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50)
* * *
석삼이 대촌현에 있는 사토왕을 만나러 갔던 날, 두 사람은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석삼이 예의 없이 탐라까지 그를 끌고 온 것에 사과한 것을 사토왕이 받아들인 것이 전부였으니, 사과와 용서가 오간 후에도 어색함이 남아, 차 한 잔을 비우자마자 석삼이 자리를 떴던 것이다.
다시 며칠이 흘러, 경험선 5척으로 이뤄진 남양 함대가 유구섬으로 출항하게 된 그날에도 두 사람 사이는 서먹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조금이나마 풀리게 된 건 함대가 데카이에 기항하여 남향할 준비를 위해 하루를 보내던 날 밤이었다.
사토왕이 데카이를 구경하길 바라기에, 그를 혼자 보낼 수 없어 석삼이 함께 나섰는데, 데카이의 어느 주점에서 함께 술자리를 가지게 된 것이 서서히 말을 편히 트게 된 계기였다.
“지난번에 여기에 왔을 때는 그저 두렵고 분노하여 이곳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오늘 보니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군요.”
“확실히 희한한 곳이긴 하죠.”
“아까 보아하니, 탐라나 고려의 배 외에도 왜국의 다른 곳에서 온 배들도 적지 않은 듯한데, 얼마 전까지 이곳이 탐라와 더불어 왜국과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게 교역의 힘이고, 상인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데카이가 다시 정상적인 교역을 재개한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애초에 구주와 가까운 왜국의 서국은 데카이에서 거래를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그들이 데카이를 멀리할 이유도 없었으니, 전쟁의 종료와 함께 곧바로 교역이 재개된 것이다.
게다가 왜국의 남북조 분열이 보다 분명해지는 바람에, 동국의 북조 또한 데카이에서 직접 교역하길 바라게 되었다.
예전처럼 서국의 상인들이 동국으로 가져오는 걸 사서 쓰는 건 남조에 이득을 고스란히 안겨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터라,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데카이와 직접 교역하길 바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세토 내해가 남북조 누구의 것도 아닌, 탐라에 속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라카미들의 세상이 된 덕이기도 했다.
무라카미들은 예전처럼 무턱대고 해적 행위를 하는 대신, 통행료만을 요구하였는데, 그 값이 그리 크지 않아 많은 상인들과 국주들이 그에 응하였다. 특히, 데카이의 물산을 교역한다는 증표를 보이면, 무라카미의 섬에서 기항할 수도 있었기에, 통행료의 지불이 단지 돈을 뜯긴다는 개념은 넘어선 상태였다.
무라카미들은 통행료만 지불하면, 탐라나 구주에서 따로 방해를 요구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왜국의 세력에도 동일하게 대응하였으니, 세토 내해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안전한 항행이 가능한 곳이 되었다.
그런 요인들은 자연 데카이를 전쟁 전보다 더욱 번창하게 만들게 되었으니, 데카이의 모습, 특히 유흥가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이에게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시 데카이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으며, 어색했던 사이를 떨치자, 문득 사토왕이 석삼을 향해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하면 탐라국공과 같은 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
“행재청에서 머문 몇 달 동안 많은 이들로부터 탐라공에 대해 자랑하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고려의 어느 고을에 사는 일개 도령이었을 뿐이고, 탐라에 온 지도 이제 일곱 해째에 불과하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탐라공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불과 5, 6년 만에 나라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토왕이 하는 탐라공에 대한 칭찬을 들은 석삼은 실소를 머금기는 했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10년 전에 지금의 탐라공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건 누구보다 석삼이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나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구의 왕으로, 비록 안지(유구 호족)들의 호응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분명 왕이었으니까.”
“방해꾼이 크고 강하면, 가진 게 많다 하더라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겠죠. 물론, 이 말이 탐라공께서 이겨 내신 고난보다 더 힘들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렇지요. 해서 하는 말인데…….”
사토왕이 말을 늘이며 석삼의 눈치를 살피곤 말을 이었다.
