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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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급 중함선.
전장 약 52미에 이르는 그 배는 현대인의 시선에서 봐도 꽤 큰 시각적 쾌감을 줄 정도의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갑판에서 41미나 치솟은, 갑판 아래 고정된 돛대의 숨겨진 부분까지 합하면 물경 50미에 이르는 높은 돛대였다.
그 돛대에 걸린 돛이 활짝 펼쳐진 걸 옆에서 보면 마치 눈앞에 그만한 높이의 절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중함선의 돛대들에는 각각 위아래로 두 개의 돛이 달려 있었는데, 경함선과 달리 하나의 큰 가로활대 횡범을 달아 놓기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동양식 가로활대 횡범은 돛의 무게가 서양식 횡범보다 무겁기 때문에,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겠지만, 내구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하여, 위아래로 두 개의 돛을 달기로 한 것이고, 그중 상단 돛은 가로활대 횡범이 아니라 서양식 횡범이었다. 그러니까, 대항해 시대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사각돛을 달아 놓았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보다는 진보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냥 돛대 상단에 가로돛대를 박아 놓고 사각돛을 단 듯하지만, 그 가로돛대가 돛대를 축으로 하여 회전하게 되어 있었으니, 주돛인 가로활대 횡범의 움직임과 연동하여 가로돛대도 그 방향을 틀 수 있도록 밧줄과 도르레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주돛과 무관하게 상단돛을 따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움직임이 큰 편인 가로활대 횡범의 특성상 상단돛에 달린 밧줄에 걸리는 경우가 많아, 백날을 고민하고, 실험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비단 돛대와 돛뿐만 아니라, 중함선 자체가 연구와 개발의 고군분투 끝에 완성된 놈이었다.
많은 경함선을 건조한 경험이 있기에 중함선은 탐라 자체의 기술력으로 제작 건조가 가능할 것이라 여겼고, 실제로 완성하여 그것이 틀린 판단은 아님을 확인했지만, 개발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건조에 쓰이는 목재부터 훨씬 까다로운 선택이 필요했고, 기존의 짜 맞추기 공법도, 그 정밀함과 요구 시간이 급격히 늘어 많은 부분에서 포기해야 했다.
특히, 선거(船渠) 또한 기존 선거의 확대만으로는 부족하여, 목재 위주의 선거를 철제 위주의 선거로 바꾸었다.
그 고난의 개발사를 단적으로 증빙하는 건 탐라급 중함선의 ‘네이밍’ 함선인 탐라 1호가 사실은 세 번째로 건조된 배라는 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건조가 모두 실패한 탓이었다.
첫 번재 배는 기존의 목재형 선거로 짓다가 막바지 무렵에 무너져 버리는 사고로 잃었다. 그나마 야밤에 일어났고, 아무도 없던 시간대라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두 번째 배는 건조하여 물에 띄우기도 했지만, 시험 항해 기간 도중에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그 문제점들을 하나씩 개선하다 보니, 배 자체가 누더기로 변하는 바람에 아예 실험 선박으로 전환시켜서 실험할 만큼 실험한 후 폐기해 버렸다.
사실 이런 일들은 고의로 겪은 고난이기도 했다.
현대에서, 실제로 만들어 보진 않더라도, 시뮬레이션 제작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회피할 수 있었던 일들이지만, 몽주는 일부러 현대에서 알아 오지도, 아는 게 있어도 장인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대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북돋워 주고, 그간의 경험과 주먹구구식 추정으로 이겨 내기 어려운 부분은 시험 제작을 통해 극복하라 명하였으니, 탐라의 기술자들이 그 과정을 통해 자체적인 역량을 키우길 바랐다.
하여, 선소 주변에 중함선 제작 중 행했던 시험 제작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띠는 건 해안가 언덕 위에 세워 둔 돛대였다.
언덕 위에 땅을 파 세망을 붓고, 돛대를 세웠으니, 실제로 쓰이는 돛대의 크기 그대로였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불어오고, 불어나가는 바람을 통해 중함선에 쓰일 돛대와 돛을 면밀히 실험하여 실제 건조 때 적용한 것이었다.
몽주는 홍로 포구를 떠나는 탐라급 중함선의 고물에 서서 우뚝 솟아 있는 시험용 돛대를 쳐다보다가 근처 선소로 시선을 옮기곤 미소를 띠었다.
