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271)
* * *
“아빤 바보야.”
“형님이 바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바보지.”
“아냐, 바보야. 내가 전혀 모르는 줄 알고 있었다니까.”
“……눈치가 조금 없으신 걸로 하자.”
몽건은 강영이의 투정에 쓴웃음을 짓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작 한 달 차이고, 심지어 키는 강영이 조금 더 크긴 하지만, 몽건은 강영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쓰다듬을 받는 강영조차도 고분할 정도였다.
“그래도 잘 생각했다. 고마워.”
“…….”
고맙다는 말에 강영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맘속에는 느닷없는 혼사 이야기에 반항심이 있었지만, 이미 삼촌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인 바 있어 시무룩하나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게 최선인 거야.”
“최선은…… 아니겠지. 최선은 네가 사모하는 이와 가정을 이루는 거여야 마땅하고.”
사모하는 이라는 말에 강영은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사모하는 이와 혼인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남녀의 애정을 알기에는, 짐작이라도 하기에도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하나 아는 것은 자신은 평범한 사내에게 마음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너는 공가의 딸이고, 너의 혼인은 언제 하더라도 결국은 가문의 일일 수밖에 없어. 물론, 형님은 어쩌면 네가 끝내 거부한다면 이 혼사를 물리실 수도 있겠지. 네가 평범한 평민 사내와 혼인하겠다고 해도 무턱대고 반대하실 분도 아니고.”
강영이 피식 웃었다. 삼촌의 말이 우스웠기 때문은 아니고, 자신이 평범한 사내와 혼인하는 걸 상상하니 우스웠다.
평범함을 평범함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의 위치가 너무 높았다. 평범함은 뒤처짐 혹은 모자람에 가까운 것이었다.
탐라공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일상사가 평범하지 않은 자들과 함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녀는 어느새 눈이 많이 높아졌다.
“치, 삼촌 때문이야. 흥!”
“응? 내가 뭘?”
몽건은 갑작스런 조카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영은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두 사람이 국혼에 대해 알게 된 건, 아니 짐작하게 된 건 요동에서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몽건이 먼저 눈치를 챘는데, 탐라공을 찾아온 요동공에게 강영과 함께 인사를 올리면서 그의 시선이 강영에게 강하게 꽂히는 걸 보면서 그 시선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전에 순방 중에 보았을 때는 요동공이 몽건과 강영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심장함이 어쩌면 정략결혼일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약간의 고민만 필요할 뿐이었다.
요동공의 입장을 역지사지할 때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몽건은 강영에게 그 추정에 대해 말해 주었고, 기겁하여 당장에 아버지에게 달려가려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형님의 성품을 생각하면 어린 그녀를 당장 혼인시키려 하지는 않으실 것이니 침착하라 설득하곤, 그 혼인이 조카에게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님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님의 치세에 있어 요동국과의 국혼이 필수적인 건 아닐지라도 꽤 도움이 되는 일일 수 있음을 알려 주자, 강영이도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강영이도 마냥 철없진 않았다.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받기 위해 일부러 어리광을 피우기도 했고, 하필 비교 대상이 몽건 같은 애늙은이인 터라 더 어리게 느껴질 뿐이었다.
“근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그보다는 걱정돼. 아버지는 서옥살이를 시켜서 지켜본 후에 혼인을 결정하시겠다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어지간하면 혼인하게 될 것 같거든.”
몽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지간하면 혼인이 성사될 것이다. 그리고 강영이 걱정하는 게 바로 그 어지간함일 것이다.
차라리 엉망진창인 자라면, 형님도 혼인시키는 걸 거부하시겠지만,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혼인 약속을 파기할 정도는 아니라면, 강영은 불만스러운 혼인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사실 들리는 소문으로만 봐도, 어지간한 수준은 충분히 넘을 만한 자였다.
열여섯에 과거에 급제한 자라면, 적어도 머리는 비상할 것 아닌가.
또, 맹장인 요동공을 많이 닮아 체구가 크고 활을 잘 쏜다는 말도 들은 바 있어, 문무에 걸쳐 재능이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요동국을 떠나기 전에 몽건은 시정을 구경하겠다며 주빈관을 나와 요동공의 오남에 대해 수소문했었는데, 의외로 일반 백성들에게도 잘 알려진 자였다.
죽은 장남이나, 이제 장남 역할을 하게 된 차남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었으니, 오남으로서 후계 순위가 많이 밀릴 수밖에 없는 아들로서는 상당히 유명했던 것이다.
“아냐.”
문득 강영이 각오를 다지는 표정을 짓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섰다.
“맘에 안 들면 맘에 들게 만들면 되지!”
“…….”
“평강공주가 될 거야!”
요동공의 오남이 ‘바보 온달’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과는 무관한 강영의 다짐이었다.
