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41)
* * *
천재란 무엇일까.
몽주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열린 창밖을 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홀로 던지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가 천재라 평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실 의무 교육 기간의 대부분을 열등생으로 보낸 몽주로서는 천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당연히 없다.
문득 떠오르는 건 과거 수능 공부할 때 보았던 인터넷 강의 속 어느 강사가 수업 중 잠시 딴말을 하며 해 준 말이었다.
가끔 자기 스스로 혹은 학생의 부모가 학생이 정말 천재인데 노력을 안 한다는 식으로 상담을 해 오는 경우가 있다면서 그럴 때 그는 ‘천재는 분명 있다. 하지만 너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답해 준다며 농담조로 말을 꺼냈었다.
그러곤 이어 다소 진지하게 해 준 말이 있었으니, 천재라는 말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한자 조어로써, 천재(天才)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말이지만, 유럽어 계통에서 천재라는 말은 즉, 영어 ‘Genius’라는 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나온 말로, 진정한 천재 중에 한 사람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했다.
칸트의 정의에 의하면, 천재란 ‘규칙’을 깨닫는 자다.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규칙, 진리(眞理)를 깨우쳐 밝혀낸 자이니, 그럴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야 함은 물론, 실제로 ‘규칙’을 밝혀낸 업적을 세운 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강사가 천재에 대해 말해 준 건 아마 두 가지 의도였을 것이다.
하나는 천재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드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뭔가 이룩해 내 세상에 공인되지 않는 이상, 천재적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천재는 아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몽주가 뜬금없이 고려에서 훨씬 나중에 나올 천재에 대한 개념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물론, 몽건과 종성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냥 똑똑한 정도는 뛰어넘은 녀석들인데…….”
몽주는 그가 왜국에 나가 있는 사이에 유리 공소에서 생산한 유리로 창을 만들어 놓은 곳을 통해 하늘을 올려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제 점심 약속을 해 놓고는 예기치 못한 정무가 많아, 약속을 미루어 오늘 오전에야 두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 차를 마시며 한 시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두 아이들 모두 일단 ‘수재’임에는 확실했다.
이미 지적 능력은 당대의 어지간한 성인을 능가하고 있었으니,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 평가하긴 해도, 그건 그들의 나이로 인한 한계일 뿐, 합리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당대의 지식인들을 뛰어넘고 있었다.
물론, 두 아이들 사이에도 차이는 있었다.
종성이 두 살 가까이 어린 데다, 글을 깨우치기 시작한 이래, 보고 배운 대부분이 유학 경전이었던 탓에, 그가 생각하는 방향 자체가 유자와 매우 흡사했다.
그에 비하면 유학 서적을 읽은 적은 있어도, 탐라에서 보고 자란 몽건은 보다 ‘open-mind’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몽린이 아닌 몽주의 시선에서는 몽건이든 종성이든 똑똑하긴 하지만 당황스러울 만큼 대단한 건 또 아니었다는 말이다.
현대 한국에서 학벌로 따지면 꽤 상위권인 몽주가 충분히 ‘내려다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두 아이를 그저 수재 정도로 단정할 수 없었던 것은, 근세와 근대의 천재들이 인생을 걸고 밝혀낸 진리들을 몽주는 현대인으로서 교과서 등을 통해 쉽게 얻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현대에서 재상이 현대인이 고려 말 시대로 간다면 당장에 대단한 지식인으로 추앙받기보다 오히려 그 7백 년 가까운 시간 차이만큼 오히려 바보가 될 것이라 말한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반대의 경우, 고려 말의 지식인이 현대로 간 경우에는 훨씬 더 큰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은 자명했다.
몽주에 의해 평가되는 몽건과 종성의 처지가 그와 마찬가지였다.
몽주는 아무리 그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변하여 탐라국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생겼고, 몽건과 종성 두 아이들이 탐라국에서 자란 덕을 보았다고 해도, 또, 그럼에도 몽주가 판단 가능한 수준에 불과한 지적 능력을 보였다고 해도, 그들의 지적 수준이 남다른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확실히 두 아이들은 천재적이다. 즉, 천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정말 천재적인 채로 성장하여 천재임을 증명하게 되는 건 솔직히 운명에 달린 것이었다.
현대에서 영재의 기미만 보여도 온갖 기대를 걸며 각종 교육을 시키지만, 그 영재가 천재가 될 확률은 미약하다.
근대 ‘천재들의 시대’에 등장했던 천재들 중 책 한 권 보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어이 천재임을 증명한 이들도 적지 않다.
