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8)
* * *
“이 잡종놈들아! 모두 고개 숙여라! 고개를 드는 자는 곧바로 목을 벨 것이다!”
단창을 허공에 휘두르며 협박의 고함을 지르는 자들은 모두 녹둔도 주션족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협박의 대상은 우디거 부족의 부족민들이었다.
우디거 전사들과 닝구타에서 크게 한바탕 붙은 이후, 그리 빠르지도 않게 북동쪽으로 이동하였는데, 우디거 부족의 임시 군락을 발견하였다.
탐라 연합군에게 크게 깨진 우디거 부족의 전사들이 그들의 거주지에도 들리지 못하고 곧바로 일란 할라 쪽으로 도주하면서 닝구타의 우디거 부족민들은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탐라 연합군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이게 소득인지 짐인지 모르겠군.”
허호필 소령은 서둘러 세운 군막 앞에 서서 들판에 가득히 웅크리고 있는 우디거 부족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수는 대략 1만 안팎이었고, 대부분이 노약자나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식들이었다.
장성한 사내들이야 이미 탐라군에게 두 번 연속으로 깨지면서 죽거나 도망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 여인들을 취해야겠소.”
문득 맹특목이 곁에 다가와 한마디 던지니, 허호필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미 앞서도 맹특목과 아합출이 요구한 바였기에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우디거 부족민들 중에서 임신이 가능한 여인들만 데려가고, 다른 자들은 죽이겠다는 말이다.
여인들을 데려가 취하는 것이나, 다른 자들, 주로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죽이겠다는 것이나 허호필로서는 내키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당장에 거부하지 못하는 건, 주션족들이 젊은 여인들만 요구하는 데에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녹둔도 주션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수의 부족함이니, 가급적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여 차후에 부족의 전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예전 인간 사냥으로 주변 다른 주션족 부족민들을 납치해 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죽일 필요까지야 있소?”
허호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하였으니, 여인들을 데려가는 것은 양보하되, 우디거 부족의 남은 부족민들을 학살하는 것은 막고자 하였다.
“어차피 저들은 당장에 우디거의 전력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군입만 늘어나는 것이니, 남겨서 보낸다 한들 우려할 필요는 없지 않소?
허 소령이 다시 설득하자, 맹특목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마디를 붙였으니 그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일란 할라까지 완전히 되찾아야만 통하는 이야기일 것이오.”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소.”
이미 일란 할라로 진격하는 것은 무리임을 동감하고 있었다.
그건 일란 할라에 우디거 부족 본류가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의 전력이 지금 탐라 연합군으로서는 감당하기 곤란하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지만, 적게 잡아도 2, 3천은 될 여인들을 취하기로 한 이상 싸움터로 향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었다.
“하면, 퇴각할 준비를 해야겠소.”
허 소령과 합의를 보자, 맹특목이 먼저 자리를 떠나 그의 전사들에게로 향하니, 잠시 후 전사들 사이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곤 오도리와 후르하의 전사들이 사로잡은 우디거 부족민들 사이로 뛰어들어서, 나이 든 자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젊은 여인들만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몇몇 곳에서 노인들이 항거하다가 얻어맞기도 했고, 어미에게서 떨어지는 어린아이와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전반적으로 우디거 부족민들의 저항은 별로 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던 듯, 여인들도 처연하게 끌려나올 뿐이었으니, 노인과 아이들을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분위기였다.
허호필은 잠시 우디거 부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닝구타의 사방을 훑었다.
건조한 곳이라곤 하지만, 얼마 전의 태풍 덕에 푸른 초원이 광활하게 펼쳐진 닝구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탐라공께서 이곳을 보시면 무어라 하셨을까. 어떻게 쓰고자 하셨을까. 아니, 이미 안배해 두고 계시겠지…….”
다시금 중얼거리니, 탐라공께서 호인들을 포섭하시면서까지 북방을 얻고자 하신 것에 대해 기대감과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그건 탐라공께서 강조하신 인본과 동떨어진 일이 벌어지는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심리의 발로이기도 했다.
