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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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씨들의 배는 아마도 훗날 세키부네(関船)나 고바야(関船)라 불리는 왜선들의 조상이었을 것이다.
날렵한 선체에 많은 노가 달려 빠르게 돌진할 수 있는 그 왜선은 방어에 거의 신경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갑판은 낮고 난간은 허술하다 못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포탄은커녕 화살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전투함이라곤 하지만, 몽충(蒙衝) 역할을 하기 위해 전면의 내구도에만 신경 썼을 뿐, 측면은 부실했다.
물론, 내해에서 빠른 속도로 선제공격하기 위한 배인 만큼 의도대로의 전황에서는 큰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예컨대, 구루시마 무라카미의 수장이 당한 경우처럼 말이다.
구루시마 무라카미의 배들은 오시마의 남면에 숨어 있다가 신호와 함께 탐라 함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무라카미들은 물론 서국의 수군들 상당수도 함께 돌격하였지만, 그중 구루시마 무라카미는 가장 핵심이었으니, 맡은 돌격 진로가 탐라 함대의 후미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화포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적기에 가장 많은 배들이 탐라 함대에 충각이나, 백병전을 시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받았고, 구루시마 무라카미의 입장에서도 그들이 따르기로 한 고노씨로부터 받은 대우를 생각해서라도 온 힘을 다하고자 하였다.
“돌격!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돌격이다!”
기함의 선루에 서서 구루시마 무라카미의 수장이 목소리를 높였으니, 기함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함께 달리는 구루시마의 배들은 더욱 기세를 높였다.
물론, 수장의 목소리가 전해진 덕은 아니고, 애초에 계획이 그렇고 노를 저으면서 점점 속도가 붙은 탓이긴 하지만, 구루시마의 수장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기함의 군병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으나, 본인 스스로의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나, 그렇게 정신없이 소리치느라 계획과 달리 노지마 무라카미의 배들이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그리 개의치는 않았을 것이니, 그저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탐라의 화포 공격을 피하려 잔꾀를 부린다 여기며 코웃음 몇 번 치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든 노지마 무라카미의 배들이 다가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대가는 컸다.
슬그머니 다가와 어느새 구루시마 무라카미들 사이로 끼어든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던 중, 이물에 설치된 화구(火球)에 불을 당기더니 갑자기 침로를 꺾어 좌우에 날리던 구루시마의 배들을 덮친 것이다.
구루시마의 기함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조금 더 튼튼한 기함에는 노지마 무라카미들 중 두 척이 좌우에서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노지마 무라카미의 배들 앞에 달려 있던 화구가 튕겨져 구루시마의 기함 위로 떨어졌으니, 충각의 충격으로 혼미한 와중에 갑판 위에서 불타는 화구를 본 구루시마의 군병들은 기겁하였다.
“피하라……! 아니, 화구를 치워라!”
충격에 쓰러졌다가 일어나면서 화구를 보고 놀란 구루시마의 수장이 도망치려다 다시 명하였으니, 지금은 도망치려고 해도 그럴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명에 따라, 화구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는 구루시마의 군병들이 창을 들어 화구를 바다로 밀어내려고 달려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펑!
폭음과 함께 화구가 산산조각이 나며 불덩이를 사방으로 난사하였다.
화구 안에 화약이 들어 있어 불이 붙은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폭발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악!”
목초와 마른 말똥 등을 재료로 기름을 먹여 만든 화구의 파편에 붙은 불은, 기함과 기함 위의 여러 군병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건 비단 기함뿐만 아니라 구루시마 무라카미의 배들 중 상당수가 같은 상황이었다.
본디 탐라의 함대에 충각하며 쓰기 위해 노지마 무라카미 측의 제안에 따라 준비된 화구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반대편 인노시마 무라카미들도 근처 노지마 무라카미들의 배신(?)에 당했고, 구루시마나 인노시마에 비하면 적었지만, 왜국 국주들의 수군들 사이에서도 노지마의 충각 및 화구 공격에 당한 배들이 수두룩했다.