또,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곤 하지만, 그 지적 능력이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발현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던 끝에 몽주는 문득 자문하였다. 맘에 들지 않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몽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몽주가 몽건과 종성에게 ‘장차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몽건이 답한 말이었다.
9.5//“사실 그것이 제 가장 큰 고민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보아도,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다 알지 못하니,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지식의 축적은 물론, 그 체계성 또한 현대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한 당대임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고민일 수도 있었다.
몽건이 토로한 그 고민을 떠올리면,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절대 맘에 드는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뭘 어찌해 줘야 하는지도 딱히 떠오르진 않았다.
“이거야말로 현대에서 논의를 좀 해 봐야겠네.”
점심 식사 후 잠시 쉬는 시간을 모두 할애하여 곰곰이 생각한 결과는 결국 뒤로 미루는 것이었다.
어쩌면 몽주가 만들 세상을 이끌어 줄 인재를 둘이나 얻은 건지도 모르는데, 짧은 생각으로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 인생은 길고, 그들은 너무 어리지 않은가.
* * *
“거 되게 거만하네, 쳇!”
응천부 황궁의 작은 문을 나서는 한 사내는 구시렁거리며 황궁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가 아무리 관직 따위를 얻지 못한 장삼이사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때 황상의 근신(近臣)이었던 이의 마지막 심부름으로 찾아온 것이건만, 마치 거지가 황궁에 들어오려는 것처럼 막 대하니 짜증이 절로 났던 것이다.
잠시 황궁을 더 노려보다가 가까운 곳의 근위병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위협하는 걸 보자, 얼른 굽실거리며 잦은 발걸음으로 황궁에서 멀어졌다.
“아이쿠,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과장된 몸짓으로 겁 먹었음을, 자신이 아무런 위험도 될 수 없는 자임을 표현하면서 십여 걸음을 옮겨 황궁 앞 대로의 인파 속으로 파고든 그가 다시 어깨를 펴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그의 입에서 절로 누군가를 향한 말을 흘러나왔다.
“어르신, 저는 마지막 약속을 지켰습니다. 근데, 이래서야 황상께 어르신의 소식이 전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전해 들은 황상의 됨됨이를 생각하면, 그의 곁을 떠나 낙향하여 병환으로 죽은 노신을 안타까워하는 건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어쨌든 저는 할 건 다 했으니, 이만 제 길을 떠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남기고는 고개를 내려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 번창해 있는 응천부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가 느끼기에 응천부는 더 높아져 있었다.
북방은 아직도 원나라의 잔재세력과 다툰다고는 하나, 그 싸움의 여파가 남쪽까지 내려오지는 않으니, 이미 남방은 태평성대였다.
응천부는 나날이 높아지고, 응천부의 꼭대기에 있는 황상은 그야말로 하늘로 솟구치니, 이제는 누가 뭐래도 천자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천자의 눈에 세상은 어찌 보일까.
일개 이야기꾼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높아질수록 아래는 잘 안 보이는 법이지.”
이상하게 통쾌한 기분으로 중얼거린 나씨 아무개는 발걸음 가볍게 길을 잡아 걸음하였다.
그가 가려는 목적지는 연국이었다.
근래에 명국에 흘러다니는 이국의 물산들 중 상당수가 연국을 통한다 하는데, 그 덕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돈도 그만큼 많이 흘러다닌다 하였다.
그런 곳일수록 이야기에 돈푼을 던져 줄 사람들이 많은 법이니, 그곳은 가 볼 만한 곳이었다.
물론, 죽은 노신 유백온이 그에게 남겨 준 돈도 제법 있었기에 돈이 그곳으로 가는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지금 명나라 군대가 연국을 시작으로 원의 동쪽을 새로이 벌하려 하고 있으니, 그곳의 싸움 소식을 듣고자 한다면 연국으로 가야 자세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태생이 호기심이 많은 그였기에,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라면 발로 밟아 봐야 속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황상 주원장의 책사였고, 어쩌면 최후의 충신이었을지도 모르는 백온 유기가 고향땅에서 죽었고, 그의 죽음을 응천부에 전한 나본은 연국으로 향했다.
* * *
“아쉽군.”
나본이 걱정한 것과 달리, 유기의 사망 소식은 황상에게 전해졌다.
다만, 황상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은 것을 빼고는 딱히 유기를 위한 슬픔을 표하지 않았으니, 그것만큼은 나본의 짐작과 같았다.
누가 그걸 보면 홍무제 주원장이 참으로 인정없다 하겠지만, 사실 응천부의 시선에서 보자면, 유기는 가장 축복받은 자였다.
