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64)
훈닝 가도 위의 말들이 거침없이 달렸다.
본래 쓰던 계곡 길에서 조금 떨어져 올라가,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난 그 길은 구불구불 굽어 있었지만, 그래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고, 평평하고, 단단하게 다진 평균 폭 4미짜리 가도는 훈춘과 닝구타를 보다 빠르게 연결하고 있었다.
동금주를 얻은 직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반 만에 1차로 완성한 그 가도는 곧바로 확장 공사에 돌입하여 근래에 이르러 2차 완공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동금주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핵심 도로로 그저 말이나 키우고, 사냥이나 하는 땅으로 머물 수도 있었던 동금주의 북부에도 산업을 일굴 수 있게 하였다.
허호필 도집사는 급하게 말을 몰면서도 훈닝 가도의 상태를 살폈다.
1년여 전에 가족을 녹둔군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오랜만에 탐라에 갔을 때, 세망 포장 도로를 보곤 동금주에도 적용했으면 좋겠다고 여긴 게 떠올랐다.
하나, 당시에는 일단 맨땅일지라도 말이 제대로 달릴 수 있고, 작은 마차나 화포를 끌고 갈 수 있게 만드는 게 우선인 터라 언감생심이었다.
한 차례 확장 공사를 완성한 지금도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4미로 넓혔지만, 아무래도 1미 정도 더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그게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하면 좋겠지만, 동금주의 인력과 재정 상태를 생각하면 도로를 포장하는 건 한참 후에나 가능할 듯했다.
물론, 동금주는 나날이 번성하고 있었다.
불과 3년여 전만 해도 동금주는 녹둔도를 제외하면 모든 곳이 사실상 야생의 터전이었고, 무족들이 조그맣게 농사를 짓는 게 그나마 사람의 흔적일 뿐이었다.
하나, 지금은 녹둔현의 인구만 1만 5천이 넘는 큰 고을이 되었고, 훈춘, 비라카, 닝구타, 일란 할라처럼 무족들이 크게 무리 지어 사는 곳 또한 호구수가 많이 늘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산업이 육성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동금주 경영의 초기부터 시작한 녹둔군의 소금 산업과 임업은 이미 안정적으로 정착했고, 땅이 기름진 일란 할라에는 밀과 대두(콩) 등의 농사가 크게 풍작을 이루었다.
농사가 잘되자 그 부산물을 이용한 소와 양의 목축도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목축으로 얻은 젖과 고기는 동금주의 백성들의 식단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으며, 가죽은 또 하나의 소득원이 되었다.
허 도집사는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곱게 무두질된 양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직 더우면 덥지 추울 때가 아니지만, 고삐를 쥔 손이 다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착용한 것이었다.
시선을 돌려 가까이 있는 탐라군 장교들의 손에도 같거나 비슷한 장갑이 있었다.
금주나 요동에서 탐라로 건너간 가죽이 그곳에서 가공되어 다시 금주와 요동으로 돌아오니, 험한 일을 할 때 쓰는 두껍고 단단한 가죽 장갑이 아닌 부드러운 가죽 장갑은 수백 길미의 거리를 건너온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십리 밖도 외딴곳이고, 백리 밖은 거의 미지의 세계나 다를 바 없었는데, 불과 30년도 안 되어 수백 길미 떨어진 물산들이 오가고 있었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허호필은 그것이 주군 탐라공의 힘이고, 탐라군의 탐라상단의 힘이라 여겼으며, 탐라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가장 근본이라 여겼다.
특히, 상단 휘하에 있는 여러 회사들은 처음 주군께서 세우라 하실 때는 굳이 왜 그런 일을 하시나 싶었으나, 각 회사가 저마다 취급하는 물건만 있으면, 수십, 수백 길미를 마다치 않고 상행을 하니, 그 덕에 동금주의 여러 산업이 보다 빠르고, 보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교역을 통해 확보한 이익이 동금주의 인구를 늘리고, 200길미에 이르는 가도도 닦을 수 있는 원천이었다.
