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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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국의 발전은 비단 밀농사와 양목으로 대표되는 산업 발달에만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요동국의 발전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관리 체계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산업의 발전 역시 관료제가 체계가 잡히면서 더욱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이에 크게 기여한 건 당연히 과거제 시행이었다.
고려 국왕의 형식적인 윤허를 얻어 2년 전에 향시의 형태로 소과(小科)라는 ‘1차 시험’을 치렀고, 다섯 달 전에 요동국공시라는 이름의 대과(大科)를 치러 최종적인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시험의 분야는 문과, 잡과, 승과로 나눴고, 그중 문과는 다시 진사시와 생원시로 나뉘어 있었다.
생원시는 고려의 명경과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전의 암기와 기술 능력을 따졌고, 진사시는 제술과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전의 이해를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담은 문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처음 치러진 향시에서는 총 99명을 선발하였으니, 진사시 30명, 생원시 30명, 잡과 30명, 그리고 승과 9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1차 시험에 해당하는 향시의 급제자들은 요동국공시에 응시할 권한 이외에도 곧바로 하급 관리에 임명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대부분은 대과인 요동국공시를 준비하기 위해 고사하였지만, 차후에 요동국공시에 급제하지 못한 자들은 다시 하급 관리로 일하길 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문과 급제자의 경우에는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권한이 따로 부여되기도 했다.
요동국만의 대과인 요동국공시의 최종 급제자 수는 총 23명이었고, 진사시 7명, 생원시 7명, 잡과 7명, 그리고 승과 2명이었다.
첫 과거 시험은 요동국 내에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관리가 부족한 중에 시행된 첫 시험인 터라, 급제자들 전원이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임하게 된 것도 그중 한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급제자 중에 주목할 만한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요동공의 오남 이방원이었다.
혹자는 요동공의 아들인 터라 특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지만, 과거 시험을 주관한 자가 야은 길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또 시험의 평가 자체가 무기명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보면 그저 허황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방원은 스스로의 실력으로, 과거 시험 분야 중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진사시에 최종 합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학문적인 소양을 닦기는 했지만, 진사시 입시에 필요한 유학은 요동에 온 이후에 익히기 시작했으니, 과거에 뜻을 세운 지 고작 3년 만에 급제한 셈이었다.
물론, 이를 두고 고려의 과거 시험에 급제한 것과 동등하게 평가하기는 부족했다.
고려에서 건너온 유자들 중 실력 있는 자들은 이미 관리로 임한 탓에, 요동시에 입시한 유자들 대부분이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닌 덕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어쨌거나 급제는 급제였고, 공가의 영광이었다.
요동공 또한 상당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나라 전체에 잔치를 열게 할 정도였다. 다만, 역사에서 이방원이 더 훗날에 고려 과거에서 급제했을 때만큼의 기쁨까지는 아니었다.
고려 과거와 요동 과거라는 차이점도 있었고, 요동공이 동북면 출신으로서 개경 출신들에게 괄시를 받은 시간도 짧아 가문에 급제자가 나길 바라는 마음이 크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오남 이방원이 요동공의 눈에 새롭게 띄게 되는 계기로는 충분했고, 비단 요동공뿐만 아니라, 요동국의 신료들에게도 이방원의 존재감이 크게 상승하게 된 건 당연했다.
“혹시 저하께서는 방원 공자를 후계로 생각하고 계신 겐가?”
“그 정도까지야…… 여전히 방과 공자가 으뜸일 것이고, 방의 공자가 건강을 회복한다면 버금갈 따름이지 않겠습니까.”
영주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멀리 탐라의 선단이 멀어지는 걸 보던 좌찬성 정도전의 말에 호승지 노숙진이 답한 것이었다.
장남인 방우 공자가 전장에서 얻은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면서, 요동공의 후계 구도는 다소 혼란한 중이었다.
물론, 노숙진이 말했듯 차남 방과 공자가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가장 앞서 있다곤 하나, 그것만으로는 확정 지을 수 없었다.
