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4)
* * *
유목 민족의 전투력이 특별히 강한 것은 당연히 기마 자체 덕분이다.
기마를 이용한 충돌이든 궁술이든 보군이 대항하기에는 무척이나 힘드니까.
하나, 말이라는 동물을 유목 민족만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님에도 유목 민족의 기마병이 특별히 강한 것은 말이 곧 그들의 생활이고, 문화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유목 민족은, 특히 전사들은 말과 함께 무엇이든 했다.
밥도 말 위에서 먹고, 잠도 말 위에서 자며,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달리며 여인을 품은 적도 있다고 자랑하는 자마저 있을 정도였다.
기마가 곧 생활인 것은 전투에서 기마 유목 민족만의 전투력으로 드러난다.
말을 손발 부리듯하니, 소위 기마로서 보군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기마병종을 운영함에 있어, 보군의 뒷받침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사실 기마병이 강하다는 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만, 소위 문명국에서 기마병을 운용하는 비중은 의외로 상당히 낮았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기마 부대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유는 기마병이 가진 한계였다.
고대 이후, 전술의 발달과 함께 대단위 전투에서 기마의 기능은 중심에서 맞부딪치는 것이 아닌 기동력을 이용한 측면 공격에 집중되어 있었다.
애초에 진형의 구성 또한 기마를 측면, 혹은 후미에 배치하여 보군 간의 접전이 펼쳐진 후에 기회를 노려 적의 측면을 노리게 되어 있다.
적의 방어가 약한 측면에 대한 기습.
그것은 통하기만 한다면 승기를 단번에 잡아 쥘 수도 있는 전략이었다.
하나, 오직 측방 기동(flanking action)의 이점을 얻기 위해, 측면 공격에서 큰 승리를 얻기 위해 대단위 기마를 운영하는 것은 성능 대비 비용 면에서 무리였다.
전술적으로 충분한 보군의 뒷받침을 얻지 못하면, 기마는 의외로 손쉽게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마의 측방 행동 자체가 보군에 의해 전장의 중심이 고착된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단지 보군 1인과 기마 1기의 싸움이라면 당연히 기마 1기의 압도적인 우위일 것이나, 대부대 간의 전투에서 움직임이 제약될 상황을 보군이 막아 주지 않는다면, 난전에 휘말린 기마는 오히려 좋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시대에서 다른 그 어떤 곳보다도 풍족한 중국조차도 기마는 보군에 비해 극소수만을 운영할 뿐이었다.
한데, 유목 민족들의 기마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부족 전사들은 난전 상황을 보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고, 심지어는 난전에서 기마로 싸우는 것에도 능했다.
“아름답군…….”
호인과 기마, 그리고 기마를 이용한 싸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던 허호필은 사나운 투성(鬪聲)이 가득한 중에도 눈을 크게 뜨고 전장을 직시하다 문득 입 밖으로 감상을 흘렸다.
기마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들이 모여 만드는 들판 위의 물결은 실로 아름다웠다.
비단 아군인 주션족 호인들의 기마술뿐만 아니라, 성난 화포의 무수한 타격과 폭죽이 달렸든 아니든 숱하게 쏟아진 화살 세례에 당하고도 살아남은 우디거의 전사들 또한 그 기마술만큼은 전투를 지켜보는 이의 눈을 호강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주군께서 맞붙어 싸우는 건 저들에게 맡기라 하신 겐가.”
녹둔도에서 탐라공이 그를 소령에 임하고, 북방 진군의 임무를 내리면서 명하셨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저 자비로운 주군께서 탐라의 군병들이 상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명이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주션족 기마 전사들은 고려나 명국의 기마병들과 달리 차라리 보군이 없는 게 더 나았다.
보군이 뒤를 받친다고 끼어들어 봐야 오히려 움직임만 방해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흔히 알려진 기마병의 한계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허 사령관, 저희는 이대로 그냥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문득 한 장교가 물어 오니, 허 소령 또한 뭐라도 할 게 있는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할 게 없었다.
