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0)
* * *
아직은 그저 요동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곳의 어느 하늘 아래에 5천의 인파가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녹둔도로 돌아가는 길.
귀환길은 진격 때에 비해서 확연히 느렸다. 2천 명이 넘는 포로들, 그 모두가 가임기(可姙期)의 어리고 젊은 여인들인 터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만큼 적의 급습에 더 위험해졌다.
탐라 연합군의 태세가 적의 공격을 경계하기보다는 포로들의 탈주를 막는 데 집중되어 있어 군력이 흩어진 탓이었다.
하나, 다행히도 계곡길을 나와 토문강 중류에 이를 때까지도 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일란 할라의 우디거 부족 전사들이 소식을 들은 후에 바로 추격을 시작했다면 충분히 따라잡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건, 포기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탐라 연합군 대열의 분위기는 상당히 훈훈해졌다. 그리고 그 훈훈함은 거의 전적으로 포로인 여인들의 태도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부족 전사들에 의해 구출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인지하고 나자, 이제 그들의 생명 보존과 삶의 질이 탐라 연합군, 특히 오도리와 후르하 부족 전사들의 손에 달렸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사내들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덕분에 벌써 눈이 맞은 남녀들이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부럽나?”
“……아, 아닙니다.”
“저 꾀죄죄한 여자들이 뭐가 그리 탐이 나나?”
“…….”
긁적긁적.
허호필 소령이 장난스레 놀리는 말에 한 군병이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워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는데, 쉴 때면 눈이 맞은 여인들과 전사들이 서로 만나 알콩달콩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어떤 자들은 쉬는 곳을 슬쩍 벗어나 짙은 수풀 안으로 숨어 들기도 하였다.
주션의 전사들이 여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에 비해, 탐라의 군병들은 기본적으로는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군기에 의한 자연스러운 제한일 뿐, 탐라 군병들이 우디거의 여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2천 명이 넘는 젊은 여인들이 있으면, 그중에 미녀라고 할 만한 여인들도 제법 있는 게 당연했으니, 사내라면 절로 그런 어여쁜 여인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녹둔도에 파견된 탐라 군병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들 홀로 타지에 온 터라, 아내가 있는 군병들도 홀아비 신세였고, 총각인 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장교들 중에서 몇몇은 적어도 홀몸인 군병들은 주션족 전사들처럼 우디거 여인과 교제하는 걸 허락해 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 왔고, 맹특목이나 아합출도 그에 별거리낌이 없다는 반응도 보였다.
어차피 주션족들의 입장에서도 여성이 부족해서 저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기 위해 주션족 전사들의 첩으로 삼으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허 소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괜히 주션족 전사들과 여인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군병들이 나오는 걸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 후에 탐라로 돌아갈 탐라의 군병들인 만큼 우디거의 여인을 취했다가 거취가 곤란해지는 경우가 생기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남녀 관계라는 게 명령에 따라 무작정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그저 빠른 시간 안에 녹둔도를 확고한 탐라의 고을로서 자리매김할 필요성, 군병들이 가족과 함께 살고 가족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 정도를 느꼈다고나 할까?
어쨌든, 한 식경가량 쉰 후에 다시 탐라 연합군과 포로 여인들이 이동을 시작했으니, 그들의 앞길에는 훈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훈춘에서 허 소령은 생각지도 못한, 아니, 생각한 바는 있지만, 그 생각을 월등히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다.
훈춘 북쪽 계곡 입구로 나오자마자, 즉, 예전에 타온 부족이 있던 곳에 닿자마자, 한 무리가 우르르 말을 몰아 달려왔던 것이다.
정확히는 한 무리는 아니었고, 여러 소부족의 부족장이나, 그 대리인들이 한데 뭉쳐 있었다.
탐라 연합군의 전사들이 앞으로 나서서 달려온 자들을 일단 가로막았고, 허 소령이 두 부족장과 함께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오?”
맹특목이 허 소령의 왼편에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크게 소리쳐 물으니, 전사들에게 막힌 훈춘의 무리들이 10미 전방쯤에 서서 자기들끼리 눈짓을 하는 게 보였다.
그중 하나가 여러 인물들의 눈빛을 받고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입을 크게 열어 고함쳤다.
“먼저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주션족의 원수이자 배신자인 우디거 부족을 크게 무너뜨리고 닝구타까지 점령하신 것에 대해 크게 감축드립니다!”