여태껏 수많은 고관 공신들을 숙청했고, 지금도 빌미만 있다면 여지없이 시행하고 있었으니, 유기 정도 되는 인물이 황상의 손에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굉장한 행운이었다.
예전에 명나라 수군이 행방불명된 일로 말미암아 최대 공신 세력을 이끈 전 승상 이선장은 쫓겨난 뒤에도, 황상의 감시 아래 숨도 못쉬고 있는 처지였고, 위국공 서달은 그 자신의 운명을 걸고 북벌에 나섰으니, 유기와 더불어 삼대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그 두 사람의 운명도 칼 위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의 개국공신들마저 이미 숙청되었거나, 언제 숙청당할지 몰라 숨죽이고 있으니, 반대로 홍무제 주원장의 권위는 홀로 높았다.
이선장이 축출된 이후, 승상의 자리는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승상을 임하는 안을 황상께 고하지 않았고, 황상은 아예 승상제를 폐지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나, 황상이 홀로 육부백사(六部百司)를 독단할 수는 없기에 삼전이각(三殿二閣)을 세워 그 수장을 대학사(大學士)라 하니, 후에 일전(一殿)이 추가되어 사전이각을 내각(內閣)이라 부르게 된다.
겉으로 보자면, 그 내각대학사들이 승상을 대신하는 셈이지만, 사실 대학사들의 권력을 실로 볼품없어 모두 합하더라도, 예전 승상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고문(顧問)에 불과하다고 할까.
하여, 실제로 국정의 주도권을 가진 건, 황상을 제외한다면, 육부(六部)의 상서(尙書 : 장관)였다.
지금 유기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대전에서도 대학사들은 듣기만 할 뿐, 황상과 더불어 국정을 논하는 이들은 모두 상서들이었다.
“호부상서는 고하던 것을 마저하라.”
유기 때문에 잠시 끊긴 보고를 계속하게 하자, 호부상서는 말문을 다시 열었다.
“지금 나라 안에 풍족한 국외의 물산들 중 상당수는 연국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하여, 연왕부에 그에 대해 질의를 넣으니, 모두가 고려로부터 구한 것이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고려? 하면, 그 하얀 사탕도 고려에서 온 것인가.”
“그렇다 합니다.”
“흠…….”
대답을 들은 홍무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또한 하얀 사탕을 맛보았고, 그렇기에 그것이 온 곳을 하문하여 알아보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하얀 사탕이 같은 무게의 은만큼이나 비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히 떠오른 건 고려가 그 하얀 사탕으로 얼마나 큰 이문을 얻었을지에 대한 궁금함이었다.
“연왕부에서 말하길, 그 하얀 사탕은 애초에 몹시 비싼 데다가 아국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부분이 아국으로 오기 때문에, 고려에서 남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려에서는 찾기 어려울 정도라 하였습니다.”
“허, 그래? 우습군.”
예전보다 존재감이 커진 고려였지만, 역시나 명국에 비하면 소국이다 싶은 홍무제였다.
어찌 제 나라에서 난 것도 손에 쥐지 못한단 말인가.
경시하는 마음이 살짝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홍무제 주원장은 원래 걱정하던 걸 잊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비싼 물산이 지금 나라 안에 가득하니, 그 대신 고려에 쥐어 준 것이 있지 않겠는가.”
“연왕부에서 밝힌 바로는, 고려 상인들이 연국 상인들로부터 얻어가는 것은 때마다 달라 각양각색이라 하였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미곡과 비단이고, 그 외에 황금과 광물 등이라 하였습니다.”
“은은 아니고?”
“은은 목록에 없었습니다.”
은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하니, 홍무제는 다소 안심이었다. 북방은 아니더라도, 남방에서 은은 모든 가치의 으뜸이라 은이 줄어드는 건 그만큼 나라가 쇠락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은만이 홍무제가 우려하는 모든 건 아니었다.
“그렇게 고려와의 교역으로 생기는 이문 때문에 많은 자들이 농지를 버리고 장사치가 된 건 아닌가?”
“그에 대해서는 연왕부에서 밝힌 바가 없었습니다.”
호부상서가 궁색한 안색으로 고하였다. 혹여나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은 것을 두고 호령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하나, 황상은 호부상서를 탓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그의 좌측 아래 앉아 있는 태자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었느냐?”
“그렇습니다.”
태자가 담담히 답하니, 홍무제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다시 물었다.
“하면, 어찌 짐에게 고하지 않았는고?”
“안 그래도 번잡하신 천자의 안중을 어지럽힐 만한 일이 아니라 여겼습니다.”
“그래?”
