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40)
* * *
“좀 섭섭하지 않으세요?”
“……?”
함께 걸음을 옮기던 중에 들려온 종성의 물음에 몽건이 고개를 돌려 의문을 표하였다.
“저는 좀 섭섭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님을 각별하게 대하던 신하들 중 몇몇의 태도가 변한 것 같았거든요.”
“후후, 그랬나.”
무슨 소리인지 이해한 몽건은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종성이 그렇다 하니, 정말 태도가 바뀐 신하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하나, 몽건이 그에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새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자신을 마치 차기 국공인 양 대하는 자가 있을 때도, 지금 조카 강중이가 태어난 후에 태도를 바꾼 자가 있을 때도 몽건은 그런 자들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종성 또한 몽건의 그런 마음가짐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지만, 겉으로도 보이는 소수 인물들의 조변석개에 괘씸하다는 소감을 가진 것이었다.
“어차피 나의 삶은 형님의 치세와 닿아 있어.”
몇 걸음 더 움직이던 중에 몽건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내가 많은 것을 익혀 준비를 하면, 형님께서 나를 쓰실 곳을 찾으시겠지. 지금까지 형님이 얻으셨고, 앞으로도 얻으실 세상을 생각하면 나는 오직 내 능력을 갖추는 것에만 열중할 뿐이야.”
탐라의 세상은 몽건이 태어날 때에 비해서도 월등히 넓어졌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넓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디 넓어지기만 할까, 깊어지기도 할 것이고, 높아지기도 할 것이다.
그제 오랜만에 탐라로 돌아오신 형님이 조카 강중이와의 첫 해후을 즐기신 연후에 밤늦게 다시 신하들을 모아 회의를 여셨다고 하니, 그 밤에 빠르게 논의되고 결정된 것 중 하나가 새로운 배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경함선과 다른 배를 짓는 건 기정사실이긴 했지만, 더 크고 육중한 배를 만들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새로 결정된 그 배는 날렵하고 빠른 배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건너들은 몽건은 형님이 비단 지금 넓어진 탐라의 영역을 더 먼 곳까지 뻗고자 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빠른 배의 기본적인 용도야 지금 탐라의 영역 안을, 말 그대로 지금보다 빠르게 오가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곧 더 먼 곳까지 탐라의 영역을 뻗게 할 것임을 직관하였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거리라 하더라도 오가는 데에 삼 일이 걸리던 것이 이틀로 준다면 체감적으로 탐라의 영역은 삼분지 이로 줄어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다시금 더 먼 곳의 영토에 대한 욕구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몽건은 그런 욕구 이전에, 이미 형님께서 더 먼 곳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 짐작하고 있었다.
몽건 또한 형님이 만드신 지도를 꼼꼼히 살핀 바 있으니, 그 정도로 형님이 지리에 해박하신 이유가 해외 확장 내지, 진출에 있다 여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탐라의 세상은 그처럼 나날이 넓어질 것이고, 그 안의 탐라 백성들은 점점 부유해지고, 비단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풍류를 즐기고, 배움을 익히고 있으니, 그것이 탐라의 세상을 깊고 높여 도탑게 하리라.
그리고 그런 만큼 탐라 안에서 쓰일 인물에 대한 갈증은 항시적일 테니, 몽건은 자신의 실력을 갖추지 못할까 염려할 뿐, 그가 그 배운 바를 행하고 실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군왕의 지위란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굴레일 수도 있을 것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문득 몽건이 중얼거리니, 그걸 들은 종성이 얼른 물었다.
“그냥 문득 든 생각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답을 회피하며 몽건은 씨익 다시 웃었다. 하나, 종성의 눈에는 몽건이 형이 뭔가 예견한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나, 다시 묻고 싶어 얼른 몽건의 곁에 따라붙으며, 나란히 회랑을 돌아 걸으니, 시야에 탐라공께서 공녀와 함께 나란히 걸어오는 게 보였고, 더는 몽건에게 물음을 던질 수 없었다.
“아아! 그러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나랑 강중이 중에 누가 더 좋아요?! 네?!”
“허허, 거참…….”
딱 봐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자식 ‘버전’인 질문에 곤란해 하던 탐라공은 문득 아우와 포은의 아들이 함께 오는 걸 보고는 반갑게, 아마도 딸아이의 득달에서 잠시마나 벗어날 기회가 온 것 때문에 더 반갑게 아는 체를 하였다.
