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48)
* * *
몽주는 갑주를 착용하고 나니, 문득 주션족 전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와 탐라 군병들의 갑주와 주션족들의 무장은 한눈에도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몽주를 포함한 탐라군 안에서도 계급에 따라 갑주의 성능이 차이 나긴 했지만, 사냥 때의 복장과 별 차이가 없는 주션족 전사들과 비교할 건 아니었다.
몽주의 갑옷은 흔히 경번갑(鏡幡甲)이라고 알려진, 일종의 체인 메일(Chain mail). 즉, 사슬 갑옷으로 사슬로 만들어진 옷 위에 강철 철편을 단 것이었다.
탐라 군병들 또한 몽주의 갑옷과 비슷한 갑옷을 사용했는데, 사슬옷 대신 촘촘하게 구멍이 난 가죽옷 위에 철편을 달아 놓은 것으로 겉보기와 달리 경번갑보다는 찰갑(札甲)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어찌 보면 두정갑(頭釘甲)의 초기형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탐라군 중에서도 일반 군병과 장교들의 갑옷은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갑주의 주(冑 : 투구)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어, 일반 군병은 머리만 가리는 철제 투구인데 비해, 장교들은 차양도 달렸고 목덜미 덮개도 달려 있었으며, 투구의 위에 뾰족한 돌기가 있어 얼핏 봐도 장교와 일반 군병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무게는 몽주가 쓰는 경번갑형 갑주가 가장 무거웠고, 그래서 몽주는 평소에는 쓰지 않다가 전투가 일어날 때만 갖춰 입었다.
물론, 전투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대체로 안전한 지역에만 있는 터라, 그마저도 갖춰 입은 적이 드물었지만 말이다.
하나, 지금은 갑주를 갖춰야 할 때였다.
“주군,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군막을 나서니, 군막 앞에서 장교들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던 탁기가 몽주를 보곤 좀 과하게 감탄하였다.
“간만에 입으니, 좀 어색하군.”
왜국에서 오카성을 공략할 때 입은 게 마지막이었다.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그 전에도 별로 입은 적이 없었으니, 어색한 건 당연했다.
어깨를 움직거리며 낮게 몇 번 뛰며 갑옷이 몸에 맞춰지기를 시도하니, 무게감이 더 여실히 느껴졌다.
몽주의 체력으로는 이런 갑옷을 입고, 뛰고, 달리며 무기를 휘두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몽주가 오늘 갑주를 제대로 착용한 것은 그만큼 오늘 싸움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적은 아직 움직임이 없는 겐가?”
“예. 건너편 언덕에 첨병만 간간이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탁기의 말에 몽주는 고개를 돌려 그의 앞에 있는 언덕길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언덕길은 앞서 몽주가 군영을 차려 첨병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갈림길에서 ‘옌볜’ 쪽 산길의 일부였다.
그 좁은 언덕길 위에는 탐라군이 개복포를 방열해 놓은 상태였고, 몽주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3천의 주션족 전사들이 길을 막고 있었으며, 좌우 숲 속에도 각각 2천의 전사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쪽은 어찌 되었는가?”
“명하신 대로 6천의 기마와 20문의 포대를 보내 두었습니다. 지금쯤 한창 진지를 구축 중일 것입니다.”
명한 대로 시행하였기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심호흡하였다.
첨병들이 돌아온 건 대략 한 시진 전이었다.
스무 명이 나가 열다섯이 돌아왔으니, 다섯은 나하추의 척후대와 조우하는 바람에 시살당했으리라.
그 위치는 ‘옌볜’으로 향하는 산길의 끄트머리로, 첨병들이 나하추군을 목격할 즈음, 그들은 비라카와 ‘옌볜’ 사이의 험로를 뚫고 온 후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몇 갈래로 접근했던 첨병들의 보고는 대동소이했다. 적게는 10만에서 많게는 15만의 군세였고, 공히 나하추군의 대다수가 기마라고 하였으니, 나하추는 전력으로 훈춘을 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란 할라의 입구에 1, 2만은 보냈을 것이고, 장춘을 지키는 군병들도 남겨 두었을 것이니, 지금 산길 중 두 개의 언덕을 끼고 3, 4길미 정도 떨어져 대치하고 있는 나하추의 군세는 진정 전력(全力)이라고 봐야 했다.
“크게 패했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명군이 나하추에게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을 줄은 몰랐군.”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이지 약졸들이 아닙니까?”
