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29)
* * *
“그게 뭡니까요, 어르신?”
석삼은 공관대신 화극이 들고 있는 걸 보며 물었다.
“뭐겠나, 화포지.”
“에? 그렇게 작은 게 화포입니까?”
“작아도 원리는 화포와 같으니, 화포라 해야지 뭐라 부르겠나.”
석삼은 화극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에 쥐어진 쇳덩어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극이 실소하며 그 작은 화포를 석삼에게 건네니, 석삼은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혹시 사람이 들고 방포하는 겝니까?”
“그렇지.”
“어유, 그러면 사람 팔이 남아 나겠습니까?”
군무 중일 때, 화포 좀 쏴 보았던 석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양 몸서리를 쳤다.
아닌 게 아니라, 화포 훈련 중에 머저리 같은 자들이 화포 바로 뒤에 서 있다가 뒤로 주퇴하는 화포에 얻어맞아 크게 부상을 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지 않았던가.
“그건 작아서 그리 큰 요동은 없을 걸세. 아직 시범은 해 보진 않았지만 말이야.”
“음…….”
하기야 삼십 세미 정도의 길이에 직경 오 세미쯤 되는 원통형의 작은 화포라면 탐라군의 정식 화포보다는 충격이 훨씬 작을 수밖에 없다 싶었다.
“하면, 요렇게 작은 게 뭔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상대로 하면 소용이 있지 않겠나.”
“음, 그게 되겠습니까?”
그건 작은 화포로 사람을 맞추기 어렵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화포나 개복포 또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나.”
“그거야 천뢰탄 덕 아닙니까. 이렇게 작은 거에는 천뢰탄을 쓰기도 어려울 터이니, 직접 맞춰야만 하는데 그게 쉽겠습니까?”
“이 사람아, 하면 전투 중에 화살은 어디 사람을 정확히 노리고 쏘는 겐가? 많은 화살을 한 구역에 몰아 쏘아서 적중시킬 가능성을 높이는 게지.”
“아, 이것도 그런 식으로 쓰려는 거군요.”
석삼은 작은 화포를 든 자들 한 무리가 동시에 방포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대략 이해했다.
“근데 아직은 그냥 상상일 뿐일세. 이것도 그 생각한대로 되나 싶어 한번 만들어 본 것이고.”
“잘 안 되나 보군요.”
“만들어서 손에 쥐고 나니, 이걸 제대로 쓰려면 활은 겸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그게 있으면, 활은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네만, 이것도 화포라 연사가 힘들거든. 그러니 차라리 폭죽시를 날릴 수 있는 활이 낫지.”
“아…….”
석삼은 손에 든 묵직한 쇠덩이를 보면서 한 번 쏘고 다시 쏘기 위해서는 탐라의 화포처럼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니, 다시 쏘기 어려울 것임을 깨우쳤다.
화약을 재고, 탄환을 넣고, 화승에 불을 붙여서 당기는 과정은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석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군기청에 온 겐가?”
“아, 그게 말입니다.”
석삼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엉덩이를 바짝 당겨 앉으며 말하였다.
“지금 탐라에서 쓰는 배는 사실상 경함선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당연히 경함선 외에 다른 배들도 있긴 했지만, 다 기존에 있던 작은 노선들에 불과했고, 나라에서 쓰는 건 경함선뿐이었다.
전함과 상선으로 나뉘긴 했지만, 그것도 무장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느냐만 다를 뿐 기본적인 토대는 같은 것이었다.
“홍로급 경함선이 참 좋은 배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장차 탐라를 위해서는 좀 더 빠른 배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빠른 배?”
