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6)
* * *
누구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잠이 오더라도 쫓아내었다.
적진의 코앞이랄 수 있는 곳에서, 야습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잠을 편히 잘 만큼 멍청한 자들은 탐라군에는 없었다.
군진의 북쪽 1, 2백 미씩 떨어진 여러 곳에 붙여 놓은 모닥불은 달도 뜨지 않은 짙은 밤에 적의 습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그렇다고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준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적이다!”
“왜놈들이다!”
뿌아아앙!
축시(丑時 : 새벽 2시)가 지난 지 대략 한 식경쯤 되었을 때, 보초를 선 군병들이 일제히 고함을 치고, 나팔 소리를 힘껏 내었다.
군진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지만, 혼란하지는 않았다.
이미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선잠 겸 휴식을 취하던 군병들이 일제히 나와 각각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으니, 가장 먼저 선보인 탐라군의 대응은 화시를 날리는 것이었다.
밤하늘에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불화살들이 날아가니, 얼핏 그 광경은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그건 불화살이 내리꽂히는 위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던 시마즈씨의 군병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적어도 그 무서운 폭죽 달린 화살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그저 화살에 직접 맞지만 않는다면 무사히 적진까지 닿을 수 있다고 여기며 시마즈씨의 왜군들은 광안을 번뜩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하나, 애초에 그 불화살은 그 화살로 적을 크게 살상하길 바라며 쏜 것은 아니었다.
날아간 화시(火矢)들 중 많은 수가 대지에 그대로 박혔는데, 그렇게 박힌 화시들로부터 불길이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전날 모닥불을 준비하는 척하면서 몇몇 곳에 풀을 베어 만든 꼴에 콩기름을 섞어 뿌려 두었으니, 그곳에 화시가 박히자 점화된 것이다.
다만, 성질상 순식간에 불이 솟구치는 대신 군불처럼 서서히 번져 나갔고, 그 위를 지나가는 왜군들에게도 별다른 피해를 주진 않았다.
하나, 그렇게 느리게 불이 번진 덕에 오히려 ‘타이밍’은 좋았다.
야습에 임한 시마즈씨의 군병들 중 삼분지 일가량이 지나간 후에야, 탐라군이 화시로 불을 일으킨 의도가 마침내 통했기 때문이었다.
“터져라, 터져!”
화시를 발사한 순간부터 몽주는 군진의 중심부에서 몇몇 방향을 향해 열심히 시선을 옮기며, 초조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첫 화시를 쏜 이후, 폭죽시(爆竹矢)를 쏘기 시작한 덕에 적이 쳐들어온 북쪽 전 방향에서 폭죽의 폭음이 들리고 있었지만, 몽주가 기대하고 있던 폭발은 폭죽의 폭발이 아니었다.
“역시나 기름이 모자랐나…….”
등불용 기름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대지를 충분히 적실 만큼 많이 뿌리지 못했다.
활을 든 모든 군병이 첫 화살로 화시를 날리게 한 것은 그만큼 발화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 어떻게든 불이 붙을 확률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게 아니더라도 막을 수……!”
쾅! 쿠구쾅!
탁기가 창을 쥐고 일어서, 직접 전선에 나갈 준비를 하며, 주군을 위로할 때, 몽주가 기다렸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거의 정북 쪽과 북서 쪽 두 곳에서 일어난 폭발은 자세히 들으면 한 번씩 폭발한 것이라기보다는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달리던 왜군들은 물론,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적들이 폭발에 휩쓸렸으니, 화광과 폭염에 정확히 보이지는 않더라도 수백이 절명하고, 또 다른 수백 또한 중상에 쓰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전날 모닥불을 준비하면서 야습의 경로가 될 대지 여러 곳에 포탄을 묻어 두었던 것이 마침내 터진 것이다.
쾅! 쾅!
다른 곳에 묻어 두었던 포탄들 역시 뒤늦게 폭발했으니, 그 주변에서 앞선 폭발에 기겁하여 멈칫하거나 우왕좌왕하던 왜군들을 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안 그래도 첫 화시 이후 쏟아지는 폭죽시에 큰 피해를 입었던 왜군들은 예상을 뛰어넘은 대폭발이 연신 일어나자, 사기를 잃고 손에 쥐었던 병장기마저 내팽개치고는 머리를 감싸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싸움이 그렇지만, 야습은 기세의 대결이니, 애초에 야습한다는 것 자체가 적들의 무방비를 틈타 기세를 얻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한데, 방비가 잘된 것을 넘어, 마치 덫을 쳐 놓은 사냥꾼처럼 달려드는 군세를 일거에 날려 버리니, 사기가 역전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쾅! 쾅!
