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1)
* * *
오카성에서 한바탕 ‘칼춤’이 있은 지 엿새째.
예정대로라면 어제 출항하여 내해에서 결전을 감행했어야 했다.
하나, 출항 준비를 다 마친 상황에서 몽주의 명에 따라 출범이 연기되었으니, 이는 다의홍으로부터 급하게 온 전령 때문이었다.
“비전국과 축후국의 방비를 강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막 안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 여러 생각들이 오가는 중에 탁기가 몽주에게 권하였다.
그러자 몽주는 싱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해 두지 않았나. 한데, 자네는 오우치 씨가 내 요구를 거부할 수도 있다 여기는 모양이군.”
“거부할 리 없다 여기십니까.”
“뭐, 굳이 가능성을 따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정말 오우치 씨가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그 정도의 피해는 감당하려 할 거야. 애초에 오우치의 가독 히로요가 내게 그런 뜻을 밝혀 온 것도, 오우치 가문 단독으로 크게 흥하길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테고.”
다의홍을 통해 온 오우치씨의 제안에 대한 탐라군의 판단은 이미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몽주의 판단은 이미 결정되었고, 그 답은 다시 다의홍을 통해 오우치씨에게 전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오우치씨가 수전에 동원한 군병의 수는 3천, 배도 30여 척. 다른 가문과 비슷한 수준이지. 오우치씨가 서국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가문임을 생각하면, 설령 그 군력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다른 가문에 비하면 큰 타격은 아닐 거야.”
몽주의 말은 오우치 히로요가 서찰에 밝힌 내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믿을 만했다.
서국이 내해에서 탐라군과 크게 부딪쳐 승리하는 것에 몰두한 바, 그 싸움을 틈타 서규슈와 맞붙어 있는 오우치씨의 북규슈를 통해 서규슈를 침탈하기 위해서는 오우치씨에게 따로 대군을 남겨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비슷한 수를 내해의 싸움에 투입하면 오우치씨의 군력이 평소보다 서국 주고쿠의 여러 가문보다 훨씬 더 우위에 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만약 오우치씨가 창머리를 돌려 서규슈 대신 주고쿠의 여러 주변 나라를 침탈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해에서의 싸움에 투입한 병력을 다 잃는다고 쳐도 오우치씨가 주변 나라들을 병탄하는 데 성공한다면 오우치씨로서는 큰 이익이라 판단할 걸세.”
“저는 사실 아직도 오우치씨가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수작을 부리는 건 분명하지.”
애초에 오우치의 가독이 제안한 것은 한마디로 ‘내응(內應)’이었다.
내해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 오우치의 수군이 반전하여 탐라의 편에서 싸우겠다는 제안.
하나, 이는 이미 또 다른 ‘내응’을 준비하고 있었던 탐라군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건 아니었다.
서로를 모르는 두 내응군 사이를 조율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힘든 일임은 물론, 믿을 수 없는 오우치씨에게 작전상의 비밀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몽주로서는 서국의 다른 나라들과 작당하여 서규슈를 위해하는 일에 동참했던 오우치씨를, 단지 작금의 상황을 유리하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무탈하게, 아니, 무탈한 정도를 넘어 이득만 얻게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내응을 거부하고, 오히려 진짜 싸우라고 요구하였다.
안 그래도 혼란하고 복잡한 전투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함이고, 오우치의 수군을 ‘희생양’이자 ‘제물’로 요구하고자 함이었다.
수군을 잃을 것을 감내한다면, 오우치씨의 제안을 조금 더 믿을 수 있을 것이고, 탐라에 대항하는 일에 협력한 것에 대해 모자라나마 벌을 주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탁기로서는 고개를 여전히 갸웃거렸다.
확실히 오우치씨가 거짓으로 그런 제안을 해 올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목표가 서규슈 침탈이라면, 아무리 탐라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다 하더라도, 미리 밝히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 주군께서는 오우치 수군의 전몰을 요구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오우치씨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기 어려웠다.
군병 3천이 아까운 것도 아까운 것이지만, 전투함 30여 척은 더욱 단시일 안에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지 않은가.
설령 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내해에서의 싸움을 틈타 주코쿠의 다른 나라를 침탈하여 병탄한다 하더라도, 바다를 끼고 영토가 나뉜 오우치씨의 입장에서 전투함의 상실은 안위에 여러모로…….