“그렇습니다. 이미 탐라는 이곳 탐라섬만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남면도 100길이나 떨어져 있고, 대마도나 서규슈는 200길이 넘습니다. 저 북방의 녹둔도나 남방의 유구섬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 먼 곳이 오롯하게 탐라의 영역으로 남으려면 무엇보다 교통이 원활해야 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같은 지역이라고 해도 전함을 흩어 둘 수 없으니, 뜬금없는 곳에 침범하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빠른 배가 필요할 것입니다. 바다는 우리가 나아가기 좋기도 하지만, 적이 쳐들어오기도 좋을 수 있으니까요. 이는 바다를 영토처럼 여기는 주군의 뜻을 생각하면 분명 생각해 볼 일이라 여깁니다. 군관대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기척도 없이 방문하여, 난데없이 쾌속선을 언급하는 석삼을 빤히 보던 화극은 문득 석삼의 의도를 알고는 실소하였다.
“자네 아마미 섬이 약탈당한 것에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구먼.”
“물론 그렇습니다. 어디 저만 화가 날 일입니까?”
적어도 탐라에서 관원된 자들이라면, 주군의 유구 제도로의 진출 의지를 알 것이고, 그것을 안다면 주군의 행사에 타격을 준 시마즈씨의 아미미 섬 침탈에 대해 노한 마음을 가진 건 당연했다.
그때, 유구 나하현에 있던 탐라군의 분함대가 급히 아마미 섬으로 달려갔으나, 소식이 전해지고 그곳으로 항주하여 닿을 때까지 하루나 걸렸다.
그사이 시마즈씨, 아니 시마즈씨와 결탁한 고노씨의 함선들은 이미 떠나 버렸다.
나중에 상황을 정리해 보니, 만약 탐라군의 분함대가 두 시진만 일찍 도착했다면 고노씨가 도주하기 전에 길을 막을 수 있었고, 두 시진이 아니라 한 시진만 일찍 도착했어도 추격해 볼 여지가 있었다는 판단이 도출되었다.
“제가 한번 구상해 본 건데, 이런 식이면 경함선보다 빠른 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
그냥 생각만 하고 온 건 아닌지, 석삼은 품에서 접힌 종이 다발을 꺼내어 화극 앞에 펼쳤다.
모시던 주인을 닮는다 싶더니, 하는 짓도 탐라공과 비슷하다 속으로 실소하며, 화극은 석삼의 엉성한 그림을 살폈다.
붓으로 어설프게 그리긴 했지만, 그래도 정면, 측면, 평면을 모두 표현했으니, 나름 선박의 설계도라 부를 정도는 되었다.
“흠, 극단적으로 길고 좁은 배로구만. 돛이 세 개인데 거기다가 돛만 쓰는 게 아니라 노꾼을 부리는 배고. 흠, 횡단면도 몹시 가파르구먼.”
화극은 석삼이 보인 설계도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는데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석삼의 의도를 하나씩 확인함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면 파도를 갈라 빠르게 나아갈 수 있고, 바람이 약하거나 없을 경우 노를 저어 이동할 수 있으니, 순항하기에 좋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하네. 이 그림은 조잡하지만 무얼 노리는지는 알아볼 수 있겠어. 다만, 이런 배는 적재량이 굉장히 적을 수밖에 없어. 노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부양력이 적으니까. 게다가 함포를 쓰기에도 부족해. 경함선 만큼은커녕 예전 당도리보다도 안정성이 떨어져서 방포시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걸세.”
화극이 단점을 지적하였지만, 석삼도 그 정도는 예상한 것이라는 듯 담담하게 그의 생각을 말했다.
“이건 오직 속도만을 생각한 배입니다. 오로지 그게 목적이니까요. 또 전투에 크게 쓰기 위한 배가 아니니, 갑판에 함포는 싣지 않아 됩니다. 설령 전투에 동원한다고 해도 전장이 긴 것을 이용해서 선수와 선미에 함포를 두면 빠른 속도와 더불어 쓸모가 있을 겁니다.”
“……선수와 선미라면, 추격과 진로 방해에 전용한다는 말이로군.”
