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49)
* * *
고려 왕성에 근래에는 찾기 어려웠던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는 궁중후 염흥방이 처음으로 금상에게 청원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청원의 내용이 보기에 따라서는 궁중후가 왕가를 모욕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왕실의 누구도 궁중후를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건 궁중후가 왕실을 받드는 대들보이기 때문은 물론, 애초에 궁중후가 청원한 내용이 탐라국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근자에 고려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말 중에, 고려 왕실에 있어 요동공이 지붕이고, 궁중후가 기둥이며, 탐라공이 집터이자 전답(田畓)이라 하였다.
고려 왕실이 편안할 수 있는 건 그 세 권력자들이 왕실을 지켜 주기 때문이라는 뜻이니, 왕실 또한 겉으로는 모른 체하더라도 속내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세 인사들 중에서 두 사람이 논의하여 금상에게 청원한 것을 두고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탐라공이 고려 왕실을 지탱케 하는 지분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고려의 삼남, 즉 남면이 안정되어 소출이 증가한 덕에 남면통관안찰사로서 고려 국공이 왕실 재정에 기여하는 재원은 더욱 커졌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개경 시전의 물산 중 태반이 탐라 상단의 손을 거치고 있었으니, 만약 탐라공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지금 고려 왕실이 누리고 있는 사치와 안락은 꿈도 못 꿀 형편으로 전락할 게 뻔했다.
“탐라국공은 그것이 얼마나 미묘한 문제인지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어느 정도는 그런 듯합니다. 제게 그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입에 담았으니까요.”
“하면, 탐라국공에게 왕실의 혼사라는 것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것임을 깨우치도록 하는 게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판내시부사의 말에 궁중후가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긴 했지만,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보건데 그 말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것 같진 않았다.
“부사 영감.”
“말씀하십시오.”
“내 부사 영감이니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왕성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시니까요.”
“…….”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판내시부사는 다소 긴장하며 궁중후를 바라보았다.
지난 날, 영산왕 신돈을 몰아내는 데에 힘을 합하였던 내시부 좌승직이 지금의 판내시부사였으니, 왕실이 평온한 걸 두고, 고려의 왕가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왕실 인사들이 가득한 와중에 진실로 왕실이 처한 진면목을 두고 허심탄회하게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제가 보기에 탐라공은 비록 왕실의 혼사를 무겁게 여기지는 않았더라도, 왕실 자체를 경시한 건 아니라 봅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입지를 생각하면 과하게 몸을 낮춰 준 것이라 할 일이지요.”
“……왜국의 국주를 왕실의 부마로 들이는 것이 그 정도로 평가할 일입니까.”
부마(駙馬)는 왕의 사위를 의미하는 만큼, 금상이 아직 혼인도 치르지 않을 정도로 어린 상황에서 부마는 존재할 수는 없었지만, 왕실의 여인을 왜국 국주에게 보내는 것이기에 왕실의 부마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왕실에서 불만을 가지는 부분이니, 족내혼(族內婚)의 풍습은 이미 사라진 지 20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왕가의 여식들은 여전히 왕실 내의 먼 친척이나 지체 높은 귀족 가문과 혼인을 맺었지, 신분이 낮거나 외국으로 시집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타국의 왕도 아니고, 여전히 용서하기 어려운 왜국의 일개 국주에게 왕실의 여인을 보내는 건 왕실의 입장에서는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지금 탐라공이 혼처를 주선한 자를 국주라곤 하나, 실상 그는 왜국 구주를 온전히 다스리는 자로서 국주의 신분을 뛰어넘었습니다.”
“왜국의 구주라 해 봐야 결국 일개 섬일 뿐이지 않습니까?”
판내시부사의 되물음에 염흥방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소하였다.
그러고 보니, 탐라공이 보여 준 지도를 판내시부사가 본 적이 없었으니, 그 또한 왜국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일개 섬이라고는 하나, 그 섬의 크기가 경상도만 하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구, 구주도가 그 정도로 컸습니까?”
판내시부사는 쉽게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당대의 영토는 체감에 의지하는 면이 컸다. 그렇기에 모든 나라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과장되게 여기고, 다른 나라를 과소평가하였고, 자기 나라 안에서도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 과대평가되곤 하였다.
또, 그 체감에는 심리적인 영향도 컸으니, 고려의 경우, 문화적으로 영향을 크게 받고, 따라야 하는 상국인 경우가 많았던 중국의 제국은 과대하게 여기고, 경시를 넘어 천시하던 왜국에 대해서는 그만큼 과소하여 평가하였다.