“나는 탐라에서 몇 달을 보내는 동안 유구를 탐라처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내 사정이 열악하다고는 하나, 적어도 오래전 탐라공이 처한 사정보다는 나으면 나았지 부족하진 않을 겁니다. 하면, 나 또한 의지와 열정으로 힘껏 노력하면 유구를 탐라처럼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석삼은 언뜻 무어라 답할 수 없었다. 주군이 단지 의지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서고, 지금의 탐라를 만든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토왕도 석삼의 얼굴에 스치는 미묘함을 느꼈는지 얼른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쉬운 일이 아님은 알고 있습니다. 탐라 백성들이 누리는 풍족함은 단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낚아 얻은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나, 유구도 찾아보면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주군께서라면 뭐라도 생각해 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석삼의 대답에 사토왕은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정으로 탐라를 부러워하고 있었고, 유구를 탐라처럼 바꾸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처음 탐라에 왔을 때는 두려움과 황당함으로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얼마의 시간이 흘러, 자신이 탐라에서 죽을 리도 없고, 유구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깨달은 뒤부터는, 탐라의 모습이 눈에 분명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장 쉽게 비교할 수 있는 의식주와 관련된 것부터 눈에 들어왔지만, 이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탐라의 산업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저 그런 산업이 가능한 탐라의 행운에 대한 부러움이었지만, 역관과 행재청의 관리들, 그리고 주변에서 만날 수 있었던 대촌현 백성들의 입을 통해 탐라도 그런 산업을 가지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이 모두가 탐라공이 탐라에 와서 이뤄 낸 것으로, 고작 몇 년의 짧은 시간 안에 탐라를 바꿔 냈다는 것이 과장도 거짓도 아님을 안 뒤에는 사토왕은 자신의 무능에 한탄해야 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왕권을 갖추기 위해 안리들 사이의 반목이나 이용하려고 애썼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다만, 그에 좌절만 하는 것은 더 초라해질 뿐이라 여겨, 어떻게든 탐라를 배우고자 하였으니, 유구로 보내 주겠다는 전갈을 받고도 거부하였다.
대신, 고려말을 배우고자 하였고, 문자와 수를 익혔으며, 탐라의 학교에서 쓰는 책을 빌려 읽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 대촌현에 근방 있는 석회 공소에서 일하기를 자청하기도 했었다.
하나, 그럼에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으니, 아무리 탐라의 산업을 익힌다고 해도, 유구에서 그대로 답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산업을 일으켜야 유구가 풍족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유구의 자원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상업성에 관한 고민이었다.
탐라의 물산은 탐라에서도 쓰이지만, 대부분은 명국과 고려, 그리고 왜국에까지 전해져 팔렸으니, 그것을 통해 탐라는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한데 유구에서 무엇으로 그와 같은 교역의 이익을 누릴 수 있을지 그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석삼은 사토왕의 하소연 같은 말을 들으면서, 사토왕이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음을 느끼곤, 그도 조금 더 진지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건 인정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입지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남양 전권특명대사로서 유구섬을 기점으로 한 남양의 가치는 곧 그의 입지와도 유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양 진출에 대한 주군의 의지는 분명하기에 그것만으로도 남양 대사는 중한 자리임에 틀림없지만, 모든 것이 탐라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보다 남양만의 힘으로도 이뤄지는 무언가가 있어야 그 가치가 더 높아질 건 분명하지 않은가.
언젠가 주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그와 같은 방향을 가진 것이었다.
9.5//“남양(南洋)은 정말 큰 곳이다. 명나라보다도 크고, 그곳에 사는 사람의 수도 명나라에 못지않다. 그런 큰 곳을 탐라가 오롯이 다스리려 함은 굉장한 무리수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탐라의 남양 진출을 정복이라 여기되, 순수한 정복과는 다른 궤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 다른 궤란, 구주의 데카이나 유구의 나하 같은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
석삼은 그 이야기를 듣고, 주군이 사방으로 진출하려 하심에 어떤 방책으로 임하시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구주의 데카이는 일개 고을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은 구주 전체를 대표한다고 과언이 아니다.
