 포에서 포성이 터질 때까지도 무사들은 술과 음식 그리고 탐라공과 다의홍을 향한 조롱과 욕설을 탐닉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무척 컸다.
수십 문의 포가 각각 첫 방포를 하였을 때, 이미 무사들은 전의를 상실했을 정도였으니, 제대로 반격하려는 자들은 볼 수 없었다.
아니, 설령 있었다 한들, 2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탐라군과 축후군을 알아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몇 번의 방포가 있은 후에 포위망이 좁혀지니, 탐라군과 축후군이 할 것이라고는, 폭발과 포성에 정신이 나가 경기를 일으키는 무사들을 베어 버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살아남은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생애 마지막 호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놓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은 동편 산지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부러 길을 터준 것으로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모조리 몰살하고자 했어도 큰 탈은 없었을 것 같았다.
물론,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탐라군과 축후군 중 누구도 죽지 않고, 다친 자들도 한 손에 셀 정도로 적었다.
그러니까 1,200여 무사들을 상대로, 아무리 그들이 방심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거의 전멸시키는 동안 아군은 피해가 전무하다는 말이었다.
무사들이 공격을 예감하고 임전 상태였다면 달랐을까?
다의홍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무사가 2리를 전력으로 달리는 동안, 아니 말이 있어 급히 승마하여 달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의 방포를 추가로 받았어야 할 것이고, 화살 세례도 몇 번은 감수해야 할 것이니, 그 화를 모두 피하고 닿을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그런 상태라면, 이미 수적으로 우세한 아군은 아마도 네댓 명으로 한 무사를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피해는 극미했을 것이다.
값비싸게 무장하여 일생을 바쳐 무예를 연마하고, 숱한 싸움을 경험한 무사가 그런 꼴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니,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하나의 의심이 우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진정 무사가 필요한가.
“오우치 요시히로는 무사였으나, 다의홍은 무사가 아닙니다.”
다의홍의 답에 그의 주군이 웃었다.
* * *
“이거 막상 해 보니, 민망하군.”
몽주가 실소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단단한 자세로 서 있던 아홉 사내들의 표정도 조금 풀렸다.
몽주가 쑥스러워한 부분은 어사들에게 나눠 준 표식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으니, 예전에 영화에서 본 걸 떠올려 주철을 조각내어 나눠 주고, 그것을 도로 맞춰 봄으로써 신원을 확인하려 하였던 것이다.
한데, 막상 실제로 해 보니, 영 이상했다.
얼굴을 완전히 감추고 정말 비밀리에 움직이는 진짜 비밀 요원도 아니고, 어차피 대략의 신원과 인상착의도 알고 있고, 또 고려말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미 탐라군 소속임을 아는 중에 표식을 맞추고 있자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자네들의 활약상은 장계를 통해 이미 짐작하고 있네. 어려운 중에도 잘해 주었어.”
“감사합니다!”
“혹시 장계에 쓴 것 외에 추가로 알아본 게 있나?”
몽주가 물은 것은 그에게 전해진 장계의 시점이 삼사 일 전이라, 그사이에 더해진 정보가 있는지였다.
그러자 한 자가 손을 들었다. 비전국에서 활동했던 선구라는 자였다.
“장계에 의심스럽지만 아직 증좌가 없다고 했던 다나카씨를 조금 더 캐 보았는데, 오히려 악질적으로 배신행위를 한 것 같습니다.”
“악질적으로?”
“네, 그가 한 일이 탐라와 서규슈를 배신하는 짓임을 알고도 저지른 것 같습니다.”
비전국의 다나카씨는 본디 토박이 토호였는데, 데카이를 통한 장사가 큰 이문을 내는 것을 보고는 전답을 팔아 뒤늦게 장사에 뛰어든 가문이었다.
하나, 그 가문이 소작인들을 악랄하게 착취하고, 주변 농민들에게 행패를 부린 탓에 데카이에서 거래를 거부당했고, 그로 인해 재산상 손실을 입었다.
하여, 평소 탐라공과 다의홍을 욕하고 다니는 일이 잦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고, 팔아치웠던 토지를 다시 사들였다고 했다.
그게 수상한 것은 데카이 덕에 서규슈에 흘러다니는 금은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물가도 오르고, 땅값도 올랐으니, 그가 팔았을 때보다 값이 상당히 오른 토지를 도로 사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인데도 별 잡음없이 사들였기 때문이다.
“다나카씨의 마름 녀석이 투전판에 왔길래 돈을 조금 잃어 주면서 친해져 알아낸 겁니다. 녀석이 말하길, 다나카씨 내에 정체 모를 자들이 근자에 많이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자네, 혹시 투전에 다시 재미를 붙인 겐가?”