그러니까 바다에서 전면전에 쓰기보다는 도주하는 적의 꽁무니를 잡거나 앞에서 길을 막는 데 쓰자는 것이었다.
뭐랄까, 정확히 같은 용도는 아니겠지만, 바다의 기마병을 의도한 듯했다.
화극은 석삼의 설계도(?)를 보며 고개를 끄득끄덕, 일리가 있는 제안이라는 표현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으로 한번 시도해 보겠노라 말을 뱉진 않았다.
새로운 모양의 배를 만든다는 건 쉽게 결정할 문제도 아니지만, 그보다는 탐라공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자네도 아마 알 테지만, 주군께서는 경함선 이후의 신함선으로 더 큰 배를 염두에 두고 계시네. 그런 점에서 이 배는 주군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것이지. 물론 이 배 또한 경함선에 비해 작은 배는 아니고, 전장은 오히려 더 길지만, 주군께서 원하시는 건 많은 화포를 실어 막강한 화력을 선보일 수 있는 배니까 말이야. 그리고 노를 쓰면 좋은 점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하네. 우리 탐라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많이 쓰이는 배는 다소 곤란한 것이라 할 수 있지.”
“노꾼이야 꼭 탐라의 군병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노비라도 쓰자는 겐가.”
“뿐만 아니라, 죄인들로 하여금 사역을 시킬 수도 있고, 탐라 백성이 아닌 고려인이나 왜인들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이 되긴 했다. 노만 제때 저을 줄 알면 되니, 훈련받아 귀한 군병을 쓸 이유는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내 나중에 주군께서 오시면 장계를 올려 보지. 다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우리 경함선도 다른 나라의 배에 비하면 꽤 빠른 편이라, 주군께서 급하다 여기지 않으실 수도 있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잘 좀 말씀드려 주십시오.”
석삼은 용무를 마치곤 차 한잔 더 마실 시간이 지난 후에 물러났다.
“저 녀석도 철이 많이 들었군.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겐가.”
화극은 석삼이 그린 설계도를 다시 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보아도 어설프기 그지 없었지만, 그래도 가만 보자면 배에 쓰이는 중요한 구성품은 빠짐없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탐라군에서 복무한 바가 있다곤 하지만, 배를 만드는 것에 참여한 적 없던 이가 이 정도라도 생각해서 그렸다면, 따로 조선(造船)에 대해 연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기술학교에서 나오는 기초적인 교과서도 있고, 경함선을 만들면서 나온 자료와 시험 결과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어, 찾아보고자 한다면, 전권대사인 석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럴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시도한다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아마도 남방을 관장하는 전권특명대사로서, 속수무책으로 아마미 섬이 털린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어찌하면 아미미 섬을 탐라의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빠른 연락선의 필요에까지 생각이 닿은 것인 듯했다.
책임감.
여인을 임신시켜 놓고도 모르쇠하려던 얼간이 같았던 그가 몇 년 사이에 맡은 바 책임의 무게를 느끼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나저나 일이 또 생겼구먼.”
흐뭇한 미소를 짓던 화극은 이내 표정을 바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알량한 그림으로 주군께 보고할 수는 없으니, 그럴싸하게 다시 작성해야 마땅하였고, 그와 군기청이 해야 할 수고가 더 늘어난 것이었다.
* * *
“저쪽이다!”
“잡아라!”
먼 곳에서 장교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중에 몽주는 그의 발 근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죽었겠군.”
“바로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랬을 겁니다.”
몽주가 중얼거린 대상은 시마즈 고레히사였다. 아니, 그의 사체였다.
하루 동안 진행된 포격은 오카성 내 수많은 왜군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중 고레히사도 있었다.
고레히사의 사체는 참혹했으니, 특히 왼팔이 없는 게 눈에 띄었다.
아마 그의 왼쪽에서 폭발이 있었고, 그 폭발로 왼팔이 뜯겨 나간 모양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복당(腹當 : 하리아떼) 갑옷은 몸통만 가리는 것에 불과하여 어깨 방어구도 없었던 터라, 꼼짝없이 찢긴 것이다.