유구섬 나하의 경우에는 아직 데카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하 또한 단지 포구 고을만의 정체성을 넘어 유구섬 전체에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지금 북방에서 녹둔도가 가지는 의미까지 생각하면, 그것을 지키고 녹둔도를 통해 북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주군의 노력을 생각하면, 장차 남양에서도 탐라가 어떤 방식으로 진출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거점의 건설과 발전을 통한 배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확대.
배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어떤 식으로 행사될지, 또 그 확대가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될지는 알 수 없고, 주군의 의도도 거기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 작게는 교역의 주요 상대로서의 역할로 그치는 곳도 있을 것이고, 크게는 탐라의 영토이자 고려의 영토로까지 동화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단기간에 가늠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어떤 추측을 하든 아직은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하나, 석삼은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으니, 크게 보아 ‘고려화’된 남양이든, 작게나마 교역지에 그치는 남양이든, 어느 것이든 거점뿐만 아니라 그 배후 지역의 발전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데카이가 빠르게 발전하고 융성하는 것은 가까이는 구주가 있고, 멀리는 왜국 전역을 상대할 수 있기에, 즉 왜국이 가진 상업적 능력을 이용할 수 있기에 그런 것임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찬가지로 나하 또한 가까이는 슈리와 중산국을, 멀리는 유구 전체와 그 주변 도서 지역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 때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유구 지역의 상업성이 증가될수록 나하 또한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토왕이 중산국과 유구의 발전을 고민하는 건, 탐라의 관리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돕고 함께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석삼은 다른 생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임을 깨닫고 사토왕과 더 논의를 이었다.
하나, 쉽게 무엇이 답이다 정할 수는 없었다.
“너무 초조해하실 건 없습니다. 일단 돌아가 중산국과 남산국 나아가 유구섬 전체의 상황을 확인한 후, 차근히 돌아보며 산업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맞는 말씀이시오.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유구에서 산업의 씨앗이 발화하는 것을 보고 싶구려.”
석삼은 미소 띤 얼굴로 사토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자신과 만나는 것조차 품위에 떨어진다며 거부하며 신하가 대신 대화를 했던 것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진 모습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석삼이 조금 더 진심으로 유구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사실, 석삼은 유구섬이 따로 생산업을 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흥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탐라의 남양 진출은 계속될 것이고, 적어도 이주섬(대만섬)만큼은 이미 시야에 두고 있는 만큼, 유구섬은 그 진출로의 중요 거점으로서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하나, 사토왕이 바라는 것은 그 수준을 넘는 것임을 알기에 굳이 그것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탐라보다 크고 많은 인구를 가진 유구섬을 그저 경유지로만 쓰기에는 아까우니, 주군께서도 달리 생각이 있으실 것이리라.
* * *
일주문 현판에 새긴 흥국사(興國寺)라는 글귀는 꽤 낡아 보였으니, 고려의 역사와 같은 세월을 보낸 탓이었다.
태조께서 나라를 일으킨 후 10개의 사원을 지었으니, 한양부에 속한 흥국사도 그중 한 곳이었다.
그 흥국사에 달린 여러 암자 중에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의 여승들은 보통 흥국사 본처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산중에서 불학(佛學)하며 속세의 연을 끊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었다.
때문에 어느 비구니가 흥국사 주지승을 찾은 것은 꽤 눈에 띠는 일이었다.
물론, 그 비구니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오히려 모르는 척했겠지만.
“결심이 서셨습니까.”
“네.”
주지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자마자 들린 질문에 여승은 지체 없이 답하였으니, 그 목소리는 젊은 여인의 것이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기운을 느낀 주지승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내려가실 참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님은 아실 터…….”
“애초에 제가 이곳에 어울리는 이가 아님은 주지 스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모르는 자가 들으면, 꽤 당돌한 대꾸라고 혀를 찼겠지만, 주지승은 그저 웃음만 더 짙게 보일 뿐이었다.
“나무아비타불, 부처께서 뜻하신 바가 계실 테지요. 빈승은 그저 중생의 행운을 기원할 따름입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것으로 주지승과 비구니의 만남은 끝이었다.