애초에 요동공이 죽은 장남에게 크게 만족하셨던 이유가 방우 공자의 정치적 학문적 능력이었음을 생각하면, 무관 일색의 성품과 능력을 갖춘 차남 방과 공자는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요동공을 꼭 닮았고, 성품도 사납다고 알려진 방원 공자가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학문적인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 벌어지자, 후계 구도가 더 오묘해지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요동공이 탐라국과의 국혼을 추진함에 있어 방원 공자를 내세운다 하니, 더욱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탐라공의 사위라는 건 꽤 큰 권세를 등에 업는 것일 터. 만약 방원 공자가 요동공의 후계에 욕심을 낸다면, 탐라공이 그것을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오. 이를 모를 리 없는 저하께서 방원 공자를 내세우신다 함은 자연 방원 공자를 후계로 생각하시고 계심을 은근히 알리는 것 아니겠소?”
“일리 있는 말씀이긴 합니다. 하나, 저하께서 탐라공이 과거 요동국을 휘어잡으려 했음도 아시고 계시니, 방원 공자가 탐라공의 사위가 되는 것이 오히려 후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음을 피력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더 혼란을 키우는 것 아니오? 만약 저하께서 다른 공자를 후계로 정하셨는데, 방원 공자가 탐라공을 등에 업고 망측한 일을 도모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오.”
오가는 말 중에 은근히 노숙진에 대한 책망이 묻어 있었다.
이는 요동공에게 탐라공과 국혼을 맺으라 제안한 것이 노숙진이기 때문이었으니, 그가 아니라 말하면서도 사실은 방원 공자를 후계로 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노숙진도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못마땅하시다면 어째서 좌찬성께서는 이 국혼 제안에 동의하셨습니까?”
“방원 공자가 못마땅한 건 아니오.”
“하면요?”
노숙진이 되묻자, 정도전은 잠시 헛기침으로 시간을 끌었다.
사실 좌찬성의 입장에서 못마땅한 것은 방원 공자를 대상으로 하는 국혼이 노숙진에 의해 제안되었다는 것 자체였고, 그가 국혼을 저하께 주청하기 전에 자신과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건 마치 노숙진이 자신을 포함한 유자 출신 관리들과 선을 긋는 행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요동국의 신료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뉘었는데, 고려 본토 출신과 요동 출신이 바로 그것이었고, 이는 곧 유자 출신인지 아닌지로 나뉘는 것과 대동소이했다.
하여, 똑같이 고려 출신이긴 하지만, 유자라곤 할 수 없는 노숙진은 요동 출신들과 친근하여 그들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붕당을 이룬 건 아니었지만, 계기만 있다면, 예컨대 후계 문제를 두고 유자 출신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면 언제든 작당이 이뤄질 것처럼 보였으니, 유자 출신 관리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으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제가 이곳 출신 관리들을 모아 사사로이 분파를 이루어 득세할까 우려하시는 겝니까?”
“…….”
정도전은 침묵으로써 그 물음에 인정함을 피력하였으니, 노숙진은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이번은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저하께 주청한 것은 탐라국과의 국혼일 뿐이었고, 방원 공자를 내세우신 것은 저하의 판단이셨습니다. 또, 이 국혼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방원 공자를 두고 저하의 후계 결정에 혼미함을 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말을 끌며 정도전을 응시하는 노숙진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은근히 웃음을 흘리며 조그맣게 물었다.
“좌찬성께서도 내심 방원 공자를 주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좌찬성뿐만 아니라 야은 영감을 포함하여 유자 출신 관리들 전체가 그렇다 해야겠지요.”
“어찌 그리 확신하신 게요?”
“아니라면 저하께서 방원 공자를 두고 국혼을 물으셨을 때, 영감께서 찬동하셨겠습니까?”
“그야 …….”
“저하께서 바라시기에 막을 수 없었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저하 앞에서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이자가 능구렁이가 다 되었군.’
이론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가정을 확정 짓는 말투에 정도전은 자못 심기가 거슬렸지만, 확실히 반론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유자 출신들 사이에 과거에 급제한 방원 공자의 입지가 크게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만약 요동공께서 방원 공자를 후계로 여기신다는 의지를 보이신다면 유자들 대다수가 그에 호응할 것이고, 이는 정도전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한 가지 우려만 없다면 말이다.