* * *
첫 수전(水戰)은 생각보다 일렀다. 아니, 시일로는 이른 것이 아니지만, 이번 왜국과의 전쟁 단계를 가늠해 둔 것과 비교하자면 분명 빨랐다.
남규슈를 정리하는 동안 수전은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미야코노조 성의 모든 문을 박살 내는 것을 비롯하여 여타의 남은 방어 시설을 붕괴시킨 탐라군이 2만이 넘는 포로를 무장 해제시킨 후, 다시 오스미국의 앞바다로 나온 것은 급하게 움직였음에도 미야코노조 함락으로부터 나흘 후였다.
탐라의 함대는 곧장 북상하여 휴가국의 주요 거점을 살펴 시마즈씨가 혹시라도 휴가국에 또아리를 틀었을 가능성을 살폈는데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곧장 오토모씨의 분고국으로 이동하여 항전하기로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여, 더 북상하여 규슈 섬과 시코쿠 섬 사이의 분고수도(豊後水道)로 조심스레 진입하였는데, 오토모씨의 분고국 앞바다에서 주고쿠 아키국(安雲國)의 다케타 씨(武田氏)의 가몬이 달린 전선들과 뜬금 조우하고 말았다.
시코쿠 이요국(伊予國)의 서쪽, 규슈 섬을 향한 창처럼 뽀족히 튀어나온 사다미사키 반도(佐田岬半島)에 가려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 탐라의 함대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서 만난 것인데, 탐라 함대가 먼저 사다미사키 반도의 첨단을 남에서 북으로 지나 분고국 앞바다로 진입하고 있었기에 사다미사키 반도를 동에서 서로 따라 움직이던 다케다씨 함대에게 뒤를 물린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다케다씨의 전함은 일반적인 왜선으로, 화포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에 갑작스런 조우는 오직 다케다씨에게만 불운이었다.
두 함대는 서로를 인식한 뒤 잠시 동안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야 서로가 적임을 깨달았다.
탐라의 함대가 오토모씨를 공격하러 가는 것임을, 다케다씨가 규슈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 것임을 깨닫는 순간 전투가 시작되었고, 다케다씨의 함대는 반사적인 것처럼 돌격부터 감행하였다.
“방포하라!”
물론, 탐라 함대의 대응은 함포 사격이었다.
뭉쳐서 움직이던 진형을 급히 단종진으로 바꾸었고, 다케타씨 함대가 돌격하는 방향의 우측으로 빠지면서 방포하였다.
역시나 땅으로 둘러싸인 내해(內海)에서 갤리(galley)형 전함의 충각 공격은 위협적인 것이었다.
좁은 곳에서 급하게 선회하며 방포하는 중에 함포의 포망이 흐트러지자, 아마 의도는 아니고 우연이었겠지만, 어쨌든 그 틈을 비집고 달려드는 왜선들 중 일부는 탐라 함대의 단종진을 거의 찢어 낼 뻔하기도 했다.
만약 다케다씨의 함대 지휘관이 화포전에 경험이 있었다면, 다케다씨 함대 내 전함들이 각개 돌격대신 일점 돌격했다면, 다케다씨의 전함들이 조금 더 많았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다케다씨의 배에 화포가 있었더라면, 그중 무어라도 하나 조건이 중족되었다면 탐라의 함대는 꽤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나, 다행히도 다케다씨의 함대는 해상전을 염두에 두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에게 지원병을 보내기 위한 수송 함대에 불과했으니, 급박한 중에 얼결에 돌입한 전투에서 큰 전과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갑작스런 조우 직후 첫 충각 돌격에는 위태로웠지만, 일단 첫 공격을 회피하는 데에 성공한 뒤부터는 탐라의 함대는 다케다씨의 함대를 일방적으로, 가지고 놀듯 공격하였다.
결국, 다케다씨의 함대 내 절반의 전함들이 수몰되기에 이르자 다케다씨의 기함에서 항복을 표하였다.
“휴우, 큰일 날 뻔했어.”
적이 항복하자, 이미 위태로운 순간이 지나간 것은 한참 되었음에도 몽주는 안도의 한숨을 그제야 내쉴 수 있었다.
