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47)
* * *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오?”
산 중턱에서 숭가리 강이 흐르는 걸 내려다보다, 문득 허 소령이 묻자, 맹특목이 되물었다.
“우리가 저들의 척후를 본 지 이미 두 시진이 지났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겨우 두 시진뿐이지 않소. 10만이 넘을 대군이 움직임에 그 정도는 몹시 짧은 시간일 뿐이오.”
“아닙니다. 저들은 분명 우리가 제대로 방어 진형을 구축하지 못했음을 보았을 겁니다. 하면, 선발대라도 뽑아 공격함으로써 타격을 주거나, 적어도 우리가 방어진형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게 방해라도 해야 마땅합니다.”
“그렇긴 해도, 저들도 머리가 있으니, 우리가 길목을 막기보다 계곡에 숨어 호기를 노리려 할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지 않겠소? 실제로 그러고 있기도 하고.”
“그야 적의 척후를 보았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고육지책 아닙니까. 어설프게 방어진을 구축하는 중에 수많은 기마의 돌격을 받게 되면 큰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요.”
“허 장군은 저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게 싫으신 모양이오?”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고, 불길하다는 겁니다.”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조용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산 중턱에 80문이 넘는 개복포의 방열을 마무리하기 위해 탐라군 군병들이 열심히 작업하는 소리가 있었고, 산 아래 좌측 계곡에는 5만의 주션족 기마들이 당장에라도 말에 오를 수 있을 태세를 갖춘 채 물과 육포로 체력을 비축하는 중이었으니 소리가 없을 순 없었다.
숭가리 강이 흘러들어오는 길고 긴 협곡 중 가장 좁은 곳은 나름 여유로운 중에 은근한 긴장감이 있었다.
사실 협곡(夾谷)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곳이었다.
지형도를 그리면 협곡처럼 보이긴 하지만, 원체 땅덩어리가 큰 곳인 터라, 그 길이가 무려 150길미에 이른 탓에 협곡처럼 보이는 것이지, 고려에서 그와 같은 곳이 있다면, 그냥 분지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협곡 아닌 협곡의 폭이 넓은 곳은 20길미가 넘기도 했으니, 협곡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다만, 그래도 간간이 상당히 폭이 좁아지는 곳이 몇 군데 있었으니, 지금 녹둔도 연합군이 숨어 있는 곳도 그중 한 곳이었다.
이쪽 산기슭에서 반대편 산기슭까지의 거리는 대략 4길미.
하나 숭가리 강과 강변 사장 및 늪지를 제외하면 실제로 적의 기마가 이용할 수 있는 폭은 2길미 안팎에 불과했다.
그 정도라면, 못해도 10만이 넘을 나하추군과 약 5만의 녹둔도 연합군이 겨루는 장소로서는 분명 매우 좁은 곳이었다.
게다가 탐라군이 개복포를 방열한 산중턱까지 상당히 산비탈이 가파른 덕에 그 높은 곳에서 방포하면 남쪽 방면 전역으로 최대 2.5길미까지 사정거리가 닿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적군이 진입하는 동안 꽤 큰 피해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또, 그 산자락에서 남쪽을 바라본 상태에서 좌측, 즉 동편의 골짜기는 다른 곳의 골짜기보다 상당히 큰 편이라 5만의 기마들을 몰아넣어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으니, 개복포에 얻어맞아 정신이 없을 적을 측면에서 기습하기에도 적당했다.
그렇게 다 좋은데…… 허 소령은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으니,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다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허 소령과 탐라군에게 부여된 임무의 최종은 일란 할라가 아니라, 기회를 엿보아 나하추 세력권인 서쪽 초원지대로 진출하는 것이니, 그건 나하추의 군세를 이겨 낸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하추군이 먼저 쳐들어와야 했다. 수적으로 불리하고, 군력의 상당 부분을 개폭포의 위력에 의지하고 있는 탐라군이 먼저 공격해 나가는 건 하책인 것을 넘어 미련한 짓이다.
한데, 당연히 일란 할라를 수복하기 위해 공격해 올 줄 알았던 나하추군이 공격해 올 낌새도 없으니, 이상하다 못해 불길한 마음이 들 수밖에…….
