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8)
* * *
가마쿠라후 어소(御所)를 품에 안고 있는 산의 이름은 취봉산(鷲峰山)으로, 취봉산과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사원들이 여럿이었다.
그중 취봉산의 가장 중심이라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원의 이름은 각원사(覚園寺)였다.
여름 한철을 위해 오랜 시간을 인내한 매미들이 미친 듯이 울어 대고 있는 각원사의 어느 곳에 두 중년의 사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대략 북동쪽이었으니, 취봉산의 산자락 사이로 간토의 드넓은 녹지를 멀리 바라볼 수 있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
한 자의 물음에 다른 한 사람은 말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물음을 받은 자의 미소는 순수하게 웃겨서 웃는 것이었다.
근래 들어 같은 질문을 말과 글로 수십 번은 들었으니,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고심하였고, 여러 번 들었을 때는 귀찮아졌는데, 이제는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질문을 던진 자,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憲顕)는 질문을 받았음에도 답을 하지 않는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 : 가마쿠라후의 수장) 아시카가 우지미쓰(足利氏満)를 잠시 올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그가 바라보는 북동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가마쿠라 구보를 보좌하는 네 가문들 중 가장 번창한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이자, 전대 간토간레이(関東管領)인 그라면 약간이나마 답을 재촉할 수도 있겠지만, 아시카가 우지미쓰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기에 성급하게 굴지 않고자 한 것이다.
사실 그도 속내가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고.
서쪽에서 일어난 전란은 화국의 정세를 몹시도 복잡하게 만들기 시작했으니, 지리멸렬해져 그 목숨이 멀지 않다 여겼던 남조가 호소카와씨와 손을 잡고 일거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호쿠리쿠도의 친남조 성향이었던 슈고 가문들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우에스기 일족이 다스리는 나라들 중 에치고(越後)국이 호쿠리쿠도에 속하여 있어 자칫 고립될 수도 있는 처지였다.
물론, 이는 우에스기 가문이 추종하는 우지미쓰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당대 막부 쇼군 요시미쓰와 가마쿠라 구보 우지미쓰의 관계는 사촌지간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임에는 틀림없으나, 부자지간도 상쟁하게 만드는 권력의 생리를 생각하면 그리 가깝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막부의 상황은 만약 우지미쓰마저 외면하면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질 수 있는 바, 만약 그가 냉정한 마음을 먹으면 글 한 장, 말 한 마디로 막부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굳이 남조를 지지한다 하지 않더라도, 그저 막부와 선을 긋는 정도의 태도만 취해도 그리될 것이다.
“이보게, 저곳이 자네에게는 무엇으로 보이는가?”
문득 들린 구보의 말에 노리야키는 잡생각에서 벗어났고, 서둘러 우지미쓰의 물음에 답하려 하였으나, 딱히 답할 게 없었다.
그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넓은 녹지는 끝없이 이어져 간토 지방의 동반부를 아우르는 평야의 일부였다.
물론, 낮은 야산들도 틈틈이 머리를 내밀고 있긴 하지만, 평야의 존재감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하나, 그 넓은 평지 중에 정작 녹경지는 적었으니, 푸른 평야 중 태반이 늪지이거나 가변하는 수로였고, 아니면 그저 수풀밭이었다.
과거 가마쿠라에 막부가 있을 때부터 간토의 녹지를 개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아직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노리야키가 무어라 답할지를 궁리하고, 또 속으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데, 다시 우지미쓰의 말문이 열렸다.
“나는 말이야, 저곳이 희망이고 기회처럼 보이네.”
“그렇습니까?”
“암, 저 넓은 땅을 개간하여 쓸 수 있다면, 이 화국의 모든 땅 중에서 가장 풍족한 땅이 되지 않겠는가.”
“그야 그렇지요.”
당연한 말이었다. 간토의 평야 지대를 모두 개간하고 수로를 정비할 수만 있다면, 간토의 소출은 화국의 다른 모든 곳에 못지않을 것이다.
“간토의 여덟 나라가 힘을 합쳐 개간에 열중한다면, 우리의 시대에는 무리겠으나, 우리 아들과 손자의 시대에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
우지미쓰의 말을 들은 노리야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마따나 이루어질 수 있다면 분명 간토는 최고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나, 동시에 속내로 그것이 이루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력과 비용의 문제 전에 정세의 문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간토의 북쪽 야인(아이누족을 비롯한 비 야마토족을 의미)들과 맞서 그들을 정벌하고, 동국의 오만한 국주들을 억누르는 데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제하고 나면 여력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오래 전부터 간토를 개간해야 함을 알면서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것 아닌…….
노리야키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우지미쓰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혹시 지금의 정국을 틈타 개간에 열중하실 요량이십니까.”
