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55)
* * *
“이보시오. 나는 아니 되오!”
석삼은 끌려가면서 크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말이 통한다고 저들은 강요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이가 있소. 아이가 있다지 않소?! 응애, 응애! 나는 유부남이란 말이오!”
아기 울음소리까지 내며 항거했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석삼은 힘껏 고개를 돌려, 탐라군병들을 보고 도와 달라 마구 소리쳤다.
하나,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석삼을 외면하고 있었고, 잠깐 시선이 마주치는 자들 역시도 이내 고개를 돌렸다.
“…….”
석삼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심정은 도와주고 싶지만, 도울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공범 의식.
그러니까 석삼 또한 같은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야, 이놈들아! 나를 구하지 않으면, 네놈들이 한 짓을 나중에 다 고하고 말 것이야!”
이미 20미가량 끌려가, 탐라 군병들이 머물고 있는 언덕 위의 집이 보이지 않을 때에 이르러, 석삼은 마지막 발악처럼 고함쳤다.
하나, 누구도 석삼을 구하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길!”
참담한 심정 끝에 몸에 힘이 빠져 더는 저항할 마음도 사라졌다.
양쪽에서 억센 팔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니, 석양이 지는 방향 멀리 ‘여나국’의 왕궁이 보이고 있었다.
석삼이 끌려가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 * *
폭풍의 바다에서 정신을 잃었던 석삼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바다는 잠잠했고,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는 경함선의 아래층 갑판에 누워 있었으니,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살았으니까, 그것도 배에 탄 채로.
하나, 안도도 잠시 몸을 일으키려던 석삼은 옆구리에서 큰 고통을 느껴야 했다.
폭풍 속에서 허리에 묶어 두었던 밧줄은 그의 목숨을 구해 주긴 했지만, 갈비뼈를 상하게 만든 것이다.
석삼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에 선원 몇몇이 달려왔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기함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표류였다.
배가 바다 위에 떠 있긴 하지만, 돛대가 다 부러져 항행이 불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실종된 선원이 절반에 이르고, 무엇보다 다른 배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저 단순히 폭풍 중에 흩어진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기함만 남기고 다른 배들은 침몰한 것일지도 모르니, 절로 태산 같은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석삼이 정신을 차리자, 살아남은 군병들과 더불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논의하고자 하였는데, 사실 논의할 게 별로 없었다.
사방에는 망망대해만이 보일 뿐이었고, 어느 방향에 육지가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물론, 안다고 해서 갈 수도 없었다.
그저 식량과 물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하고, 가능한 오래 견디기 위해 배급량을 정하는 정도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나마 조금 길게 부러진 돛대에 찢어지고 활대가 부러진 예비 돛을 달아보자고 애를 쓰긴 했지만, 실패만을 맛봐야 했다.
그렇게 20여 명의 생존자들은 반파나 다름없는 꼴이 된 경함선 위에서 정처 없이 바다를 표류하기 시작했다.
가끔 수평선 먼 곳에 섬인가 싶은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유인도인지 무인도인지도 알 수 없고,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어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그렇게 5일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남쪽 바다 위에서 해류에 따라 배가 흐르는 대로 있으니, 석삼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신체적, 정신적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실의에 빠진 어느 군병이 폭주하여 얼마 남지도 않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만류하는 다른 군병과 치고받고 싸우는 일도 벌어졌다.
얼마 후엔 나무 파편에 어깨와 가슴이 찔린 큰 부상을 입은 군병이 기어이 숨을 놓자, 비관적인 분위기가 배 위에 가득했다.
6일째, 마지막까지 실의에 잠기지 않았던 한 군병이 배가 보인다는 소리를 쳤다.
북쪽 먼 곳에 고기잡이배로 보이는 작은 배가 보였던 것이었다.
석삼과 선원들은 힘껏 고함을 치고, 옷가지를 마구 흔들면서 구조 요청을 하였는데, 그 어선은 잠시 후 더 북쪽으로 사라졌다.
다시 실망감에 좌절하였는데, 배를 보았다고 알린 선원이 이번에는 섬이 보인다고, 큰 섬이 보인다고 마구 소리쳤다.