“……!”
짝!
문득 허 소령은 양손을 거칠게 맞잡았으니, 뭔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오?”
“지금 일란 할라 앞에 와 있는 나하추군이 주력인 게 확실합니까?”
“주력이 확실하냐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가 5만의 기마에 화포로 무장되어 있음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어찌 주력이 오지 않을 수 있겠소?”
“아뇨, 그건 저들이 일란 할라를 수복할 마음이 있을 때나 그렇겠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저 우리가 일란 할라를 나서 나하추의 중심부를 향해 나가지 못하게만 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주력을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
맹특목은 그제야 허 소령이 하는 말의 뜻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하면, 우리를 이곳에 잡아 두고 나하추는 다른 곳을 노린다는 게요? 아니…… 하지만 이미 우리 척후가 나하추의 군세가 보이는 것만 수만은 족히 될 것이라 하지 않았소?”
“허장성세야 뭐가 그리 어렵겠습니까. 우리 척후 또한 멀리서 눈대중을 하고 왔을 뿐이지 않습니까.”
앞서 나하추의 척후가 녹둔도 연합군을 살피고 가기 전에 연합군의 척후 또한 일란 할라의 입구 쪽으로 달려가 나하추 군이 이미 군영을 차렸음을 보고한 바 있었다.
다만, 목격 직후에 나하추 군 쪽에서 군사를 보내려 하기에 급히 돌아왔으니, 만약 허장성세였다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다시 척후를 보내야겠습니다. 이번에는 산을 통해 접근해 보지요.”
허 소령의 말이 전해지니, 맹특목도 고개를 끄덕이며 특별히 날랜 자들을 선별해서 보내겠노라 하였다.
“한데, 만약 나하추군의 주력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면 어디로 갔을 것 같소?”
“아직 요성 방면에 묶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걱정인 건 나하추가 요성 방면의 북벌군을 이겨 냈음에도 이쪽으로 소수의 군세만 보내고, 다른 곳으로 주력을 보냈을 경우입니다. 그 경우에는 나하추가 주력을 보낼 곳은 단 한 곳뿐이지 않겠습니까?”
“……훈춘 말이오?”
“그렇습니다. 장춘에서 훈춘으로 가는 길이 비단 일란 할라를 거쳐 크게 돌아가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허 소령이 그가 아는 바를 말하며, 맹특목을 바라보니, 그건 동요동의 지리에 대해서는 그가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야 그렇소만, 대군이 기마와 더불어 이동하기에는 꽤 힘든 길일 터인데…….”
“힘든 겁니까, 불가능한 겁니까?”
“…….”
맹특목이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한 순간, 일란 할라의 전황은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실제로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 보낸 척후가 일란 할라의 입구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나하추 군의 실상을 알려온 건 다시 한 시진 이상 흐른 뒤였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나하추의 군영은 산 아래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으니, 족히 10만의 군력을 의미하던 수많은 군막과 깃발들 사이로 보이는 기마와 군병들의 수가 너무나 적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허 소령과 주션족 족장들은 탐라군과 주션족 전사들에게 이동을 준비하라 명을 내렸고, 동시에 함께 고민에 빠졌다.
나하추군이 허장성세로 일란 할라의 녹둔도 연합군의 발목을 잡으려 했음을 안 이상, 일란 할라에 머물러 있는 건 옳지 않음이 분명해졌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최대의 이익을 노리는 것과 최소의 손실을 보장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었다.
사실 녹둔도 연합군이 가진 정보에 한해서는, 나하추 군이 아직 요성 방면의 명-요동 연합군과 다투고 있을지, 아니면 허 소령이 가능성을 지적한 것처럼 제3의 길로 훈춘을 노리고 있을지 누구도 정답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갈등이었다.
이대로 일란 할라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소수의 나하추군을 격파하고, 나하추 세력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것이 최대의 이익을 노리는 방책이라면, 회군하여 훈춘의 안전을 확인하고, 그 후에 다시 북진하는 것은 최소의 손실을 보장하는 방책이었다.