훈춘의 북쪽 투먼강 중류에서의 싸움이야 다른 주션족들이 관망하였음을 알고 있었지만, 닝구타에서 있었던 일까지 알려졌을 줄은 허 소령도 몰랐다.
하기야 소수의 전사가 숲 속에서 몰래 멀리서 쫓고, 관찰했다면 탐라 연합군의 입장에서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 소령이 피식 실소를 짓자, 맹특목이 그 웃음을 받아 같이 웃음을 흘리고는 소리쳤다.
“고맙소이다. 한데, 감축이나 하려고 이렇게 많은 자들이 몰려온 것이오?”
“그, 그렇기도 하오만…….”
대표로 대화를 나누던 자가 궁색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다시 말하였다.
“긴히 할 말이 많으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가 준비한 곳으로 가십시다. 주션족의 체증을 해소해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큰 잔치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말이 통역되어 전해지니, 허 소령은 훈춘의 주션족들이 왜 이리 들떠서 몰려들었는지 짐작했다.
지금 몰려온 자들의 표정이나 그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흥분 어린 표정은 탐라 연합군의 승전을 마치 자신들의 승리처럼 생각하는 것에서 기인했을 테고, 탐라 연합군 중 탐라 군병들의 무장과 뒤에 끌려오고 있는 화포를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그들이 과소평가했던 탐라의 군력을 다시 평가했음이 분명했다.
또, 어마어마하게 끌려온 우디거의 포로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탐라 연합군의 승리에 대해 전해 들은 게 과장이 아닐까 했던 일말의 의심조차 지웠을 것이다.
‘주군, 눈덩이가 이제 커질 때가 된 듯합니다.’
허 소령은 속으로 주군께 보고를 올리며 맹특목과 아합출에게 저들이 마련한 연회에 참석하자고 허락 내지 권하였다.
하여, 근처에 군진을 차리고 잔치를 연다는 한 오도리 소부족의 군락으로 향했는데, 그 길에 사방으로 보이는 훈춘의 모습이 전에 지나갔을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에 산천초목이 크게 달라질 리는 없었고, 그 낯선 느낌은 오로지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원래 훈춘에 이처럼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었소?”
허 소령이 양쪽에 따르는 두 부족장에게 물으니, 그중 아합출이 껄껄 거리며 답하였다.
“우리의 승리가 주션족들 사이에 퍼져 이곳으로 몰려오게 만든 것이겠지요. 아까 몰려온 자들 중에서도 전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소부족의 전사들도 있었습니다.”
허 소령이야 그 부족이 다 그 부족 같아서 구별하지 못했지만, 주션족의 부족장들은 구별이 가능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훈춘 분지의 중심부로 가면서 시선을 두는 사방 곳곳에 전에는 없었던 부족의 군락이 보였다.
예전 같으면 자기네 군락 근처에 새로운 군락이 생기는 걸 허락할 리가 없을 다른 주션족 소부족들이 그것을 방치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주션족들이 훈춘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그렇게 새로 훈춘으로 유입된 주션족들 모두 아마 탐라 연합군을 따르기 위해 모였을 것임을 짐작하니, 허 소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서렸다.
물론, 그많은 많은 부족과 부족민들을 조율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기도 했지만, 주군으로부터 받은 명이 있고, 어깨에 지워진 기대가 있는 허호필로서는 환영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날 밤, 훈춘 분지의 중앙에 위치한, 그래서 훈춘에서 가장 큰 소부족인 오도리의 한 부족 군락에서 크게 잔치가 열렸으니, 훈춘이 주션족의 중심이 된 이래 그 어떤 날보다도 축제와 같은 날이었다.
동시에 부족장의 게르 안에서는 삼십에 이르는 부족장들이 모여 주션족의 앞날을 논하였으니, 사실 논의라기보다는 탐라 연합군을 이끄는 허호필의 뜻과 주션족들이 바라는 바에 대한 조율과 타협이 진행되었다.
“내가 약조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대들이 말을 키우고, 사냥을 할 수 있는 땅과 약간의 식량 지원뿐이오. 그 이상은 내가 약속할 수 없고, 아마 내 주군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것이오.”
주션족들에게 주는 것은 사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 * *
스오국 내 동편에 위치한 오우치 가문의 한 장원에 몇몇의 가마와 말들이 몰려들었다.
“어쩌실 요량이시오?”
물음을 받은 오우치 히로요는 차 한 모금을 마신 후, 그 질문을 고스란히 다른 자에게 넘겼다.
“어쩌실 생각이시오?”