물산과 식량이 풍족하니, 무족들도 늙은이를 버리거나 여아를 포기하는 일도 없어졌고, 전사가 되지 못한 사내들이 철저히 버림받는 대신, 얼마든지 부족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족 전사들은 전문 군병으로 분하여, 평시에는 치안을 안정시키고, 호환을 방비하면서 값비싼 호피를 생산하며, 전시에는 잘 갖춘 무장으로 신속히 집결하니, 허호필은 그 넓은 동금주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답답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3년이나 노리고 있던 계획도 지체 없이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머더리(mederi)와 지린 우라(girin ura)를 얻는 것.
이미 허르빈에 세운 거점에는 1천의 전사들이 주둔 중이고, 지금쯤 일란 할라와 닝구타의 무족 전사들도 허르빈으로 가고 있거나 벌써 집결해 있을 것이다.
훈춘과 비라카의 전사들은 비라카의 북쪽 산길을 통해 곧바로 지린 우라로 향하기로 하였다.
장춘에 나가 있는 세작들이 나하추의 출병을 확인하면, 곧바로 머더리와 지린 우라로 진출하고, 거점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니, 이미 허르빈의 거점에 그와 관련된 준비가 대략 갖춰진 상태였다.
문득 허 도집사는 실소하였다. 지린 우라는 ‘강가의 마을’이라는 무족 지명이고, 머더리는 ‘바다’를 뜻하는 무족 지명이었다.
지린 우라야 숭가리 강 상류 근처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니 자연스러웠으나, 머더리는 그렇지 않았다.
허르빈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 있는 곳은 금주에서도 가장 깊은 내륙이랄 수 있었으니, 바다라는 의미와 걸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지명이 생긴 이유는 있었다.
그곳은 크고 작은 호수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오래전 직접 바다를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무족의 선조들이 그곳을 바다로 오해한 것 혹은 고의로 곡해한 것이었다.
바로 그 머더리가 장춘이 위치한 평원의 북쪽에 붙어 있으니, 지리적인 경계로써 장춘을 범하지 않은 채 최대로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지린 우라 또한 숭가리강의 상류를 경계로 하여 장춘의 동쪽을 최대로 침범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장춘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동금주의 영역을 최대로 넓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하추 외 금주에 소재하는 몽골족들의 영역이 장춘과 그 서쪽, 남쪽 지역이기에 그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함이었고, 애초에 명으로부터 동금주를 인정받으면서 그 서쪽 경계를 백산으로 하여 장춘의 동쪽까지를 가지겠노라 약계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탐라의 정밀한 지도를 보면 머더리는 물론, 지린 우라만 해도 이미 백산의 서쪽을 침범한 상태였지만, 당대 명나라와 요동의 지리적 지식에 한계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지금 허르빈이 그러하듯 머더리와 지린 우라를 얻는다고 해도 당장 어떤 이득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주군께서 명하신 게 있고, 그와 관련된 작계가 있으며, 사전에 준비해 둔 것이 있어 시행할 뿐이었다.
하나, 그 명을 수행함에 있어 누구도 하등의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주군께서 명하신 대로 그 땅들을 얻으면 언제고 동금주에 크게 득될 게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었다.
“분명 뭔가 있을 게야…….”
빙긋 미소를 지으며 허호필은 마편(馬鞭)을 휘둘러 속도를 높였다.
“히랴! 더 서두르자!”
허호필이 소리치자, 수백의 군마들이 닝구타가 멀지 않은 훈닝 가도를 더 힘차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정식 편제상 탐라군병의 수는 약 1만 3천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리 많이 늘어난 수는 아니었다.
다만, 정식 편제라 함은 탐라의 본군과 구주, 대마, 나주, 녹둔현에 주둔하거나, 파견된 탐라군병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몽주가 최대로 부릴 수 있는 군병의 수는 적게 세 배, 많게는 여섯 배에 이르렀다.
일단 탐라와 구주 및 고려 남면에 각각 탐라 순위군 2천여, 구주 순위군 1만여, 그리고 고려 순위군 2만여를 두었다.
여기에 동금주의 무족 전사들까지 더하면 도합 여섯 배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군병들을 모두 일시에 동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순위군(巡衛軍)은 이름대로 지키는 군대로써, 일종의 경찰이었고, 그 실상은 그나마 경찰이라기보다는 자경대에 가까웠다. 농한기에만 훈련하고 평시에 번을 두어 차례로 고을의 치안을 지키는 자들을 선발해 둔 것에 불과했다.