“내가 사촌 동생을 지지하는 척한다면 그럴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사촌 동생은 막부의 쇼군을 가리키는 것인데, 중요한 건 지지하는 ‘척’을 한다는 말이었다.
“지금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동국이여, 가만히 있어라…… 라고 말이야.”
노리유키는 우지미쓰를 계속 쳐다보며 그가 말하는 걸 이해하고자 하였고, 그의 생각을 미리 읽기 위해 노력하였다.
가마쿠라후가 북조와 막부를 지지한다면 남조와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동국은 누구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물론, 북조와 남조가 서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주변의 국주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작은 소란이야 이어지겠지만, 정세를 뒤바꿀 만한 크기의 권력은 움직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동쪽 외곽에 위치한 가마쿠라후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저 막부 측 세력으로 이름만 올려 주고, 실질적으로는 가마쿠라후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니, 그것이 곧 간토 평야를 개간하는 것이다.
하나, 노리야키는 이내 그런 생각이 오산일 수도 있음을 곧 깨달았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군병을 줄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개간한다고 농사짓는 농부를 데려다 쓸 수는 없다. 농토 개간이라는 게 겨울철에 후딱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관리가 필요하기도 한 만큼 유휴 인력의 투입이 필수였다.
하나, 지금의 사정에서 그런 유휴 인력은 거의 다 군병이었으니, 개간을 위해서는 군병의 수를 줄여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세력 균형이 맞지 않아 막부와 북조가 크게 밀릴지도 모르고, 덩달아 가마쿠라후도 존망의 위기에 설 수 있었다.
“군병이야 유지해야겠지. 다만, 그 군병을 싸우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혹 일종의 둔전(屯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리야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말하니, 우지미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둔병도 결국 용병이 아니오?”
둔병(屯兵)은 군병을 주둔하게 함을 의미하니, 주둔해놓은 군병으로 무엇을 하든 다 용병술이라는 말이었다.
또, 둔병이 둔전병(屯田兵)의 다른 말임을 생각하면, 군병을 모아놓고 개간하고 농사를 짓게 하더라도 그 또한 가마쿠라후의 군력으로 취급받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동국의 대세적인 세력 구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구보의 계획이었다.
노리야키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라 여기면서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인정하였다.
그렇게 간토의 평야를 농토로 조금씩 바꿀 수 있다면, 정말 한 세대가 지난 후에는 간토가 화국의 중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번 해보고 싶은데 말이오…….”
말을 길게 늘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시카가 우지미쓰의 시선을 잠시 마주한 우에스기 노리야키는 자세를 고치고는 허리를 굽혀 읍하며 답하였다.
“명을 내리시면 견마지로를 다할 것입니다.”
그날로부터 얼마 후, 가마쿠라의 아시카가씨는 그들을 따르는 간토 4대 가문, 우에스기(上杉)씨, 시바(斯波)씨, 쿠우모로(高師)씨, 하타케야마(畠山)씨와 더불어 멀리 내다본 한 수 한 점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다만, 그들은 왜국에서의 승승장구를 위한 포석이라 여긴 그 결정이, 그들이 상상도 못하는 땅의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 * *
탐라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은 몽주가 아와지 국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물론, 모두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군력을 셋으로 나눠 시쿠코의 이요국과 남규슈에 각각 하나씩 주둔시킨 후, 남은 군력만 탐라로 귀환하는 것이고, 그들도 탐라에서 군기와 군량을 싣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번 철수에서 정말 철수하는 이는 몽주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호소카와 및 오우치씨와의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몽주가 돌아가는 건 이른 면이 없지 않았지만, 몽주는 탐라로 돌아가야 했다.
아내 앵도의 출산 예정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벌써 낳은 건 아니겠지?”
“걱정되십니까?”
웃음 어린 질문을 던진 자는 다의홍이었다. 남규슈에 탐라군 삼분지 일을 주둔하느라 만 하루하고 몇 시진을 더 보냈는데, 그 전에 다의홍에게 선편을 먼저 보내 데카이에서 잠시 보자고 했던 것이다.
“부디 이번에는 아들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다의홍의 이어진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그는 몽주의 걱정을 착각하는 듯 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내가 걱정하는 건 아내와 아기의 건강이고,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같은 지붕 아래 있을 수 있느냐는 걸세.”
“그게 중요합니까. 어차피 아기씨는 기억도 하지 못할 텐데요.”
“나와 아내는 기억하지 않겠나.”
다의홍은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평범한 인물도 아니고, 탐라섬을 중심으로 사방 천리 안팎에 세력을 뽐내는 주군임을 생각하면, 그런 소소한 가정사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탐라공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영토를 다스리는 국주들도 때때로 몇 달이나 집을 떠나 있기 일쑤였으니, 당대의 교통 상황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시일을 정확히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인 만큼, 집안에서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탐라에서 이 먼 곳까지 원정을 나오셨으니, 늦더라도 국공부인께서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다의홍의 반응은 아기의 출산을 작은 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당대인들이 한계로 여기는 공간과 시간의 문제였다.