폭죽의 작은 폭음들이 난발하는 중에 아직도 터지지 않고 있던 매복 포탄이 간간이 터지니, 그 화광이 번뜩일 때마다 보이는 것은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밟고 도주하는 왜군들의 뒷모습뿐이었다.
“와아!”
어쩌면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던 적의 야습을 한 식경도 채 되지 않아 물리친 뒤에 탐라군의 군진은 환호로 가득했다.
간간이 탐라국공을 연호하는 소리도 있었기에 몽주는 주변의 군병들에게 손으로 화답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여 주었다.
다만, 군막 안에 들어가 호상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통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시마즈의 군병들이 피해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진을 향해 돌격을 계속 감행했다면, 이겼다 하더라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쾅!
아직도 안 터졌던 매복 폭탄의 너무 늦은 폭음을 들으며, 몽주는 남아 있던 개복포의 포탄을 전부 털어서 일종의 ‘지뢰’로 사용한 도박이 성공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올렸다.
화포와 달리 직사가 불가능한 개복포의 성능 탓에 200미터 안팎의 짧은 거리에서 개복포를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 정도 짧은 거리는 거의 직각으로 하늘에 쏘아야 하는데, 전투 중에 작은 실수라도 있는 날에는 아군의 머리 위에 포탄이 떨어지는 참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여, 몽주는 차라리 포탄을 묻어 터뜨리는 데에 개복포 포탄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문제는 내천만 건너면 확 트인 야지인 터라 야습의 경로가 너무 많았고, 그래서 개복포의 포탄을 거의 모조리 털어 넣어야 했다는 점이었다.
아니면, 경로를 모두 아우르지 못하거나 밀집도가 떨어져 폭발의 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시마즈씨의 장수가 ‘지뢰’ 공격이 이번뿐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야습하거나, 날이 밝아 정식으로 밀고 오면, 탐라군은 유일한 강점인 포격이 사라진 탓에 중과부적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물론, 화포를 가지러 간 군병들이 제때 화포를 가져온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예기치 못한 장애로 가져오지 못하거나 많이 늦는다면 크게 곤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짜 바닷가 말고는 가급적 싸우질 말아야지.”
초창기보다는 탐라의 군력이 외연적으로 많이 확장되었다고는 하나, 역시 아직까진 함포의 협조가 없는 곳에서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화포와 개복포가 위력적이긴 하지만, 병력수의 부족함은 늘 한순간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위태로움을 야기하고 있었다.
몽주는 왠지 살 떨리는 느낌에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고는 부디 화포를 가지러 간 군병들이 제대로 임무를 완수해 내길 기도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머리를 스친 것은 또 다른 걱정이었다.
“녹둔도의 탐라군들은 잘 해내고 있으려나…….”
* * *
“화포를 포기한 게 정말 잘한 선택이었소.”
“그러게 말이오. 몰랐는데, 허 장군이 결단력이 참으로 좋소이다.”
닝구타(Ningguta : 宁古塔)의 남쪽 계곡 입구로 나오자마자 군진을 세우고 휴식을 취하는 중에 맹특목과 아합출이 연신 허호필을 칭찬하였다.
허호필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아직도 수림 지역에서 애를 먹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투먼강 중류에서 우디거족의 요격군을 물리친 녹둔도 탐라군은 군세를 정비하자마자 북쪽 계곡길에 나섰다. 그리고 맞닥뜨린 것은 거대한 자연의 장애였다.
투먼강을 따라 이동할 때도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길을 잡을 수 있는 정도였는데, 닝구타로 향하는 계곡길은 그야말로 말도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빼곡한 수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만약 몽주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자신이 밀림에 있는 게 아니냐며 한탄을 했을 것이니, 나무만 침엽수인 게 다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포를 끌고 가는 건 몹시도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탐라의 화포가 작고 가벼운 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커다란 쇳덩이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계곡길로 20여 길쯤 이동했을 때부터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그나마 지형 자체는 평탄한 편이라서, 나무를 잘라서라도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언덕 지형에 큰 바위들이 길을 막아서기 시작하니, 몇백 미만 이동해도 사람과 말 모두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약하긴 했지만, 태풍에 비마저 한바탕 쏟아 내고 나니, 누구라도 이동이 불가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쯤에서 모두들 화포를 포기하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했지만, 모두들 화포가 아까워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직전의 전투에서 화포의 위력을 여실히 느낀 바 있었으니, 앞으로 더 큰 적과 상대해야 할 판에 화포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하나, 허 소령은 과감하게 화포를 포기하겠노라 선언하였다.