다만, 그를 위한 재정과 인사권, 그리고 명분 및 체계상의 명령권이 지방 수령을 거치지 않고, 군 계통을 통해 탐라공이자 통관안찰사인 몽주에게 있으므로, 몽주의 군대로 취급할 수 있긴 했다.
동금주의 무족 전사들도, 동금주에 밀어닥친 산업의 활성 탓에 다소 줄어들었다. 하나, 그래도 만약 탐라군이 정식 편제 이외의 군대를 동원하고자 한다면, 역시나 무족 전사들이 가장 최우선적으로 선택될 것이다.
다만, 유목 민족 전사들의 특성상 북방에서 제대로 쓰일 것이고, 그들도 그들의 부족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길 원치 않을 테니, 다소의 제약이 있는 셈이었다.
여기에 정식 편제는 물론, 명목상으로도 더하진 않지만, 무라카미 수군도 용병으로 부릴 수 있고, 구주 도집사 휘하의 무사들도 있긴 했다.
물론, 동금주의 전사와 마찬가지로 폭넓게 쓰기에는 아직 미흡했다.
“군병의 수를 늘려야 한다라…….”
팅!
잔잔한 바다 위를 나아가는 경함선 갑판 위에서 몽주는 동전 하나를 튕겨 공중에 띄웠다가 받으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양옆에는 탁기와 화극이 있었으니, 조금 전에 탁기가 조심스럽게 탐라군을 확대하자는 생각을 건의한 것이었다.
“주군께서 산업을 육성하시는 데에 먼저 사람을 쓰고자 하심은 잘 알고 있으나, 군의 규모가 나라의 규모에 비해 작은 것은 위태로운 일이지 않습니까. 특히, 장차 중함선을 여럿 더 들이고자 한다면, 군병의 수가 더 모자랄 것이니,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군병을 크게 모집해야 할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사실 나라의 재정에 비해 군비가 적게 나가는 편이기도 했고.
현대 한국이 냉전 시대에 재정의 삼분지 일을 국방비로 썼으며, 21세기에도 15퍼센트 가까이 쓰고 있는데, 지금 탐라군에 쓰는 재정 비중은 오분의 일 정도로, 당대의 일반적인 왕조 국가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쳤다.
다만, 이는 재정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인구 대비 군사수로 보면, 적은 건 아니었다.
탐라공국의 영역에 있는 인구의 총합이 대략 500만임을 생각하면 8, 9만의 상비군과 준상비군을 가지고 있는 건 꽤 큰 것이었다.
물론, 전근대 정복왕조들 중에는 인구 대비 십분지 일에 이르는 대군을 움직인 바도 적진 않지만, 그건 그야말로 전시 국가총력전에 해당하는 것이고, 상비군은 일반적으로 인구 대비 백분지 일 정도였다.
지금 탁기가 권하는 증병은 탐라섬 본토에서 탐라군 정식 편제를 늘리자 함이니, 더욱 벅찬 일이었다.
탐라국의 모든 영역에서 인구가 사뭇 늘어나긴 했지만, 이는 어린아이들의 수가 많아진 탓이었다. 출산을 권하기도 했고, 태어난 아이들의 위생과 영양의 상태가 좋아져 생존율이 올라간 것이다.
그나마 남면이나 구주 그리고 동금주에는 외부에서 유입된 성인 인구도 있지만, 탐라섬 본토는 그렇지 않았다.
외부에서 탐라섬으로 들어온 자들이 제법 있긴 했지만, 상단의 일로 인해 혹은 개인적인 생업의 일로 탐라에서 외부로 나간 자들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40여만 탐라섬의 인구에 비해 1만 3천의 상비군에 1천의 순위군은 이미 너무 많은 수준이었다.
“어찌 탐라군의 부양을 탐라섬의 백성으로만 국한하려 하시는 겐가?”
문득 화극이 말문을 열어 물었다. 물론, 그 부양이라는 건 재정이 아닌 인구 대비 군사수에 대한 것이었다.
“무족은 그렇다 쳐도, 남면과 구주의 백성들이라면 이제는 군병으로 받아들여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네만?”