“우리 두 귀여운 소년들이 오셨었군?”
두 소년들이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특히 아우 몽건이 얼마만큼 넓게 생각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몽주는 그저 나란히 뒷짐 지고 오는 두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기침하셨습니까, 형님.”
“안녕하십니까, 국공 저하.”
“그래, 문안인사를 하러 왔던 게냐?”
공손하게 손을 모아 인사하는 몽건과 종성을 보고 흐뭇한 미소로 말하니, 두 귀여운 소년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님, 어머님께 인사드린 후, 형수님을 뵙고 조카도 보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형님은 안 계시다 하기에 일단 그냥 가던 중이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었습니다.”
“허허, 그래. 넌 언제봐도 참 어른스럽구나.”
몽주는 또박또박 말하는 아우를 흐뭇하게 보다가 문득 자기 바지춤을 잡고 매달려 있는 딸아이를 보았다.
“후잉, 아버지, 아버지, 제발 제가 더 좋다고 말해 줘요.”
“아이고, 대체 어느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겠느냐? 이 아비는 너와 강중이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히잉…….”
대체 아버지의 대답에 무엇이 못마땅한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칭얼대니, 몽주는 같은 나이의 몽건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과 자연 비교가 되었다.
하여, 몽건을 보고 좀 보고 닮으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겨우 목구멍 너머로 도로 밀어 넣었다.
괜히 비교하여 훈계하다가 딸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염려한 탓도 있었지만, 굳이 따져 보면, 그 나이 대에 아이라면 몽건이보다는 강영이 쪽이 더 정상적인 모습이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몽건에 대해 들린 것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총명하며 어른스럽다는 말들뿐이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어디서도 그 나이다운 모습에 대해서는 말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새삼 몽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몽건아, 오늘 무엇을 할 예정이냐?”
“평소와 다를 바 없습니다.”
“평소에는 뭘 하고?”
몽주가 다시 묻는데, 대답은 몽건 대신 여전히 바지춤을 잡고 떼쓰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강영으로부터 나왔다.
“삼촌은 만날 서고에만 있어요. 예전부터 그랬는데, 요새는 더 해요.”
“…….”
강영의 대답을 듣고 시선을 옮겨 아우를 보니, 몽건이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그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칠팔 세의 어린아이가 도서관에만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몽건이 이상하다 확정하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비교하면 분명 달랐다.
“몽건 도령은 늘 배우고 익히는 중입니다. 국공 저하의 가문에 장차 큰 기둥이 되시고자 잠시도 헛되이 보내시지 않으니, 저하께옵서도 눈여겨 보아주십시오.”
“…….”
문득 들린 말은 몽건의 곁에 있던 종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던 똑똑한 귀여움에 몽주는 절로 미소를 보였지만, 동시에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어른스러운 것과 어른인 것과는 분명 다른 것 아닌가. 눈앞의 두 꼬마 녀석들은 분명 겉만 꼬마지, 속은 아닌 녀석들이었다.
몽주는 그간 몽건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겉으로는 밝게 웃으며 아우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바빠서 안 될 것 같고…… 내일 점심때 나를 찾아오너라. 같이 식사나 하면서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아, 종성이 너도 같이 오고.”
“알겠습니다. 제때 찾아뵙겠습니다.”
몽건이 묵묵히 답하자, 종성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응하였다.
그 뒤로 두 아이가 먼저 자리를 벗어나 떠나니, 몽주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간 들었던 몽건에 대한 소식과 소문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래쪽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내리니, 아직도 매달려 있는 딸아이가 보였다.
“매달려 있는 것도 힘들 터인데, 그만 놓는 게 어떻겠니.”
“안 힘들어요.”
정말 별로 힘들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몽주는 강영이를 계속 달고 다닐 수는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아, 나랑 강중이 중에 누가 더 좋아요, 답해 주세요.”
“……네가 조금 더 좋구나.”
“정말요? 헤헤!”
원하던 답을 들으니, 그제야 강영은 꼭 쥐고 있던 몽주의 다리를 놓고는 좋아라 하였다.
“대신, 이건 너랑 나만의 비밀이다. 절대 다른 곳에 가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네에.”
몽주는 강영이와 손가락까지 걸며 함구를 약속받았다.