몽주와 탁기의 말을 위국공과 요동공이 들었다면 꽤 억울했겠지만,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탐라군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수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 그 또한 명군과 요동군의 한심함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잠시 명군과 요동군을 핀잔하던 몽주는 다시 시선을 돌려 서남쪽 투먼강의 상류 방향을 보았다.
그 방향은 앞서 탁기가 6천의 기마와 20문의 포대를 보낸 곳이었으니, ‘옌볜’에 군영을 차린 나하추군이 택할 수 있는 우회로가 있는 곳이었다.
다만, 그 우회로는 상당히 큰 산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10길미 정도의 산길보다 훨씬 길어져 80길미가 넘었고, 길 자체도 투먼강의 강변에 해당하는 터라 기마로 이동하기에는 오히려 산길보다 마땅치 않았다.
하여, 어지간한 경우라면 산길을 뚫으려 할 테지만,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하여 군세의 일부를 20길미 정도 떨어진 우회로의 요충지에 보내 둔 것이었다.
산길과 우회로 어느 곳에도 배치되지 않은 약 7천의 기마 전사들은 군영 근방에 대기토록 하였으니, 양쪽 어디서라도 원군이 필요하면 급파하도록 하였다.
나하추군이 최소 10만임을 감안하면, 꽤 버거운 대치였지만, 몽주는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 여겼다.
산길이든 우회로든, 탐라군과 주션족 전사들이 한발 앞서, 소수로 대군을 막을 수 있는 길목을 선점하였으니, 이는 개복포의 조력과 함께라면 문자 그대로 일당백도 감당할 수 있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격렬하긴 하겠지.”
그건 아무리 준비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 * *
나하추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미시 정각(오후 2시)이 넘은 시각으로, 오늘은 쳐들어오지 않으려나 싶을 때쯤이었다.
건너편 언덕 위가 문득 소란스럽다 싶더니, 일련의 기마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일제히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탐라의 포대들은 일제히 방포하여 나하추의 기마를 타격하였다.
쾅쾅! 쿵쿵!
방포음과 함께 기마들 사이에 떨어진 천뢰탄이 다시 터지는 소리가 뒤섞여 마치 큰북 작은북을 섞어 치는 듯하였다.
물론, 피어오르는 먼지구름과 그 사이로 튕기고 찢겨 나가는 나하추의 기마들이 보였으니, 그것이 ‘드럼’ 연주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런 소란 중에 몽주는 방열한 포대 중에 나란히 서 있었다, 탐라의 문장기를 들고.
그곳이 아직 적의 공격이 닿을 곳은 아니지만, 일군의 수장이자, 탐라국의 주인이 있기에는 제법 위험한 곳이었다.
하여 탁기를 비롯한 장교들이 몇 번이나 뒤로 물러나 계실 것을 청했지만, 몽주는 다 뿌리치고 양쪽으로 포대들을 둔 곳에 우뚝 서 있었다.
첫 천몽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가 일반적으로 ‘안전 지대’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나아가 전사들과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전사들의 사기가 급진작되었으니, 지금도 그와 마찬가지의 노림수를 가진 행동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몽주의 ‘일보 전진’은 군병들 사이에서 꽤 놀라운 반응을 이끌어 내었다.
비단 탐라군뿐만 아니라 주션족 전사들에게도.
키만 멀대같이 클 뿐, 딱 봐도 유약, 심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의 탐라공이 갑주를 갖춰 입고, 경기를 일으킬 만한 굉음이 난발하는 포대 사이에 우뚝 선 채 긴 깃대를 옆에 세워 들어 탐라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멀대 같았던 모습도 갑주를 갖춰 입자, 풍채 큰 늠름한 장수처럼 비쳤으니, 그 헌앙한 주군의 모습에 자연 군병들도 흐뭇했던 것이다.
그때, 몽주가 깃대를 곧추세워서 흔들며 소리쳤다.
“더욱 거세게 방포하라! 이 계곡을 저들의 무덤으로 만들어라!”
언덕과 언덕 사이 계곡으로 쇄도하는 나하추군의 일부가 중앙에까지 이르자, 몽주가 방포를 독려한 것이다.
그 소리가 포대 전부에 퍼지지는 않았겠지만, 몽주가 크게 휘두르는 탐라 문장기를 본 포대장들은 그 의미를 깨닫고는 방포 속도를 더욱 높였다.
쿠구구궁!
천지사방에 터지는 폭음과 폭염은 진실로 산중을 묘지 터로 바꾸고 있었다.