그 섬은 어선이 사라진 북쪽에 있었으니, 워낙 시야에 태양의 반사광이 가득한 바람에, 그리고 섬 자체가 낮고 평평하여 수평선에 길게 늘어져 있는 바람에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석삼과 선원들은 다시 희망을 얻었으니, 이제껏 보았던 섬과 달리 꽤 큰 섬이라 사람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앞서 어선이 그쪽으로 사라진 것이 어쩌면 표류하는 배를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러 간 것일 수도 있다는 추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반나절 후에 몇 척의 배들이 그 섬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석삼과 선원들은 고함을 쳐서 구조 요청을 하고, 그 배들이 경함선을 향해 다가오는 게 분명함을 확인하고는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다.
6일간의 표류.
물도 다 떨어져 이제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던 날에 구조를 받은 것이었다.
섬주민인 어부들로부터 신선한 물을 받아 마시고,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들을 위로해 주는 듯한 말투와 표정 보내니, 석삼은 살아남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경함선이 구조해 준 배들에 밧줄로 연결되어 섬으로 들어갔을 때, 이방인들을 구경하려는 섬사람들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관리나 호족쯤으로 보이는 자가 주도하여 쉴 집과 의식주를 제공해 주니, 세상에 이런 착한 사람들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석삼과 선원들은 마음 편히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회복되자, 석삼과 선원들은 정보를 구하고자 하였다. 장차 어찌해야 할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이 섬에 대한 정보부터 구해야 했다.
일단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고려말은 물론이고, 들리는 느낌은 비슷했지만, 왜어와도 삭제 달랐다.
간간이 거처를 방문하는 섬사람들로부터 손짓발짓으로 정보를 구하다가, 탐라인들에게 집을 내준 호족이 다시 방문하였을 때, 한자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섬의 이름을 물으니, 여나국(与那國)이라는 답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의문이 해결되었으니, 탐라공의 지도에 여나국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유구에서도 요나구니(与那國)라는 이름으로 그 존재를 들은 바가 있었던 섬이기 때문이었다.
여나국은 유구에서 이주(대만)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들 중 가장 이주섬 쪽에 가까운 유인도였다.
더 가까운 무인도나 암초도 있긴 하지만, 사람이 사는 섬 중에는 가장 이주에 가까운 섬이었다.
석삼은 기억에 남은 지도를 떠올리며 얼마나 표류했는 지를 따져 보니, 직선거리로도 대략 250길미나 표류한 것이었다.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석삼의 배는 폭풍에 휩쓸려 서쪽으로 300길미나 떠내려갔다가 태평양을 시계방향으로 도는 해류에서 비롯된, 황해까지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 덕에 여나국의 남쪽 바다로 떠밀려 온 것이었으니, 실제 표류한 거리는 500길미 이상이었다.
어쨌든 여나국임을 알게 되자, 안도와 안타까움이 교차하였으니, 돌아갈 방향이 어느 쪽인지는 알지만, 쉽게 돌아가기 어려운 곳임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함인 경함선이 여나국 포구에 정박해 있긴 하지만, 반파된 상태였고, 눈에 보이는 여나국의 수준으로 추측해 볼 때, 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시일 안에는 불가능할 듯했다.
게다가 그 먼거리를 항해할 만큼 제대로 수리가 될지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어떻게든 탐라로 돌아가자고 다들 의기투합하였는데, 그날 저녁 때 문득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나국 군병 수십 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을 몰고 온 건 석삼들을 돌봐준 그 관리이자, 호족이었으니, 석삼이 무슨 일로 온 것인지를 글로 묻기도 전에 병사들이 선원들 중 일부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석삼과 다른 선원들이 놀라서 잡혀가는 선원들을 구하려 했지만, 수적으로 밀리는 데다가 남아 있는 선원들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라 구할 수 없었다.
즉, 탐라인들 중에서 신체건강한 자들만 골라서 데려간 것이었다.