다른 경우보다 빠르게 승적을 파계하고 흥국사를 나서는 비구니의 모습은 아직 여승의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자세와 표정은 이미 여승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흥국사를 벗어나 산길을 내려가다 문득 길에서 비켜 곁에 흐르는 냇가로 향했다.
냇가에 쭈그려 앉은 채 흐르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던 여승은 승모를 천천히 벗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울퉁불퉁한 물결 위에 비치니, 여승은 문득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훗, 기르려면 한참 걸리겠구나.”
냇가에 손을 담가 뜬 물로 얼굴을 몇 번 씻은 그녀는 다시 승모를 주섬주섬 쓰고는 길 위에 올랐다.
그쯤에는 발걸음마저도 발랄해져, 차림새만 아니면 여승이라기보다는 여염집 여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 길을 더 내려가니, 몇몇의 군병들이 가마 한 채와 더불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승이 그것을 보고 더욱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니, 그 군병들 중 군관 차림인 자가 그녀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그러네. 내가 왕시라일세.”
물음이 들리기도 전에 여승, 아니 왕시라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니, 군관이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뫼시러 왔습니다. 가마에 오르시지요.”
“알겠네.”
기다렸다는 듯이 왕시라는 가마에 올라탔다.
“후우, 이제야 속이 좀 편하네.”
평생을 절 안에서 썩을까 걱정했던 것이 사라지는 순간에 그녀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녀도 어째서 자신을 절 구석으로 치워 버리려 했던 종친들이 생각을 바꾼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왜국의 국주라…….’
생각도 못한 혼처였지만, 왕시라의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성미에서 비구니로 죽는 건 처녀 귀신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 *
탐라군의 머리와 꼬리는 고정이었다. 다만, 나하추의 머리는 수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하추군을 서서히 좀먹게 만들었다.
아무리 군을 기기묘묘하게 운영하고자 해도, 어느 쪽도 깨부수지 못한다면, 그저 군력만 더욱 소모할 뿐이었다.
사실 나하추군은 보다 유리한 국면을 만들 수도 있었다. 만약 산중의 탐라군이 더는 개복포를 쏘지 못함을 알아챘더라면 말이다.
하나, 폭죽의 폭음이 산중에 울리는 것을 개복포로 착각하기도 하고, 산중의 탐라군이 개복포를 쏘지 못할 무렵, 몽주의 탐라군이 쫓아와 개복포를 쏘아 대는 바람에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여, 나하추군은 딱히 탐라군이 의도하지 않은 양동(陽動)에 스스로 고스란히 걸려들었으니, 산중의 탐라군을 잡기 위해 복잡한 산 안으로 2만의 군력을 들이민 것이 최대의 실책이었다.
당대의 혼란한 전장에서라면 다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명을 전하기 어려운 지리적 환경까지 더해진다면 사실상 지휘부에서 예하 군병들을 지휘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산 중으로 들어간 나하추군은 사실상 나하추의 지휘와는 무관한 전력이 되어 버렸고, 나하추군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일시적인 전력의 우위를 이용한 각개격파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니, 각개격파가 불가능한 것을 넘어, 개복포의 포격을 이용하여 야금야금 침입해 들어오는 탐라공의 공격에 피해를 입으며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는 꼴이 되었다.
나하추군의 지휘부에서는 차라리 뒤로 크게 물러나 탐라공의 군병을 비라카의 넓은 평야 지대까지 끌어들인 후, 기마로 일시에 역전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럴 경우 탐라공의 군병이 산중의 탐라군과 합류할 길목을 허락하게 되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산중으로 들어간 나하추의 군병들은 전멸을 면치 못한다는 주장에 의해 기각되었다.
그렇게 물러나지 않고 버티려니 적의 화포 공격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고, 물러서려니 수만의 군병들이 몰락할 게 뻔했으니, 나하추 군세는 진퇴양난이고, 지휘부는 자중지란이었다.
쿠구쿵!
