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39)
홍로현 포구에서 출발한 탐라공의 마차 속도는 평소와는 달랐다.
아마 마차가 만들어진 이후로 가장 빠르게 달렸을 것이다.
탑승한 몽주 또한 주변에 모인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도 없었으니, 왜국에서 돌아온 탐라의 함대가 평소처럼 축포를 쏘며 의기양양하게 천천히 입항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서 가게!”
말은 없었지만 조바심에 마른 입술만 문지르고 있는 몽주를 대신하여 동승한 석삼이 마부 군병에게 재촉하였고, 안 그래도 난생처음 빠르게 달리는 마차는 조금 더 속도를 붙였다.
타다다다다다!
그러다 문득 마차 소리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시선을 돌려 마차가 달리는 길을 내려다보니, 전과 달리 길이 포장되어 있었다.
딱 마차가 달리는 길만, 그러니까 포구에서 국공의 자택이 있는 언덕 위로 뻗은 길만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망으로 밑을 닦고 그 위에 크고 작은 둥글고 납작한 돌을 붙여 만든 도로였다.
“전에 말씀하신 것을 화극 어른과 박무 대신이 시험해 보았는데, 꽤 괜찮아서 곧바로 시행하였습니다. 모래를 들여오면서 들어온 자갈도 많아서 처치 곤란이기도 하고요.”
“음, 일단 괜찮은 것 같군.”
유리 제조 때문에 고려에서 모래를 수입하면서 자연히 섞여 들어온 돌들이 많았다.
하여 그 돌들을 골라내는 것도 꽤 손이 가는 일이었는데, 그걸 본 몽주가 모나지 않은 것들은 따로 모아 두면 쓸 곳이 있을 거라 하면서 포장 도로를 언급한 바 있었다.
도로 건설의 필요성을 말해 둔 적도 많고, 실제로 체관대신 박무와 대략적이나마 논의를 한 바도 있었으니, 몽주가 말한 도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공관대신과 체관대신이 그사이에 시험해 본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마차를 멈춰 도로 사정을 살펴보았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대로 달리면서 그저 마차 바퀴를 통해 전해지는 작은 요동을 느낄 따름이었다.
몽주가 포구에 닿자마자 석삼이 조금 전에 앵도가 산통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준 이후, 그의 마음은 이미 집으로 날아가 있었다.
응애-!
“버, 벌써?”
가택에 들어서서 안방으로 가는데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포구에 닿자마자 석삼으로부터 앵도의 산통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
물론, 석삼이 산통 소식을 전해 듣고 몽주에게 전하기까지의 시간도 있으니, 실제로 산통을 겪은 시간은 일각보다야 훨씬 길겠지만…….
하기야 강영이를 낳을 때도 반 식경 정도만에 낳은 그녀였으니, 두 번째 출산은 그보다도 빠를 수 있겠다 싶긴 했다.
어쨌든 놀란 맘으로 안방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때마침 안방 바깥문을 열고 나오던 점녀가 몽주를 발견였다. 그녀가 몇 걸음 다가와 고하였다.
“감축드립니다! 부인께서 도련님을 순산하셨습니다.”
“그래? 지금 막 낳은 건가? 아내는 건강하고?”
“네. 부인과 아기씨 모두 건강합니다.”
몽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주군, 감축드립니다!”
주변에 신료들이 일제히 축하를 올리니, 함께 마차를 탄 석삼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라온 신하들이 많이 있었던 터라, 주변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몽주는 그 축하에 화답하며 점녀에게 눈짓하여 그가 있음을 아내에게 알리게 하였다.
가만 보면, 몽주가 둘째 아이를 얻은 걸 그보다 신하들이 더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아들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아직 몽주나 앵도나 젊은 터라,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겠지만, 현백에서 군공이 되고, 다시 국공으로 승작함에 따라, 그리고 탐라의 영역이 나날이 커감에 따라 자연히 몽주의 후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안 그래도 남양 석씨의 손이 귀한 탓에, 혹여 몽주가 더 이상 아이를 얻지 못한다면 어찌 될 건지를 두고 은근히 논하는 자들도 있었다.
진지한 의논은 아니었지만, 특히, 강영과 몽건 중 어느 쪽이 더 정통성이 있는지를 두고 저울질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여왕이 있었던 전조와 달리, 당대 고려에는 여인이 왕위에 오른 바가 없었으니, 몽주의 아우 몽건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이 조금 더 강성하였다.
