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45)
* * *
“캬아! 직고 술맛이 괜찮군.”
직고(直沽) 포구 근방 어느 다점에서 한 사내가 술을 비운 주발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훔쳤다.
술맛 자체가 좋아, 물길과 도보로 남쪽에서 2천 리를 올라온 여독이 일거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데, 예까지는 어쩐 일인가.”
“그야 몇 안 되는 내 친우를 보러 왔지. 하하하.”
나본의 웃음에 맞은편에 앉은 진리(陳理)는 피식 웃었다.
“자네 친우가 어디 한둘인가? 강남에만 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을.”
“그들이 모두 친우라곤 하지만, 진정한 친우는 정말 드물지. 자네도 그중 하나이고.”
“허허, 참으로 영광이군.”
진리는 다시 실소하며 그와 나본의 술잔에 술을 따라 채웠다.
“어쨌든 간만에 만나니 반갑네.”
진리가 주발을 들어 건배를 표하니, 나본도 마주 잔을 들어 건배를 받고는 나란히 술을 들이켰다.
“그나저나 자네야말로 어째서 예서 이러고 있는 겐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가.”
“어쨌긴! 순임금의 자손이자, 전대 승상의 손자인 자가 겨우 북방 작은 고을에서 포구 관리나 하고 있으니 묻는 게지?”
“아이고…….”
나본의 큰 목소리에 진리는 주변을 살피며 창피한 기색을 띠었다.
그가 진(陳)씨인 만큼 순임금의 자손이라는 소리도 틀린 건 아니지만, 이씨, 왕씨와 더불어 중원에 가장 많은 성씨 중 하나로서, 그 자손에 해당하는 자들은 족히 수백만 명이었다.
진씨에서 비롯된 다른 성씨까지 더하면 성씨를 가진 중원 사람들 열에 하나는 순임금의 자손일 것이다.
또 전대 승상 진보재(陳普才)가 진리의 조부라곤 하지만, 실상은 죽은 뒤 추증된 것으로 그저 반원(反元)한 공을 지금의 황상이 높이 평가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진리는 진보재의 서출에서 비롯된 손자인 데다가 황상의 대적이었던 진우량과 인척 관계였으니, 진보재의 손자라는 명예보다는 진우량의 인척이라는 굴레가 더 큰 처지였다.
“어허, 이 사람, 어찌 그리 부끄러운 기색을 띠는가. 내가 어디 거짓을 말하기라도 했는가?”
“알았네, 알았어. 그러니 제발 그 입 좀 다물게.”
“크하하.”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나본의 놀림에 진리는 그저 얼른 지나가라 재촉할 뿐이었다.
다행히 나본의 ‘헛소리’는 그쯤에서 그쳤고, 두 사람은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면, 연의(演義)는 다 쓴 겐가?”
“거의 다 마무리하긴 했네. 다만, 좀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말일세.”
“그런가? 허허,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닌가? 삼국의 군웅 이야기라면 작은 야사까지도 줄줄이 읊을 줄 아는 자네라서 만족 못하는 거겠지.”
“그렇기도 하네만, 사실 삼국 이야기는 실제 삼국의 시대 중 절반만 다루는 거나 진배없지 않은가.”
“아, 그야 그렇지.”
민간에 떠도는 위촉오 삼국시대에 대한 설화는 촉의 제갈 승상이 죽으면서 사실상 끝나지만, 실제 삼국의 시대와 대조해 보면 그때는 겨우 중간 지점에 불과했다.
물론, 위촉오의 창업자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설화들이기에 시간적으로 그들이 죽으면서 설화가 급격히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이야기꾼으로 삼국 이야기를 팔아먹고 사는 거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삼국연의(三國演義)라 이름하여 책으로 내고자 한다면 진정 삼국의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꾸려야 하지 않겠나. 한데, 그게 어려우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닐세.”
“혹시 그 뒷이야기는 자네가 오롯하게 창작해 보고 싶다는 뜻인가?”
“그렇다기보다는 엉성한 줄기를 울창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네.”
“그게 그거구먼. 뭐, 너무 과욕부리지 말게. 삼국 군웅의 이야기에 어설프게 내용을 추가하다가 망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이번에는 진리가 나본을 훈계하듯 말하다가, 문득 점원을 불러, 다 떨어진 술과 요리를 다시 주문하였다.