그렇게 딸아이의 고집에 져 준 몽주는 멀리서 따르던 가복에게 강영이를 맡기고는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일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쯤에 온 홍로현에 몽주가 아들보다 딸을 더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밤에 앵도에게 자식을 차별하느냐는 항의를 받아야 했다.
* * *
“진정 정지 중사 나리십니까요? 아이고, 영웅을 뵈어 영광입니다요!”
“아, 예, 사실 보잘것없…….”
“정지 중사 나리의 포대가 방포할 때마다 왜놈들 성문이 박살 났다던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 뭐, 성문을 부순 적이 있긴 합니다만, 다른…….”
“자, 여기 받으십시오. 제가 넉넉히 몇 길구람 더 넣어 드렸습니다.”
“…….”
정지는 얼결에 종이에 감긴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받아 들고는 더 무어라 해명할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곤 고맙다 말을 남기며 돌아섰다.
“큭큭큭.”
“웃지 마라.”
“……넵!”
입구를 나서며 정지가 나직이 말하자, 함께 육점(肉店)에 왔던 수하들이 서둘러 입을 막았다.
“한 번 더 내 이름을 허락 없이 다른 이에게 밝혔다가는 내가 얼마만큼 무서운 사람인 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게다. 알았나.”
“넵!”
상가 중에 일순 차렷하며 답하는 부하들을 잠시 노려본 정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몰랐는데, 탐라에 오고 나서야 그는 그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인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국 원정 동안, 순보에서는 매회 전쟁 소식을 전하였는데, 전황에 대한 기사는 물론, 군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기사도 많이 실렸다.
그 기사들 중 정지와 그의 포대에 대한 기사도 있었음은 데카이에서 뒤늦게 순보를 보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어지간한 탐라 백성들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순보에 실린 ‘전쟁 영웅’들은 얼추 일백은 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한데, 막상 탐라에 닿아 집에 돌아오니 이웃사람들은 물론, 일면식도 없는 자들까지도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다들 영웅을 보고 싶어 왔다는 말을 하며 만남 자체에 감격하였다.
심지어 선물까지 안겨 주는 자들도 있어, 한사코 사양해도 야밤에 대문 앞에 놓고 도망가기까지 하였다.
지금 육점에서도 그의 수하들이 장난 삼아 정지가 바로 그 정지임을 알리자, 주인이 영웅을 만난 것을 기뻐하며 고기를 더 얹어 준 것이었다.
공으로 고기를 얻은 것에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정지는 자신이 받는 관심과 쏟아지는 칭찬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물론, 열심히 싸웠고, 분명 군공을 세우긴 했다.
육점 주인이 물었듯 왜성의 성문을 박살 낸 적도 있긴 했다.
하나, 그렇다고 다른 군병들에 비해 엄청난 공을 세운 건 아니었다.
성문을 부쉈다고 하지만, 그건 그게 임무였기 때문에 그의 포대가 성문만 집중적으로 공격한 덕이었다.
다른 성에서는 다른 포대가 성문을 부쉈고, 비단 성문을 부순 것만이 최고의 공훈은 아니었다.
또, 공성전만이 중요한 전투는 아니었으니, 성을 끼고 싸우지 않은 곳에서 더 훌륭한 전공을 세운 자들도 분명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 정지와 그의 포대를 비롯하여 극소수의 군병들만이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공훈을 세운 자들은 거의 모두 순보에 실린 바 있고, 순보가 편파적으로 정지를 비롯한 몇몇 관심을 받고 있는 자들을 추켜세운 것 같지도 않은데, 그 소수의 명성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 정지는 그를 찾아오는 자들을 역으로 물어, 어찌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는지를 조사하였는데, 엉뚱하게도 많은 이들로부터 연안 노꾼들로부터 들었다는 답을 들었다.
탐라의 교통은 연안을 오가는 배에 집중되어 있기에 많은 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그러다 보면 노꾼들의 잡담을 듣거나, 그들과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노꾼들을 통해 소식과 소문이 퍼지게 되는데, 그들이 집중적으로 몇몇 ‘전쟁 영웅’들의 영웅담을 퍼뜨린 것이다.
물론, 이는 탐라공이 연안 수송선을 운영하는 문씨 가문에게 시킨 일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정지로서는 대체 왜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 자신 외에 똑같이 노꾼들에 의해 칭송된 자들을 함께 살펴보니,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탐라 원주민이 아닌 외부 이주민 출신 군병들이고, 정지처럼 소수의 휘하 군병들을 이끄는 자들이었다.