다만, 중국의 경우에는 고려와 가깝고 대개 중국 제국의 중심이 있던 동부와 북부를 과장하고, 반대로 서부와 남부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사실 처음 탐라공이 지도를 보였을 때, 그 자세함을 두고 크게 감탄하긴 했지만, 궁중후 염흥방 또한 그 지도가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했다.
하나, 그 지도를 통해 교통과 물류에 대해 탐라공이 설명하는 것을 들으니, 과연 이치에 맞음을 깨달았고, 자연 그 지도 또한 고려의 다른 지도보다 더 정확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염흥방의 눈에 들어온 ‘새로운 세상’은 그의 생각을 여러모로 수정하게 만들었으니, 특히 경시하던 왜국이나 북방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왜국 구주도 그 다른 시각 중 하나였다.
과거였다면 탐라공이 구주도를 왜국으로부터 빼앗았고, 다의홍이라는 자를 통해 다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지금만큼 그 업적을 대단하다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백만의 왜인들이 거주하는 경상도만 한 영토, 그것도 춥고 황폐한 북방의 땅도 아닌, 따뜻하고 여러 물산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을 얻었다는 건 돌이켜 보면, 400년이 넘는 고려 역사에서도 비할 게 없을 대단한 공업이었다.
그리고 그런 땅을 다스리는 국주, 아니 도집사의 혼처를 주선하여 고려 왕실의 인척으로 삼으려는 탐라공의 의도는 궁중후의 시야에서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구주 도집사를 왜국이 아닌 고려인과 혼인하게 하여 구주의 정체성을 고려 쪽으로 끌어오고자 한 것임을 알지만, 솔직히 자신이 탐라공이었다면, 탐라공의 친인척이나 탐라인과 혼인하게 하였으면 했지, 고려 왕실과 인연을 맺게 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왕실이 아니라도 이미 탐라공을 따르는 구주 도집사를 왜국과 구분하게 만들 수 있음은 물론, 구주에 대한 탐라공의 지배력에 흠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고려 왕실과의 인연을 막으려 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구주도는 그저 탐라국공의 사유지일 뿐, 고려의 영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구주도를 어찌 생각하든 말이지요. 한데, 구주를 다스리는 도집사가 탐라공의 수하인 동시에 고려 왕실과 인척 관계라면 어떻습니까? 특히, 훗날 고려 왕실의 피를 받은 도집사의 후계자까지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진정 구주 또한 고려의 일부라고 해도 허언인 것만은 아니게 되겠지요.”
“…….”
판내시부사는 과연 그렇다 싶은 마음이 반이고, 과연 그렇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구주가 왕실과 인척이 된다고 해도, 지금 왕실이 구주에 일말의 영향력이라도 행사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길게 보십시오. 아주 길고 크게 봐야 합니다. 탐라공은 아주 젊습니다. 앞으로 3, 40년을 살아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젊지요. 그리고 능력이 대단한 자입니다. 적어도 구주를 확실히 휘어잡을 능력쯤은 충분한 자란 말입니다. 게다가 탐라공의 고려에 대한 충심은 의심할 바가 없지요. 한데, 지금이야 구주가 왕실과 상관이 없고, 상관할 수도 없지만, 훗날의 일은 또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언젠가 다시 왕실이 그 권위를 되찾는 날에 고려의 크기가 오히려 늘어나 있을 수도 있는 일인 겁니다. 그걸 생각하면 구주 도집사의 가계에 고려 왕실의 피를 수혈하는 건 득이면 득이지, 실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궁중후가 연신 설득하니, 판내시부사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왕실의 자존심이라는 건 실상 왕실 종친만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는 부사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자존심을 부릴 게 있다면, 지금 왕실이 처한 상황에나 부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게다가 왕실의 핏줄에 원나라 호인들의 피도 잔뜩 섞여 있으니, 단지 외인과의 혼인을 두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건 오히려 자기비하에 불과했다.
먼 훗날의 일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탐라공이 고려왕실에 기여하는 것과 그의 충성심을 더욱 도탑게 하기 위해서라도 구주 도집사와 왕실 간의 혼사는 마냥 거부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구주 도집사의 배필로 적합한 여인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충숙왕 때부터 왕실이 여러 번 흔들린 탓에 지금 왕실 종친의 규모도 작아졌고, 특히나 진정 국혼을 성사시킬 만한 젊은 여인은 하나도 없는 지경입니다.”