그걸 보던 나본은 진리가 꽤 비싼 술과 요리를 서슴없이 시키고 있음을 깨닫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요즘 팔자가 좀 핀 모양일세? 옷도 비단으로 잘 차려입었고?”
“뭐, 근래에 괜찮은 수입이 있었지.”
“그래? 어디서?”
“음…… 아마도 내가 본 이들 중 가장 큰 부자로부터라고 할까나.”
“……?”
나본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부자를 보는 거야 그럴 수 있겠지만, 부자로부터 뭔가를 얻는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솔직히 권세와는 거리가 먼 포구 관리, 그것도 직고 포구처럼 상업보다는 군사 용도로 쓰이는 곳의 관리가 부자로부터 뭔가 얻을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의아해 하던 나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목소리를 죽여 친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근자에 연국에 물산이 풍족한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어허…… 어찌 사인이 나랏일을 묻는 겐가? 크어험!”
진리가 길지도 않은 수염을 매만지며 거드름을 피우자, 나본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허이고, 참 장하시오. 그렇게 높은 분이신 줄도 모르고 감히 소인이 겸상을 하였구먼요.”
나본은 술잔을 들고는 앉아 있던 의자 아래로 털썩 주저앉으며 너스레를 떠니, 진리가 주변의 시선을 훑어보며 얼른 나본을 끌어올렸다.
“거참, 나도 농 좀 한 걸 가지고, 왜 이러나.”
“하면, 얼른 말해 보게. 대체 그 부자가 누구고, 어찌 돈푼을 얻었다는 겐가?”
“알아서 뭐하게?”
“뭐하긴, 책을 내려면 큰돈이 필요하지 않겠나.”
“책 내는 데 뭐 그리 큰돈이 필요하다고.”
“필사로 몇 권 내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지. 하지만, 중원 곳곳의 책방에 쭉 깔아 두려면 제법 큰돈이 필요하지.”
“허허, 욕심도 많군. 책 하나 내고서 팔자를 고치려는 겐가?”
“암! 내 평생에 걸친 역작이니, 응당 대가가 있어야지.”
나본이 자부심 넘치게 답하니, 진리는 과연 그답다 싶었다. 하기야, 책 몇 권 책방에 팔아서 그 책이 잘 나간다고 해도, 이내 다른 필사본이 퍼져 나가 정작 책을 지은 이에게는 푼돈도 안 들어오는 게 현실이었다.
애초에 이야기책을 내어 돈을 벌고자 하는 이가 드물긴 했지만, 자기 이야기에 자부심이 있는 나본이라면 그리 여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데, 내가 말한 그 부자는 자네가 만나기 어려울 듯하네.”
“엥? 그게 뭔 소린가? 혹시 소개해 주기 싫어서 변명하는 거 아닌가?”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내 체면이 상하더라도 소개해 주겠네만, 그 부자가 명국 사람이 아니라서 말일세.”
“하면?”
“고려 사람일세. 그것도 고려에서 국공씩이나 하는 귀한 사람이지. 지난날에 어쩌다 만나서 도움을 주게 된 덕에 몇 푼 받을 수 있었지만, 나 또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네.”
“아…… 에이!”
나본은 아쉬움을 표하다가 히죽 웃고는 주발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이내 아까운 마음을 털어 낸 듯 보였지만, 사실 속내로는 진정 아쉽다 여기고 있었다.
“어쨌든 연국에 있는 동안은, 내 집에서 편히 묵게. 심심하면 가끔 우리 애들에게 이야기 좀 해 주고.”
“흐흐, 알았네. 알았어.”
두 사람은 다시 술을 나눠 마시곤, 이내 고려의 부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 모두 그 고려의 부자와 자신들의 인생이 얽히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 * *
그건 의도가 있었던 작전은 아니었다. 그저 기마로 단련된 전사들의 경험과 천부적인 전투 본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사방 1, 2백 길미가 터져 있는 드넓은 일란 할라의 평원 위에서 쫓고 쫓기며 치고 빠지는 거대 기마군들이 만 하루를 쉬지도 않고 싸웠으니, 그들의 싸움은 태곳적부터 그 땅에서 다투고, 싸웠던 조상들의 싸움이 재현된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 주션족 전사들이 무리에 속한 벌레처럼 10여 기가 하나로 움직이며 우디거 부족의 기마 전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얼마간 우디거 부족은 여전히 화포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피하고 도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나, 주션족 기마들이 화포의 조력을 포기하고 기마만의 싸움을 걸어온 것을 확신한 이후에는 우디거 전사들도 그들이 익숙한 싸움의 방법을 택하여 대항하였다.