폭음이 연달아 들리는 사이, 군중의 어느 군막 안에 나하추를 중심으로 제부족장들이 모여 있었다.
“더는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이만 물러나야 합니다.”
한 부족장의 주장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부족장들도 동의를 표하였다.
“맞습니다. 여기서 계속 적의 화포에 당하고 있는 건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때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결단을 내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당장 물러납시다.”
“이대로라면 패배는 당연하거니와 초원을 지킬 힘조차 모조리 잃을 수 있습니다.”
연달아 퇴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촛불의 빛이 흔들리던 나하추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쿵!
그러다 호상에 앉은 채 크게 발을 구르며 벌떡 몸을 일으키곤 주변 제부족장들을 둘러보며 일갈하였다.
“어찌 부족장이라는 자들이 전사들을 함부로 버리려 하는 것인가! 그래 놓고 부족을 이끄는 자들이라 자부할 수 있겠나!”
하나, 나하추의 훈계 어린 일갈은 곧바로 반론에 부딪쳤다. 아니, 반론이라기보다는 비꼼에 가까웠다.
“요동 몽골족을 이끄는 분이 휘하 제부족의 전사들을 파리 목숨처럼 전선에 밀어 넣으셨던 건 잊으신 모양이외다.”
“……!”
“내 말이 틀렸소이까?”
힐난 어린 반론을 제기한 자는 파얀으로, 몽골 동방 삼왕가 중 옷치긴 왕가의 핏줄을 이은 자였다.
당대 옷치긴 왕가를 이끄는 아자스리와는 사촌지간이나 사이가 좋지 못하여, 나하추가 세력을 키우던 시기에 일족을 이끌고 나하추에 합류했었다.
파얀의 부족은 나하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집단으로 2만의 전사를 가진 대부족이었으니, 그가 합류함으로써 나하추는 강대한 세력으로 한층 발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요동 몽골 세력 내 커다란 경쟁자가 생긴 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 파얀이 나서 몽골 제부족장의 항의를 대표하는 것은 나하추에게 굉장한 위협이었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적전하여 분열을 일으키려는 겐가? 초원을 망치려는 게야?!”
“초원을 망치는 건 우리가 아니라, 태위 그대요! 애초에 그대가 고집을 부려 산골짜기를 전장으로 삼은 것부터가 파국의 시작이었고, 그대의 정예를 아끼기 위해 뒤로 물려 놓은 채, 다른 부족의 전사들을 허무하게 소모한 일은 파국의 절정이었소! 만약 여기서 이미 생사를 구분할 수 없게 된 그대의 전사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파국을 넘어 멸망으로 치닫게 될 것이오!”
“네 이놈!”
나하추가 격분하여 칼을 뽑아 들자, 파얀 또한 기세를 끌어올리며 발검하였고, 주변의 다른 부족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군막 안은 삽시간에 양쪽으로 나뉜 채 서로를 향해 적의를 뿜게 되었다.
하나, 이미 승패는 갈린 셈이었다.
군막 안만 살피면, 나하추의 호위 전사들이 상당수 있어 수적으로 비슷하였으나, 군막 바깥은 이미 나하추보다 다른 제부족의 전사들이 월등했다.
애초에 훈춘으로 향한 나하추의 원정 군세인 약 15만 중 10만 정도가 제부족의 전사이고, 5만여가 나하추 직할의 전사였다.
장춘에 남은 몽골 전사들 중 다수가 나하추의 전사들이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원정군 내에서 단독으로 5만을 지휘할 수 있는 나하추의 입김은 충분히 통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제부족장들에게 그들 전사들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탐라공과 산길에서 싸우며 제부족 전사들 3만 가까이를 상실하였지만, 황당하게도 뒤에서 편하게 있던 나하추의 정예 전사들 중 절반이 탐라군 별동대에 급습당하여 죽거나 다쳐 버렸고, 살아남은 나하추의 전사들 중 1만이 넘는 자들이 복수에 불타 산중으로 쳐들어갔으니, 지금 나하추가 온전히 지휘할 수 있는 전사의 수는 1만에 불과했다.