* * *
탐라공이 탐라국에 신화폐령(新貨幣令)을 공포한 것은 신유년(1381년) 입동 다음 날이었다.
탐라국공 석몽린이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그간 탐라에서 거래를 함에 있어, 미찰을 유용하게 사용하였으나, 거래의 양이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미찰로는 감당키 어려워졌다.
이에, 새로이 화폐를 만들어 미찰을 대신하게 하고자 하니, 백성들은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고 숙지하여, 만사에 불이익이 없게 하라.
하나, 신화폐는 네 가지 동전, 1전, 1원, 10원, 100원과 수표로 이루어진다. 다만, 수표의 발행은 차후에 별도로 공표될 것인 바, 금번에는 통용치 아니 한다.
하나, 미찰 한 닢은 1원 한 닢과 같으며, 1원은 10전과 같다.
하나, 미찰은 임술년 정월부터 납월(12월) 동안 여러 전당에서 해당 액수의 신화폐와 교환할 수 있다.
하나, 미찰은 임술년 상월(10월)까지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뒤로는 쓰일 수 없다.
하나, 신화폐에 대한 위조는 사형으로 처벌할 것이며, 함부로 훼손하는 자 역시 엄벌에 처한다.
하나, 신화폐의 예시가 현마다 전시되니, 사전에 확인하여 눈에 익히도록 하라.
신화폐령이 공포되고, 다음 날부터 모든 현마다 신화폐 예시가 전시되었고, 대촌현이나 홍로현처럼 큰 고을은 여러 곳에 전시되었다.
백성들은 신화폐에 대한 기대와 걱정 속에 전시된 곳으로 몰려들어 각 동전들의 생김새를 확인하였는데, 일단 동전의 모양에는 크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1원 동전을 기준으로 각 동전의 지름은 2밀미씩 차이가 있어, 가장 작은 1전 동전은 23밀미, 가장 큰 100원 동전은 29밀미였다.
네 동전 모두 뒷면은 삼태극 위에 각각 ‘1전, 1원, 10원, 100원’이 양각되어 있었고, 앞면은 각각 갈매기, 탐라섬, 범선, 탐라공의 얼굴이 새겨졌다.
“겨우 손가락 한마디만 한 것에 잘도 복잡한 모양을 넣었구먼.”
“그러게 말이여. 근디, 탐라공 저하의 얼굴이 저리 생겼던가?”
“뭐가 어때서? 근엄한 장부마냥 잘 나오셨구먼.”
“에이, 솔직하게 말해서 탐라공께서는 장부라기보다는 미공자시지.”
“어허, 탐라공께서 내년이면 보령이 서른이신데, 미공자라 하는 건 무례한 게지.”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내가 저번 달에도 포구에서 뵈었는데, 수염만 기르셨을 뿐 여전히 미공자시던데.”
두 사내가 옥신각신하니, 그 뒤에서 동전을 구경하려고 기웃거리던 한 아낙네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뭔, 사내들이 다른 사내 용모를 두고 싸우고 있소? 내가 보기에 탐라공은 둘 다 아니오.”
“뭐시여? 지금 탐라공 저하를 모욕하는 것이여?”
“뭐가 모욕이야! 어디 탐라공께서 용모로 존경받으시는 겐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동전 다 봤으면 비키쇼!”
그 무렵, 몽주도 새로운 동전들을 앞에 두고 있었다.
“영 민망하군.”
“하하하.”
상관대신 희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재관대신 점녀도 입을 가리며 웃음 지었다.
몽주가 민망해한 이유는 100원 동전에 새겨진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동전에 자기 얼굴을 박아 넣는 것 자체도 민망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자신의 얼굴이 너무 근엄하게 나온 게 여간 이상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생겼소?”
“지금이야 동전의 얼굴보다는 더 젊으시지요. 하나, 그 동전은 몇 년만 쓰게 하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해서 내가 늙을 때를 상상해서 넣었다?”
“늙을 때라기보다는 지금보다 위엄이 더 높아지셨을 때라 해야지요.”
쩝. 몽주는 입맛을 다셨으니, 대략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동전에 각인하기 위해 앞서 초상을 그린 바 있었다. 어진(御眞)처럼 정면을 그리는 대신, 동전에 새기기 편리하도록 비스듬한 각도로 본 모습을 그렸는데, 자신이 봐도 나이에 비해 너무 어리다 싶긴 했다.
현대 한국에서야 젊어 보이고 어려 보이는 게 유리한 것이겠지만, 당대에는 미숙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니, 일부러 그리한 것일 터였다.
미리 알았다면, 고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동전에 얼굴을 넣는 게 민망해서, 일부러 신경 쓰지 않은 탓이었다.
“동전 때문이라도 잘 늙어야겠군.”