선대 충숙왕이 심양왕의 모함으로 사실상 강제 양위되어 원나라에 의해 귀양 가게 되면서 시작된 고려 왕실의 혼란은 이후 충혜왕의 폭정과 충목, 충정왕의 단명으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다.
멀리 보면 왕실 종친의 여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국혼에 해당할 공주나 옹주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한데, 판내시부사의 말을 들은 궁중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
판내시부사는 뭔 소리냐는 듯 염흥방을 쳐다보았으니, 내시부의 수장인 그가 모르는 왕족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충숙왕께서 복위하신 이후…….”
“……!”
하나, 궁중후가 한마디 꺼내는 걸 듣자마자, 판내시부사 또한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 그분은…….”
“뭐, 문제 될 것이야 있겠습니까. 비록 가까우실 수 없는 사이긴 하나, 금상과 사촌지간임에는 틀림없지 않습니까.”
“…….”
생각해 보면, 어차피 종친들이 왕실 종적에서 지워 버리고 싶던 여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먼 구주로 보내는 것 또한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구주 도집사와의 혼사에 반대하던 용족들도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 * *
그 폭음은 사실 더 일찍부터 들렸을 것이다. 다만, 워낙에 주변 전장에 가득한 것인 방포음인 터라, 그것을 따로 구분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 날이 저문 후에도 한 시진 가까이 공세를 들이붓던 나하추군이 어느 순간 모조리 퇴각하고 나자, 그제야 또 다른 폭음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적들이 물러남에 터져 나온 승리의 환호 뒤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낸 그 폭음은 북쪽에서 멀리, 그러나 아주 먼 곳은 아님이 분명한 곳에서 생긴 것이었다.
“탁기!”
몽주는 그 폭음을 인지하자마자 상장군을 불렀다.
“지금 당장 군을 정비하라. 부상자와 그들을 돌볼 자들을 제외하고 곧장 출병 준비를 하라!”
“……네!”
탁기는 잠시 뜬금없는 명에 고민하다가, 먼 곳 폭음이 조금 더 크게 들린 직후, 그 명이 무엇 때문인지를 깨닫고 복명하였다.
생각해 보면, 나하추군이 물러난 건 그들이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피해를 입은 것도, 날이 어두워져 싸우기 적합하지 않은 탓도 아니었다.
여전히 적은 아군에 비해 수배의 군력을 가지고 있었고, 날이 저문 후에도 한참 동안 싸운 것을 보면, 또 어둠은 비단 나하추군에게만 불리하지 않고 오히려 개복포에 의지하는 바가 큰 탐라군에게 더 불리함을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핑곗거리가 아니었다.
그 대신, 북쪽에서 들리는 새로운 폭음은 확실한 이유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모두 들어라! 적이 물러난 것은 적의 후방에 아군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들이 물러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다면 아군이 오히려 크게 당할 수 있으니, 우리 또한 다시 힘을 내어 적을 치고 아군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몽주가 있는 힘껏 고함쳐 말하니, 탐라군병들이 일제히 복명하듯 환호하였고, 뒤늦게 말을 전해 들은 주션족 기마들 또한 기성을 터뜨려, 투지가 아직 누그러지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물론, 모두가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부상을 입었든 아니든, 부상이 크든 아니든, 땀과 먼지, 그리고 피와 살점이 뒤섞인 몰골은 그들에게 또다시 싸우라 명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하나, 지금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만약 후방의 아군이 무너진다면 나하추는 다시 건재할 터이니, 비단 인정과 의리의 문제를 넘어 합리적인 판단으로도 지금은 다시 힘써야 할 때였다.
탐라군이 방열해 둔 개복포 중 쓸 만한 스무 문을 해체하여 이동을 준비하고, 주션족 전사들이 어지간한 부상자까지 모조리 사열시켜 진두 전진할 태세를 갖추기까지는 한 식경이면 충분했다.
몽주도 말에 올라 선두에 섰으니, 그의 한 손에는 아직도 탐라의 문장기가 들려 있었다.
비록 화살에 여러 번 맞아 갈래갈래 찢어지긴 했지만, 손아귀에 잡힌 깃대 주변에 핏자국이 가득하긴 했지만, 몽주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탁기를 비롯한 장교들도 더는 주군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험한 모습의 주군조차 쉬려 하지 않는 모습에 군병과 전사들 모두가 오히려 힘을 얻고 있었다.
“전진!”