노지마 무라카미의 기습 한 번에 모든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었다.
많은 배들이 불타고 있긴 했지만, 순식간에 불타서 가라앉을 리도 없었고, 노지마 무라카미의 공격에 별 피해가 없거나 운 좋게 공격을 받지 않은 배들도 있었으니, 처음 혼란했던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배신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 멀리 떨어진 탐라의 함대는 이제 뒷전이 되었고, 감히 뒷통수를 친 노지마 무라카미를 향해 기타 왜국의 모든 수군 전력들이 남은 힘을 쥐어짜기 시작한 것이다.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약속을 지킨 모양입니다.”
노지마 해협 안에 무수한 배들 사이에 폭발이 생기며 검은 연기가 곳곳에서 뿜어 대는 것을 본 탁기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주군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저쪽부터 해결하지.”
반면에 탁기와 함께 노지마 해협 쪽을 바라보던 몽주는 담담히 뒤쪽을 고개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오미시마와 하카다 섬 사이의 해협으로 후퇴하던 왜국 함대가 역전하여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보면 왜국 서국 연합이 제법 준비를 잘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세 섬 사이의 좁은 바다로 끌어와 남과 북에서 돌격하여 백병전을 강요하는 작전이었으니, 만약 노지마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탐라의 함대는 크게 당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애초에 노지마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적이 끌어들인다고 해서 마냥 끌려들어 가지 않았겠지만, 노지마 무라카미에게 완전한 신뢰가 없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한데, 몽주의 말을 들은 탁기는 무심코 명을 전하려다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노지마들을 지금 돕지 않으실 것입니까? 저대로 두었다가는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전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쪽도 급하긴 합니다만…….”
“나는 너무 큰 노지마 무라카미를 원치 않네.”
“…….”
몽주의 말에 탁기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주군의 뜻을 깨닫고는 목례하며 명을 처리하기 위해 곁을 떠났다.
탁기에게 말한 대로 몽주는 노지마 무라카미가 이번 싸움으로 그 규모가 줄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는 탐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노릇이었다.
한동안 노지마 무라카미를 부양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노지마 무라카미를 다룸에 있어 너무 득의양양한 세력은 ‘컨트롤’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지마 무라카미의 알려진 현재 세력 규모 정도는 능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이번 싸움이 이후 구루시마와 인노시마 무라카미들이 몰락하거나,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한 바, 노지마 무라카미로 자진 투신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니, 그것까지 생각하면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적당히 상하도록 두는 게 나을 것이다.
쾅!
다가오는 적 함대에 대응하기 위해 정자진을 일자진으로 급하게 바꾼 탐라의 함대에서 첫 방포 소리가 터졌다.
급선회로 인한 원심력과 관성이 끝난 직후에 귀청 따갑게 요란스러운 방포음들이 연달았으니, 매캐한 화약 냄새 외에도 왜군 함대와 그 주변 바다에 솟구치는 화광과 물기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도 별로 없었던 긴장감은 이미 사라졌다.
* * *
계속 이어진 공사로 녹둔도의 포구에는 부두가 네 개나 지어져 있었고, 5번 부두의 공사가 진행 중이며, 공사 예정된 부두도 세 개나 더 있었다.
처음 탐라공이 일차로 완성할 포구의 규모를 말하셨을 때, 다들 필요에 비해 너무 크게 짓는 것 아니냐고 이의를 표하기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금 탐라의 상선 18척이 당도하여 하역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고 단주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다른 일로 바쁜 와중에 탐라 상단의 선단을 이끌고 온 자가 누구인지 전해 들은 허호필 소령이 급하게 포구로 달려와 하역 작업을 관망하던 자에게 인사하였다.
“아, 허 대…… 아니, 허 소령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강녕하셨습니까? 한데, 어찌 제가 존대하십니까? 듣기 민망합니다.”
“하하, 허 소령님께서는 군관으로 승찬하셨고, 저는 일개 사인일 따름이니, 당연히 존대해야지요.”