그렇게 잡혀간 선원들은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어도 좀처럼 답을 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그날 저녁에 이르러 또 여나국의 군병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자, 그제야 잡혀갔던 자들이 그 이유를 밝혔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가서 한 일은 여나국의 여인과 동침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석삼과 함께 살아남은 선원들은 모두 유부남이었다.
원양 항해에 나선 만큼 숙련된 군병들이 동원되었고, 그만큼 나이가 있어 모두 기혼자였던 것이다. 또, 나이가 적은 이들도 근자에 탐라에서 혼인 열풍(?)이 불었기에 모두들 아내가 있었다.
그 고백을 들은 석삼은 혀를 차며, 아무리 동침을 강요받았다 하더라도, 목에 칼을 들이민 게 아니라면, 사내로서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지 않느냐 훈계하였다.
그에 잡혀갔던 자들은 이상한 향을 맡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합방한 상태였다고 변명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비겁한 변명이라 여겼다.
그날 저녁에 또 군병들이 탐라인들을 잡아갔고, 어제는 남겨 둔 이들 중에서도 살펴 건강이 좋아진 자를 추가로 몇 명 더 데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이 다시 돌아왔는데, 역시나 동침을 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모두가 그 이상한 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니, 석삼도 슬슬 걱정이 되었다.
사내라면 여인을 마다치 않는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석삼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점녀가 아닌 다른 여인과 동침한 게 알려진다면, 석삼은 죽은 목숨이었다.
아직도 주군이 점녀와의 혼인을 두고 그에게 경고한 말이 선명했으니, 지금까지 쌓은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인생이 패망할 수도 있었다.
사실 걱정해야 할 사람이 비단 석삼뿐인 건만은 아니었다.
탐라섬에서 여인의 지위와 가정 내 아내의 위세는 고려 본토에 비해서도 높았으니, 혼인하지 않은 사내가 여러 여인과 번갈아 어울리는 건 상관치 않으면서도 혼인했거나, 연모하는 여인을 둔 사내가 다른 여인과 사통하였다면, 그 순간 인생이 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석삼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도 모두 군병의 신분으로서 장차 장교로 승급하길 바랐는데, 만약 다른 여인과 사통한 것이 알려진다면, 그 바람은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때문에 본의 아니더라도 남자의 본능을 충족시킨 것에 흡족해하는 자는 전혀 없이, 오히려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였으니, 아내에 대한 성실함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더해, 장차 탐라에서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여, 동침을 강요당한 자들끼리 서로 발설하지 말자 다짐하기도 하고, 석삼에게 다가와 모르는 척해 달라 부탁하기도 했다.
석삼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그런 부탁에 응했다.
그 또한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석삼과 아직 끌려가지 않은 탐라 사내들은 계속 아픈 양 연기하였는데, 정말로 아픈 자들은 더욱 아픈 척하고, 석삼처럼 거의 다 나은 자들도 끙끙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나, 그 ‘채홍사(採紅使)’ 관리는 어찌 아는 것인지, 귀신같이 건강을 회복한 자들을 골라내 데려갔으니, 기어이 석삼의 차례도 오고야 말았다.
한데, 석삼은 같이 끌려간 군병들과 떨어져 홀로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수상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묻는다고 알아들을 수도 없기에 그저 정신만 똑바로 차린 채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날 기회를 노렸는데, 뜻밖에도 여나국 군병들이 그를 데려간 곳은 작은 욕탕이었다.
“나더러 씻으라는 거요? 어?! 아니, 이거 왜 이러시오?! 아니 되오! 어허!”
그들은 석삼이 알아서 씻는 걸 기다리지 않았다. 곧바로 억센 손들이 다가와 석삼을 홀딱 벗기고, 욕통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곤 탁한 색의 물을 연신 뿌리면서, 뭔지 모를 풀잎으로 석삼의 몸을 마구 훑어 대었다.
석삼은 사내들의 손에 농락(?)당하는 것이 원통하여 처음에는 크게 반항했지만, 어느 순간 이상하게 노곤한 느낌과 함께 몸에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강제로 목욕을 당한 석삼은 다시 사내들에 의해 여나국의 옷을 입어야 했고, 어느 방에 가둬졌다.