전투가 끝이 나기라도 해야 정리하는 일이라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호인들의 기마술이 이 정도나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무리 개개의 전사들이 말을 다루는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전장에서 싸우는 건 개개의 병사가 아닌 부대인 만큼, 꿰지 못한 구슬 더미 같을 수도 있다 여겼건만, 큰 착각이었습니다.”
당장 크게 할 일이 없자 담당한 포대들에서 물러난 장교들이 허 소령 주변에 하나둘씩 모여 앞서 펼쳐진 전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분명 제각각이었지만, 그들로 이뤄진 덩어리는 흐트러짐이 없었소. 작게 보면, 자유분방함이 과하나, 크게 보면 규율을 갖추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오.”
“맞습니다. 그간 호인들에 대해, 저 전사들에 대해 생각해 왔던 것들이, 이번 싸움을 보고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막무가내로 난폭한 자들이라고만 여겼는데, 저들 또한 각각이 무장이고 군인이었습니다.”
전황에 대한 감상이 몇 마디 오가면서, 서서히 작은 부분에 대해서도 소감을 내놓는 자들이 생겼다.
“나는 기마로 그처럼 자연스럽게 횡보(橫步)를 할 수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 측사로 적을 공격하고,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양 좌우의 간격과 줄을 맞추니, 저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자유롭게 횡보함에도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말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으니, 그것도 가능한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호인들이 말과 대화라도 할 줄 아는 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거세하지 않은 수말을 저처럼 얌전하게 부리는 게 가능한 것입니까? 아니, 그 전에 귀를 멀게 하지도 않았음에도 방포음에 말들이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허허…….”
암만 그래도 정말 말과 대화를 하는 능력이 있기야 할까. 하나, 그런 능력이라도 있다고 해야 가능할 법한 일들을 지금 호인들이 보여 주고 있었으니, 웃으면서도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우디거 부족의 기마들은 아군의 포성과 포탄의 폭음에 놀라 경기를 부렸으니, 아마 주션족의 호인들이 따로 방책을 마련한 듯합니다. 다 같이 말을 자유로이 부리는 호인들이지만, 우리 탐라군이 포를 가지고 있고, 능히 쓸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들과 아닌 자들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던 게지요.”
어느 장교의 합리적인 분석을 하며 화포를 언급하자, 허 소령은 문득 장교들을 향해 칭찬의 말을 전하였다.
“다들 방포하느라 수고했네. 두 부족장이 꽤 앞서 나갔음에도 주션족들을 상하지 않게 한 것은 훌륭한 일이었네.”
“그간 얼마나 훈련을 하였는데, 수백 미나 떨어져 있는 아군을 친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적병을 죽인 수를 따져 보면, 우리가 호인들보다 많으면 많지,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하, 그건 또 그렇습니다.”
아직 2길 너머에서는 호인들이 생사를 다투고 있음에도 탐라군의 분위기는 전후의 평온을 넘어 전승연에 가까웠다.
방심하지 말라 한마디 해야 할 법도 하지만, 허 소령은 이미 호인들 간의 기마전 또한 이미 주션족의 승리로 크게 기운 것을 확인하였기에 내버려 두었다.
대신, 고개를 돌려 근처 투먼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류 너머로 얼핏 보이는 몇몇의 기마를 바라보았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보였던 자들이니, 탐라 연합군이 우디거에 대항하기 위해 북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따라붙은 자들임이 틀림없었다.
진군 중에 만난 부족들이 보낸 자들은 물론, 소문을 듣고 따라온 자들까지.
그 수가 반쯤 줄어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으니, 이미 결과가 정해졌다 여겨 급하게 부족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갔음이 분명했다.
“저들이 눈덩이를 불려 줄 테지…….”
저들은 이번 전투를 어찌 보았을까.
작은 분지의 남과 북 양단에 3길쯤의 거리를 두고 마주한 두 군을 보며 전투의 결과를 어찌 예상했을까.
주션족이 고작 2천여의 기마로 1길이나 앞서 나아가 횡으로 진열을 갖추고, 마치 우디거의 공격을 도발이라도 하였을 때는 혹시 만용이라 비웃지는 않았을까.