맹특목과 아합출이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 동의하면서도 화포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허호필은 화포도 싸우기 위해 가져가는 것이지, 싸우는 곳까지 가지도 못하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며, 화포를 봉하여 묶어 두고 차후에 회군하는 길에 가져가기로 결론을 지었다.
물론, 이는 개복포가 있기에 감행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화포를 포기하고 난 후의 이동은 그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달리듯 하였다.
군세의 발목을 잡고 있던 쇳덩이들이 사라지자, 남은 80길의 거리를 이틀도 안 되어 주파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곳이군요.”
석양 아래 거대한 분지, 닝구타를 바라보던 허호필은 감탄 어린 감상을 보였다.
말이 분지지, 탐라 정도의 섬은 두 개쯤 집어넣을 수 있을 거대한 대지였으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 평원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들이 나온 계곡의 산을 따라 시선을 돌려야 그 거대한 대지를 감싸고 있는 산세가 있음을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허허, 닝구타에 그리 감탄하면 어쩌시오. 나중에 일란 할라를 보면 기절이라도 하겠구려.”
“기절해도 좋으니, 일란 할라에까지 갈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호필은 농담인 양 웃으며 답했지만, 정말 일란 할라까지 밟기를 바랐다.
탐라공께서 보내 주신 지도에, 일란 할라의 평원은 고려 삼남 지방을 다 넣어도 될 만큼 거대하다 하니, 정말 그런 대평원이 있다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단지 자연의 웅장함을 목격하고픈 건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만약 일란 할라에까지 이르고,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우디거족을 격파한다면, 북동 요동의 판세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지난날, 투먼강 중류에서의 싸움으로 탐라와 주션족의 연합군이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님이 알려졌으니, 닝구타와 일란 할라의 우디거족까지 물리친다면, 그때는 주션족들 모두가 그 기세에 동참하려 할 것이다.
그건 그저 아무렇게나, 그저 낙관적으로 하는 예상이 아니었다.
맹특목과 아합출로부터 주션족에 대해 들은 바 있으니, 금나라의 몰락 이래 주션족들이 살아온 방식을 생각하면 그랬다.
대세를 만든 자나 부족이 있으면 그를 추종하고, 아니라면 서로 반목하여 희소한 자원을 두고 죽도록 경쟁하는 삶.
몽골족이 초원을 일통하고, 주션족의 우위에 서서 그들마저 지배할 때부터 지금까지는 후자의 삶을 살았다면, 그 몽골족을 쳐부수는 주션족의 등장은 대세 아래 결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란 할라에 가기 위해서는 이곳 닝구타의 우디거 일파부터 처리해야지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밤은 푹 쉬어야겠고요.”
허호필은 다시금 닝구타의 거대 분지를 바라보며 휴식을 명하였다.
시야에 사람이나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이곳 어딘가에는 분명 우디거의 일파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투먼강 중류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잔뜩 독이 올라 있을 것이다.
허호필은 그들이 어찌 대항하려 할지 궁금했다.
덕분에 다른 자들은 이동의 피로를 풀며 깊은 잠에 빠진 그 밤에도 허 소령은 적들의 행보를 추측하느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허소령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닝구타의 우디거족이 싸움을 회피하고 도망 다니는 것이었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 다른 우디거족의 지원을 기다리거나, 지친 탐라군이 회군하는 것을 노리고 그 뒤를 치는 것.
이 넓은 땅에 작정하고 도주한다면, 절대 찾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닝구타의 우디거족을 내버려 두고 북상할 수도 없다.
그렇게 일란 할라로 향해 봐야 차후에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할 뿐이니, 어떻게든 닝구타의 우디거족부터 해결해야 한다.
허 소령은 우디거족이 그럴 경우 어찌해야 하는지를 늦게까지 고민했지만, 그럴싸한 방법은 없었다.