“……?!”
탁기는 한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는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 놀란 눈빛을 확인한 탁기의 주군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지만, 탁기는 그걸로 족했다.
주군께서 오우치씨에게 요구한 것이 단지 오우치 수군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만이 아님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 * *
오우치씨로부터 다시 답이 온 건 몽주가 오우치의 제안에 답한 지 나흘 뒤이자, 오카성에서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의 족속들이 목이 달아난 지 열흘 뒤였으며, 내해에 서국의 수군들이 티가 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인 지 삼 일 뒤이자, 몽주가 다시 현대에서 깨어나기 대략 이틀 전이었다.
여름이 깊어 가는 망종(芒種 : 6월 6일경)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하하하!”
몽주의 군막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진 다음 날, 탐라의 함대가 마침내 출항하여 세토 내해로 진군하였다.
* * *
녹둔도에 명국의 관리가 당도한 건 생각보다 다소 일렀다. 약속한 한 달까지 닷새는 남아 있을 때쯤 바닷길로 녹둔도에 닿았던 것이다.
이들은 바다로 황해를 건너고, 육로로 북면 함주까지 온 뒤, 다시 함주에서 요동공 측의 협조로 배를 타고 왔다.
녹둔도로 온 명국 관리의 수장은 전에 위국공과 함께 고려를 방문한 사신단에 속해 있던 자로, 병부시랑 추합(秋閤)이었다.
재밌는 건 추합은 명나라 개국공신 중 하나인 추유(秋濡)의 사촌인데, 추유는 본디 고려의 추계 추씨로, 조부가 충렬왕 시대의 명성 높은 유자인 추적(秋適)의 손자였다.
추적은 명심보감의 저자이기도 하여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는데, 사실 추적의 조상은 본디 중국인으로 추계 추씨는 송나라 고종 당시 문하시중이었던 추엽(秋饁)에서 비롯되었다.
즉, 추계 추씨는 본래 송나라에서 비롯되었다가 고려 인종 때 고려에 귀의하였고, 그 자손 중 일부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명나라의 개국 공신 가문이 된 것이다.
가문 자체가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걸쳐 있어서일까, 추합의 태도는 상당히 온화한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명나라에서 북벌과 관련하여 고려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일부러 고려와 인연이 있는 자를 보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덕분에 허호필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분위기는 일단 훈훈하였다.
추합은 녹둔도까지 오는 여정을 늘어놓으며, 그 고됨을 껄껄 웃음으로 승화시키면서 대화의 분위기를 이끌었고, 허 소령도 그에 맞장구치며 그 여정을 감내한 명 사신단을 추켜세워 주었으니, 분위기가 나쁠 리 없었다.
“한데, 탐라공이 약조하신 기마는 어찌 되었소?”
한참 웃으며 말을 나누던 중에 슬슬 추합이 녹둔도를 방문한 목적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허 소령은 곧바로 그에 대해 답하기 전에 주션족을 통합하기 위한 싸움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건 그저 명의 요구에 부합하였는지 여부를 밝히기 전에 그것이 탐라국의 굉장한 노력의 결실임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탐라군 일천과 녹둔도에 거주하였던 호인 부족의 전사 이천은 이곳까지 진격하였습니다.”
허 소령이 지도까지 펼쳐 두고 말하니, 탐라군이 쓰는 것이 아닌 당대의 일반적인 허술한 지도임에도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침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고작 삼천으로요?”
“그렇습니다. 두 번의 큰 싸움을 벌여 도합 일만이 넘는 적도를 소탕하였지요.”
허 소령의 말에 추합이 눈을 얇게 뜨며 그것이 참말일까 은근히 의심하는 눈빛을 보냈다.
전공을 과장한 것이거나, 혹은 나하추를 따르는 호인들의 전력이 약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
그러거나 말거나 허 소령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탐라를 따르는 녹둔도의 호인 전사들이 출중했고, 탐라의 화포가 제몫을 감당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도가 어리석었던 덕에 큰 전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대단하구료.”
그리 진정성없는 감탄이었지만, 허 소령은 그 말을 받아 다시 말했다.
“대단한 일이지요. 다만, 싸움에서 얻은 공업이 대단한 것이기 전에 그것이 만들어 낸 파급이 더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파급?”