4천이 넘는 우디거의 기마들이 고성과 환호를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결과를 본 것처럼 여기고 고개를 돌리진 않았을까.
도발처럼 앞섰던 주션족 호인들이 횡보로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이자, 동시에 탐라군이 화포와 개복포로 주션족 너머로 달려오는 우디거의 기마를 타격하기 시작했을 때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포탄에 직격당하고, 땅에 떨어진 포탄이 다시 터져 주변의 우디거 기마를 아작 내는 중에 주션의 기마들이 흐트러짐 없이 횡보로 후퇴하며 가까이 접근한 우디거의 기마를 향해 측사하는 것을 목도하였을 때, 저들은 감탄하였을까.
아니, 적어도 후퇴하던 주션의 기마들이 뚜렷한 신호도 없이 탐라 군진의 100미 앞에서 좌우로 갈라져 자연스레 측방 기동으로 혼란에 빠진 우디거의 기마를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분명 감탄했을 것이다.
그 움직임 자체는 호인들 모두의 것이라지만, 화포와 어우러져 보다 막강해졌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허 소령은 크게 호흡하여 가슴을 크게 키웠다. 뿌듯함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사령관, 주션의 전사들이 회군하고 있습니다.”
허호필이 고개를 돌려 전장을 보니, 군진이 낮은 언덕 위에 있는 덕에 분지 중심부에 2열의 대형을 지어 돌아오는 주션족 전사들을 볼 수 있었다.
맹특목과 아합출이 앞서고, 그 뒤로 오도리와 후르하 부족의 전사들이 합류하여 따르니, 그들이 말을 모는 대지의 사방에 적 기마와 적병의 시체가 가득한 탓인지, 마치 염라의 수하처럼 보였다.
* * *
쿠구궁!
굉음에 모두들 바짝 긴장했다. 심지어 몽주도 체면 불고하고 근처 건물 벽에 바짝 기대어 지붕 아래로 몸을 숨겼다.
솔직히 무서웠다.
그 굉음이 포성이었다면 안 그랬겠지만, 자연이 만든 소음은 ‘데시벨’과는 무관하게 본능적인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주군…….”
탁기가 몽주를 부르니, 그의 시선에는 체통을 지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자신들이 침입한 것을 두고 왜국의 산신(山神)이 노하셨다며 군병들 사이에 두려움이 퍼지고 있는데, 탐라공마저 무서워하는 것을 보이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걸 어쩌랴.
산신이 노하니 마니 하는 말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지만, 몽주 또한 화산을 경험해 본 적 없는 한국인일 뿐이었다.
그래도 탁기의 핀잔 어린 시선을 받고 나니, 몽주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굽었던 허리를 애써 펴고는 크게 심호흡하였다.
한데, 심호흡 중에도 뭔가 공기 중에 먼지가 가득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그 찝찝한 기분으로, 몇 걸음 나와 건물 사이로 비치는 화산섬 사쿠라지마(櫻島)를 바라보았다.
“앵 자가 들어가면 다 저렇게 사나운가…….”
사쿠라지마를 노려보며 중얼거리니, 아내 앵도와 같은 앵두나무 앵 자를 쓴 탓이었다.
규슈에 화산이 몇 곳 있고, 그중 이곳 가고시마 만 안의 사쿠라지마 화산은 분화를 멈추지 않은 곳임을 알고 있긴 했다.
하여, 일찌감치 모락모락 김과 먼지를 피어오르는 그 화산에 대해 군병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기 위해 그저 김만 뿜을 뿐 절대 안 터진다고 강조했는데…… 젠장, 터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안 터졌다.
정말 화산이 터졌다는 표현을 쓸 정도라면 몽주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지금 있는 곳과 사쿠라지마 화산섬 사이의 거리는 3길이 채 안 될 정도이니, 용암이 분출되고, 지진과 함께 화산재가 용솟음치는 폭발이 있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흔히 있는 작은 수준의 분화일 뿐이고, ‘숨 쉬는 중에 잠시 트림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터질 것 같았으면, 지금 사츠마성 안에 있는 자들도, 수성이고 나발이고, 당장 뛰어나와 도망치지 않았을까.
