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5)
* * *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몽주의 앞으로 9첩의 크고 작은 장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차현유 외관대신이 서규슈에 닿은 뒤, 오우치씨와 협상을 하기 위해 축전국으로 가기 전에 탐라에서 가져온 장계들을 모두 풍후국의 탐라 군진으로 보낸 것이다.
장계들 중 하나는 몹시 두꺼웠는데, 그 전에 들어온 장계들을 요약 발췌한 것이고, 남은 것은 요약할 겨를이 없는 최신의 것들이었다.
탐라에서 지은 것은 물론, 탐라가 세력을 뻗은 사방팔방에서 들어온 것이니, 몽주는 그 9첩의 장계를 서둘러 훑었다.
다행히 당장 시급한 결정을 요구하는 장계는 없었다. 모두 대신들이 선결제 후보고한 상태거나 그런 중인 것들이었고, 아니면 천천히 결정해도 되거나 아예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몽주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무리하면서 관료제를 확대 및 구체화하고, 공국경론을 지어 관리들의 판단 기준으로 세운 것이 그 때문이지 않은가.
적어도 대신들을 포함하여 관리들은 그런 몽주의 의도를 이해하고 따라 주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으로 몽주는 급히 훑은 장계들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
오우치씨가 다케다씨의 아키국을 점령하고, 야마나 씨의 이와미국을 공략 중이라는 소식은 예상한 수순이었다.
오우치씨의 나가토국과 스오국의 동쪽에 접한 그 두 나라는 당연히 오우치씨가 가장 먼저 노려야 하고, 적어도 그 두 곳만큼은 병탄해야 자신과 협상한 것이 손해로 귀결되지 않을 테니까.
다만, 그 뒤로 어디까지 진출하려 할지가 궁금했지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탐라의 상황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산업은 계속 발전일로에 있었고, 사회는 안정적이었다. 군량미 문제로 나라 안 쌀의 재고량이 준다는 재관대신의 걱정도 있긴 했지만, 아직 식량 유통에 문제 될 정도는 아닌 듯했다.
고려 남면의 사정도 탐라 상단의 활약 덕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남면은 현재 농업 생산 증가에 집중하고 있는데, 낯선 산업을 일구는 것보다는 당연히 고려백성들이 잘 따라와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탐라 상단주인 고신걸이 올린 보고 중에 처사촌 최종도에 대한 ‘루머’ 조사 결과도 있었는데, 다행히 거짓으로 드러났다는 내용도 있었다.
“평범한 인물은 확실히 아니야.”
종도가 거짓 행각을 꾸민 이유를 알게 되니, 몽주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람의 성품을 의심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지만, 그 처신의 이유는 여전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그를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몽주는 장계들을 계속 읽었다.
역시나 몽주의 관심을 크게 끈 건 요동 북벌에 관한 소식이었다.
우선 녹둔도의 허호필 소령은 일을 매우 잘해 주었다.
녹둔도의 호인 전사들과 더불어 닝구타의 우디거 일족까지 격파함으로써 주션족들의 결집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4만이 넘는 전사들을 꾸릴 수 있게 되고, 계속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북방 개척을 위해 몽주의 안배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명나라의 북벌을 위한 움직임도 진행 중이었다.
남부에서 편성된 4개 위(衛)가 이미 연국에 도착하였고, 북서쪽 북원과의 경계에서 착출한 6개의 위가 연국으로 한참 이동 중이라 하였다.
최대 열흘 안에 명나라 10개 위가 요동에 집결할 것이고, 보름 후에는 요서의 중심지인 진저우(錦州)현으로 이동, 그곳에서 요동군의 일부와 합류하여 선양으로 움직이고, 선양에서 고려 왕실이 내놓은 5천의 군병이 포함된 요동군의 남은 군력마저 더한 뒤 최종적으로 북진하게 되는 것이다.
요동국은 이미 3만여의 원정군을 편성 완료한 지 오래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북벌을 준비하였는데, 은근히 나하추와의 접경 지역 전역에 군사를 보내어 근방 주션족들을 미리 포섭할 정도였다.
말이 포섭이지, 회유가 안 될 경우에는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다고 하니, ‘미니 북벌’을 이미 진행 중인 셈이었다.
어떻게든 명의 북벌을 통해 요동의 강역 또한 북쪽으로 끌어 올리려는 요동공의 의도와 의지가 느껴졌다.
사실 몽주가 가장 궁금한 건 나하추의 대응이었는데, 전해진 소식 중에는 그에 관한 게 별로 없었다.