* * *
쿠궁!
폭음이 들리는 순간, 언덕 위에서 바라본 참상 어린 광경에 태위 나하추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들린 폭음은 산길이 아닌, 숲 속에서 있었으니, 전사들 수천을 하마시켜 숲을 통해 기습하려 했던 시도가 무위로 끝났다는 증거였다.
“대체 저들의 화포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위력적이란 말인가?”
“…….”
태위가 물었지만,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탐라군이 가진 화포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은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포탄이 다시 터진다는 이야기는 들었기에 그 위력에 놀라면서도 예견한 부분이라 놀란 마음을 애써 억누를 수 있었지만, 더 황당한 것은 그 포탄의 궤도가 일반적으로 일려진 것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다.
조금 전 수풀로 가득한 험지로 전사들을 보낸 것도, 화포의 궤도가 나무에 가려져 제대로 타격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그리한 것인데, 탐라의 화포는 요상하게도 포탄을 높이 솟구치게 하여 거의 직각으로 떨어뜨리니, 기슭에 서 있는 나무를 방패 삼고자 한 것도 무소용이었다.
거기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폭발로 인한 화재까지 겹쳐 남서풍의 바람과 함께 오히려 아군을 위협하고, 불리하게 만들었다.
“저 철로 만든 가시덩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전에 저런 것에 대해 들은 바가 없거늘?”
태위 나하추가 다시 물으니, 이번에도 답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하기야 실제로 환형 철조망을 경험해 본 자가 극히 드물었으니, 나하추에게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 질문과 더불어 나하추와 그 주변의 분위기는 더욱 악화되었으니, 전황 자체에 대한 태위의 분노에 더해, 전과에 대한 책임을 수하에게 전가하려는 듯한 느낌마저 짙어진 탓이었다.
사실, 이번 싸움에 앞서 나하추의 수하인 몽골족 제부족장들 간의 대세는 일란 할라를 먼저 수복하자는 것이었음에 반해, 나하추와 그의 직계 부족장들만이 정공을 버리고, 궤도를 택하길 주장했으니, 애초에 책임은 나하추에게 있다고 해야 마땅했다.
한데, 나하추가 탐라군의 화포가 가진 위력과 듣도 보도 못한 철로 만든 가시덩굴을 지적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을 은근히 책망하고 있으니, 만약 패전하였을 때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특히 남쪽 초원의 부족들에게 떠넘기려 함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투입했는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태위가 다시 물으니, 백부장을 다섯씩 보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하추 세력하의 제부족들의 수가 대략 스물에 이르니, 약 1만의 기마들이 산길을 뚫기 위해 투입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스란히 손길로 기록될 예정이었다.
쇄도하는 중에 탐라군 화포에 곤죽이 났고, 철 가시덩굴로 인해 기동력을 상실하였으며, 화포에 더해 언덕 위에서 날리는 화살까지 그대로 맞고 있으니, 살아 돌아오는 자도 성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암울한 중에 태위가 다른 부족장들이 깜짝 놀랄 말을 전하였다.
“백부장을 열씩 더 내주게.”
“……!”
“다섯은 다시 이곳에 투입할 것이고, 다른 다섯은 우회하여 공격해야겠네.”
“…….”
제부족장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쉽게 응하겠노라 말을 뱉지 못했다.
나하추 세력에 속한 몽골족 제부족들은 저마다 규모의 차이가 있으나, 가장 큰 부족도 전사가 1만이 되지 않았고, 적은 부족은 2, 3천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미 각각 5백의 전사들을 상실하게 생긴 와중에 다시 1천의 전사들을 전선에 갈아 넣을 생각을 하니, 절로 반발심이 생긴 것이었다.
“지난번에 명군을 물리쳤을 때는 하늘을 범하는 것에도 따르겠노라 하더니, 그사이에 생각이 바뀐 겐가?”
“…….”
“아니면, 내가 군령을 엄히 집행해야 말을 듣겠나?”
나하추가 공공연히 협박조의 말까지 하자, 그제야 부족장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숙였다.
그건 신뢰를 지키기 위함도, 지엄한 군령을 따르기 위함도 아니었다.
오직 나하추가 홀로 5만이 넘는 전사를 가진, 가장 강력한 세력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아직 나하추의 군력은 더 밀어붙일 여력이 적잖이 남아 있었다.
* * *
“주군! 이만 물러나시지요! 더는 위험합니다!”