서로 겸양하며 반가워하였으니, 본디 허 소령과 고신걸 단주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고 단주가 상무교리이던 시절, 허 소령이 선장으로 있는 배를 몇 번 이용했던 것이다.
잠시 환담을 나누며 해후를 즐긴 두 사람은 이내 같이 하역 작업을 지켜보며 다른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모두 6천 석입니다. 잡곡이 절반 이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북방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버틸 만하겠지요?”
“충분할 겁니다. 여기서도 나름 식량을 구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군량미는 감당하기 어렵겠습니다만…….”
허 소령은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군무를 하면서 충분한 군량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권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1, 2만도 아니고 4만이 넘는 호인 전사들, 거기에 그 전사들이 속한 수많은 부족의 부족민들의 수까지 더하면 10만이 넘었으니, 솔직히 녹둔도를 위해 식량을 구해야 하는 탐라의 관원들과 탐라 상단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생겼다.
물론, 그 많은 호인들이 전부 넋 놓고 입에 식량이 떨어지길 바라고만 있는 건 아니었고, 사냥, 채집, 소규모의 농사 등을 통해 식량을 구하고 있기는 했다.
하나, 식량 획득을 주도하던 성인 남성들 중 상당수가 전사로서 녹둔도 탐라군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으니, 안 그래도 자급하기 어려운 식량 사정에 탐라의 도움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 선단에 1만 석은 족히 들어올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굉장히 힘들어 보이십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요. 왜국에서의 싸움도 진행 중인데, 저희까지 감당하셔야 하니까요.”
“하하…….”
고 단주가 터뜨린 너털웃음에는 솔직히 그렇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다음번 1만 석도 고려 남면의 지주들 곳간까지 뒤져서 억지로 팔게 하여 구한 겁니다. 뭐, 다 내놓으라 한 건 아니니, 한 번 정도 더 짜낼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 이상이면 토호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지요.”
“그 정도입니까?”
“사실 이건 온 세상이 싸움을 하고 있거나 싸움을 준비 중이라 그런 것이지요. 우리 탐라와 왜국은 이미 싸우고 있고, 요동은 물론 명국도 북벌로 인해 군량을 구하느라 아주 난리법석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은덩이를 들고 찾아도 양곡을 구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지요.”
고려의 식량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고, 이제는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그래도 오랜 혼란기 탓에 식량 재고가 축적되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식량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왜국과 싸우는 중이니 왜국에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고, 요동과 명국 또한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자연 식량 생산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올해부터 남면 몇 곳에 이앙법과 이모작을 시험 중입니다. 주인께서 명하신 것이지요.”
“이앙법이라면 볏모를 옮겨 심는 것을 말하는 겁니까? 그건 농사를 망칠 위험이 크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앙법(移秧法).
즉, 모내기 농사 자체는 이미 고려에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모내기로 농사를 하는 이들도 적게나마 있었다.
일단 같은 종자로 농사를 지어도 많게는 4배까지 쌀 생산량이 증가하니, 그 방법이 알려지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따뜻한 곳에서는 겨울과 봄에 대맥(보리)를 키워, 모내기 전에 수확할 수도 있었으니, 식량 생산이라는 면에서 분명 시도하고픈 동기가 충분했다.
하나, 동시에 모내기 농사에는 큰 단점이 있었으니, 모내기 시기에 수량이 충분하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모내기라는 과정에 필요한 인력이 직파하여 농사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서 가족들만으로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시도했다가 큰 낭패를 겪기도 했다.
“주인께서도 그 점을 아시고, 특별히 저수지와 수로가 정비된 곳에서만 시험하게 하셨고, 모내기로 농사를 짓는 자들끼리 서로 품앗이를 하도록 명하셨지요.”
“하면 지금이 한창 모내기를 할 때가 아닙니까?”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더 바쁘기도 합니다.”
상단을 운영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남면을 아울러 관리하는 관리의 역할도 맡고 있는 고 단주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허 소령은 조금 더 미안한 기색을 띠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모내기가 성공할 것 같습니까?”
