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69)
* * *
몽주가 이사장실의 문을 열자, 뭔가 후끈한 열기 같은 게 느껴졌다. 그건 진짜 열이기도 했고, 분위기이기도 했다.
소매를 걷어 올린 두 사내들이 노트북 컴퓨터와 서류를 쌓아 놓고 열심히 논의하다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열정은 낯설게 느껴질 만큼 꽤 오랜만이었다.
“뭐죠? 이 분위기는?”
몽주가 실소하며 자리에 앉자, 재상은 크게 호흡하며 말했다.
그건 그들의 반성과 새로운 각오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몽주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곤 입을 열었다.
“고맙군요. 저도 좀 반성해야겠네요. 그저 코딱지만 한 영역에서 방귀깨나 뀐다고 너무 방만해졌어요.”
몽주의 반성은 분위기에 휩쓸린 탓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대충 넘긴 일이 적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자신이 챙겼을 일들도, 관료 제도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는 이유로 신료들에게 맡긴 후 별 신경 쓰지 않았고, 주변 나라들의 변화에도 많이 무심해졌다.
재상이 국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야기했듯 이성계의 제안을 즉흥적이라고 판단한 것도 그런 방만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 그러면 가열 차게 한번 논의해 보죠. 역시나 국혼에 대해서 먼저 논해야겠는데, 혹시 두 분께서 합의하신 게 있습니까?”
“그 전에 몽주 씨께 하나 묻겠습니다. 귀족으로서 자격과 의무를 갖추실 수 있습니까?”
“…….”
21세기 한국의 어느 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듣는 질문으로는 참 어색했다. 물론 무슨 의미인지는 몽주도 금세 이해했다.
“국혼을 받아들이라고 하실 생각이시군요.”
재상과 두신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의 자격과 의무.
그건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같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혈통, 문벌, 재산, 공적으로 구분되는 상위 지배 계급으로서 가지는 특권과 그 유지를 위한 의무라는 세속적인 의미였다.
몽주는 이미 고려에서 고려국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계급의 귀족으로 그 유명세는 명나라에까지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하나, 그가 귀족으로서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과 구별되게, 그 스스로 귀족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혈통이나 문벌에 관심이 없고, 재산과 공적을 쌓은 건 귀족으로서가 아니라 탐라국을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얻은 것이었다.
탐라국의 지배자이긴 하지만, 국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몽주의 사고 속에서는 차라리 탐라국의 ‘대통령’이나 ‘CEO’라 해야 마땅했다.
아니, 그것도 과대평가일 것이고, 실상은 ‘이장’이나 ‘가게 주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저희도 착각한 부분이지만, 몽주 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더는 소시민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거죠.”
“소시민이라…… 다소 반발심이 생기는 말이군요.”
소시민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그랬고, 소시민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중간 계급을 의미하는 어원과 무관하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따져도 마찬가지였다.
능력과 시야, 그리고 목표 의식을 아울러 모두 평범하다는 것이니, 몽주는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이미 소시민일 수 없…….
“엄연히 상대적인 것이지요. 몽주 씨가 천몽을 다시 시작하시면서 가진 목표는 역사를 바꾼다는 것, 그것도 지금도 나름 괜찮은 대한민국에게 훨씬 더 위대한 역사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니까요. 6백 년을 격한 후에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몽주 씨가 고려에서 얼마나 큰 업적을 달성해야 하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죠.”
재상의 말이 끝난 직후에, 두신이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저희에게 하는 경고에 가깝고요. 몽주 씨는 적어도 저희보다는 더 애를 쓰시고 계실 겁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몽주 씨는 첫 천몽에 대한 후회와 미련에 얽매인 감이 있다고 봅니다. 판단과 행동에 첫 천몽의 경험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나 할까요. 만약 다른 건 동일하고, 이번이 첫 천몽인 것만 다르다면, 몽주 씨는 어땠을까요?”
“그건…… 아마 더 과감했겠지요.”
두신의 지적은 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천몽이 단순한 꿈이 아닌 현실임을 똑같이 알고 있다고 해도, 첫 천몽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없었다면, 학살과 착취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다면, 그는 분명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감함에는 자신이 현대인임에 구애받지 않고, 당대에서 조금 더 당대인답게 판단하고, 행동했을 것이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국혼을 두고 강영이를 먼저 생각하려 하진 않았겠지요.”
그리고 그건 처음 재상이 물었던 질문, 귀족의 자격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느냐는 물음과도 닿아 있었다.
“착하고 자비로운 건 좋죠. 대신 착하고 자비로운 귀족이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가 강영양과 이방원의 혼인 추진을 권하는 거고요.”
딸아이를 정략결혼의 재물로 쓰는 것에 대한 거리낌은 현대인의 시야에서만 그럴 뿐이다.