2년이 넘는 악전고투 끝에 탐라호가 건조되고, 4호선까지 만든 지금, 선소에서는 다섯 번째 탐라급 중함선의 건조가 진행 중이었다.
아직은 용골을 놓고 뼈대를 갖추는 단계에 불과하지만, 몽주는 다섯 번째 중함선에 기대가 컸다.
사실 그 배야말로 진정한 중함선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건조한 네 척의 중함선도 부족한 배는 아니었지만, 그간 전함과 상선으로 쓰이면서 보충해야 할 점들이 여전히 발견되었고, 그런 약점들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느라 그동안 중함선의 건조를 한동안 중지해 두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건조되는 중함선은 다른 중함선들이 미처 고치지 못한 부분까지 설계 차원에서 해결하여 완성될 것이니,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탐라급 5호는 선판 하부인 흘수선 아래 물에 잠기는 부분에 구리판을 덧붙일 계획이었다.
나무로 만든 배에는 흘수선 아래에 따개비가 붙어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따개비가 많이 붙을수록 수중저항력이 커져 배가 잘 나아가지 않게 된다.
그래서 목선은 정기적으로 배 밑에 붙은 따개비를 떼어 내는 작업을 시행해야 했는데, 구리판을 덧붙이면 따개비가 붙을 수 없어 괜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또, 구리판의 무게만큼 무게 중심도 아래로 내려가 보다 안정성을 가지게 되는 장점도 있었다.
물론, 중함선처럼 큰 배의 아래를 감싸는 것인 만큼 추가로 드는 비용이 크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중함선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할 수 있다면 감수할 만했다.
몽주가 점점 멀어지는 선소 쪽을 보는 동안 탐라군에 속한 탐라 4호선은 범섬으로 항해 중이었다.
범섬은 홍로포구에서 볼 수 있는 세 섬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섬으로, 그곳에는 탐라군의 방포 훈련장이 있었다.
“주군, 방포 지점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선장이 호위군병 사이로 들어와 보고하자, 몽주는 걸음을 옮겨 갑판 중앙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는 화극을 비롯하여 선소와 공소에서 나온 장인들 여럿이 한창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몽주는 돛대와 돛대 사이에 갑판보다 50세미 정도 솟아 있는 포대 위로 올라갔다.
포대(砲臺)는 돛대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세 개의 포대마다 세 문의 화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화포는 포대 중에서도 툭 튀어나와 있는 원판형 포가(砲架), 마반대(磨盤臺) 위에 올려져 있었다.
몽주는 그중 가까운 화포 곁에 서서 포신을 매만졌다. 차가운 감촉을 전해 주는 신형 화포.
포신의 길이가 조금 더 길어져 구경장(口徑長)이 좋아졌을 뿐, 그 외 제원 자체는 기존의 화포와 별 차이가 없지만, 신형 화포는 운영과 위력 면에서 기존의 화포보다 진일보한 것이었다.
운영 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신형 화포는 ‘불랑기’포라는 점이었다. 즉, 모포와 자포로 나뉘어져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신형 화포의 명칭은 ‘모자대포(母子大砲)였다.
모자대포는 포신 후미에 들어가는 자포를 떼어 내 쉽게 장약이 가능하기에 방포 속도가 상당히 좋아져, 기존의 화포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나 빨라졌다.
물론, 이는 모자대포의 구조 외에도 고형화된 화약을 쓴 덕이기도 했다.
구경과 거의 일치하는 연탄 모양의 화약 덩어리를 쓰면, 기존의 화약 알갱이를 넣고 다지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고형화 화약의 경우 연탄 모양이긴 하지만, 연탄보다는 작은 구멍이 많이 나 있었는데, 여러 번 실험을 통하여 선택한 가장 폭발력이 큰 구조였다.
그리고 폭발력이 커졌다는 말은 제원상 길이가 길어진 것을 제외하면 기존의 화포와 큰 차이가 없는 모포의 포신이 그만큼 더 튼튼해졌다는 뜻이었다.
모자대포의 포신은 기존의 주물식 제조가 아니라, 자기긴축(autofrettage)식 제조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주물로 제조된 포신의 내경을 필요한 구경보다 조금 작게 만든 후, 포신 내부에 고압을 가하여 내경을 구경에 맞게 팽창시키는 방법이었다.