이틀에 걸친 사투 끝에 지킨 언덕 위에서 마침내 몽주와 군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방에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 그리고 빈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언덕길 주변에 가득한 사체들 사이로 1만의 군세가 이동하니, 그들의 마음만큼은 승리의 개선을 하는 중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그곳은 이미 사지였다.
한 시진에 걸친 방포는 그 산기슭에서 약 2길미에 걸친 대지 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현실은 쑥대밭 그 이상이었다.
비라카 남쪽 산길 입구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나하추의 정예 전사들의 군영 중 절반 이상이 사라졌으니, 그 안에서 맘 편히 휴식을 취하던 나하추의 전사들이 어떤 꼴로 전락했을지는 뻔했다.
휘영청 뜬 달 아래는 밝았지만, 비단 달빛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사위를 분간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불붙은 군막의 잔해가 대지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고, 곳곳에서 죽은 전사와 말의 시체마저 불타올라 그 환한 밤에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방포음이 없었다.
폭음은 있으나, 폭죽시에 의한 것일 뿐, 개복포는 그저 서서히 그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포탄이 이미 다 소모되어, 지금은 그저 이상한 생김새의 철덩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싸움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나하추군이 산 아래로 몰려들어 복수심을 마구 불태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몰려온 것도 아니었다. 방포가 끝난 뒤로도 두 번째이고, 방포 중에 있었던 것까지 더하면 대여섯 번째였다.
방포 중에 몰려오는 적들은 허 소령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가운 것이었다. 수풀과 나무에 걸리고, 산기슭 오르막길에 걸음이 느려진 적은 그저 개복포의 명중률만 높여 줄 뿐이었으니까.
하나, 개복포가 소용없게 된 이후에는 꽤 무시무시한 상황으로 변했다.
방포 사정거리 밖에 있었거나, 안에 있었더라도 운 좋게 물러났던 나하추의 전사들이 눈에 핏줄을 띠고 달려드는 건 어둠 속에서도 섬뜩할 정도였다.
다만, 첫 번째 싸움에서는 그래도 주션족 전사들의 기습으로 비교적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방포를 위해 산속 깊이 스며든 자들 대부분이 탐라군이었고, 방포에 도움이 되기 어려운 주션족 전사들은 뒤에 오는 낙오병들을 추스르고, 함께 온 전마를 정비하면서 산허리 뒤에 숨어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다 방포가 끝난 후 나하추군이 산으로 쳐들어오자, 기회를 노려 나하추군의 옆구리를 기마로 기습하였으니, 그 충격에 나하추군이 상당히 무너졌다.
하나, 그 첫 싸움에서 주션족 전사들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기습을 시도한 전사들의 수가 2천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말까지 포기하면서 급하게 달린 터라, 뒤늦게나마 도착한 일부 낙오병들이 말을 가능한 최대로 수습하여 왔음에도 그 정도밖에 기마대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첫 싸움에서 기습을 통해 큰 전과를 얻긴 했지만, 나하추군이 충격을 수습한 후에는 오히려 중과부적으로 밀려나야 했고, 많은 기마와 전사들을 잃고 말았다.
지금 다시 몰려온 나하추군에 대항할 때 기마를 통한 측면 공격을 감행하지 못한 것도, 기마 전력을 동원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주션족 전사들도 탐라군이 있는 곳에 합류하여 활로 적을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펑, 펑, 퍼펑!
산 중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연발하는 걸 들으며, 허 소령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곤란하군.”
폭죽을 소모하는 걸 보자니, 조만간 폭죽시 또한 쓰지 못하게 될 게 뻔했다. 그 후에는 그야말로 백병전이 시작될 것이다.
일반 화살이야 조금 더 남아 있겠지만, 전장이 산중이라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수풀과 나무가 많아 적병을 제대로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폭죽시는 따로 다시 폭발하는 덕에 그를 통해 적에게 피해를 조금 더 입힐 수 있긴 했지만, 그 또한 트인 곳에서 싸울 때에 비해서는 작은 피해에 불과했다.
그렇게 원거리에서 피해를 강요할 수단이 사라지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숫자 싸움으로 바뀔 것이니, 녹둔도 연합군이 불리해질 것은 뻔했다.
비라카에 있던 나하추군을 크게 무너뜨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2만 여의 전사들은 남아 있을 것이고, 이곳의 소식이 앞서 나간 나하추군의 본진에 전해지고도 남았을 터이니, 그들이 돌아온다면 정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
“……?”
암울한 전황을 진단하던 중에 허 소령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는 귀를 기울였다.