“호승지, 그대가 보기에 방원 공자는 바뀌었소?”
‘무엇이, 어떻게’는 생략된 물음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변했는지는 몰라도 더해진 건 있겠지요.”
“더해진 것이라…….”
지난날, 방우 공자가 죽은 뒤, 붕 떠 버린 후계 구도를 두고 다른 공자들을 훑어보았을 때, 그는 방원 공자가 대담하고 총명하다는 건 인정했지만, 유가적 정치 이상과는 걸맞지 않은 인물이라 평가한 바 있었다.
오히려 전제 군주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데, 지금은 모를 일이었다.
유학적 잣대로 시험을 쳐 다른 유자들을 이긴 사람을 두고 유가적 정치 이상과 맞지 않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호승지의 말대로, 그저 더한 것뿐일지라도, 그 더함이 곧 변함일 수도 있지 않은가.
끓는 물에 얼음을 부으면 미지근한 물이 되듯이 말이다. 정도전의 눈매에 생각이 많이 매달리고 있음을 본 노숙진 또한 그만의 생각을 하였다.
방원 공자는 변했는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가 유학을 익힌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마저 속이고자 한 것이고, 위태롭지 않기 위해 적을 알고자 한 것이며, 독을 조금씩 음미하여 내성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 있어도,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충격이 있어야 한다.
방원 공자는 그런 경험이 없었고, 오히려 그저 자신만의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이었다.
‘내게는 나쁘지 않지.’
요동의 군주는 아직 대인일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교활함을 갖춘 패왕이 필요하다.
‘왜? 정명하게 대결해서 어찌 탐라공과 견준단 말인가.’
* * *
집을 나서려는데, 자는 줄 알았던 아들 녀석이 아버지의 옷깃을 잡았다.
“아빠, 어디 가요?”
“응, 일하러 가.”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공장 구경 가고 싶어요.”
그러면서 민호는 옴팡진 주먹을 자신 손바닥 위로 치며 전에 보았던 프레스 기계를 흉내 내었다.
“나중에 가자. 오늘은 아빠가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가거든.”
“후잉.”
하필이면 유기 공장으로 출근하지 않는 날에 조르는 터라, 두신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뒤늦게 마중하러 나온 아내가 민호를 안아 들고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까지 나와주었다.
“근데, 요즘은 별로 준비할 게 없나 봐요?”
“응? 아, 이미 해 뒀어.”
“예전에는 가기 직전까지 자료 준비하고 그랬잖아요?”
“음, 그랬지.”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그만두라고 그러면 어떡해요. 그 사람이 주는 돈이 꽤 쏠쏠한데…….”
“아니야. 익숙해져서 예전보다 빨리 준비해서 그러는 거야.”
민호는 두툼한 팔로 아들을 마지막으로 끌어안고는 차에 올라탔다.
“안녕! 아빠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차가 주차장 입구로 갈 때까지 먼 곳에서 손을 흔드는 아들을 룸미러로 보며 두신은 흐뭇한 미소를 띠다가 어느 순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까 아내가 대충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솔직히 양심에 찔렸던 것이다.
‘너무 날로 먹는 건가?’
두신이 몽린 재단에 도착한 것은 9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아, 미안! 눈 때문에 차가 많이 막혔어.”
“나도 조금 전에야 왔다. 앉아.”
회의실 탁자 앞에 앉아서 서류를 훑고 있던 재상이 턱짓으로 자리에 앉으라 시늉하였다.
이사장과의 약속 시간은 10시 반이지만, 어제 재상이 전화해서 9시에 보자고 하여 먼저 만난 것이었다.
“무슨 일로 일찍 보자고 했냐?”
앉아서 숨을 돌리곤 물으니, 재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몽주 씨로부터 파일 받아서 봤지?”
“응.”
“어땠어?”
“좀 고민이 되는 문제긴 해. 탐라국과 요동국이 혼사로 얽힌다는 게 장단점이 나뉘는 사안이니까. 게다가 이방원이 몽주 씨의 사위가 된다는 것이 여러모로 께름칙하고 말이야.”
