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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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술에 취한 이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느적거리는 몸짓에 발음 꼬인 목소리로 아무 소리 나 해도, 다들 웃고 즐거워하였다.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니까.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스위트룸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그림과 같았다. 넓게 트인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홍콩 섬은 그만한 크기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 펼쳐진 검은 바다가 인상파 화가인 양 물상보다 빛으로 화폭을 채우고 있었다.
오늘 몽주에게 140억 원이 생겼다.
북송대의 황동 여래불상과 수나라 청동 허수아비들의 낙찰가가 한화로 각각 110억과 240억 도합 350억 원 정도였다.
크리스티 홍콩 및 한양 옥션 측과 나누고, 장차 나갈 세금도 미리 제하고 나니, 140억 원 정도가 남았다.
140억 원.
억 소리 나는 억 원이 140개라는 말이다.
한국의 시중 은행 아무 곳에 아무런 상품 가입도 없이 예금해 두기만 해도 일 년에 약 3억 원 정도는 이자로 붙을 만큼 큰돈이었다.
한 마디로 횡재했다.
“뒷모습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죠?”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술기운에 뺨이 붉어진 방 실장이었다.
아까 경매가 끝나고 크리스티 측에서 준비한 축하연을 즐길 때까지도 취한 기색은 전혀 없었는데, 호텔에서 한양 옥션의 직원들, 그리고 그들의 홍콩 지인들과 함께 몽주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에서 연 룸 파티에서는 제법 홀짝거린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편한 옷차림에 화장도 지운 방 실장은 평소의 스마트한 이미지 대신 좀 친근한 느낌이었다.
“쓸쓸하기보단 씁쓸하네요.”
“무슨 차이?”
몽주가 기대고 있는 테라스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홍콩의 야경 쪽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어떤 사내 녀석이 크게 결심을 하고 도전하던 일이 있었어요. 아주 힘든 일이죠. 물론 해내면 꽤 보람된 일이기도 해요. 한데, 그 사내 녀석에게 큰돈이 생겼어요. 굳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 일을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심이 찔리는 기분이에요. 이런 기분, 충분히 씁쓸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죠.”
“그 일이라는 게 그 사내만을 위한 게 아닌 모양이네요?”
마치 뭘 알고 있는 듯, 꽤 정확한 그녀의 추측이었다.
“이제는 뭐든 쉽게 생각하세요.”
“쉽게요?”
“그래도 되잖아요. 몽주 씨,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본주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고 분석도 각양각색이지만, 전 결과적으로 세상만사 중 대부분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보거든요. 돈만 있다면 아주 괜찮은 세상이죠. 꼭 나쁜 일을 돈으로 무마하는 것 같은 경우만 따지지 말고, 착한 일도 돈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먼저 생각해요. 하려던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몽주 씨가 도전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제는 더 쉽게, 돈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봐요. 안 그래요?”
“…….”
일반적인 경우라면 대단히 유효한 조언이자 위로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몽주의 경우는 좀 아니었다. 그가 하려는 일은 역사를 바꾸는 것.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엄청난 일이었다.
140억 원은 무척 큰돈이지만, 그 파급력과 비교할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도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이나,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로 인해 바뀌는 역사 속에서 본래보다 더 행복해지는 사람과 불행해지는 사람의 합은 아마도 제로섬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순수하게 행복의 크기를 늘릴 수 있는 건 140억 원 쪽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 별로 동감하지 않는 기색이네요?”
“의도에는 감사드립니다.”
“피이.”
야유하듯 소리를 낸 방 실장은 홍콩 섬을 내려다보던 몸을 반쯤 돌려 그를 향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아뇨.”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은 있었어요?”
“…….”
“없었죠? 그럴 것 같더라.”
‘꿈속까지 쳐준다면 전 여친이 세 자리 수입니다만.’
“그렇다 치죠.”
“그렇다 치긴…… 난 어때? 너무 늙었나?”
“에?”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방 실장이 몽주보다 나이가 많은 건 분명했다. 진한 화장을 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의 화장기 없는 얼굴은 분명 나이보다 더 동안인 것 같기도 했다.
“늙었다고 할 나이도 아니잖아요. 다만…….”
“연상이 싫어?”
‘그러고 보니 모르는 사이에 말을 놓고 있네.’
몽주는 그녀의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살짝 놀라면서도 차분하게 대꾸했다.
“연상 연하의 문제가 아니라요.”
“내가 돈 보고 덤비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닌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이래 봬도 내가 부자인 남자들을 많이 알거든. 아무래도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세상에 참 돈 많은 인간들 많다 싶을 정도로 부자들을 많이 만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남자들마다 어떻게든 사귀어 보려고 애쓰진 않았어. 물론 가난한 남자는 싫지. 너도 얼마 전까지는 전혀 남자로 보이진 않았거든. 그러다 명품 슈트를 입고 단정하게 꾸민 모습 때문인지 지금은 남자로 보이네. 게다가 단지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고 말이야.”
“…….”
“지금 그 반응을 좋아해야 할까, 싫어해야 할까.”
몽주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자, 방 실장이 중얼거렸다.
“정말 싫으면 싫다고 말할 성격 같은데, 그렇다고 좋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우유부단하게 보일 만했다. 몽주는 그쯤에서 씁쓸한 마음의 부작용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습니다.”