녹둔도 연합군의 군병들이 급하게 이동 준비를 완료하는 그 순간까지도 허 소령과 주션족 족장들 사이의 격론은 이어졌으니, 길지는 않았지만 꽤 깊고 격렬한 논의였다.
* * *
첨병을 선발하여 보낸 뒤 두 시진이 흘러 날이 밝자, 몽주의 원군은 닝구타로 향하는 산길의 입구로 출발하였다.
4만에 가까운 대단위 군력이 움직임에도 꽤 조용한 이동이었으니, 이는 군 내 분위기에 긴장감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다 난 모양이군.”
“그런 모양입니다. 아까 얼핏 들으니, 잠을 설쳤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첨병으로 나간 자들이야 곧장 떠났기에 말을 전할 수는 없었겠지만, 야간 경계하던 군병들이 들은 것도 있고, 그 전에 첨병을 모을 때부터 무슨 일인가 싶어 관심을 집중하던 자들도 있었으니까.
“지금이라도 헛된 말을 못하게 엄명을 내릴까요?”
“아니, 어차피 곧 상황을 말해 줄 터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탁기는 아직은 우려이자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상황을 두고 군병들이 수군거리며 불안감을 키우는 것처럼 보여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몽주의 입장에서는 군병들의 수군거림 같은 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주션족에서 새로 모인 전사들 중 왜 안 뽑혔는지 의아했던 자들은 사실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자들이었고, 탐라의 군병 또한 ‘베테랑’들은 주로 왜국에 나가 있던 터라, 이곳에 온 군병들 중 절반은 실전 경험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오히려 묵묵하게 반응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고 불안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군병들의 반응이 아니라, 나하추의 선택이었다.
약 15길미를 더 이동하여 다시 군진을 세우니, 그곳은 투먼강 중류에서 4길미 정도 떨어진 곳으로, 산길의 갈림길이 있는 곳이었다.
갈림길 우측은 닝구타로 향하는 산길이고, 좌측은 ‘옌볜’과 비라카로 향하는 산길이었다.
그곳에서 방어진을 구축하여 하루를 보내며 첨병들이 소식을 전해 오길 기다릴 예정이었다.
그 하루 안에 들어오는 소식에 따라 그곳은 격전지가 될 수도 있고, 하루를 축낸 것에 불과한 곳일 수도 있었다.
“일란 할라로 보낼 파발을 준비했습니다.”
탁기의 보고는 그 파발에 어떤 명을 전하게 할지를 묻는 것이었다.
몽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말했다.
“파발에게 이리 전하게. 만약 도중에 회군하는 아군을 만나게 되거든 닝구타에서 곧바로 비라카로 넘어가라 하고, 일란 할라에서 만나거나 아예 만나지 못한다면…… 그냥 택한 대로 하게 두라고.”
몽주의 말에 탁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음을 피력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미 일란 할라에서의 승부가 정해졌을 것이고, 아마 나하추의 군력과도 조우가 있었을 것이다.
나하추가 전력으로 일란 할라를 공격한다면, 당연히 일란 할라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을 것이고, 이는 곧 훈춘과 녹둔도가 위협받지 않을 것을 의미하니, 지금 원군이 서둘러 일란 할라로 향하면 그만이었다.
반대로, 만약 나하추가 일란 할라의 입구만 적은 군세로 막는 방책을 택했다면, 일란 할라의 허 소령 또한 이를 깨달은 후, 상황의 변화를 추측했을 것이니, 그 후 녹둔도 연합군의 선택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입구를 막고 있는 나하추군을 뚫고 장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군하여 후미를 노리는 나하추군을 저지하는 것.
이에, 몽주는 만약 녹둔도 연합군이 회군한다면 훈춘 방향으로 직접 오는 대신 닝구타에서 비라카로 바로 넘어가게 유도하였으니, 나하추군이 훈춘을 노리는 것이 맞다면, 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줄 속셈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장춘으로 향해도 되는 것이고.
탁기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 여기긴 했다. 다만 걱정인 것은 만약 녹둔도 연합군이 장춘으로 향했다면, 이곳에 있는 4만 미만의 군세로 나하추 군의 주력을 막아야 했고, 자칫 크게 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패하는 것 자체도 걱정이었지만, 탁기의 입장에서는 주군의 안위가 크게 위협받을 수도 있기에 더욱 우려스러웠다.