현대의 사쿠라지마는 연륙되었으니, 20세기 초에 크게 분출하여 오스미 쪽과 붙어 버렸다.
때문에 이름에 ‘섬’이라는 의미가 붙은 것과 달리, 현대에는 화산섬이 아닌 화산으로 불리고 있었고, 반대로 이곳에선 아직 섬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사쿠라지마 화산을 잠시 노려보던 몽주는 몸을 돌려 군병들을 향해, 특히 그중에서도 아까 몽주처럼 주변 건물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는 탐라군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고려 본토 출신은 물론, 탐라의 두무악(한라산) 또한 화산이지만, 이미 죽은 사화산인 만큼 탐라 출신의 탐라의 군병들 또한 처음 보는 화산의 굉음에 기겁한 중이었다.
“두려운가!”
문득 몽주가 소리치니, 화산 쪽을 향해 힐끔힐끔 시선을 주고 있던 군병들이 일제히 몽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렵나!”
다시 물으니, 몇 곳에서 아니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대부분은 무언으로 긍정하고 있었다.
“나도 두렵다! 그러니, 서둘러 저 성을 무너뜨리고 얼른 다른 곳으로 가자!”
“…….”
몽주의 솔직한(?) 고백에 잠시 군병들 사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싫으냐! 하면, 여기서 몇 날 며칠이고 계속 머물고 싶은 게냐!”
“아닙니다!”
“하면, 뭣들 하느냐! 서둘러 방포를 재개하라!”
몽주의 재촉을 받은 군병들이 다시 개복포를 쏘기 시작하니, 화산에서 들려오는 우르릉거리는 소리도 연이은 포성에 묻히기 시작했다.
해안의 경함선에서도 얼마 후부터 다시 방포가 시작되었으니, 사쿠라지마의 ‘트림’ 때문에 잠시 멈췄던 사츠마성을 향한 포탄 세례가 다시 이어졌다.
몽주는 팔짱을 낀 채, 탁기와 함께 늠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다만, 그의 입술 사이로 탁기도 잘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터지지 마라. 진짜 터지지 마라. 아, 제발…….”
* * *
다행히 사쿠라지마 화산은 ‘구토’까지 하진 않았다. 물론, 트림을 며칠 동안이나 했으니, 다시 본래의 먼지만 폴폴 내는 착한 화산으로 돌아간 건 직접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그 며칠 안에 사츠마성을 함락했다는 뜻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만 하루도 안 되어, 사츠마성의 성문이 숱한 포격에 결국 뜯겨 나가자, 곧바로 성벽 위에 백기가 올랐다.
“이럴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좀 당한 느낌입니다. 소비한 포탄이 아까울 지경입니다.”
“당한 건 아니지. 어쨌든 사츠마성은 떨어졌고, 이는 곧 사츠마 국이 우리에게 점령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입성하여 성 안을 살핀 탁기의 소감에 대한 몽주의 대답이었다. 사츠마성을 함락시켰다고 사츠마 국을 정복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시마즈씨가 물러난 건 맞지 않는가.
고각으로 쏜 개폭포의 포탄에 성안 곳곳마다 흉하게 포탄이 터진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천추각은 이미 반파되고, 그나마 나머지도 불에 타 버린 상태였으며, 철문은 진짜 철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흉하게 구겨져서 떨어져 나가 있었다.
다만, 인명 피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피해를 입을 만한 인간들, 즉 왜군들이 별로 없었다.
항복한 자들과 죽거나 다친 자들까지 다 합하여도 300여에 불과했으니, 성벽 위에 다섯 문 정도 있는 멍텅구리 화포를 운용하고, 수성군이 많은 것처럼 위장할 만한 딱 그 정도의 인원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마즈씨는 ‘쿨하게’ 사츠마를 포기하고 주력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전령선이 오지 않았으니, 서규슈로 쳐들어간 건 아닐 겁니다. 하면, 오스미나 휴가로 집결하여 대항하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휴가일 가능성이 크겠지.”