강영이는 언젠가는 혼인할 것이고, 그 혼인을 자유연애에 맡기는 건 귀족으로서의 자격과 의무를 저버리는 짓이다.
“대신 뽑아낼 건 뽑아내야겠지요. 해서, 저희는 그 혼인의 조건으로 몇 년간의 서옥(壻屋)살이를 요구하시길 권합니다.”
“서옥살이요?”
“네, 이방원을 탐라로 데려오는 거죠. 이는 기본적으로 그 혼인을 통해 이방원이라는 인물을 얻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원이 거론되자, 두 가지 논제가 절로 떠올랐고, 그 두 논제는 서로 부딪치는 면이 있었다.
이방원은 잔인무도한 자다.
이방원은 냉정한 승부사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논제였다. 잔인함이든 냉정함이든, 그 과감한 면모가 원인인지, 결과인지를 나누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두 가지 면모를 다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냉정한 자에게 잔인한 본성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었고, 잔인한 본성을 가진 자가 냉정함을 갖추지 않기도 어려우므로.
관건은 그 과단한 면모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사실 그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방원이 그저 잔인무도한 자일 뿐이라면, 조선은 그때 망했겠죠. 안정되기는커녕, 건국을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시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진정한 관건은 몽주 씨가 그를 통제할 수 있느냐는 것일 겁니다.”
“서옥살이를 요구하라는 것도 그에 일환일 테고요.”
“그렇습니다.”
그럴 거라 여겨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도 얻었지만, 얼마간 서옥살이를 시킨다는 것과 이방원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사이는 너무나 먼 것이었다.
“통제라는 게 그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것이라면 불가능하겠죠. 하나, 그가 가진 야심이 고려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유도하는 건 가능할 겁니다.”
“방법은요?”
“그의 야심을 더 키우는 거죠.”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몽주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자, 두신이 말을 받았다.
“지금의 역사에 기록된 이방원의 야심은 강력한 왕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건 그것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원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화신이고자 했고, 그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의 한계가 조선의 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경계되는 거 아닙니까. 권력의 화신인 자는 윗사람이 있는 것도, 곁에서 간섭하는 자가 있는 것도 참을 수 없을 테니까요.”
“하나, 이방원도 명나라와는 잘 지냈죠. 달리 말하면 사대관계에 복종했다는 거고요. 그게 임진왜란 이후 제조지은이라는 명분하에 부하국처럼 납작 엎드린 건 아니라고 해도, 허리를 굽힌 건 맞습니다.”
이방원의 조선이 명에 사대한 것은 물론, 이방원 스스로도 명나라의 황제에게 직접 허리를 굽힌 바 있었다.
보위 계승자 시절에 명나라에 태자 신분으로 행차했던 그는 마찬가지로 계승자 신분이었던 영락제를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올렸다.
“그러니까 역사에서 조선에 비해 명나라가 압도한 것만큼, 탐라국이 요동국을 압도할 수 있다면, 이방원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요?”
“요는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줘야 하겠죠. 서옥살이가 그 과정으로 필요한 거고요.”
“그 전에 탐라국이 요동국에 압도적이어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이미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두신이 빙그레 웃었다.
“……?”
“우리가 그간 조심스러웠던 건 그 비교 대상이 명나라이기 때문이지, 다른 나라와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요동국이 탐라국의 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울 겁니다. 그렇다면 이해시켜 줘야 하고, 그 과정으로 역시나 서옥살이가 필요하겠죠.”
요동국에서도 알 만한 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계가 그처럼 경계심을 드러낸 것일 테고.
다만, 아는 자들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
“대신, 단지 위압만으로 이방원을 억누르는 건 한계가 있을 겁니다. 지금 몽주 씨가 요동국을 다룸에 있어 조심스러웠던 건 요동국의 지리적인 중요성 탓이고, 이는 이방원이든 누구든 왕이 된 자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몽주는 그 말에 앞서 언급되었던 이방원의 야심을 떠올렸다. 그의 야심을 더 키우라 했었으니.
“그의 야심이 가질 수 있는 한계는 결국 요동국일 겁니다. 다만, 어떤 요동국이냐는 조금 다를 수 있겠죠.”
“어떤 요동국?”
