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
* * *
붉은 드레스를 입은 미녀 진행자가 잠시 휴식을 마친 후, 다시 경매 단상 위로 올라왔다.
경매품이 올려져 있는, 그러나 주단에 가려져 있는 단 옆에 서서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경매 참가사들을 향해 인사를 한 뒤, 전체 조명이 꺼지며 핀 조명이 그녀를 비추었다.
“고려 말,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라는 망국의 조짐이 가득했고, 왜구들이 창궐하여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은 그 혼란이 가시길 바라면서 동시에 생존을 갈구하였습니다.”
지극히 피상적인 고려 말기에 대한 감정적인 설명이었지만, 진행자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자식들의 안전과 장수였습니다. 설령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아들딸들이 잘 살길 바랐던 것이죠. 사실 그런 바람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 그 염원을 담은 물건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아쉽게도 부모의 염원이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염원에 깃든 진심과 정성은 칠백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마침과 함께 그녀를 비추던 핀 조명이 꺼지고, 대신 또 다른 핀 조명이 주단에 덮인 경매물을 비추었다.
그리고 직후 진행자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주단을 들어 경매물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조명 덕일까, 원래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는 판옥의 담청색이 한결 멋스러워 보였다.
“이 판옥에는 한 문장의 글귀가 정갈하게 음각되어 있습니다. 본래 마치 상감 청자처럼 그 파인 글귀엔 자토(瓷土)가 채워져 있었으나, 시간의 무게로 인해 지금은 거의 다 떨어져나간 상태입니다. 하나, 그 글귀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진행자는 호흡을 한 템포 쉬곤 감정을 담아 그 글귀의 의미를 말해 주었다.
“대의왕이시여, 내 몸의 광명을 바치어, 내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나이다.”
천천히 글귀를 해석한 진행자는 잠시 여운을 남기곤 미소 지었다.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담긴, 고려 말의 연옥판에 대한 경매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경매 시작 선언과 함께 객석에서 약간의 수군거림과 낮은 소음이 흘러나왔다.
별건 아니었다.
이미 앞선 경매 때마다 봤던 장면이었다.
이 경매 방식은 목소리가 아닌 PDA 입력을 통해 호가하는 것만 다른 게 아니었다.
경매 시작 후 1분간은 각자 경매가를 입력하고 이후 최고가를 확인하여 거기서부터 다시 레이스 경쟁을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최초 경매가도 당연히 감정가 이상이어야 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1분이 지났다.
인이어를 통해 최고가를 전해 들은 진행자가 말문을 열었다.
“현재 최고 호가는 일억 삼천입니다. 일억 삼천, 추가 호가하실 분 계십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제실에서 추가 호가가 몇 개 등록되었다.
그사이에 진행자가 옥판을 받치듯 가리키며 추가적인 설명을 이었다.
“직접 보고 계시듯 이 옥판은 연옥입니다. 연옥은 가장 아름다운 담록의 색을 가지고 있으나, 의외로 약한 면이 있어 사실 오랜 세월을 견디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하나, 그럼에도 이 연옥판은 금 하나 없이, 흠집 하나 없이 장구한 시간을 견뎌 내었습니다. 저는 감히 이것이 자식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부모의 정성 어린 마음 덕분이라 단언합니다.”
이어 관제실로부터 현재 최고 호가를 확인한 진행자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최고 호가 일억 구…… 아니, 이억 일천입니다. 이억 일천! 추가 호가를 기다립니다.”
호가는 이어졌고, 이억 팔천에 이르렀을 때가 되자, 서서히 경매 참가자들의 호가가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 * *
“이억 팔천만 원이라…… 기대 이상이긴 하군요.”
관제실에서 경매관 상황과 입찰 상황을 모니터하던 몽주는 내심 만족스럽게 말했다.
다만, 가장 마지막에 내놓은 경매물인 만큼 최고가를 기대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아뇨, 아직 현두 그룹 사모님이 입찰하지 않으셨어요.”
하나, 방 실장은 조금 더 기대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입찰하실 의향이 없나 보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면 되겠죠.”
그녀는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형 마이크에 달린 버튼을 두 번 정도 눌렀다.
그러자 경매 단상의 진행자가 새로운 정보를 객석을 향해 내놓았다.
“참고로 이 연옥판은 앞서 경매한 약사불 입상과 함께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둘이 한 세트라는 것이죠. 연옥판의 글귀에 나온 대의왕은 대의왕불을 가리키는 것이며, 대의왕불이 바로 약사불을 의미하는 것이니, 왜 둘이 한 세트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세트 템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은 또다시 호가의 폭발을 일어 내었다.
“사억! 사억 오천! 오억 오천!”
미녀 진행자의 목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 * *
“헐…….”
연옥판과 앞선 약사불 입상이 한 세트라는 것에 가치가 확확 뛰어오르는 것에 몽주는 혀를 내두르며 방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여섯 분 정도가 경쟁하고 계시군요. 그중 한분은 현두 그룹의 사모님이시고요.”
“……혹시, 약사불 입상을 낙찰 받은 사람이 현두 그룹의……?”
“네, 맞아요. 그러니 관심 없으셨다가 약사불과 한 세트라는 말에 저렇게 달려드시는 거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뭐죠? 약사불을 이미 잃었는데…….”
“글쎄요. 사람 심리를 정확히 아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다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약사불을 경쟁하다가 실패해서 억울한 사람이 그냥 야료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든 사 놓으면 현두 그룹 측에서 재매입하려 할 때 더 비싸게 팔려고 그러는 걸 수도 있겠죠. 혹은 현두 그룹과 관계 개선을 위해 쓰려 하거나. 아, 이미 약사불의 주인이 누군지는 객석에도 대충 알려졌을 거예요. 현두 그룹 사모님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상태니까요. 근데 말이에요…….”