우디거족은 주션족보다도 더 유목 생활에 가까운 자들이라 아예 마을 자체를 만들지 않는 부족들이니 거점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우디거족을 내내 추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설령 주션족은 가능하더라도 탐라군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탐라군 없이 주션족이 추격해 봐야 역공당하여 수적 열세에 크게 당하는 결과만 있을 뿐이니, 나눠서 움직일 수도 없다.
결국 남는 건 우디거족이 복수에 눈이 뒤집혀 있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싸움을 회피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초원 전사들의 생리를 믿고자 하였다.
다행히 하늘이 허 소령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닝구타의 우디거 일파는 도망쳐 싸움을 피하는 대신 복수를 선택하였다.
우디거족이 매복 기습을 시도한 것이다.
닝구타 분지의 중앙에서 조금 북쪽에 얕은 산이 하나 있었으니, 숲으로 가득한 그 산 가까이 탐라군이 접근하자 매복하고 있던 우디거의 기마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돌격해 왔다.
투먼강 중류에서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화살 공격을 생략하고 돌격해 왔으니, 화포의 방포 자체를 허용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때보다 좀 더 위협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투먼강 중류에서의 싸움은 3길 정도의 유격(裕隔)을 두고 천천히 시작된 것에 비해, 닝구타에서의 기습은 채 1길도 남기지 않고 돌격해 오는 것이라 그만큼 방포할 여유가 줄어들었다.
하나, 기습은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효과가 큰 법.
탐라군은 이미 기습이 있을 것을 짐작했고, 또 그 기습이 있을 곳이 분지 중앙의 산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습을 시도할 만한 곳이 닝구타에서는 딱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분지를 둘러싼 산세에서 흘러나온 지맥에도 매복할 수 있긴 하지만, 미쳤다고 그곳 가까이 이동할 리가 없음은 우디거족도 탐라군도 다 알고 있었다.
허 소령은 만약 우디거족이 싸움을 회피하지 않고 복수를 시도한다면, 화포의 공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기습적인 공세를 실시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으니, 자연 분지 중앙의 산을 주시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동할 때부터 기습에 주의하라는 명과 더불어 주션족은 기마를 날렵하게 움직일 준비를, 그리고 탐라군은 개복포를 방열할 준비를 하였고, 실제로 숲에서 우디거족의 선두가 짓쳐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전투 준비가 끝난 상태나 다름없었다.
개복포의 방열에 숙련된 탐라군이 첫 방포를 한 건, 우디거족의 선두가 돌격 속도에 이를 때이자, 대략 200미를 달린 지점이었다.
후미는 아직 매복지를 채 빠져나오지도 못한 중이었고, 중앙도 아직 속도를 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쾅! 쾅!
조용하던 분지 내에 한순간에 소란해졌으니, 개복포의 방포음과 포탄의 폭음은 물론이고, 우디거의 기마들이 공포를 이기기 위해 함성을 지르는 소리와 탐라군이 개복포의 탄착 지점을 수정하기 위해 지르는 함성 소리, 그리고 주션족 기마가 활을 쏘며 천천히 앞으로 나서 후미의 탐라군을 지키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는 호령으로 가득해졌다.
“적의 선두는 아군 기마에게 맡겨라! 너희는 적의 중앙을 노린다!”
허호필도 평소의 모습과 달리, 개복포 포대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연신 소리쳤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이기에 흥분한 탓도 있지만, 걱정과 달리 싸움을 걸어온 우디거족의 선택에 기꺼워한 탓도 있었다.
모든 것이 예상된 범위인 데다가, 이 싸움은 이길 수 있고, 이겨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흥분이 된 것이다.
“탄착 지점을 넓혀라! 절대 몰려서는 아니 된다! 각자 전방을 향해 쏘란 말이다!”
쾅! 쾅!
방포음과 폭음, 그리고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중에도 허호필의 목소리는 제법 뚜렷이 들렸으니, 그가 얼마나 힘껏 소리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돌격해 오는 적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디거의 가마는 대략 5천 정도. 지난 싸움에서 1천 이상이 살아서 도주하였고, 닝구타의 우디거 일파가 소유한 기마 전사가 거의 1만이라고 들었으니, 최대 7천 정도라고 예상한 것에 비해서는 다소 적었다.