그저 나하추 세력이 근래 변경지역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는데, 나하추 또한 당연히 명의 북벌을 알고 대응하기 위해 군력을 결집하는 중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원나라에서 요동의 원 군벌 세력을 도울지도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명나라가 북방 접경의 군력을 많이 빼내었다면, 남하하여 명군을 압박하든, 동진하여 나하추를 돕든 무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명군이 북방에서 많이 빠지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원나라의 상태가 좋지 못한 상황이니, 알려진 대로, 원의 대칸 아유시리다르가 몸져 누운 터라, 오히려 내분의 움직임만 진해질 따름일 것이다.
예상보다 명의 북벌이 늦어지긴 했지만, 이제 빠르면 보름 뒤, 적어도 한 달 안에는 나하추의 군력과 본격적으로 격돌할 것이니, 동북아 세력 구도에 제법 큰 변화가 생길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탁기가 몽주의 군막으로 찾아온 건, 몽주가 혹시 명국에서 탐라와 왜국 간의 싸움에 대해 무어라도 반응이 있나 싶어 장계들을 뒤적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예 모르는 건지, 알아도 별 관심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 반응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군막으로 들어온 탁기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이요국의 앞바다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투? 내가 포위만 해 두라 하였는데?”
몽주가 눈썹을 치켜뜨며 물으니, 탁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그것이…… 다케다씨의 수군이 하필 이요국으로 들어가려는 바람에 아군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걸 외부의 조력이라 착각한 고노씨가 포위망을 깨기 위해 바다로 나오는 바람에 전투가 벌어졌다 합니다.”
갑자기 다케다씨가 왜 나오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 다케다씨의 아키국이 오우치씨에게 무너지면서 다케다씨 중 일부가 바다로 탈주했을 수 있었겠다 싶었다.
일단 바다로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몸을 의탁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필 이요국의 고노씨를 선택한 건 의아했지만, 세토 내해의 수전에 대해 소식을 들었다고 해도 그 후 탐라군이 어디로 갔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요국은 충분히 선택할 만한 곳이었다.
대략 상황이 파악되니, 이제 궁금한 건 그 전투의 결과였다.
“처음에는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합니다. 탁정 중령의 보고에 의하면, 다케다씨의 배들을 초검(初檢)하느라 진형이 다소 흐트러졌는데, 그때 고노씨가 공격하여 대웅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게. 탁정 중령에 대해서는 충분히 변호했으니.”
탁정 중령은 몽주와 탁기가 물러나 있는 중에 포위에 임하고 있는 탐라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교였고, 당연히 탁기와 친척지간이었다.
“아, 전투 자체는 승리였습니다. 다케다씨의 함선들을 모두 나포하였고, 고노씨도 격퇴시켰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노지마 무라카미 측 함선 두 척이 침몰하면서, 일백 여명이 죽고 다쳤습니다만, 우리 탐라군의 피해는 미미하다 합니다.”
“노지마 무라카미 일백여가 상했다고?”
“네.”
몽주는 눈쌀을 찌푸렸다.
노지마 무라카미는 내해 수전에서 큰 피해를 입어, 상당수가 노지마로 돌아가 피해 복구에 임하고 있었지만, 운 좋게 상하지 않은 몇몇 배들은 탐라군과 함께 이요국을 포위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함선의 특성상 포위망의 가장 전방에 대기 중이었을 터이니, 고노씨의 습격에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몽주가 눈쌀을 찌푸린 것은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추가로 피해를 입은 것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지마 무라카미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내해에서의 싸움에서 그들이 당하는 걸 방조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다시 1백여의 노지마 무라카미들이 상했다고 하니, 너무 세력이 급감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웠고, 또, 노지마 무라카미의 수장인 미야코가 상황을 오해하여 더는 인내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아무래도 노지마 무라카미에게 선물을 따로 줘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그 선물로 무엇이 적합한지는 때마침 떠오르는 게 있었으니, 남방 특명 전권대사인 석삼이 탐라에서 화극 어른에게 열심히 졸라 대고 있다고 전해진 것이 노지마 무라카미에게 주는 선물로도 유용할 것 같았다.
“고노씨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몽주는 이맛살을 계속 찌푸린 채 물었다.
“삼십여 척이 쳐들어왔으나, 돌아간 것은 열 척에도 미치지 못한다 합니다.”
그 정도면 고노씨가 당장 동원 가능한 군력을 모두 쏟아부었다가 크게 무너진 것이리라.
대략 이제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는 상황이었다.
내해에서의 패배로 많은 배와 군력을 상실한 서국의 국주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특히 주코쿠쪽 국주들은 오우치씨의 돌변에 당황하여 바다 건너의 일에 관심을 둘 수 없을 것이다.
시코쿠의 국주들이 순망치한이라 여겨 고노씨를 도울 여지가 있긴 했지만, 솔직히 내해에서 군력을 상당수 잃은 시코쿠의 나라들 정도라면 탐라군이 ‘맞짱’을 떠도 상관없었다.
물론, 아예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우리군의 정비는 언제 완료되겠는가.”