“아, 아닙니다! 엄연히 임무 때문에…….”
선구라는 자의 ‘이력서’에 적힌 걸 몽주는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는 본디 노름꾼이었다.
몽주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두었으니, 오른손 검지가 반쯤 잘려 있었다.
과거 돈을 크게 잃는 바람에 그의 뒤에 있던 왈짜패에게 보복으로 당한 탓이라 하였다.
“자네 이력 탓에 어사로 뽑히긴 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신임을 얻기 어려웠으니, 만약 다시 노름에 빠진다면 그때는 단지 어사직에서 면하는 정도의 벌만 받지는 않을 것이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선구가 자기 장기를 자랑 삼아 보고했다가 괜히 핀잔만 듣자 다른 어사들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나, 정보를 구한 것 자체는 잘했네. 어떤 장기든 제대로 쓴다면 다 쓸 만한 것이지. 전국시대 맹상군 또한 닭 울음소리를 내는 자와 개도둑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였다지 않은가. 물론, 닭 울음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내거나, 개도둑이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아무 개나 훔쳐 내면 아니 되겠지만 말이야.”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를 들어, 선구에게 병 주고 약 준 몽주는 어사들에게 명하였다.
“이틀 후에 탁 장군이 후발대를 이끌고 오면, 이곳 군병 사정에 여유가 생길 것이니, 그때 세작과 배신자들을 처단할 것이다. 너희는 그 전에 그들을 잡아들일 방법과 그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것이니, 지금껏 알아낸 세작과 악질적인 배신자들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 모든 세작들을 알아낸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일단 그들이라도 잡아내야 다른 자들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서규슈를 흔드는 세작들은 왜국에서 비롯된 것이니, 전쟁으로 왜국이 꺾이면 세작들도 활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국이 몸이고 세작은 손발이라 할 수 있으니, 몽뚱이를 박살 내면 어찌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몽주가 어사들을 만난 그날 밤 자정쯤에 왜국을 꺾기 위해 중요한 자들이 몽주를 찾았다.
어사 동채와 함께 은밀히 등장한 그들은 노지마 무라카미의 수장 미야코와 그녀의 의붓딸이자 고려 출신인 묘자라는 두 여인이었다.
이미 동채를 통해 노지마 무라카미와 손을 잡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몽주와 직접 만나기를 청하였기에 허락한 것이다.
그들이 몽주를 만나기를 청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계약 사항’의 조절이었지만, 막상 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논의할 게 없었다.
“그저 탐라공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이라 하십니다.”
묘자라는, 몽주의 눈에도 나름 어여뻐보이는 여인이 미야코의 말을 전하니, 몽주는 실소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내가 묻지.”
“말씀하십시오.”
“너희가 어사를 통해 전한 바를 듣자니, 상당히 냉혹한 계책을 내놓았더군. 정말 그대로 시행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같이 무라카미라는 성을 쓴다 해도 다른 자들일 뿐입니다.”
묘자는 미야코에게 말을 전하지도 않고 곧바로 답하였다.
“아니, 내 말은 다른 무라카미를 치는 것을 두고 한 게 아니라, 너희의 계획대로라면 너희의 피해도 그만큼 클 것이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어차피 곧바로 탐라공께서 호응해 주실 것 아닙니까? 그사이에 약간의 피해는 있겠지만, 각오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수군이라 불리는 내해의 해적 집단 전체가 대략 5천 안팎이라는 보고가 있었고, 무라카미의 세 집단의 규모가 다 비슷하다 하니, 노지마 무라카미는 한시적으로나마 그 두 배의 적과 싸워야 한다. 아니, 무라카미가 아닌 왜국 국주의 수군도 있을 터이니,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일 수도 있다.
“탐라공.”
문득 묘자가 담담히 몽주를 불렀다.
“저희는 저희의 운명을 걸고 탐라공을 선택한 것입니다. 탐라공이 실패하신다면, 저희는 살아남아도 살아남은 게 아닐 것입니다.”
“좋다. 너희를 한번 믿어 보마. 계획대로 실행된다면 우리군이 크게 힘을 얻을 것이니, 그리된다면 너희는 너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중히 쓰일 것이고, 높이 대우받을 것이다.”
묘자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아직은 완전히 믿기 힘든 웃음이었지만, 어차피 그들을 믿을 수 있을지 아닌지를 사전에 포착할 수 있을 테니, 그때 그 믿음을 평가하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물러나 세토 내해에 들어가는 대신 외해에서 치고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왜국은 어디든 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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