두신이 국혼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 건 전해 받은 파일에 그에 대해서만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분할 여부에 대한 문제는 이미 논의한 바도 있고, 이제는 고려 당대에서 결정할 문제라 여겨 현대에까지 끌고 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두신이 간략하게 소감을 이야기하자, 재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은 그럴 줄 알았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될 만했다.
“조금 더 물어볼게. 이방원이 몽주 씨의 사위가 되는 게 왜 께름칙하지?”
“그야, 이방원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렇잖아. 실질적으로 조선을 개국한 위인으로서 능력이야 있겠지만, 그는 왕좌에 앉기 위해, 강력한 왕권을 갖추기 위해, 그리고 그 왕권을 후대에 튼튼하게 물려주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철권을 휘둘렀지. 자신을 위해 장인 가문을 짓밟았고, 아들을 위해 며느리 가문을 도륙 냈는데, 지금 몽주 씨가 바로 그 가문이 될 수도 있잖아. 물론, 여흥 민씨나 청송 심씨 집안하고 몽주 씨와는 스케일이 달라서 이방원이라도 함부로 못하겠지만, 혹시 모르지. 자칫 아내를 통해 몽주 씨를 이용해 먹으려 할지도.”
세종대왕 이도의 탄생 여부는 굳이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미 요동공과 여흥 민씨 가문 사이의 접점은 미약해져 사돈지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므로.
재상은 두신이 말하는 동안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며 틈틈이 쓴웃음을 보였다.
“왜 그렇게 웃어?”
“아니, 나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했었거든?”
말미의 뉘앙스가 있었다.
“사실 몽주 씨가 보낸 파일을 읽고 나면 자연히 네가 말한 것들이 떠오르지. 근데 말이야. 그건 우리가 아니라도 몽주 씨가 이미 아는 것들 아닐까.”
“…….”
“언제부턴가, 아마 몽주 씨가 탐라국의 내정에 집중한 시점부터인 것 같은데, 그때부터 우리도, 아니 우리가 먼저 안주하기 시작한 것 같아.”
“안주?”
“응, 안주. 생각해 봐. 처음 몽주 씨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그렇지만, 너는 특히 믿을 수 없어 했고,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분노하면서 어떻게든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역사를 흘러가게 만들겠노라 이를 악물었어.”
“…….”
“우리는 몽주 씨가 전해 주는 고려의 정보를 가지고 온갖 가능성을 염두하면서 최선의 계획을 몽주 씨에게 주려고 애를 썼어. 그리고 그 결과, 몽주 씨는 탐라공이 되었고, 이제는 악수에 악수를 거듭하고, 거기에 재수까지 없으면 모를까 어지간해서는 위태롭지 않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지. 뭐, 따져 보자면 안주해도 될 만한 상황이기도 해.”
재상임을 감안하면 그나마 조심스럽게 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두신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시에 재상이 진정으로 하고픈 말도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어. 그것도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지.’
두신의 표정이 진지해지고, 진지한 마음가짐일 때 늘 그러하듯 팔짱을 끼고 크게 호흡하였다.
재상은 잠시 두신을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처음에 몽주 씨에게 주급을 받을 때는 그게 많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내가 내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긴 하지만, 몽주 씨가 가져오는 정보와 고민거리에 대해서도 머리카락 빠지도록 고민했었으니까 말이야. 한데, 요새는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그 주급이 부담스럽더라. 요 몇 달 사이에 우리가 몽주 씨에게 전해 준 건 그냥 원래 알고 있던 상식 정도, 인터넷에서 잠깐 검색만 해도 나오는 수준이었어. 몽주 씨도 알 만한 수준이고, 몰랐다고 해도 키보드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정도.”
“무슨 말인지 알겠…….”
“아니, 아니야. 하나 물어볼게. 넌 아직 몽주 씨를 믿냐? 몽주 씨의 비밀 말이야. 그가 신비한 능력으로 과거로부터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거 말이야. 11달 전에 우리는 그걸 철석같이 믿었어. 말로는 거짓일 가능성이 1퍼센트는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정말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근데, 지금은 어때? 지금도 믿어?”