“모르시겠지만, 요동에서는 숱한 호인 부족들이 있고, 그중 주션족은 몽골족과 그에 결탁한 다른 호인들의 핍박으로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지요. 그런 그들 앞에 주션족이 속한 일군이 나하추를 따르는 호인 전사들을 대거 무너뜨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에 주션족 호인들은 어찌 반응하였겠습니까.”
“……호응하려 했다는 게요?”
추합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 답하였으니, 허 소령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 제 주군께서 위국공에게 상당수의 기마를 약속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 무렵, 한 장교가 허 소령에게 눈짓을 보냈으니, 그가 몸을 일으키며 시랑 추합에게도 함께 군막을 나가자 청하였다.
“지금 밖으로 나가시면, 우리가 약속을 지켰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허 소령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말하니, 추합은 조금 얼떨떨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겨 군막을 나섰다.
사실 명국에서 지시받기를 탐라공이 5만의 기마를 장담하고, 한 달 후에 최소 2만의 기마를 선보일 수 있다 하였지만,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일 터이니, 말로써 훈계하여 분위기를 제압하되, 그 반절만 이루어도 대계를 깨지 말라고 하였다.
1만의 기마만 있어도 만족할 만하니, 전에 백산을 경계로 따로 나하추를 공격하고, 땅을 점령하기로 한 것을 고쳐, 명국의 군령을 따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추합의 생각에도 2만의 기마를 구한다는 건 아무리 녹둔도에서 호인들을 규합하여도 한 달 안에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데, 녹둔도의 사령관이라는 자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서니, 정말 이루었나 싶어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
어쨌거나 군막을 나서니, 앞서 녹둔도에 당도하였을 때와 별반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 몇 필과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이 좁아 모든 이들을 대령하기 어려워 북쪽에 따로 모아 두었으니, 그곳으로 가시지요.”
하여, 추합이 가마를 타고 말을 탄 허 소령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 십 리쯤 가는 사이에 허 소령과 추합의 일행 중에서 탐라의 군병들이 먼저 앞서 나가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추합은 더욱 궁금해져 허호필에게 제대로 답해 달라 청할 시기를 가늠하는데, 문득 먼 곳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우……!”
그리 목청 높은 함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내는 것이었다. 다만, 그 울림이 공명하는 규모가 듣기에도 결코 작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산자락을 지나 넓은 계곡이 등장하나, 추합은 그 낮고 웅장한 함성의 주인공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
들판이 가득 차 있었다.
기세를 보이고자 준비한 것임에 틀림없었으나, 허장성세는 결코 아니었다.
이쪽 산자락부터 저쪽 먼 곳의 산자락까지 계곡이라기보다는 평야에 가까운 넓은 곳에 한가득 사람과 말이 있었다.
허 소령이 말에 탄 채 손을 들자, 낮게 울리던 함성이 멎었고, 다음 순간 허 소령이 주먹을 쥐고 한 번 힘차게 흔들자 다시 환호가 터졌다.
“우아아아!”
이번에는 낮은 함성이 아닌 절규하듯 힘차게 지른 고함 소리였으니, 계곡 안에 메아리치는 인간들의 육성은 듣는 이의 혼을 흔들 만큼 우렁찬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저희는 약조한 것을 지켰다고 봅니다만…….”
“……수가, 기마의 수가 모두 몇이오?”
이미 약속의 기준이었던 2만의 기마를 넘겼음이 분명했지만, 추합은 얼떨떨한 가운데에도 기마의 수를 물었다.
“정확히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몰려오고 있으니까요. 다만 대략 3만 5천은 분명히 넘었습니다. 아마 빠른 시간 안에 4만도 넘길 테고요.”
주션족 전사의 수가 4만을 넘기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최근에 합류한 부족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합류를 위해 떠나올 때도 합류를 결정하고 이동을 준비하는 소부족들이 아직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탐라국과 함께 손을 잡은 주션족 전사들이 주션족의 배신자들인 우디거 부족을 두 번이나 크게 격파하고, 2천이 넘는 포로를 끌고 왔다는 사실이 이미 동요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주저하던 작은 주션족 부족들도 점점 더 거대해지는 탐라와 주션족의 기세를 파악하고 뒤늦게라도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있으니, 잘하면 탐라공이 과하다 싶게 장담했다 싶은 기마 5만을 달성하고도 남을 듯하였다.