“그렇습니다.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탐라군만큼만 그곳의 백성들 중에서 군병으로 선발하면 탐라에서 새로 군병을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탁기도 한마디 거들었지만, 몽주는 묵묵히 동전을 다시 튕겼다가 받기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튕겼던 동전을 잡아챈 몽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솔직한 말을 하자면, 나는 아직 남면과 구주의 백성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이 순위군이나,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징집할 예비 군병의 증편이 아닌, 정식 탐라군의 증편이라면 아직은 아닙니다.”
몽주는 탁기와 화극을 번갈아 보곤 다시 말하였다.
“출신이 어떠하든 탐라군이 되면, 탐라군이 쓰는 모든 것을 같이 써야 할 것이니, 이는 군정(軍情 : 군사 정보)과 군비, 그리고 군기를 모두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남면의 고려인이나, 구주의 백성들이 그런 것을 유출시킬 수 있음을 걱정하시는 겐가?”
몽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군사기밀의 유출뿐만 아니라, 내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자, 탁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양 말하였다.
“하나, 남면과 구주의 백성들 모두가 주군을 우러르고 있습니다.”
“정말 모두라 생각하나?”
“…….”
모두일 수는 없었다. 구주는 실상 피로 씻어 정복한 곳이고, 남면도 피를 별로 흘리지 않았을 뿐, 기존의 지배 구조를 뒤엎은 건 마찬가지였다.
불만을 가진 자들이 분명 적지 않을 것이고, 그런 자들에게 포섭되거나 부화뇌동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워낙에 압도적인 군력과 경제력으로 몽주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겉보기에 티가 나지 않지만, 언제라도 작은 틈이 생기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물론, 이는 탐라섬도 마찬가지겠지만, 몽주가 하늘에서 내려 보듯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있고, 지리적인 환경도 폐쇄적이라 관리하기에 유리하며, 백성들의 충성심도 다른 곳보다 월등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면, 탐라의 인구를 늘이고, 그를 통해 군병의 수도 늘리는 게 어떻겠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방안이죠. 다만, 탐라섬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도 그렇군.”
지금 탐라섬의 인구는 40만을 넘었다. 현대 제주도 인구의 삼분의 이 정도인데, 사실 이미 탐라섬은 어느 정도 인구 수용 한계치에 다다랐다.
탐라군이 방포시험장을 범섬으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까운 탐라섬의 영토를 방포장으로 쓰긴 아까우니까.
물론, 굉장히 북적대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고층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대 제주도와 달리 각종 산업들이 집결해 있기도 해서 토지 이용율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특히 홍로현과 대촌현은 모두 10만의 인구를 넘겨 더는 현급 고을이라 할 수도 없었고, 당연히 두 현에 속한 땅 중에 쓰이지 않는 땅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른 현들의 토지에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인구가 적더라도, 대신 산업에 쓰일 각종 농산물산을 경작하기 위한 토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도 연안 뱃길과 최근에 최종 완공된 환형도로 덕에 어느 정도 분산한 것이었다.
하여, 근자에는 쓸데없이 넓은 홍로현의 도로를 줄여 가옥을 짓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물론, 몽주는 거절했다.
지금이야 넓어 보이지만, 백성들이 더 많아지고, 이를 수용하기 위해 더 높은 건물을 짓게 되면 오히려 좁아 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 탐라가 더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최대로 봐도 10만 정도라 추정되었으니, 일반적인 비율로 따지면 군병 1천 정도를 늘릴 수 있고, 탐라섬의 비율로 따지면 3천 정도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네가 원하는 5천의 증병은 곤란할 듯하군.”
“3천이라도 감지덕지입니다.”
5천의 증원을 청하긴 했지만, 탁기도 애초에 그 원안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고 여긴 듯했다.
몽주는 탁기의 반응에 피식 실소하곤, 다시 동전을 튕겼다가 받았다.
돈은 많은데, 사람이 부족하다. 처음보단 나아지긴 했다. 그때는 돈도 많지는 않았으니.
어쨌거나 인구 부족은 언제나 탐라의 약점이었고, 적어도 1, 20년은 더 이어질 것이다.
크게 늘어난 어린아이들이 장성하여 탐라의 일꾼이 될 시간이자, 남면과 구주를 더 믿을 수 있는 영역으로 만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거나 몽주는 탁기에게 차후에 총무 회의에서 인구 유입을 논하기 위한 발안을 준비하라 명하였고, 탁기는 수긍하곤 물러났다.