“달리 말하면 얼마나 강대한 요동국이냐를 의미하는 거죠. 이방원이 탐라국의 진정한 국력을 이해할 때쯤에 요동국이 성장할 길을 보여 준다면 그의 야심 또한 그 방향으로 흐를 겁니다. 물론, 사전 작업이 잘되었을 때의 일이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할 겁니다. 몽주 씨가 이방원을 지원해 준다면 그만큼 그를 통제할 수 있을 테고요. 사실 요동국이 고려의 품을 떠나지 않는 이상, 역성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 이상, 이방원의 권력욕은 오히려 장점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계속 나누면서 몽주는 재상과 두신의 조언에 일리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건 이방원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앞서 재상과 두신이 그 또한 그저 잔인무도한 자만은 아님을 설파하긴 했지만, 그것 또한 논리적인 판단일 뿐, 상대가 ‘맹수’라면 논리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얼마든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방원의 쓰임새는 그가 ‘맹수’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곁에서 쭉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좀 많이 앞선 논의이기도 하네요. 이방원이 요동국의 보위에 오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 제가 지지한다고 해도 결정은 이성계가 할 것이고, 제 지원은 오히려 단점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으로서는 왕자의 난 같은 것도 생각하기 어려울 듯하고.”
내내 진지하던 몽주가 분위기를 가볍게 할 겸, 긴장 풀린 말을 했는데, 정작 재상과 두신은 그런 의도에 휩쓸리는 대신 둘만의 시선을 나누었다.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러자 두신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미 많이 앞선 논의긴 하지만, 한 발짝 더 나가 보려 합니다. 요동국이나 이방원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자연 명나라의 분열에 대해서도 생각이 닿더군요.”
“…….”
몽주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고려에서 그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긴 했지만, 이미 전에 논의한 바가 있어 이번에는 두 사람에게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화두로 청한 것이었다.
“명나라의 분열이 이방원의 야심을 자연히 키울 테니까요. 연나라 쪽을 노리든, 그 위쪽 초원을 노리든 기회가 왔음을 그도 알게 되겠죠.”
두신의 말에 몽주는 절로 재상을 보았다. 전에 그는 명나라의 분열은 시기적으로 불가능하고, 탐라국에 이롭지도 않다는 주장을 했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도, 두 사람은 한창 논쟁 중이었다. 아마 명나라의 분열을 두고 대치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 시선을 느낀 재상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는 여전히 명나라의 분열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왕조가 들어서도 이미 중국의 영역은 통합의 구심력을 갖추고 있어 분열이 고착될 가능성이 낮은데, 같은 왕조는 더 가능성이 낮겠죠. 다만, 이건 장기적인 시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단기적으로는 분열책이 곧 혼란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혼란요?”
“이호경식과 구호탄랑의 계책을 함께 쓰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호경식(二虎競食)은 두 호랑이를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고, 구호탄랑(驅虎呑狼)은 호랑이를 몰아 이리를 삼키는 것이다.
즉, 재상은 명나라의 분열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지만, 연왕 주체의 독립을 통해 명나라를 혼란하게 할 수는 있으니, 그 혼란을 틈타 고려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는 말이었다.
“전에도 이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때는 이방원의 요동국을 상정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혼란하다 한들, 명나라와의 교역 이익만 감소하는 불이익만 초래할 뿐이라 여겼죠. 하나, 만약 몽주 씨가 통제할 수 있는 요동국이 그 틈에 세력을 확대하고, 그 경계를 확정 지을 수 있다면 오히려 이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역시 사전 정지 작업이 쉬울 리 없고, 기회도 잘 보아야 할 겁니다.”
재상이 말을 일단락하자, 두신이 얼른 이어받아 말했다.
“저도 영구적인 분열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몽주 씨보다는 그 후의 역사에 걸린 문제겠지요. 다만, 몽주 씨 대에서만이라도 명나라가 분열된다면, 그리고 명나라 태자와 우호 관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요동국은 요동만이 아니라 요서 정도까지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연나라 지방까지는 욕심낼 필요도 없습니다. 요서만 얻는다면 몽골 초원이 훤히, 서쪽의 광활한 대지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지는 거죠.”
두 사람 모두 말을 마친 채 응시하자, 몽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다른 생각이 어느 지점에서 합의점을 찾았는지는 이해했다.
하나, 이미 그들도 인정했듯, 그 이야기는 이방원에 대한 것보다도 더 앞서 나간 이야기였다.
분열책이든 혼란책이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왕 주체의 봉기가 필요했고, 그건 탐라와 몽주가 명나라를 상대로 음모와 배신의 거미줄을 꼼꼼하게 쳐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했다.
“어지럽군요.”
하나, 어지럽다고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는 건 다시 새롭게 각오를 다진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재상, 두신과 함께 어지럽게 널려 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짜 맞추고자 노력하니, 일부나마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 * *
몽주가 진주와 함께 강지혁을 만난 건 거제도였다.
진주와의 데이트를 겸하여, 질란트 사와 함께 짓기로 한 새로운 범선 건조 현장을 들리고자 했고, 마찬가지로 그 범선 건조 일로 거제도에 내려가 있던 그와 자연히 만난 것이다.
“후아, 진짜 크긴 크군요.”