나하추와 다른 제부족장들이 모두 3, 4만의 전사들을 잃은 셈이었지만, 그 비율은 크게 달라져 이제 제부족장의 전사들이 나하추의 전사들보다 5배가량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장춘에 남은 전사들까지 더해도 이제는 오히려 다른 몽골 제부족의 전사들이 더 많았으니, 나하추의 지배력이 약화된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세력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그 군막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으니, 먼저 칼을 뽑아 든 건 나하추였지만, 기세가 등등한 건 제부족장들 측이었다.
“정 그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그대는 이곳에 남으시오. 우리는 물러나겠소.”
칼끝이 서로 겨누는 중에 파얀이 말을 하니, 나하추의 이맛살이 한층 더 구겨졌다.
“여기서 돌아간다 한들, 초원을 지킬 수 있겠는가. 요성의 명군과 요동군이 언제고 다시 쳐들어올 것이고, 이곳의 탐라군 또한 너희의 목 아래 칼을 들이밀 것이거늘, 진정 너희들만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이다!”
“하! 그럼 여기에 남는다고 상황이 달라지겠소?”
나하추의 위협에도 파얀이 가볍게 일소하자, 제부족장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정말 나하추만을 남기고 돌아갈 참이었다.
나하추의 뺨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그는 분노에 가득 찼지만, 대세를 바꿀 힘은 없었다.
한데, 그 엄엄한 분위기 속에 군막의 입구가 조심스레 열리더니, 한 전사가 감히 끼어들어 송구하다는 양 말하였다.
“탐라의 왕이 교섭을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
그러고 보니, 폭음이 멎어 있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누구도 전령이 온 것에 대해 명을 내리려 하지 않자, 전사가 다시 물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 * *
“저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교섭이야 받겠지. 내 요구를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교섭에 응하면, 주군의 요구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저들이 곤궁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니까요.”
“음, 그렇겠지.”
몽주는 피곤한 안색으로 교섭 자체에 대한 걱정은 애써 털어 내었다.
사실 나하추 쪽이 곤궁한 만큼, 탐라군 또한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그건 전투로 인한 피로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투 자원의 문제였다.
포탄 재고량이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만 이틀을 꽉 채워 싸우고 있었으니, 포탄이 떨어질 때도 되었다. 녹둔도에 재고가 남아 있기야 하겠지만, 그곳에서 다시 가져오는 건 시간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교섭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었다. 포탄의 재고가 떨어졌음을 저들이 눈치챈다면, 지금의 공세적인 전황은 순식간에 뒤집힐 것이고,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에서 패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한데, 허르빈은 굳이 요구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곳은 허허벌판으로 지키기가 힘든 곳입니다.”
“일단은 뻥…… 과욕을 부려 보았네. 교섭하면서 한발 물러날 경우도 대비해야 하니까.”
“아…….”
몽주는 허르빈을 요구한 것을 ‘뻥카’라 얼버무렸지만, 사실 당연히 진심이었다.
허르빈은 훗날 하얼빈(哈爾濱)의 어원이 되는 지명으로, 도시 하얼빈과 달리 당대에는 ‘만주’의 북동쪽 소흥안령 산맥의 남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허르빈 지역에 훗날 다칭(大慶)시가 위치한 곳도 속하니, 그곳은 중국 최대이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유전 지대였다.
몽주가 허르빈에 욕심을 부리려는 건 그 유전 지대를 손에 넣고자 함이었다.
물론, 유전 지대를 얻는다고 해서 곧바로 석유를 얻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다칭 유전’은 지반을 1,500미터 이상 파야 할 정도로 채굴하기 어려운 유전인 터라, 기술적인 노력과 발전이 충분히 진행된 이후에야 유의미한 가치를 지녔다.
하나, 훗날을 위해서라도 얻을 수 있을 때 얻어 두어 야 하지 않을까.
‘뭐, 안 되면 다음 기회에 얻고…….’
이틀간의 격전에 눈꺼풀이 무거운 몽주는 애써 눈을 치켜뜨며 전령이 희소식을 들고 오길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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