고려에서 사는 동안 몽주의 수하들이 몽주의 명을 받들면서 흔히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시간 관념’이었다.
첫 천몽의 경험이 있어, 몽주도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여 시간을 계산했지만, 그럼에도 시-테크를 넘어 분-테크, 초-테크에 익숙한 현대인으로서 정확한 ‘타임 스케줄’을 무심코 요구하였으니, 그럴 때마다 고려인들은 당황하곤 했던 것이다.
예컨대, 지금 몽주와 다의홍의 만남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데카이에서 이틀 후 미시 정각에 보자는 통보는 다의홍에게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박한 것이었다.
몽주는 나름 축후국의 다의홍이 데카이로 이동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생각해서 약속을 잡은 것이지만, 다의홍은 기겁하여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아무리 시간 안에 데카이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당대의 누구도 백수십 리 너머의 어느 곳에서 만나는 걸 그런 식으로 계산하여 요구하지 않았다.
몽주는 다의홍과의 대화에서 그런 시간적, 공간적 이해의 간격을 다시 느끼곤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당대의 세상은 유유자적…… 과는 실제로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느슨한 시간관념으로도 충분하였다.
하나, 몽주가 만들길 바라는 세상은 좀 더 분화되고 그만큼 더 정확한 시간을 따라야 하리라.
어찌 보면 사람들을 시간에 쫓기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도 바쁠 때 바쁜 건 매한가지고, 상공업과 금융 등의 근대적 산업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 단위의 조절은 물론, 그것이 유의미할 수 있도록 교통수단도 확충해야 할 터인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술적인 문제이기 전에, 적어도 시간관념을 바꾸는 건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이해는 역법(曆法)과 관련이 있고, 역법의 변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대의 헤게모니 싸움이 되기 일쑤이지 않던가.
몽주는 언젠가는 해야 할 임무를 떠올리다가 길게 숨을 내뱉고는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오늘 다의홍을 보자고 한 건, 아내의 출산이나 시간관념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규슈, 아니 구주(九州)를 서구주, 동구주, 남구주로 나눌 생각이다.”
“예…….”
몽주가 말문을 여니, 다의홍도 진지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대답하며, 은근히 긴장감을 표하였다.
몽주가 구주의 행정 체계를 언급한다는 것은 곧 다의홍 자신의 지위 또한 언급한다는 것과 같음을 짐작하였기 때문이다.
서규슈를 다스리며 탐라를 받들었음에도, 정작 탐라나 탐라공과 유관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던 그로서는 진심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디 사방위로서 지방을 나누고자 한다면 동서남북을 모두 쓰는 게 적합하겠지만, 이미 서구주에 본래 북규슈에 속한 비전국이 더해져 있어 북규슈를 동서로 나누고자 하였다.
하여, 서구주는 본래대로 비전, 축후, 비후 삼국으로 하고, 남구주는 시마즈씨의 영역 즉 살마(사쓰마), 대우(오스미), 일향(휴가)국 삼국을, 그리고 동구주는 축후와 풍후(분고), 그리고 풍전(부젠)국 삼국을 영역으로 하게 하였으며, 당연히 이미 탐라의 영토화된 대마도를 제외한 주변 도서 지역 또한 가까운 지역에 속하게 하였다.
다만, 동구주의 경우 풍전국의 소유 여부가 확정되지 않아, 변동될 수 있기는 한데, 몽주가 최근에 듣기로 오우치씨와 호소카와씨 사이에 풍전국을 탐라에, 그리고 이요국을 호소카와씨에 귀속하게 하는 대신 호소카와씨가 오우치씨에게 다른 보상을 해 주는 것을 논의하고 있다 하니, 구주의 아홉 국 모두가 탐라의 영토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세 지방의 구별을 분주로 하고, 각 분주를 다스리는 자를 집사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세 분주, 즉 구주 전체를 총괄하는 자를 도집사라 칭할 생각이다.”
각 분주의 명칭은 서구주, 동구주, 남구주 그대로 하되, 분주(分州)는 그 나뉜 지방을 아울러 지칭하기 위해 만든 말일 뿐이었다.
각 분주의 수장을 집사(執事)라 칭하는데, 집사는 현대에서 쓰이는 의미와 달리 당대에는 관직의 이름이자, 고귀한 지위를 가진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특히 중상급 관직명으로 쓰던 중국이나 고려와 달리, 왜국에서는 집사라는 말이 더 크게 쓰였다.
관령(管領), 즉 쇼군이나 가마쿠라 구보를 보좌하는 간레이라는 직책의 전대 명칭이 바로 집사였다.