이 자기긴축식 포신은 현대 무기의 포신에도 널리 쓰이는 방법으로, 포신을 팽창시킬 때 생기는 잔류 응력(應力)이 여러 번 발포하였을 때 포신이 변형되는 걸 막아 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당대 탐라에서 쓰는 자기긴축식 제조는 현대의 그것과 비교하기에는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다.
본디 현대에서는 상온에서 물리력만으로 포신을 팽창시키는데, 당대에서 그런 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포신을 달궈지기 직전까지 가열하여 탄성을 많이 감소시킨 후, 구경에 맞는 강철 기둥을 포신에 삽입하여 넓히는 방법을 썼다.
때문에 탄성이 줄어든 만큼, 팽창후 잔류 응력도 작아져 현대식 자기긴축식 포신만큼 포신의 내구도가 강력할 수는 없었지만, 적게나마 남은 응력도 당대에서는 꽤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더 큰 폭발력을 견딜 수 있었고, 그럼에도 더 오래 방포할 수 있었으며, 포신 내부가 더 깔끔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졌지만, 역시나 치명적인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그 문제는 근래에 새로 만든 화포들 중 모자대포만이 자기긴축식 포신을 가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 바로 제조 중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거의 셋 중 둘이 실패할 정도라고 하니, 군기청에선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상온에서 고압만으로 팽창하는 것과 달리, 가열된 상태에서 포신을 세워 누르는 방식이다 보니, 조금만 실수가 있어도 포신이 찌그러지거나, 주름이 생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
제작 공정이 더 갖춰지고, 장인들이 더 숙련되면 불량률이 조금 줄기는 하겠지만, 자기긴축식 제작으로 포신을 대량으로 만드는 건 한동안 계속 힘든 일일 게 분명했다.
때문에 현재는 모자대포만 자기긴축식 제조법으로 만들기로 하였고, 기존의 화포도 계속 제조하여, 지금 중함선에 무장된 화포도 갑판 포대에 놓인 아홉 문을 제외하곤 모두 기존의 화포였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몽주가 흐뭇한 미소를 띠곤 모자대포의 포신을 어루만지고 있자, 화극이 다가와 곁에 섰다.
“방포 준비를 마쳤네.”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느새 중함선이 돛을 접고 닻을 내려 정지되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범섬을 찾으니, 대략 2길미쯤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시험 방포치곤 꽤 멀군요.”
“그래도 최대 사거리보다는 가깝지 않나. 기왕에 하는 거 탄착의 정확도도 한번 보자는 게지.”
방포는 이내 시작되었다.
네 명의 화포병들이 포대장의 구령에 따라 방포를 개시하니, 실전과 달리, 장약부터 시작하였다.
장약수 2인이 나서 한 자가 자포를 꺼내어 세웠고, 다른 자가 고형화 화약과 철구를 연달아 자포 안에 넣었다.
그 자포를 모포 안에 장착하자, 축목수(縮木手)가 모포 안에 들어간 자포의 뒤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망치로 몇 번 두들기자, 모포와 자포가 더욱 밀착하였다.
그와 동시에 포대장이 측정한 거리를 알리자, 장약수 중 하나가 포 옆에 달린 바퀴를 돌려 포각을 맞췄고, 직후에 조준수가 포 옆에 수평으로 달린 원시적인 광학 조준기로 목표를 조준하면서 반대쪽 바닥에 달린 바퀴를 돌려 방향을 맞추었다.
“방포하오!”
조준수가 조준이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자, 포대장이 크게 구령하곤 손에 달린 집게를 들어 포 후미의 상부에 난 구멍에 가까이 하였다.
그 집게는 끝이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었고, 집게가 집고 있는 건 점화선이었다. 집게로 그 점화선의 불씨가 붙은 끝을 화포에 난 새끼손가락 두께만한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펑!
점화선 끝이 구멍 안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방포음이 터져 나왔고, 철구가 순식간에 날아가 범섬의 해안 언덕에 있는 방포장에 탄착되었다.
물론, 몽주는 포탄이 날아가는 걸 보는 대신 모자대포를 살폈다.
원기둥 형태의 포가 위에 놓인 화포의 용수철 형태의 주퇴 복좌기는 민감하게 튕겨 대진 않았지만, 대신 그만큼 포가에 주는 충격도 컸다.