아마 탁기가 원하는 3천의 군병을 늘이는 데에는 다시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한데, 그 동전은 뭔가?”
“이게 그겁니다. 1원 동전.”
“아, 그게 벌써 나온 겐가?”
화극이 관심을 보이자, 몽주는 손에 든 동전 대신 주머니에서 새로운 동전을 하나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 동전을 받아 든 화극은 동전을 유심히 살폈다.
“탐라섬의 모양이구먼.”
“네.”
지름 2.5세미짜리 동전 안의 문양은 화극이 본대로 탐라섬이었다.
탐라섬의 해안과 그 주변 섬 모습을 상당히 정밀하게 양각하였는데, 심지어 두무악(한라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미세하게 더 두껍기도 했다.
반대쪽면에는 삼태극 문양 위에 숫자와 한글로 ‘1원’이 겹쳐서 양각되어 있었다.
“허허, 이 정도면 위폐를 만들기도 어려울 것 같구먼.”
“저도 제법 만족스럽습니다.”
금본위제 화폐를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었고, 1원 동전도 그 일환이었다.
“하면, 이 1원 동전이 1미찰을 대신하는 겐가?”
“네. 그 동전이 기준인 셈이죠.”
그러니까 1원은 한국 1천 원권이나 미화 1달러권에 해당하는 포지션이었다. 가치가 같다는 게 아니라 화폐 체제상 지위가 그렇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는 그간 미찰은 화폐의 기능을 하긴 했지만, 모든 거래와 가치의 잣대로 쓰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현대 한국에서 1천 원짜리만으로 거래하고 가격을 매긴다고 생각할 때, 상상가능한 불편함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실제로 탐라에서 통용되는 미찰은 400만을 넘었고, 이는 3년과 비교하면 거의 4.5배 늘어난 셈이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미찰이 탐라에 있는 모든 상거래를 아우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몽주는 금본위제를 도입하면서 동시에 화폐 체계를 세분화하기로 하였다.
1전, 1원, 10원, 100원으로 이뤄진 4종의 동전이 그것이었고, 10전이 1원이니, 각각 10배의 가치 등락이 있었다.
지금 완성된 건 1원 동전뿐이지만, 재관부에서는 납, 아연, 주석, 은 등을 섞어 색과 크기가 다른 동전을 개발 중이었다.
장차 경제 규모가 더 커지면 더 큰 단위의 화폐를 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폐는 종이 제작이나 인쇄술의 한계가 있어 쓰지 않기로 하되, 대신 큰 액수의 거래를 행하는 자를 위해 수표 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전당과 수표 발행인 사이에 암호표와 인장을 등록하는 등의 방책을 동원하면 위조를 상당히 방비할 수 있으리라 내다보고 재관부에서 연구 중이었다.
“하면, 이 1원을 전당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꿔 주는 겐가?”
“하하하.”
금본위제 화폐이기에 형식상 가능한 일이긴 했다.
다만, 화폐 발행 개시를 위한 국공령에 금으로의 교환은 금 10길구람 단위로만 가능하다 명시할 예정이었다.
1원이 1미찰이고, 1미찰이 쌀 1길구람임을 생각하면, 아직 정확하게 정해지진 않았지만, 금 1길구람이 약 800석의 쌀에 해당하니, 80,000원이 필요할 것이다.
즉, 80만 원을 가져와야 그제야 금 10길구람으로 교환해 갈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금을 교환할 때 세금 납부 여부를 조사하고, 외국으로의 유출과 범죄 이용 가능성을 방비하기 위해 신원 조사까지, 그것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행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건 교환하지 말라는 거나 진배없는 것 같네만?”
“그런 의도죠.”
몽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금 교환 자격 자체가 엄청난 부자이거나 투자를 받아 낼 세력가이어야 하는데, 그런 자들에게 있어 세무 조사와 신원 조회는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애초에 자격이 되는 자들도 극히 드물 것이고, 모두 몽주의 신하에 해당하는 자들뿐이니, 당장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먼 훗날에는 그것이 금본위제를 가급적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제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걱정인 건 80만 원이라는 액수가 언젠가는 그리 큰 액수가 아니게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역시 몽주의 대에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탐라의 물가 상승률은 엄청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안정적…… 인 정도를 넘어 거의 0에 수렴되고 있었다.