그 대응이란 주션족의 방법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작게 덩어리진 전사들이 곳곳에서 격투로 맞붙었다.
싸움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진 전장에서의 각자 쟁투였기에, 탐라군은 한동안 그냥 구경꾼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탐라군을 보호하는 기마들이 싸우러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으니, 오히려 방해꾼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그것이 참 못마땅했지만, 허 소령은 공을 탐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주션족의 전사들이 승기를 잡길 고대하였다.
그 싸움의 승패가 가늠된 건 날이 밝기 시작할 새벽이었으니, 먼 곳까지 나아가 싸우던 주션족과 우디거 부족의 전사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돌아왔을 때였다.
그 살아남은 자들 모두가 주션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아직 격전 중이던 다른 주션족 전사들을 도우니, 나름 팽팽했던 싸움이 일시에 주션족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이미 예견된 승리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데 주션족 전사들의 수가 1만이 더 많았으니, 시간이 문제이지 승패는 정해진 게 아니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나,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의 규모를 이용한 기마 전투는 단지 수를 비교하여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쪽 끝에서 싸우는 자들과 반대쪽 가장 먼 곳에서 싸우는 자들 간의 거리는 말을 달려서도 한 시진을 족히 가야 할 정도로 아예 동떨어져 있었으니, 막상 전장에서 싸운 전사들에게는 수적 우세나 열세가 체감되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호인 전사들의 싸움 방식은 무조건 맞붙기보다는 기마의 기동력과 뛰어난 기마 궁술을 통해 원거리에서부터 견제하듯 싸우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아주 일방적으로 많은 수도 아니고, 3만 대 4만의 싸움은 전사들의 무장과 사기, 특히 특출하게 뛰어난 기량을 가진 전사들의 존재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었다.
어쩌면 주션족의 승리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은 수적 우세보다는 탐라국의 풍족한 지원 덕에 싸움을 철저히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허 소령이 대기하고 있던 탐라궁에게 이동을 명한 것은, 주션족과 우디거 부족 간의 마지막 접전이 끝난 직후였다.
그쯤에는 엄연히 수적 우세가 분명해져 우디거의 전사들과 일족이 한곳에 몰려 있었다.
그들 또한 탐라군의 화포를 잊지 않았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접전을 유지해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죽고 상한 전사들이 많아 사기마저 잃은 상태라 반쯤 자포자기 상태로,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방열하라.”
허 소령의 명이 있자, 기다리고 있던 군병들이 일제히 개복포를 대지 위에 방열하였다.
그러자 우디거 부족 쪽에서 꿈틀하듯 반응이 있었고, 그 와중에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그대로 개복포가 포성을 내면 그들이 꼼짝없이 죽게 될 것임을 어린아이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다만, 개복포의 방열이 마친 후에도 허 소령의 입에서는 좀처럼 방포하라는 명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맹특목이 다가오며 허 소령의 표정을 살폈다.
“또 자비를 베푸실 생각이시오?”
“얼마나 상하였습니까?”
“……?”
“아군 전사들 중 몇이나 죽고 상하였냐고 물었습니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대략 7천 정도가 이탈할 것 같소.”
상당히 많은 피해였다. 물론, 우디거 부족은 그 이상의 피해를 입었음이 틀림없었다.
침엽수림이 빼곡한 산기슭을 뒤로하고 뭉쳐 있는 우디거 부족 중 전사로 보이는 자들은 아무리 훑어봐도 1만이 채 넘을 것 같지 않았다.
허 소령과 맹특목 사이에 짧은 문담이 흐른 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방해 받을 것이 없는 광활한 평원 위로 불어오는 바람만이 적막함을 깨뜨렸다.
“우디거의 족장을 만나야겠습니다.”
마침내 허 소령이 말문을 여니, 맹특목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답하였다.
“허 장군, 내가 보기에 이번 일은 단순하게 처리해야 하오. 우리의 싸움은 이것이 전부가 아님은 허 장군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는 거지요. 아, 말문을 연 김에 하나 더 묻겠습니다. 만약 우디거 부족이 일란 할라를 비롯한 주션족의 영역에서 사라지고 다시는 넘보지 않게 된다면 저들의 생존을 묵과할 수 있습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이오?”
“그건 차차 아시고, 일단 제 물음에 답하여 주십시오.”