오우치 가독의 물음을 받은 상대는 스오국의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아키국의 국주 다케다씨의 가독 노부하루(武田信春)였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몸을 조금 흔들고 있을 뿐, 답을 빠르게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를 재촉하진 않았다.
다른 자들은 탐라의 군력을 걱정하는 것에 불과하였지만, 다케다씨는 이미 실질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피해가 다케다씨의 실책에 의한 것이라 동정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쨌든 다케다 노부하루에게 잠시 시간적 여유를 줄 정도는 되었다.
“나는…… 우리 가문은…….”
한참 뜸을 들이다 노부하루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약조한 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소?”
“오우치씨가 감당한 것을 알고 있는데, 제가 엄살을 부릴 수는 없지 않겠소.”
“…….”
그 말인즉슨, 자신의 장남이 이끄는 함대가 탐라의 함대에게 당하여, 장남의 생사마저 불확실한 것이 안타깝고, 만약 장남이 포로가 되었다면, 계속 탐라에 대항하는 것이 그를 위태롭게 할 테지만, 오우치씨가 북규슈를 얻는 과정에서 차남과 삼남을 잃고, 장남이 가문을 떠나게 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얼핏 그만큼 작정했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했지만, 어찌 들으면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오우치 히로요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야 아직 아들이 셋이나 있지만, 다케다씨는 손이 귀하지 않소?”
“가문의 대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우려할 필요는 없소.”
그의 아들은 둘뿐이었지만, 남자 조카가 셋이나 있어, 대를 이을 걱정은 없다는 말로 일종의 자존심을 지킨 노부하루는 히로요를 향해 물었다.
“오우치씨야말로 심경의 변화가 없는지 알고 싶소만…….”
“걱정 마시오. 약속은 칼날같이 지킬 터이니.”
남규슈의 시마즈씨가 선봉이라 치면, 막부 아래 연대한 서국의 여러 나라들 중 오우치씨는 반탐라의 중심이라 할 만한 나라였다.
출병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지정학적으로 탐라의 서규슈를 압박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탐라가 남규슈를 먼저 칠 것은 명확한 바, 탐라가 남규슈에서 힘을 소모하고, 내해에서 크게 몰락하면 곧장 오우치씨가 서규슈 공략에 앞장서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만약 계획대로 서규슈를 무너뜨리면 오우치씨는 지코쿠(축후)국을 얻고, 시마즈씨는 히고(비후)국을 얻으며, 데카이가 속한 비젠(비전)국은 막부에서 새로 슈고를 임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탐라는 서규슈를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그 특성상 왜국과의 거래를 끊을 수 없을 것이므로 잠시간의 냉각기를 거친 후에는 다시 데카이를 열어 고려와 탐라의 물산을 교역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서국 전체의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것이 애초에 서국의 연대를 제안했던 시마즈씨의 주장이었으며, 막부와 서국이 동의한 바였다.
하나, 문제는 시마즈씨와 오토모씨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케다씨의 열혈 장남이 고집을 부려 지원군을 몰아가다가 하필 탐라 함대와 맞닥뜨리게 된 것 또한 따지고 보면 시마즈씨가 너무 빨리 무너진 탓이었다.
탐라군이 그 규모보다 더 강력한 군력을 소유하고 있음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건 화포의 도움을 크게 얻을 수 있는 바다와 연안에 국한될 뿐이지, 내륙에서는 잘하면 일거에 깨부술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주 큰 착각이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미 알려진 탐라의 화포보다 작은 화포가 따로 있는데, 작고 가벼워 사람이 지고 이동할 수 있음에도 그 위력은 본래 화포에 못지 않다고 하였고, 그 작은 화포로 내륙에서도 연안과 마찬가지로 탐라군이 강력한 투사력을 보였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불안하군요.”
이 자리에 모인 여러 슈고들 중에서 이와미(石見)의 국주 야마나씨의 가독 도키우지(山名時氏)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무엇이 불안하다는 말이오?”
“지금 우리의 계획은 두 가지 전제하에 정해진 것이었소. 하나는 남규슈가 최대한 버텨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해에서 탐라의 수군을 크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오.”
도키우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이미 남규슈가 재기 불능에 이른 것은 예견되는 바이니, 우리 계획에는 벌써 차질이 발생하고 있소. 이런 와중에 만약 내해에서의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면…… 혹은 이긴다 하더라도 탐라의 수군을 크게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서국 일대는 탐라군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오.”