하나 탐라국은 탐라국이지, 고려가 아니기에 주군이 허락한다면 강영 또한 얼마든지 국공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주장도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주군이 뜻한 바에 따라 정해질 것이기에, 그런 논의는 공개적으로 언급되지도 않았고,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그런 중에 마침내 몽주가 아들을 얻으니, 어쩌면 훗날에 꽤 큰 정쟁거리가 될 수도 있었던 문제가 사라진 셈이었다.
다만, 신하들이 후계 문제가 사라졌다고 좋아하는 것에 비해, 그런 분위기를 느낀 몽주 본인은 오히려 후계의 범위가 늘어났다 여겼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고, 죽을 것 같은 ‘느낌’도 없기에,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지만, 몽주는 자신의 아들이 반드시 국공의 지위, 어쩌면 장차 더 커질 수도 있는 그 지위를 승계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물론, 이 시대에 갑자기 민주정을 도입하여 선거로 뽑겠다고 선언할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혈연의 범위 안에서 적합한 자가 없다면, 혈연을 뛰어넘는 선택도 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왕정’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운 시대이고, 지리적으로도 왕정 이외의 지배 체제를 구현하기 어려운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탐라국이지만, 왕정의 형태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옵션을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잠시 미뤄 두고 외면하고 있던 문제를 잠시 생각하던 중에 안방으로 들어갔던 점녀가 나오는 걸 보고는 몽주는 다시 아내의 출산과 아들의 탄생에 집중하였다.
“정리를 마쳤습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방 바깥문으로 들어가니, 안쪽 문 앞에 산파와 산파를 돕는 여인들 몇몇이 몽주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들이 품에 안은 천더미 중에 얼핏 핏기가 보였고, 옅은 피 냄새도 전해졌지만, 그들이 밝은 인상으로 인사를 올리는 걸 본 몽주는 한층 더 안도하며, 그들을 치하하곤 서둘러 안쪽문을 열고 안방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오셨네요.”
“늦을까 봐 무척 급하게 왔소.”
앵도가 아기를 품에 안고 이불 위에 앉은 채 웃으며 몽주를 맞이하였다.
그녀의 이마에 얼핏 땀기운이 있긴 했지만, 강영이를 낳을 때와 마찬가지로, 앵도는 산고를 너끈히 이겨 낸 모습이었다.
“안아 보세요.”
몽주가 앵도의 곁에 앉자, 그녀가 아기를 건네주었다.
포대에 꽁꽁 싸 매인 갓난 아기의 가벼움을 느끼며 몽주는 처음으로 아들과 대면하였다.
핏기가 남은 쭈글쭈글한 얼굴로 아들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얼굴 근육을 움직거리고 있었다.
“안녕, 내가 네 아비다. 반갑구나.”
“……응애! 응애!”
뭐가 안 낯설겠냐마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아기가 입술을 ‘0’자 모양으로 반응하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쿠,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보구나.”
아이가 울자, 몽주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일어나 살살 ‘바운스’를 주며 달래기 시작했다.
앵도는 그 모습을 웃으며 올려다보았고, 안방 바깥에서는 다른 곳에서 며느리의 출산 소식을 기다리던 해민과 주이가 손녀와 함께 안방 안에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싸움에 연루된 탐라국의 국공 가택에 간만에 온화한 평화가 있었다.
* * *
요동으로 온 뒤, 방원은 자신이 그 어떤 소임이라도 맡길 바랐지만, 아직 십 대 초반인 그에게 요동공이 일을 줄 리 만무했다.
때문에, 방원은 여기저기 쏘다니며 모습을 많이 내보이긴 했지만, 정작 하는 일은 없이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은근히 말을 붙일 만한 자들을 몇몇 만나게 되어, 그들과 교류를 시작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호부승지 노숙진이었다.
“하면, 탐라국으로부터 얻은 수입은 어찌 쓰이고 있소?”
오늘도 찾아온 요동공의 아들이 묻는 말에, 노숙진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는 그를 보았다.
아무런 공식적인 직책도 가지지 못한 자에겐 나랏일에 대해 물을 자격이 없음을 경고해야 옳았지만, 질문한 자가 그 나라 주인의 아들이니, 극비가 아닌 이상 대답을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그나저나 어린 녀석이 말투는 참 어른 같다 여기면서 노숙진은 말문을 열었다.