방 실장은 말꼬리를 늘리며 모니터에 비친 연옥판을 보며 말을 이었다.
“기본적으로 연옥판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계속 경매에 참가하고 있다고 전 생각해요.”
“그 매력이라는 게 칠억이라고요?”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에 호가는 7억대로 올라선 상태였다.
“보세요. 경매 참가자들 중 딱 봐도 대리인인 듯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40대 중년 이상의 나이를 가지고 있죠. 적어도 아이가 하나쯤은 있을 사람들이고, 손주를 본 이들도 많을 거예요. 저 돈 많은 사람들이 자식과 손주에 대한 사랑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을 때, 지금 경매되고 있는 연옥판은 썩 괜찮은 물건이죠. 700년을 이어 온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부서질 수도 있음에도 견뎌 내어 전해진 그 진심. 구체적인 스토리는 없더라도 그 맥 자체가 진하잖아요.”
그 순간 8억이 호가되었다.
* * *
몽주가 내놓은 경매물의 최종 매출은 22억 4천만 원.
막판 두 경매물이 8억 원과 8억 2천만 원에 낙찰된 덕이었다.
몽주에게 두 장의 서류가 전해졌다.
회사 측과 나누고, 세금 납입을 처리했을 때, 그의 손에 쥐어질 금액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나는 한양 옥션 측과 2 : 8로 나눈 것이고, 다른 하나는 3 : 7로 나눈 것이었다.
각각 세금까지 떼면 대략 12억 원과 9억 원 정도였다.
“세금이 세네요.”
“불로소득으로 취급하니까요.”
“그래도 로또 당첨된 셈이네요.”
“호호, 축하드려요.”
성공리에 경매를 마치고, 한양 옥션 부사장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방 실장과 독대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경매가 성공적으로 끝났기에 축하할 일만 남았겠지만, 몽주는 아니었다.
“이제 그 중국 고미술품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경매가 잘 마무리되어 기분이 좋은 몽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나갈 기세였다.
“잠깐만요.”
방 실장은 그를 자제시키곤 전화를 들어 누군가를 불렀고, 곧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등장하였다.
“몽주 씨를 위한 경호원들과 저희 직원들이에요.”
“아, 예.”
사내들 중에는 지난번 장도리 사건(?) 때 얼굴을 본 이도 있었다.
“이제 나가시면, 몇몇 사람들이 몽주 씨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누구죠?”
“기자들과 문화재청 직원들. 몽주 씨가 할 일은 간단해요. 이걸 쓰고 경호원들이 안내하는 대로 곧장 차량에 올라타면 되는 거죠. 기자들이 질문을 던질 것이고, 문화재청 공무원들도 몽주 씨를 잡아 세우려 할 거예요. 다 무시하세요. 그들은 우리 회사에서 대응할 테니까요.”
방 실장이 그에게 마스크와 모자를 건네며 말했다.
“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지만, 몽주로서는 조금 긴장되었다.
기자들? 아마 문화 쪽 담당 기자들일 것이다.
고려 시대 고미술품들이 대량으로 풀렸고, 그중 두 점은 상당한 금액으로 낙찰되었으니, 충분히 기사화될 법한 것이다.
문제는 공무원들이었다. 문화재청이라 공권력과 상관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공무원 아닌가. 그냥 무시해도 되는 건가 싶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문화재청이라고 해도 증거도 없는데 당장 몽주 씨를 어떻게 하진 못해요. 지난번에 대충 말씀드렸죠? 그들이 몽주 씨를 압박하는 건 간접적인 방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괴롭힘에 일일이 상대해 봐야 괜한 힘을 빼는 거니, 도망치는 게 최고예요.”
“그럼?”
“내일 안에 출국하시죠. 오늘 물건들 확인하면 곧바로 홍콩으로 가고, 아니라면 가까운 일본으로 가세요. 그리고 원하신다면 가족분들도 함께 가실 수 있게 주선해 드리죠. 다만, 가족분들의 출국과 체류에 관한 비용은 몽주 씨가 내셔야 해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해외로 도피하듯 출국하는 게 마음에 걸릴 따름이었다.
하나, 괜히 한국에 남아 있다가 문화재청의 괴롭힘이나 흘러나간 신상 정보로 이상한 인간들이 몰려들 걸 생각하면 잠시 피해 있는 게 나을 것이다.
“갑시다.”
몽주와 방 실장은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회사를 빠져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기자들이 달라붙었고, 그 사이로 공무원들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지만, 몽주는 방침대로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곧바로 승합차에 올라탔다.
“후우…….”
승합차는 곧바로 몽주가 대여해 둔 개인 금고가 있는 은행 지점으로 향하였다.
따라오는 차는 없는 듯했다. 하긴,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은행으로 들어간 몽주는 10분도 안 되어 돌아왔다. 들어갈 때 가벼웠던 가방은 어느새 묵직해져 있었다.
달리기 시작한 승합차 안에서 몽주의 가방 속 물건들이 조심스럽게 하나씩 밖으로 꺼내졌다.
먼저 나온 건 황동불상인 여래입상이었다.
따라온 한양 옥션 측 감정사는 잠시 살피자마자 감탄의 목소리를 내었다.
“북송 시대의 것이군요. 그것도 건국 초기의 것입니다. 당의 화려한 문화가 채 가시기 전의 것이지요.”
감정사의 말에 몽주보다 방 실장이 먼저 흥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확실히 진품이라는 거죠? 북송 시대의 것이고?”
“그렇습니다. 이건 더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송 건국 초기의 것입니다. 시대가 명확한 물품을 두고 감정사끼리는 흔히 도장이 찍혔다고 표현하는데, 이게 바로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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