“너무 과한 우려 아니오? 탐라의 수군이 강대하긴 하나, 이미 점령한 남규슈만 해도 탐라로서는 체증을 일으킬 정도일 것이오. 그런 중에 무슨 힘이 있어 서국의 아무 곳을 침범할 수 있겠소?”
누군가의 반론에 도키우지가 고개를 저었다.
“단편적으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오. 나도 얼마 전까지는 마찬가지였소. 하나, 그런 예상은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의 탐라군을 두고 한 것이지, 지금 남규슈의 시마즈씨와 오토모씨를 박살 낸 탐라군을 염두에 두고 가정한 것이 아니오. 비단 그 작은 화포뿐만 아니라, 탐라의 국공은 서규슈의 무사들마저 동원하였다지 않소? 그 수가 1만은 족히 넘는다 전해지니, 만약 탐라가 지키고자 작정한다면 누가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겠소? 그리고 규슈를 지키는 중에 수군이 남과 북에서 주코구와 시코구를 습격한다면, 서국의 국주들 중 홀로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오.”
도키우지의 불안한 지적을 들은 오우치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오. 하나, 그런 우려 또한 결국 우리가 내해에서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경우에 한한 것 아니겠소. 왜국과의 교역을 끊을 수 없는 탐라는 어떻게서든 이번 싸움을 빠르게 종결짓고자 할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내해에 들어와 우리와의 싸움에서 이기려 들 것이오. 그것이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첩경이니까. 하여, 내해에서의 싸움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 반드시 있을 싸움에 대비하여 우리는 온 힘을 모았으며, 어떻게 봐도 지는 게 이상할 정도의 전력을 구축하고 있소. 그러니, 결국 내해에서 탐라군을 크게 무너뜨리면 야마나씨의 우려는 기우가 될 것이오.”
“확신하시오?”
“무엇을 말이오?”
야마나 가독의 물음에 오우치 히로요가 되물음으로 받은 이유는 짧은 시간 동안 오간 말 중에 확신해야 할 거리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확신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이오. 하나는 탐라가 우리 화국과의 교역을 끊지 못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전쟁을 빠르게 종결짓고자 할 것이라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세토 내해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예상이오.”
“이미 언급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다시 말하자면, 내 대답은 둘 다 그렇다는 것이오.”
히로요의 답이 있은 후, 그와 도키우지는 잠시 눈싸움을 벌이듯 시선을 고정하였다.
“이보시오, 가독.”
“…….”
시선이 오간 끝에 도키우지가 히로요를 부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오래전에 같은 배를 탄 바 있었소이다. 그렇지 않소?”
“…….”
“그때도 가독은 꽤 많은 수를 염두에 두고 움직였소. 그것이 나는 꽤 불안했지요. 그리고 그 불안이 아주 허황된 것 또한 아니었소.”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그때처럼 지금도 가독이 혹여 딴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불안하오. 사실 내가 앞서 말한 모든 불안함보다 그것이 앞서 있을 정도로.”
“…….”
도키우지의 말과 함께 방 안의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오래전에 주코쿠의 여러 국주들이 막부에 귀의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히로요는 그에 동참하면서 동시에 규슈에도 손을 뻗어 그 중간자로서의 이득을 노렸다.
그런 히로요의 딴짓 덕분에 주코쿠의 여러 나라들 또한 막부에 귀의해 놓고도 그 충성의 결실을 제대로 얻지 못했으니, 특히 막부 귀의에 앞장섰던 야마나씨의 입장이 여간 곤란해졌던 게 아니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서국의 국주들도 반쯤 잊은 일이고, 실제로 근래에 들어 오우치씨가 막부 아래로 자처하기도 했기에 없던 일이 되었지만, 도키우지는 다시 히로요와 손을 잡고 일을 하게 되니, 절로 의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단 도키우지뿐만 아니라, 서국의 여러 국주들 또한 다시 오우치 가독을 얇은 눈으로 바라보니, 의심과 불안이 점철된 방 안의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후후…….”
한데, 따가운 시선이 집중된 중에 오우치 히로요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그건 누가 들어도 연출된 웃음이었다.
겉과 달리, 속은 분노, 혹은 어이없음이 가득한, 그런 낮고 음산한 웃음.
“앞서 이야기가 나왔으니, 잘 알고 있지 않소. 나는 아들을 셋이나 잃었소.”