“대략 말씀드리자면, 수입을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국고에 더해지고, 다른 둘은 양모를 생산하는 자에게 주는 급여와 그에 필요한 경비로 쓰이고 있습니다.”
“흠,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양모 일꾼들의 급여에도 세금이 있을 것이고, 경비 또한 꼭 경비로 다 쓰는 건 아니지 않소?”
“맞습니다.”
“하면, 수입의 삼분지 이 이상이 나랏돈이나 마찬가지겠구려.”
방원이 싱글거리며 하는 말에, 노숙진도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말한 것은 공식적인 답변에 기인한 것인데, 국공의 아들이 그 실제를 정확히 짚어 낸 것이다.
“아무래도 실제로 나라에서 얻는 이익 수준이 알려지면 곤란하지요.”
“천한 백성들이 감히 대서지는 않을 것이고…… 일견 탐라국의 눈치를 보는 것이겠지요?”
“눈치까지는 아닙니다만, 굳이 그들과 마찰을 빚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탐라국과 교역하면서 곧잘 탐라국이 쓸데없는 데에 신경쓴다 여기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들은 그들이 지불한 매매금 중 일부가 실제로 물산을 생산한 자들에게 전해지는지를 굳이 확약받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요동국의 입장에서는 탐라국이 물산만 제값에 제대로 받으면 그만 아닌가 싶었고, 실제로 탐라국 측 실무자들 중 대부분이 그에 동의하긴 했지만, 탐라공이 명하여 확인하게 한 터라 어쩔 수 없다 하였다.
하여, 명목상 삼분지 일은 양모 생산에 임한 일꾼들에게 가게 하되, 그 세금을 가중하고 실제로 쓰이는 경비를 줄이는 식으로 나라의 이득을 늘이고 있었다.
“하면, 재정은 제법 풍족하겠군?”
“그런 편이긴 합니다. 다만, 이번 북벌을 준비하며 쓰일 곳이 많았고, 앞으로 북벌을 진행하면서 더 많이 쓰일 것이니, 마냥 여유롭지도 않습니다.”
호부승지로서 나라의 재정 상태를 잘 아는 만큼 노숙진은 제대로 그 실태를 짚어 알려 주었다. 그러자 방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데, 어찌 나라의 재정 상태에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그게 말이오. 어제 명군 군영을 가서 보니까, 요동에서도 쓰면 좋겠다 싶은 게 있었소.”
“그게 무엇입니까.”
“제갈노였소.”
“아…….”
노숙진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 방원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이내 알아들었다.
연국에 집결하여 북진을 시작한 명군은 일부를 먼저 요동에 보내어 요동군이 명군과 제때 합류하도록 안내하게 하였는데, 방원은 그 명군의 군영에 가서 제갈노를 보고는 쓸만하다 여겼던 것이다.
제갈노(諸葛弩)는 제갈량이 만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긴 했지만, 제갈량이 만든 제갈노는 원융(元戎)이라 하여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쇠뇌였고, 지금 명군이 쓰는 제갈노는 연노(連弩)로써, 연발 장치를 가진 기계식 쇠뇌였다.
명군에서는 그 제갈노를 두고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자랑하였지만, 사실 이미 춘추 전국 시대에도 존재했던 무기를 개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요동공의 아들이라는 자격덕에 방원은 명군의 제갈노를 관람할 수 있었고, 그 연발 사격 능력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제갈노는 그 사정거리나 위력이 좋지 못하다 들었습니다만…….”
“그러니 하는 말 아니겠소. 그저 명군의 것을 따라 만드는 것이라면 굳이 재정을 따져 물을 이유가 있었겠소? 그 원리를 따르되, 다시 개량하여 그 위력을 높일 필요가 있으니, 적은 재정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기에 물은 것이오.”
명군의 제갈노는 10발을 연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했고, 살상 거리는 더 짧았다.
게다가 연발 사격을 위해 꽁지깃이 없는 화살을 쓰느라, 같은 발사 속도라 하여도 비슷한 크기의 편전에 비해 관통력이 훨씬 떨어졌다.
실제로 편전을 최고의 무기라 여겼던 방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제갈노에 눈독을 들인 것은 그 연발 능력 때문이었다.
특히, 장차 북방의 드넓은 황무지와 초원을 얻게 된다면, 그곳의 호인들을 다루기 위해서라도 기마를 제압할 능력이 필요한데, 그에 제갈노가 무척 적합하다 여겼던 것이다.