“나 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아무리 맹특목이 아합출과 더불어 은연중에 주션족 전체를 이끄는 대족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곤 해도, 그렇다고 다른 족장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면, 물어봐 주십시오. 저는 우디거 부족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습니다.”
맹특목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뭔가 불만스러운 속내를 비췄지만, 아합출이 다가오고 다른 부족장 몇몇도 모이니, 자연스레 허 소령이 요구한 논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허 소령은 주션족 전사들 중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대전사를 하나 불러, 우디거 부족장에게 대화하자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 대전사는 맹특목과 아합출을 힐끔거리면서 허 소령의 말을 따를지를 시선으로 물었고, 막는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자, 곧바로 우디거 부족들에게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우디거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못해 거의 즉각적이었다.
대전사가 우디거들에게 다가가기 무섭게, 몇 기의 말이 달려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주션족 전사들의 포위망에서 수십 미 정도 떨어진 곳에 우디거의 기마들이 멈춰 섰고, 대전사만이 허 소령에게 다가왔다.
“데려왔습니다.”
“수고했소.”
5, 60미 정도 떨어진 곳에 경계 어린 표정으로 말을 탄 채 서 있는 우디거들을 보며, 허 소령은 곧바로 말에 올랐다.
본디 역병을 포함하여 해병대 군병 서너 명만을 동반한 채 가려 했지만, 맹특목이 턱짓하자 주션족 전사들 십여 명이 추가로 붙었다.
그에 우디거들이 조금 더 경계 어린 기색을 띠며 언제든 말을 돌려 도주할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었고, 이제 언제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기 때문에 많은 군병과 함께 허 소령이 접근함에도 꿋꿋이 버텼다.
“그대가 족장인가?”
말머리를 마주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허 소령이 물으니, 역병이 그 말을 통역하였다.
“그렇소.”
“상당히 젊군.”
“내 아버지께서는 어제 돌아가셨소.”
“…….”
중앙에 서 있는 자가 족장으로 보이긴 하는데, 너무 젊어 물으니, 역시나 본디 족장이었던 자가 죽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명복을 빌 사이도, 상황도 아니기에 허 소령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대로 죽겠소, 아니면 살 기회를 가져 보겠소?”
“……?”
허 소령의 의미심장한 제안에 젊은 족장의 얼굴엔 더욱 경계심이 짙어졌지만, 그래도 무슨 의미인지 되묻기는 하였다.
그에 허호필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니, 사실 간단한 제안이긴 했다.
우디거 부족이 항복하고, 우디거 전사들은 포로병이 되어, 주션족이 나하추군과 싸울 때 함께 싸우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 간단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꽤 시간이 필요했다.
앞서 짧은 문답을 나눌 때도, 역병이 조금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말이 길어지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디거 부족도 본디 주션족에 속한 부족이긴 하지만, 사실 다른 주션족 부족보다는 더 서쪽의 대초원에 살던 부족이었고, 거란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과의 혼혈이 심한 터라, 말이 적잖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손발을 동원하여 겨우 설명을 마친 허 소령이 최후통첩하였다.
“거부한다면 나는 그대들을 몰살할 수밖에 없소. 대적을 앞두고 많은 포로들을 잡아 둘 수는 없으니 말이오.”
“……우리를 화살 받이로 쓰고자 함이오?”
잠시 사나운 시선으로 허 소령을 노려보던 젊은 족장이 말하니, 말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포탄 받이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
허 소령의 냉소적인 대꾸에, 젊은 족장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에라도 분노를 폭발시킬 것처럼 얼굴도 붉어졌다.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이라 주변의 해병대 군병과 주션족 전사들이 한껏 긴장하였으나, 그럼에도 허 소령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를 도와 나하추와 대적한다면, 우디거 전사들이 모두 죽더라도, 남은 일족은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겠소. 내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니, 지난날 닝구타에서 살아 돌아간 자들의 말을 들었다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허 소령이 지난번 닝구타 공격 때, 우디거의 여인들만 앗아 가고 남은 자들은 살려 보낸 것을 언급하자, 젊은 족장의 표정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우디거의 여인들을 빼앗아 간 것 자체는 분노할 만한 것이었으나, 분명 죽였어도 무방한, 아니 그들이었다면 분명 다 죽였을 자들을 살려 보낸 것은 확실히 의외였다.