몽주가 풍후국에 정박 중인 탐라군의 현황을 묻자, 탁기는 파손이 심한 세 척을 제외하면 이틀 안에 정비를 끝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하면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는 배는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여섯 척 정도는 더 빠져야 할 듯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진하여 고노씨를 공략하기로 하지. 다만, 그 전에 시코쿠의 다른 국주들에게 서찰을 전해야겠다. 서찰은 한 식경 후에 주도록 할 테니, 탁기 자네는 선편을 준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탁기는 몽주가 무슨 서찰을 쓰려는 지 다소 궁금한 듯했지만, 어차피 한 식경 후에는 알 수 있을 것이기에 그대로 물러났다.
탁기가 물러난 후 몽주는 곧바로 붓을 들어 서찰을 써내려갔다.
궁서//……이처럼 고노씨는 탐라국의 영역에서 크게 난동을 부린 바, 나 탐라국공은 고노씨를 고이 둘 수 없다. 하여 고노씨를 쳐서 크게 벌할 것이니, 이는 탐라국이 시코쿠(四國)에 욕심을 부리는 것과는 무관하다. 오직 고노씨의 이요국만이 탐라군의 목표이니, 너희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탐라군의 무쌍함으로부터 무탈할 것이다. 하나, 만약 고노씨를 도와 전장에 나서거나, 고노씨를 받아 들어 숨기려 한다면 탐라군은 너희를 상대로 진격할 것이다. 무엇이 가문과 나라의 안전을 위한 선택인지는 분명한 바, 현명한 길을 좇길 바란다.//
* * *
텅!
활줄이 튕기며 화살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화살이 정점에 올라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활을 쏜 자는 뭔가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활을 곁에서 시중하던 자에게 건네고는 뒤를 돌아 사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관중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없는 것도 화살을 쏜 자의 기분이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대 아래로 내려가자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그를 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발걸음을 멈춰 관령의 숙인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내려다보는 시선과 표정에서 싸늘함이 가득히 흘러나오니, 주변에서 그를 보좌하는 자들도 절로 긴장하였다.
따르는 자에게 비단 수건을 받아 손을 닦던 쇼군이 문득 말하였다.
“패배하였다지?”
“그렇습니…….”
촤악!
관령이 고개를 숙인 채 답하는데, 쇼군이 손을 닦던 수건을 휘둘러 신경질적으로 관령의 목덜미를 휘감듯 때렸다.
아픈 것을 따지기 전에 관령에게는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관령을 믿고 내가 안계를 넓히기 전까지 나라를 맡겼는데 말이야. 어찌 이 모양이 된 거지?”
“……송구하나이다.”
“내가 송구하다는 말이나 듣자고 공사다망한 자네를 불렀겠나?”
쇼군의 말투는 완연히 시비조였다. 관령을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을 따름이었다.
“나는 전에 서국의 무리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 그들과 함께 싸우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하오나, 지금의 상황은 서국의 국주들이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탐라국의 군력이 생각 이상으로…….”
휙, 찰싹!
“……!”
다시 쇼군의 수건이 관령의 머리와 어깨를 때렸다.
“지금 나를 바보라 여기는가. 오우치씨가 전란을 틈타 서국의 다른 나라들을 침범하고 있음을 모른다고 생각한 겐가. 아니면, 내가 탐라국의 군력이 강할 것임을 지적하지 않은 것을 탓하고 있는 겐가?”
“어찌 그렇겠습니까. 다만, 오우치씨의 일은 적어도 내해에서의 싸움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여, 그저 일을 그르친 제 잘못을 정확히 고하고자 할 따름이었습니다.”
관령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니, 쇼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받았다.
“그래, 관령의 잘못이지. 자, 그러니 말해 보게. 자네의 잘못을 어찌 복구할 것인가. 이곳까지 불려왔으니, 내가 무엇을 물을 지는 짐작하고도 남았을 터, 한번 말해 보게.”
“…….”
관령은 선뜻 말문을 열지 못했다.
물론, 쇼군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어떤 추궁이 있을 줄은 짐작하였지만, 아직 무어라 답을 내놓기에는 일렀다.
일단 내해에서 대패하여 삼분지 일 정도의 군력만을 보존하였고, 그나마 그 살아남은 군력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오우치씨의 군력이 제외하면, 사실상 탐라국에 대항한 서국의 연합군은 완전히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패배의 크기가 너무나 커서, 서국의 국주들은 몸을 사려 막부의 전령에 답을 주려 하지도 않고 있었으니, 다시 서국의 군력을 모아 탐라군에 대항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지경이었다.
거기에 오우치씨가 돌발인지 계획인지 주코쿠의 여러 나라들을 침범하고 있었으니, 서국의 서쪽 국주들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상태였다.