탁기가 말했듯 그 순간에 정신을 놓지 않았다면, 절지(切肢)된 고통과 과다 출혈로 인한 혼미함 속에서 인생 최후의 순간을 끔찍하게 경험했어야 할 것이다.
거의 하루 동안 쉬지 않고 퍼부은 포격은 오카성 안팎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것이 설령 세련된 현대의 포병 무기에 의한 스틸레인(steel rain), 말 그대로 빗발치는 포격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막을 도리가 별반 없는 당대의 상황에서는 죽음의 신이 강림한 곳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밤에도 횟수만 조금 줄였을 뿐 쉬지 않았으니, 포격을 가하는 탐라군도 무척 피곤했지만, 포격을 당하는 입장에선 실로 끔찍한 밤이었음에 분명했다.
사실 그처럼 개복포의 포격이 강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오카성, 즉 작은 산성인 덕이기도 했다.
산봉우리를 등 뒤에 둔, 가장 긴 면이 채 80미도 안 되는 작은 성인 덕에 수십 문의 개복포가 밀집도 높게 두들길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파른 산성인 만큼 공격해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성에서 나와서 습격하기에도 곤란한 곳이었다.
몸을 숨길 곳 없이 돌출되는 기슭으로 나와 봐야 포격과 화살 공격의 희생양이 될 뿐이니.
당대의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공성 측이 몹시도 곤란했을 곳이지만, 상대가 탐라군인 게 저들에게는 최악의 불운인 셈이었다.
결국 근 하루 동안 일방적인 공격을 받던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들은 지난 정오 무렵에 탈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미리 오카성의 좌우로 탐지를 위한 군병을 숨겨 둔 탐라군에 그 징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에, 몽주와 탁기는 그것을 봉쇄하는 대신 일부러 놔두었고, 포격의 회수도 조금 줄여 주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오카성의 서문으로 탈주 시도가 있었으니, 그 순간부터 탐라군은 다시 강력한 포격을 가하였다.
아마 그때 그나마 몸 사리기 좋은 성벽에 기대어 운좋게 목숨을 부지했던 많은 무사와 가문의 족속들도 포격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고레히사도 그때 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들 중 일부가 서문을 통해 뒷산으로 숨어 들긴 했지만, 그 수는 어림해 보자면 일백 안팎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탐라군의 맹렬한 추격에 쫓기고 있었다.
오카성이 있는 산은 서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오노강(大野川)과 그 지류에 둘러싸인 탓에, 서쪽으로 탈주하는 데에 실패한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들이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 할 수 있었다.
몽주는 먼 곳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폭죽의 폭음을 들으며 오카성 안에 널린 사체들을 지나, 살아남아 포로가 된 왜군들의 앞으로 향하였다.
탐라 군병에 의해 무릎 꿇은 채 손발이 뒤쪽으로 함께 묶인 포로들은 모두 갑주도 제대로 입지 못한 잡병들이었다.
미야코노조에서처럼 이번에도 일반 군병들과 징집병들을 내버려 두고 가문의 속인들만 탈주를 감행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 덕에 지금 살아서 포로가 된 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탈주가 있을 때 포격을 서문 쪽에 집중했었으니.
생포된 왜군들 중에 혹시 대물이 있을까 싶어 취조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문득 오카성 밖에서 장교 하나가 수하 두어 명과 더불어 몽주에게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몽주가 물으니, 그가 숨을 급하게 고르곤 말하였다.
“모로히사를 막다른 곳에 몰아넣었는데, 그자가 주군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장교의 보고에 몽주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탁기가 성난 음성으로 말하였다.
“지금 제정신인가? 어찌 적군의 수괴 따위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주군을 모시려 하는 겐가?”