그리고 그것이 허 소령의 제안에 조금 더 신빙성을 더해 주는 증거가 되었다.
“일각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저 뒤에서 의견을 나누고 있는 족장들이 반대한다면, 나는 지금 제안한 것을 뒤집고 그대들을 주살할 것이오. 그러니 얼른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대들이 서둘러 항복해야, 저쪽에서 강경한 결론으로 의견이 모이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다시 한참이나 역병이 설명하니, 어느 순간 상황을 인지한 우디거들이 일제히 주션족 족장들이 모인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표정에 복잡한 심사가 역력히 떠올랐다.
“서두르시오.”
허 소령이 마지막으로 재촉하곤 말머리를 돌리니, 우디거의 젊은 족장도 일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주션족 족장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다가오는 허 소령 쪽을 바라보았다. 분위기상 의외로 빨리 결론이 나온 모양이었다.
“허 장군, 우리 뜻대로 우디거가 거주할 곳을 정할 수 있다면, 장군의 뜻을 따르겠소.”
아합출이 앞서서 간단하게 결론을 말하니, 자연 허 소령이 물어야 할 건 하나였다.
“우디거를 어디로 내쫓을 요량이십니까?”
본디 우디거 부족의 터전은, 지금 나하추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장춘 부근이었고, 사실 허 소령이 족장들에게 그가 우디거에 제안할 내용을 언급하면서도 그곳으로 보내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장차 그곳이 탐라와 주션족의 북방 영토 중 동쪽 경계가 될 곳인 만큼, 우디거 부족으로 하여금 그 경계를 담당하게 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나, 주션족 족장들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숭가리 강의 동쪽 바깥이 좋을 것 같소.”
“…….”
숭가리 강은 곧 송화강이었으니, 일란 할라를 동서로 가르는 강으로, 그 끝은 아무르 강과 닿아 있었다.
그리고 숭가리 강이 아무르 강에 합류하는 곳까지가 일란 할라의 영역이니, 주션족 족장들은 우디거 부족을 일란 할라의 동쪽 외곽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일란 할라의 동쪽이라…….’
“참 잔인하면서도 현명한 생각이군요.”
“저들을 몰살시키지 않는 이상 우리가 택한 모든 것은 다 자비로운 것이지 않겠소.”
일란 할라의 동쪽은 거친 산과 울창한 숲, 그리고 늪지가 어우러진 곳으로 유목 부족들이 거주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곳은 진정한 의미의 야인들이 살고 있는 터전이었다.
명국이나 고려에서는 북방의 모든 호인들을 야인이라 칭하긴 하나, 호인들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했다.
범 주션족들은 그래도 문명과 간간이 교류하고, 때로는 나라를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던 자들이지만, 그 동쪽 먼 곳의 호인들은 교류도 극히 드물었고, 생활 또한 야만인의 표본인 터라, 주션족들도 몹시 경계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곳으로 우디거 부족을 몰아넣는다는 건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허 소령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허 소령이 응하자, 주션족 족장들도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서로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있었다.
주션족 족장들은 우디거 부족으로 하여금 야인들을 막게 함은 물론, 동시에 원수 같은 우디거 부족들을 고통 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여기고 있는 것에 반해, 허 소령은 탐라공이시라면 우디거 부족마저 포용하여 그들을 지원하고, 유용하게 쓰실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동상이몽 또한 나하추를 이겨 낸 이후에나 어찌 될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 앞서 제시한 일각이 다 흘러갔을 무렵, 우디거 부족에서 몇 기의 기마들이 달려 나왔다.
그 기마의 기수들은 모두 하얀 깃발을 창두에 달고 있었다.
* * *
녹둔도 연합군이 일란 할라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우디거 부족을 포로로 삼을 무렵, 일란 할라의 동남쪽 먼 곳, 그리고 정남쪽 먼 곳에서는 허 소령의 예상을 뛰어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예기치 못한 두 변화 중 하나는 허 소령이 이끄는 녹둔도 연합군을 돕기 위한 것이기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허 소령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임은 물론, 남쪽 녹둔도에서 연합군을 돕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탐라군의 원군마저도 당황스럽게 할 만한 것이었다.
“정녕 우디거 부족을 포기하시려는 것입니까?”
“애초에 거둔 적이 없으니, 포기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
일란 할라로부터 동남쪽 먼 곳, ‘대원 태위 나하추(大元 太尉 纳哈出)’의 깃발 아래서 오고 간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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