한 영역의 2인자 혹은 2인자 그룹이나, 최고권력자의 심복을 뜻한다고나 할까?
때문에 다의홍도 집사라는 직위를 금세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었다.
구주의 주인인 탐라공을 대리하여 구주의 분주를 다스리는 자가 곧 집사인 것이다.
그쯤 되자 다의홍을 긴장하게 한 내용이 몽주의 입에서 나왔다.
“너는 당연히 서구주의 집사다. 그리고 동시에 도집사(道執事)도 겸직할 것이다.”
“가, 감사드립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다의홍은 공손히 모으고 있던 양손으로 주먹을 쥐며 허리를 굽혔다.
사실 내심 걱정이 많았던 다의홍이었다.
이번 전쟁이 어렵지 않게 끝나 다행이긴 했지만, 데카이에서 있었던 방화 사건을 비롯하여 왜국 세작들의 발흥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인해 문책 아닌 문책을 당할 수 있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구주를 아우르게 된 현상에서 구주를 다스리는 자리에 그가 서지 못한다면, 문책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여겼는데, 다행히도 탐라공이 그에게 도집사의 지위까지 안겨 주셨으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 다의홍의 마음을 엿본 몽주는 실소하며 다시 말하였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나중에 영장을 보면 알겠지만, 어차피 실권은 각 분주의 집사에게 다 있으니까. 도집사는 차후에 내 명에 따라 구주의 군병을 동원하게 되면, 그때 구주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주군께서 주시는 임무에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다의홍은, 몽주의 말을 듣고는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다음 순간 재고해 보니, 도집사의 권한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주군의 명에 따라 구주에 군병의 동원령이 내려지는 순간, 도집사는 구주의 작은 왕이나 마찬가지고, 그가 서구주의 집사를 겸하는 만큼, 서구주가 동구주나 남구주에 비해 우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전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은연중에 상하관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데, 동구주와 남구주의 집사로 누굴 생각하고 계신지요?”
다의홍은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고 나니, 다른 집사들이 궁금해져 물었다.
“동구주나 남구주는 한동안 군정(軍政)하게 둘 것이다. 군정을 마감한 후 집사를 정하는 건 그때 생각해 보면 되겠지. 구주인이 될 수도 있고, 고려인이 될 수도 있으니, 나는 집사로서 자격이 있는 자를 선택할 것이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다의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군의 생각에 동의하는 양 하였지만, 사실 속내로는 고려인이 동구주와 남구주의 집사로 오면 다소 껄끄러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해 둘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지금 왜국의 사정이 실로 복잡하고 난해하니, 그 와중에 오우치씨나 호소카와씨가 너에게 접근하여 협조를 청할 것이다.”
“예.”
“내가 그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로 이것만 명심하라. 불가근불가원. 알겠느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가깝지도 멀지도 말라는 것이니, 다의홍 또한 금번 전쟁으로 왜국이 분할되고 있고, 주군이 그런 구도가 고착되길 바라고 있음을 알기에 그 명 또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정 어려우면 내 핑계를 대고.”
“걱정 마십시오.”
그 후, 몽주가 노지마 무라카미와의 관계에 대해 다의홍에게 조언할 무렵, 정류하였던 탐라의 배들이 다시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여, 다시 임신한 앵도가 떠올라 급하게 자리를 일어서던 몽주가 문득 멈칫하더니 다의홍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혼인할 생각이 없나?”
“어찌 그렇겠습니까? 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 하면, 생각해 둔 처자는 있는 겐가.”
“아직은…….”
다의홍은 부정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서구주의 유력 가문에서 매파를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고, 어떨 때는 우연을 가정하여 딸이나 손녀를 내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다의홍은 그런 유혹을 모두 거부하였으니,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혼인은 주군의 손을 거쳐야 한다 여겼던 것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주군과 인척관계를 맺는 것이었지만, 주군의 나이가 그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젊어 혼인기의 여식이 없고, 형제 관계도 어린 아우뿐이며 일가친척도 없는 터라 딱히 인연을 생각하기도 어려운 중이었다.
“아, 그러면 내가 중매를 서도 되겠는가?”
“명하신다면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혼인에 명을 내리긴 그렇고, 조만간 주선할 터이니, 한번 만나 보기나 하게.”
“예? 예…….”
몽주가 저도 모르게 현대에서 ‘소개팅’을 주선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하니, 다의홍은 내심 불안해졌다.
주군이 주선하신다면 한 점도 맘에 들지 않는 처자라도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문득 국공부인을 떠올리고, 그녀를 몹시도 어여쁘게 아끼는 주군을 생각하니, 다의홍의 등줄기에는 문득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지금이라도 말을 바꿀까?’
하나, 다시 말을 내뱉기도 전에, 몽주는 서둘러 배에 올라 탐라로 출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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