어쨌거나, 명나라 병부시랑 추합은 기마의 수가 3만 5천이 넘는다는 말에 안 그러려고 해도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나하추의 기마 전사가 무려 20만이라는 소문도 있긴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3만 5천의 기마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만약 탐라공이 장담한 것처럼 5만의 기마를 모을 수 있다면, 명나라 입장에서는 확신할 수 없었던 양방 진군책에 보다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북원의 나하추도 한쪽에 전력을 몰아넣을 수 없으니, 명나라든 탐라든 산술적으로 절반의 전력만 감당하면 되는 것이고, 이는 승리의 가능성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북벌에 투입하는 명나라 군병의 수가 10만에 불과한 터라, 병부에서도 천자께서 너무 북방의 호인들을 무시하시고 계시는 건 아니냐며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중이었다.
명군 10만에 요동과 고려에서 많아야 4만을 더할 뿐이니, 나하추의 20만 기마를 상대하기에는 다소 무리라는 게 중론이었던 것이다.
물론, 흔한 선입견과 달리, 대군간의 싸움에서는 반드시 보군이 기마에 열세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명군에도 2만의 기마군이 있고, 그들의 무장은 호인들보다 뛰어나 적어도 전장에서 측면으로 침투하여 적진을 쪼개는 능력은 호인들보다 낫다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나하추의 20만 기마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는데, 만약 동남쪽에서 탐라와 또 다른 호인들이 5만의 기마로 나하추의 세력를 찔러 준다면 나하추 또한 군을 쪼개어 그에 대응할 수밖에 없을 테니, 명군 또한 훨씬 유리한 싸움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눈앞에 가득한 기마로부터 전해지는 함성과 무형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으며 이번 북벌의 흐름이 크게 변할 수 있음에 생각이 닿은 추합은 문득 벌떡 일어났다.
“대단하시오!”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천자께서도 크게 흡족하실 것이외다.”
추합은 허호필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만족함을 표현하였다.
함성 소리는 더욱 커지고, 마치 이미 싸움은 이긴 것 같은 분위기였다.
* * *
그날 밤, 다음 날 다시 떠나기로 한 명 사신단의 군막 안에서는 추합이 밤늦도록 고민하며 장계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미 거의 다 쓴 장계이지만, 마지막에 덧붙일 글에 대해 고심하던 추합이 마침내 붓을 들어 글을 써내려갔다.
궁서//……이처럼 탐라국이 동요동의 호인들을 결집시켜 대군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으니, 이번 북벌에 관해서는 분명 호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다만, 현득하신 천자께 어리석은 신의 우려를 한마디 올리자면, 만약 나하추를 무너뜨린 후, 약속대로 백산을 경계로 동쪽을 저들에게 주었을 때, 과연 그 경계가 만년에 걸쳐 지켜질 수 있겠습니까? 백산의 북쪽은 드넓은 초원과 황무지로 요하처럼 경계를 분명히 세울 수 없는 곳이니, 만약 북벌 후 명군이 서쪽 북원에 집중하거나, 혹은 향후 북쪽에 경계할 것이 사라져 명군을 철수시킨다면, 호인들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 세력을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이는 명군이 군사를 소모하여 또 다른 호인들을 득세하게 만드는 일이니, 천자께옵서는 이 점에 유의하셔야 할 것이며, 소신이 짧은 시간 동안 강구한 방책을 하나 올리자면, 미리 호인들 사이에 추명(推明 : 명나라를 좇다)하는 자들을 세워 저들 간에 분란과 경쟁이 생기도록 도모하심이 옳을 것이옵니다.//
* * *
탐라의 함대가 비후국을 떠나 시코쿠 이요국의 연안을 따라 세토 내해로 진입하자, 내해의 분위기는 마치 폭풍전야와 같았다.
어제 탐라 진형에서 탐지선을 보내 내해의 입구에서 살펴보았을 때만 해도, 내해 안에 여러 왜선들이 오가며 분주한 모습을 보였건만, 막상 탐라의 함대가 진입하자, 왜선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평소의 고기잡이배들마저도 찾기 어려웠다.
그게 오히려 의심스러운 징후였지만, 사실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해에서 큰 수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탐라군도 왜군도 다 잘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바였으니.