“하나, 그자가 강에 투신하겠다며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장교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걸 들으니, 추격하던 탐라군의 입장에서는 그 협박이 통할 만했다.
애초에 몽주가 남규슈 몰락의 증거로서, 모로히사의 머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리만큼 서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하여, 그것을 아는 탐라군 장교의 입장에서는 강에 투신하여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모로히사의 협박 앞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 있는가.”
“북동쪽 오노강의 합류 지역에 있습니다.”
“용케도 그곳까지 도망쳤군.”
서문으로 탈주하다가 밀려 북쪽 산으로 도주하였으니, 그 험한 산봉우리를 넘어 북동쪽까지 간 게 대견(?)할 정도였다.
물론, 그만큼 추격에 임한 탐라군이 고생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몽주는 모로히사를 보러 가기로 결정하였다.
지난 첫 천몽을 생각하면, 어차피 자신을, 혹은 가족이나 가문을 살려 달라는 요구를 할 게 뻔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서로 고생한 사이에 마지막으로 얼굴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이에, 몽주가 탁기를 비롯하여 수십의 군병들과 함께 산 아래 오노강의 줄기를 따라 이동하니, 고작 직선거리로는 500미에 불과하였으나, 거친 길 탓에 유약한 몽주의 몸으로는 꽤 힘겨운 일이었다.
“후우, 후우! 저기인 모양이군.”
막판에 강가에서 가파른 기슭을 올라가느라 숨이 턱끝까지 찬 몽주는, 모로히사가 막다른 곳에 몰려 있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모로히사를 비롯한 십수 명의 왜인들이 있는 곳은 절벽의 끝이었으니, 그 높이가 딱 몽주가 올라온 기슭의 높이었다.
떨어진다고 몸이 산산조각 날 높이는 아니지만, 그 아래로 오노강이 흐르니, 투신한다면 확실히 사체를 찾기 어려울 듯했다.
잠시 숨을 더 고른 후, 몽주가 포위한 탐라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왜인들이 피폐한 눈빛으로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몽주도 그들을 바라보며 모로히사를 찾았는데,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다들 수세적으로 서 있는 중에 구족(具足;구소쿠) 갑옷 즉, 제대로 갖춰진 갑옷을 입은 자가 홀로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으니, 그자가 시마즈씨의 당대 가독 모로히사였다.
잠시 시선만 오가다가 몽주가 무어라 말을 전하려는데, 대뜸 모로히사가 앉은 채로 소리쳤다.
그가 소리친 첫 말은 굳이 통역이 없어도 알아들을 만했다.
“나는 규슈의 삼국과 에치젠국의 국주까지 겸하신 시마즈 다다히사(島津忠久)의 육대손, 시마즈 모로히사다!”
“…….”
꽤 울림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몽주에게 별 울림을 주진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모로히사임을 굳이 알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내 아버님 사다히사(島津貞久)께서는 현 막부의 초대 쇼군 다카우지 님을 도와 지금의 막부를 세우셨으니, 그 공으로 규슈의 삼국을 시마즈씨의 것으로 확립하셨다!”
역병을 통해 전해 들은 후 몽주의 소감은 그래서 대체 어쩌라고였다.
시마즈씨가 200여 년 전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남규슈 삼국을 다스렸고, 그 후에 막부로부터 독립적인 성향으로 겉돌다가 그사이에 사쓰마를 제외한 다른 두 나라를 잃게 되었으며, 그러다가 아시카가씨가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릴 때 줄을 잘 서서 다시 남규슈를 얻게 되었음을, 그리고 그런 주제에 다시 독립적인 노선을 걷다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적어도 몽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몽주가 그런 사실들을 잘 안다는 걸 모로히사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에 나는 떳떳하게 죽을 자격이 있다!”
흥미 없이 듣던 몽주는 다음 순간에 조금 흥미가 생겼다. 구명의 청이 아닌 의외의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자진 할복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달라! 그리고 나의 시체를 농락하지 말아 달라!”