첫 번째 적의 돌격에서 하마터면 후미가 잡혀 충돌할 뻔했고, 단종진의 중심부도 적의 돌격에 찢어질 뻔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거렸다.
“죄송합니다.”
이는 전투가 급작스레 시작되었을 때, 무리하게 단종진으로 바꾸느라 다케다씨가 돌격해 올 여유를 준 탓도 있었으니, 단종진으로 변진을 명한 탁기가 송구한 표정으로 사과하였다.
“아니야, 애초에 좁은 수도로 진입할 때 진형을 바꿨어야 했는데 그걸 잊은 나도 잘못이야.”
……라고 답하긴 했지만, 탁기는 더욱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형을 미리 갖추게 하는 명은 탐라공보다 군부대신이자, 탐라군의 총사령관인 그가 했어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전투 중 아슬아슬했던 순간에 대해 잠시 되짚는 동안 탐라의 경함선 한 척이 기함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미 반파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왜선들을 장악하면서 그중 지휘관들을 데려오라 명한 것이 있었다.
손이 묶여 갑판 위로 끌어올려진 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니, 그중 몽주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젊은 자는 현 다케다 씨 가독 노부하루(武田信春)의 장남 노부미쓰(武田信光)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기 위해 꽤 반항하였지만, 그와 다른 지휘관 몇몇에게 약간의 고신을 가하자, 그가 다케다 가독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토설했고, 그도 결국 그것을 인정했다.
“다케다씨의 장남이라 하면 내가 죽일 것 같았소? 아니, 그 보다 내가 죽일 생각이 있으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죽였겠소?”
굳이 고문을 당하길 청한 노부미쓰를 한심하게 여긴 몽주는 갑판 위에 무릎 꿇고 앉은 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자가 일본 전국시대의 유명 무장 중 하나인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으로 잘 알려진 그 다이묘의 5대조였다.
물론, 그렇다고 대단한 자라는 건 아니었다. 그냥 다케다 신겐의 조상일 뿐이지, 특별한 족적을 남긴 자는 아니었다.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를 도우러 가는 길이었소?”
“……그렇습니다.”
노부미쓰는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그를 두들겼던 군관이 다시 몽둥이를 손에 들자 어쩔 수 없다는 양 답하였다.
“장남이 이런 일에까지 나서다니, 고레히사 같은 자가 또 있었군.”
시마즈 고레히사를 떠올리며 실소한 몽주는 문득 떠오른 궁금함을 물었다.
“남규슈를 도우려는 건 다케다씨의 단독 결정이오, 아니며 서규슈의 국주들 간에 어떤 결의가 있는 것이오?”
“우리 가문의 결정이고, 그중에서도 내가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대가? 하면, 가독은 반대하셨다?”
“그리 내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그랬소?”
“…….”
“어째서 가독이 내켜하지도 않는 지원군을 보내려 한 것이오?”
재차 이유를 묻자, 노부미쓰는 머뭇거렸다. 답하는 것 자체를 꺼려 하기보다는 그 답의 내용이 껄끄러운 것인 듯했다.
“무슨 말이든 좋소. 들어나 보게 말하시오.”
몽주가 부드럽게 재촉하니, 노부미쓰가 문득 크게 숨을 고르더니 몽주를 직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탐라공이 맞다면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
“공은 공 때문에 화국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줄 아십니까?”
“피해? 누구에게 어떤 피해가 있다는 말이오?”
“국주와 사인(士人 : 무사 계급)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공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
노부미쓰가 부연하여 말하니, 데카이를 통해 왜국으로 흘러들어온 탐라의 값비싼 사치품을 구하기 위해 국주들은 나라와 가문의 세간을 탕진하고, 그 모자란 것을 충족하기 위해 백성들을 더욱 쥐어짜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데카이가 없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규슈에서 우리 탐라국의 영역을 몰아내야 한다고 여겼다는 말인가?”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공과 탐라국이 아니라면 왜국 또한 본래의 평온을 되찾을 것입니다.”
“크흡.”
몽주의 입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설탕을 비롯한 탐라의 사치품이 비싼 것은 둘째치고, 사치품은 문자 그대로 사치하는 물건일 뿐이니, 안 사고 안 쓰면 그만이었다.