탁기가 다가와 몽주의 곁에서 크게 소리쳐 고하였다.
그 목소리의 크기란 단지 전장의 소란함을 이겨 내기 위한 정도를 넘은 것이었다.
탁기로서는 주군이 위험한 곳에 버티고 있는 것을 더는 묵과할 수 없어 피할 것을 강권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몽주가 갑옷에 화살 하나가 달려 있기도 했다.
비록 그 화살이 제대로 박힌 것이 아니고, 그저 스치던 화살촉 끝이 사슬옷에 걸리는 바람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탁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하나, 몽주는 대답 없이 문장기만을 더욱 열심히 휘두를 뿐이었다.
“주군!”
“하하하! 탁기! 우습지 않느냐!”
“주군?!”
“대체 내가 이곳에서 깃발을 휘두르는 게 무엇이 그리 대수라고 상장군인 자네가 여기까지 온 것인가! 또, 겨우 힘없이 올라온 화살이 무엇이 그리 위협적이라고, 사방의 군병들이 저리도 감탄한단 말인가!”
“…….”
몽주는 실소에 실소를 거듭하다가 폭소마저 터뜨리며 말했다.
이미 싸움은 만 하루를 넘게 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언덕 아래 튼튼하게 걸어 두었던 환형 철조망은 숱하게 부딪쳐 온 나하추의 기마에 뜯겨 나가 더는 장애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나하추군과 탐라군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으니, 여전히 교전비는 월등하다고 하나, 탐라군의 피해도 상대적으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적의 화살이 몽주의 근처까지 간간이 날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적이 아군의 저항선을 침범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서 죽은 나하추의 군력은 모르긴 몰라도 1만이 넘었고, 패퇴한 자들까지 합하면 2만이 넘을 것이나, 탐라군과 주션족 전사들의 피해도 물경 2천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죽거나 크게 다친 자들의 대부분은 주션족 전사들이었고, 탐라군 사망자는 수십에 불과했다.
일당백은 아닐지언정 일당십은 거뜬히 버티고 있음에도 크게 보자면 위태로운 건 오히려 탐라군 쪽이었다.
특히 우회로를 통해 공격해 온 나하추군을 막는 곳에서는 피해가 더욱 커서, 죽은 주션족 전사들 중 삼분지 이와 탐라군 사망자의 대다수는 그곳에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주션족 전사들을 모조리 그곳에 투입하였음에도 몇 번이나 무너질 뻔한 걸 겨우 틀어막은 것이다.
게다가 개복포도 서서히 돈좌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며칠이나 방포한 적도 있지만, 그때는 일방적인 공격이라 교차하여 방포함으로써 성능을 유지시켰지만, 이곳에서의 싸움은 계속 위태로워 한시도 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잠깐의 휴전이 휴식의 전부였으니, 비단 개복포뿐만 아니라, 싸우는 자들도 지치긴 마찬가지였고, 깃발을 흔드는 몽주 또한 같았다.
“주군!”
다시 탁기의 끓는 듯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치 몽주를 억지로라도 잡아 들어서 뒤로 물러나게 할 것 같은 기세였다.
하나, 기세만큼은 몽주도 지지 않았다.
탁기의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흔들던 문장기의 깃대를 거칠게 땅에 박듯 내리꽂으며 탁기를 노려보았으니, 앞서 입가에 흐르던 웃음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나는 고작 이 깃대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몽주의 고함 속에는 깃대를 흔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도 담겨 있었다.
차라리 왜국에서의 싸움처럼 일방적인 승리를 담보로 한 싸움에서는 뒤로 물러나 크게 전황을 관리하거나, 혹은 그러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물고 물리는 격전 중이었고, 전략적으로 따질 것 따윈 없었다.
그저 적이 쳐들어오는 두 곳을 있는 힘껏 막는 것만이 해야 할 모든 것이고, 몽주로서는 그저 그중 한 곳에서 탐라 문장기를 마구 흔들며 군병들에게 자신이, 탐라의 주인이 적과 맞서 싸우는 너희들과 함께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모든 전부였다.
눈싸움을 하며 서로를 노려보던 중에 다시 몽주가 말하였다.
“탁기, 상장군이라면 상장군답게 내 곁을 지킬 게 아니라 군병들을 이끌어라.”
“…….”
핑!
마치 몽주의 말을 종지부 찍듯 화살 하나가 흘러들어오더니, 몽주와 탁기 사이를 스쳐 지나가 언덕 바닥에 튕겼다.