또, 휘하 군병들은 탐라 원주민과 이주민들이 골고루 섞여 있는데, 모두 힘을 합쳐 큰 공훈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 공통점들을 깨닫고 나니, 대체 노꾼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노꾼들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국공께서 명하였거나, 국공의 재가를 받아, 조정에서 탐라 원주민과 외부 이주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알력을 그런 식으로라도 감쇠시키기 위해 일부러 ‘전쟁 영웅’을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짐작하고 나자, 정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곤혹 아닌 곤혹을 묵묵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군공을 세우고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다른 군병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역시 이주민 출신으로서 텃세를 경험한 바 있고, 원주민 출신 군병과 이주민 군병 사이에 싸움이 나는 걸 목격한 바도 있기에, 효과는 미심쩍더라도 그 고의적 영웅 만들기에 암묵적으로나마 조력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정도 양이면 우리 배 군병들이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겠습니다.”
문득 뒤에서 들리는 어느 군병의 말에 정지는 그제야 웃는 낯을 보였다.
같이 고생해놓고, 그와 그의 포대원들만 너무 박수를 받는 게 미안해서, 돼지고기 150여 길구람을 사 가지고 가는 중이었다.
이틀 후면 다시 왜국으로 돌아갈 터이니, 가기 전에 돼지고기와 술로 회식이라도 할 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왜국으로 돌아가면 민망한 시선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 *
상관대신 희도와 탐라 상단의 고신걸 단주가 자주 회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왜국에서 있는 전쟁은 물론, 북방에서도 곧 싸움이 있을 것이기에 그에 필요한 양초를 제때,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기 위해 최근에는 더욱 만남이 잦았다.
다만, 오늘 만난 것은 양초나 다른 군비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하면, 직(織)과 사(絲)는 저희 상단에서 전담하고 사탕은 사탕무 재배까지만 맡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아시겠지만, 사탕무 종자 관리에 신경 써 주십시오. 종자만 있다고 해서 사탕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나, 혹시 모를 일 아닙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만나 여러 녹계와 지도를 놓고 협상을 하고 있었으니, 그건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빅 딜’이고, ‘민영화’이며, ‘정경 유착’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탐라국의 이름으로 행하는 여러 산업들 중 탐라 상단 아래로 이전될 산업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이유로 반드시 탐라 조정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는 산업과 탐라 상단에서 다루어도 별문제가 없는 산업을 골라 나누었다.
이는 마치 현대 한국에서 재벌들 간에 기업을 맞바꾸는 것과 유사하니 빅 딜이라 할 것이고, 나라에서 민간 상단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민영화라 할 것이며, 밀실에서 큰 이문이 달린 산업이 관료의 손을 통해 아무런 제한도 없이 상단에 넘어가니 정경유착의 성격마저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는 엄연히 현대적 시선에서 그러하다 할 뿐이고, 그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그런 개념조차 없었으며, 당대의 다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하면 상단 아래 따로 회사를 세우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여러 회사들이 상단에 속하는 것이지요.”
탐라공이 회사령을 반포한 후, 탐라 상단이 우선적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회사 체제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그중, 이미 고려 내에 탐라 상단을 따르는 보부상들 및 하천 배꾼들을 규합하여 탐라 내류(內流) 회사를 세웠으니, 양남 내 유력 접장(지역 보부상의 수장)들과 선주들에게 회사의 지분을 조금씩 주어 양남 전역 내륙 유통의 기반을 확보하였다.
또 탐라 경업(輕業)회사를 세워, 말 그대로 가벼운(輕) 물산의 생산을 담당하게 하였으니, 비누나 백묵, 그리고 종이 등과 같이 본래 탐라 안에서 만들던 몇몇 물산들이 고려 남면으로 서서히 이전될 예정이었다.
이번에 직과 사, 즉 천과 실을 생산하는 것 또한 탐라 상단에 넘어갔으니, 조만간 방사(紡絲) 회사와 직포(織布) 회사로 분하여 회사화될 예정이었다.