처지가 기가 막힌 것도 잠시, 석삼은 이내 쏟아지는 졸음에 잠이 들었는데, 다시 깼을 땐 이미 밤이었다.
방 안에는 어느새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불빛 사이로 희미한 기운이 스치는 게 석삼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그 뭔지 모를 향내인가?!’
시야 들어오는 희미한 연기와 코로 느끼지는 향내에 석삼은 숨을 잠시 멈췄지만, 이내 포기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미 한참을 맡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이 말해 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지도 않았으니, 그저 절간에서 맡던 향내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갇힌 방에서 서성거리며, 혹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자, 어느 순간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역시나 또 그를 잡아 온 사내들이었고, 또 여지없이 양쪽 팔이 잡혀 끌려가야 했다.
놀라긴 했지만, 석삼도 더 이상 버둥대지 않았다.
‘정신만 차리면 된다!’
석삼은 사내와 여인 사이에 다른 것이 많고 많지만, 남녀상열지사의 문제에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으니, 여인은 강제로 당할 수 있으나, 사내는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니, 스스로 마음을 굳건히 다지고 유혹을 떨쳐 내기만 한다면, 저들이라고 해서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석삼이 그렇게 맘을 다지는 동안, 조촐한 그 왕성 중 그나마 화려한 문 앞에 닿았으니, 문이 열리는 순간, 그곳이 침실임을 알 수 있었다.
사내들은 석삼을 침실의 중앙에 놓인 침상 위에 밀어 앉히고는 그 방구석마다 자리를 잡았다.
설마하니, 저들이 이 밤 끝까지 저 자리에 있는 건가 싶어 어이없어 하는데, 문득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헉! 저, 저 여인이 나를 ……?!’
석삼은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곤 기겁하였다.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이미 황혼의 나이에 접어든 노파였기 때문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석삼은 몸을 웅크리며 점점 다가오는 여인 아니, 노파 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실 강제로 이곳의 여인들과 동침하게 하는 이유를 탐라인들끼리 따져 봤는데, 아무래도 이 섬이 몹시 폐쇄적인 곳인 터라, 타지 사내의 씨를 받아들이는 것을 중히 여긴 탓이 아니냐는 결론이 내려졌다.
석삼도 오랑캐들 중에서 그런 풍습을 가진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그것이 맞다 싶었는데, 정작 침실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아무리 봐도 가임기를 넘어선 지 오래된 듯한 할머니였으니,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하여, 석삼은 더 몹쓸 짓을 당하기 전에 다시 탈출하고자 눈알을 이리저리 옮기는데, 문득 노파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건 마치 육점에서 고기를 받아 들고는 싱싱한지를 따지는 것 같은 눈빛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느낀 석삼은 자신이 싱싱한 사내가 아님을 피력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 순간 노파가 무어라 말하였다.
물론, 석삼이 알아듣지 못하자, 노파는 문 쪽을 향해 무어라 다시 말하였고, 곧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네가 너희 무리의 수장인가.
그 질문을 시작으로 필담이 진행되니, 석삼은 마지막 기회라 여겨 열심히 응하였다.
-그렇소. 노파는 누구시오?
-나는 여나국의 왕 이소바.
그러니까 여나국의 여왕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석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으니, 유구에서 여나국의 이름을 들었을 때, 여나국이 여왕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말도 함께 들은 기억이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노파가 한 차림은 여나국에서 본 다른 여인들보다 화려했다.
석삼은 다시 붓을 들어 적었다.
-어찌하여 우리를 함부로 간음하는 것이오?
-사내라면 응당 좋아하는 것. 우리는 너희 사내의 씨가 필요하다.
-아니오. 아무리 사내라지만 이럴 순 없소. 게다가 자칫 회임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오?
-애초에 목적이 회임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석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자신의 아이가 엉뚱한 곳에서 태어날 수도 있는데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 그에 대해 더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는 없었기에, 석삼은 당장 가장 급박한 문제를 물었다.
-혹시 왕이 나를 간음하려 하오?