그리고 그 충격이 중함선에 무장한 모자대포를 거의 완성했음에도 그 완성을 확정하는 일을 지금까지 막고 있었다.
방포는 계속 이어졌다.
방포 직후에 자포를 다시 떼어 내어 장약수들이 주걱 같은 도구로 자포 안에 남은 찌꺼기를 털어 내는 동안 축목수가 포구 앞에서 천이 묶인 봉으로 포신 내부를 청소하자, 내부에 있던 찌꺼기가 자포가 장착되는 부분을 통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다시 장약된 자포가 장착되고 축목을 박아 넣은 후 조준하여 방포하였으니, 그 간격이 기존의 화포에 비해 절반에 불과했다.
“축목을 쓴 게 오히려 낫군요.”
“가끔은 단순한 게 더 나은 법이지.”
모포에 자포를 밀착시키는 데 쓰는 나무를 축목이라 하는데, 원래는 그 또한 기계적으로 밀착시키려 하였다.
한데, 나사와 치차로 조이는 방법은 시간이 꽤 필요했고, 방포의 충격에 약해 고장 나기 일쑤였다.
한데, 장인들이 그냥 단단한 나무토막을 망치로 두들겨 밀착하게 하였으니, 필요한 시간도 적고, 고장도 적었으며, 설령 나무가 충격에 찌그러져도 다른 예비 나무토막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방포가 계속되다가, 대략 스무 번 정도 방포한 후에 일단 멈추게 하였다.
포신은 열기로 뜨거워져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긴, 백 번을 쏘아도 멀쩡하도록 만든 것이라 문제가 없어야 마땅했다.
대신, 지금 몽주가 그 방포 시험을 본 이유이자, 화극을 비롯하여 여러 장인들이 기대와 우려가 섞인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건 화포 자체가 아니라, 그 아래 있는 포가였다.
“열어 보게.”
화극이 명하자, 두 명의 장인이 다가와 화포 아래 원기둥 형태의 포가 옆에 각각 앉아서 무언가 조이고 있던 것을 풀어내었다.
그러자 원기둥의 표면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던, 반원 형태로 구부러진 철제 띠 구조물이 떨어져 나왔다.
몽주도 쭈그리고 앉아 포가 안을 살피니, 기름칠된 축대와 그 주변에 놓인 쇠구슬, 아니 이제는 ‘축받이 공’이라 칭하기로 한 ‘볼 베어링’이 보였다.
일단 겉보기로는 괜찮아 보였다.
화극과 다른 장인들도 괜찮음을 확인하자, 다시 철제 띠 구조물을 붙여 조였고, 이어 포가를 이리저리 360도 회전시켜보았다.
몽주도 회전하는 포가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회전하는 포가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가늠해 보았다.
“음, 제 느낌에는 괜찮은 듯하군요.”
“이제는 스무 번의 방포 정도에는 문제가 없겠지.”
대단치 않다는 양 말하였지만, 화극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가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개발한 마반대가 이제야 전력화될 수 있게 된 것이 사뭇 기쁜 게 분명했다.
회전형 포가 마반대의 원리는 단순하였고, 금세 완성할 수 있으리라 보았지만, 방포 시 극심한 충격에 축대가 망가지는 걸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몽주가 ‘볼 베어링’의 착안을 일찌감치 알려 주긴 했지만, 볼 베어링을 만드는 게 그처럼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미 포탄용으로 쓰는 철구를 만든 경험도 있고, 강철 주물에는 이력이 났으니, 작은 쇠구슬쯤이야 금세 만들 줄 알았는데, 난이도가 전혀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일단 크기가 작아질수록 정밀하게 구형의 주물을 제조하는 게 어려웠고, 특히 볼 베어링은 완벽에 가까운 모양이어야 했으니, 더욱 어려웠다.
또, 단순히 강철로 만들면 된다 싶었건만, 수백 길그람짜리 화포를 지고, 그 와중에 순간적으로 수 톤짜리 충격을 접점(接點)으로 감당해야 하니, 구의 형태가 찌그러지는 일도 흔히 발생했다.
완벽한 구형을 만드는 건 장인들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볼 베어링을 만드는 강철의 경도였다.