몽주는 농을 던지곤 100원짜리 동전을 들어 올렸다. 얼굴 모양의 어색함과는 무관하게, 구리와 은, 그리고 아연을 섞은 그 동전은 마치 황금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알루미늄을 조금 섞을 수만 있다면, 현대 유로화에 쓰이는 노르딕 골드(Nordic Gold)의 명성을 능가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약간 아쉽긴 했지만, 희유 광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당대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결과이었다.
100원 동전이 황금색이라면, 10원 동전은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이었고, 1원 동전은 붉은 느낌이 더해진 구릿빛이었으며, 1전 동전은 회색에 가까웠다.
“이 신화폐는 고려 전역에서 쓸 수 있게 할 생각임을 잘 알 것이네. 이를 위해 전당의 지점을 각지에 여러 곳을 두어야 할 터인데, 역시나 인력이 문제겠지?”
“다음 고학교 졸업생들 중 많은 이들을 전당청에 밀어 주신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겁니다만…….”
점녀가 말을 하며 희도의 눈치를 보았다. 희도는 담담했지만, 비슷한(?) 적성과 재능의 인재들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만했다.
몽주는 그런 역학관계를 짐작하곤 쓴웃음을 잠시 지었지만, 이내 결론을 내렸다.
“화폐의 유통과 전당의 관리는 상업의 확대를 위해서라도 필수이니, 다음번만큼은 재관부와 전당청에 우선적으로 관원을 배치하도록 하지. 상관대신도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뜻대로 하십시오.”
희도는 계속 담담하게 굴었다. 사실 그는 지금 상관부의 규모도 충분하다 여겼고, 그걸 밝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상관부의 위신을 세워 주므로 입을 다문 것이었다.
아무래도 탐라 상단이 있고, 그 휘하에 수많은 회사들이 있어, 상관부의 임무를 수월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정경 유착의 표본과 같은 상황이지만, 탐라상단이 탐라공의 것인 만큼 희도는 문제라 여기지 못했고, 누구도 그에 대해 책잡을 수 없었다.
두 대신들이 물러나자, 몽주 앞에 새로 등장한 자들은 외관대신 차현유와 교관대신 홍길도였다.
“문서의 작성은 어찌 되고 있소?”
“문구를 다듬고 있을 뿐, 사실상 완성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문서에는 예식이 중요하니까요.”
그 문서란 요동공의 국혼 제안을 조건부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담긴 것이었고, 몽주는 그것을 정식적인 외교문서화하고자 하였다.
이미 초안을 봐서 내용을 확인했는데, 몽주나 탐라의 대신들의 눈에는 충분히 공손한 문구로 작성되어 있었다.
서옥살이에 대해 요동공도 익숙하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자칫 무례하다 여길 수 있기에 가능한 조심스럽게 제안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완성되면 바로 가져와서 보여 주게. 그리고 왜국에서 계속 도학생의 확대를 청원하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아주 끈기 있게 지속하고 있습니다.”
왜국, 그러니까 구주가 아닌 본주의 왜국 세력들이 자신들의 젊은이들도 도학생으로 받아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처음 청원한 건 남조 측이었고, 그 사실을 안 북조도 그에 질세라 청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은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탐라의 세력에 속한 구주와 타국인 왜국을 같이 취급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구주의 도학생들이 역모를 꾸민 게 고작 몇 년 전이라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데, 더 불신하는 왜국의 도학생들이 도학교에 들어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생각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네.”
몽주는 외관대신과 교관대신을 같이 보며 말문을 열었다.
“어찌 바꾸신다는 말씀이신지…….”
“탐라의 도학교로 들이는 건 여전히 불가하지만, 구주에 들이는 건 가능하지 않겠나.”
“하면, 구주에 새로 도학교를 세우시고자 하시는 겝니까.”
“아니, 그보다는 구주의 기술학교에 왜국 출신들도 입학할 수 있게 하도록 하지.”
구주에도 재작년에 분국마다 두어 곳씩 기술학교를 짓기 시작했고, 올해 몇몇 학교가 개교했었다.
탐라의 기술학교와 체계상 같았지만, ‘커리큘럼’은 다소 달랐으니, 탐라의 기술적 우위를 위협할 만한 지식, 특히 제조 기술 계통의 지식은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럼에도 염려가 된다면, 왜국 출신들은 가르침에 있어, 고려말과 글, 그리고 산학 등에만 국한시키는 방안을 검토해 보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운 그레이드’하긴 했고, 또 왜국 학생들의 배움을 제한시킬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술과 지식의 유출을 무릅쓰고 몽주가 왜국의 학생들을 들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상업 때문이었다.
말과 글이 통하고, 수와 셈법이 통해야 교역이 더욱 증진될 테니까.