시마즈씨가 다스리는 남규슈의 삼국 중 가장 우측에 위치한 휴가국(일향국)은 북으로 키쿠치씨의 분고국(풍후국)과 닿아 있어, 키쿠치씨와 연합하기에 유리했다.
지형적으로도 서규슈와는 산세가 깊고 길어 통하기 어려웠으나, 휴가와 분고는 해안으로 평지가 제법 있고, 산길도 짧아 보다 결집하기 용이했다.
사츠마성에 전공을 구할 건수가 없음을 확인한 몽주는 탁기에게 군진을 세우고 안팎을 정리하게 명하곤 성벽 위에 올랐다.
그곳에 그가 멍텅구리 화포라고 칭한 왜국의 화포가 있었으니,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었다.
성벽 위에 올라 5문의 왜국 화포를 차근히 하나씩 살핀 몽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B급만 남겨 둔 건가.”
딱 봐도 하품(下品)만 남겨 둔 것이라 여겨 실소한 것이었다.
하기야 어차피 사츠마성에서의 수성을 포기한 셈인 시마즈의 입장에서 A급 화포를 포기하고 남기고 갈 리가 없었다.
몽주가 그 화포들을 B급이라 취급한 것은 이미 그 화포들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5문 중 2문은 아군의 포격에 당한 상태라 확인하기 애매모호했지만, 다른 3문의 화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으니, 방포 중에 포신이 늘어나 퍼진 상태였다.
그 화포가 시마즈씨에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화약처럼 막부에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몇 번의 방포만으로 퍼질 만큼 엉망인 것만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고, 개중에 상태가 안 좋은 것만 두어 쓸 수 있을 때까지만 쓰게 한 것이리라.
그래도 설계 자체는 같을 것이므로, 몽주는 그에 주안점을 두고 꼼꼼히 살폈는데, 역시나 왜국은 아직 주물 제강법을 완성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포신 자체는 철로 만들어, 청동 화포보다 작긴 했지만, 강철이라기보다는 연철인 상태의 포신은 열과 충격에 쉽게 늘어졌으니, 그 위로 강철띠를 따로 몇 번이나 둘러서 내구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하나, 그러면서 크기와 무게가 늘어나, 크기는 청동 화포보다 아직 좀 더 작았지만, 무게는 청동화포와 다를 바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사츠마성에 남은 것처럼 쓰기 곤란할 수준의 저급한 화포도 나왔으니, 왜국의 화포 제조술과 제강법은 우려했던 것보다는 아직 많이 미비함이 분명했다.
‘아니, 아니지. 안심할 건 아니야.’
현대의 지식을 이용했던 탐라 또한 처음 강철 주물을 생산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실수가 있었던가.
개발 과정에서의 실수는 말할 것도 없었고, 공정을 완성한 이후에도 제작 결과물이 기준 미달인 적도 적지 않았다.
지금이야 수없이 생산하여 공정 과정만 정확히 지키면, 믿을 만한 품질의 강철 주물을 얻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왜국 또한 그런 ‘발전 직전의 실수’의 과정을 밟고 있을지도 모르니,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화포에서 시선을 떼고 나니, 성벽 위 훤한 시야 속에 사쿠라지마 화산섬이 눈에 들어왔다.
사츠마성이 산성은 아니지만, 낮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탓에 시야를 가리는 게 전혀 없었던 덕분이었다.
여전히 트림 중인 화산섬과 정상 즈음에 자리 잡은 옅은 화산재 구름을 잠시 보던 몽주는 시선을 내려 오스미국 쪽을 바라보았다.
사츠마성을 공성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했던 사쿠라지마의 화산재 분출 때문에 나름 긴장감이 있긴 했지만, 정작 공성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무료할 지경이었다.
경계했던 멍텅구리 화포는 몇 번 쏘고 말 뿐이었고, 혹시나 오스미국과 연결된 해안에서 기습이 있을까 싶어 방비에 열중했지만, 아무런 접근도 없었으니, 정말로 심심한 공성이었다.
물론, 심심하지 않은 공성전이 있어, 많은 군병들이 죽고 다치는 걸 바란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사츠마성에 있어야 할 자들이 고스란히 어딘가에 모여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그것이 맘에 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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