현대에서야 온갖 희귀 광물과 섞어 초경합금을 만들었지만, 당대에 니켈이나 크로뮴(크롬) 같은 합금 물질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으니, 어찌해야 할지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탄소 함유량을 세밀하게 조절하면서 볼 베어링에 가장 적합한 탄소강을 찾고자 할 뿐이었는데, 그러던 중에 같은 탄소강임에도 경도가 남다른 게 있음을 발견하였다.
하여 그 강철구를 만드는 데 쓴 철을 역추적하니, 연나라 당산(唐山)에서 나온 철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본디 탐라가 여러 곳에서 철을 수입함에 있어 기본적으로 무쇠, 즉 주철 덩어리의 형태로 구하기에 지역별 철광성의 특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동아시아의 철광석은 품위가 낮은 편이라 여러 이물질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제철하는 중에 희귀 광물을 그대로 포함하게 되었다.
주철을 제조하여 쓸 때는 그런 희귀 광물들이 철의 균질함을 해쳤지만, 강철을 만들 때는 제강 시 필요한 고온 탓에 일부 희귀 광물도 녹아 강철의 성질을 전반적으로 바꾸기도 하였으니, 당산의 철로 만든 강철이 우연치 않게 일종의 초경합금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몽주는 당산에서 난 철로만 만든 강철로 볼 베어링을 만들어 보게 하였으니, 그렇게 완성된 것들 중에 확실히 내구성과 경도가 높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당산의 철로 만든다 해도, 모두가 초경합금의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 쓰는 건 몰라도, 화포용 마반대에 쓰는 축받이 공, 즉 고부하용 볼 베어링만큼은 앞으로도 한동안은 하늘의 점지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어쨌든 마반대에 모자대포를 올려놓을 수 있게 됨으로써 중함선은 기존의 고정형 화포를 넘어선 회전형 화포를 보유하게 되었다.
비록 아홉 문에 불과하고, 복잡한 갑판 사정으로 자유자재로 쓰기에는 제한이 있지만, 방포 속도를 생각하면 기존 화포 18문을 양 측면에 추가로 가진 셈이었다.
여기에 하층 갑판에 무장된, 한 측면당 22문에 이르는 화포들까지 합하면 측면 사격 시 최대 40문의 화포를 쏘는 것과 맞먹는 셈이었다.
물론, 중함선의 공격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모자대포를 수십 발이나 더 방포한 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 탐라 4호는 다시 항해 하여 범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대략 200미쯤까지 다가간 후, 다시 중함선이 정박하자, 대기하고 있던 몇 명의 군병들이 측면 난간 앞에 섰다.
그들 중 두 군병이 각각 길고 얇은 화포를 들고 있었는데, 후미가 두껍고 그 안에 자포가 들어 있는 걸로 볼 때, 그 또한 모자포임에 틀림없었다.
꽤 무거운지 조금 힘겨운 모습으로 그 화포를 들고 난간 근처에 서자, 다른 군병과 함께 난간 위에 그 화포를 걸쳐 놓았다.
다만, 그냥 올려 둔 건 아니고, 화포 앞부터 삼분의 일 지점 하부에 갈고리 모양으로 튀어나온 게 있어 그걸 난간 바깥쪽에 걸었다.
난간에도 군데군데 철판으로 감싸여 있었고, 바깥쪽에 홈이 파여 있어, 그 홈에 갈고리 모양의 고정쇠를 넣어 일종의 견착이 가능했다.
장착과 방포는 앞선 모자대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화포의 후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있는 군병이 조준수이자 축목수의 역할을 동시에 하였으니, 모자대포에 비해 쉽게 들어간 축목을 설치하자마자 손잡이를 움직여 곧바로 조준하였다.
점화수가 따로 있긴 하지만, 조준수가 그 역할까지 해도 상관없을 듯했다.
펑펑!
두 대의 화포가 방포하니, 방포음이 화포라기보다는 현대 대구경 총과 오히려 유사했다.
구경이 3세미에 이르지만, 위력이 적은 편이라 소리가 그만큼 작은 것이었다.
방포된 작은 철구는 거의 직사로 날아가 200미 정도 떨어진 방포장에 탄착하였고, 다시 방포 준비를 하는데, 이번에는 포탄이 조금 특이했다.