물론, 제한시킨다고 해도 훔쳐보려 시도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럴 작정이라면 왜국에서도 이미 세작을 넣어 두었을 것이다.
“하는 김에 고려화 교육의 강도를 더 높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강도를 높이라?”
“달리 표현하자면, 학생들이 고려를 추종하게 만들자는 말입니다.”
그것은 길도의 제안이었다.
“음…….”
몽주는 길도의 제안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았다.
지금도 구주의 기술학교에서는 역사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왜인들이 고려인과 같은 민족이라는 식의 반발심을 조장할 만한 내용을 가르치는 건 아니었고, 오래전부터 고려와 교류해 왔음을 알리면서 구주가 탐라에, 나아가 고려에 속하게 된 것이 영 뜬금없는 상황이 아님을 은근히 알리는 수준이었다.
한데, 거기서 더 강도를 높이자 하니…….
“사실 왜인들 중에 전조나 백제 계통이 적지 않음은 익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오우치 가문처럼 대놓고 공언하는 가문도 있고, 왜왕가에도 백제 왕실의 피가 섞여 있다지 않습니까.”
사실 왜국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친탐라파 내지, 친고려파 왜인들도 많아졌고, 그들 중에는 은근히 조상이 고려나 전조에 이어져 있음을 알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려인과 왜인들이 같은 혈통이랄 수는 없지 않소. 그렇게 치면 금주의 호인들도 고려인과 같은 혈통이고, 나아가 중화와도 같을 것이오.”
왜국과 피를 나눈 것 못지않게 북방민족이나 중국인들과도 다양한 형태의 교류, 즉 혼인이나 이주같이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침략과 강탈의 형태로도 피가 섞인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러자 길도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였다.
“저도 같은 혈통이라든지 같은 민족이라 가르치자는 건 아닙니다. 하나, 있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게 못할 짓을 하는 건 아니라 봅니다. 그 후, 혈통이나 민족에 대해 판단하는 건 왜인들의 몫이지요.”
어째 침소붕대하자는 주장 같긴 했지만, 끌리는 제안이긴 했다. 몽주는 조금 더 고민하곤, 길도에게 한번 글로 만들어 오라 명하였다.
“이제 동금주와 유구에 세울 기술학교는 어찌 되고 있는가.”
“유구는 내년부터 입교할 수 있을 것이고, 동금주는 내후년부터 가능할 것입니다.”
“교과서는?”
“그 또한 시일에 맞춰 준비 중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명심하게. 내가 기술학교를 탐라 밖에도 세우는 건 그곳 백성들이 탐라와 고려에 더욱 친근감을 가지게 만들고자 함임을. 섣부르게 세뇌시키려 시도하는 건 괜한 반발심만 키우는 하책이네.”
“명심하…….”
“……라는 건 기술학교의 경우이고. 도학생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겠지.”
“예?”
몽주는 놀란 표정을 짓는 외관대신과 교관대신을 보며 실소하곤 말을 이었다.
“도학생들은 관원으로 일할 자들인 만큼 보다 확실해야 하지 않겠나. 구주 도학생의 경우를 보면 탐라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탐라에 대한 추종심이 생겨나긴 하지만, 아닌 자들도 있지. 게다가…….”
“……?”
“다른 곳에서 올 도학생은 또 다를 것이고.”
“그 말씀은…… 고려와 동금주에서도 도학생을 받으시고자 하십니까.”
“그래야지. 다만, 구주의 경우는 탐라의 위력을 여실히 경험한 바 있지만, 고려는 아직 그런 적 없고, 동금주 또한 적으로 절실하게 깨닫지는 못했으니, 자연 마음가짐과 태도가 다를 걸세. 또, 요동의 도학생은 더욱 그렇겠지.”
요동이 언급되자 두 대신들이 더 놀라워하였다.
“요동국에서도 도학생을 들이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요동국의 공자를 탐라로 불러들이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겝니까?”
마지막 질문은 차현유의 것이었다.
서옥살이는 엄연히 혼인 이후에 하는 것인데, 요동공에게 제안한 것은 혼례 전에 1년간 탐라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니, 자칫하면 마치 인질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한데, 대신 도학생의 신분으로 오게 한다면…….
“그 또한 이유 중 하나겠지. 하나, 궁극적으로는 요동국과의 관계를 도탑게 하고자 함이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요동국을 더 얽어매고 싶기 때문이네.”
요동의 도학생들을 키워, 정식 교역소에서 일하게 하고, 나아가 요동국에서 일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친(親)탐라파를 키워 지(知)탐라파로 분하게 하여, 요동의 관리가 되도록 밀어 주고, 그들로서 요동국 내 탐라의 영향력을 키워 볼 계획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첫 목표이자 가장 큰 대상은 이방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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