할복이라…….
현대에서야 ‘거참, 미친 짓도 여러 가지네.’라고 비웃었던 풍습이지만, 당대에서 정말 그것을 무사로서의 품위인 양 요구하는 말을 들으니, 솔직히 구경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굳이 저런 걸 들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기습적으로 들이닥치면 투신할 여유도 없을…….”
“보고 싶군.”
“……하면, 모로히사의 머리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할복의 요구를 들어주면, 모로히사가 자신의 시신을 훼손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요구도 들어줘야 할 테니, 탁기는 그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은가.”
몽주의 결론은 간단했다.
* * *
왜국에서 할복(셋푸쿠 : 切腹)이라는 풍습 아닌 풍습이 처음 생긴 건 헤이안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이 유행(?)이 된 건 근래의 일이었다.
무사 계급이 강성해짐에 따라 그들 나름의 명예가 허세화된 죽음의 절차.
몽주는 현대에서 공부하면서 본 할복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일본 역사에 할복에 대한 기록은 수도 없었으나, 사실 정말 흔히 사무라이 영화 같은 미디어를 통해 보인 할복처럼 비장미 넘치는 할복은 드물다는 게 역사적 판단이었다.
아무리 무사의 명예라는 허위에 세뇌된 자라고 해도 자기 배를 스스로, 정말 죽을 만큼 깊이 찔러 가르는 짓이 가능할 리가 있을까.
하여, 할복으로 기록된 죽음 중에서 진짜 배를 가른 것이 사인이 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할복을 선언한 모로히사를 보는 몽주의 시각은 정말 할 수 있느냐는 것에 맞춰 있었고, 그것이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한데, 그 할복이라는 게 이토록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미 할복의 작법이 정해져 있어, 그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몽주가 그것을 허락하긴 했는데,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꽤 성가신 일이었다.
몸의 청결을 위해 목욕 재개 같은 거야 그나마 이해할 만 했는데, 제대로 머리 모양을 낸다고 한 식경이나 쓰고, 올바른 의복을 구해 오느라 다시 한 식경을 더 보내니, 할복을 허락한 몽주로서는 후회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거기다가 할복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반쯤 무너진 성내 가옥 중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 흰 천을 구해 와 깔기도 했다.
그 후에도 최후의 만찬인 양 음식과 술을 요구하기도 했고, 그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심에도 복잡한 예법이 있었다.
그냥 저 빌어먹을 가옥에 불을 질러 버리라는 명을 내릴까 말까 고민할 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술상이 치워지고, 나무 쟁반 위에 흰 종이에 감긴 단도가 올려졌다.
모로히사가 그 쟁반을 앞에 두고 흰 천 위에 무릎 꿇자, 그쯤부터는 슬슬 비장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몽주도 여태껏 쌓은 불만을 풀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는데, 모로히사가 눈을 감은 채 무어라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늦게 역병을 통해 그의 말을 전해들으니, 그를 최후까지 수호하였고, 지금 할복의 절차를 도운 무사들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남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흘러나옴에 따라 주변에 시위하던 시마즈씨의 무사들 사이로 흐느낌이 들리기 시작했다.
“오토모 가독, 다음 생에서 함께 복수합시다.”
무사들을 향해 유언을 남기던 모로히사가 한쪽 구석에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던 오토모씨의 가독에게까지 말을 남기자, 마지막으로 말문이 향한 곳은 몽주였다.
“탐라공, 지금은 그대가 이겼소이다. 하나, 시마즈씨는 아직 패하지 않았소. 오래전 시마즈씨가 오스미와 분고를 잃고도 결국 다시 되찾은 것처럼, 시마즈씨는 다시 부활할 것이오!”
“…….”
역병이 유언을 전해 주었지만, 몽주는 딱히 반응하진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그가 어서 단도를 손에 쥐길 기다릴 뿐이었다.