왜국의 지형도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세토 내해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존재했다.
얼핏 혼주(本州)의 주코구 지역과 시코쿠 섬을 징검다리처럼 연결해 놓은 듯 보일 정도로 많은 섬들이 놓여 있었으니, 사실 세토 내해라고 통틀어서 말하긴 하지만, 그 섬들로 인해 몇 개의 관문이 더 있는 셈이었다.
그중 첫 관문이라 할 만한 곳은 이요국에 거의 맞붙은 고고(興居) 섬과 나카지마(中島) 섬 사이의 해협으로 그 폭이 2길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좁은 수로를 통과해야 세토 내해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좁은 길목으로 들어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길목이 그나마 가장 넓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말했듯 세토 내해 내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고, 그 섬들 중에는 좁게는 수백 미, 심지어 백 미 이내로 바짝 붙은 섬들이 많았다.
나카지마(中島) 섬의 동북쪽은 마치 병풍처럼 작은 섬들이 늘어서 있어 말이 섬이지, 수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실제로는 연륙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첫 관문을 통과하는 대신 곧바로 이요국을 공격하고, 상륙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는 중에 왜선이 뒤에서 포위하고 돌진하면 피할 길이 없는 탐라의 함대는 곤란한 지경에 빠질 터였다.
하여, 먼저 왜군의 수상 전력부터 격파해야 그 후에 이요국이든 어디든 마음 편히 공략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나카지마와 고고 섬 사이의 길목은 잘 모르는 경우라면 굉장히 조심하며 지나야 할 곳이지만, 탐라의 함대는 한 차례 전초선을 보내어 살피게 한 후, 곧바로 통과를 시도하였다.
이미 노지마 무라카미로부터 얻은 정보가 있었기에 왜군이 결전을 준비하는 곳은 이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좁은 해로를 통과하여도 왜선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탐라의 함대를 맞은 건 거센 물살이었다.
바람이 거세지도 않았음에도 탐라의 배들이 흔들거리고 그 침로가 변하기 일쑤였으니, 안 그래도 좁은 내해 안에 가득한 섬들이 해류를 쥐어짜듯 하여 거세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긴장하라 하게.”
몽주도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명하니, 그건 물살이 거세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곧 왜국과 수전이 벌어질 곳이 다가오는 탓이었다.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한 세토 내해 중에서도 가장 백미인 곳.
이츠키 여울(齋灘)과 히우치 여울(燧灘) 사이의 동서로 40길 정도, 남북으로 20길 정도의 내해 안은 바다보다 섬이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밀집된 군도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섬들 중에 세 무리의 무라카미들이 거점을 잡고 있는 섬들도 있었으니, 가장 북동쪽의 인노시마(因島), 가장 남쪽의 구루시마(來島), 그리고 그 중간쯤에 노지마(能島)가 위치해 있었다.
명성 높은 아니, 악명 높은 무라카미들까지 사주하여 탐라에 대항하는 만큼, 무라카미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 군도 지역을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분명 왜국의 입장에서는 잘한 결정일 것이다.
탐라의 함대가 이요국 북쪽 반도 쪽에 붙어 군도 방향을 경계하며 천천히 나아갈 때였다.
마침내 반도 북쪽 끝과 6, 7길 떨어진 오미시마(大三島) 섬과 그 아래 오시마(大島) 섬 사이의 해협에서 왜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백 척이 조금 안 되는 왜선들은 그 해협에 길게 늘어서며, 마치 탐라의 함대에게 공격해 들어오라는 것처럼 도발하였다.
복잡한 군도를 뒤로 한 적선을 공격하는 것은 분명 조심해야 할 일이었지만, 탐라의 함대는 마치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듯 공격을 감행했다.
물론…….
“방포하게.”
선행 포격은 필수였다.
포성이 터지고, 왜선 사이에 화광과 물기둥이 연신 솟는 중에 몽주는 잠시 시선을 돌려 오미시마 섬의 남쪽이자, 탐라 함대의 동쪽에 위치한 오시마 섬을, 정확히는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짓이라도 승리를 의심하진 않지만, 만약 노지마 무라카미가 약속한 것을 지켜 준다면 세토 내해에서의 싸움은 탐라와 왜국 양측이 오래도록 준비하고 결의한 것에 비해 훨씬 일찍 승패가 갈릴 것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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