물론, 전근대 계급 사회에서 지배층의 사치품 소모는 위신을 지키는 것과도 유관한 문제라서 속으로는 아깝다 여겨도 쓸 수밖에 없긴 했을 터.
당대 유럽의 귀족들이 그 비싼 후추를 취향 이상으로 마구 뿌려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위신과 힘을 증명했던 것처럼, 왜국에서도 국주들이나 상급 무사들에게 있어 탐라의 설탕과 기타 사치품들은 그것들을 써야만 위신을 지킬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명국 또한 그와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중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정말 그런 사치품의 소비로 인해 나라와 가문의 경제가 흔들리는 게 걱정스럽고, 또 그로 인해 더욱 착취당하는 백성들이 안타깝다면 사치품을 쓰지 않으면 그만인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애초에 이 시대에 피지배층을 그 정도로 생각할 만한 인물이라면, 위신이라는 가면을 쓴 허영에서도 초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때문에 몽주는 노부미쓰를 마구 비웃었고, 노부미쓰 또한 자신이 비웃음당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사나운 시선으로 몽주를 노려보았다.
“하하, 이거 참……. 이보게, 설령 탐라가 규슈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왜국에 설탕이 없어졌을 것 같나? 탐라가 배로 설탕을 실고 오지 않는면, 왜국의 국주들이 정녕 설탕을 포기하고 살 것 같냐는 말일세.”
“없는 것을 어찌 구한단 말입니까.”
“없기는! 바다 건너에 탐라가 있음을 다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와서 구하려는 자들이 없을 것 같은가? 데카이에서 흘러나오는 은전을 구하기 위해 나라도 배신하고 건너오는 상인들이 그처럼 많았는데, 겨우 바다 좀 건너면 나오는 탐라에 오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그야 막으면 그만…….”
“자네에게 그럴 힘이 있나?”
“…….”
“오히려 내 덕에 그나마 그 정도의 값으로라도 설탕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생산가를 생각하면 굉장한 폭리를 취하고 있는 몽주의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도 화국 내 유통되는 중에도 값이 두 배, 세 배로 뛰는 걸 생각하면 탐라가 왜국에 설탕을 가져다 주지 않을 경우에는 그보다 훨씬 값이 폭등할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당신 때문에 화국의 모든 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알겠네, 알았어. 안 그래도 내가 그 고통을 덜어 줄 생각이니, 자네는 더 고함칠 필요 없네.”
몽주는 군병에게 눈짓하여 다케다씨의 장남과 무사들을 데려가게 하였다.
노부미쓰는 뭘 어찌하려느냐고 소리쳤지만, 몽주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은 조금 가지고 있을지언정, 세상을 보는 눈은 없는 자였고, 또 설득해야 할 이유도 없는 자였으니, 굳이 입 아프게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날 방해하지 않는 게 네 뜻대로 되는 것이다, 쨔샤.”
묶여서 끌려가는 노부미쓰를 힐끗 보며 그리 중얼거린 게 다였다.
이번 전쟁 이후, 적어도 왜국의 서국은 예전보다 훨씬 값싸게 석상의 기물을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쏠쏠했던 몇몇 국주들과 그와 결탁한 일부 상인들은 울상을 짓게 되겠지만 말이다.
“다케다씨의 조력군은 대략 3천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은 반으로 줄었습니다만…….”
몽주가 노부미쓰와 대담을 나누는 사이에 다른 장교로부터 전후 처리에 대한 보고를 받은 탁기가 말하였다.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만약 서국의 모든 국주들이 그에 준하여 군사를 내놓아 탐라에 대항한다고 가정하면 꽤 위협적인 수였다.
하나, 몽주는 그리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다. 왜국의 국주들, 슈고 다이묘들이 그렇게 단결이 잘되었다면, 왜국은 일찌감치 중앙 집권적 나라를 세웠을 것이고, 전국 시대라는 혼돈기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남규슈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무너진다면 태도를 바꿀 자들마저 속속 드러날 것이다.