탁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을 받았음을 보이면서도 곧바로 돌아서 명을 전하지 않는 것을 본 몽주는 그의 심정을 짐작하곤 미소를 지었다.
“내 걱정이 있다면 접어 두게. 다칠지언정 나는 그리 쉽게 죽지 않을 터이니.”
“황송한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다친다는 말조차 입에 담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탁기를 보며 몽주는 다시 실소하곤 ‘옌볜’으로 향하는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첨병의 귀환이 최대한 늦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고, 아예 하루 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길 바랐다.
“서두르세. 아니길 바라지만, 혹여 진정 나하추군이 이쪽으로 온다면 가능한 한 최선의 방어진을 구축해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 주군.”
탁기가 몽주의 명을 다시 받을 즈음, 서쪽 20길미 정도 떨어진 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다만, 그 폭음이 몽주에게까지 들리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다.
* * *
“그게 뭡니까?”
“음, 마반대라 부르면 되지 않나 싶네.”
“마반대요?”
“그러니까 회전하는 받침대라는 뜻이지.”
마반대(磨盤臺)의 마 자는 문지르다, 갈다의 의미이면서 맷돌처럼 돌린다는 의미가 있었다.
“흠, 그러고 보니 위가 회전할 수 있게 만들어졌군요.”
석삼은 작은 목형을 보다가 위쪽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근데 이걸 어디에 쓰시려고……?”
“포대로 쓸 생각이었지.”
“포대요? 아! 위에 화포를 놓고 이리저리 회전시켜 쏠 수 있게 하는 거군요. 좋은데요? 근데 왜……?”
석삼은 감탄하다가 문득 화극이 앞서 말한 쓸 생각이었다는 어투에 담긴 미묘함을 뒤늦게 깨닫고 물었다.
“이렇게 작은 목업으로 만들어 보면 별문제가 없지만, 진짜 화포를 놓고 쓰고자 한다면 쓰기가 어렵네. 일단 화포의 무게를 이기고자 한다면 아주 두꺼운 나무로 만들거나, 아예 철로 만들어야 하지. 게다가 방포시의 충격까지 생각하면 더 튼튼하게, 더 무겁게 만들어야 할 걸세. 한데, 그렇게 하면 회전시킬 때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기름칠을 한다고 해도 구멍 난 항아리에 물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혼란한 싸움 중에 마반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하게 될 걸세.”
“음, 그도 그렇겠군요.”
석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쉬움을 보였다.
“이거 배에 두고 쓰면 딱이다 싶었는데…… 특히 이제 만들고자 하는 노선에요.”
“아닌 게 아니라, 본디 전함에 쓸 생각이었네. 뭍에서 쓰기에는 너무 무거워도 배에서는 큰 상관이 없을 테니까. 돛대 사이에 마반대를 여럿 두면 전함의 전투력도 그만큼 높아졌을 거야. 경함선은 화포의 수를 늘릴 수 있겠고, 노선은 백병전에 거추장스러운 갑판 난간 쪽 화포를 빼낼 수 있겠지.”
하나, 분명 여러모로 쓸 만했을 마반대는 현재는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차근히 연구하여 화포의 무게와 충격을 이겨 내면서도 큰 힘 들이지 않고 회전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개발한 후에야 쓸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여긴 또 어쩐 일인가.”
문득 화극이 물으니, 지난번 그가 뜬금없이 찾아왔을 때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때 지금 주군의 허락으로 건조하기로 확정된 노선에 대한 착안을 들고 왔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어 걱정 반 기대 반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석삼은 잘 물어 줬다는 듯 화색을 띠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선소에 가서 설계도를 보았는데, 배 아래 중심을 잡기 위해 철괴를 넣는다더군요.”
“그렇지. 안 그러면 배가 뒤집히니까.”
“그래서 말인데, 굳이 배 안에 철괴를 둘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뭔 소린가?”