“이렇게 위험…….”
“이렇게 난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기어이 몽주가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재확인시키자, 탁기는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한 걸음 물러나더니, 군례를 취하곤 돌아섰다.
몽주도 다시 문장기의 깃대를 크게 들어 올리고는 힘차게 깃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소 잦아들었던 방포음이 다시 거칠게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까지만 버티면 된다! 내일이면 저들도 더는 공세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 힘내라!”
몽주가 크게 고함치니, 주변의 포대 군병들이 크게 대답하였음은 물론, 제대로 듣지 못한 포대 군병들까지 무어라 환호하듯 소리쳤고, 심지어 들었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주션족 전사들까지도 크게 기성을 내뱉었다.
몽주는 이상하게 그것이 즐거웠다. 삭막한 전장 속에 즐거움이란 감정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솔직히 즐거웠다.
첫 천몽에서 부족 전사들과 함께 전투에 뛰어들어, 잠깐의 용맹한 모습을 비친 후에 슬쩍 뒤로 물러나 전사들의 승리를 관람할 때 느낀 즐거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새로운 기쁨이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그리도 좋아라 하는 거냐?! 하하하!’
몇 번 화살이 다시 날아들었고, 그중 한 발이 가슴팍에 꽂히면서 알싸한 충격과 따끔한 아픔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즉사할 정도가 아니라면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이 몽주 스스로 물러서지 않는 최후의 보루였다.
‘겨우 이 정도로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탐라군과 주션족 ‘떨거지’ 전사들이 사력을 다하여 싸움에 정진하는 것이 이번 싸움의 진정한 보루였다.
“조금만 더 버텨라! 승리는 분명 우리의 것이다!”
그가 다시 고함치니, 그건 그저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허세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대군이라고 해도, 그 모두가 전적으로 나하추의 병사들은 아닌 법, 저들의 피해가 극심해질수록 나하추군을 이루는 세력 간에 알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란 할라의 허 소령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춘으로 달려갔든 아니면 회군하여 돌아오고 있든, 허 소령이 이끄는 녹둔도의 군병들이 어디에서라도 모습을 드러낸다면, 나하추도 이곳에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 * *
헉! 헉! 후욱! 후욱!
그건 마치 산이 스스로 거친 숨을 내뱉는 듯했다.
비라카의 분지를 감싸고 있는 산세 중 동편 산속에 노을이 지고 있는 사이로 수천의 군병들이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거친 숨결만은 감출 수 없어 산중에 호흡하는 소리가 가득했던 것이다.
“모두 최대한 조심해서 방열하라. 들킬 거리는 아니나, 혹여 오폭이라도 있다면 대계를 그르칠 터이니, 조심해야 한다.”
허 소령이 명을 전파하니, 탐라군이 각각의 자리를 정하여 산 중턱을 파내어 개복포를 방열하였다.
방열한 곳마다 앞에 수많은 나무들이 울창한 나뭇잎과 함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하나, 어둠이 드리우면 곧장 그 나무들을 베어 낼 것이니, 그 후에는 마음 높고 방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중에 가득한 삽질 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허 소령은 조금 움직여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비라카의 남쪽 평야를 눈여겨보았다.
그곳에는 대단위 군막이 펼쳐져 있었으니, 가까운 곳은 허 소령이 있는 곳부터 1길미 정도, 먼 곳은 3길미 이상까지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얼핏 보아도 4만은 족히 넘을 나하추의 전사들이 있었으니, 허 소령이 추측컨대, 나하추의 정예 전사들인 듯했다.
고작 산길을 뚫는 데 쓰일 파리 목숨으로 나하추가 자신의 정예를 소모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덕분에 죽을 것처럼 달렸는데, 그래도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듯하구려.”
닝구타의 중심에서 주군의 파발과 조우한 허 소령은 그 즉시 명대로 비라카로 직행하였다.
그 진군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해서, 탐라군이든 주션족 전사들이든 다들 정예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절반이 낙오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도중에 길이 너무 험해 말도 포기한 탓에 더욱 그러했다.
아마 낙오한 군병들이 다 도착하기까지는 하루 이상 걸릴 것이고, 때문에 정작 나하추군의 일대(一隊)를 내려다보는 호기회를 잡은 군력은 2만여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해가 지면 저곳을 피에 젖은 사지(死地)로 만들 것이다.”
허 소령이 서슬 퍼렇게 눈을 빛내며 중얼거리니, 주변에 있던 군병들도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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