“일단 봄 가뭄이 생긴 곳은 없어서 다행이지요. 뭐, 애초에 물 때문에 힘들 곳은 피하기도 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이번 모내기가 성공한 뒤가 더 걱정입니다.”
“……?”
허 소령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고 단주가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였다.
“모내기로 수확이 늘었다고 장계를 올리면, 주인께서 모내기법을 확대하려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수지도 여러 곳에 만들어야 할 것이고, 수로도 확충해야 할 것이며, 그 일은 고스란히 우리 상단의 몫이 될 테니까요. 허허.”
“아, 하하.”
“게다가 주인께서 이상한 명도 하나 내리셨지요.”
“이상한 명이라니요?”
“올해 농사가 끝난 뒤에 남면 전역의 농토에서 특별히 알곡이 많이 붙은 종자들을 일부 거두어 상단 소유의 농토에 그것들로만 농사를 지으라 하셨지요.”
“그게 이상한 일입니까? 알곡이 많은 종자로 농사를 지으면 마찬가지로 벼의 출수가 많을 것 아닙니까?”
출수(出穗)는 곧 개화(開花)니, 벼를 비롯한 곡식의 꽃이 피는 것만 개화라 하지 않고 출수라 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수가 많으면 알곡도 많이 생겼다.
허 소령은 주군께서 탐라 상단 자체적으로 곡식을 생산하길 바라신다 여겼는데, 고 단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아님을 말하였다.
“그게 식량 생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벼의 화분이 날아오지 못하는 곳에 적당량만을 지으라 하셨지요. 게다가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 시행하라 하셨습니다.”
농사 후 알곡의 양을 파악하여 성과가 좋으면 그 종자로 다시 농사짓고, 아니라면 다시 다른 곳에서 알곡이 많은 종자를 구해 섞으라 하셨던 것이다.
사실 비단 알곡의 수만 파악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걸 강조하긴 하셨지만, 병충해가 있는 곳에서 피해가 없거나 적은 곳이 있다면 그곳의 종자도 따로 구해 두라 하셨고, 나중에 알곡량을 늘린 종자가 병충해에 약한 것이 보이면 그 종자를 섞어 다시 농사를 지으라고도 하신 것이다.
“허허, 그건 마치 전마를 개량하는 것 같군요.”
싸움터에서 필요한 말은 노역마와는 다르기에 전마는 따로 종마를 두고 튼튼한 암말하고만 교배하였으니, 절로 그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지요. 마치 벼로 새끼치기를 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뭐든 주군께서 하시는 일이시면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모를 일이지요. 나중에 알곡도 많이 생기고 병충해에도 강한 종자가 나올지도요. 하하하.”
“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몽주가 그런 명을 내린 것은 벼의 종자를 개량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좋은 종자가 따로 있음은 당대에도 익히 아는 바이긴 했다. 하여, 풍작이 있는 곳의 종자를 따로 구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였다.
다만, 유전적 지식이 미약한 당대의 시선에서 좋은 종자는 그저 운이거나 부처님의 보우하심의 결과일 뿐이었다.
아무리 좋은 종자를 따로 구한다고 해도, 사방이 농토인 곳에서 근처 다른 종자의 화분이 날아들어 벼꽃을 피우다 보니, 그 양질의 종자적 성질이 사뭇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도 경험적으로 유전적 사실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여, 몽주는 실험적으로 종자를 개량하게 하고, 그 종자의 품질이 보급하기에 충분하다 여겨질 때, 한꺼번에 고려의 모든 벼 종자를 교체하기로 마음먹고 상단에 명한 것이었다.
“한데 명의 병부시랑과는 이야기가 잘되었습니까?”
농사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고 단주가 물었다.
허 소령은 이미 장계를 올리긴 했지만, 아직 탐라에 닿았을지도 모를 때라, 고려 남면에서 일하는 고신걸은 무어라도 전해 들었을 리 만무했다.