대답은 글로 오지 않았다. 그저 여왕이 피식 웃을 뿐이었고, 그녀는 종이와 붓을 회수하게 명한 후,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누군가에게 들어오라 손짓하니, 또 다른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번에는 젊다 못해 어린 여인이었다. 다행히도.
‘아니, 다행히가 아니라…… 헉!’
석삼은 다음 순간 경악하였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어린 여인이 몇 걸음 다가오더니, 촛불이 비치는 중에 겉에 입고 있던 얇은 옷을 벗어 버린 탓이었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풍만한 몸매를 한 여인이 부끄러움도 없이, 보는 눈도 적지 않은 곳에서 훌러덩 벗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진실로 놀란 건 다른 이유에 있었다.
그 낯선 여인의 나체를 보는 순간, 마치 온몸의 피가 하체 어딘가로 몰려가는 듯한 느낌 때문에 더 크게 놀란 것이다.
그 무언가가 경직되어 감과 동시에 숨이 턱 막히고, 눈앞에 아찔해지니, 이것이 다른 선원들이 말했던 느낌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체의 여인이 침상 곁으로 다가와 석삼을 내려다봄에도 무어라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여인은 잠시 석삼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손을 뻗어 석삼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졌고, 그 손의 감촉이 너무 좋아 절로 헤벌쭉한 표정이 지어졌다.
물론 속으로는 ‘아니 되오!’를 연신 외쳤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석삼의 얼굴을 쓰다듬던 여인의 손이 내려가 석삼의 옷고름을 푸니, 마찬가지로 한 꺼풀의 옷만을 입고 있던 석삼의 속이 드러났다.
그녀의 시선이 석삼의 몸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딘가에 잠시 멈추었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그녀는 크게 숨을 고르더니, 마치 말을 타듯 석삼의 위에 올라탔다.
그녀의 손이 앉은 자신의 둔부 뒤쪽으로 돌아가더니, 무언가를 더듬으며 위치를 확인하였고, 다음 순간 그녀는 몸을 살짝 들었다가 조심스레 다시 내려앉았다.
“후우…….”
여인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석삼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잠시 숨을 고른 여인이 서서히 몸을 움직이니, 석삼을 몰아치는 희열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나,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저 몇 번의 자극이 있었을 뿐인데, 석삼은 자신의 모든 기운이 한곳으로 쏠려 나가려는 느낌을 받았다.
“아아……!”
‘이, 이럴 수가! 미안하오, 부인!’
아내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더불어, 너무 이른 결말로 인한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걸 느끼며 석삼은 자신의 정열이 한꺼번에 새어 나가는 걸 탄식했다.
석삼의 위에 걸터앉았던 어린 여인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 직후였다.
그제야 석삼이 진실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지금 그가 당한 것은 상열지사도, 간음도 아니고, 그저 교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만, 그래도 치러야 할 것을 치렀다는 묘한 안도감도 동시에 느꼈다.
한데…….
“……!”
또 다른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다가와 몸을 벗으며 석삼의 곁으로 오니, 석삼은 그녀의 생김새가 앞선 여인과 몹시 닮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매이거나 친척임에 틀림없었다.
‘설마…….’
설마는 설마가 아니었다.
그날 석삼은 세 번이나 더 점녀를 향해 마음으로 사죄해야 했다.
* * *
석삼이 거처로 돌아온 건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이었다.
해쓱한 몰골로 돌아온 그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그 암울한 기운에 다른 군병들도 가까이 가거나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러다 잠이 들었고, 다시 오시가 지나 눈을 뜨니, 그는 곧바로 모든 군병들을 불러 모았다.
“탐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모든 일은 죽을 때까지 함구한다.”
“…….”
“몇 번을 끌려갔는지와 무관하게, 한 번도 끌려갔다 오지 않은 자도 포함해서,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입죠.”
“만약 허투루 입을 놀리는 자가 있다면……!”
번뜩!
석삼의 눈빛이 살의를 발하자, 다른 유경험자의 눈빛들도 연달아 번쩍거렸다.
그리고 그 사나운 눈빛의 행렬은 무경험자이자, 예비 경험자들에게로 향했으니, 그들은 그 거센 눈빛에 기가 눌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 명가량의 사내들이 진실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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