이는 탐라의 경제가 정부 주도 계획 경제 정도도 아니고, 사실상 국가 독점 내지, 몽주의 독점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에 앞서는 형국이라 백성들의 자산이 증가하고, 소비가 늘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기도 했고, 소비 형태가 여전히 의식주에 중심을 두고 있어 관리하기 편한 덕이기도 했다.
‘그래서 편하긴 한데…….’
몽주는 여전히 아무도 회사를 세우지 않는 게 답답했다. 회사 창업과 관련한 관청인, 상관부 휘하의 회사청은 개점 휴업 상태였다.
더 답답한 건, 회사 창업이 없는 걸 넘어, 기존의 형태의 상단도 새로 생기는 게 없었다.
탐라는 물론, 고려나 구주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모든 이들이 오직 탐라공과 탐라상단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굴고 있는 것이었다.
하기야 꼭 관리가 아니더라도, 꼭 상단 직원이 아니더라도, 탐라국의 모든 경제는 탐라 조정과 탐라 상단으로 집결되는 게 현실이고,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굳이 다른 방법을 획책하려는 동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령에 대한 오해가 백성들에게 자리 잡은 게 컸다.
마치 사사로이 상단이나 회사를 만드는 게 탐라공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지고 있었으니…….
“에휴…….”
몽주는 다시 동전을 튕기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전은 1호 1원 동전으로, 한번에 49개를 열단조(가열 프레스 가공)할 수 있음에도 기념적으로 하나만 단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동전이 떠올라,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도는 동안 몽주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잡념이 스쳤다.
‘저 동전이 먼 훗날까지 이어진다면 국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은이 섞인 100원 동전에 내 얼굴을 새기자는데…… 민망하지만 허락할까 말까.’
‘알루미늄이나 니켈을 싸게 구할 방법은 정말 없나? 있으면 예쁜 동전도 만들 수 있는데…….’
그때 문득 화극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동전 중에 내 얼굴이 들어갈 수는 없나?”
피식.
몽주는 그 소리에 실소하였다. 덕분에 약간 정신이 사나워졌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계속 떨어지는 동전을 보고 있었고,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뭐, 더 훗날에 위인으로 평가받으면 정말 화극의 얼굴이 동전이나 지폐에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몽주의 등 뒤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거칠게 달려들며 몽주의 허리를 감싸 안은 건 강영이였다.
“어엇!”
“나 또 이겼어요!”
강영이가 돛대 타기에서 또 다른 선원에게 이겼다고 자랑하는 동안 몽주는 떨어지는 동전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당황하여 서둘러 휘두른 손에 동전을 쳤다.
“으어어!”
그 동전은 화극에게로 날아갔고,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드는 동전에 놀란 화극은 당황하여 팔을 허우적대었으니, 동전은 그 팔에 다시 튕겨 높이 솟았다.
“……!”
툭, 또르르르.
솟았던 동전은 갑판 난간 위에 떨어졌고,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난간 위를 타고 굴러갔다.
“자, 잡아!”
몽주가 급하게 소리치자, 화극이 몸을 날리듯 그 동전을 향해 손을 뻗는데, 하필 그 뒤쪽에서 시위하던 호위군병도 함께 몸을 날리는 바람에 둘이 충돌하였다.
“어이쿠!”
쿵!
두 사내가 갑판에 떨어지며 난간에 부딪치니, 그 위를 구르던 동전이 일순 툭- 조금 튕겼다가 다시 굴렀는데, 그 방향이 조금 꺾였다.
“안 돼!”
몽주의 기겁한 목소리와 함께 동전은 난간 밖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
몽주가 얼른 난간에 기대어 밖을 봤지만, 이미 물결치는 바다 위에 동전의 흔적은 없었다.
“어, 뭐가 떨어졌어요?”
몽주의 뒤에 선 강영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냥 미찰 하나.”
“아, 아까워라! 그거 하나면 사탕이 몇 갠데…… 잘 좀 잡으시지 그러셨어요?”
“…….”
기념비적인 1원 동전 하나를 삼켜 버린 황해 위에서 경함선들이 북쪽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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