몽주는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 도크 안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물론, 아직 범선은 단 1퍼센트도 건조되지 않았다. 그저 그 준비 작업이 진행될 뿐이었다.
하나, 범선을 받칠 구조물 구축은 어느 정도 진척되었기에 그를 통해 범선의 규모 또한 가늠할 수 있었다.
몽주가 감탄하자, 강지혁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문을 열었다.
“끝내주죠? 배 만드는 거라면 이력이 쌓일 만큼 쌓인 이 동네 기술자들도 틈나면 와서 보더군요. 뭐, 요새 조선 산업이 불황인 중에 우리가 배를 짓기로 한 게 고마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하하.”
본디 전에 양진이호를 만들 때처럼 해안가 건조를 상정하고 그에 맞게 건조하려던 계획은 행정적인 장애로 인해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하여, 조선소 도크 안에서 최대한 ‘옛날식’으로 만들기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그 후에는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현대의 조선 기술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놀고 있던 도크를 쓰고, 단순 노무이긴 하나, 배의 규모에 비해 고용하는 인력은 큰 편이니, 조선소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한 덕이었다.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까요? 타임 라인표는 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규모의 범선을 현대 기술을 최대한 배제하고 짓는 건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스케줄에도 최대 1년까지 확장해 둔 거고요.”
“음, 너무 길군요.”
“하하, 역시 배에 대해 욕심이 많으셔서 그런지 급한 마음이 드시는군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고작 1년뿐이지 않습니까.”
현대에서 1년이면, 고려에서는 9년에 이른다. 그건 고려에서 이 대형함을 건조 완성하려면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역시 너무 길다.
아니, 애초에 그 정도는 각오하긴 했지만, 상황이 달라지니, 마음도 급해졌다.
‘이 배라면 보이는 것만으로도 탐라국의 국력을 곧바로 이해시킬 텐데…….’
하나, 천몽 속과 현대의 시간차는 몽주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몽주는 가능한 건조를 빠르게 할 것을 당부하곤 조선소를 함께 나섰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러 가는 길에 몽주가 진주와 지혁에게 물었다.
만약 본인이 어머어마한 재벌가의 아들딸이고, 부모가 정략결혼을 요구한다면 어쩌겠느냐는 물음.
“정략결혼요? 허, 상상이 안 가는데요? 저 같은 중산층 자녀 입장에서는 말이에요. 혹시……?”
먼저 말문을 연 진주가 말을 하다 말고 뱁새눈을 뜨며 몽주를 노려보았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가정일 뿐이에요. 저와는 상관없는 가정.”
“흥!”
진주가 토라진 듯 시선을 외면하면서 ‘아직 고백도 안 해 놓고는…….’이라고 들릴락 말락 하게 구시렁댈 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강지혁이 입을 열었다.
“제 친구들 중에 몇 명이 정략결혼을 했죠.”
역시나 부유층 출신인 만큼 간접 경험은 있는 모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개는 잘 살아요. 심지어 사랑 없는 결혼은 하기 싫다고 울고불고하던 놈도 있었는데, 지금은 제일 잘 살더군요. 물론, 억지로 참고 살다가 사돈 쪽이랑 사업 관계가 틀어지자마자 이혼한 친구도 있고요. 근데 배우자와 잘 살고 못 살고를 따져 보면 결국 일반적인 결혼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처음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죠?”
“그것도 대개는 그냥 받아들이더군요. 머리 굵어지면서 자신이 일반적인 가정 출신과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까 그 울고불고했던 그 친구 빼고요. 특히, 장남이랑 장녀는 더 그렇고요. 짐작하시겠지만, 유산 상속도 염두에 두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아, 그냥 궁금해서요.”
몽주는 대충 말을 수습하곤 머릿속으로 강영이와 앵도를 떠올렸다.
그 두 사람은 요동공의 아들과의 혼사 제안에 대해 어찌 반응할까.
일단 아직 철딱서니 없는 강영이의 반응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니 차치하더라도, 앵도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긴, 나와 앵도도 정략결혼이었…….”
“뭐라고요?!”
‘아, 깜짝이야.’
“누구랑 정략 결혼해요? 세상에……!”
무심코 생각을 중얼거리다가 곤란해졌다.
“역시나 세상에 믿을 남자가 없어! 흑흑!”
“아니, 앵도…… 헉! 지, 진주 씨…… 그게 아니고요.”
“앵도가 대체 어떤 년이야!”
연이은 말실수에 진주가 눈물 젖은 마녀로 변신하고 있었다.
“허허, 이사장님, 이제 보니 나쁜 남자셨…….”
“닥쳐! 너도 마찬가지니까!”
“…….”
거친 생각의 진주와 불안한 눈빛의 몽주와 그걸 지켜보는 지혁이 탄 차 안은 전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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