몽주가 무반응하자, 모로히사는 잠시 눈을 치떠 몽주를 노려보다가 크게 호흡을 하곤 쟁반 위에 단도를 마침내 손에 들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한 중에 모로히사가 왼손에 단도를 쥔 채 오른손으로 옷의 고름을 풀어 헤쳤다.
양손으로 쥔 단도를 눈높이까지 들어 보인 모로히사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안 그런 척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보였다. 그게 추한 건 아니었다.
누구나 자결할 참에 이 정도의 두려움은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
모로히사는 한참이나 단도를 쥔 채 떨었다. 차 한 잔을 마칠 시간 가까이 그러고 있던 와중에 어느 순간, 그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눈을 세게 감았다.
“히앗!”
단말마 같은 고함과 함께 모로히사는 역으로 쥔 단도를 힘껏 자신의 배에 찔러 넣었…….
“아아……!”
……는 줄 알았으나, 모로히사의 배에 박혀 흰 옷에 붉은 무늬를 만드는 단도는 그 뾰족한 끝만 조금 들어갔을 뿐이었다.
물론, 조금 들어갔다고 해서 살가죽을 찢긴 고통이 줄어들진 않을 터이니, 모로히사는 무릎 꿇고 있던 다리를 경기하듯 폈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얇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다음 순간 스스로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얼른 다시 무릎 꿇고 앉아서는 양손으로 다시 단도를 아랫배에 밀어 넣으려 애를 썼다.
“으아악!”
하나, 아까 본 우스운 꼴이 다시 반복되었다. 아무리 밀어 넣으려 해도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 신체가 반사적으로 양손의 힘을 풀어내듯 경기를 일으켰다.
모로히사의 이마가 흥건한 땀은 고통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지만, 부끄러움의 흔적이기도 했다.
아마 자신이 할복할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인데, 생각과 달리 태연하게, 명예롭게 배를 가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 마구 소리치니, 역병이 정확한 통역 대신 그저 스스로를 욕하고 있다고 전할 뿐이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미 할복하지 못함이 분명해졌다.
시뻘게진 얼굴로 무어라 마구 소리치며 단도를 힘껏 쥐고는 배에 박아 넣으려 했지만, 다음 순간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뒹굴었다.
몇 번이나 그랬음에도 단도는 더 깊이 들어가기는커녕, 마지막에는 오히려 떨어져 나오기까지 하였다.
어찌 보면 참으로 애달픈 순간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희극적인 모습이었다.
몽주를 시위하는 탐라 군병들 사이에서는 코웃음 소리마저 들렸으니, 아까 함께 비장한 분위기에 젖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시마즈씨의 무사나 오토모씨의 가독도 고개를 돌린 채 모로히사의 추태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담담한 표정으로 모로히사에게 끝까지 시선을 두는 자는 오히려 몽주였다.
그건 예의를 차리기 위함이 아니라,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왜 도우미를 안 쓰지?’
도우미, 그러니까 가이샤쿠(介錯)라 하여, 할복자가 배를 가르면 뒤에서 목을 쳐 주는 자가 없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할복한 직후의 고통을 감해 주기 위해 목을 쳐서 죽여 주는 자가 있었다면, 어쩌면 모로히사도 조금 더 힘을 낼 수도 있었을…….
“하긴, 그래 봐야 결국 웃기는 짓이지…….”
아마 아직 할복의 작법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건 아닌 모양이라고 결론을 내린 몽주가 비웃음 어린 입으로 중얼거릴 때, 고통에 나뒹굴다가 자빠져 헐떡이던 모로히사가 몸을 일으키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물기 젖은 말을 토하였다.
“나, 날…… 그냥 죽여 주시오…….”
몽주는 너그러이 그 요구를 받아 주었다.
그날 노을 진 하늘 아래, 오카성에서 사로잡힌 자들 중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들의 목이 모조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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