작은 구슬을 여러 개 달아 놓아 포도를 연상케 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포탄을 방포하자, 방포 충격에 붙여 놓은 쇠구슬이 흩어지면서 마치 산탄총을 쏜 것처럼 보였다.
“포도탄의 사거리는 많이 짧네. 아무래도 새어 나가는 폭압이 많은 탓일 게야.”
“어차피 근접전 때나 쓸 것이지 않습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요.”
방포된 포도탄은 흩어져 해안 근처 바다 위에 후드득 떨어졌는데, 대략 100미 안쪽에서나 유효한 살상력을 가질 수 있을 듯했다.
“원거리에서는 모자대포 아홉 문과 측면 화포 스물두 문으로 공격하고, 근거리에서는 갑판원과 해병대 군병들이 높은 위치에서 수십 문의 모자소포로 적선과 적병을 타격할 것이니, 이 중함선이라면 다른 나라 수십 척의 배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네.”
화극이 자긍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하니, 몽주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 그 정도의 위력을 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적인 전장 상황을 염두에 두면 가능하고도 남을 듯했다.
사실 갑판 난간에 놓는, 모자대포와 같은 원리지만 작은 화포라 하여 모자소포(小砲)라 부르는 그 무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중함선의 돛대가 크고, 돛이 많아 그만큼 밧줄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마반대가 장비된 포대도 따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터라 갑판 위에는 많은 화포를 올려 두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갑판 위에 화포를 제거하면, 그만큼 많은 군병관 화물을 실을 수도 있어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으니, 어차피 당대의 사정에서는 과무장된 전함인 만큼 작은 포로 대신한 것이었다.
또, 상선이나 무라카미의 쾌속선처럼 기본적으로 화포를 많이 싣는 게 손해인 배의 무장을 모자소포로 대체할 계획이기도 했다.
몽주는 중함선과 함께라면 거친 남양의 바다와 장차 바다 위에서 조우하게 될 그 어떤 적들도 크게 걱정할 게 없겠다 싶어 자연 마음이 흡족했다.
시험을 마친 중함선 탐라 4호는 다시 배를 돌려 홍로 포구로 향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포구에 내린 몽주 앞에 기다리고 있던 외관대신 차현유가 서둘러 다가왔다.
“태위 나하추가 서쪽으로 대거 출병하였다고 합니다.”
외관대신이 말을 전하며 장계를 건네니, 그 장계는 동금주 도집사 허호필이 보낸 것이었다.
……이에 나하추에게 사정을 묻는 사신을 보내자, 나하추가 서찰을 전해 와 알리길, 그가 직속의 군병을 이끌고 옷치긴 왕가와 연합하여 원 황실을 석권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또, 덧붙여 전하길, 장차 황금씨는 더는 빛나지 못할 것이고, 나하추는 화령의 서쪽을 근거지로 삼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소신은 이미 정해 둔 작계대로 준동할 것인 바, 만약 변동이 있다면 하루 빨리 알려 주십시오.
이미 오래전부터 나하추가 서쪽을 노리고 있었으니, 예상보다 더디긴 했으나, 마침내 일을 감행한 모양이었다.
“황금씨가 더는 빛나지 못한다라…… 드디어 원이 몰락하는 날이 올 모양이군.”
황금씨는 징키스칸의 보르지긴씨를 의미하였으니, 그 의미는 확실했다. 다만, 옷치긴 왕가 역시 징키스칸의 아우로부터 이어졌기에 마찬가지로 황금씨 보르지긴임을 감안하면, 나하추가 무슨 꿍꿍이로 옷치긴 왕가와 연합했는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태위는 정말 서쪽으로 진출할 생각인가.”
장계를 접으며 몽주가 중얼거리니, 그 서쪽은 금주의 서쪽이 아닌 몽골의 서쪽을 의미했다.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작계대로 하게. 다만, 지원군을 보내긴 해야겠지. 혹여 명나라나 요동이 과욕을 부리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차 대신이 읍하곤 서둘러 물러나니, 그 멀어져 가는 발걸음에 조바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몽주가 시선을 옮겨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북쪽에 변동이 있으니, 아무래도 병상에서 죽을 둥 말 둥하면서도 역사보다 오래 살고 있었던 아유시리다르가 이제야 죽은 모양이었다.
“남양으로 가기 전에 연국에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곁에 서 있는 화극을 향해 말하니, 그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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