“…….”
두신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믿냐고? 논리적으로 여전히 믿는다. 그가 과거에서 증거를 만들어서 보여 주었으니까.
하나, 처음 느꼈던 충격은 이미 사라졌다. 역사를 바꾸는 것에 동참한다는 사실에 다졌던 각오 또한 사라졌다.
역사가 바뀌면 혹시라도 지금의 가족과 남남이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던 마음도 흐지부지된 상태였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강력했고, 믿기 어려운 것을 믿어야 하는 혼란마저 희미하게 만들었다.
두신의 얼굴에 진지함이 한층 더 두껍게 자리 잡을 때, 재상이 말했다.
“처음 가졌던 그 충격과 각오로 몽주 씨가 보내온 내용을 다시 되짚어 봐. 우리가 몽주 씨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미 바꿔 버렸을 역사에 찌꺼기처럼 남은 기록에 불과할까?”
“…….”
“역사에 엄청난 존재감을 새긴 그 인물들, 이방원, 이성계, 정도전, 거기에 변해 버린 역사에 새로이 등장한 인물들까지. 그런 자들이 그저 사라진 역사에서 했던 결정과 행동을 고스란히 되풀이할까? 지난 겨울에는 그렇다 할 수 있었을지라도, 이제 다시 겨울이 온 지금에도 그럴 수 있을까?”
현대에서 1년은 몽주의 천몽 속에서는 약 9년.
천몽 속에서 처음 1, 2년은 현대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판단할 수 있고, 아마 거기에 몇 년을 더한 시간까지도 크게 무리가 없겠지만, 이제 10년이 넘게 흐른 시간은 천몽 속 과거를 현대에서 볼 수 있는 역사와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이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아는 것과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다른 법.
재상은 두신에게 그 나태한 관성과 잃어버린 초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그제 밤에 자려다가 문득 생각이 들더라. 이건 아니다 싶었지. 해서 다시 일어나서 몽주 씨의 파일을 다시 읽었다. 몇 번이나 읽었지. 역사적 기록에 기인하여 그냥 넘어갔던 부분도 억지로라도 상상을 더해서 온갖 가능성을 만들었어. 소설을 쓴다는 마음으로 한 거지. 그 가능성들 중 태반은 곧 자기모순과 시대적 한계로 지울 수 있었지만, 몇 가지는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았어.”
“그 가능성이란 것들이 뭔데?”
“일단 하나만 말해 보지. 몽주 씨는 이성계의 국혼 제안을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것 같다고 표현했어. 정말 그럴까? 몽주 씨의 입장에서는 즉흥이고 돌발일 수 있지만, 이성계나 그의 신료들에게도 그랬을까?”
“…….”
두신은 어이가 없었다. 재상이 던진 화두가 말이 안 돼서 어이가 없는 게 아니라, 너무 간단한 물음에도 자신이 충격을 받은 게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맞다. 즉흥적이고 돌발적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범한 서민의 결혼도 그럴 수는 없다. 하물며 왕조의 시대에 사실상 왕국이랄 수 있는 두 나라의 ‘왕자’와 ‘공주’의 결혼이다.
그 왕자가 세자가 아니라는 것도 또 다른 가능성을 더하면 충분히 엄청난 일이다. 그 가능성은 그 왕자가 이방원이라는 것이고.
두신은 그 자신이 임무에 대해 방관한 것을 자조했다.
역사를 아는 현대인으로서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 중에 역사의 변함에도 그나마 끌어다 쓸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기록을 방관했고, 변한 역사에서 새롭게 등장할 인간과 그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이벤트’에 대한 상상도 포기했다.
재상과 두신 사이에 어쩌면 뜬금없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건 몽주가 그들을 필요하지 않을 것에 대한 위기감이 아니었다.
“우리는 조금 더 치열해야 해. 지금 몽주 씨가 제주에서 이룩한 것들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를 평가 받는 건 결국 6백 년 후야. 그 시간은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길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14세기 말의 모습에 만족해서는 안 돼. 파이널 보스는 6백 년의 시간이고, 그걸 이기려면 이만하면 괜찮다 정도로는 절대 안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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