“서둘러 정리하고 분고국에 상륙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몽주의 명에 따라 탁기가 전후 처리를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장교들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현대의 오이타시에 해당하는 후나이(府内) 지방은 분고국의 국부(國府 : 수도)였다.
제법 번화한 곳이라 탐라군은 후나이에 상륙하면서 나름 긴장했는데, 사츠마국에 상륙할 때처럼 후나이의 포읍을 화포로 쓸어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야코노조에서 워낙에 많은 포탄을 소모하였고, 앞서 수전도 치르느라 포탄의 재고량이 너무 적은 탓이었다.
때문에 상륙 중에 기습을 당할 우려가 높다 여겨 굉장히 조심스럽게, 돌다리를 두드려 보는 심정으로 진행했는데, 의외로 저항은 일절 없었다.
포읍을 비롯하여 후나이의 고을에 왜인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 평범한 백성들뿐이었고, 그들은 탐라군의 상륙을 멀리서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따름이었다.
후에 왜인 백성들에게 탐문하니, 오토모씨와 시마즈씨가 남은 군병들과 서둘러 징집한 자들을 데리고 후나이의 남서쪽 덴진산 위에 있는 오카성으로 올라갔음으로 알 수 있었다.
후나이에 상륙하여 일단 군진을 차린 탐라군은 오 일이나 머물렀다.
그 이유는 역시나 포탄의 부족 때문으로, 앞서 오스미국에서 떠날 때, 탐라에서 포탄을 가져오게 한 분대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 오 일이라는 시간은 아무래도 탐라군보다는 오토모씨와 시마즈씨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오카성이 산성이라 방어에 유리한 곳인데, 오 일 동안 더욱 방어에 치중할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오 일 후 오카성 공략에 나서자 그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피해라!”
쿠구궁!
커다란 통나무 수십 개가 가파른 산길을 굴러 내려오니, 그 기세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공격을 먼저 알아차린 장교가 고함을 쳐 경고하였지만, 희생자가 없을 수 없어 십여 명이 통나무를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고 말았다.
“으아악!”
다리가 부러진 부상병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으니, 통나무가 굴러떨어진 곳이 아니거나 피한 자들마저도 등골이 오싹하였다.
아니, 부상으로 비명을 지를 정도라면 운이 좋은 셈이었다. 아름드리 통나무에 제대로 직격당한 자들은 그대로 즉사하였다.
오카성까지 대략 4, 5길 정도 남은 지점부터는 산세가 급하게 거칠어졌는데, 그 지세를 틈타 왜군의 공격이 극심해졌다.
계곡의 비탈이 심한 곳에서는 통나무나 바위가 굴러떨어지기 일쑤였고, 갑자기 화시가 날아와 불에 다 태워 죽일 속셈을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전에 온 태풍 탓에 수림 내 지표면에 수분이 남아 있어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셋이 죽고 열둘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면, 지금까지 백여든 명 정도인가?”
“네, 사상자가 일백여든세 명째입니다.”
후나이의 남쪽 계곡 입구부터 오카성까지는 대략 30길, 그중 25길을 오르면서 183명이 탈락하였다.
후나이에 상륙한 1만의 군병들 중 오카성 공략이 동원한 수는 7천이었으니, 그 7천 중 200도 안 되는 사상은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사실 실질적인 결손수는 1천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몽주가 사상자가 생길 때마다 후나이의 군진으로 돌려보내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부상자를 후송하고 사체를 운반할 자들까지 내려가야 하기에 1천에 가까운 군병들이 이미 결원된 것이다.
탁기는 죽은 자들은 그 자리에 그냥 묻고, 후송되어야 할 정도의 부상자는 차라리 죽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지만, 몽주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로서는 부상자를 끝까지 살리고자 노력하고, 전사자의 사체마저도 소중히 여기는 것을 탐라군의 전통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전근대의 군대에서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라도 지키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어려운 걸 해냈을 때, 진정 힘껏 싸울 수 있는 강군이 만들어진다고 여겼다.
물론, 1천이나 결원되고, 또 은근히 군병들 중에서 후송대로 전투에서 빠지려는 얌체 같은 자들이 하나둘씩 보이자 조금 후회되긴 했다.