어쩌면 닝구타의 우디거 일파가 가진 규모가 과장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나, 7천이든 5천이든 3천의 탐라 연합군에 비하면 수가 많았고, 특히 기마가 1천뿐이기에 접전하기 전에 적들의 수와 기세를 줄이지 못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걸 모르는 자가 없었기에, 탐라군은 최대한 빠르게 방포하고, 화살을 날렸고, 우디거족들은 광기 어린 질주를 감행하였다.
각 포대에서 몇 번이나 방포했을까.
어느 순간 주션족 기마들 사이에 붉은 깃발을 어깨에 다는 자들이 보였다.
그것을 본 허 소령은 급히 탐라군에게 명하였다.
“하던 방포를 마지막으로 모두 활을 준비하라!”
허 소령의 명을 복명하는 목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할 때, 탐라군 앞 100여 미 지점에 있던 주션족들이 슬슬 횡보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방포가 완료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주션족 기마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좌우로 빠져나갔다.
화살로 적의 선두를 노리던 주션족들이 자리를 피한 것은 그만큼 적과 충돌할 만큼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기본적으로 보병이고 포병인 탐라군의 입장에서는 위태로운 상황이랄 수도 있지만, 허 소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애초에 작계를 짜며 약속하기를, 정말 적이 강대한 전력을 유지하여 돌입하려 한다면 그때는 기마가 크게 상하는 것을 무릅쓰고 버티기로 했고, 반대로 탐라군의 폭죽시와 일반 화살 공격으로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적의 돌격을 회피하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션족 기마가 자리를 피하면서 드러난 광경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돌격해 오는 우디거의 기마가 아니라, 산기슭과 이어진 들판 위에 가득 널린 우디거족 기마의 사체들이었다.
기어이 말을 끝까지 달려 코앞까지 달려온 기마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이 목표로 달리던 주션족 기마들이 좌우로 빠지고 후퇴하자, 그들 앞에 드러난 것은 1백여 미 건너에서 그들을 겨누고 있는 수많은 화살들이었다.
“쏴라!”
이미 탐라군 중에서 수백이 앞에 있던 주션족 너머로 화살과 폭죽시를 연신 날리던 중이었으니, 이제는 포병이었던 자들마저 소지하던 단궁을 들어 정면을 겨누어 화살을 쏘았다.
2천 개의 화살.
그중 수백 개가 폭죽시였으니, 그 화살 공격의 위력은 남아 있던 우디거의 전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것이었다.
화살에 직사당하여 낙마하는 자들이 수두룩한 와중에 이어서 펑펑 터지는 폭죽.
남아 있던 전사들마저 피를 뿌리며 바닥을 뒹구니, 단 한 번의 화살 세례에 수백의 기마가 피 흘리는 살덩이로 분하였다.
그런 화살 세례가 한 번 더 지나간 후에 문득 맹특목의 우렁찬 호령이 들렸다.
“돌격하라!”
좌우로 빠져 기마를 정비한 맹특목과 아합출이 이끄는 주션족 기마들이 기성(奇聲)을 터뜨리며 말을 박차고 달리니, 이미 수적으로 우디거의 기마보다 주션족의 기마가 우위에 있는 상태였다.
아니, 기마만 따지면, 수는 여전히 우디거 족의 기마가 더 많았지만, 사기와 기세가 완전히 탐라연합군 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아직 1천 수백의 기마가 남은 우디거족이긴 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이미 말머리를 돌려 북동쪽 계곡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도주하는 기마를 쫓아 전공을 확대하는 것뿐이었다.
“계곡의 끝에 이르면 나팔을 불어 회군하게 하라.”
허 소령이 수하에게 명하니, 주션족들이 너무 먼 곳까지 추격하다가 혼돈에서 회복된 우디거의 기마에게 역습당하는 우를 막고자 하였다.
혹시 모를 또 다른 우디거의 군력이 기마가 사라진 상태의 탐라군을 공격해 올 가능성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기도 했다.
하나, 그건 만의 하나인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고, 실상은 이미 전투는 끝난 상태였다.
그저 환호를 지르는 것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다시 개복포를 정비하여 여차하면 다시 방포할 태세를 갖추긴 했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환호할 시각만 조금 뒤로 미뤄진 것임을.
계곡이라곤 하지만, 너비가 수 길은 족히 되는 평야 속에서 살기 어린 괴성과 공포, 그리고 고통 끝에 터지는 비명이 메아리쳐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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