“일단은 잘 끝났습니다. 저희가 기대 이상으로 전사를 모은 것만으로도 일이 잘 안 될 리가 없지요. 다만…….”
“……?”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병부시랑 추합이라는 자가 탐라와 녹둔도를 너무 치켜세우니, 혹시 속으로는 흑심을 품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흑심이요?”
“우리가 생각보다 강대한 세력을 얻으니, 명의 입장에서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길 법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도 그렇겠군요.”
“저야 당장 직면에 북벌에 온 신경을 써야겠지만, 우리 탐라국에서는 명국의 태도 변화 가능성에 미리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허허, 참으로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그렇지요. 하물며 호인들마저도 겉보기에 단순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안을 들여다보면 그 삶이 얽히고설켰더군요. 하하.”
“허허.”
두 사람이 나란히 웃음을 흘렸다.
* * *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오미시마, 오시마, 하카다 섬으로 이뤄진 좁은 해역 위에 난파당하거나 표류하는 배들만 백 척이 넘었다.
명백히 항해 상태라 할 수 있는 배들은 겨우 수십 척이었고, 모두 탐라 함대이거나 노지마 무라카미의 배들이었다.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노지마 무라카미의 수장 미야코가 탐라 함대의 기함에 올라와 몽주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몽주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고, 오히려 미야코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는데, 정작 노지마의 수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그뿐인가?”
“이미 해야 할 말은 전에 다 하였으니, 또 입에 담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네 뒤에 선 자들은 그리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네만.”
미야코와 함께 올라온 노지마 무라카미 쪽 인원들은 모두 다섯으로, 고려 출신 묘자를 제외하면 다들 무라카미의 전사들로 보였다.
하나같이 역전의 용사임을 증명하듯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에 상처 자국이 적지 않았는데, 그런 자들이 분한 기색을 뿜고 있었으니, 몽주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나, 미야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자 미미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다.
“본디 싸움 뒤에도 그 흥분이 남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을 리가 없었다. 4인의 무라카미 전사들, 아마 선장급 중에서도 세력이 큰 자들임에 분명한 그들이 보이는 흥분의 정체는 분노였고, 그것은 탐라를, 몽주를 향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몽주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탐라 함대가 몽주의 명에 따라 노지마 무라카미의 싸움을 도운 건 싸움이 시작된 지 반 시진 가까이 지난 때였다.
아무리 기습으로 큰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애초에 수적 열세가 분명한 중에 바다 위에서 난전을 벌인 노지마 무라카미의 피해는 그사이에 급격히 쌓여 있었다.
탐라 함대가 뛰어들어 노지마 무라카미의 깃발이 달리지 않은 거의 모든 배들을 향해 방포하니, 이미 속도를 잃은 왜국의 노선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그때부터는 노지마 무라카미들의 피해도 더는 커지지 않았지만, 이미 입은 피해가 엄청났다.
미야코 일행들이 기함에 오르기 전에 먼저 전해 온 보고에 의하면, 노지마 무라카미의 배들 중 절반 가까이가 사실상 궤멸되었다고 하니, 사람을 기준으로 보자면 대략 삼분지 이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그 때문에 보다 일찍 조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가 극심할 것이라 여겼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장 미야코 노파만큼은 담담했고, 그래서 몽주는 속으로 더욱 경계하면서도 더 이상 언급은 피하기로 하였다.
“수고하셨소. 그대들의 열성이 아니었다면 이번 싸움은 더 지난해졌을 것이오. 내 이 자리에서 다시 확인해 주겠소. 지난번, 그대들과 한 약조는 반드시 지켜질 것이오.”
“그러셔야지요. 아니라면 우리 죽은 아이들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것이 미야코가 마지막에서야 은근히 내비친 분노의 한 자락이었다.
어쨌든 세토 내해에서의 결전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살아서 도주한 왜국의 배들은 채 오분지 일에도 미치지 않았으니, 사실상 왜국이 세토 내해에 배를 띄우기 어려운 지경에 처한 것이다.