다만, 화약과 무기는 물론이고, 사탕이나 유리, 그리고 조선(造船)같이 그 비급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산업의 경우에는 아직 탐라 조정의 손에 남아 있었는데, 이 또한 차후에 다른 곳에서 비슷한 것이 만들어지거나, 생산법의 발전이 있어 이전 단계의 생산법을 지켜야 하는 필요성이 적어지면 그때 다시 상단으로 넘겨 회사화할 계획이었다.
“실을 짓는 이들은 탐라에도 많으니, 너무 남면에만 집중하진 말아 주십시오.”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들에게 바뀌는 건 나라의 녹이 아닌 상단의 월봉을 받는 것뿐입니다.”
빅 딜이자 민영화이며 정경 유착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참으로 온화한 거래였다.
그건 탐라 조정이든 탐라 상단이든 어차피 탐라공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 협상을 하는 자들 모두가 탐라공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주군께서 왜 회사를 따로 세우시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관대신 희도는 문득 고백하듯 토로하였다. 탐라의 상업과 산업을 관장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꽤 아픈 부분이었다.
그에 고신걸 단장도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저도 아직 그 큰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상단을 회사로 구분하여 만들다 보니, 뭔가 정리가 되는 기분은 듭니다.”
“정리가 된다고요?”
“그렇지요. 그저 물건을 나르는 정도일 때는 상관없었는데, 취급하는 일이 많아지니, 뒤죽박죽되어 저도 상단의 일을 파악하는 게 어려워지고, 아랫사람들도 무엇부터 처리해야 하는지 곤란해 하더군요. 한데, 일의 성격을 나누어 회사를 세우고, 상단원들을 각 회사에 배정하여 그 회사의 일에만 전념하게 하니, 그들도 혼란이 줄어들고 일 처리도 보다 원만해졌습니다. 주군께서 멀리 보시고 상단의 일이 커질 때의 난맥상을 짐작하셨기에 미리 대비하게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음, 그렇기도 하겠군요.”
희도 대신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석연치 않은 마음은 거의 사라지지 않았다.
주군께서 주군의 자산을 키우기 위해 그리하셨다는 건 이해할 만하지만, 회사령이 비단 탐라 상단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들 오해하는 건지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회사령은 탐라 상단 외에도 능력이 되는 탐라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회사를 세우도록 부추기는 것이지 않은가.
만약 회사령에 담긴 뜻대로 회사들이 우후죽순 세워진다면, 탐라 상단의 이문이 적어짐은 물론, 나라 안 상업과 산업 또한 몹시 혼란스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희도로서는 다른 걸 짐작하시면서 그걸 짐작하지 못하실 리 없는 주군께서 어찌 회사령을 내어 혼란의 씨앗을 뿌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당장은 주군의 위업이 높아, 감히 회사를 세워 주군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자는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뭐, 차차 주군의 뜻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태껏 많은 일들이 그랬듯 주군께서 정하신 건 언제고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두 사람은 빅 딜 협상을 마친 후에도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관부에서 주군의 명에 따라 여러 발의 실을 동시에 기을 수 있는 방적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같이 그들의 일과 유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문득 대화가 닿은 것은 북방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양초 보급과 군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 북벌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새 주군께서 북벌에 직접 나서실지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제가 보기에는 주군께서 직접 녹둔도로 가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희도의 말에 고신걸은 일단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타고난 무장도 아닌 주군께서 전장에서 직접 군을 이끄시는 것이 몹시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대신 남쪽을 염두에 두시는 것 같더군요.”
“예? 남쪽이요?”
“남양을 말하는 것이지요. 고 단주께서도 아시겠지만, 유구 섬 말고도 남양에는 많은 땅이 있지 않습니까.”
“하면, 설마 주군께서 직접 원양에까지 나가실 의향이 있으신 겁니까?”
“지난번 회의 때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왜국 쪽 협상이 마무리되어야겠고, 명국으로 가서 유리 거래를 개시하는 일에도 나서실 생각이신 듯하니, 당장 급한 건 아닐 겁니다.”
“허허, 주군께서는 휴식을 잊으신 모양이군요.”
고신걸은 어이없다는 양 실소하였다.
한 나라의 만인지상이라는 자리가 아래에서 보기보다 힘들고 바쁜 자리라는 거야 그도 이제는 이해하는 바였지만, 그의 주군은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주원장도 주군만큼 바쁠까요?”
“바쁜 거야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그자는 화려하고 안락한 궁 안에서만 바쁘겠지요.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