관령이 주군을 뵙기 위해 자리를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해 들은 소식이 이요국의 고노씨가 무너질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그 소식은 막부에서도 관령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는데, 이는 고노씨의 이요국을 제외한 시코쿠의 모든 나라들, 즉 사누키(讃岐), 아와(阿波), 도사(土佐) 3국이 모두 호소카와 일족이 다스리거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의 슈고와 슈고다이들이 관령에게 일제히 탐라공이 보낸 협박이나 다름없는 서찰을 전하였으니, 어찌해야 할지 결정해 달라 청하였던 것이다.
호소카와 가문의 가독으로서 어떤 결단을 내려 할지 혼란스러웠고, 그것은 막부의 관령으로서 장차 탐라국과의 대립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이요국의 고노씨는 호소카와씨와는 원수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지만, 탐라국의 규슈 진출을 틈타 겨우 손을 잡게 되었다.
상당히 전향적인 관계 개선이었지만, 그렇다고 고노씨를 구하기 위해 호소카와씨의 소중한 군력과 재산을 쓰기에는 아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탐라군과 싸워 이길 공산도 미약한 바, 호소카와 가문의 입장만 생각하면, 시코쿠의 다른 나라들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탐라공의 제안에 따라 모른 척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나, 막부의 입장에서 고노씨가 무너진 그 자리에 탐라국이 자리 잡고 비켜서지 않는다면 참으로 끔찍한 상황이 될 것이니, 머나먼 서규슈와 달리 시코쿠는 내해를 통해 언제든 막부의 중심부를 공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쇼군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 순간에도 관령의 머릿속은 몹시도 복잡하였는데, 그때 쇼군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앞선 말은 듣지 못했지만, 관령은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
“하명하시옵소서.”
“스승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
스승이란 탐라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명국과의 사대관계를 맺기 위해 탐라공을 외국의 스승으로 삼은 바 있었고, 다시 폐한 적이 없으니, 여전히 탐라공은 쇼군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찌하시려는 것인지 묻고자 하옵니다.”
관령은 탐라공을 스승이라 칭한 것을 경계하며, 고개를 조금 들어 쇼군을 향해 물었다.
하나…….
휙! 퍽!
대답 대신 다시 수건이 날아왔으니, 이번에는 관령의 얼굴을 때리고 관모를 떨어뜨렸다.
우스꽝스럽게 변한 관령을 두고 웃음을 보이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여름 날에 한파가 몰아친 양 사위가 더욱 싸늘해질 따름이었다.
“상관치 말라. 너는 스승을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관령을 세 번이나 때린 수건을 시중하는 자에게 던진 쇼군을 차갑게 말을 남긴 후 발걸음을 옮겨 관령의 앞으로 지나갔다.
쇼군이 멀어진 뒤 한참 후에야 관령을 천천히 허리를 세웠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억울함이 뭉게뭉게 맘속에서 피어 올랐다.
지금 막부에 품질 좋은 화포만 백여 문이 있었으니, 그중 절반만 내해에서의 싸움에 투입하였다면 이처럼 크게 패배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설령 지더라도 군력의 규모면에서 훨씬 우위에 있는 화국의 여러 국주들이 지금과 같이 불리한 지경에 설 정도로 일방적인 패배는 없었을 것이고, 오우치씨 역시도 함부로 몸을 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쇼군이 결사 반대하여 화포를 거의 투입하지 못했으니, 서국의 무리들을 믿지 못한다는 쇼군의 고집이 워낙 거세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해의 패전을 만든 원인 중 쇼군의 고집도 한몫한 것 아닌가.
“후우…….”
관령 요리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억울함은 억울함이고, 지금은 당장 고민해야 할 것이 많았고, 급했다.
당장 탐라공을 어찌 주군 앞에 대령한단 말인가.
협상이야 할 수 있겠지만, 막부의 중심으로 탐라공이 함부로 올 리가 없으니, 그를 어찌 설득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사실 관령의 시야를 어둑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막부를 이끌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장성하신 주군께서 친정에 임하실 것은 분명한 바, 관령은 관령으로서 세를 유지하며 주군의 최측근으로 남길 바랐지만, 지금 그에게 수치를 준 주군의 모습을 보건대, 이번 사태가 수습되면 관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생각하니, 관령은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가 관령에 우뚝 선 이래로 호소카와 가문이 크게 확장하였으니, 그 와중에 적도 많이 생겨났다.
관령의 자리에서 밀려난 뒤, 그 많은 적들이 어떤 식으로 복수하려 할지 알 수 없으니, 관령은 가문을 이끄는 자로서 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쇼군의 명을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은 점점 호소카와 가문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고민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무엇이 그와 그의 가문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당장에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적어도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전향적인 선택을 해야 함이 분명했다.
원수 같던 고노씨와 화해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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