아무래도 징집된 서규슈 출신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눈에 띠었다.
그걸 보면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반대로 탐라군은 그런 분위기가 적은 것이 두드러져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것이 탐라군의 규율과 사기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몽주는 통나무가 굴러 내려온 계곡의 뒤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통나무를 던진 왜군들이 있었겠지만,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 그런 ‘게릴라’식 공격을 받았을 때는 폭죽 화살을 쏘기도 했고, 아예 군병을 올려 보내 잡으려고도 했지만, 이제는 시도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올려 쏘는 화살은 폭죽시라 해도 큰 효용이 없었고, 군병들을 올려 보내도 그사이 지리에 더 익숙한 왜군들이 먼저 더 멀리 도망쳐 허탕을 치기 일쑤였던 탓이다.
그저 이를 악물 뿐이었다.
으드득.
“원래도 그럴 생각이네만,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는 완전히 지워 버려야겠어.”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몽주로서는 그냥 올라도 힘든 산길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기습 공격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움직였다.
그렇게 오카성의 성벽이 보일 때까지 여러 번 공격을 감수해야 했으니, 공성을 준비할 때는 탐라군의 수는 오천오백여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카성의 왜군들도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미야코노조에서 탈주하면서 하급 무사들과 군병들을 다 버려 두고 도주하였으니, 남은 군병이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고, 강제로 징집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카성의 성곽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군병들이 서둘러 지휘용 군막을 치는 앞에서 몽주는 방포부터 명하였다.
탐라에서 개복포의 포탄을 많이 가져온 덕에 포탄을 하루 종일 방포해도 남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유적지로 쓰기도 어려울 만큼 화력을 퍼부은 뒤에 공성에 임할 생각이었다.
쾅! 쾅!
하나둘 방열을 끝낸 개복포가 포성을 울리니, 잠시 후에는 포성이 울리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잦아졌다.
물론, 포성이 많은 만큼, 오카성에서 보이는 화염과 화광도 늘어났다.
설치된 군막 안에서 서쪽으로 반쯤 기울어진 태양의 빛을 피한 몽주는 열린 입구로 화염에 뒤덮인 오카성을 보며, 엉뚱하게도 현대의 포병을 떠올렸다.
현대의 포병 무기는 실로 엄청나, 지금 탐라군의 화포나 개복포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하나, 군복무 시절에 알게 된 것과 천몽 때문에 공부한 것을 생각하면 포격의 효과는 당대가 월등히 좋다 여겼다.
이는 포병(?)에 의한 공격 교리(敎理 : doctrine)는 어설프게나마 존재하나, 포병에 대한 방어 교리는 전혀 없다는 것에 기인하였다.
쉽게 말해서 탐라군이나 적이나 탐라의 화포가 가진 위력을 공히 알고 있지만, 공격하는 탐라군의 입장에서 그 위력을 여실히 사용하는 것에 비해, 방어하는 적은 그 위력을 어찌 막아 내야 할지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요새나 벙커까지는 몰라도, 그저 땅을 파서 진지 공사만 잘해 두어도 상당한 대응이 될 것이건만, 여전히 당대의 일반적인 대응책은 지금 오카성의 왜병들이 그러하듯 성벽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하나,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듯이 화포가 없던 시대에 지어진 성벽은 충분한 화력의 포격을 막을 수 없었고, 그것은 곧 방어하는 적의 큰 피해로 귀결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시대에 탐라의 화포 전력은 전술 무기를 넘어 비대칭 전략 무기에 가까운 셈이었다.
추후 탐라의 화포가 많이 쓰이고, 그에 대비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진행됨에 따라 화포는 전술 무기라는 본래의 자리로 내려올 테지만, 적어도 이번 왜국에서의 전쟁 동안은 아닐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한 몽주는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화포에 대응할 줄 아는 자들이 등장한 다음에는 무엇이 있어야, 지금만큼 편안한 싸움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발달된 무기일 수도 있고, 교리 및 전술의 조합과 발전일 수도 있고, 정비된 지휘 및 보급 체제일 수도 있었다.
당연히 탐라가, 몽주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 모두일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포성을 들으며, 몽주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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