홍무제는 그 대답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연왕이 연국으로 예정보다 빠르게 가게 된 건 태자와의 알력 때문이었다.
그만큼 연왕부를 경계함이 마땅한 태자가 정작 연국에 물산이 흥하고 있는 것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렇게 의심이 짙어지자, 그걸 느낀 듯 태자가 먼저 고하였다.
“지금 연국에서 물산이 흥하긴 하나, 그 대부분이 아국 전체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고려에서 넘어온 것입니다. 오히려 연국 자체의 미곡 생산은 줄어들고 있으니, 장사로서 흥한 것은 모래성을 쌓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연국을 죄고자 한다면, 고려에 명하고 나라 안에 명하여 연국으로 물산이 흘러들어 가지 못하게 하면 그만입니다. 그때는 연국 또한 제 풀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지요.”
“음…….”
“게다가 연왕을 경계함은 대국을 위하는 것보다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북벌로 인해 수많은 군병들이 연국에 의지하니, 연국의 부담 또한 만만치 않을 겁니다. 대군이 지나가기만 하는 고을의 조세마저 감면해 주는 것을 생각하면, 대군이 오랫동안 머물고, 북벌의 본거지가 된 연국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 연왕부는 언제든 다스릴 수 있다는 게냐.”
“사탕으로 군병을 먹일 수는 없고, 사탕으로 얻는 이익 또한 보기보다 크진 않습니다.”
태자의 말에 황상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흥한다고 하지만, 고려의 물산을 교역함으로써 얻는 것만으로 군병을 크게 키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응천부에서 명하는 것만으로도 연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너에게 황자들의 왕부 관리를 맡겼으니, 너는 잠시의 허점도 보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차후 너의 치세를 위해서라도 중시해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자는 고개를 숙이며 황상의 말을 받았다.
하나, 그 숙인 태자의 이마로 머릿속에 솟았던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지금 답한 것은 황상이 상업을 멀리하고, 그에 눈이 어두운 것에 기대어 핑계를 댄 것이었으니, 자칫 그 미비함이 들통날 수도 있었다.
특히, 황상 또한 고려가 예전의 고려와 달리 사실상 셋으로 나뉜 상태임을 알고 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미 호부시랑이 탐라국의 북방 전초지에서 수만의 기마를 모은 것을 두고 경계해야 함을 고한 바 있어, 만약 그 사탕이 고려 중에서도 탐라국에서 난 것임을 알게 되면, 황상 또한 더 파헤치려 할 수도 있었다.
한데, 황상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홀로 너무 높은 곳에 임한 탓에 아래를 자세히 볼 수 없는 탓인 듯했다.
그건 당대 명국을 다스리는 황상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나, 후대에 노리는 바가 있는 태자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태자는 슬쩍 이마의 탐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고, 다시 국정을 논하는 황상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병부상서에게로 향하였다.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쳤으니, 병부상서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걱정 마시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병부상서는 위국공 서달과 통한 자로서, 위국공과 태자가 손을 잡은 만큼 그 또한 태자의 사람이 되었다.
태자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오직 하나만을 명하였으니, 그건 탐라국이 치르는 전황과 탐라군의 군력에 대해 황상께 가능한 한 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탐라국의 북방 전초지에 갔던 병부시랑의 장계를 막지 못한 실수가 있긴 했지만, 병부상서는 태자의 명을 대체적으로 잘 수행하였다.
덕분에 황상은 그만큼 고려의 사정에 어두워졌고, 안 그래도 번잡한 황상의 머릿속에서 탐라국의 존재감이 미약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탐라공이 그만 날뛰었으면 좋겠군. 하긴, 왜국에서 많은 땅을 얻었다 하니, 그걸로도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태자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황상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점점 더 안정되어가는 명나라, 그리고 그만큼 비대해져 가는 명나라.
권력을 독점하는 천자, 그리고 그만큼 작은 것에 시선을 두지 못하는 천자.
그 틈 속에서 탐라국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있을 수도 있던 화를 피하고 있었다.
* * *
바다를 통해 몇 건의 장계와 서찰이 한 번에 닿았으니, 몽주가 유리 거래의 개시를 위해 명국으로 향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하나는 고려 궁중후가 보낸 서찰이었다. 평범한 친교의 서찰인 듯하다가 뒤에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더해져 있었다.
“이운목이 잡혔다는군.”
서찰을 보던 몽주의 말을 들은 대신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운목이 누구냐는 뜻이었다.
“예전에 응양군 상장군이었던 이운목 말일세. 개경에 불을 지른 놈 말이야.”
“아…….”