개량에 성공하여, 그 살상 거리를 늘릴 수만 있다면, 갑주를 거의 쓰지 않는 호인들의 기마를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손잡이를 앞뒤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화살을 연발하던 제갈노를 떠올리며 방원은 노숙진에게 다시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아버님께서도 제갈노를 아시면 흥미로워 하실 것 같으니, 호부승지가 한번 권해 보시면 어떻겠소?”
“저도 제갈노를 본 연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부디 잘 생각하시길…….”
호부승지의 대답을 들은 방원은 한쪽 입술을 올려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렵니까.”
“호부승지가 일이 바쁜 것이 보이는데, 더 머물러 봐야 폐만 될 것 아니오. 그리고 야은 선생을 뵙기로 하기도 하였고.”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방원이 떠나니, 노숙진은 잠시 그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다가, 책상 옆에 서랍장을 열어 책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 책자를 펼치고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니, 그 내용은 조금 전 방원과의 대화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책자 전체의 내용도 같은 것으로, 비단 방원뿐만 아니라, 요동공의 적자(嫡子)들에 대한 기록부였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장남 방우의 후계 지위가 굳건하긴 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후계자란 후계자를 지지하는 세력의 강성함도 중요하지만, 후계자 자체의 능력도 중요한 법이었다.
특히, 혹여라도 장남 방우가 요절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부터는 누가 후계의 지위를 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방원도 미약하나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기록도 남겨 둔 것이다.
붓을 놀리던 노숙진은 문득 잠시 멈칫하였다가 이내 한 줄을 더하였다.
‘여러 유자들 가운데 유독 야은 길재와의 교류가 활발하다.’
* * *
방원의 길재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직 이립(而立 : 30세)에 이르지 못한 젊은 학자이자 관리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마치 이순에 이른 노학자 같은 느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나, 그럼에도 방원이 길재를 자주 찾은 건 함주에서 하륜의 조언을 받은 탓이었다.
‘요동의 치세는 유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니, 먼 훗날을 생각하신다면 유자들 중 공자의 편을 얻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특히 저와 동문수학한 자들을 눈여겨보셔야 할 것인데, 그중에서도 길재와 친근해 보십시오.’
하륜이 길재를 추천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으니, 그중 첫째는 그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었다.
하륜은 그와 같은 사문들 중 포은 정몽주가 최고라 하면서도 길재가 그에 못지 않다 평하였으니, 포은과 달리 차분한 성품인 데다가 아직 어려 기회를 얻지 못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그가 아직 권력에 가깝지 않고 높은 직위에 있지 않으면서도 유자들에게 널리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요동국에 크게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방원이 그가 임하고 있는 요동국에 마음이 없다는 말의 의미를 되물으니, 하륜이 말하길 사제 길재는 그 스스로 고려의 신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물론, 요동국이 고려의 일부인 만큼 요동국의 신하가 되는 것 또한 고려의 신하인 것과 마찬가지랄 수도 있지만, 그 실상은 요동국과 고려가 구분되기에 심적으로 혼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만약 그가 고려에서 관직을 얻은 바 있었다면, 고려에서 쫓겨났을 때도 요동공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 만약 길재를 마음으로 굴복시켜 진정으로 그의 주군이 될 수 있다면, 출중한 능력을 가진 데다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신하를 얻는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륜이 길재를 추천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방원이 길재와 친근하길 시도한 중요한 이유였다.
‘다들 길재를 두고 목은 스승으로부터 비롯되어 포은의 뜻과 같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다릅니다. 녀석의 유학 치세에 대한 신념은 굉장해서, 다른 모든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스승이나 다른 사형사제들은 다른 것을 위해 타협할 여지도 있지만, 길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인즉, 그의 유학치세에 대한 욕망만 이뤄 준다면 다른 부분은 공자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어린 방원의 눈에 성리학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경서를 읽으며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는데, 그건 경흥후 시절 전후로 아버지의 주변에 유자들이 포진하면서 그 세력이 지금 요동공의 주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요동공의 지위를 얻고자 한다면 유자 세력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건 이제 필수였다.
꼬장꼬장한 유학자들을 상대할 생각을 하면 어린 방원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하륜의 길재에 대한 평이 사실이라면 길재를 중심으로 유자들을 포섭할 수 있겠다 싶었다.