주변에 소리가 너무 많았지만,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누군가들의 비명 소리 그리고 고함과 악쓰는 소리가 마구마구 뒤섞여 있었지만, 심지어 불어오는 바람에 수풀이 우는 소리까지 그를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잠시 귀를 기울인 것으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먼 곳에서 전해지던 방포음이 사라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부터 멈춘 거지?”
허 소령이 혼잣말 하듯 스스로에게 물으니, 그것은 꽤 중요한 질문이었다.
남쪽 먼 곳에서 들리던 폭음이 사라졌다는 건 그곳에서의 싸움이 끝났다는 의미였고, 그건 주군의 방어진이 무너졌거나, 나하추군이 물러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자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기에, 허 소령은 후자의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주군과 싸우던 나하추군이 돌아왔다면, 당장 위험한 지경임에 틀림없었다.
허 소령은 급한 마음에 근처에서 주션족 전사들 몇몇을 데리고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맹특목을 불렀다.
“당장 물러나야 합니다.”
“무슨 소리요?”
“나하추의 본진이 귀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돌아와 저들 중에 가담했을 수도 있습니다.”
환한 밤이라곤 하지만, 먼 곳에서 들어오는 나하추군의 모습까지 볼 수는 없었다.
가시거리의 문제이기에 앞서, 전장의 혼란과 산 중임인 탓에 그랬다.
허 소령이 상황을 급히 설명하니, 맹특목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들에게 후퇴하라 명하겠소.”
“그러…… 엇!”
“……!”
그러라 답하던 허 소령도, 서둘러 퇴각령을 내리려 했던 맹특목도 어느 순간 놀란 낯빛으로 한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쿵-! 쿠쿵-!
다시 폭음이 들렸기 때문이었고, 그 폭음이 전해진 곳이 앞서 들리던 것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주, 주군께서 오셨나 봅니다!”
몇 번 들린 폭음은 가늠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순식간에 이해시켜 주었다.
나하추의 본대는 결국 주군의 저항을 이겨 내지 못했고, 후방이 당했다는 소식에 후퇴했으리라.
그리고 주군께선 후퇴하는 적에 환호하는 걸 넘어, 그 후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는 자신들을 돕기 위해 공세로 전환하였으리라.
“하면, 우리도 조응해야 하지 않겠소? 내 전사들에게 서둘러 나아가 싸우라 명하…….”
“아니, 아닙니다!”
“……?”
맹특목은 적을 앞뒤로 칠 수 있는 기회다 여겨 흥분한 어조로 공격의 명을 내리려 했지만, 허 소령이 만류하였다.
“하려던 대로 우리는 후퇴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찌……?”
“주군께서 오시긴 했지만, 아마 여전히 나하추군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워졌다곤 하지만, 탐라의 화포가 나하추군을 모조리 때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겁니다.”
허 소령은 탐라에서 군병으로서 배우고 훈련한 것에 비춰 생각한 바를 말하였다. 탐라군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손자약해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탐라공에 의해 추진된 바, 그 교리에 비쳐 생각하면, 지금 탐라공께서 어떤 선택을 하실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탐라군의 교리이자 손자약해는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고 전후에 빠르게 안정되는 것을 중시했으니, 그만큼 싸움의 승리 이상으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것을 관건으로 여겼다.
이는 탐라공이 직접 말씀하시며 몇 번이나 강조한 바이기도 했다.
당연히 지금 섣불리 공세로 전환하여 적과 부딪치는 것은 탐라공이 강조하신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포탄도 없는 상태입니다. 나하추가 주군의 공격을 막는 사이에 우리는 남은 나하추군의 공격만으로도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하면…….”
“후퇴해야지요. 천천히 적을 끌어들이면서요.”
“…….”
전장을 넓힘으로써 적의 대오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허 소령의 의중이 전해지자, 맹특목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것이 좋은 생각임은 두말할 것 없지만, 사실 일사불란하게 후퇴하는 것, 특히 적을 끌어들일 만큼 교전을 쉬지 않으면서 후퇴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해야 합니다.”
낮지만, 고집이 가득한 허 소령의 언사에 맹특목의 무거운 목도 천천히 끄덕여졌다.
일각 후, 보다 분명해진 폭음을 들으며, 허 소령의 명을 전해 들은 전사들과 군병들이, 앞서 있던 자들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싸움의 열기는 더 깊은 산속까지 번졌으니, 후퇴이되 패퇴가 아니었고, 전투이되 결전이 아닌 싸움이 산중 곳곳에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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