“그래? 아직 모르겠어? 그럼, 간단한 데이트부터 시작…….”
“그래서 미안합니다.”
“……?”
“방 실장님이 정말 좋은 여자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제 여자라는 생각은 지금도, 앞으로도 들 것 같지 않습니다.”
“우아…… 이거 완전 얻어맞았네. 지금까지 당해 본 것 중 가장 단호한 거절이야.”
몽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실장의 표정에는 무안함이 서렸고, 그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애써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뱉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무안함이 미안해서 우유부단하게 넘어가거나, 그녀에게 끌려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녀도 뭐든 쉽게 생각하라고 했으니까.
몽주는 현실의 변화로 인해 잠정적으로 고려의 삶을 포기하기로 솔직하게 결정한 것처럼, 방 실장이 단지 나쁜 여자가 아닌 것 같아서 혹은 솔직한 여자인 것 같아서 끌리는 마음이 없는데도 끌려가는 척하는 걸 솔직하게 거부하기로 한 것이었다.
방 실장의 제의(?)로 진행된 대화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녀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좀 더 테라스에 머물러 있었다.
“이만 들어갈게.”
“네, 먼저 들어가세요.”
돌아서던 그녀가 멈칫하였다.
“나 이제부터 술 진탕 마실 거야. 그리고 내 호텔방 문도 안 잠가 놓을 거야.”
“…….”
“언제든 들어와도 좋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너도 참, 어휴!”
테라스 바닥을 한 발로 쿵 찧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방 실장이 스위트룸 안의 흥겨운 음악과 술에 취한 자들의 수다 속으로 도망쳤다.
다시 홀로 남은 공간 속에서 몽주는 혼자 해야 하는 고민을 천천히 지웠다.
미안하다, 천몽.
네가 준 기회는 고맙다. 덕분에 부자가 되었으니.
하지만 딱 이렇게만 쓰겠다.
오늘을 즐겨야 하고, 내일은 너무 믿을 게 못되는 법이잖아.
네가 던져 준 과거는 나의 내일로 돌아오니, 네가 내게 준 기회를 믿기가 힘들구나.
다시 말하지만 정말 미안하다, 천몽.
9. 고용(雇用)
한국에 귀국한 건 홍콩에서 경매를 마친 후로도 꼬박 한 달이 지나서였다.
곧바로 귀국한 한양 옥션 측에서 한국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한동안 외국에 머물러 있으라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미술품 전문 경매 회사가 홍콩에서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은 곧바로 한국에 전해졌고, 한양 옥션 측에 그 대박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문의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몽주의 신상 정보를 감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어느새 예전 고려 고미술품 경매의 주인과 같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고미술품계에 흘러다니는 고려 청자연적의 주인이었다는 소식도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었으니, 이미 몽주의 신상을 알 만한 자들은 다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안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낸 후에 들어갈 생각이었던 몽주는 외국 체류 시간을 더 늘려야 했다.
꼭 나쁜 건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여기저기 놀러 다닐 시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경매 후 홍콩에서 나흘 정도 더 있었고, 이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일주일 정도 해변과 태양을 즐기다가 유럽으로 건너갔고,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가서 고베 시에 위치한 일본 3대 온천 중 하나라는 곳에서 3일간 쉬다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고생이나 다름없는 일상에서 갑자기 호화스러운 여행의 시간으로 변한 것에 당황하던 부모님들도 금세 적응하여 아들이 가져다준 행운을 즐기셨기에 몽주도 맘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뭘요.”
한양 옥션 측에서 직원이 나와 환영(?)해 주었다. 얼마든지 인연을 정리할 수 있었음에도, 해외에서 몽주가 경호원 고용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자 적극적으로 응해 주었고, 지금 이 직원도 몽주를 대신해 대리 계약한 경호 회사와 주선해 주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경호원은 총 4인으로 둘은 부모님을 위해, 다른 둘은 몽주를 위해 배정될 예정이었다.
몇 분 후, 그들은 렌트한 차량을 통해 공항을 벗어났다.
“집이 썩 괜찮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진이나 영상보다 낫나요?”
“하하, 그건 제가 못 봐서 비교하기가 어렵군요. 하지만, 제가 그 집을 대신 계약하면서 참 부러웠습니다.”
기대치를 너무 높인다 싶었지만, 강남과 성남 사이에 위치한 고급 빌라촌은 기대에 충족했다.
빌라촌 입구의 삼엄한(?) 경비실도 맘에 들었고, 빌라촌의 중심에 위치한 집 주변 풍경도 맘에 들었다.
잔디밭이 펼쳐진 있는 집 앞마당과 옆으로 흐르는 개천, 그리고 한옥 스타일의 2층 집.
모르긴 몰라도 몽주의 부모님 세대들이 바라던 전원주택의 모습이 이럴 것 같았기에 이 집을 선택했던 것이다.
실제로 부모님은 그 새집을 보고 감격하신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눈물까지 보이셨다.
예전에 살던 집은 매물로 나간 상태고, 이삿짐도 이미 다 와 있었다. 가져올 만한 가구가 거의 없었기에 이삿짐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절반 이상은 이미 정리되어 집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날 하루 동안 세 식구는 집 안팎 주변을 구경하고, 개인 용품을 정리정돈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새집에서 첫 끼로, 어머니 손맛의 된장찌개를 맛나게 먹기도 했다.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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