‘길재를 쓰되, 학자로서만 쓰십시오.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반길 것이니, 공자는 그가 학조(學祖)로서 힘쓰는 동안 제왕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그 후에는…….’
방원은 그가 제왕으로 등극하기만 한다면, 후에 길재나 그의 제자들이 유학적 치세를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능력과 영향력은 좋으나 아직 권력에 가깝지 않고, 아버지 아래 있으나 마음으로 따르지 않으며, 권력을 쥐고 주군에게 간섭하기보다 유학을 널리 퍼뜨리는 것에 관심이 집중된 유자라면 방원 또한 손을 잡을 만하다 여긴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요동에 온 뒤 길재를 여러 번 찾으니, 하륜으로부터 들은 것과 대동소이하였다.
그가 권력이 욕심이 적고, 유학의 보급에 열성인 것은 하륜의 소개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부분들도 분명 있었으니, 요동국 내 유자들에 대한 길재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포은 정몽주가 탐라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이래로 포은을 따르던 유자들 중 상당수가 길재를 따르고, 교류하면서 그리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성격에 모난 구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방원이 요동공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굉장히 무뚝뚝하게 대할 정도였다.
하여, 방원은 어쩌면 다루기가 어려운 자일 수도 있다 판단했는데, 그래도 길재와 친해지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아직 진심으로 따르는 자가 없는데, 정작 그를 따르는 자들은 예상보다 더 많으니, 곧 그를 끌어들여야만 하는 이점이 되었다.
하여, 방원은 자주 길재를 찾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시험?”
“그렇습니다. 마침내 요동공께서 윤허하시었지요.”
길재를 찾아갔는데, 그가 보기 드물게 밝은 낯빛으로 맞이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오늘 요동공이 마침내 과거제의 시행을 준비하라 명을 내리셨다는 답이 있었다.
요동공 휘하의 유자들이 모였음에도 과거 제도에 대한 원청은 없었다가, 근래에 이르러 길재를 비롯하여 여러 유자 출신들이 간원하였다.
예전과 달리, 요동국이 고려의 일부이되, 독자적인 나라로서 역할을 함이 분명해지자, 유학의 확대와 관리의 선발을 위한 요동국만의 과거 시험을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주군께서 북벌 후 나라의 안정을 되찾으시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과거 시험을 치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현명하신 결정이시지요.”
길재가 과거제 시행에 대해 크게 기뻐한 건 유학의 광범위한 보급을 원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더욱 기쁜 것은 과거제 시행을 준비하는 일에 그 또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길재를 보던 방원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문득 물었다.
“나도 그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겠소?”
“예?”
“나도 시험을 치를 자격이 되느냐 물은 것이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나, 공자께서 굳이 과거 시험을 보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요동공의 아들로서 만약 하려고 한다면 한 자리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굳이 과거 시험을 볼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과거제가 비단 관리의 선발만을 위한 건 아니지 않소. 유학적 소양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니, 장차 유학의 기치에 따르는 요동국에서는 그 누구라도 과거를 볼 수 있고, 그렇게 하도록 해야 옳지 않겠소? 내가 보기엔 심지어 군왕의 자격 중에 하나로 삼아도 될 것 같소만.”
“예…… 예?”
길재는 방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다가, 군왕의 자격이 언급되자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하, 무얼 그리 놀라시오. 그저 어린 내 생각일 뿐이오. 하나,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니겠소?”
“…….”
분명 오해의 여지가 많은 말이었다.
감히 왕의 자격을 시험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을뿐더러, 앞서 그가 과거 시험에 응하고 싶다고 한 말과 더하여 생각하면 그가 요동왕이자, 요동국공의 지위를 탐내고 있다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야은 선생이라서 하는 말이니, 굳이 마음에 담으실 필요는 없소. 그나저나 조만간 과거 시험이 있다 하니, 나도 공부를 좀 해야겠군.”
길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니, 방원이 너스레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만약 지금 있었던 이야기를 바깥으로 흘린다면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방원은 길재가 그럴 것이라 여기진 않았다.
게다가 알려진다 하더라도 아직 어린 만큼 정말 크게 벌 받을 것 같지도 않았고.
사실 방원으로서는 오히려 길재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게 맘에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만약 과거에 합격한 공자가 있다면 다른 공자들보다 우선하여 후계로서 지지할 마음이 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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