그제야 잊고 있던 이름을 깨닫곤 대신들은 관심을 보였다. 응양군 상장군이 방화를 지시한 것은 이미 차후 조사로 밝혀진 것이었다.
“스스로 개경으로 돌아와 잡혔다는데, 그의 손에 기현의 목이 쥐어져 있었다는군.”
“……!”
궁중후 염흥방의 서찰 속에 적힌 바, 자진하여 잡힌 이운목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광인이 된 그는 신돈을 죽여야 나라가 산다며, 자신이 신돈의 신복 기현의 머리를 잘랐으니, 신돈만 죽이면 된다며 왕성 앞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잡혔다.
염 궁중후의 짐작으로는, 그가 방화한 죄책감에 못이겨 광인이 되었고, 개경 방화를 신돈과 기현이 저지른 것이라 스스로 세뇌한 듯하다고 전하였다.
횡설수설하는 이운목의 말을 통해 보자면, 그는 강원도 산속에 숨어 지내다가, 우연히 만난 신돈의 당여를 통해 기현 또한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음을 알고 찾아가 그를 죽인 모양이었다.
미쳤든 안 미쳤든 이운목의 운명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염 궁중후는 이운목을 개경의 대로에서 오체분시(五體分屍)로 공개 처형할 것이고, 그의 찢어진 시체를 개경 사방 성문에 걸어 둘 것이라 전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탐라군 때문에 화재가 났다 여기는 백성들에게 그 진상을 낱낱이 밝힐 것이라 하였다.
염흥방의 글에는 은근히 자신이 탐라국을 얼마나 위하는지 내세우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든 한때 권세를 누리며 떵떵거리던 자들의 비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었다.
몽주는 실소하며 그 서찰을 접었고, 다른 장계를 손에 들었다.
그것은 녹둔도의 허호필 소령으로부터 온 것으로, 명국으로부터 북진할 일시를 전해 받았음을 고하며, 일종의 출사표(出師表)을 보낸 것이었다.
녹둔도를 기점으로 북쪽 훈춘에 이르는 큰 땅에 주션족 약 20만이 모였고, 그중 기마 5만을 골라 편성하였다 하니, 허 소령의 공업은 실로 대단했다.
“북방에 대해서는 걱정을 놓아도 될 것 같군.”
만족스레 몽주가 말하니, 수십 문의 개복포의 지원을 받는 5만 기마의 위력을 생각하면, 전술적인 실수를 크게 저지르지 않는 이상 그 두 배의 적도 너끈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허 소령이 어느 정도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나하추가 미친 척하고, 명군의 북진을 무시한 채 녹둔도의 군병을 대적하는 것에 ‘올인’하지 않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몽주는 다음 장계를 펼쳤으니, 그건 왜국에 있는 군관대신 탁기로부터 온 것이었다.
마침내 오우치씨와 호소카와씨가 풍전국과 이요국을 두고 한 협상을 마무리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결과는 예상대로 삼자 간의 땅놓고 땅먹기였다. 오우치씨가 풍전국을 탐라에 양도하고, 탐라는 이요국을 호소카와씨에게 내주며, 그 대신 오우치씨는 주고쿠의 호소카와씨 영토인 빗추국의 남서쪽 절반을 할양받기로 했다.
“아아, 이와미국으로 보낼 채굴단의 편성도 서둘러야겠군.”
몽주는 더욱 기분 좋은 목소리로 명하였다.
협상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이와미의 은광을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전쟁 중에 오우치씨의 태세 변화를 허락하면서 조건으로 내세운 건 비단 축전국의 양도만이 아니었다.
이와미국에 있는 은광의 채굴권 또한 그 조건 중 하나였으니, 당대에는 제대로 된 은 분리법이 없어, 그 소출이 매우 적은 탓에 오우치씨는 그리 큰 대가가 아니라 여겨 쉽게 응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오우치씨에게 얼마나 큰 손해로 이어질지는 오직 몽주만이 짐작하고 있었다.
적어도 역사에서 조선이 고안했던 연은분리법은 몽주를 통해 탐라국이 쉽게 구현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결과 막대한 은은 탐라국이 가지고, 오우치씨가 얻는 것은 은 채굴에 동원되는 왜국 백성들의 품값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길 납 중독자들을 생각하면 오우치씨는 이익은커녕 손해만 더욱 축적할 것이다.
납 중독으로 고통받을 왜국 백성들에게는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박쥐처럼 이익을 좇는 오우치씨를 생각하면 고소한 일이었기에, 몽주는 기분이 한층 더 좋았다.
“세상살이가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군. 하하하!”
몽주가 웃으니, 대신들도 함께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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