“그게 모두 탐라공 때문은 아니지 않소? 오히려 가독이 가문의 성세를 위해 아들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누가 만들었소이까? 그 강요된 상황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와중에 어떻게든 한 줌이라도 남기기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결단한 것을, 정녕 내가 아들을 비정하게 버린 것이라 여기는 것이오이까?”
“…….”
“장남은 가문을 배신하고 료슌을 따르다가 팽당한 뒤, 제 살길을 찾기 위해 탐라공을 따랐고, 그놈은 탐라의 신하가 된 이후에는 눈앞에서 동생이 비참하게 죽는 걸 주인의 이득을 위해 쳐다만 보았소. 삼남이 죽은 것 또한 탐라공이 그 망할 쇼니씨와 결탁한 척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나는 아들들을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처지였소. 아시겠소? 내 세 아들은! 장남, 차남, 삼남은 모두 탐라공 때문에 내 곁을 떠난 것이란 말이외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싸움은 탐라와의 싸움이오. 그런데 내가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소이까?”
그가 잃은 아들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붉어진 얼굴과 그보다 더 붉어져 핏기까지 보이는 눈자위 앞에서 오우치 히로요를 향해 일말의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던 대부분의 국주들은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다른 싸움도 아니고 탐라공과의 싸움이었고,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오우치씨는 가장 큰 전리품을 얻는 자들 중 하나였다.
그의 전적에 믿음은 없었지만, 상황은 오우치씨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야마나의 가독 도키우지는 여전히 히로요를 직시하고 있었으니, 아직 심중의 의심을 다 지우지 않았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었다.
하여, 다른 참석자들이 다시 둘 사이의 알력이 크게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는데, 문득 바깥에서 알자가 다급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남규슈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었다.
“시마즈씨와 오토모씨가 멸문당했습니다. 그 성씨를 가진 자들은 모조리 목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
아까 히로요와 도키우지가 알력을 보이면서 식었던 건 지금에 비할 것도 아니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변하였다.
“끌끌…….”
그때 다시 히로요가 웃음을 흘리니, 이번에는 조금은, 정말 웃음 같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 끝에 차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긴 히로요가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탐라공에게 항복하면 우리 목은 성할 것 같소?”
그 말은 그 자리에 있는 서국의 국주들을 향해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 길임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그 또한 같은 배를 타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말이었다.
* * *
남규슈의 참사에 관한 소식이 전해진 뒤, 스오의 장원에 모였던 국주들은 서둘러 돌아갔다.
대가문인 시마즈씨와 오모토씨의 족속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건 그들 또한 탐라공의 손에 들어가면 구명할 방법도 없이 목이 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였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전쟁에서 이겨야 했다.
이미 준비할 만큼 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급해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적해진 장원에서, 히로요는 소수의 가신들과 함께 정원을 거닐었다.
그가 생각에 깊이 빠진 것이 뻔히 보이는 터라, 가신들 모두가 작은 소음도 자제하며 조용히 주인의 뒤를 쫓기를 한참, 문득 히로요가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토하였다.
“요시히로에게 서찰을 전한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오랜만에 히로요의 입에서 장남의 이름이, 이제는 다른 곳에서는 다의홍이라 불리는 자의 본명이 흘러나왔다.
“이틀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어느 가신의 대답에 히로요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하였다.
“내일 해가 지기 전에 당도해야 한다.”
“예!”
‘무엇을, 어떻게’와는 무관하게 가신은 가신답게 복명부터 하였다.
“한 시진 안에 서찰을 내어 줄 터이니, 너는 먼저 그 서찰을 보낼 자들부터 대비하게 하여라.”
“옛!”
한 가신이 급한 걸음으로 사라지자, 남아 있던 가신들 중에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판단이 있으십니까?”
히로요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질문한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우치씨의 가신단들 중 가장 큰 무리이자, 본디 오우치씨의 분가인 스에(陶) 씨의 가독이었다.
물론, 그 정도는 되기에 주인을 향해 먼저 물음을 올릴 수 있었다.
“서국이 일제히 힘을 합한다면 탐라에게 이길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엇박자가 있다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걸세.”
그리고 그 엇박자가 오우치씨처럼 중심이 되어야 할 곳에서 생긴다면 필패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히로요의 판단이었고, 불확실한 승리와 확실한 패배 속에서 그는 확실한 길을 선택했다.
하나의 확실함은 또 다른 확실함을 보장하니, 확실한 패배는 확실한 승리로 대신하면 된다.
아니, 어쩌면 대신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히로요는 또 한 번의 배신, 아니 냉혹한 승부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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