“배 바깥에 붙여 두자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배 안에 둘 철괴들을 녹여 길게 한 줄기로 뽑아내는 겁니다. 그걸 용골 아래에 달아 두어 앞으로 뾰족하게 내세우면 그대로 충각의 역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석삼의 말에 화극이 눈만 끔뻑거렸고, 그걸 생각지 못한 착안을 듣게 되어 놀란 것으로 지레짐작한 석삼은 더욱 신나게 말을 이었다.
“경함선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이번에 만드는 노선은 충파하는 것 또한 고려해야 하니, 제 말씀대로…….”
“이보게.”
“……예?”
“그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린지 알고 하는 말인 겐가?”
화극이 콧방귀를 끼며 핀잔하니, 석삼은 왜 그러냐는 반응을 표정에 한가득 담았다.
“철에 물이 닿으면 부식되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냐는 걸세.”
“알지요. 하지만, 겉이 부식된다고 해서 바로 철이 부스러지는 건 또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몇 년에 한 번 갈아 치운다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허, 그 부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로군. 이보게, 철이 부식되면 껍질이 일어나서 떨어지는 건 알고 있겠지? 그 껍질이 생기며 밀어내는 힘이 보기보다 커서, 아무리 철을 잘 붙여 놓아도 그 힘에 밀려 붙인 게 떨어지네. 하니, 자네 말대로 용골에 철을 붙여 놓으면 그 붙인 부분에 생긴 부식으로 인해 붙인 것이 서서히 느슨해질 수밖에 없네. 그러다 어느 순간 떨어져 나가면 그때는 하중이 사라지는 것이니 배는 전복되고 말 걸세. 특히나 자네 말대로 충각처럼 이용한다면 더더욱 잘 떨어지겠지.”
“…….”
철이 물기에 부식되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큰 위험인 줄은 몰랐던 석삼은 할 말이 없어, 그저 어깨만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화극은 실소하곤 석삼의 늘어진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자네가 좋은 의견을 내놓았고, 주군께서도 그에 응하였으니, 그만 만족하고 이후의 일은 장인들에게 맡기게. 자네도 곧 남양에 가야 하니, 그에 신경을 쓰는 게 낫지 않나.”
“그야 그런데, 녹둔도에 원군을 보낸 터라 시일이 연기되었지 않습니까. 녹둔도에 간 경함선 중 몇 척은 곧 돌아온다지만 그래도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이고, 준비를 마치는 걸 생각하면 더 뒤에나 떠날 수 있지요. 제 준비야 끝났지만 출발하지 못하니, 괜히 이런저런 생각만 하고 있지 뭡니까.”
석삼이 머리를 긁적이곤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화극이 문득 생각났다는 양 제안하였다. 아니, 제안이기 전에 물음이었다.
“전부터 꼭 묻고 싶었네만, 자네는 왜 사토왕을 찾지 않는 겐가? 자네의 자리를 생각하면 오히려 사토왕과 더 친근해야 하지 않은가?”
유구국 국왕 사토는 아직도 탐라에 있었다. 다만, 홍로현이 아닌 대촌현 행재청에 있었으니, 모르쇠 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석삼은 조금 뜨끔한 기색을 띠며 변명하듯 말하였다.
“그게 좀 그 사람 보는 게 민망해서요.”
“민망하기도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뜸 한 나라의 왕을 끌고 오다니. 그래도 만나 보게. 장차 새 노선이 만들어지면 더욱 유구를 앞마당 드나들 듯해야 할 터인데, 억지로라도 어색함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화극의 훈계를 들은 석삼은 군기청에서 물러났다.
그러곤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포구로 향하였으니, 그곳에서 배를 타고 대촌현으로 가 볼 셈이었다.
많이 늦긴 했지만, 사토왕을 만나 오해(?)를 풀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차라리 가라고 할 때 가지. 왜 여태까지 남아서…….”
사실 사토왕은 더 일찍 유구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자원하여 탐라국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아주 형편없는 인사는 아닌 모양이지? 탐라를 보고 뭐라도 배워 갈 생각을 한 걸 보면 말이야.”
석삼이 중얼거리듯 사토왕은 뜻밖에도 탐라를 배우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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