왜국 막부가 동국의 국주들까지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서국의 수군이 몰락한 걸 아는 이상 동국의 국주들이 험한 곳에 자신들의 세력을 갖다 바칠 리는 없을 테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한동안은 내해에 왜국 수군력이 없는 상태인 건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 ‘한동안’이라면, 탐라군과 노지마 무라카미가 활개 치기에 충분했다.
몽주는 다시 서진하면서 노지마 무라카미와 탐라 함선들의 일부에게 고노씨가 다스리는 이요국의 성읍 포구를 봉쇄하도록 명하고, 기함을 비롯한 나머지 함대는 풍후국 후나이로 귀환하였다.
탐라 함대의 피해는 별로 없었지만, 화포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는 배들이 있었고, 포탄을 충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늦도록 함대 정비에 후나이의 포구가 북적대고 있을 때, 몽주는 이번 왜국과의 싸움을 정리하였다.
이제 곧 현대에서 깨어날 때이니, 상황을 정리하여 현대에서 논의할 것을 가려내야 했다.
“그나저나 화포 무장이라는 게 확실히 쉽지 않은 모양이군.”
이번 왜국과의 싸움에서 벌어진 전투들에 대한 녹계를 보며 왜국의 전력을 가늠하던 몽주는 의아함과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분명 왜국이 화포를 제조한 것임은 분명하였다. 이미 몇 번이나 봤으니까.
다만, 그 위력과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그렇다 쳐도, 생각보다 화포의 수가 너무 적었다.
전투함에 화포가 무장되지 않은 건 왜국의 배가 가진 성능의 한계와 왜국 화포의 무게, 그리고 크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적어도 결전의 장소가 확실한 상황에서 그 주변 육상에 화포를 충분히 배치했을 법한데도 왜국은 그러지 않았다.
탐라군 화포의 위력을 봐서라도 화포의 필요성을 모를 리가 없음을 생각하면, 화포로 무장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제작의 어려움, 제작을 위한 재정을 투입하는 어려움 때문일 것이고, 어쩌면 막부 측이 서국의 국주들을 돕는다 하면서도 정작 화포는 아끼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화포를 마구 반출하였다가 후에 막부를 공격하는 데에 쓰일 수도 있고, 값비싼 탓에 문자 그대로 아까워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당대의 일반적인 기술에서 화포는 그만큼 비싼 몸이지 않은가.
하기야 전쟁으로 점철된 근세 유럽에서도 전장에 투입된 화포의 수는 아무리 큰 전투라고 해도 많아야 100문 남짓이었다. 그마저도 모든 화포가 전투에서 쓰인 것도 아니었고.
역사에서 화포 기술적인 면으로 영국과 더불어 가장 앞장선 스웨덴의 경우에도 화포 무장은 18세기까지도 포병 연대 하나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14세기 말에, 강철을 대량 생산하여 보다 튼튼하고, 보다 가볍고, 보다 값싼 화포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전함을 화포로 무장하고, 육상에서도 개복포를 통해 수십 문은 기본으로 동원하는 탐라군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 예전 같았으면, 너무 오버라고 난리였겠네.”
몽주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건, 현대에서 처음 재상, 두신과 놀이할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현대인의 한계를 보수적으로 단정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지금 탐라군의 군력도 과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겠지만.
몽주의 정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고, 그중 상당 부분은 ‘전리품’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싸움이 승리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바, 어느 정도까지 전공을 확대해야 어느 정도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 따지는 것도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규슈 장악은 당연한 요구였다.
“그나저나 오우치씨는 시작했을까?”
문득 노지마 앞바다에서 몽주의 아량 덕에 그나마 일부라도 허둥지둥 도주할 수 있었던 오우치씨의 배들을 떠올리며 궁금해하였다. 오우치씨에 대한 괘씸함이 여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이번 국면에서 오우치씨가 서국 주고쿠에서 세력을 키운다면 막부를 압박하기가 한결 편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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